오솔길은 아름답다. 우리는 원래의 길을 1.5킬로미터가 넘게연장했다. 우리를 위한, 와이라를 위한 새로운 정글, 케이지와 러너의 북쪽에 있는 이곳은 어쩌면 와이라가 탈출했을 때 와봤던 곳일지 모른다. 우리와는 함께 오지 않았던, 결코 그런 적 없었던 곳. 다음 날, 나는 와이라 앞에서, 돌프는 뒤에서 로프를 달고 걷는다. 방향을 틀어서, 새롭고 낯설고 불확실한 파라다이스 고속도로길목으로 접어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와이라의 눈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잠깐 망설인다. 표정에서 두려움이 어른거린다. 혼란. 나머지는 흥분과 불신, 완고함도 잠깐 스치지만 일순간일 뿐이고, 다른 무언가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 무언가는 나의 배 속을 꽉 채우고 내게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로, 믿음. 우리 사이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형성되었던 믿음. 와이라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다. 그러고는 함께 걷는다. 아르릉도 그르렁도 없다. 말없이 걷는 와이라, 경외심에 휩싸인 와이라뿐이다. 반 바퀴 돌았을까. 일광에 젖은 나무에 이른다. 오솔길의 우측 경사면 위로 쓰러진,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 와이라가 불쑥 나무로 뛰어올라 잽싸게 달려가는 바람에 돌프가 나동그라질 뻔한다. 나는 몰래 미소를 짓는다. 와이라와 마찬가지로 긴장감은 이미 녹아내렸다. 와이라는 몸에 힘을 쭉 빼고 나무 위에 엎드려 발을 달랑거린다. 휘둥그레진 두 눈은 아름답게 빛나는 하늘의 조각들로 향한다. - P317
"사랑해."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해본다. 햇살 아래로 굽은 와이라의 목이 금빛을 머금는다. 우리는 하늘 한 조각을 가로질러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함께 바라본다. 소리 내 말하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다니, 믿기지 않는다. 와이라가 나를 바라보고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며 호응한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오래전부터. 그러고는 볼을 양발에 기대고 나를 응시한다. 경이로 가득한 눈빛. 왜 그러느냐는 듯한 눈빛. 독수리가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 P318
나와 와이라……. 우리의 관계는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서로를 믿는 법을 배우고 그 믿음을 부서뜨리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도 부서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 덕분에 난 더욱 강해졌다. 그럴 때마다 와이라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 관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또 이런 관계가 형성되리라고 감히 바랄 수 없을 것 같다. - P343
떠난다고 해서 실패는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 특권이 남긴 선물이다. 와이라는 선택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니나는 결코 부서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에 의문을 품기로 선택했다. 결혼 그리고 성공의 의미.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본주의, 종차별주의를 비롯한 ‘주의‘들. 이러한 파멸을 떠받치는 것들. 나를 나 자신과 나의 욕망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만든 모든 것들. 수많은 사람을, 수많은 집을, 수많은 동물을 다치게 한 모든 것들. 그것들에 의문을 품고 맞서 싸우기로 선택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어떻게 와이라의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있겠는가? - P351
"와이라는…" 찰리가 멈칫한다. 와이라가 눈 깜짝할 사이에 파투후 숲에서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굉장히 빠르게 달린다.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만큼 순식간에 움직인다. 전과 다르게 달리고전과 다르게 보인다. 와이라는...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와이라는 로프에 묶이지 않은 채 달리고 있다. 로프는 물론이고 모퉁이에서 몸을 가로막는 철조망도 없다. 그저 달리고 있다. 와이라를 처을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 몸이 얼마나 짓눌린 것처럼 보였던지. 하지만 케이지 밖으로 나가 오솔길에 서면 놀랄 만큼 거대했다.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보다 천배는 더커진 것 같다. 입을 떡 벌리고 와이라를 바라본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때 찰리가 나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와이라가 우리를향해 전속력으로 뛰어오고 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다태진 두 눈은 흥분으로 가득 찼다. 나의 심장이 아드레날린으로 고동친다. 로프에서 벗어난 퓨마가 우리를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다. 그런데 몇 미터 앞에서 속도를 늦추더니 내 다리에 머리를 들이민다. 혹여나 뛰어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를 막을 작정으로 두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와이라는 그저 나를 핥기 시작한다. 나는 곧바로 앉는다. 와이라가 내 팔과 손을 핥으며 가슴에 몸을 기대온다. 그러더니 가르랑거린다. 평상시에 가르랑거릴 때에는 얼마 안 돼서 소리가 멎기 일쑤였다. 그리 좋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지금은, 계속해서 가르랑대고 있다. - P429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웃는다. 와이라는 차분해지더니햇살 아래서 잠이 든다. 우리 둘은 부러진 통나무에 앉는다. 이제야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다. "올라, 로라?" "네나." "시, 토도 비엔(그래요, 괜찮아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네나의 음성에 불안과 긴장감이 팽팽하다. "케파소(어떻게 됐어요)?"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네나, 와이리타 에스타 엔라 누에바 하울라(와이라가 새 방사장 안에 있어요)." "¿엔 세리오(정말이에요)?" 치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네나가 외친다. "시(네)." 나는 끄덕인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다. "아, 로라." 네나의 목소리가 나직하다. "에야 에스 펠리스(행복해 보여요)?" "시" 안심과 놀라움, 자랑스러움과 믿기지 않음. 이 모든 감정이 아우성치는 통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나 자신의 말조차 가까스로 들린다. 와이라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와이라 에스펠리스(와이라는 행복해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울음을 터뜨린다. - P431
ONCA는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는 번성 중이다. ONCA의 운영팀은 날마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다. 나는 그들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내가 슬플 때마다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충분히 드넓은 한 세상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음을 상기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파르케에서 찾은 희망이기도 하다. 파르케는 그 시초가 된 볼리비아 자원봉사자들의 상상력과 용기와 의지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르케는 뾰족한 막대기와 칼 그리고 영웅 한 명이 아니라, 가방과 장바구니와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생각은 내 여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한 작가, 어슐러 K. 르 귄에게 빌린 것이다. 1986년에 발표한 선구적인 에세이<소설판 장바구니 이론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에서 르 귄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말한다. 영웅 한 명이 맞서야 하는 폭력에서 벗어나 협동과 발효, 협력과 연결로 나아가는 것. 나에게 파르케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진 곳이다. 우리가 나란히 ‘발효‘되는 곳, 사람만이 아닌 동물들도, 그들이 무슨 종이든, 어떤 이야기를 지녔든, 어떤 방식으로 부서졌든, 집을 찾는곳. 우리 모두가 함께 출렁이며 중요한 연결을 만들어가는 곳. 변화를 몰고 오는 건 연결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 P440
이제 깃털처럼 가벼워진 배낭을 맨다. 문밖을 나가기 전에마지막으로 방 안을 한참 바라본다. 바라건대 내년 이 무렵에도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건대 너무 늦지 않게 조금은 늪에 빠질 수 있기를. 그리고 바라건대, 정말로 바라건대 그때에도 정글이 암녹색으로 변하는 길목에서 와이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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