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와인드 : 하비스트 캠프의 도망자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1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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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언와인드』*는 임신 중지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어 벌어진 〈하트랜드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먼 미래 소설(SF)이다. 저자 닐 셔스터먼(Neal Shusterman)은 전미 도서상 수상 작가로 미국의 영 어덜트(young adult)**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는 작가라고 한다. 전작 『수확자』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번역 소개돼 국내 독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작가다. 〈하트랜드 전쟁〉은 오늘날 지구촌의 인구 문제와 맞닿아 있어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 같다. 표제어 '언와인드'(unwind)는 '임신 중절'을 뜻하는 단어로 미래의 인구 문제를 미리 끌어온 느낌이다. 미래 지구촌 인류가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의 생명이 죽지 않고 영생이라면 어떤 문제가 일어날까?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은 인구 문제가 가장 먼저 닥칠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에 먼 미래 인류는 전작 『수확자』를 통해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사형 집행인'(死神)'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대명사이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 유토피아로 보이지만 사실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좀 좋은 세상을 찾아나가려고 애쓰는 주인공이 나오고,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소설이 끝난다.

인구 조절을 위해 생명을 끝낼 임무를 맡은 '수확자'는 컴퓨터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로써 강제로 생명을 끝내는 집행자 역할을 맡는 것이다. 끝내지 않은 〈『수확자』 시리즈〉가 이어받는 느낌이다. 『언와인드』는 소득 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던 양 진영이 '언와인드'라는 기묘한 합의에 도달하며 시작된다. 합의한 법안은 임신 중지를 금지하는 대신, 부모가 원할 경우 13세부터 18세 사이의 자녀를 '소급적으로' 중절할 수 있다는 법안이다. 이 제도는 언와인드가 되더라도 자녀의 장기가 다른 사람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부모들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언와인드* : 감다(wind)라는 의미의 단어에 'un-'이 앞에 붙어 '풀다'라는 뜻의 영어다. 이 소설에서는 '임신 중지', '임신 중절'의 의미로 사용됐다.(역자 주)

영 어덜트(young adult)** : 소비자를 연령별로 세분화시킨 경우, 보통은 22~25세까지의 사람들을 말하는데 트렌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발생한다.(패션전문자료사전, 1997)



소설이 시작되기 전 맨 앞 페이지에 「생명법」의 내용이 정리돼 있다.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 닐 셔스터먼이 일부러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하트랜드 전쟁〉이라고도 알려진 2차 내전은 단 하나의 문제를 놓고 벌어진 길고도 피 튀기는 충돌이었다.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생명법」이라 알려진 일련의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생명파와 선택파를 모두 만족시켰다. 생명법은 인간이 잉태된 순간부터 13세에 이를 때까지 그 생명에 대한 침해를 금지한다. 그러나 13세에서 18세 사이의 아동은 부모가 소급적으로 '중절'할 수 있다. 조건은 아동의 생명이 '기술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동을 중절하는 동시에 살려 두는 과정을 '언와인드'라 한다. 언와인드는 현재 사회에서 용인되는 흔한 과정이다."(p.11)

이 소설 작품은 7부로 나뉘어 있다. 각 부의 제목만 보더라도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아 여기에 적는다. 1부 〈삼중 복제〉, 2부 〈황새〉, 3부 〈이동〉, 4부 〈목적지〉, 5부 〈묘지〉, 6부 〈언와인드〉, 7부 〈의식〉 등이다. 1부의 시작은 암울하다. 이 나이대의 대상자들의 대화다. "갈 만한 곳이 있어." 아리아나가 그에게 말한다. "넌 똑똑하니까 열여덟 살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코너는 그리 확신이 들지 않지만, 아리아나의 눈을 들여다보니 잠시나마 의심이 사라진다. 아리아나의 눈은 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예쁘장한 보라색이다."(p.15)

슈퍼컴퓨터가 통제하는, 죽음이 사라진 미래를 그린 시리즈 소설이 『수확자』라면 『언와인드』는 그 이후의 더 암울한 미래 세계를 다룬다. 즉 인구 조절을 위해 선발된 수확자로 통제가 안 되는 사회 문제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 작품은 저자 스스로 '디스톨로지'(dysology)***라고 이름 붙인 미래 소설이다. 저자에 따르면 디스톨로지'(dysology)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SF가 아닌, 인간 존엄에 대한 문제 제기와 청소년 인권의 현실 폭로, 과학의 윤리성와 제도적 억압에 대한 고발 등 수많은 철학적 메시지를 녹인 작품임을 나타내 주는 단어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언와인드 디스톨로지〉는 현재 TV 시리즈화를 앞두고 있으며, 거대한 스케일과 장대한 서사로 독자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디스톨로지'(dysology)*** : dys(나쁘거나 어려운 것+ology 연구, 즉 나쁘거나 어려운 것에 대한 연구.(저자 주)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장기 이식 수술이 진보한 세상, 임신 중지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어 전쟁까지 벌이는 등 인구 조절에 관한 극한 사회 문제다. 지리멸렬한 싸움을 되풀이하던 양 진영은 '언와인드' 법안을 합의에 의해 통과시킨다. 이른바 「생명법」이다. 이 법안은 임신 중지를 금지하는 대신, 부모가 원할 경우 13세부터 18세 사이의 자녀를 '소급적으로' 중절할 수 있다는 위헌적 법안이다. 이 제도는 언와인드가 되더라도 자녀의 장기가 다른 사람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부모들의 선택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 잔혹한 언와인드 제도 시행을 앞두고, 이 제도를 피해 세 명의 아이들이 도망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모 속을 썩이던 코너, 보호 시설에서 자란 고아 리사, 신께 몸을 바치는 '십일조' 레브. 각각의 사연을 지닌 셋은 국가로부터, 경찰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도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살기 위한 모험과 투쟁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어떤 진실을 깨달아 간다. 단순히 지금 당장 죽지 않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쓸모 있는 장기 취급에 분노하고,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정부는 이 제도가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인 양 포장하기 위해 언와인드된 신체 부위만을 조합해 '합성 인간'을 탄생시키고, 그 결과 태어난 캠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정체성의 문제, 인간 존엄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캠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낙태에 대한 권리 - 즉 임신 중지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어디에서나 뜨거운 이슈다. 임신한 사람의 신체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임신 중지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태아를 동등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보호할 것인가. 저자 셔스터먼는 각각의 주장을 펼치는 '선택파'와 '생명파'의 논리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 임신 중지를 둘러싼 현대 사회 전체의 풍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임신 중지가 금지될 때 시도되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방식의 중절 수술,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를 누가,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 이와 관련한 법안을 내는 정치권과 그 지지자들, 신념을 갖고 물러서지 않는 종교계, 법의 틈새에서 돈만을 좇는 기업인 등의 문제는 지금 우리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사회 문제다. 어쩌면 인류 존속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 속의 미래 세계에는 지금 열거된 문제보다, 그 모든 논쟁의 중심에서 사라져 버린 '구체적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사려 깊은 관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저자는 지금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사회 문제 가운데 인류 생명의 문제는 먼 미래 빛나는 과학의 힘으로 해결되더라도 '인간애'나 '인간 존중'에 대한 개념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지금이나 먼 미래나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소설 속 그 이념과 이권의 추상적인 논쟁 속에서, 사랑스럽고도 매력적인 한 명 한 명의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면에 모순을 안고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소년 소녀의 우정과 사랑, 웃음과 눈물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그들이 인간으로서 존엄해지고 행복하길 바라게 된다. 현실을 꼭 닮은 그 복잡한 디스토피아 세상을, 어떻게 하면 다시금 사랑과 애정과 존중으로 통합시킬 수 있을까? 철학적 고민이 가득한 언와인드 디스톨로지의 장대한 SF의 세계에서, 독자들은 설렘과 재미는 물론 단단한 삶의 태도까지 얻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이 소설을 번역한 강동혁은 말은 많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애초에 '선택파'와 '생명파' 간 갈등의 이면에 있던 '핵심적인 물음은, 즉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소설에서 그 질문은 '태아가 과연 생명인가'라는 식으로 직접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누구에게서도 태어나지 않은 존재, 언와인드된 사람의 장기만으로 재조합된 '리와인드' 캠의 처절한 고민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그를 보면서, 그를 따라서 고민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사람으로 만드는가? 무엇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가? 정말이지 탁월한 점은, 이토록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이 단 한 순간도 지루한 사변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저자 닐 셔스터먼는 30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으며, 출간 즉시 각종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작품을 올리는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소설가다. 저자의 가장 큰 강점은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는 점이지만, 뜨거운 사회적 문제를 절묘하게 끌고 와 독자들로 하여금 철학적 문제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솜씨 또한 매우 탁월하다. 정신 질환을 다룬 『챌린저 디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는 〈『수확자』 시리즈〉, 다양한 혐오 문제를 그린 『게임 체인저』,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 인권을 깊이 천착한 이번 작품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시리즈〉 모두, 흥미로운 플롯 속에 거대한 사유를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세계의 단어들에 대해 출판사 측이 단어 설명을 책 소개글 뒤에 붙였다. 


- 언와인드: 인간의 신체가 해체되는 과정이다. 법에 따라, 해체된 사람의 99.44퍼센트는 이식에 활용되어 살아 있는 채로 유지되어야 한다.

- 황새 배달: 갓난아기를 키우고 싶지 않은 어머니가 아기를 남겨 두고 떠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아기를 다른 사람의 집 문 앞에 두고 떠날 수 있는 행동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기를 법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 하비스트 캠프: 언와인드가 분열된 상태를 준비하는 허가받은 시설이다. 각 시설은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시설은 언와인드로 지정된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 박수도: 이 어린 테러범들은 혈액을 폭발 물질로 바꾸는, 탐지 불가능한 화학 물질을 자신의 순환계에 주입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은 강하게 손뼉을 쳐 폭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청소년 전담 경찰(청담): 전국 청소년 전담국에서 일하며, 언와인드의 통제를 담당하는 법 집행관.

- 십일조: 〈10퍼센트〉를 의미하는 용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종교적인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언와인드가 예정된 아동을 가리킨다.


그들은…… 언와인드되어야 한다. 그렇다. 그게 그들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지금 상태로는 그들은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특히 그들 자신에게. 내면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그들에게는 언와인드가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안에서부터 부서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깥이 망가지는 것이 낫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는 육신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다른 생명을 구하고 누군가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걸 알고 그들의 분열된 영혼이 마침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레브 자신의 영혼이 곧 안식하게 될 것처럼.(p.108)


"내가 언와인드당하면, 내 눈은 사진사에게 갔으면 좋겠어."

헤이든이 말한다. 슈퍼 모델을 찍는 사진사한테. "내 눈으로 슈퍼 모델을 봤으면 좋겠거든."

"내 입술은 록 스타에게 갈 거야." 코너가 말한다.

"이 두 다리는 올림픽에 나갈 거야."

"내 귀는 오케스트라 지휘자한테 갈 거야."

"내 배는 음식 평론가한테."

"내 이두근은 보디빌더에게."

"내 코는…… 아무한테도 안 가면 좋겠다."

비행기가 내려설 때, 그들은 모두 웃고 있다.(pp.253-254)


저자 : 닐 셔스터먼(Neal Shusterman)


1962년 미국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으며 16세 때 가족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해 그곳에서 국제 학교를 다녔다.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에서 심리학과 연극을 전공했다. 전미 도서상을 받은 『챌린저 디프』와 미국 도서관 협회 마이클 L. 프린츠상을 받은 『수확자』, 미국 도서관 협회 최고의 영 어덜트 소설상을 받은 『분해되는 아이들』, 보스턴 글로브 혼 북상을 받은 『슈와가 여기 있었다』 등을 포함해 30개가 넘는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대중성을 인정받아 「수확자」 시리즈, 『드라이』, 『게임 체인저』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는 중이다. 현재 플로리다에 거주하며 아들인 재러드 셔스터먼과 소설, 시나리오 등을 공동 작업하고 있다.

홈페이지 storyman.com

페이스북 @NealShusterman


역자 : 강동혁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바버라 킹솔버의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에르난 디아스의 『먼 곳에서』, 『트러스트』, 커트 보니것의 『타이탄의 세이렌』,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그 후의 삶』,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 『이 소년의 삶』, J.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앤드루 숀 그리어의 『레스』, 진 필립스의 『밤의 동물원』, 말런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전 2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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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의 생각 없는 생각 - 양장
료 지음 / 열림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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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자가 이 책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책의 〈서문(프롤로그)〉에서 발견한 '진짜 나'란 문구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저자 '료'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책의 제목이 묘(?)하다는 느낌이 들어 독자의 시선을 잡아 당겼다. 저자 료가 직접 쓴 〈서문〉의 첫 문장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논하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해서 '왜 우리는 이렇게나 진짜의 나로 가는 길에 용기까지 필요하게 된 걸까?" 

이 문장에 담긴 '진짜 나'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는 '가짜'로 살았던 것일까? '진짜'란 단어는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섞여 '참'과 '거짓' 중 '참'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족한 영어 실력을 동원하자면 'real' 'true'쯤 아닌가? 독자가 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혼란했던 대한민국의 정국이 차츰 안정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 뽑힌 이재명 대통령이 선거 전까지(정확하게는 취임사에서도 들었다) '진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여러 번 천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한민국은 '가짜'란 말인가? 국가 공동체가 진짜가 있고, 가짜가 따로 있진 않을 텐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이 후보자가 이런 뜻으로 썼을 리는 없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란 표현을 놔두고 왜 '진짜 대한민국'을 외쳤을까? 더욱이 우리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사실 한자와 우리말이 복합적으로 합쳐진 것이다. '眞'짜와 '假'짜는 상대적 개념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독자는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가짜(거짓말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자신에게 붙은 별칭의 허위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진짜'를 반복 주장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반대 세력이나 정당에서 비방하기 위해 가짜 프레임을 씌운 것 정도로 독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료가 사용한 '진짜 나'는 문맥상 '허상(虛像)'의 반대되는 뜻의 '실상(實像)'을 의미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 표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자 이 대통령의 '진짜 대한민국'의 참뜻에 한층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대통령이 정치적 구호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에서 그 깨달음은 '참'에 가깝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저자 료는 ‘런던베이글(bagel)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high waist),’ ‘레이어드(Layered)’ 등의 감각적 공간 브랜드를 창업하고, 브랜드를 전국의 ‘빵지순례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든 분이다. 그녀가 창조한 공간은 ‘꾸며진 컨셉’이 아닌, 감정이 축적된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공간을 만든 그녀는 브랜드보다 오래 남는 감각과 마음을 믿는다. 그 믿음은 그녀가 만들어온 시간의 결, 그리고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다층적인 시간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어 올려, 자신의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담아냈다고 출판사 측은 소개하고 있다. 이 책 속의 글은 생생한 언어이거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이거나, 비유적 표현이거나 모두 독자들이 바로 이해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밝힌다. "언제나 말보다 시선을 먼저 보내는 그녀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장르와 형식에 갇히지 않고, 온전히 ‘나다움’을 지켜내는 그녀의 글은 얼핏 가벼운 일상의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인간을 향한 다정한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담겨 있다"는 출판사의 글에 공감한다. 

이 책을 읽은 후 독자의 감상을 굳이 묻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과장 없이, 실제 모습 그대로 표현했다"고 독자는 답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마음속 작은 울림을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저자 료는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작고 소박했던 런던의 한 카페에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완벽한 하나의 합을 이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커다란 울림을 받았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오랫동안 저는 타인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평생 하리라 믿었던 일을 그렇게 내려놓고, 직업을 일순간에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렇게 “목표 대신 자유를 원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저자가 "진짜의 나로 가는 길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나의 많은 모습들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묻는 것 같다."며 "내가 나로 태어나 내가 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를 자주 스스로에게 물었던 생각들이 모여 이 책이 된 것"이라고 말로 대신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며, 삶이라는 무대에서 모두가 배우로서 각자 자신만의 연기를 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얼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는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핵심 가치이며, 그녀가 만들어 온 브랜드의 철학이라고 답변한다. 매일, 매 순간을 ‘진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에게, 일과 삶, 일상과 예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간을 만들고, 옷을 입고, 음식을 만들고, 타인과 함께하는 모든 사소한 일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점이 저자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고유함에 대한 예찬’이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어로 쓰고 사진도 책 속에 담겨 있다. “Being yourself, not being someone.” 그 과정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긴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 속에는 진실과 진심이 잘 녹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겉모습의 화려함이나 장식적인 감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저 바라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무언가를 저 끝까지 알고 싶은” 사랑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보려는 이와 같은 ‘몰입’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감정의 동일화”이다. 바게트를 들고 돌아오는 길, 오래된 찻잔의 무늬, 해 질 녘 창문에 드리운 빛과 같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저자는 말한다. “그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빠짐없이 낚아채는, 아름다운 사냥꾼으로 살고 싶어요. 순간의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요.”라고.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고 독자는 짐작한다. “"매일 순간의 아름다움을 스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다.”는 단순한 집필 취지와도 일치한다. 


저자가 이 책을 내며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는 반복되는 '나로 사는 것'은 두려움이 동반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과 섞여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이기에 불가피하다고 배웠기에 '나답게'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은 혁명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는데 쉽게 가능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가질 만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알고도 그저 시작할 수 있던 '용기'가 필요하며 누구나 낼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비에 젖은 작은 새’와도 같은 마음이 들 때, 우리를 다시 날아오르게 하는 건 무엇일까.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오래된 빈티지 물건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마주하며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내가 제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가장 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비에 젖은 작은 새 같던 시절이었다. 열두 번 바뀌는 생각과 출처 없는 공포에 손도 못 쓰고 자꾸만 숨이 차던, 그 안에서 지도 같은 건 손에 쥐지 못한 걸 알면서도,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고, 캄캄한 길목에서 한 발자국 용기를 낼 때, 그 어떤 일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성장했다는 것은 꼭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두려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작든 크든 성장했다는 것은 어둡고 보이지 않음을 알고도 발을 내디딘 용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그 어떤 성공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두렵지만 “첫선을 그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그저 시작할 수 있다.”고.

어쩌면 내가 제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가장 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비에 젖은 작은 새 같던 시절이었다. 열두 번씩 바뀌는 생각과 출처 없는 공포에 손도 못 쓰고 자꾸만 숨이 차던, 그 안에서 지도 같은 건 손에 쥐지 못한 걸 알면서도,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고, 캄캄한 길목에서 한 발자국 용기를 낼 때, 그 어떤 일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무엇을 알아냈다.’고 강하고 단단하게, 부족함 없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꾸만 우스워 눈치 없이 그저 서 있던, 알고 보면 더없이 지루했던 때가 아니라.(p.82)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터뷰)〉를 제외하고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나를 뒤흔든 런던〉, 2장 〈그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3장 〈진짜의 베이스는 외로움〉, 4장 〈매일의 아름다움〉, 5장 〈생각 없는 생각〉, 6장 〈준비된 즉흥성〉, 7장 〈내가 나로 산다는 것〉, 8장 〈모든 질문의 끝에 사랑이〉 등이다. 제목을 잘 살펴본다면 차근차근 설명하듯이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개 장에는 모두 186개의 단상(斷想)이나, 짧은 생각 등이 수록돼 있다. 모든 내용이 별도의 생각이나 내용이지만 각 글은 모두 한 가지로 수렴된다. '사랑'이다. 

6장 121번째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타인의 경험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내가 눈을 떠 직접 느끼는 모든 것들만이 결국은 내가 풀어내는 과정에 베이스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제법 정확하게 알게 된 뒤로는, 운전을 하거나, 출근길을 걷거나, 회의를 하거나, 팀원들의 스타일을 구경하거나, 줄 서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운드들을 라디오처럼 듣거나, 같은 책을 계속 읽거나, 컨펌을 하거나, 수정을 하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테스트를 하거나, 해의 크기와 높이의 다름을 보거나, 물이 끓고 있는 형상을 보거나, 길 건너 신호 대기 중인 사람을 관찰하거나, 무작정 선 채로 매장의 바이브를 느끼는 일까지. 사소한 발견과 미미할지도 모르는 반응과 기억을 의심하던 매일의 사진과 잊지 않기 위해 써댄 글들의 반복이, 매번 기분 좋은 공짜 학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그대로 내가 투영될 때, 그 언젠가의 분주했던, 차분했던, 어려웠던, 즐거웠던 나를 빌려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저 멀리 언젠가 또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두서없이 무엇이든 채우고, 보고, 쓰던 나를 빌려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두 눈과 귀와 맘이 바빠진다.(p.229)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나를 알아가는 방식이란, 결국 물리적으로 자꾸만 써대는 뭔가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고, 택하고 있다. 고민 같은 것 없이, 자주 생각하고 자꾸 써대는 것들이 모여 잘하는 일이 되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의심 같은 건 접어 두고, 거창하든 사소하든 그저 끌리는 대로 쌓여가는 거대한 시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믿으며, 나는 그저 간다.(p.247)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인터뷰)〉에서 두 가지 질문과 답변을 그대로 적는다. 

-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료가 생각하는 ‘예술’과 ‘생활’, 혹은 ‘예술’과 ‘일’ 사이의 경계는 어떤 것인가요?

네. 우리는 이미 예술 안에 살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니까요. 인간의 탄생, 나무의 성장, 벌레의 움직임, 돌과 대리석의 질감 - 이 모든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경이롭고 완벽한 질서 속에 존재하고 있어서, 결국 ‘존재 자체가 이미 예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모든 방식들, 글씨체, 말투, 먹는 방식, 작은 습관들까지 모든 것이 예술 활동이죠. 그렇게 보면 이 지구에 수십억 개의 예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아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할 때의 나’, ‘집에서의 나’, ‘사랑할 때의 나’처럼 나를 분리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데,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된 건 삶이 이미 너무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요즘 많은 사람들이 취미 대신 SNS에서 인증된 즐거움으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요. 하지만 예술은 그런 것들과 별개로, 하루하루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 몸의 모양을 관찰하거나, 피부의 감각을 느끼는 것, 발가락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 그런 일상이 곧 예술 활동인데, 중요한 건 ‘나는 어떻게 남들과 달라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다르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p.342~343)


-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레퍼런스를 찾거나,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데, 오히려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는 이미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가장 ‘나’다운 자료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 것이죠. ‘자기 자신을 레퍼런스로 삼는다.’라는 자각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했는데, ‘자아’라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내리는 선택들의 합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 그것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 지켜낼 것인가?’가 나를 결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정답을 따라가며 성공하려는 건 위험한 오해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에게 맞는 삶이 아닐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기고, 그 과정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p.344~345)


저자 : 료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카페 레이어드를 창업하였으며, 현재 브랜드 총괄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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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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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이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란 “넘어지고, 후회하고, 다시 또 사랑에 빠지는”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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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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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작가 이름은 익숙한데 표제어가 독자에게는 낯설다. 아마 독자가 흔히 말하는 '로맨스', 혹은 '연애' 소설을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그랬을 터다. 그런데 긴 제목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니 이상하게도 오래 전이지만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연애'라는 단어가 표제어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 같다. 긴 제목을 가진 이 소설 작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은 서로 모순된 느낌의 단어가 조합을 이뤄 미스터리 소설이나 추리 소설 느낌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독자들이 알겠지만 '조찬모임'이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친목과 정보 교환의 목적으로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아침 식사를 겸해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의 장소로도 이용되는 회합이다. 이를 테면 비지니스 맨들의 시간 활용법이다. 이런 모임 참여자들은 대부분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비즈니스 담당 이사 등이다. 간혹 비즈니스 전문가들의 짧은 강연을 듣기도 한다. 독자는 개인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지만 참여한 지인 덕에 먼 발치에서 지켜본 적은 있다.

    이 작품은 사실 초간본이 아니다. 13년 전 출간됐다. 매우 인기가 좋았던 덕분에 개정판을 내다가 이번에 완결판으로 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이에 따르면 초판의 서사를 따르되 문단을 리드미컬하게 다듬었으며, 문장 일부를 단호히 삭감하고 시대상을 반영해 단어를 세공했다. 또한 스타일리시한 표지로 옷을 갈아입고(양장판) 책의 만듦새에 감성을 불어넣었다. 임선애 감독이 연출하고 수지·이진욱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화로 그 의미를 더한다. 소설 작품이 영화화된 것은 많지만, 이 작품이 영화화된 것은 어쩌면 출연 배우들의 인기로 더 큰 홍보 효과 덕일 것이다. 

    저자 백영옥은 이 작품 전 훨씬 단순한 제목의 단편집을 낸 적이 있다. 첫 작품집 『아주 보통의 연애』이다. 8편의 단편이 실린 단편소설집이다. 이 단편집에는 「육백만원의 사나이」, 「청첩장 살인사건」, 「가족드라마」, 「강묘희미용실」, 「푹」, 「미라」, 「고양이 샨티」, 그리고 표제어로 쓰인 「아주 보통의 연애」 등 여덟 편이 게재됐다.


    이 단편집의 공통적인 점은 등장 인물들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자신의 직업, 업무, 역할이 매개가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독특한 설정이 깔려 있다. "이 단편집의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의 명함이나 프로필 뒤로 내쫓기듯 숨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총출동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장받고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들의 직업과 직장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직업이나 직책 뒤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그 정체성을 버텨온 심리적 장막이 사라지자마자 공황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찾기 위해 직업을 가졌지만 거꾸로 그 직업의 역할에 철저히 구속됨으로써 자아를 상실한다. 백영옥의 소설은 그렇게 명함과 프로필 뒤로 자신의 맨얼굴을 숨긴 사람들의 연약한 내면과 상처입은 자의식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정여울(문학평론가) 

    표제작이 된 「아주 보통의 연애」에서 잡지사 관리팀 직원 ‘나’ 김한아는, 한 인간의 모든 욕망을 그가 사용한 영수증을 통해 해독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내가 짝사랑하는 패션팀 수석 ‘이정우’의 삶 역시 그가 나에게 제출하는 영수증으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영수증을 몰래 복사해 차곡차곡 모아둔 노트는 그를 향한 나의 마음 그 자체이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나를 이태리 식당으로 데려간 이정우는 실은 자기가 반지 영수증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영수증 처리 담당 직원, 갈빗집 사장님, 청첩장 디자이너, 기업의 CEO, 출판사 편집자, 인터넷서점 북에디터 등 평범하지만 독특한 사랑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제목은 '아주 보통'의 연애라고 저자는 묶어놓는다. 

    등장 인물들은 자신의 꿈과 목표, 이상의 실현을 위해 선택한 '직업'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직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아갈수록 그들을 이루는 '나'라는 알맹이는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것만 같다. 저자 백영옥은 그들이 경험하는 변화를 통해 참된 자아와 마주할 용기를 보여주고 그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은 전작 『아주 보통의 연애』 출간(2011) 1년여 만에 펴낸 장편 소설이다.(2012) 출간 당시 “투명하면서 아름다운 서사”, “독특한 설정과 세련된 필치”, “신선한 제목의 소설”이란 호평을 이끌어냈던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최근 영화화가 확정돼, 원작 소설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이라는 간판을 건 레스토랑에서 시작한다. 오전 일곱 시에 모인 실연당한 사람들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실연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동병상련의 상처를 위무하기 위한 모임”이라기보다 각자가 “실연을 선언하는 모임”인 동시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 작품의 세 주인공은 만난다. “남자라는 신인류”와 치명적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이별을 고한 뒤 상실감에 빠진 항공사 승무원 윤사강, 오랜 연애의 갑작스러운 종료 앞에서 일상이 무너진 컨설팅 강사 이지훈, 사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 뒤 이직한 결혼정보회사에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미도. 이들은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얽히고 맞물린다. 

    작품을 통해 저자는 사랑의 오해가 깊어질 때 사랑은 종말을 맞이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것을 사랑을 이루지 못한 ‘실연’이라 부른다. 언젠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헤어짐이 아니라 이제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없는 것이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거절과 거부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p.28)”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뿐 아니라 부정하고 밀어내고 있는 어떤 기억을 내포한다. 사강은 짧은 연애 끝에 이별했다. 뜨겁게 끌렸던 정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느꼈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랐지만 마주치지 않기 위해 1년 동안 거리 두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별은 유년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이별과 상처를 다시 마주하게 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레스토랑 상호명)에서 사강을 바라보던 지훈은 현정과의 10년 연애 끝에 이별했다. 서로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지속적인 연애는 “변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결국 사랑”일 수 없다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 이별은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외할머니와 형에 대한 기억과 원망을 대면하게 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주인공의 시선이 교차하여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별이라는 공통된 상처를 통해 사랑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배운다는 것을 알려준다. 눈물겨워 털어내고 싶던 이별에 ‘안녕’이라 말하며 손짓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진짜 이별을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믿어보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한눈에 그 사람의 모든 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란 지훈의 말은, 긴 연애 끝에 돌연 찾아온 이별에 대한 고백이자 우리네 사랑과 인생에 대한 진리로 읽힌다.

    이 소설 작품은 이별이라는 감정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 아픔이 어떻게 일상을 바꾸고 회복되는지를 풀어낸다. 여기서 실연은 단순한 감정의 붕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궤도를 비틀고, 잊고 있던 과거를 끌어올리며,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내적 훈련이 된다. 실연의 아픔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서 어떻게 바꾸는가. 시간은 상처를 흐려지게 하는 약이다. 그러나 “넘어져서 피가 철철 나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무한 위로다. 저자는 실연을 ‘고통의 종착지’가 아니라 ‘내면 근력을 길러내는 자기계발의 장’으로 그린다. 사강은 연인과의 이별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이별을, 지훈은 지나간 사랑의 습관을 되짚으며 이별 후 폐허가 된 마음을 다시 들여다본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수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 게 진짜 위로라고” 말하는 미도는 “헤어져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새로운 사람에게 “연락처를 묻고, 무너진 감정을 복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오전 일곱 시”에 시작하는 이 소설은 “오후 일곱 시”에 끝난다. 열두 시간의 시차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을 마주한 이별의 아침부터 “헤어져야 만나고, 만나야 사랑이 다시 시작”됨을 깨우치는 이별의 저녁까지의 과정을 상징한다.

    서로의 슬픔이 때때로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이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란 “넘어지고, 후회하고, 다시 또 사랑에 빠지는”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취약한 인간은 “남의 슬픔을 보면서 진심으로 위로”받는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경계하지만, 곧 공통의 슬픔으로 연결된다. 슬픔이 다른 슬픔을 알아보는 것이다. 슬픔을 농담처럼 말하는 미도, 묵직하게 고통을 짊어지고 슬퍼하는 지훈, 오랜 슬픔을 끌어안은 사강. 이들의 서사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상처를 줄 수 있고,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예고한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은 연애소설이자 성장소설, ‘심폐 소생 소설’이다. 어긋난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새로운 회복에 이르는 이야기, 가슴 안에 있던 트라우마가 가슴 밖으로 나오면서 치유되는 이야기, 심폐가 멈춘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폐를 소생시키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감지하고 품을 수 있다는 치유의 아이러니를 되새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연애에는 마지막이 필요하고, 끝내 찍어야 할 마침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사람은 도리 없이 어른이 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밖과 안 모두를 보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고 자기의 중심축을 잡으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게 된다"고.


    사강이 원한 건 작은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삶이었다. 재작년에 심은 라일락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눈으로 가늠하는 삶. 집과 동네의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강이 원했던 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자신의 반경 안에 있는 익숙한 것들을 손으로 만지고 친숙함을 코끝으로 느끼는 것이었다.(pp.243-244)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진짜 이별을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p.325)


    저자 : 백영옥


    소설을 쓰는 일이 고독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명랑한 노동이라 믿고 싶은, 예술가라기보다 직업인에 가까운, 오전 5시에서 오전 11시 50분까지의 사람. 네 권의 장편소설, 두 권의 소설집, 다섯 권의 에세이를 써내는 동안 때때로 야근. 자주 길을 잃고, 지하철 출구를 대부분 찾지 못하며, 버스를 잘못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는 일이 잦은, 외향적으로 보이는 내향성인, 아주 보통의 사람. 2006년 단편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08년 첫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 『다이어트의 여왕』, 『애인의 애인에게』, 소설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출간했으며, 산문집으로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다른 남자』,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를 펴냈다.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는 작가 백영옥이 연간 500권이 넘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수집한 인생의 문장들 중 정수를 담은 에세이다. 매일매일 일상 곳곳에서 밑줄을 수집해,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에게 약 대신 처방할 수 있는 문장을 쓴다. 상처의 시간을 겪은 사람들에게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과 같은 문장으로, 위로를 건네는 것이 작가의 오랜 기쁨이다.

    조선일보 ‘그 작품 그 도시’, 경향신문 ‘백영옥이 만난 색다른 아저씨’, 중앙SUNDAY S매거진 ‘심야극장’, 매일경제 ‘백영옥의 패스포트’ 등의 칼럼을 연재했다. 한겨레21, 보그, 에스콰이어 등에도 책과 영화에 대한 폭넓은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조선일보에 ‘말과 글’을 연재 중이다. 교보문고 ‘백영옥의 낭독’과 MBC 표준 FM ‘라디오 디톡스 백영옥입니다’, ‘라디오 북클럽 백영옥입니다’의 DJ로 활동했다. 현재 EBS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에서 골목을 여행하며 동네 책방을 소개하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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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만장자의 거리 -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뉴욕 억만장자 거리에 숨겨진 이야기
    캐서린 클라크 지음, 이윤정 옮김 / 잇담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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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카페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짧고도 매우 극적인 일화가 실려 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가 집필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93-94년)에서 서사적 구조로 확장되었으며, 16세기 초 플랑드르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마도 피터르 브뢰헬은 이들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바벨탑〉의 직접적인 출처로 삼았을 것이다. 그는 모두 3점의 〈바벨탑〉을 그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2점만이 전해지고 있다. 빈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의 〈바벨탑〉은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에 소장된 〈작은 바벨탑〉(1564)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로 제작되었다. 두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빈의 〈바벨탑〉이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도시 풍경을 보다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이 책 『억만장자의 거리』는 300m 이상 높이 솟은 초고층 건물들,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집값,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과 억만장자가 모여 사는 동네···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판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이라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도 센트럴파크 인근 ‘억만장자의 거리(BILLIONAIRES’ ROW)’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마천루의 거리는 한때 허름한 건물이 늘어선 낡은 거리였다. 불과 몇 년 만에 초고층 건물이 밀집한, 지구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거리가 되기까지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캐서린 클라크는 이 책에서 억만장자 거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히 전하며, 뉴욕 부동산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클라크는 책의 맨 앞장에서 〈창세기〉를 인용한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11장 4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뉴욕 스카이라인을 바꾼 사람들과 그들이 지은 건물을 다룬 이야기를 통해 뉴욕 부동산의 역사, 사회, 정치, 금융 등 관련 정보를 풍부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21세기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억만장자 켄 그리핀, 빌 애크먼, 마이클 델, 인기 가수이자 영화배우 제니퍼 로페즈···.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과 억만장자가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이라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도 센트럴파크 인근 ‘억만장자의 거리’는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얇고 높은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일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얼마에 집을 사고팔았을까? 부동산 전문지 『리얼 딜』과〈뉴욕 데일리 뉴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미국 부동산 시장을 전문적으로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 캐서린 클라크는 2011년 뉴욕 부동산에 관한 기사를 쓰다가 ‘억만장자 거리’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이 주제에 관해 100여 명에 이르는 부동산업계 관계자를 취재한 끝에 이 책 『억만장자의 거리』를 펴냈다.

    ‘억만장자 거리’ 배짱 없이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세계로 알려져 있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뉴욕 부동산 거물(개리 바넷, 해리 맥클로우, 스티븐 로스, 마이클 스턴)의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그들이 지은 다섯 건물(원 57, 432 파크 애비뉴, 111 웨스트 57번가, 센트럴파크 타워, 220 센트럴파크 사우스)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이 책은 억만장자 거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히 전해 뉴욕 부동산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했다는 평을 받으며, 2023년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비즈니스 도서상 최종 후보작과 2023년 『CEO 매거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아마존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모두 3부 2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하늘을 꿈꾸다(1~9장)〉, 2부 〈난기류(10~17장)〉, 3부 〈땅에 떨어지다(18~28장)〉 등이다. 이 책의 주요 배경지인 뉴욕 맨해튼에서 건물의 높이는 점점 위로 향하는데 이곳의 이야기를 쓰는 저자 클라크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의 책 구성을 보여준다. 이 점은 저자의 의도적 구성인지, 아니면 신(神)의 관점인지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책의 본문 전에 게재된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뉴욕 센트럴파크 남쪽을 바라보는 것은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부의 물리적 현현(顯現)을 보는 일이다. 줄지어 선 극도로 얇은 초고층 빌딩들이 공원 남단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초고층 건물들은 뉴욕 스카이라인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평범한 뉴욕 시민은 초고층 건물 중 어느 곳에도 발을 들여놓을 일이 없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전망대처럼 망원경으로 도심을 들여다보거나 30 록펠러센터 유명 레스토랑인 레인보우 룸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출 수도 없다. 과거에 지은 마천루와 달리 최근에 지은 초고층 건물에는 공용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억만장자 거리'라고 불리는 '초고층 건물' 밀집 구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성소이자,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하늘 위 최상류층 커뮤니티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초대를 받아야만 한다.(p.15)

    일반적으로 부동산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TV를 통해 뉴욕 맨해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서 방 한 개짜리 원룸 같은 크기의 임대료가 15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억만장자의 거리’는 특별한 건물이 집중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조성한 대표적 인물들이 이 책의 앞에 캐리커처 사진과 함께 별도 소개돼 있다. 이처럼 유명해진 억만장자의 거리’는 이젠 세계 각 나라에서도 비싼 거리 앞에는 이 수식어가 별명처럼 붙는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억만장자 거리의 핵심인 뉴욕 맨해튼 57번가의 길이는 1.6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주변에는 300m 이상 높이 솟은 건물이 쭉 늘어서 있다. 이 책에는 거리의 약도까지 포함해 별도 그림으로 처리돼 있다. 물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길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가다 보면 지난 100년간 뉴욕 부동산 개발과 건축의 진화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858년에 초대형 도심 공원인 센트럴파크가 개장한 이래 농지로 둘러싸여 있던 57번가 주변으로 뉴욕의 부유한 가문들이 몰려들며 초부유층의 메카가 되었고, 20세기로 접어들자 주거 지역은 점차 상업 지구로 변모했다. 1970년대 뉴욕 부동산 시장은 뉴욕 상류층 대신 돈을 가진 전 세계 제트족의 관심을 끈다. 세계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몰려든 부유층은 콘도를 구매했고, 이 성공에 힘입어 이들을 모방한 고층 타워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점점 쇠퇴한 57번가에는 초호화 상점, 기념품 가게, 갤러리, 역사적인 아파트가 현대적인 사무실 빌딩과 주거용 빌딩 사이에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이후 2010년에 306m 높이의 원 57 공사를 시작으로, 더 높고, 더 얇고, 더 비싸고, 더 호화로운 초고층 빌딩이 속속 들어서며, 이 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저자는 미국 뉴욕 스카이라인을 바꾼 사람들과 그들이 지은 건물을 통해 뉴욕의 역사, 정치, 금융 등 관련 정보를 다채롭게 전달하며, 시대적?사회적 흐름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점점 건물을 더 높이 지으려 할까? 뉴욕은 오랫동안 마천루의 본고장으로 알려졌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시아와 중동에 자리를 내주었다. 높은 인건비, 비싼 건축 비용, 엄격한 규정, 점점 부족해지는 토지···. 크고 작은 건물이 블록마다 꽉 찬 맨해튼에 개발되지 않은 땅은 드물었다. 맨해튼 개발업자들은 토지 합병으로 이를 해결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 1961년 뉴욕시 토지 용도 지정법에 따라 건물 연면적을 땅의 넓이로 나눈 비율인 ‘용적률(FAR)’과 이웃 건물 소유주로부터 기존 건물 위의 공간인 ‘공중권(air rights)’을 매입할 수 있는 조항이 도입된 것이다.

    빈 하늘은 ‘아직 아무도 건물을 짓지 않은 땅’이었다. 특히 57번가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용적률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빈 땅이었다. 이때부터 좁은 땅에 온갖 건축 기술을 활용한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건물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건물에 틈을 만들고, 거대한 콘크리트 추를 달로 건물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등 최신 미적·공학적 기술을 총동원한 끝에 미국의 여느 평범한 가정집 뒷마당만 한 크기의 부지에 400m가 넘는 마천루가 지어졌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설 기술에 더해 성공과 야망을 열망하는 이들의 경쟁으로 건물은 점점 더 하늘에 가까워졌다. 

    저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초고층 건물' 밀집 구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하늘 위 최상류층 커뮤니티라고 이곳을 소개했다. 저자가 432 파크 에비뉴를 몇 차례 방문하며 푸코의 파놉티콘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스트 56번가에 자리한 드라마틱한 건물 입구를 지나칠 때마다 부유한 입주자를 엿보고 싶어 했다면, 그러나 자신의 시선이 건물 로비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개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억만장자 거리에는 호기심과 비판 어린 시선이 교차한다.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때마다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바뀌고, 이는 그림자 문제로 이어졌다. 고층 빌딩으로 인해 센트럴파크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고층 건물로 인해 한낮의 햇빛을 차단당했다고 지적하면서 1,000여 명이 넘는 시위대가 모인 일도 있었다. 도대체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기에 이토록 철저한 보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일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공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전 세계 자본의 움직임에 관여할 만한 인물들이 아닐까? 하는 일반인들의 의혹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단순히 그림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러시아의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가 주체할 수 없는 현금을 세고 있을까? 다이아몬드를 가득 채운 욕조에서 슈퍼모델이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씻고 있을까? 미국 헤지펀드 억만장자들이 최고의 전망을 놓고 사우디 왕자들과 다투고 있을까? 아니, 그들이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 이런 의혹들의 저자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새롭게 건설한 초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사방으로 열린 창으로 센트럴파크나 맨해튼 전망을 감상할 수 있겠지만, 그 건물에 평범한 뉴요커는 들어갈 수 없다. 고층 전망대나 식당처럼 대중에게 공개된 공공 공간이 점점 개발 계획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강조한 이유와 맥락이 같다.

    억만장자 거리의 초고층 빌딩은 유명인, 금융업자, 러시아 올리가르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등 세계 초부유층의 집인 동시에 세계 최부유층의 투자 수단이었다는 저자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래서 누군가는 억만장자 거리의 권력 구조를 파놉티콘에 비유하고, 불평등 시대의 대차대조표라 일컫는다. 다시 말해, 이 책 『억만장자의 거리』와 그곳에 들어선 첨탑처럼 생긴 건물 이야기는 돈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확실해진다. 우리가 경외하며 올려다보는 마천루의 눈부신 외관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마천루를 통해 21세기 뉴욕,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깊이 있고 날카롭게 그려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 타워들을 보고 공간 낭비, 전 세계의 돈을 보관하는 그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이 건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부자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골드바를 거래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피카소의 작품을 창고에 보관하기보다 벽에 걸어 두기로 선택한 미술 투자자에 비유할 수 있다. 타워는 자신들을 만든 개발업자들의 유산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고, 일부 개발업자는 다른 개발업자들보다 훨씬 더 큰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2023년, 인플레이션과 암호화폐 폭락, 또 다른 금융 위기의 위협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개발업자들은 단념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이 바로 개발업자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개발업자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개발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몇 년만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죠.” 감정평가사 조너선 밀러가 말했다.(p.451)


    저자 : 캐서린 클라크(Katherine Clarke)


    〈뉴욕 데일리 뉴스〉, 『리얼 딜』,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미국 부동산 시장을 전문적으로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와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자는 2011년에 뉴욕 부동산에 관한 기사를 쓰다가 ‘억만장자 거리’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이 주제에 관해 1백여 명에 이르는 부동산업계 관계자를 취재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거리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히 전하는 『억만장자의 거리』는 그의 첫 번째 책으로, 출간 후 2023년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비즈니스 도서상 최종 후보작과 2023년 『CEO 매거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아마존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엑스 @KathyClarkeNYC

    홈페이지 katherineclarke.com


    역자 : 이윤정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한동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크레셴도로 살아라』, 『데이터의 함정: 숫자에 가려진 고객 인사이트를 포착하는 법』, 『무의식적 편견』, 『시너지 셀링: 고객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산다』, 『인생을 바꾸는 작은 습관들』, 『나만의 커피 레시피북: 집에서 만드는 50가지 커피와 에스프레소 음료』, 『세상을 속인 의사』,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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