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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이 책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표제어나 표지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다른 소설 작품이다. 표지로 봐서는 철학 에세이나 행복한 일상을 다룬 에세이처럼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소설 작품은 나가노현에서 지역 의료에 종사하는 현역 내과 의사인 작가인 나쓰카와 소스케의 최신작이다. 이 작품은 누계 340만 부가 팔린 밀리언셀러 시리즈의 작가이기도 한 저자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은 때로부터 14년 만에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현직 의사로서 바쁜 틈에 소설을 펴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14년의 비밀'은 예상과는 다른 데 있다. 이번 소설은 오랜 기간 현역 의사로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깨달은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 대해 독자들에게 출간의 말을 전한다.
“의료가 소재입니다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수들의 갈급한 권력투쟁도 없고 의식이 돌아오라고 절규하며 심장마사지를 하는 긴박한 장면도 없습니다. 다만 기적이나 음모, 절규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제 능력이 허락하는 한 온 힘을 다해 썼습니다.”
이 작품은 출간 즉시 서점 관계자와 독자로부터 극찬 세례를 받았고 급기야 일본서점 대상 4위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독자들은 “많은 이가 읽었으면 하는 책”, “각자가 죽음을 대하는 법,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다” “초고령화 사회에 인간의 ‘마지막’이 그려진 소설” 등 감동을 쏟아냈다.
“대학 의국에 있을 때 그가 사용하던 책상 위에는 변변한 의학서적은 없었지만, 쓸데없이 어려운 철학책들은 수북이 쌓여 있었으니까.”
“철학책이요?”
“뭐였더라. 칸트, 플라톤, 흄, 스피노자…. 적어도 의사 책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
“예사롭지 않은 독서 편력이군요. 광범위한 공부이고요.”
“그러고 보니 가쓰라기 편집장은 문학부 철학과 출신이라고 했던가?”
“네. 학창 시절에 제 나름대로 다양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그러니까 데쓰로 선생이 플라톤이나 칸트와 같은 정통파 책을 읽었다면 이해하겠는데, 스피노자라니…. 참으로 흥미롭네요.”(p.74~75)
이 소설은 단순한 의료계 안팎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대하는 휴머니즘이 가득한 의사의 치료와 치료 과정의 이야기다. 또 환자와 의사의 공감, 불치의 병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보여준 휴머니즘이 잘 드러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모든 생명체처럼 언젠가는 죽는다. 지구 등 우주적 관점에선 '순간'에 불과하지만 한 인간에게 죽음은 짧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이자 전부다. 환자와 의사는 이런 시각에서 공감한다. 죽음에 대한 지나친 무게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인간적 관점과 전체적 관점으로 보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로서 살아 있는 동안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 속에 처해 있다.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를 너무 무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원동력이다. 이 소설이 휴머니즘 가득한 의사의 시선과 환자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치료는 서로가 원하는 만큼 이뤄진다. 의사가 최선을 다하는 과정 하나하나는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실행됨을 독자들이 깨닫게 하는 소설이다. 이 의사의 책상에 독특하게도 스피노자의 책이 꽂혀 있다.
이 소설 작품은 이 매력적인 주인공 마치 데쓰로와 함께 어느 순간 ‘소박하고 행복한 시간의 흐름 속에’ 빠져들게 한다. 출판사 측에서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데쓰로의 말을 인용한 문장은 주인공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기적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 의사는 생명의 최후에 희망의 등불을 처방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교토의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저자 나쓰카와 소스케와 같은 직업을 가진 내과 의사이다. 이름은 마치 데쓰로. 데쓰로는 저자의 분신처럼 빙의한 작품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데쓰로는 환자를 치료하는 자신의 소신이 “설령 병이 낫지 않아도, 남겨진 시간이 짧아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어. 분명히 그럴 수 있다는 게 내 나름의 철학이거든. 그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해.”라고 말한다. 데쓰로가 삶의 마지막을 앞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력할 뿐이다. 스피노자를 즐겨 읽는 데쓰로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많이 닿아 있다.
스피노자는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서양 철학자다. 그의 철학과 사상, 생애를 모른다고 이 책을 읽기 어렵거나 이해가 힘들지는 않다. '스피노자의 진찰실'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주인공 데쓰로의 치료 과정에서 붙여진 별명이지 그의 삶이 스피노자와 같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피노자 철학의 근원을 알아두는 것이 데쓰로의 치료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여기에 철학사전을 참고해 간단하게 설명한다. 스피노자는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네덜란드 철학자다. 영국의 베이컨,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신(新)시대를 환영하는 사상을 표현했다. 따라서 〈자연 지배〉와 〈인간 개조〉가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다. 그의 철학은 한편으로는 범신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유물론적 주장으로도 해석된다. 관념론자들은 그를 범신론자로서 관념론적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스피노자의 기본 사상은 오히려 유물론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사상의 밑바탕이 되는 '신'(神)은 무한한 계속성을 가지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해석될 뿐 아니라 또 '자연'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유물론은 형이상학적이고, 동적이지 않고 정적이며, 또 발전에 대한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속성이 개체로서 규정되었다는 의미에서 '양태'로 간주된다.(철학사전, 2009)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의지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쓰나미나 지진을 없앨 수 없고, 환자 몸속에 생긴 췌장암을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라는 말 속에 희망의 빛이 일렁거린다.
“이런 희망 없는 숙명론 같은 것을 제시하면서도 스피노자가 재미있는 점은 인간의 노력을 긍정한 데 있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말했거든. ‘그렇기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인공 데쓰로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놀라운 기적도, 교수들의 권력투쟁도, 음모도 없다. 지역의 작은 병원을 무대로, 이런저런 질병으로 인해 고달픈 인생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삶의 본질과 죽음의 의미를 따듯하고 상냥한 필치로 담아냈다. 특히 주인공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령의 환자와 그 가족에게 오직 병의 치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남은 생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진료를 펼치는 모습은 진한 감동을 전한다. 또한 뛰어난 의술로 치료에 난관을 겪는 환자들을 살려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역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여러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지만 신기하게도 읽는 이의 마음에는 따뜻함과 뭉클함이 차오른다.
주인공은 암 환자에게 힘내라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서두르지 말라’고 할 뿐이다. 생을 다하고 떠난 사람에게는 마지막으로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어느새 읽는 이도 환자의 마음이 되어 어깨에 힘이 빠지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칫 신파적인 내용이 될 수 있지만 결곡한 문장에 아름다운 교토의 풍경까지 더해져 “소박하고 행복한 시간의 흐름 속에” 빠져들게 한다. 모처럼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고 싶다면 이 소설을 강력히 권유한다.
교토가 주 무대이기에 이야기 속 곳곳에 등장하는 일본의 옛 수도(우리의 경주 같은) 교토의 명물 화과자도 소개된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당장이라도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싶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으니 주의하시라는 편집진의 귀띔이다.
이 소설의 의뢰자이자 편집자 시노하라 이치로(미즈즈키 대표이사)는 출간 후 소감을 남긴다. “나쓰카와 씨에게 작품의 집필을 의뢰하고 나서, 14년의 세월을 거쳐 탄생한 것이 이번 작품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행복’이라는 깊고 큰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으로 전달됩니다. 굉장하면서도 뛰어난 한 의사가 환자나 동료와 진지하게 마주하는 모습을 그린, 최고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이 작품을 출판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독자는 서평에서 소설의 줄거리를 세세하게 쓰면 오히려 스포일러가 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의 줄거리를 미리 듣고 가는 것처럼 '김 빠진 맥주'일 테니까. 줄거리를 간략하게 옮기는 데 한계가 있지만 최소한의 배경과 주제는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서너 문장으로 압축해 본다.
마치 데쓰로는 교토의 하라다 병원에서 일하는 내과의사이다. 싱글맘으로 아들을 키우던 여동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 조카를 돌보기 위해 촉망받던 실력 있는 의사 데쓰로는 격무에 시달리던 도심의 대학병원을 떠나 작은 동네 병원의 의사로 이직을 결심한다. 데쓰로의 실력을 아는 대학병원의 부교수 하나가키는 애제자인 여의사 미나미를 보내 그에게 연수를 받게 한다. 처음에 미나미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대하는 데쓰로의 태도에 미심쩍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데쓰로의 깊은 의중과 놀라운 실력을 목격하고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미나미와 함께 평소와 같이 죽음을 앞둔 고령 환자들을 회진하던 데쓰로에게 하나가키로부터 급한 전갈이 도착한다. 대학병원에서 치료하던 소년의 병세가 급하게 악화돼 한 시간 반 뒤에 수술을 해야 하는데 데쓰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는 대학병원 출입금지를 당한 상태라 신분을 감춘 채 비밀리에 수술을 도와야만 했다. 마침내 데쓰로는 수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의사들이 가득한 수술실에 들어선다.
데쓰로는 아키시카가 어떤 가혹한 일을 겪은 탓에 정신과에서 내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나베시마가 말끝을 흐렸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른다. 물어볼 생각도 없고, 들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저는 오히려 죽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데쓰로가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하필 데쓰로의 말과 함께 종횡무진 활약하던 아키시카의 기체가 적의 직격탄을 맞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게임에 몰두한다. 데쓰로도 화면을 응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환자분들의 마지막을 지킬 때마다 생각해요.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더 알고 싶어요. 죽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최후의 시간이 다가온 환자에게 자신 있게 말하면서 안심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당신이란 사람은….”(p.181~182)
데쓰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이 녹아 하나로 섞인 계절의 틈새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친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자전거 벨 소리가 울렸다가 멀어져 갔다.
“나는 말이야, 미나미 선생.”
데쓰로가 고개를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의료라는 것에 큰 기대도 희망도 갖고 있지 않아.”
미나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의사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의료의 힘이란 정말 미미한 것이라고 생각해. 인간은 덧없는 생물이고 세상은 끝까지 무자비하고 냉혹해. 나는 그 사실을 여동생의 임종을 지켰을 때 정말 뼈저리게 느꼈어.”
잠시 입을 다문 데쓰로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무력감에 사로잡혀서도 안 돼. 그걸 가르쳐 준 것도 여동생이지.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산처럼 넘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말이야.”(p.260~261)
저자 : 나쓰카와 소스케(なつかわ そうすけ, 夏川 草介)
197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신슈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로 일하고 있다. 2009년 『신의 카르테』로 제10회 쇼각칸문고 소설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이 작품은 2010년 서점대상 2위에 올랐고, 이어서 출간된 『신의 카르테 2』, 『신의 카르테 3』, 『신의 카르테 0』을 포함하여 전체 32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인기에 힘입어 2011년과 2014년에는 사쿠라이 쇼와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으며, 2021년 도쿄TV에서 스페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 『신의 카르테 4』가 출간되었으며 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 나쓰카와 소스케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합친 펜네임으로, 나쓰는 나쓰메 소세키, 카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스케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소는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풀베개(草枕)」에서 따왔다. 단편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나쓰카와 소스케의 첫 번째 판타지 소설로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되었던 『은하철도의 밤』의 21세기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큰 화제가 되었다. 그외 단편 『시작의 나무』 등이 있다.
역자 : 박수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제1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회사생활이 힘드냐고 아들러가 물었다』, 『셰익스피어의 말』, 『잠 못들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혼자 공부하는 영어습관의 힘』, 『생각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