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 깊고 진하게 확장되는 책읽기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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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분류상 독서 에세이 혹은 독서 비평 분야로 나뉜다. 지금까지 책을 많이 읽고 쓰는 분들의 '독서 노트'나 '작가 수첩' 등을 읽어보면 주로 책을 쓴 작가들의 인삿말 정도가 많다. 모두 겸손이 밴, 자신을 낮추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본서(집필서)를 쓰는 과정에서의 짧은 소회 등을 주로 쓰고, 관례에 입각해 겸손한 자세의 글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독자는 작가들의 독서 노트를 읽는 이유가 평소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와 책을 읽을 때 어디까지 사유하나? 등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독자는 그러나 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들의 글이나 메모를 비평할 능력도 없거니와 읽은 책에 대한 즐거움 때문에 작가들의 메모를 거의 100% 신뢰한다. 

저자 김겨울의 첫 책 『독서의 기쁨』이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연서처럼 쓴 책이라면, 이 책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한 권의 책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밝힌다. 이 책에는 저자가 본능에 가까운 이끌림으로 선택한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네 편의 소설이 작가의 삶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깊고 진지하게 책과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독자가 짧은 메모를 읽으며 궁금해 했던 대부분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느낌이다. 저자는 운명, 고독, 시간, 상상 등 인간이 처한 조건을 다룬 이 네 권의 책을 토대로 독자와 함께 생각의 지도를 그려보며 새로운 생각의 싹을 틔우는 독서 노트를 공개하는 셈이다. 물론 공개의 또 다른 이유는 독자들도 무조건 책을 읽는 것보다 저자처럼 책의 내용은 물론 책의 주제에서 파생되는 확대 심화된 사유까지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독자는 이해한다. 

"책이 뻗어 보인 가지들에서 시작해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기를, 그렇게 가지를 뻗고 뻗어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까마득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따금 언어의 지평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란 저자의 작은 소망의 길에서 만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독자의 책 읽기 '텍스트'로 삼을 생각이다. 이번 재출간되는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2019년 출간 이후 독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스테디셀러를 저자의 전작 『독서의 기쁨』과 함께 리커버 세트(양장본)로 묶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던 초보 작가 시절의 저자의 바람도 책 읽는 기쁨을 더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로서는 재출간이지만 독자는 이 책을 처음 읽기 때문에 책의 신선함까지 읽어낸다.(사실은 독자가 과문한 탓이라 독서 지식이 지극히 짧아서일 것 같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독자들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는 이 책을 독서 텍스트로 삼기로 했다. 저자는 이번 리커버판 〈서문〉에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책이 단순히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신에게 비춰주었다는 것을 안다"고 전제한 뒤 "책은 전혀 모르는 곳으로, 혹은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몰랐던 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나녔음을 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곳'이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확대 사유의 끝, 주제에 대한 심화된 사색의 끝을 말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독서를 끝내고 비로소 자신에게 돌아온 후 되찾은 자신은 책 읽기 전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분명하게 작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못 느끼더라도 차곡차곡 쌓여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는 눈을 더 크게 해줄 것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2023년 출간한 『겨울의 언어』의 저자 소개는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고 말한다. '텍스트 속 타자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왔으므로 자신을 '텍스트가 길러낸 자식'으로 여겨도 제법 정당할 것이라고 여긴다." 집필했던 책의 내용도, 저자 자신도 서로서로 조금씩 발전해왔음을 느낀다는 표현이다. 책 속의 내용이 과장이나 왜곡은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또 한 문장, 한 문장에 대해 부끄럼보다는 이젠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다고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는 『독서의 기쁨』 출간으로부터 수년이 흘렀지만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생각(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는 지금도 큰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 체계를 갖추고 자리를 잡는다고도 밝힌다.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집필 '경륜'이 쌓이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 표현 하나하나에 조바심을 냈던 시절에 비해 당당해진 언어 사용, 또 책을 쓰면서 조금씩 늘어가는 삶에 대한 자신감이 오히려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다가왔으리라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의 "글쓰기, 책을 쓰는 것은 못내 부끄러운 일이다. 책에 저자의 결함이 행간에 묻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결함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끝내 책을 위한 시간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쓰는 자의 첫 번째 미덕이 성실함이라면 두 번째 미덕은 부끄러움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는 말에 응원과 찬사를 함께 보내고 싶다. 



이 책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저자가 읽고 사유를 늘린 네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다. 네 권의 책 모두 소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있고 베스트셀러 작가도 있다. 거창한 수상 이력이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에 읽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쁨으로 읽었다기보다 '진지하고 차분하게 감상한' 책들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등이다. 모두 본능에 가까운 이끌림으로 선택한 책들이라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여기서 '본능'이란 책을 많이 읽은 독자로서의 '촉'을 이를 것이다. 저자는 이 선택한 책들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고 나서야, 각각의 책들이 인간이 처한 조건 중 일부를 다루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가 깨달은 것들은 운명, 고독, 시간, 상상이라는 조건들이다. 저자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몸에 따른 고독, 그 몸을 가지고 통과할 수밖에 없는 시간, 그 안에서 만들어가야만 하는 운명, 그리고 삶에서 탈출하려는 혹은 변화시키려는 상상이라는 조건들은 비단 저자에게만 주어진 것들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네 편의 소설을 이러한 키워드로 읽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경험이라고 말한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들이 훨씬 더 풍요롭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저자는 독자들의 독서를 권유한다. 

이 책은 일종의 독서 노트지만, 저자는 책에 대한 감상에 그치지 않고 한 권의 책에서 가지를 뻗어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설명한다. 『운명』을 다룰 때는 나치에 대해서도 썼고, 『프랑켄슈타인』을 말할 때는 메리 셸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도 다뤘다. 『백년의 고독』을 이야기할 때는 시간에 대하여 썼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다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앞서 다룬 인간의 한계들을 뛰어넘으려는 상상에 관해 생각을 더했다.

개략의 설명을 끝낸 저자는 이제 이 책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를 쓴 목적(?), 집필 이유를 꺼낸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마음에서, 책이 완성되어 가면서 그 스스로 목표를 빚어냈다고 고백한다. 좋아하는 소설을 소개하고 그 소설이 어디까지 달려 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 생각의 지도를 함께 그려보는 일, 그것이 다시 삶의 어떤 자리에 자리를 잡는지 지켜보는 일, 그래서 조금이나마 쓴 사람과 읽는 사람에게 다시금 새로운 생각의 싹을 틔우는 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단순히 변화라기보다 확대됐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물론 저자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이 대목에서 독자들에게 하나의 소회와 함께 당부를 남긴다. 독자들은 이 탐색의 기록을 읽으며 하나의 생각이 어떻게 가지를 치고 다른 책으로 연결되는지, 책이 한 인간을 어디로 달리게 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저자는 이 독서 노트를 이용하는 방법을 꺼내놓는다. "목차에 있는 네 권의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읽거나, 이 책을 먼저 읽고 나서 네 권의 책을 읽는 것이다. 아니면 한 권씩 읽고 해당하는 장을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이 책이 뻗어 보인 가지들에서 시작해 새로운 가지들을 뻗어 볼 수 있다면, 그렇게 가지를 뻗고 뻗어 나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책의 소임은 다 한 것이다. 이 책이 여러분의 종착역이 아니라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어쩌다 보니 책을 이야기하는 일을 업의 목록에 추가하게 되었으나 저자는 어디까지나 일개 독자라는 사실에서 멀리 떨어져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유튜버로서 매주 영상을 만들며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공부하고, 말을 삼키며 보냈던 시간을 이 책으로 조금 변명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담아서 털어내는 말이다. 턱없이 부족한 지식으로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라고도 그간의 어려움도 삼킨다. 잔뜩 쌓인 기대를 앞에 두고, 비로소 이 책으로 부담을 내려놓는다며 홀가분함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탈고할 때까지 불안하고 기대되는, 복잡한 심정을 거침없이 내놓는다. '후련하다'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별것 아닌 일개 독자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일개 독자도 책을 읽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책의 축복이라고 책에게 슬쩍 책임과 영광을 떠미는 듯한 센스도 보여준다. 

이 책에 소개된 네 권의 책 가운데 독자는 불행하게도 한 권밖에 읽지 못했다. 다른 한 권은 영화를 통해서, 줄거리를 아는 정도고 다른 두 권은 읽지 못했다. 『운명』은 읽지 못한 책 가운데 하나다. 저자의 책 소개는 책 읽기와 연결되어 있다. 독자들의 눈을 잡아 끄는 글은 첫 페이지부터 눈에 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십여 페이지다. 이십여 페이지를 읽기 위해 우리는 앞의 삼백여 페이지를 끈질기고 끈질기게 읽어내야 한다. 이것은 독서라기보다는 '함께 살아내는' 행위에 가깝다. 페이지마다 통증이 골수에 사무치는 듯하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고통스러운 두 해를 산다. 물론 이 경험은 주인공만 한참 못할 테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겸허한 간접 체험자로서 주인공을 지켜본다."



『백년의 고독』은 네 권의 책 중 유일하게 독자가 읽은 책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는 1982년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독자로선 20년이나 지난 후 읽었지만 지금으로부터 생각하면 22년이나 지났다. 사실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주인공들 이름이나 줄거리조차도···.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 주며 일단 한 번 잡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소설"이란 당시 번역판의 소개글에 나와 있다. 더듬어 생각해보면 남아메리카를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 것은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강제 점령했다는 반증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사회적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의 이야기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슬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생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한다. 이 원시적인 마을은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번화한 도시로 발전했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부엔디아 가문과 등장인물 개인의 고독은 결국 빠져나갈 수 없는 돌고 도는 역사로 인한 고독이다. 이미 예언된 것처럼 마지막에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마르케스만의 영역을 인정받게 한 이유이라고 소개글에 나와 있다.

저자 김겨울의 평가는 조금은 시각이 다르기도 하고 다른 작품을 이용해 비유적 표현을 해주기에 훨씬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한다. "『백년의 고독』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환상처럼 존재했다 사라진 한 가문의 일대기가 지극히 초현실적이나 현실적이고, 덧없으나 영원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때로 어떤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생명을 얻어 끊임없이 회자되는 특권을 누린다. 이 권능은 작가를 뛰어넘어 그 스스로 생겨난다. 『이 작은 책은 늘 나보다 크다』는 줌파 라히리의 책 제목처럼, 실은이 책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가 그 스스로 생명을 얻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고 피가 직각으로 꺾어 흐르는 능청스러도록 이상한 세계, 이 세계를 여기서 전부 전달하려면 『돈키호테』를 처음부터 긑까지 똑같이 쓴 삐에르 매나르처럼 『백년의 고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 베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p.158~1159)


저자 : 김겨울


작가, 독서가, 애서가. 한때 음악을 만들었고 지금은 종종 시를 짓는다.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며 MBC 표준FM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 DJ를 맡고 있다. 『책의 말들』, 『아무튼,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철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텍스트 속 타자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왔으므로 자신을 ‘텍스트가 길러낸 자식’으로 여겨도 정당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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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다녀온 단테 - 후회와 절망을 기회와 희망으로 바꾸는 신곡 수업
김범준 지음 / 유노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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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다"라고 입을 모은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모든 시장에는 먹을 것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필수 물자들이 차고 넘친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풍요를 즐기는 데 덜함이 없다. 코로나 팬데믹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지혜롭게 넘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왜 살기가 어렵다고 할까? 사실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살기 좋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대마다 특수 계층에게는 살기 좋을지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늘 부족함으로 느끼며 온몸으로 일해서 겨우 하루 먹고 살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이란 사실 종교적 개념의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의 반대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극락'의 상대적 개념이다. 누구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다녀온 적 없는 현실에서 말하는 '상상의 세상'일 뿐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현실에서 지은 죄에 맞춰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기한 없는 고통의 세상이다.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 표제어로 보면 '단테'가 지옥에 다녀왔다. 단테(Dante Alighieri)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다. 단테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중세의 신학과 철학, 자연과학 등을 두루 배웠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싹튼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창작과 영감을 주고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로 삼았다. 

단테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피렌체의 행정과 외교, 군사 방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정쟁에 휘말려 1302년 추방당했다.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랑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작 『신곡』은 1304년부터 1320년까지 구상하고 썼으며,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이 각각 따로 출판되면서 계급을 초월하여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망명 유랑 시절에 쓴 『신곡』은 장편 서사시로 서가(序歌)를 포함해 모두 100개의 노래(시편)로 이루어져 있다. 3부작 1만 4233행에 이른다. 제명(題名)을 중세의 관용에 따라 『희곡(喜曲)』(Commedia)이라 붙인 것은 비참한 인상을 주는 것은 〈지옥편〉뿐으로, 나머지 〈연옥편〉, 〈천국편〉에는 쾌적하고 즐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에 나타난 주제는 사후의 세계를 중심으로 한 단테의 여행담이라고 한다.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의 저자 김범준은 「삶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으로」란 제목의 〈서문〉에서 신곡은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을 죄악과 고통에서 구원하는 여정을 다룬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사후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고 밝힌다. 단테 역시 승승장구하던 삶이 한순간에 모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피렌체에서의 추방은 그에게 절망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세속적 욕망과 허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구원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가장 어둡고 어려운 시기에 『신곡』이 쓰여졌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순례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 세계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추구한 것은 내세의 안락함이 아니라 현세에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올곧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단테에게 구원이란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과 연옥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세계관 속에서 이뤄진다.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전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을 품은 '살아남은 지혜'다. 그 깊이에 압도되기보다는 고전의 지혜를 자기 삶에 투영해 읽고 음미할 때 비로소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신곡 역시 마찬가지다. 신학적, 철학적 세계관에 경도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집중하고, 그 속에서 마주한 구절과 장면들을 내 인생의 좌표 위에 자유롭게 투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p.6~7)

이에 따라 저자는 이 책 『지옥에 다녀온 단테』 역시 기존 신곡에서 나타난 지옥, 연옥, 천국의 이야기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신곡이 전하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 흐름을 구성했다고 말한다. 다만 단테의 메시지를 정돈해서 전달하기 위해 전체적인 흐름은 지옥 편의 지옥 순서를 빌렸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옥, 연옥, 천국의 순서가 아닌 메시지와 연관 있는 소재를 가져와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밝힌다. 또 본격적으로 단테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전에 7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단테와 현시대의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 주고, 단테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내용의 흐름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차례의 제목들은 신곡의 대사를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알려준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지옥의 문턱에서 죽었다 살아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2장 「탐욕 지옥에서 버릴 줄 알아야 비로소 채워진다」, 3장 「분노 지옥에서 자만을 멈춰야 나를 살린다」, 4장 「폭력 지옥에서 말의 무게를 알아야 현재를 지킨다」, 5장 「배신 지옥에서 진실된 인생이 거짓된 인생을 이긴다」, 6장 「지옥 밖 문턱에서

희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위해서」 등이다. 각 장마다 3~6개씩 모두 30개의 소항목의 글이 단테의 싯구와 문장 등에 대한 풀이를 곁들이고 있다.

『신곡』에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루치아(시칠리아 섬에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사망한 순교자), 카론(바닥이 없는 쇠가죽 배에 죽은 자들을 태워 아케론 강에서 스틱스 강까지 건네주는, 즉 지옥행 배의 뱃사공), 미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섬의 왕으로 지하 세계의 심판관), 게리온(그리스 신화에 등장ㅇ하는 상상의 동물로 머리와 몸이 각각 3개인 괴물) 등 다소 낯선 신화적 인물들부터 헥토르, 카이사르, 호메로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실존 인물들까지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저자는 이 인물들 하나하나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신곡』을 읽고 감상하는 입장에서 연구자로 탈바꿈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는 작중 주인공 단테 역시 독자들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전한다. 오히려 단테는 『신곡』에 담긴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기만을 바랄 것이라고 저자는 알려준다.

그래도 세사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인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등이다. 『신곡』은 단테가 33세에 사후 세계로 순례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단테는 빛이 비치는 언덕을 향해 가려하지만, 정욕을 상징하는 표범, 교만을 상징하는 사자, 탐욕을 상징하는 늑대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때 단테 앞에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그가 평소 존경하던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나타난다. 그는 단테를 지옥과 연옥까지 안내한다. 이어서 단테의 뮤즈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던 베아트리체가 천국으로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여기에 '성 베르나르'의 도움까지 전해져 단테는 마침내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낙원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단테의 여행은 지옥에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상 최초로 '지옥 여행가'라고 말해도 될 듯하다. 단테가 말하는 지옥은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 희망 없음의 강도는 잔인하다. 지옥에서의 희망 없음이란 죽음의 희망조차 없음을 말한다. 즉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곳이 지옥이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가? 희망의 종류는 일단 무관한다. 희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최소한 지옥 같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저자의 암시다. 

지옥과 관련 예술품이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1871년 프랑스 정부가 화재로 타 버린 파리의 감사원 청사 자리에 미술관을 지으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르네 프랑수아 우귀스트 로댕의 작품이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수백 명을 조각했는데, 특히 지옥에 관련된 조각을 많이 해서였는지 〈지옥의 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출입구 위쪽 끝에 걸터앉은 사람이다.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이 남자의 정체가 단테라고 한다. 지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단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생각의 결과가 우리가 읽고 있는 『신곡』의 〈지옥편〉일 것이라고 저자는 귀띔한다. 단테는 수백 년이 지나 자신을 모델로 한 조각상이, 그것도 〈지옥의 문〉으로 이름 붙여진 출입구에 만들어질 걸 예상했을까? 신곡의 지옥 편에 나오는 지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 모두 희망을 버려라."

저자는 지옥이란 '희망 없음'과 동의어라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이 심해도, 괴로움이 극에 달해도, 희망만 있다면 그곳은 절대 지옥이 아니라는 반대 등식도 성립된다. 반면 즐거워도, 기뻐도, 희망이 없다면 그곳은 지옥 그 자체다. 지옥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자들을 보며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게 "어떤 고통을 받기에 지옥에서 이들이 이토록 처절하게 울부짖는지요?"라고 묻자 들은 대답 역시 그러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여기 있는 이들은 죽음의 희망조차 없다. 앞을 볼 수 없는 생할이 너무도 절망스럽기에 언제나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한다."



다음 다다른 지옥에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사나운 개가 있었다. 그 개는 일단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들어오면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음울하고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이곳에는 눅눅한 비가 사정없이 내린다. 비는 우박이 되고 눈이 되어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기도 하는데 이 비를 머금은 세상의 땅에선 이상하게도 악취를 뿜어낸다. 이곳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들어오는가? 

탐욕스럽게 먹는 자들이 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단테가 적었다. "너무하다, 먹는 것 까지 죄가 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먹을 때는 마음대로 먹지만 나갈 때는 편안하게 나가지 못하는, 소화 안 되는 음식을 먹은 느낌이 들 것이다. 소화가 되질 않으니 그 음식들은 고스란히 부패하여 몸속에서 차가운 기운만 남긴다. 그러니 그토록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단테를 향해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단테, 당신이 살던 도시에 한때 나는 아주 평온한 생활을 누렸소. 그곳 사람들은 아네게 '차코(돼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 정도로 잘 먹었다는 말이오. 하지만 그 빌어먹을 탐식은 결국 내 비참한 영혼의 이유가 되었소. 그리고 보다시피, 지금은 이놈의 비 때문에 녹초가 되었소." - 〈지옥편, 제6곡〉

이 지점에서 단테는 탐식이란 오만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을 때 생기는 죄악의 표출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비가 차갑게 내려 질척대는 지옥의 땅에서 뒹굴게 되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배고픔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피지 못하고 최소한의 따뜻한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벌인 것이다. 당시 중세 유럽은 일부 지배계층은 먹을 것이 남아돌았겠지만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매일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20세기 들어오기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기아와 싸우고 먹을 것이 모자랐다. 식량 부족은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단테와 그를 인도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가 "탐식으로 즉각적인 기쁨의 순간을 얻은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선명하게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같음을 보여준다. 늘 교훈적인 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동양 고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야기.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을,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내가 풍부하게 가진 여유를 부족한 그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탐식의 반대말은 금식이 아니라 '나누기'라고 저자는 말을 보탠다.




"일단 버린 것에 관해서는 권리가 없는 법이지요. 각자 자기가 해쳐 버린 육신은 나무가 되어 슬픈 숲에서 영원히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지옥편, 제6곡〉에 들어 있는 싯구다. 단테가 이야기한 곳은 지옥이었다. 일단 죽은 사람은 식물로 변신하여 숲에 떨어지게 된다. 식물로 변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숲은 삭막하다. 나뭇잎은 온통 검붉고 나뭇가지는 뒤틀려 있다. 자기 육체를 버린 사람들도 싹을 틔우긴 한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겨걱인 고통이 시작된다. 일단 하르피아가 등장한다. 하르피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물이다. 여자의 얼굴에새의 몸뚱이를 했는데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낮 동안 새순을 틔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노력하지만 밤이 되면 하르피아는 자살한 사람이 변신한 나무의 노고를 무시하고 갉아 먹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자에게는 자기 몸에 대한 권리가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의 주석을 통해 뜻을 확실하게 각인해둔다.

"생명이란 살아 있음을 명령받은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늘이다.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한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늘의 것을 살아 있는 동안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신성하며, 신성하기에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물리적이나 윤리적으로 빼앗거나 상해를 입힐 권리가 없다."(p.121)

지금까지 이 책에 나오는 30개의 메시지 가운데 2개의 주제를 이야기했다. 메시지가 전달되었을지 독자의 글 전달력 부족으로 자신은 없다. 다만 『신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언제든 『신곡』에 도전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이 책은 『신곡』으로 들어가기 전 미리 읽는다면 『신곡』에 대한 이해는 절반은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 : 김범준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한국기술교육대학교 테크노인력개발전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말투와 태도에 대해 연구하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삼성그룹, SK그룹, 현대기아차, KB금융 등의 기업과 서울시, 경기도, 한국과학기술원, 국방부 등의 지자체와 공공기관 그리고 고려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방대한 데일 카네기의 책 가운데 평생 적을 만들지 않는 불멸의 원칙만을 모아 지금 시대에 맞는 가장 현실적인 시선으로 정제하여 담아냈다. 소통, 관계에 대한 유쾌한 통찰로 정평이 난 김범준 작가는 직접 ‘데일 카네기 코스’에 참여한 뒤, 여기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최우선적으로 읽고 실생활에 즉시 사용할 만한 24가지 삶의 해법을 엄선했다. 인생의 시곗바늘이 오후를 향해 갈수록 타인을 향한 다정함이 낯설고 더는 혼자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꺼내어보기를 권한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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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와 유대인 1 - 세상을 이기는 위대한 지혜편 탈무드와 유대인 1
임유진 편저 / 미래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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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국민들에게 '탈무드'에 대해 물으면 대체로 '유대교 경전'이라는 답변이 쉽게 나온다. 탈무드에 대해 잘 알려진 셈이다. 과거에는 달랐다. 어린이들이 읽는 〈세계명작전집〉에 탈무드는 없었다. 〈그리스·로마 신화〉 〈이솝우화〉 〈안데르센 동화집〉은 있었지만 〈탈무드〉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이나 한국전쟁 당시 서양(미국)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서양문화 중심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독자도 탈무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자랐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겨우 '탈무드'란 이름만 들었을 뿐이다. 교양 필독서에 들어 있지도 않았고, 번역한 책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독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탈무드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서는 90년대 이후 우리의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나와서야 알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이 가장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다. 물론 이들의 국적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으로 명기했다. 그렇다 보니 역시 미국 국적자가 가장 많았다. 탈무드와 노벨상은 어떤 관계일까? 2000년대 들어서야 탈무드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탈무드(Talmud)는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사회의 모든 사상(事象)에 대하여 구전·해설한 것을 집대성한 책이라는 사전의 풀이로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우리 삶의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은 탈무드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태어나서부터 유대인들은 '토라'(구약성서 중 ‘모세의 5경’)와 탈무드를 모두 읽고 배운다는 것이다. 탈무드가 뭐가 적혀 있기에 그런가? 하는 의문을 가진 것도 이때쯤이다. 대체적으로 탈무드의 내용 중 일부를 뽑아 번역하고 해석해주는 책이 대다수였다.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유대교의 율법, 전통적 습관, 축제·민간전승·해설 등을 총망라한 유대인의 정신적·문화적인 유산으로 유대교에서는 〈토라(Torah)〉라고 하는 ‘모세의 5경’ 다음으로 중요시된다.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것(4세기 말경에 편찬)과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것(6세기경까지의 편찬)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혹은 ‘예루살렘 탈무드‘라 부르며, 후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라고 한다.



「세상을 이기는 가장 위대한 지혜편」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 『탈무드와 유대인 1』은 편저자 임유진(이하 저자)이 번역·해석을 달아 책으로 펴냈다. 저자 임유진은 〈서문〉을 통해 "유대인들은 〈탈무드〉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고 적고 있다고 말한다. 또 나날을 '오늘이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라고 명시하면서 책을 정원으로 삼고 즐기되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처럼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문〉에 따르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이다. 탈무드는 유대인에게는 소중한 삶의 지침서이자 경전이고 지혜서다. 불교와 유교가 한국 사람들의 정신문화의 뿌리이듯이 〈구약성서〉 중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혜의 바다이다. 〈탈무드 유머〉(이 책 시리즈의 2권)는 그 망망대해에서 떠올린 한 컵의 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 한 컵의 물속에 영롱하게 서려 있는 〈탈무드〉를 피력해 보고 시나고그(Synagogue)가 모태가 된 초대교회의 맥도 짚어 본다고 책 출간 취지를 밝힌다. 

출판사 소개글에 유대인은 세계적인 철학자와 예술가, 정치가와 상인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노벨상이 제정된 1901년부터 최근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살펴보면 유대인이 무려 20~30%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미국의 100대 부호 중에서 20%,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의 20%를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취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이들은 하나같이 탈무드를 옆에 두고 생활의 지침서로, 또한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민족성을 잃지 않고 단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탈무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탈무드는 250만 단어의 방대한 어휘로 이루어져 있으며 5,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쌓아온 지적, 민족적, 종교적인 유산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어려서부터 배움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배우고,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짜 맞추고 꿰뚫어 보는 힘을 기른다. 그래서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를 날카롭게 해주어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게 만든다.


저자는 탈무드의 내용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탈무드라는 지혜서를 통해 유대인들에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등식을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유대인이 어떠한 역사의 질곡을 거쳐 왔으며, 그 속에서 탈무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떻게 시련을 극복하고 지금의 성공을 이루었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다. 탈무드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무에서 유를 창출한 유대인들의 성공비결, 성공의 원리, 그 생존법 등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 사고방식을 확립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고 안내한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현재까지도 유대인의 일상에서 삶의 일부로서 실제적인 문제들에 적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탈무드를 읽다 보면 여호와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의 입장과 지으신 여호와 신의 입장을 오가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독자는 비종인이어서 저자의 주장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저자는 〈신약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다고 책에 서술하고 있다. 다소 과격한 주장도 이어진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신 여호와 입장에서 보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인간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르다고 저자는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전도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후 2,000년 동안이나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었을까? 600만 명이라는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였는데(제2차 세계대전을 가르킨다) 이성이 지배하는 20세기 문명인들이 저지른 과오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저자의 해석은 이렇다. "유대인들은 이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이는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토라〉의 가르침과 〈탈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또 유일신 여호와에 대한 명칭이 천주(하느님, 천주교), 하나님(개신교), 한울님(천도교), 대종교(한얼님)으로 각각 달리 부른다고 지적한다. 유일신 여호와에 대한 명명이 다른 것만큼 교회 간의 이질성 또한 심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토양에 떨어진 기독교라는 씨앗은 확장일로에 있다고 말(비판)한다. 타 종교에 대해 교회간 이질적이란 단어와 기독교가 확장일로에 있다는 비판은 저자의 주장이지만 선뜻 공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니(비종교인으로서) 양해 바란다.



탈무드를 배우려는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탈무드 사랑은 충분히 공감한다. 또 유대교에 대한 경의, 그리고 유대인의 핍박의 역사를 헤쳐나온 강인한 신념 등을 높이 평가한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세웠다는 '통곡의 벽'과 우리의 고구려 시대 광개토대왕을 오버랩시키는 점, 유대 민족의 선민(選民) 의식과 우리 민족의 백의(白衣)와 비슷한 자부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공감력이 떨어진다. 이 역시 독자가 종교에 대해 무지한 이유라고 너그러운 포용심으로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선민 의식은 자칫 편견이 되어 사람과의 화합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악한 독자의 단견(短見)이길 바란다는 의미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다고 그 옥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밝혀 알려주는 수많은 내용이 오늘날의 유대인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탁월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를 읽다 보면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을 확립시켜 주고, 그 뜻을 속 시원히 이해시켜 주기 때문에 흡족함을 느끼게 된다. 두뇌 회전이나 정신을 단련시키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책이 없다. 그래서 〈탈무드〉는 유대인의 혼과 같은 것이다. 원래 〈탈무드〉는 '위대한 학문' '위대한 연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탈무드〉는 흩어져 있는 유대 민족을 단단히 결속해 주고 유대민족을 포근히 감싸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위안을 준다. 〈탈무드〉에는 생활 규범이 있고 그 규범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자신에게로 전승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생각할 때 유대 민족이 〈탈무드〉를 지켜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무드〉가 유대 민족을 지켜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p.8)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한 굴뚝 청소부에게 2명에 랍비의 질문 에피소드를 이 책에서 소개한다.(탈무드 관련한 책을 한 번쯤 읽어본 독자라면 대부분 알 것이다.) 이처럼 〈탈무드〉는 상식적이면서 마음속의 맹점을 찌르는 머리 회전을 요구한다. 그래서 흔히 〈탈무드〉는 법을 논하지만 법전이 아니고, 역사를 논하지만 역사책이 아니며,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인명사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백과사전도 아니며, 그저 유대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지혜서의 구실을 할 뿐이다는 저자의 정의(定義) 올바르다고 독자는 믿는다.

특히 〈탈무드〉의 중요한 가르침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은 독자에게도 감명 깊다. 5,000년을 이어온 지혜서라면 마땅히 추앙되어야 할 말들이고 기록들일 터다. 그 지혜는 지식의 동화 작용을 거쳐야 자양분이 되고, 그 자양분이 나무를 성장하게 한다는 저자의 비유적 표현은 독자들을 즐겁게 하는 글이 된다.



이 책은 모두 2부 7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탈무드와 유대인〉, 2부 〈탈무드의 지혜〉이다. 1부에는 「유대인과 탈무드」「유대인의 상술」 등 2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2부엔 「탈무드의 지혜·눈」「탈무드의 감성·귀」「탈무드의 이성·머리」「탈무드의 오감·손」「탈무드의 전통·발」 등 5개의 장으로 눈, 이성, 감성, 손과 발 등으로 나뉘어 '탈무드의 지혜'의 원천과 지혜의 얻을 수 있는 에피소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 탈무드의 지혜와 상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수난의 역사보다 지혜의 축적 과정이 훨씬 오래됐다. 유대인은 수난의 과정에서 지혜를 축적해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노예에서 모세가 지금의 팔레스타인으로 함께 왔다. '모세 5경'을 경전 삼아 유대인이 그들의 종교를 유대교(시오니즘)라고 했고, 자신들이 일군 땅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서이스라엘 유대인이 살았다. 수난의 역사 후에 영광된 땅에서 잘 살았으나, 수난은 다시 찾아온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유대인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로마 제국에 복속된다. 이때 살아 남은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당시 세계관으로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일대)로 흩어져 살았다. 이 땅 없는 민족은 2,000년을 떠돌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600만 명이 희생되고서야 승전국인 영국에 의해 지금의 이스라엘의 땅을 마련해 살게 된다. A.D.70년부터 1948년까지 유대인 수난사를 여기에 적을 수는 없을 터, 제정 러시아가 볼셰비키 공산혁명에 의한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직전 유대인들은 직업이나 토지 소유를 철저하게 탄압받고 억눌려 살았다. 황제마다 돌아가며 유대인을 학살했고, 주거나 직업도 제한했다. 포그롬(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제정러시아에서 경찰이나 그 앞잡이들의 선동에 의하여 행하여진 조직적 약탈과 학살)으로 7만여 명이 죽었다. 직후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당 중앙위원 7명 중 트로츠키, 카메니프, 지노비에프, 스베르트로프 등 4명이 러시아 공산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공산당원도 전체의 70%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독자로서는 처음 들은 말이어서 유대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르크스 공산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가 유대인(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아버지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가슴에 유대인이라는 기장을 달고 다니게 하는 차별이 행해졌다. 로마 교황은 유럽의 모든 유대인드에게 황색 모자를 쓰도록 명하고 배지를 달고 다니도록 했다.



유대인들의 상술이 뛰어났다는 점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술이 뛰어나다'라고 하면 '거짓말에 능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정직과 신뢰를 상행위에 적용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물건값을 깎는 것을 싫어한다. 상품값을 깎는 것은 자기의 위신에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정가판매(定價販賣)를 실시했던 곳이 디파트먼트 스토어(백화점)이다. 티파트먼트 스토아란 미국에 와 있는 유대인들이 맨 처음 설치한 백화정밍다. 즉 상품을 정가대로 팔고 많은 물품을 다양하게 갖춘 상점이다. 컴블이니, 메이신, 니만마가스티 하는 디파트먼트 스토어는 모두가 유대인들이 경영한 곳들이다. 유대인들은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에는 손수레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수레 한 대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팔던 것을 나중에는 건물 안에다 가지런히 진열해 놓고 팔았다. 

유대인들이 장사꾼이 된 것은 살아나갈 방도가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허용된 비즈니스에도 한계는 많았다. 상류사회와 교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클럽에도 가입할 수 없었으며, 골프클럽의 회원도 될 수 없었다. 그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상거래였다. 


2부에 있는 5개 장 중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었던 글의 제목을 여기에 적어 본다. 탈무드나 유대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면 이해를 더하고 그들의 지혜를 가려 발췌해 갖고 있다면 역경에 부닥칠 때 참고 삼는다면 도움이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제목만 열거하면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문구들도 있으니 작은꺾쇠(「」)를 사용해서 각 소제목을 묶는다. 「‘7’이라는 숫자」「유대인들의 술에 대한 생각」「진정한 비즈니스」「유대인들의 맹세」「지도자의 자질」「부부 화해법」「불공정 거래」「소유권」「탈무드의 상도덕」「벌금의 규칙」「섹스에 대하여」「가장 안전한 재산」「상거래의 윤리」「선과 악」「혀의 좋은 때와 나쁜 때」.


저자 : 임유진


역사와 철학을 전공했으며, 동양의 역사와 고전에 담긴 지혜를 꾸준히 책으로 엮어냈다. 저서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가려 뽑은 『고사성어』, 고전에 담긴 옛사람들의 해학을 담은 『중국 역사 이야기』, 『36계 병법』 등이 있다. 인도와 중국의 선(禪)사상에 대하여 연구하며 집필 중이다. 한국청소년도서출판협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및 감사,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를 역임했으며 국가원로회의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중앙노동경제연구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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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긴 표제어를 갖고 있는 이 책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는 '나는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실존주의 철학' 하면 혀를 내두르는 독자로서는 표제어 중에서 '내 삶의 예술가 되기'란 표현에 매료돼 선택했다. 또 저자가 천경이라는 점도 독자의 선택에 힘을 보탰다. 독자가 저자 천경을 처음 접한 것은 전작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을 통해서다. 『니체의~』도 독자가 니체를 잘 알거나 좋아해서가 아니라, 표제어 중 '옆길'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니체에 대해 독자 스스로 본격 해석은 못해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적혀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옆길이 '아름답다'고 저자 천경이 표현한 것도 삶에 연결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능한 단어가 아닌가?라고 기대했다. 예상대로 저자가 니체 철학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생활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재미있게 풀어 썼다. 저자 천경은 〈서문〉에서 '옆길'이란 표현도 '오류'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면서 니체에 대한 존경심과 우리 일상의 연결 지점에 난 길이라는 의미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가벼운 스케치로 시작되는 『니체의~』의 이야기들은 매 편마다 매우 쉽게 읽히지만, 니체 철학의 깊이를 땀 흘려 담아낸 흔적이 돋보였다. 특히 비유와 상징의 문체로 쓰인 난해한 니체의 저서를, 일상생활에 적용해서 한 편 한 편 담아낸 이야기들이라 설득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저자가 저자 천경을 좋아하고 믿는 마음이 이때 확인됐다. 이때 독자는 저자의 삶의 통찰과 오래 닦아온 문장의 힘이 있어 깊이 매료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니체의~』의 문장 중에는 유머 코드가 행간마다 숨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쉽고 평이한 문장들과 일상생활에서 길어올린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각 장마다 영원회귀 사유, 힘에의 의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위버멘쉬(초인)와 인간 말종, 신의 죽음과 보편진리의 유무, 그리스도교의 폐해와 가치의 전도, 아모르파티(운명애) 등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니체 철학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독자가 책 한 권 읽고 니체를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저자 천경이 니체에게 가는 길 옆에 난 또 다른 옆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직접 알려준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철학자에게 다가가는 자신만의 길이 있구나···"라는 생각도 당시 처음으로 해봤다.



저자 천경은 2019년 미셸 푸코의 책 『주체의 해석학』을 접하고, 며칠 간 두문불출 이 책을 단숨에 읽고 매료됐다고 말한다. 이 책이 재밌어서라기보다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는 희망과 용기가 되는 말이다. 저자가 이번엔 미셸 푸코까지 소개해 준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저자는 먼저 이 책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 〈머리글〉에서 로고스(언어)는 지식의 방대한 축적이나 과시, 시쳇말로 잘난척하기 위한 매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로고스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장비(파라스케우에)였다고 털어놓는다. 로고스의 물질성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저자 자신의 삶에 실험했다고 말한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세미나를 진행한 점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또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세네카, 에피쿠로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헬레니즘·로마 시대 영적 스승들의 '자기배려'를 위한 구도의 삶에도 매혹되었다고 밝힌다.

독자로선 낯선 용어 '자기배려(자기돌봄)'란 스스로 만든 '명령적 정언'을 실천하는 것이란 해석도 덧붙인다. 외부의 가치기준에 기대지 않고, 개체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발명하여 역량을 펼쳐내는 삶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자기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며, 타자와의 관계 또한 동시적으로 문제시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새로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내가, 나 또는 타잗와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내가 변화된다는 것은 관계성의 변화와 동시적인 사태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에게 관계들이란 힘의 관계들이고, 힘 관계란 권력관계에 다름이 아니다. 삶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가 되는 이행 과정이며, 이는 권력관계의 새로운 양태를 발명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저자의 해석은 확대된다. 요가,명상, 공부, 생태학적 연대, 공동체의 실험, 귀농활동 등 다양한 실천이 요즘 많이 눈에 띈다고 지적한다. 이들 행위는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이라는 전 지구화된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의 품행을 스스로 인도하는 실천들이다. 이 실천들이 임계치를 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우리 시대에 힐링 산업이 번성하고 심리치료나 정신분석이 성행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이 우리를 번아웃과 정신병으로 내몰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고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다.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스스로 터득한 의례(리추얼ritual)들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은 익숙한 감정과 행동습관으로 자주 돌아가고는 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써야 했다'고 말한다. 말로만 해서는 몸에 새겨넣을 수 없어 써야만 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주체의 해석학』을 기본 교재로 〈천경의 미셸 푸코 읽기〉라는 연재를 내외뉴스통신에 시작했다. 로고스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장비'임을 실천한 것이다. 저자의 이 같은 실천 정신도 미셸 푸코의 실존의 철학, 실존의 미학에 영향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책에 따르면 푸코의 철학은 전기와 중기, 후기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1960년대로 지식의 고고학 시기, 중기는 1970년대로 권력의 계보학 시기, 후기는 1980년대로 주체와 윤리학 시기로 나뉜다. 그러나 이 세 시기는 불연속적이지 않다. 서로 증폭되면서 연결된다. 푸코는 프랑스 출신으로 1926년에 출생해서 1984년 58세에 병(AIDS)으로 사망했다. 『광기의 역사』(1961), 『임상의학의 탄생』(1963), 『말과 사물』(1966), 『지식의 고고학』(1969),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 1,2,3,4』(1976~1984) 등 많은 저서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5~1976), 『안전, 영토, 인구』(1977~1978),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1979), 『주체의 해석학』(1981~1982) 등 수많은 강의록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권력-지식'에 대한 획기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생전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영향력과 인기는 대단하다. 거의 모든 저서와 강의록이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의 위상과 관심을 반영한다. 니체의 계보를 잇는 푸코의 철학과 방법론은 현재에도 여러 인접 학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범죄자, 광인, 동성애자, 정치범 등사회적 소수자의 편에 서서 철학적 정신을 삶으로 연결하고 실천한 학자였다. 예를 들면 감옥정보그룹(G.J.P.)을 결성하여 수감된 죄수들의 열악한 인권과 처우 개선 활동을 벌이는 등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알려진 『감시와 처벌』은 국내에도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범죄자를 다루는 처벌권력의 방식과 근대적 개인에게 교묘히 가해지는 규율권력의 전략전술의 상관관계를 밝힌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이후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형성된 이 근대 권력은 폭력적이지 않으며, 비가시적이고 자동으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근대의 개인은 '순종기계'로 자기의 품행을 정립하게 된다. 또 하나의 걸작 『말과 사물』은 간단히 말해 무의식적인 에피스테미(인식틀)에 따라 특정 시기마다 각각의 특정 '지식-진리'가 구성된다는 것이 주요 논점이다. 이외에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행한 강의녹취록으로 통치성에 대해 다룬다. 이 책 제1부의 통치성 관련 논의는 대부분 이 두 권의 강의록에 기초해서 작성됐음을 저자는 미리 밝힌다.



중기를 거쳐 후기의 푸코는 '권력-지식론'에서 '주체의 윤리학' 쪽으로 이동한다. 후기에 몰두한 푸코의 작업은 역사상의 지식이 어떻게 성립했는가를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에 제한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어떻게 꾸며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 작업을 바로 ‘실존 미학(Esthetique de L’existence)’이라 부른다.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를 전문으로 했던 푸코는 이 실존미학을 완성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로 무대를 옮긴다. 타계하기 얼마 전 빛을 본 『성의 역사 2,3』과 이 책을 쓰던 무렵의 강의록인 『주체의 해석학』이 실존 미학에 몰두했던 푸코의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기존의 '권력론'을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푸코 철학의 세 시기는 서로 연결되면서 증폭된다. 

독자도 조금 어렵게 생각해 많은 페이지에서 사전을 찾아 의미를 꼼꼼히 해석하기 시작했으나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독자가 워낙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우선 저자의 안내대로 흐름을 읽히고 깊은 생각 없이 '흐름대로 읽으면 훨씬 나아진다'는 저자의 주문대로 실천했다. 쉽게 생각해 보면, 늘 우리 삶을 규정하는 규칙들이 있다. 국가의 법률, 교칙, 사내 규정, 종교적 교리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규칙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우리 삶을 꾸미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저런 규칙들을 떠나 늘 우리 삶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고민한다. 역사상 이런 고민의 모범은 바로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삶에서 발견된다.(저자가 앞서 헬레니즘·로마 시대를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겐 획일적으로 규칙에 종속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유인으로서 삶의 따라야 할 바를 독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렇게 실존의 방식을 창조하는 일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일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여기에 '실존미학'이라는 명칭이 붙는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진다. "주체가 자신의 실존 방식을 창안"해 내는 이 방식은 획일화될 수 없기에 푸코는 성윤리, 자기수양, 명상 등 삶의 세세한 영역에서 그것을 탐색해 나갔다고 저자 천경을 해석한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미셸 푸코 철학 총론, ‘통치성과 주체성’〉, 2부 〈‘실존의 미학’: 『주체의 해석학』 읽기〉, 3부 〈주체화의 기술들: ‘자기돌봄 실천의 방법들’〉 등이다. 각 부에는 여러 장(章)들로 이루어져 각 부의 의미에 맞게 기술되는 등 잘 짜인 구성을 갖고 있다. 1부에는 「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통치성과 주체의 ‘자기배려’」「정치가와 경제학자, 그리고 근대 영혼의 탄생」「이렇게 통치당하지 않을 기술」「푸코의 권력론과 주체의 윤리학」 등이 있다. 2부에는 「『주체의 해석학』이라는 책」「제2부 프롤로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글쓰기」「내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자기배려와 자기인식」「스님과 철학자와 아버지와 아들」「인간의 죽음, 그 이후」「양생, 가정, 연애 그리고 쾌락의 활용」「영화 〈거짓말〉, 사도마조히즘과 성적 쾌락」「돼지와 동길이는 어디로 간 걸까?」「세 가지 종류의 시간 이야기」「당신에게는 숨기고 싶은 우주의 진리」「자기배려와 자기계발」「인간도, 세상도 변하지 않을 거야!」「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공감, 자기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마법」「공부한다는 것: ‘줏대 없음’을 찬양함」「꼰대들과 전향들과 개종들」「오래전 그 사람」 등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주체의 해석학』의 내용을 잘 풀어 설명해준다. 3부에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휘폼네마타」「파르헤지아와 웅변술」「파라스케우에, 지금 이 순간 나를 돌보는 장비」「분노 다스리기」「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지금 당장 행복해지기」「여가시간 갖기와 공부하기」「기억 훈련과 습관을 혁명하기」「모욕 권하는 자에게 대처하는 방법」「삶을 길게 사는 방법」「죽음 명상하기」「당신, 잘살고 계신가?」「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야」「영성, 당신의 창조성과 접속하라」「에필로그: 뱀 이야기 그리고 붓다 되기」 등 재밌고도 기대되는 제목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모두 '푸코 철학', '실존미학', '자기돌봄 실천'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예술작품이란 땀의 흔적이며 고통의 기록이다. 규정에 갇히지 않으려는 해방의 몸짓이다. 예술가란 감각의 다른 문을 열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연습하는 자들이다. 지금과 다른 지각의 펼침을 모색하고 그것을 몸에, 목소리에, 화폭에, 문장에 기입하는 자들. 일상성과 동일성에 머물지 않기 위해 예술가는 몰입한다. 그것은 낡은 ‘보편’을 깨기 위한 작업이다. 몰입은 일순간 자기의 기존 감각 방식이나 신경회로 밖으로 나가는 고행이다. 그 숱한 고행은 지금 이 오감의 세계에 매몰된 자기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기존의 감각 회로나 신경 체계를 고장 내고 변형시킬 정도로 수련해서 다른 문을 열고 다른 리듬을 만들어 그것을 대상에 구현하려는 것이다.(p.37)



저자는 현재 우리의 욕망은 모두 단 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장과 부의 증식, 돈이 최고의 목표이며 가치가 된 시대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지점이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는, 나의 자율적인 선택이라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원망하거나 물리쳐야 할 적도 없고, 이런 삶을 강제한 가시적인 폭력도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강제의 시스템' 안으로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현실을 이 책에서 꼬집고 있다. 푸코의 시선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실존의 미학이란 “외부의 가치기준에 기대지 않고, 개체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발명하고 역량을 펼쳐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와의 관계’가 중요하며, 타자와의 관계 또한 동시적으로 중요하다. 실존의 미학이란 자기배려, 즉 자기 돌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권력관계의 새로운 양태를 발명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지금과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고타마는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를 깨닫고 붓다가 된다. 이 순간 붓다는 반얀나무에서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 걸까? 붓다는 자리를 옮겨 다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선정에 든다. 이렇게 7일씩 총 일곱 번 49일간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복습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고타마가 붓다가 되는 사태다. 이전의 내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의 존재 되기다. 이전에 방치했던 실존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가 고통과 위험으로 인지될 수 있다. 이름을 바꾸고 존재를 바꾸고 다른 역량을 증득하는 것이니. 고타마처럼 일시적으로 완벽하게 변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소한 변화도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p.337)


저자 : 천경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기자 및 편집장으로 일했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좋아한다. 현재 서울 홍대 인근에 위치한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미셀 푸코, 질 들뢰즈, 프리드리히 니체, 레비스트로스 등의 저서를 읽고 공부하는 <잡종의 책 읽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 브런치 사이트의 니체 철학 추천작가이기도 하다.

저서로 《고독 혹은 빨강색에 대하여》(시집)와 《키스해도 돼요?》(산문집), 《내 안에는 작은 아이가 산다》(산문집), 《주부 재취업 처방전: 내 안의 천재와 접속하기》(산문집)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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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철학 - 삶의 순간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열세 가지 철학
양현길 지음 / 진성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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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소통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SNS는 더욱 각광받았고,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실시간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얼핏 보면 지금 세상은 소통의 수단이 잘 발달해 외로움은 사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세상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주변에선 '외롭다'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외로움은 혼자 있기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이렇게 다양한 소통 창구를 갖고 있는데도 외로운 사람은 많다. SNS를 통해 소통을 하는 사람 가운데 오히려 더 많은 것 같다. 이 책 『홀로서기 철학』의 저자 양현길은 외로움의 이유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지만, 온통 밖을 향해 있는 관심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연결된 이들과의 관계에 더욱 매달리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더욱 거세게 다가올 뿐이다. 우리는 SNS에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한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추느라 자기의 삶과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했던 행위들이 도리어 나를 더 옥죄어 온다.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를 통해 외로움이라는 것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해소되는 감정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내 생각과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통 외부로 향해 있는 시선은 남들에게 의존하여 외로움을 달래기 때문에 더욱더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의존하기에 외로워진다는 말이다. 이는 외로움이 의존성과 연결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신의 삶에서 '의존'이라는 단어를 떨쳐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 나만의 세상을 여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갈수록 단단한 내가 만들어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끝에 '홀로서기'가 있다. 역사적으로 홀로서기에 가장 성공한 이들인 ‘철학자’의 생각과 그들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철학을 세울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에는 열세 가지 철학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저자는 기대한다. 이 책의 집필 취지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고뇌를 안고 삶과 마주했다.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물 흘러가듯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해 왔다. 열세 명의 철학자들이 마주한 ‘홀로서기’의 비결을 이 책에 담았다.



저자는 책을 펴낸 후 한 인터뷰를 통해 '홀로서기 철학'이란 말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내놓았다. "우리는 사람들과 이어져 있지만, 이와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비혼율은 높아지는데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혼자서 밥먹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의 또는 타의로 혼자 지내야 하는 순간들을 더 자주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홀로서기'라고 생각합니다. 홀로선다는 건 곧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존하지 않는 삶이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고, 설사 혼자가 되더라도 흔들림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홀로선다는 건 결국 남들로부터 영향을 덜 받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NS나 유튜브에서 보여지는 부자들과 엄청난 능력자들과 내 삶을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됩니다. 홀로설 수 있다면 내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사람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홀로서기란 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한 사람들 그리고 고독을 즐기면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생각을 제일 많이 한 사람들이 철학자들입니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할 때 철학자들의 삶과 생각들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철학자들과 홀로서기라는 주제를 엮어서 『홀로서기 철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4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한 삶에 대하여〉, 2장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에 대하여〉, 3장 〈물 흘러가듯 사는 삶에 대하여〉, 4장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삶에 대하여〉 등이다. 1장에서는 몽테뉴, 쇼펜하우어, 랄프 왈도 에머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실었다. 또 2장에는 카뮈, 빅터 프랭클, 헨리 데이비스 소로가 등장해 독자들에게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홀로서기'의 길을 제시한다. 3장은 장자, 노자, 에피테토스의 삶의 태도를 살펴보며 4장에서는 세네카, 사르트르, 니체 그리고 아들러가 삶과 홀로서기에 대해 함께가는 길에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저자는 「자기 자신이 먼저다」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홀로서기'에 몽테뉴를 올린다. 먼저 몽테뉴의 저서 『수상록』의 일부를 인용한다. "아무도 자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친구나 지인들에게 권세와 명예를 위해 애정을 베푼다면, 나는 모든 애정을 내 영혼과 나 자신에게 쏟는다. 새어나가는 애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충분하게 느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다. 타인을 위한 삶은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아 있는 인생만큼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자."(p.15) 

저자는 외로움은 쉽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제한 뒤, 세상에 혼자 있다는 외로움을 느낄수록 불안한 마음이 올라온다고 말한다. 이럴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신경 쓰여 선뜻 마음먹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혼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몽테뉴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때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스스로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해석해 주고 있다. 철학자 몽테뉴는 "나라는 존재을 아끼고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건 성스럽고 숭고한 일"이라고 표현한 데 대한 설명이다. 주변에 사람이 많더라도, 갑자기 혼자가 되더라도 상관없이 우리는 나를 향해서 숭고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몽테뉴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준다.

몽테뉴는 38세가 될 무렵 가족과 주변 친구들의 죽음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이때 몽테뉴는 15년 동안 맡았던 판사의 직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몽테뉴 성에서 높고 단단한 탑 건물 하나를 찾아냈다. '치타델레(Zitadelle)'라고 불리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몽테뉴는 홀로 책을 읽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일을 시작했다.

책에 따르면 몽테뉴는 결혼 생활을 비롯해 사회 속 시민으로서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고독한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몽테뉴는 10년이라는 세월을 탑에서 보냈다. 그리고 이 10년이라는 고독의 시간 동안 몽테뉴의 『수상록』 초판이 출간됐다. 자신을 향한 긴 시간 끝에 이르렀던 사유가 책으로 엮인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살아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 카뮈의 말이다. 그는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라는, 허무와 공허함의 인간을 창조했다. 뫼르소는 카뮈의 분신처럼 여겨진다. 저자는 카뮈와 뫼르소는 닮아 있다고 한다. 소설 속 뫼르소의 캐릭터는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가 느끼는 무관심과 무의미, 무가치한 태도들은 언뜻 보면 현실감과는 동떨어져 낯설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다가 나이가 들수록 느껴지는 씁쓸함과 공허해지는 우리의 모습은, 뫼르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에 따르면 뫼르소는 의도하지 않게 아랍인을 살인하게 되어 구치소에 수용되지만, 자신을 도와주려는 변호사와 재판관에게조차 귀찮다는 듯한 그의 태도는 결국 주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뫼르소의 행적을 보면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와 세상, 나와 나 자신, 나와 가족, 그리고 나와 연인 등, 마치 이 세상 전부와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뫼르소에게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한 곳이었다. 뫼르소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 관심 있던 것들로부터 무가치함을 느끼는 권태로움을 경험한다. 삶이 지루해지고 지독한 무기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먹고 자고 생활하는 삶을 살아가며 허망함에 허우적대는 것이다. 

이에 카뮈는 말했다. "삶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이유는 부조리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목적도, 결과도, 변화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에 절망조차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뫼르소의 이야기는 오늘날 평범한 사람의 직장생활을 떠올리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자가 임의로 조금 건너뛴 저자의 해석 저쪽 끝에는 우리 삶의 의미가 없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란 질문이 있다. 끝에서 우리는 답을 얻는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판단했던 것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온갖 것들이 사소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부와 명예는 가치를 잃는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정 원하는 것들에만 집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지금 당장 마음의 평온을 얻는 방법」에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등장한다.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 중에서, 세네카와 에픽테토스는 대조를 이룬다. 에픽테토스는 외적인 부의 축적이나 성공에는 초연해서 다만 가르치는 일에만 헌신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지만, 세네카는 로마의 사회적인 맥락에서 엘리트들이 걷는 길을 통해 명성을 얻고, 엄청난 부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에픽테토스는 "행복의 시작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면서 시작된다"는 말로 유명하다. 이 시기 로마 제국 초창기에는 후기 스토아 학파 세 명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치인이자 시인인 세네카, 노예출신인 에픽테토스,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다. 

저자는 3장에서 에픽테토스에 주목한다.(세네카도 4장에 있다) 저자는 에픽테토스를 설명하기 전에 '행복'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이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해질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교육의 유무와 관계없이, 내가 원하기만 하면 행복은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행복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에픽테토스의 삶 역시 그랬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함 삶을 위해 노력했다. 노예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 재능을 알아본 매우 관대한 주인 에파프로티토스는 그를 로마 유학까지 보내줬다. 에파프로티토스는 네로 황제의 행정 비서관이었다. 그때 스토아 철학을 배웠고, 로마 철학 교사가 되었다. 노예 신분을 벗어난 것은 물론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시대 철학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위협을 느껴 많은 철학자를 추방했다. 에픽테토스 역시 그리스의 서부 해안 도시 니코폴리스에서 철학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평정한 마음으로 위엄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때 뛰어난 제자들 중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있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재산,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니코폴리스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에픽테토스는 '평온함에 이르는 다섯 가지 방법'을 남겼다. 자세한 설명이 20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다. 

①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②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라

③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든다

④ 행복은 오직 내부에서만 찾을 수 있다

⑤ 홀로 설 수 있어야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4장엔 세네카가 실려 있다. 「죽음을 마주하고 삶을 가꾼다」 제목의 글이다. 세네카는 워낙 유명한 철학자이자 정치가여서 철학 책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귀족 출신이다. 저서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에서 "일평생 잘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뜻밖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평생 잘 죽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 양현길은 위 문장을 인용하며, 세네카는 '잘 죽는 법을 모르는 이는 잘 살지 못한다'로 풀이한다. 세네카는 항상 죽음을 탐구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주장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다. 그는 '삶을 바라볼 때 인생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일 뿐이며, 인간은 태어나는 나부터 매일 죽어가기에 항상 죽음을 연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저자는 세네카에게서 '좋은 삶'의 철학을 뽑아 독자들에게 알린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수십 억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싶고, 해외여행을 마음껏 떠나고 싶기도 하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기도 하고, 좋은 차와 집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매일 퇴사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열심히 출근한다. 책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기른다. 이 모두는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다. 이 모든 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원하는 마음이 집착하는 마음으로 변질될 때 문제가 생신다.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과도하게 마음을 쏟고 매달리게 된다. 결국 삶은 고통으로 가득해진다. 저자 양현길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 사상에서도 보이는 욕망, 집착, 고통 등을 연결하는 풀이를 이 대목에서 하는 이유는 굳이 철학을 하지 않아도,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독자 모두가 좋은 삶,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사상과 삶에 대한 관점은 저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 취지와도 같다. 


저자 : 양현길


‘회사는 무엇이고 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대학교 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단어에 꽂혀 영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내내 ‘대체 회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회사에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푹 빠져 살았다. 사회적 기업, 스타트업 투자사, 기술 스타트업을 전전하고, 현재는 마음을 케어하는 스타트업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처음 들어간 사회적 기업에 출근한 지 3개월 만에 대표가 미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 졸지에 대표 역할을 1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온갖 종류의 대표들 옆에 머무르며 회사와 나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 왔다. 스타트업의 특성인 불확실성을 한가득 안고 1년, 2년 다니다 어느새 8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아직도 주말만 되면 회사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회사와 나의 관계에 대한 글들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면서 치유의 시간을 갖곤 한다. 회사와 너무 멀어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도 안 되는 적당한 관계를 꿈꾸며 산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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