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게 두오! : 괴테 시 필사집 쓰는 기쁨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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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를 울게 두오!: 괴테 시 필사집』은 세계의 대문호 괴테의 시를 한 자 한 자 눌러 써가며 익히도록 한다. 시집 필사는 문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 수업 시절에 해본 경험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글과 문체를 갈고 닦아야 할 귀중한 시간에 왜 남의 싯귀나 문장을 필사했을까. 

아침 저녁 기온으로 봐선 딱 겨울이다. 지구 북반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겨울은 움츠리고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계절이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 지나고 기온도 영하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얼마 전 붉디 붉었던 잎파리들이 낙엽져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마침내 가지만 남긴 채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온몸의 받아 안으며 계절을 버틴다. 동물들은 물론 사람들도 따뜻한 곳을 찾아들면 밖에서의 하루 활동을 마감한다. 그렇지만 날씨가 춥다고 자연의 이치가 냉혹한 계절만은 아니다. 겨울만 이겨낸다면 나무들은 새잎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고 무성한 잎파리들을 다시 키워내 저마다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것은 아름다운 새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기후 변화로 이상 기온이 우리의 일상을 흐트려 놓기는 하지만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인간은 이미 터득했다. 가을에 수확한 풍요로운 먹거리로 저장해 놓고 오손도손 가족이 함께 먹는 즐거움은 부푼 행복감을 안겨준다. 

겨울에 아랫목에 누워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은 시처럼 아름답게 변한다. 대체로 그렇다. 감명 받은 시에서도,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시를 읽는 마음은 순수함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시에서 받은 감동은 오래 지속되나보다. 이 책의 표제어가 된 「나를 울게 두오!」는 대문호 괴테의 시의 제목이다. 시에 쓴 싯구로 제목이 되었고 책의 표제어가 되었다. 이 제목으로 인해 아름다운 싯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하고,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지 충분히 추정할 만하다.

나를 울게 두오!

끝없는 사막에서 밤에 에워싸여 울게 두오.

낙타들이 쉬고, 몰이꾼도 쉬고

아르메니아인 조용히 앉아 돈을 헤아릴 때

나, 그 곁에서 먼 길을 헤아리네.

나와 줄라이카를 갈라놓는 먼 길,

그 길을 더 길게 늘리는 야속한 굽이굽이 자꾸 되풀이되네

나를 울게 두오!(P.276, 이하 생략)


책의 〈추천사〉를 쓴 장석주 시인은 이 시를 읽으면 언젠가 파주 출판단지 안에 있는 한 디자인 회사 건물의 '울기 좋은 방'을 떠올린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그 건물에 있는 방 이름이란다. 천창으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그 작은 방은 장식도 기물도 없이 텅 빈 채로 손님을 맞는다고 한다. 단순 소박한 그 방에 들어선 순간 시인은 울고 피어졌다.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울고 나면 가슴에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겨 나갈 것만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괴테의 말처럼 울고 싶을 때 우는 건 수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자기감정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선량한 사람일 것이라고 시인은 읊조린다. 밤의 사막 한가운데서 혼자 우는 사람이 그렇듯이. 시인은 그렇게 어느 호젓한 저녁, '울기 좋은 방'을 떠올리며 「나를 울게 두오!」를 읽는다. 쓰러진 자에게 일어설 용기를, 복잡한 감정을 단순하게 만들 영감을 주는 시에 진실로 감사하며!

이 책은 괴테의 시 100편이 독자들의 필사를 기다리며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괴테가 누구인가. 우리 독자들은 그의 시를 한두 편 읽어보지 않은 이들은 드물다. 그만큼 괴테의 명성이 자자해서겠지만 그의 싯구는 격언으로도 많이 쓰이는 아포리즘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격언이나 싯귀가 괴테의 시에서 인용한 아포리즘이란 걸 발견하면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짓는다. 이를테면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고"(「라인강과 마인강」),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서 그럴 것이다. 

역자 배명자도 여담이라고 가벼운 말을 건넨다. "눈물 젖은 빵"을 "눈물 젖은 밥"으로 바꿔야 하낟. 잠깐 고민했었다고 고백한다. 아마 번역자로서 더 적합한 단어 찾기, 혹은 독자에게 더 적절한 단어로 바꿔 전달해야 하는 번역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역자의 고민도 잠깐 '눈물 젖은 빵'은 이미 관용구로 굳어졌다고 그대로 쓰기로 했단다.

역자는 이 책의 시 중에는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고 귀띔한다. 시 「보물 찾는 이」에는 "내 영혼을 가져가라! 피로 계약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면서 피로 서명하는 장면과 연결된다고 독자들에게 슬쩍 내민다.


텅 빈 주머니와 병든 가슴으로 

긴 세월 힘들게 버텨왔다네

가난은 가장 큰 고난

부유는 가장 큰 재산

나, 고난을 끝내려 보물을 찾아 떠났지

"내 영혼을 가져가라!"

피로 계약했네(p.134, 이하 생략)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판에 붙인 시」는 '2판'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1판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자살하는 젊은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2판 앞머리에 이런 시를 넣은 것이다.

보라, 그의 정신이 무덤에서 그대에게 손짓한다

사내답게 살라고, 나를 따르지 말라고

-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판에 붙인 시」 중에서


인류의 스승으로 꼽을 만한 독일 문학의 거장은 누구인가? 우리는 가장 먼저 괴테를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그와 견줄 만한 위대한 작가는 찾기 힘들 테다. "우리들의 정신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 존재, 영원에서 영원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활동"이라고 굳게 믿은 작가! 괴테에게 문학이란 창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문단은 시인 장석주가 〈추천사〉에 쓴 첫 단락의 문장들이다. 장석주 시인에 따르면 괴테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족함이 없은 환경 속에서 모국어는 물론이거니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히며 성장했다. 더 큰 행운은 성서와 히브리어, 이디시어를 익히면서 더 너른 교양과 지식을 쌓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집안의 장서들과 다양한 언어 습득은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세련된 취향과 예술적 영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부러운 마음을 전한다.

괴테에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향한 열정과 호기심, 명석한 분별력, 좋은 영향력을 제 것으로 취하는 재능이 넘쳤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가 명석함에 더해서 예술의 소양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되는 천혜의 환경을 만난 것은 그의 축복이라고 한다. 일찍이 철학, 음악, 미술 등에 걸쳐 고루 교양과 지식을 갈고닦으며 천부적 재능을 꽃피울 날을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25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써내며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친 뒤, 반세기가 넘는 세월에 걸친 노력 끝에 『파우스트』라는 대작을 완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그의 약력을 소개한다.

시인은 소년 시절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괴테의 시는 「휴식」이란 시라고 밝힌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빠져서 여기 소개하지 못한다. 시인은 괴테의 시에서 심장 떨리는 벅찬 기쁨을 맛보고, 고전의 향기와 웅장한 영혼의 울림을 느끼며, 비로소 괴테를 소설가로만 알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괴테는 타고난 직관과 상상력으로 만물에서 시적인 영감을 구한 사람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곱 살에서 인생의 만년까지 겪은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시에 온전하게 녹여내는 창작을 쉰 적이 없었다. 괴테의 서정성 짙은 시들을 가사로 삼은 슈베르트와 모차르트의 가곡들이 당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시성(詩聖)이라는 면류관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입증한다고 강조한다. 시인은 괴테의 "당신이 그리워/한밤중에 흐느껴 울었지요"(「헛된 위안」 p.212)이라는 시 구절을 읽으며 깔짝 놀란다. 인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존재라는 것, 괴테같이 위대한 인간조차 한밤중에 흐느낀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놀라움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리움이란 아무 조건을 붙이지 않은 자기 증여의 내밀한 형식일 터다. 아울러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증거,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무작정 보낸 상태. 마음이 상대에게 가닿았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상태일 때 생기는 아스라한 감정이다. 

사랑하지 않은 자에겐 그리움이 깃들 여지도, 사랑의 상처가 생길 까닭도 없다. 그리움은 막막하고 마음에 고통의 자취를 남긴다. 그래서 괴테는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나의 아픔을 알리라!"(「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p.160)라고 썼을 거라고 말하며 탄식한다. 나는 언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울었던가?

이 책 『나를 울게 두오!: 괴테 시 필사집』은 바이마르 초창기부터 생애 끝자락까지 쓴 괴테의 시 가운데 100편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시마다 더욱 깊이 있게 숙독할 수 있도록 필사란을 마련하였기에 음미하고 마음을 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산다는 것에 대한 찬미, 첫사랑을 위한 노래, 고전의 아취, 인생 경험에서 길어낸 자양분을 머금은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진 괴테 시집을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필사하는 시간, 자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멋진 투자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어떤 운명이라도 좋다! 오라, 운명이여, 몇 번이라도 좋다!” 괴테는 시를 통해 자칫 무르고 약해지기 쉬운 우리에게 운명에서 도망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고 권한다. 이런 의연함이 더욱 간절한 요즘이라면, 무의식적인 정신의 풍부함을 만끽하면서도 그 자발성을 파괴하지 않고 거기에 성찰의 빛을 부여한, 독일 최고의 지성, 대문호 괴테의 시를 추천한다.


저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자 : 배명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8년간 근무했다. 이후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져 독일 뉘른베르크 발도르프 사범학교에서 유학했다. 현재 바른번역에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비투스』, 『호르몬과 건강의 비밀』, 『밤의 사색』 등 8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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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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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소설 작품 『죄의 끝』은 세기말, 인류의 종말을 연상케하는 아포칼립스 세상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말 그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년 후 아메리카 대륙이 지리적 무대다. 2173년, 지구에 소행성 나이팅게일이 충돌하며 그 파편들로 전 세계는 초토화되고 만다. 정부는 피해를 받지 않은 지역을 「캔디선」으로 경계를 나누어 관리하고, 영하 40도의 혹한과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해 캔디선 바깥의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된다. 결국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을 감행하고, 살기 위해 식인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한 존재에게 구원받길 원하게 된다. 그렇게 세상을 구원할 식인의 신, 「블랙라이더」 너새니얼 헤일런이 탄생한다. 이 소설은 종말 이후 세계에서 신화가 되는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끔찍한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놀라운 대활약의 나날에 이르기까지 저자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상상력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다 보면 어느덧 결말에 이른다.

저자는 〈나오키상〉〈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일본 서점 대상〉〈와타나베 준이치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SF소설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 『류』에서 보여주듯 미래 세계의 역사를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소설 『죄의 끝』 역시 출간 직후 "끔찍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적인 정취를 잃지 않은 따뜻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제11회 〈중앙공론문예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인용되는 점도 흥미롭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을 성경 이후의 세계로 그리려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민경욱 역자는 「잿빛 황야를 가로지르는 SF 묵시록」이라는 제목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종말의 세계에 대만인 아버지와 라오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뉴저지주에 사는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란 네이선 발라드"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쓴 글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전해지는 형식을 취한다. 액자소설 구성 형식이다. 너새니얼 헤일런의 일생을 취재하는 과정을 논픽션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신약성경의 구원자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인류 멸망 이후 캔디선 내부에서 부흥하게 된 백성서파 교회는 혼란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구세계의 범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킬러 「화이트라이더」를 캔디선 바깥으로 파견한다. 백성서파 교회의 네이선 발라드는, 살해 명단에 오른 너새니얼 헤일런을 화이트라이더와 함께 뒤쫓는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될수록, 캔디선 안에서는 끔찍한 살해범이라 알려진 너새니얼이 캔디선 바깥에서는 인류의 구원자로 칭송받는 이유를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관한 생각이 점차 바뀌게 된다. 과연 너새니얼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러 지상에 도래한 ‘신의 사자’일까? 아니면 괴이한 논리를 펼치며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범’일까?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를 죽인 냉혹한 존속 살인범이 중남부 일대에서 구세주로 널리 숭배되었다."(p.11) 이 살인범은 죽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가 베푼 수많은 기적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어 500명의 배를 채웠다. 홀로 백성서파의 킬러들, 즉 화이트라이더를 차례로 처치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적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가 치유되었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다. 등등. 예수가 로마 제국 초기 세상에 등장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설명한 대로 소설의 앞부분에 있는 〈서문〉에서 블랙라이더의 전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액자소설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야기의 화자는 화이트라이더 네이선 발라드이고, 소설의 주된 내용은 블랙라이더 너새니얼 헤일런의 활약하는 모습이다. 즉,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구원자로 떠올랐으며 어떤 활약을 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네이선은 책을 출간한다. 책의 〈서문〉은 네이선이 출간간할 때 내용만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해 책을 쓴 이유를 추가한 부분이다. 2175년 7월 뉴욕에서 책이 출간됐으며 이 책은 인류의 종말 전후의 과정을 저자 네이선 발라드가 취재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담아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서문에 따르면 네이선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18년전 네이선은 18년 전 아내를 잃었다. 백성서파가 의뢰한 임무로 뉴욕을 떠나 있던 13개월 동안 아내 마리앤은 다름 아니라 그 백성서파의 목사에 의해 산 채로 등유를 뒤집어쓰고 불에 타 살해당했다. 교회의 연락을 받은 발라드는 빌 개럿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밤새 얼어붙은 뉴멕시코주의 황야를 달려 뉴욕까지 왔다. 그러나 지진과 눈보라, 이어진 습격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두 달 뒤에야 간신히 뉴욕에 도착하는 바람에 발라드는 아내의 시신을 보지도 못했다. 

네이선의 머릿속은 '복수'라는 두 글자로 가득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케네스 모리아는 이미 법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목사였던 그가 어떻게 가련한 여자들에게 독니를 드러냈을까? 네이선은 가톨릭 신자였다면 바닥이 푹 꺼지는 참회실 같은 소도구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짓 말한다. 신부가 바닥의 버튼을 누르면 참회실 바닥이 덜컹 열리고 사냥감이 바닥 아래 감금실로 낙하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없었다. 모리아는 어설픈 수작 없이 여자들에게 접근했다. 즉 예배가 끝난 뒤 여성들을 불러내 수면제를 탄 홍차를 마셔 잠들게 한 후, 침대에 묶고 악마 같은 욕망을 채운 것이다. 열두 명의 여성이 그의 독니에 걸렸고 마리앤은 열한 번째 희생자였다. 마지막 피해자가 운 좋게 탈주에 성공한 덕에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책에는 모리아가 판사에게 털어놓은 이상 성욕은 말 그대로 엽기적이다. 그는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침대에 묶인 여성들에게 불을 붙여 불덩이가 되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자위를 했다. 불길에 의해 정화된 여성들을 '신의 디저트'라고 불렀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백성서파 신자들 손에 죽었는데 성기만 탄화되어 시커멓게 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네이선의 정신은 무너졌다. 격렬한 착란 상태를 거쳐 끝 모를 허무함에 사로잡혔다. 서문에는 네이선 자신의 착란 상태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 증상을 보여주며 기술되어 있다. 이때 네이선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약 마리앤이 케네스 모리아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살해된 것이었다면 충격이 덜했을 것 같다고 되뇌인다. 〈뉴욕 타임스〉 기자로 일하는 오랜 친구 잭 매코믹이 그런 네이선을 보다 못해 캔디선 밖을 여행했던 경험을 책으로 써보라고 권유한다. 모든 창작 활동은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면서. 

네이선의 복수심에는 이유가 있다. 구세계의 식인귀 대니 레번워스를 쫓아 1년 이상이나 캔디선(2175년 제롬 캔디가 설정한 전체 길이 900km에 달하는 구호선으로 동부 정부의 병력, 경제력, 인구 지지력을 바탕으로 해당 범위를 산출했다) 밖의 공기를 맡은 탓인지, 자신의 안에는 굶주림을 견디기 위한 희생은 우주의 커다란 진리의 일부로 자라있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친 목사의 자아와 성욕을 채우기 위한 죽음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부조리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네이선은 얼이 나간 상태로 10여 년을 지냈다.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채 심야를 배회하고, 싸움질에, 운 좋게 술이 생기면 있는 대로 다 마셔버렸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날들이었다.

즉각 잭의 조언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마 도슨과 만남 이후로 네이선은 잭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캔디선을 경비하는 주병(州兵)으로, 얼마 전 월경자와의 처절한 전투에서 연인을 잃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단체 상담에 함께 참여했다가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아름다운 여성으로, 발라드의 여행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서로의 마음을 허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발라드는 말한다. 발라드에 따르면 전 아내였던 마리앤과 지금 만난 여성 에마는 정반대 타입이다. 두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발라드의 말도 매우 흥미롭다. "마리앤은 살랑살랑한 봄바람 같은 옷차림을 좋아했는데 에마는 늘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카고 바지에 카키색 밀리터리 재킷을 입었다. 마리앤과의 섹스는 배려로 가득하고 평온했는데 에마는 야생마 같았다."

네이선은 에피소드를 하나 덧붙여 소개한다. 에마와 이스트강 변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놓은 덧에 고양이 한 마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사경을 헤매는 고양이는 사력을 다해 오히려 위협적인 행동을 취했다. 뒷다리는 이미 시커멓게 괴사했고 허리까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에마는 조용히 고양이를 내려보다가 느닷없이 품에서 글록을 꺼내 고양이의 머리를 쐈다. 네이선은 이미 자신이 겪은 캔디선 밖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만큼 생각이 바뀌어 있다. 

네이선은 캔디선 내부에서 아사와 동사의 걱정 없이, 선악을 쉽게 재단하며 살아왔다. 네이선은 일개 범죄자에 불과했던 너새니얼이 어떻게 바깥 세계의 구원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따라간다. 네이선은 처음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던 알을 깨고 나와 캔디선 바깥의 현실을 똑똑히 목격한다. 동시에 악한 범죄자를 처단하는 일이 ‘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신념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 책 『죄의 끝』은 멸망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주인공이 아닌,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는 인물을 화자로 설정해 가상의 청자와의 간극을 극단적으로 좁혀 독자로 하여금 네이선에게 깊이 이입하게 한다. 네이선은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이 중요해진 세상에서, 극한에 몰린 인류가 어떻게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냈는지 그 역사의 필연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투명하고 이성적인 시선은, 독자를 『죄의 끝』의 세상으로 깊이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작중 네이선의 고민은 곧 현재를 사는 우리의 고민과 같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는 과연 불변의 가치인가?’, ‘선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하나의 물음을 낳는다. 대체 우리는 이 혼란한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믿으며 살아가야 할까? 이 작품을 읽고 독자는 캔디선 밖의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과정에서 인류 문명이 선한 가치관과 희망의 세계관을 갖고 제대로 발전해 왔는가를 묻는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소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한 이들에게 너새니얼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을 먹었으면 두 사람을 구하라.” 최소한의 인간성을 저버린 채 식인을 한 이들은 너새니얼의 이 한마디에 구원받게 된다.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아픈 사람을 치료하거나 아사하는 이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붕괴한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마을을 건립한 너새니얼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되었어도 우리는 그냥 우리로 있을 수밖에 없어.” 엉망이 된 세계에서 ‘구원과 희망’은 대단치 않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 피어난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면, 구원의 불씨는 곧 거대한 희망의 불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다만 올바른 방향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는 어려울 뿐이다.


저자 : 히가시야마 아키라(ひがしやま あきら, 東山 彰良, 본명:王 震緖)


1968년 대만 태생. 다섯 살까지 타이베이에서 지낸 후 아홉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때부터 후쿠오카 현에 거주하고 있다. 2002년 「터드 온 더 런」으로 제1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은상과 독자상을 수상했고, 2003년 이 작품을 고쳐 쓴 『도망작법』으로 데뷔했다. 이후 2009년 『길가』가 제11회 오야부 하루히코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블랙 라이더』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14년’ 3위와 제5회 ‘AXN 미스터리 싸우는 베스트 텐’ 1위를 동시에 차지하며 일본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2015년 『류流』로 “20년만에 한 번 나올 만한 걸작”이라는 최고의 호평와 함께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하며 “지금 일본에서 가장 세계에 근접한 작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 밖에, 2016년에 『죄의 끝』으로 제11회 중앙공론문예상, 2017~2018년에 거쳐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으로 오다사쿠노스케상, 요미우리문학상, 와타나베준이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에도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역자 : 민경욱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관련 회사에 근무하며 1999년부터 일본문화포털 ‘일본으로 가는 길’을 운영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문번역가의 길을 걷고 있다. 또 일본 관련 블로그 ‘분카무라(www.tojapan.co.kr)’를 운영하며 일본문화 팬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요시다 슈이치의 『거짓말의 거짓말』, 『첫사랑 온천』, 『여자는 두 번 떠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11문자 살인사건』, 『브루투스의 심장』, 『백마산장 살인사건』, 『아름다운 흉기』, 『몽환화』, 『미등록자』, 이케이도 준의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사카 코타로의 『SOS 원숭이』, 『바이, 바이, 블랙버드』, 누마타 마호카루의 『유리고코로』,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야쿠마루 가쿠의 『데스 미션』,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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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 - 리스본에서 피니스테레까지 순례길 700km
정선종 지음 / 작가와비평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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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나이로 들어서면서 그나마 아침마다 한 걷기 운동도 최근에 거르기 일쑤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정말로 걷는 일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나이가 들어서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근력이 떨어져 운동은커녕 걷기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얼마 전 건강 관련 책에서 읽은 건강 지식이다. 걷기는 모든 운동의 기본이 되기도 하고, 또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적절한 운동으로 많이들 하는 것 같다. 뛰는 것과 직접 스포츠에 참여하는 일이 힘들어질 경우 걷기는 최소한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의사들의 한목소리다. 걷기는 힘이 비교적 덜 들고 속도나 운동량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에 노년의 운동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은 유럽의 곳곳에 산재한 성지 순례길을 걷는 70대의 한 순례객의 완주기다.

사람은 매일 걷는다. 출근을 위해 또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디론가 향하기 위해 우리는 걸어야만 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다. 걷는 동안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걷는 이의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길은 다르게 다가온다. 이러한 걷기의 미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길은 단연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이 책 『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의 저자 정선종은 말한다.

이 책은 산티아고로 향한 두 번째 여정을 담은 여행에세이이다. 걷기에 빠진 저자가 “나는 왜 걷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산티아고를 거쳐 땅끝마을 피니스테레에 이르기까지 36일간 걸은 700km의 순례길을 생동감 넘치는 문장으로 담아냈다. 저자가 찍은 사진과 함께 동반자인 아내의 스케치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포르투갈 길의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저자는 「나는 왜 걷는가?」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한 부류는 산티아고 길을 걸은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그 길을 걷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을 한 번도 걷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산티아고 길을 한 번만 걸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독자는 이미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어 700~800km에 달하는 순례길을 걷기에는 체력에 자신이 없어졌는데 저자는 평생 걷기를 즐겨 하신 분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는 평소 30분 걷기도 힘들다고 최근 산책을 겸하는 그 시간을 버텨낼 정도의 체력도, 자신감도 이미 소진됐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그 걷기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평소 다니던 의사의 권고로 시작했었다. 젊었을 때는 체력은 되지만 시간 탓하며 못 걷고, 나이 드니 이젠 체력이 안 따라준다. 이 책의 저자에 비춰볼 때 몸 관리에 성실하게 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에는 걷기에 대한 자세부터 바뀌어야 할 듯하다는 느낌이다. 저자는 자신의 건강 관리를 위해 걷기를 시작한 것은 맞지만 다른 어떤 일도 앞서서 걷기가 생활에 일부로 만들었으나, 독자는 시간 날 때 타인의 권유로 짐짓 걷기를 해본 척했다는 자책감마저 든다. 저자의 걷기 예찬은 이 책 끝날 때까지 계속될 터이니 잘 읽고 걷기에 대한 영감이라도 얻어 30분 걷기를 다시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걷기의 속도로 천천히 읽어나간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스본에서 출발해 목적지인 피니스테레까지 700km를 도시 구간별로 나누었다. 1장 「Before the Camino」, 2장 「Lisboa~Tomar」, 3장 「Tomar~Porto」, 4장 「Porto~Tui」, 5장 「Tui~Santiago 그리고 Finisterre」 등이다. 모두 원어로 표시돼 있어 읽기 불편해도 책을 읽어나가면서 불편함은 해소될 것이다. 1장은 본격적으로 걷기 전의 이야기로 저자와 포르투갈의 인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 2장부터 5장까지는 설렘과 고난이 교차하는 순례길 위의 이야기이다. 출발지인 리스본부터 토마르, 포르투, 투이를 지나 목적지인 산티아고, 그리고 덤으로 걷는 길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 매일의 기록을 특유의 솔직담백한 문체로 담아냈다. 독자 역시 전문 글쓰기 작가가 아닌 저자의 소탈한 문장과 함께하며 유쾌한 시간을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두 번째 도전이다. 그러나 걷기는 국내 및 미국 등 해외 유명한 길을 모두 섭렵할 정도로 오랜 기간에 걸쳐 걷기를 삶의 일부로 실천했다. 부록으로는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 방법과 장비, 역사가 실려 있으며, 날짜별 루트 요약도 있어 전체 여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여행정보를 담은 여행 안내서가 아니다. 저자가 현직(삼성전자 포르투갈 법인장)에 있을 때 딸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는 비극적 경험 이후 30주년 되는 해 이 길을 다시 선택한 것은 이번 순례길이 단순한 여행의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김낙희(토마스) 전 제일기획 사장은 〈추천사〉를 통해 저자의 딸에 대한 추모와 사랑을 담은 여정이라고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번 산티아고 길은 당초 2020년 봄, 칠순을 기념해서 걷기로 예정했지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 팬데믹에 의해 가로막혔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리스본 직항편을 운항하던 아시아나 항공도 비행기 길을 취소했다. 저자는 이 팬데믹 기간을 오히려 국내의 길을 더 걷는 기회로 삼았다. 4년간 코리아둘레길 가운데 해파랑길 750km, 남파랑길 1,470km, 서해랑길 1,800km를 걸었다. 또 지리산둘레길 300km도 걸었다. 이제 나이도 70을 넘겨 중반으로 치닫고 있다. 저자는 나이를 이유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열정이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의 건강보다는 동행할 아내의 건강에 대한 염려이다. 

포르투갈 길을 이미 직접 경험한 저자의 이번 여정에는 현실적인 조언이 듬뿍 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현지 경험과 열정, 건강 상태 등이 한데 묶인 까닭이다. 앞으로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을 경험해 보고 싶거나 다녀올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저자의 이야기는 좋은 조언이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수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저자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끝까지 나아갈 용기도 얻게 되기를 저자는 기대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사실 중국의 고대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 그것을 중국의 공자는 길(道)로 표시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순례길도 같은 의미로 들린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산이 높은 것을 확인하려고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듯, 거기 길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길을 걷는 것 또한 아니라고 말한다. "산이 거기 있어도 내가 오르지 않으면, 길이 거기 있어도 내가 걷지 않으면 산도 길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힘들게 오르면서 걸으면서 고생도 하고 후회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더욱 성숙해지고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p.16)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많은 사람이 걷는 루트는 프랑스 길이라고 한다. 저자 역시 2017년에 첫 산티아고 순례길로 프랑스 길을 다녀왔고 두 번째로 선택한 길이 바로 포르투갈 길이다. 포르투갈로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스본에서보단 제2의 도시 포르투에서 출발을 하는데,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 숙소와 식당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기도 하고 대체로 차도를 따라 걷는 구간이 많아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서 포르투갈 길을 온전히 느끼고자 수도 리스본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를 거쳐 피니스테레까지 모두 721km의 순례길을 따라 걸었다. 프랑스에 비해 순례자에게 친절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고 마음씨 좋은 포르투갈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고 책에서 회고한다. 매일 기록을 잊지 않고 실천한 저자의 부지런함 덕분에 독자들에게도 포르투갈 길만의 매력이 그대로 전달된다. 지친 길 위에서 마주한 오렌지 한 바구니처럼, 이 책은 따뜻한 위로와 기분 좋은 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길 앞에서건 주저하지 않는다. 또 ‘천천히, 꾸준히 그러나 끝까지’ 걷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빠름보다는 느림을 추구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통해 “나는 왜 걷는가?”라는 질문이 결국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기나긴 길을 걷는 일과 같다. 길을 걸으며 어디서 묵고, 무엇을 먹을지 등을 선택하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길이 있어도 걷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인생은 순간의 결정들로 완성되고 나만의 삶의 의미로 채워진다. 『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은 매일 목적지를 향해 걸으며 보고 느끼고 사유한 순례의 여정을 통해 지금도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을 천천히 음미하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모든 독자들이 이 책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기를 저자는 바란다.

2장이 실질적 순례길의 시작이다. 책의 목차에 「Lisboa~Tomar」로 표기돼 있다. 7일간 여정으로 163km에 이른다. 3일차 'Via Franca~Azambuja(20km)' 구간이다. 저자의 서술을 살펴본다. "오늘은 빌라 프랑카에서 아잠부자 마을까지 20km를 걷는다. 오른쪽에는 태주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철길이 달려가는 평탄한 길이다. 형형색색 들꽃들이 길을 따라 지천에 깔려 있다. 눈이 즐겁다. 클로버, 엉겅퀴, 양귀비, 데이지··· 아는 꽃 이름은 거기까지다. 

숙소를 나서서 한 2km쯤 왔을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카미노 순례자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30대쯤으로 보이는 여인이다. 오늘 아침 숙소 식당에서 우리를 봤단다. 얼마를 같이 걷다가 여인이 앞서간다. 반갑지만 우리 아줌마들 걸음이 느리니 계속 같이 걸을 수는 없다. 인연이 있으면 어디선가 또 만나게 되겠지. 원래 카미노란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그런 길이니까.

20km를 걷는 내내 쉬고 마실 것이 보이지 않는다. 기차역이 보여 들어섰더니 아무것도 없다. 철길을 따라 건너 멀리 마을에 가면 뭔가 있을 법은 하지만 갔다가 되돌아오는 수고까지 감당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그냥 물이나 마시고 가자."(p.88~89)

독자도 유럽 여행을 다녀 왔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이다. 이는 서양 문명의 초기부터 전해오는 결과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그리스에 가보면 그들이 대형 건축물(신전)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신전을 지었지만 점차 왕궁이나 정치적 건축물, 또는 공공건물 등의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는 2,500년이 지난 건축물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이고 유럽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 문명도 대형 건축물에 많은 돈과 신경을 썼다. 로마는 다신교이었고, 피지배국에 일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또 불이익을 주지도 않았다. 그러다 기독교를 결국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성당 건물이 엄청나게 유럽 전역에 올라갔다고 한다.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유럽은 다시 기독교 문명으로 통일된 제국을 이어온 셈이다. 어차피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 시작을 포르투갈에서 시작했으니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가 위상으로 보아 브라질 대제국을 건설했으리라고는 쉽게 짐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5세기 경부터(서로마 제국 멸망 시기쯤으로 추정) 12세기까지 오랜 시간 아랍 무어족의 지배를 받았다. 토마르는 무어족의 중심도시였다가 12세기 기독교 영토회복 후 십자군 기사단의 본부가 되었던 도시다. 그래서인지 토마르시의 심벌 마크도 십자군 기사단이 사용했던 원형십자가 방패 모양이다. 시내에는 성당과 성채, 다리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16세기 포르투갈의 전성기에 확장, 재건된 르네상스 양식들이라고 저자는 전한한다. 

"엊그제 산타랭에서 얘기했던 산타 아레네 성당도 이곳에 있어 들어가 보니 제대 뒤에는 성모나 예수 십자가 대신 이레네 성녀가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바로 계단을 타고 으로면 토마르성으로 올라간다. 로마 때부터 건설돼 무어족 지배 시절, 그리고 십자군 기사단까지 사용했던 성채라서 그런지 곳곳에 기독교는 물론 아랍 냄새도 풍긴다. 긴 회랑을 걷다가 보니 언뜻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채 내부에는 '그리스도 수도원(Convento de Cristo)'이라는 화려한 성당도 있다."(p.128)


카미노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는 나쁜 날씨가 이어질 때가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 계속될 때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보다 잘 견디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 진정으로 멋진 사람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사람이다. 힘든 걸 겪어 내야만 인생의 달콤함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카미노는 인생 길이다.(p.239)


저저 : 정선종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삼성 그룹에 입사하여 회장 비서실 홍보팀, 삼성전자 수출부장, 스페인 포르투갈 법인장, 제일기획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35년간 삼성에 몸을 담았다. 삼성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골프가 좋아 인생 2막은 골프에 미쳐 보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골프 대학 PGCC(Professional Golfers Career College)를 졸업하였고 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골프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13년부터는 4년간 대교 그룹에서 운영하는 마이다스 골프클럽(청평, 이천)의 경영을 책임졌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국내외를 돌아다니면서 명문 골프장 탐방을 하고 있고 틈틈이 국민대 등에서 골프 강의도 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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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 안전가옥 오리지널 42
배예람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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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부터 괴물을 격리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그리고 괴물에게도 과연 좋은 일일까? 저자는 전래 동화 속 괴물들과 화해를 꾀하고 인간과 괴물이 함께하는 세상의 비전을 펼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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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 안전가옥 오리지널 42
배예람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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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 소설 작품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의 저자 배예람은 〈작가의 말〉을 통해 "나의 인생 한편에 늘 존재했지만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러브레터"라고 말한다. 우리는 괴물에 대해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는 말로 일축한다. 사실 우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괴물은 대부분 그리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다만 구전이나 설화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 '도깨비'처럼 선한 인상을 남긴 괴물들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부정적이다. 일단 외모가 무섭다. 외모가 무서우면 사람들은 당연히 가까이 하기 어렵고 꺼려한다. 권선징악의 우화나 전설에서 선행을 하는 괴물들은 우리 사회에서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징벌하기 위해 무서운 외모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 소설의 경향이 빠르게 SF 판타지로 옮겨진 느낌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최고의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고서도 판타지 소설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 왠지 부조화스럽다. 과학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판타지 소설을 집필한다면 더 멀리 넓게 볼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독자들의 취향이 판타지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문학을 공부하거나 직접 쓰는 작가가 아닌 일반 사람으로서 궁금하지만 속내를 읽을 수 없어 답답하지만 판타지는 과학만 함께 엮는 게 아니라, 범죄와 미스터리 등 합동하는 영역을 무한히 늘려가고 있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 등을 밝혀낸 21세기 과학은 무한하게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한가운데 들어선 느낌이다. 과거에 상상했던 게 눈앞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인류는 과학으로 접근하면 인류가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발전하고 있다. 자율주행뿐만 아니라 우주여행도 민간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에 대해 의문을 갖든 풀지 못할 것은 없다는 태세다. 

그러나 인류가 우주를 지배할 꿈은 아직 근본적인 문제인 '속도'와 '시간'이다. 두 물리적 현상이 지금까지의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초월한 타일 슬립 소설, 차원의 문제로까지 확대시킨 '순삭(공간 이동)'까지 많은 SF 소설의 전성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전설이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괴물)의 문제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그 모습을 바꿔가기도 한다. 기괴한 모습의 괴물들은 사실 우리에게 "괴물은 무섭다", "귀신은 나쁜 일을 한다"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의 저자 배예람은 괴물에 대해 공포나 무서운 느낌을 벗어난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다. 저자에게 괴물은 친구이고 애정의 대상이다. 그래서 거침없이 러브레터도 쓴다. 이 책이 러브레터다. 저자는 장르 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과 기대를 받아 온 분이다. 이 소설도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장르소설이다. 괴물과 귀신이 공존하는 현대를 배경으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오컬트 판타지를 선보이고 있다.

귀신을 보는 ‘눈’을 가졌지만 괴물을 다루는 ‘손’은 갖지 못한 주인공 보늬는 그럼에도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에서 꿋꿋이 버티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쓴다. 3년 동안 사무실 붙박이로 지낸 보니는 어느 날 회사에 나타난 전래 동화 괴물을 물리친 일을 계기로 신입 직원 지운과 함께 ‘임시 파견팀’을 꾸리게 된다. 앞으로 그들의 눈앞에는 또 어떤 괴상하고 기이한 괴물이 나타날까?

저자에게 괴물은 내쫒거나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니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을까? 저자가 이번 작품에서 내세운 주인공 보늬는 저자의 분신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늘 자신을 한심하게 묘사하지만, 언제나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이 책을 출판한 〈프로듀서의 말〉에서도 명확하게 지적되고 있다. "보늬는 아주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매일매일 내가 재능이 없다는 걸 확인받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그럼에도 그런 하루하루를 버티며 좋아하는 것 옆에 있고자 하는 마음은 얼마나 큰 것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심지어 자신이 훨씬 더 큰 재능을 가진 대안이 명확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런 보늬의 용기와 괴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감동하여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린다."(p.397)

괴물과 귀신이 공존하는 현대의 대한민국.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중으로부터 괴물을 격리하고 보호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암약하는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이하 한국괴물관리협회)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사단법인 한국실뜨기협회〉로 알려진 협회는 전국에 다섯 개의 지부가 있으며 괴(怪)와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비밀 조직이라는 점 외에는 일반 회사와 다를 게 없는 협회에서는 괴물을 다루는 ‘손’을 가진 ‘괴물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협회에서 유일하게 괴물을 다루는 ‘손’ 대신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진 인물, 강보늬가 있다. 괴물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손’을 갖지 못한 보늬는 파견팀 소속이면서도 3년 내내 사무실 붙박이 신세다. ‘손’이 없는 보늬는 괴물에게 생채기 하나, 흠집 하나 낼 수 없고, 따라서 파견을 나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협회 사람들은 그런 보늬를 본체만체하기 일쑤이고, 그럴 때마다 보늬는 탕비실 구석에서 여자 귀신과 잡담을 나누거나 회장실에서 목이 없는 괴물 무두괴와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에 재능이 없는가. 그렇게 보늬는 늘 괴로워하면서도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에서 꿋꿋이 버틴다.

사무실에 남은 인력이 없어 모처럼 구 팀장과 파견을 나간 보늬는 잡으러 간 도깨비에게 연민을 느껴 그냥 보내 주고 만다. 구 팀장은 화가 나서 보늬에게 협회를 그만두라고 말하고, 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하려던 보늬는 밤마다 사무실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는다. ‘귀신’이란 두 글자에 귀가 번쩍 뜨인 보늬는 스스로 귀신을 잡겠다고 나서서 탐문을 시작한다. 모두가 귀신인 줄 알았던 존재는 알고 보니 전래 동화에 나오는 괴물이었고, 보늬는 신입 직원 지운과 함께 전래 동화 괴물을 물리친다. 이 일을 계기로 보늬는 지운과 함께 ‘임시 파견팀’을 꾸리게 된다. 앞으로 이들의 눈앞에는 또 어떤 괴상하고 기이한 괴물들이 나타날까?

이 소설 작품은 모두 8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돗가비와 돗가비」「어서 눈을 떠서 저를 급히 보옵소서」「웰컴 투 해피랜드」「요술 맷돌」「여우 누이의 재앙」「도근천의 비밀」「나랑 같이 먹지」「에필로그」 등이다.

첫 장의 「돗가비와 돗가비」에서는 한국괴물관리협회의 직원들의 역할과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국괴물관리협회는 괴물들의 등급을 정하고 자료화해 관리하고 있다. 이를 테면 제목에 있는 '돗가비'는 도깨비의 옛말이다. 이 도깨비의 출현이 인지되면 직원들이 출동한다. 출동하는 직원들은 괴물 잡는 '손'을 가지고 있다. 형사가 범죄자를 잡아들이듯 괴물을 잡아 완전히 굴복시켜 관리한다. 물론 범죄 조서 쓰듯이 일일이 신상 정보는 물론 '범행 사실'을 바탕으로 낱낱이 관리 카드에 저장된다. 여기서 보늬는 '손'이 없어 현장 출동엔 갈 수 없다. 대신 괴물을 보는 '눈'이 있지만 이는 현장 출동의 부적격 요소다. 손이 없으면 괴물을 제압하거나 잡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도깨비는 위험 괴물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는 아닌 것으로 협회 직원들은 분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보늬도 함께 출동은 했지만 차량 안에서 기다릴 것을 지시 받는다. 직접 제압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다. 직접 제압하려고 출동한 직원들의 대화로 봐서는 보늬가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직원 구 팀장이 지금 잡으러 가는 도깨비는 '백(白)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고지하며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손가락 하나로도 제압 가능하다는 표시다. '핑거 스냅'.

저자가 달아놓은 주(註)를 통해 한국괴물관리협회에서 괴물을 분류하기 위해 부여하는 등급의 내용을 알 수 있다. 백 등급의 괴물은 사람을 해치려는 목표가 아닌 다른 특정 목표를 가지고 있거나, 괴물 전문가의 힘으로 통제가 가능한 괴물을 말한다. 백 등급의 괴물은 한번 확보되면 보안실에서 지내게 된다고 설명이 달려 있다. 또 '청(靑) 등급'도 있다. 이 등급의 괴물은 사람을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우호적인 괴물로,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거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괴물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이 등급의 괴물은 보안실을 나와 사무실 구역을 돌아다니도록 풀어놓기도 한다는 주석의 설명이다. 구 팀장의 핑거 스냅은 수많은 괴물들을 체포하면서 슬슬 권태에 빠져든다. 그 핑거 스냅으로 제압이 충분하다는 구 팀장은 선배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실적을 올린다. 도깨비 다음에는 어둑시니였고, 다음에는 불가사리. 불가사리 다음에는 생사귀(까만 모습에 머리에는 다섯 갈래로 나뉜 뿔이 달린 괴물)였다. 그 이후로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단피몽두(사람의 두세 배 정도 되는 크기에 얼굴에는 몽두를 쓴 괴물), 쌍두사목(머리가 둘 달린 듯한 느낌을 주느 괴물. 눈이 네 개이며 뿔이 달렸다), 식인충(고운 망사 같은 껍질에 싸인 벌레로 사람을 빨아 먹는다)······.

이 소설 작품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에는 다양한 전래 동화 속 괴물들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전래 동화가 사실은 괴물들의 탄생 설화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떤 전래 동화 괴물이 등장하는지는 책을 통해 직접 만나보기를 권한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한 가지 주제는 빗나간 재능에 관한 이야기다. 보늬는 어릴 적부터 괴물을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었고, 한 번도 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외할머니와 엄마처럼 괴물을 다루는 ‘손’을 갖게 될 거라 믿고 있던 보늬에게 찾아온 것은 귀신을 보는 ‘눈’이었다. 보늬의 마음 한편에서는 언제나 괴물을 향한 순정이 반짝거렸지만, 보늬는 오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무난한 학과를 졸업해 무난한 회사에 다니고, 무난한 현실을 살던 어느 날, 보늬는 한국괴물관리협회의 회장인 외할머니 귀순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스물여섯 살 보늬는 모든 걸 내팽개치고 한국괴물관리협회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것들 옆에 있기 위해서.

사랑하는 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 일은 괴롭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보늬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도 용기를 선물할 것이다.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주제는 괴물과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다. 보늬에게 괴물은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징그러우면 징그러울수록 어여쁜 친구들’이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함께 임시 파견팀을 꾸린 지운 역시 괴물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보늬를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괴물을 아끼는 보늬는 인간이 괴물을 ‘다스리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끊임없이 고민한다.

괴물도, 인간도,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뿐인데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괴물을 다스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이는 단지 인간과 괴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일 수 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며 자신만의 답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괴물 '옹고집'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가 고딕활자로 지면에 드러나 있다. 물론 다른 괴물들도 모두 하나씩 차례로 활자화돼 지면에 모습을 나타낸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옹고집에 대한 보고서를 여기에 발췌, 정리한다. 

개체 이름: 옹고집

일련번호: KMMA-448

등급: 황(黃) 등급*

종류: 인간형 괴물(둔갑)

활동지역: 전국

탄생(일부 『월야괴담』 발췌): 옛날 옛적에 황해도 옹진에 옹고집이라는 부자가 살았다. 그는 심술궂고 끔찍한 구두쇠여서, 여든 살 노모를 차가운 방에 재우고 식사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불효를 저질렀다. 그는 습관처럼 노모를 구박했을 뿐 아니라 남녀 종들을 심하게 부려 먹고 폭력까지 행사할 정도로 사악한 인간이었다.

심지어 그의 행패와 폭력을 견디다 못한 종들이 죽는 사건마저 발생했다. 죽어 나가는 종들이 많아 집 안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도는 등,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한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와 집 안의 불길한 기운을 물리쳐 주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옹고집은 스님에게 오물을 뿌리는 등 푸대접했고, 이에 크게 화가 난 스님은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옹고집을 벌하는 주술을 걸었다. (중략)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괴물 전문가들에 의해 격리되었다. 괴물 전문가들은 괴물에게 옹고집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붙였고, 이 사례는 진짜 옹고집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변형되어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 황(黃) 등급: 황 등급의 괴물은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려는 목표를 가진 괴물로, 이 등급의 괴물은 제거해야 한다.


저자 : 배예람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내일 무엇을 쓸지 상상만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독한 게으름뱅이. 게으름을 이겨 내고 한 줄이라도 쓰는 것이 매일매일의 목표. 2019년 안전가옥 앤솔로지 『대스타』에 수록된 「스타 이즈 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안온북스 ‘내러티브온’ 소설 편 『왜가리 클럽』에 수록된 「인어의 시간」을,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엔조이 시티전(傳)」을 썼다. 오래오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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