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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피로 쓴 7년의 지옥.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치욕은 반복된다, 책 읽어드립니다
류성룡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2월
평점 :
이 시대에 왜 갑자기 『징비록』인가.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싶었을까.
외교적 이유인지 모르지만 오래 끌어오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 판결이 이제야 나왔다.
우리 대법원이 개인의 민사상 보상(배상) 문제는 여전히 남은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박정희 정부 때 대일청구권에 관한 양국의 합의에 따라 보상을 따로 논할 수 없다는 자국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보상은 양국의 정식 외교 통로를 통해 이미 합의했고, 일본은 더 이상의 청구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서 한일 외교가 초긴장 국면에 돌입한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정치적, 외교적 차원에서 인정치 않고 경제 보복으로 맞섰다.
과거 식민지 정책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본 정부가 오히려 반성 없는 경제 보복을 강행하면서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여기에 『징비록』 출판의 의의가 크다.
일본은 이웃 나라지만 '불편한 이웃'이다.
최근 일본과의 긴장이 계속됨에 따라 출판계는 『징비록』에 다시 주목함으로써 우리의 대일 시각을 고취해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에 대한 참상과 후세에 경계로 삼기 위해 쓴 '피의 기록'이다.
얼마 전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소설가 장강명은 “『징비록』은 정작 일본에서는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그 시대에 베스트셀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잊혀진 책이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한 김상욱 교수는 “도로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었는데 일본군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20일 만에 진격했다. 백성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라고 당시의 두려움을 가늠하며 “니체의 말처럼, 『징비록』은 피로 쓰인 책이다. 단순히 읽기를 바라기보다 한 자 한 자, 기억되길 바란 책"이라고 정의했다.
『징비록』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부수어지고, 임금은 살기 위해 도망가 굴욕적으로 무릎 꿇고, 백성들은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육신을 목구멍으로 넣는 일까지 발생한다.
류성룡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비극이 발생했을 때 단지 ‘참담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라고 심정을 밝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엄 있는 군주가 아닌 불안에 벌벌 떨며 자리에 연연하는 왕, 역시 자기 이익을 채우는 길이 어디인가를 따라가는 관료들, 방위 사업을 귀찮아하는 백성들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으나, 그럼에도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은 최고 결정권자인 수장의 몫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연유는 과거를 회한하며 죄책감을 덜고자 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류성룡이 지은 제목 그대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징계하며 앞날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외침의 역사는 비단 임진왜란뿐만이 아니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책을 맡아 나라의 요직에 앉았던 인물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 『징비록』의 가치가 있다. 류성룡은 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의 실황, 군사 기무의 정리, 여러 사건의 논평 등을 기록하여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남겨 놓았고,
거기에 더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문물제도까지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란 발발 이후 7년간의 기승전결과, 그 안에서 오간 대화의 기록들은 전쟁문학의 고전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 책에 따르면 전란 발발 이전 류성룡이 불길하게 느낀 조짐들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지금의 시대라도 무시하지 못할 그리고 무시해서는 안 될 자연적 암시는 존재한다. 그처럼 류성룡은 하늘의 기미들과 세간에서 드러나는 기미들을 보고 느꼈다.그중 하나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꾼 꿈이다.
경복궁 연추문에 불이 나 그가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지을 때는 조금 높여 인근 산에 가까운 높이로 해야 한다”라고 말해 준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류성룡은 이 불길한 꿈 이야기를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온 뒤에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그리하여 임금이 피란하고, 백성들은 처참히 목숨을 잃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기며 자포자기하자, 류성룡은 지난 꿈을 언급하며 “꿈속에서 궁궐의 고쳐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반드시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류성룡은 평생토록 꾼 꿈 중에 징후를 경험한 바가 많았음을 스스로 밝힌 사실이 있다.
『징비록』 본문에 나와 있듯이 전쟁이 터지기 전 류성룡을 불길하게 만든 일들은 여럿이고 현실은 이미 끝나 버린 듯 비참했지만, 그날의 꿈은 분명 류성룡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을 기어이 헤쳐 낼 수 있게 한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류성룡의 해석처럼 왜적은 결국 물러갔다. 비록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조선 건국 후 태평한 세월이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다보니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온 국토가 넋을 잃고 말았다.
왜적은 파죽지세로 불과 열흘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전략을 도모할 수가 없었고, 용감한 사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민심 또한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으니 서울을 빼앗는 교묘한 계책이 달리 필요치 않았다.
한심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란 자는 자기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방어사에 예속된 군사 수백 명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간단 이유로 모두 죽여 버렸고, 순찰사 김수는 이 행동에 공이 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승진되도록 하였다.
파벌 싸움에 몰두하였던 지사 신잡은 나라를 잃고 임금이 피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수복할 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옵니다”라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말을 하였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평복으로 바꿔 입고 도망다니는 다른 관원들과 달리, 경기 감사 심대는 위험한 곳을 피하지 않고 왜적이 알도록 먼저 공문을 띄워 알렸으며 내응할 사람도 모집하였다. 그러다 첩자의 말을 진짜로 믿고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참혹함을 겪은 부끄러운 우리의 지난날을 현실에 결부시켜 다시 살피면서, 앞날을 바로잡는 일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한번 읽기를 권한다.서애 류성룡이 이 책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 뒤에 지난 일을 생각하면 황송하고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비록 볼만한 내용은 없지만 이로서나마 간절하게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보이고 또 못난 신하가 나라의 은혜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죄를 드러내고자 한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주자학, 양명학, 불교, 도교, 병학에 해박한 당대 최고 수재였다. 더구나 전란 당시 영의정이자 전쟁 수행을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과 대궐의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었다.
일찍이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정읍 현감이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그를 전라 좌수사로 추천한 사람도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은 이 책을 통해 참혹했던 전쟁의 경위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의 밀고 당기는 외교전, 전란으로 인한 백성의 피폐한 생활상, 전쟁에 나섰던 숱한 인물들의 처절한 활약상을 생생히 전한다.
여기다 민족적 재앙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왕조와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을 멈추지 않은 용렬한 벼슬아치들 등 당시 정치사회 상황까지 고발한다.불행하게도 류성룡의 가르침은 이후 전혀 계승되지 못했다.
‘징비(懲毖)’의 정신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임진왜란 같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 비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각종 신병기와 병법 도입, 직업 군인제 창설, 무역 통상을 통한 경제 부흥 실시 등 조선의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가르침은 이후 전혀 계승되지 못했다. 불과 40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또 한 번 국토가 쑥밭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징비록』의 교훈에 주목한 것은 오히려 일본으로, 그들은 조선보다 더 열심히 징비의 정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끌어냈다. 1712년에 일본에 간 통신사가 오사카 시장에서 『징비록』이 팔리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징비록』이 저술된 이후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 조선 시대 대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이 책을 여러 번 탐독하고 독후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징비록』은 두 차례의 왜란을 진두지휘하며 나라가 몰락해 가는 과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류성룡이 낙향한 뒤에 기록한 내용이다.
류성룡은 왜란 당시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후대인들이 같은 잘못을 선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책은 청렴함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를 통해 설명하고, 또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와 ‘류성룡의 자서’를 통해 당시의 역사와 류성룡이 글을 남긴 목적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어 『징비록』과 『녹후잡기』 본문을 싣고, 마지막에 조선시대의 관직과 관청을 정리해 이해가 쉽도록 했다. 왜란을 이겨 낸 걸출한 두 인물 가운데 재상 류성룡은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
전체 그림을 보며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수장의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지에 대한 우리 대중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까닭이라 생각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일본에서는 1695년에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1880년 무렵 일본에 머물렀던 청나라 학자 양수경(楊守敬)이 『조선징비록』을 수집해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가면서 중국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조선징비록』은 모두 4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