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고통 - 거리의 사진작가 한대수의 필름 사진집
한대수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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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삶이라는 고통』의 표제어는 다의적이지만 함축적이다. '삶은 고통'이라는 보편적 명제로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기쁨의 연속"이다는 탁월한 사유를 끌어낸다. 저자 한대수는 한국 포크-락 음악의 대부이자 사진작가로 일생을 살아왔다. 이 사진집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올해 75세의 노년이지만 그가 40여년 간 함께해온 '필름 시대'의 카메라 작품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에 따라 이번 사진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1960년대 말 뉴욕과 서울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 저자 한대수는 1960년대부터 2007년까지 늘상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노래할 때도 여행할 때도 필름 카메라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한 컷 한 컷 셔터를 누르며 세상을 담았다.

뉴욕, 모스코바, 파리, 탕헤르, 바르셀로나, 스위스, 쾰른, 모스크바, 태국, 몽골, 베이징, 상하이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사진을 실어놓았다. 필름 카메라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삶의 터전을 잃고 소외된 삶을 사는 노숙자들, 거리의 악사들, 고독한 사람들, 나이 든 노인들이다. 상업적 목적의 사진들과 결이 다르다. 특히 1960년대 말의 뉴욕과 서울을 찍은 흑백 사진은 두 문화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어 관심을 끈다. 그의 사진들은 옛날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동경, 호기심, 연민, 비애, 향수 등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은 순간 포착이다.”라는 명제는 오늘날 사진 작가에게도 통하는 사진 예술이 있기까지의 예술로서의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장면이 지나간다. 사진 작가 한대수는 “삶이란 진실로 아이러니하고, 나 자신 또한 아이러니이다. 고통과 비극이 나를 음악가로 만들었고, 글을 쓰게 만들었고,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나의 몸뚱이는 패러독스이다. 나는 항상 웃는다. 내 마음, 빈 항아리의 울부짖음이다."라고 자신을 내려놓은 채 드러낸다.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대수는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라는 곡을 선보인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한국 포크-락 음악의 대부이다. 전설적인 한국 뮤지선으로 유명하지만,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도 오랫동안 해왔다. TV 출연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져 사진 작가로서의 한대수는 잘 모른다. 간혹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는 '음악하는 사람'으로 더 널리 알려져 왔다. 미국 뉴햄프셔 주립대학교 수의학과를 중퇴한 후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으나, 한국에서는 음악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우리가 잘 아는 〈세시봉〉, 〈펄 시스터즈〉, 〈정훈희〉, 〈트윈 폴리오〉 등 가수들과 이백천, 김동건 등과의 친분도 쌓았다. TBC 방송 출연도 잦았다고 한다. 그의 노래 제목대로 '행복의 나라'로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국 정부에서 ‘체제 전복적인 음악’이라는 이유로 모든 곡이 금지됐다. 다시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에는 밥벌이를 위해 상업 사진가로 적잖게 일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사진 작품은 물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인생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TV 출연 당시 에피소드도 꺼낸다. "사회자인 김동건 씨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악단장 이봉조 씨에게 한대수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봉조 씨는 씩 웃고 이렇게 대답했다. "좀 낯설죠? 하지만 재미있잖습니까?" 그렇게 멋진 평을 해준 이봉조 씨에게 책을 통해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한다. 대한민국에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저자의 어머니는 TV에 나온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기뻐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였다"고 씁쓸한 기억을 털어놓는다. 어머니는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음악인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TV에 출연하고, 노래 공연도 다니며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옮겨다닐 때마다 늘 카메라를 분신처럼 들고 다녔다고도 말한다.

 


 

독자는 그가 사진 작가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니 『침묵』, 『작은 평화』라는 사진집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수차례 사진전을 열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따르면 1960년 처음 필름 카메라는 손에 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손에 카메라가 떠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이번 사진집은, 나이 일흔다섯을 넘겨 ‘사진을 정리해야지’ 했던 오래된 숙원을 이룬 작품집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이 책은 40여 년 동안 필름 카메라로 찍은 작품 세계를 한차례 집대성한 것으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집이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체류 중일 때 아버지의 권유로 어렵게 합격해 들어간 대학 수의학과를 2년 만에 자퇴한 때부터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사진학교에 입학한다고 하니 가족들 반응이 안 봐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는 "사진이 무슨 학문이야?"라고 했고, 아버지는 "사진은 취미 생활이지 직업이 될 수 없지 않냐?"라고 했단다. 그러나 저자 한대수는사진이 지닌 아름다움과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라는 기계에 크게 매료되었다. 더구나 아름다운 모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고백한다. 학비나 생활비는 전혀 지원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집에서는 "내논 자식" 취급했을 것 같다. 우선 세 가지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 집을 구해야 한다. 당시 뉴욕에서는 월세 200달러 이하인 방은 없었다고 한다. 할렘가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둘째 생계를 위해서라도 직장을 구해야 한다. 오전에는 사진 공부를 해야 했기에 직장은 오후부터 시작하는 일자리여야 했다. 운 좋게도 식당 아르바이트 업이 가장 적당했다. 하루 두 끼를 공짜로 먹으니까.(두 끼 7달러를 번다고 추산) 요리사 조수로 일하다 나중에는 월급도 조금 오르고 여기서 유명인들을 많이 본 것도 큰 자산이 됐던 모양이다. 당시 식당이 고급 음식점이어서 유명인들이 적잖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페이 더너웨이, 재키 케네디, 앤디 워홀...

 

 

당시 한참 팔팔한 나이 20대의 사랑과 이별 기억은 지금도 아련할 정도로 노년의 저자에게 강렬했던 것 같다. 후회도 많고, 실수도 많고, 상처투성이다고 털어놓는다. 이 가운데 가장 눈물 나게 만드는 것은 '명신과 나의 이별'이다고 말한다. 스무 살에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용감하게도 저자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독자는 저자 한대수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의 사생활은 아무것도 모르던 터다. 이 책을 통해 동거하던 명신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의 아내인 명신은 저자가 2집을 내고 노래 부르던 시절 만난, 당시 홍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김명신이었는다.(나중에 뉴욕패션계에서 크게 활약한다) 1990년대 들어와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살을 할까 침울해 있던 중에 1992년 모델 경력이 있는 몽골계 러시아인인 옥사나 알페로바(할아버지가 몽골 현대건축의 아버지격) 를 만나서 재혼하게 된다. 결혼 15년 만인 2006년, 딸 한양호(영어이름은 미셸)를 낳았는데 이때 한대수 나이가 무려 59세. 참고로 옥사나와는 22세 차이이다.

'양호'란 이름은 부모의 높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양호하게 태어나서라고 넉두리처럼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이는 3살의 나이일 때 자기 아버지의 노래를 듣고 울어서 한대수가 감수성이 참 풍부하다고 한 적이 있다고도 알려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명신과의 관계를 FF(앞으로 빠르게 감기)로 돌려도 가장 길게 쓰고 있다. 그만큼 가슴에 맺힌 것도, 응어리처럼 남은 미처 하지 못한 말도 많았던 듯하다. 더욱 놀랐던 것은 저자가 옥사나와 결혼 생활을 할 때 맨하튼 코리아타운을 지나다 명신을 만났다고 한다. "얼굴과 모습이 아주 우울했다. 옥사나의 제의로 명신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F.F.> 그리하여 우리 셋은 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때로는 옥사나 어머니까지 포함해 우리 넷. 내 팔자야! <F.F.> "난 파리로 갈래. 다시 안 돌아올게."(p.147)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지는 못하지만 소문만으로는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저자의 마음씀이 이토록 강렬한 것은 무척 순수한 사랑이었던 것을 반증하는 걸까? 라는 독자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시킨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모두 3부 9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내 인생의 봄 : 1960년대 뉴욕, 서울〉, 2부 〈길 위의 고독 : 뉴욕에서 몽골까지〉, 3부 〈끝까지, 평화 : 히피의 기도〉이다. 1부에 속한 5개 장은 「내 인생의 황금기 1960년대」, 「세렌디피티 3」, 「1969년, 서울」, 「TV 쇼」, 「명신과 나」 등이다. 2부는 「홈리스」, 「거리의 악사」, 「세상의 고독」등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3부는 「No War」 한 장이다. 특히 3부는 전쟁을 반대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음악인이자 사진 작가로서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반전 사상과 정부 정책의 부재에 대해 비판의 날선 목소리도 낸다. 노년의 가수로서, 사진 작가로서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지금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무슨 악행을 범하고 있는 건가? 우리는 다 이성을 잃은 건가? 자기 몸에 폭탄을 차고, 타인을 죽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폭파시킨 사건을 접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살 폭탄 테러나니. 너무 끔찍하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이 무서운 이성을 던져버린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극심하게 몰리고 있을 때 항복하지 않고 가미카제라는 자살 비행조종사 그룹을 조직한 것이다. 돌아올 연료도 주지 않고 비행기를 조종해 미국 항공모함에 추락하는 것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전략이었다. 결국 항복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의 핵 폭탄 두 방에 무릎을 꿇었다. 22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안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인간의 악한 행위는 끝을 모른다. 이것을 'Catch-22'라고 하낟. 악을 강한 악으로 대응하고, 강한 악을 더욱 강한 악으로 대응하고, 밑으로 떨어지는 보복의 연속이다. 돌고 도는 인간의 어두운 심리는 결국 바닥을 치고 '멸망의 밤'을 초래하는 것이다.

내가 군 복무를 한 1971년과 1974년 사이에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25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끔찍한 전쟁이었다. 결국 미국이 항복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나는 해군이었기에 구축함 갑판 위에서 이 비극적인 인간의 햄릿 연극을 보면서 말했다.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전쟁일 거야"라고.

 


 

세상을 여행하며, 일상의 찰나를 포착한 이들 사진에는 고통, 외로움, 쓸쓸함, 고단함이 자리잡고 있다. 저자 한대수가 찍은 거리의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가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는 작가이자 인간이 처한 보편적인 부조리함과 어둠에 본능적으로 민감한 작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집 뒷부분에는 1960년대 말과 2002년의 반전 운동 사진이 실려 있다. ‘사랑’과 ‘평화’를 외쳤던 우리 시대 마지막 히피 한대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Peace & Love.”

 

저자 : 한대수

 

가수, 사진작가, 저술가. 1948년생. 태평양을 30번 이상 왔다 갔다 하면서 서울과 부산에서 30여 년, 뉴욕에서 40여 년을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고, 미국 뉴햄프셔 주립대학교 수의학과를 중퇴한 후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1968년 한국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했으며, ‘체제 전복적인 음악’으로 모든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자 가수 활동을 접고,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사진가로 일했다. 첫 번째 아내 김명신과 이혼한 이후, 1992년 22세 연하 옥사나 알페로바와 결혼했으며, 2007년 딸 양호를 얻었다. 서울 신촌에서 15년을 살다가, 2016년 다시 제2의 고향인 뉴욕으로 건너갔다. 현재 뉴욕 퀸스에서 아내 옥사나, 딸 양호와 함께 사는 중이다. 발표한 앨범으로는 [멀고 먼-길], [고무신], [무한대], [기억상실], [천사들의 담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Eternal Sorrow], [고민], [상처], [욕망], [Rebirth], [하늘 위로 구름 따라] 등 15장의 정규 앨범과 여러 장의 싱글 앨범이 있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파격적 곡들로 인해, 그에게는 항상 ‘한국 모던록의 창시자’, ‘한국 최초의 히피’, ‘한국 포크록의 대부’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지은 책으로는 『한대수,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침묵』, 『작은 평화』, 『올드보이 한대수』, 『영원한 록의 신화 비틀즈, 살아 있는 포크의 전설 밥 딜런』,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뚜껑 열린 한대수』,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 『바람아, 불어라』, 『나는 매일 뉴욕 간다』 등 다수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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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의 작은 서점
프리다 쉬베크 지음, 심연희 옮김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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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템스강의 작은 서점』은 독자로서는 오랜만에 접하는 북유럽의 소설이어서 관심이 갔다. 독자가 많은 책을 읽지 못한 탓이겠지만 번역서 중 북유럽 작품을 발견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지형적 한계와 인구의 부족함 때문임을 빼놓는다면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특히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곳이 스웨덴인데 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런던이지만 작품의 주인공 샬로테는 스웨덴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스웨덴 사람으로 스웨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작가의 평범한 삶이 금세 떠오를 만큼 안정된 분위기의 작품이다. 스웨덴어로 쓰여진 이 소설은 스웨덴에서 12만 부 이상 판매됐으며, 저자 프리다 쉬베크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고 한다. 런던의 오래된 서점을 배경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사랑스러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어느 날 스웨덴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운영하던 소설 속 주인공 샬로테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모가 자신에게 런던 한가운데에 있는 서점을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샬로테는 런던까지 가서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다. 따라서 런던에 가 짧은 시간 동안 서점을 매각할 예정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 서점으로 향한다. 남편을 잃은 자신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런던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하면서 서점을 운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해본다. 런던에 내려 곧장 서점으로 향한다. 마법을 부린 듯한 서점 내부 모습에 감탄한 것도 잠시, 샬로테는 사라 이모가 살던 서점 위층의 작은 집에서 한 남자의 사진, 그리고 편지가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곧 서점이 파산 직전 상태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서점을 매각하고 곧바로 스웨덴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서점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직원, 마르티니크와 샘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샬로테는 더욱이 사라 이모가 살던 집에서 의문투성이였던 자신의 뿌리에 대한 단서도 발견한다. 낡은 상자 속 빼곡히 들어찬 편지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샬로테는 왜 이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 왜 엄마는 친아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는지 조금씩 알아 간다. 동시에, 서점 건물 2층에 세 들어 사는 소설가 윌리엄에게도 점점 빠져들면서 샬로테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변화해 간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 속에서 샬로테는 표제어처럼 이 서점은 '템스강'변에 있는 조그마한 서점이다. 우리가 영국 런던을 생각하면 떠올리면 그림 같은 풍경을 품은 서점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마르티니크, 샘, 윌리엄, 그리고 테니슨 앞에 불청객처럼 샬로테가 나타난 격이다. 일에만 파묻혀 살던 샬로테에게 개성 강한 이들과의 관계는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사라 이모의 친구이자 따뜻한 마음을 지닌 마르티니크, 제멋대로지만 누구보다 서점 일에 열정적인 샘, 근사한 미소로 마음을 녹이는 윌리엄, 그리고 샬로테에게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테니슨까지 있는 이 서점에 대해 샬로테는 점차 마음을 연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까 두려워 감정을 꼭꼭 숨기고 지내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들과 함께 서점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샬로테는 퍼즐을 맞추듯 숨겨져 있던 비밀에도 점차 다가간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조금씩 타인에게 상처받고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때론 절망하지만 친절함과 따듯함, 희망을 잃지 않는다. ‘착한 언니’와 ‘완벽한 엄마’라는 역할에 갇혀 자신을 희생하던 마르티니크는 점차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배워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일에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샬로테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처받았지만 여전히 옆 사람을 돌보고, 절망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고 그들의 단단한 마음이 부숴지지 않도록 따뜻한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어려을 때 서점 주인을 꿈꿔봤던 독자로서는 이 소설에 감정이입이 쉬웠다. 서점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싶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서점의 주인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자와는 다르지만 샤로테는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순수함과 고충, 그리고 의지에 접근하며 점점 애착이 강해진다. 그들과 함께 서점을 지키기로 한 결심이 선다. 독자로선 갑자기 내가 서점의 상속자가 된다면? 하고 생각해보니 행복감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 서점이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면?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일일 터다. 그러나 읽은 책이라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전부였던 샬로테에게 서점 일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점에 대해, 그리고 사라 이모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샬로테는 이 서점이 홀로 남은 이모를 지켜주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이모를 지켜주었듯 자신도 지켜줄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 책은 '독서 애호가들에게 더없이 완벽한 장소'인 〈리버사이드 서점〉을 배경으로,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크고 작은 소란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손으로 직접 짠 나무 서가, 대리석 선반이 달린 벽난로, 떡갈나무 계산대, 해리포터 계단 방을 본떠 만든 작은 공간까지 모두가 작지만 소중한 것이다. 그것들이 손때가 묻고 여러 사연들이 겹겹이 쌓여갈수록 아름다운 서점으로 변화해 간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인테리어와 더불어 모든 고객에게 맞춤 책 추천이 가능한 직원들은 이 서점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며 이 책의 스토리를 완전하게 채워간다. 올 가을 책 읽고 싶은 마음을 훈훈하게 만족시켜줄 소설로 손색이 없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의 저자 프리다 쉬베크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라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다. 저자의 내공이 알려진 바 없다고 보면 될 일이다. 독자가 이 책을 읽은 느낌으로는 '노련한 작가'의 면모를 보인다. 샬로테가 서점을 운영할 의사가 전혀 없이 사건이 진전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서점 직원들과 이웃의 마음을 읽고 감화된다. 그리고 자신이 서점을 지켜내리라는 필연적 이유를 소설 중간 중간에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원과 이웃의 처신과 과거 행적, 사라 이모가 살았을 때의 서점에 대한 애착 등이 이모의 생전과 사후 사이를 자유롭게 의식이 오가며 독자들에게 꾸밈없이 샬로테는 각오를 다져간다. 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이들과 함께하겠다며 서점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변화도 자연스럽다.

소설 내용의 디테일도 세밀하게 신경 쓰는 작가의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 유기적 구성력도 대단하다. 모든 것이 저자의 주도면밀한 글쓰기와 구성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당했고 이야기의 전개는 주도면밀하다고 느꼈다. 등장인물 역시 소설의 진행 과정 상 필요한 인물을 그때 그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설정해 놓고 사건의 전개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내 보여준다. 그야말로 완벽한 구성 능력이다.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보다 오히려 완벽한 구성력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는 탁월함을 보여 준다.

사건의 마지막에 의도치 않은, 모든 독자들이 다 잘 아는 듯한 인물은 이 소설의, 서점의 스페셜 게스트가 된다. 바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J, K. 롤링의 등장이다. 그가 단순히 이 서점에 들르는 무미건조한 설정이 아니다. 그가, 대 작가가 〈리버사이드 서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 8권 출간 기념 낭독회를 연다.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쓰러져가는 서점에 대 작가의 방문이라니...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서점을 살려내려는 샬로테, 직원들, 이웃까지 한마음인 점에서 소설은 더 빛을 낸다.

 


 

J, K. 롤링과 샬로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샬로테는 자신의 회사를 매각하려고 초창기 회사를 함께 시작했던 헨리크에게 말하고 매각을 위한 은행과의 문제 등을 논의해 확정해야 한다. 한 출판사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롤링을 만나다. 누군지도 모른 채 그에게 접근해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자신의 서점에서 낭독회를 한 번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출판계에 문외한이던 샬로테가 '밑져야 본전' 식의 발언이지만 롤링은 자신이 누군지 아시냐고 묻는다.

"아뇨, 저는 스웨덴 사람이라서 영국 문학계에 대해서 잘 몰라요. 하지만 작가님이 방문해 주신다면 저희 손님들이 매우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요."

"서점이 어디 있죠?"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습니다. 여기서 정말 코앞이에요. 저의 서점은 백 년 이상 이어져왔고 특별한 매력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에요. 아주 다양한 장서와 아이들을 위한 독서 코너도 있어요. 계단 아래에 해리 포터가 살던 계단 방처럼 꾸며놓은 코너도 있답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스웨덴식 커피와 다과를 제공해요. 서점 위에는 위리엄 헨슬로라는 작가님도 실제로 사시고요. 안타깝게도, 저희는 지금 재정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라서 작가님께 돈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하시는 만큼 스웨덴식 시나몬 롤을 드릴 수는 있어요. 물론 호텔을 오고 가는 택시비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해리 포터 계단 방이 있다고요?"

이렇게 우연히 대 작가 롤링의 방문이 약속되지만 모두 롤링이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샬로테를 통해 쏟아놓은다. 저자의 글솜씨, 그리고 구성 능력이 돋보인다. 더욱이 샬로테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해리 포터의 계단 방'. 신의 한 수다.

 


 

서점 방문은 신문 기사로 대체한다. 상상력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높고, 신문에 나왔다는 공신력과 함께 롤링이 그만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템스 강변에 있는 리버사이드 서점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고풍스러운 매력을 간직한 곳이다. 천장까지 뻗은 서가와 사다리, 소박한 가구가 어우러진 공간에는 세기말의 마법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에는 스웨덴식 ‘피카’를 제공하는 카페를 같이 운영하고 있으며, 전문가적 기량을 갖춘 직원들이 방문하는 손님을 책 세상으로 즐거이 안내하고 있다. 서점의 새 주인 샬로테 뤼드베리 씨에 따르면, 이런 낭독회는 앞으로 필수적인 서점 행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이 서점이 지역사회에 능동적인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사우스뱅크 지역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런던에서 가장 친절한 서점에 한번 들러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마르티니크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샬로테! 정말 꿈만 같아!” 그녀는 샬로테의 목을 그러안았고, 샬로테도 있는 힘을 다해 마르티니크를 안아주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참으로 감사하게 되는 날이었다.(p.532)

 

저자 : 프리다 쉬베크(Frida Skyback)

 

1980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를 꿈꾸었으며 다섯 살 때 처음 책을 썼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언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블로그를 통해 글을 써오다가 2011년 첫 발표한 소설 『샬롯 하셀』이 큰 사랑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2개국 이상 작품이 계약되어 번역 중이며, 『템스강의 작은 서점』은 12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현재 남편, 두 딸과 함께 스웨덴 룬드에 살고 있다.

 

역자 : 심연희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독일 뮌헨 대학교(LMU)에서 언어학과 미국학을 공부했다. 영어와 독일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설 『아웃랜더』, 『아이언 위도우』, 『레슨 인 케미스트리』, 『스파크』, 『미드나잇 선』, 그래픽 노블 『인어 소녀』, 『티 드래곤 클럽』, 시리즈물로 『이사도라 문』, 『인 더 게임』, 『매머드 아카데미』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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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
마르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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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은 저자 마르크 레비의 소설 작품으로 '영혼을 울리는 로맨스의 연금술사'라는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다. 마르크 레비는 전작 『저스트 라이크 헤븐』을 통해 폭발적인 독자들의 인기를 끌어 모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프랑스 작가'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이 작품 『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전작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갖추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감정과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물했다고 평가받았다. 저자의 첫 소설이자 전작 『저스트 라이크 헤븐』에서 '마법 같은 열정으로 그려지는 현대판 동화'로서 프랑스 평단뿐만 아니라 세계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바 있다. 이번 작품은 ‘마지막으로 함께 떠난 부녀간의 여행’을 감동과 유머로 경쾌하게 이끌어낸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이다. “누군가를 잃고 그제야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관심을 가졌던 저자가 ‘너무 늦기 전에’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따뜻한” 이야기다.

전작에서 저자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젊은 여인 로렌을 등장시켰다. 묘사된 내용으로 보아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이지만, 그녀의 진짜 육체는 샌프란시스코 병원 6층에 코마 상태로 있다. 여인은 실제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투덜거리며 말을 하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한다. 하지만 병든 육체의 환영으로만 존재하고,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더구나 코마 상태에 빠진 육체를 납치하기 위해 절친한 친구에게 구급차를 훔치도록 강요하는 등 SF와 종교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건축가인 남자 주인공 아더는 어떻게 해서 로렌의 영혼과 육체가 그처럼 따로 떨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동시에 코마 상태 환자에 대한 모든 연구 자료들을 모으는 데 집착한다. 그리고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한 출구를 상상하려고 애쓴다. 그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트면서 그들은 시니컬한 유머를 주고받으며 미친 듯이 웃기도 하다가 또 각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처럼 평화로운 행복을 맛보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다시 이번 작품으로 돌아오자면 결혼식 며칠 전, 줄리아는 아버지의 개인비서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듯이 성공한 사업가이자 늘 멀기만 한 아버지 안토니 왈슈가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불참을 나무랄 수가 없다. 아버지 안토니 왈슈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으므로. 그런데 장례식 다음 날 줄리아는 뜻밖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여행이 마침내 시작된다. 부녀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줄리아는 숨을 죽이고 리모컨을 손에 꽉 쥐었다. 과연 누굴까, 주변인물 모두를 샅샅이 다 찾아보았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단 한 사람. 이런 시나리오와 연출을 할 만한 유일한 사람의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 화가 나 할 말조차 잃은 줄리아는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이제 그녀의 예상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줄리아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딸각 하는 소리가 났고, 밀랍인형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갔다. 이제 밀랍인형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었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인형 아닌 인형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내가 그리워진 거니?”(p.62~63)

 

이 소설은 실제로 2022년 프랑스에서 드라마로 제작되며 큰 화제가 되었다. 드라마는 2023년 9월 ‘프랑스드라마페스티벌’의 대표작으로 국내에서도 TVAsia Plus 채널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측에 따르면 저자 마르크 레비는 무척 가족적인 작가다. 그는 고리타분한 설교 없이 아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그렇기에 이 작품 『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에서 마르크 레비가 한 부녀의 조심스러운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쏟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꿈인 저자 마르크 레비. “소설의 장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이번 작품에 “지나가는 사랑, 행복, 그리고 미처 잡지 못한 기회에 대한 성찰까지” 덧붙이며, 어른이 된 우리에게 “부모님이 하셨던 말씀들, 그리고 들은 적이 없다고 믿어왔던 말들”을 돌이켜보게 한다. 너무 늦은 뒤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듣고 있니, 줄리아? 단 한 번도! 함께 생을 보내기로 한 우리의 선택을, 너에게 쏟아붓는 우리의 사랑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어. 네 엄마의 마음을 얻고,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었어. 비록 너에게 가장 정확한 말로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온 단어를 찾아야 했다만···.”(p.445)

 

세상의 모든 자식은 부모로부터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반대로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들로부터 또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고 잊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항상 잊고 지내다가, 우리는 정말 위급해진 마지막 순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2년을 기획하고 하루 열일곱 시간을 작업하여 3개월 반에 걸쳐 작품 속 인물들을 만들어낸 데 대해 저자는 진정 이 이야기를 써야 하는 깊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어떤 의도로 죽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안드로이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저자가 오랜 숙고와 치밀한 구상을 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애니메이터인 웹디자인 회사의 여사장 쥴리아이다. 아버지인 안토니 왈슈는 첨단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대기업 CEO이다.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지만 여느 가정처럼 평범하지 못한 관계로 점철된다. 대기업 CEO가 되기까지 아빠 안토니 왈슈가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너무 적었던 것. 이로 인해 부녀 간에는 정보다는 오해가 훨씬 많이 쌓이게 된다. 부녀 간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이 소설 전반을 통해 펼쳐 나간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 안토니 왈슈의 역할을 크게 강조한다. 마치 저자 자신이 직접 소설 속의 인물인 듯하다.

딸 줄리아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늘 업무가 바쁜 아버지는 그녀에게 만족할 만큼의 표현을 하지 못한다. 부녀 간의 오해를 풀고, 정을 제대로 쌓을 틈도 없이 줄리아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줄리아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원망이 된다. 마음의 깊은 골이 생긴다. 하지만 안토니 왈슈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딸인 줄리아로부터 시선을 뗀 적이 없으며 출장중이라 하더라도 그의 비서를 통해 그녀의 일상을 일일히 보살핀다.

줄리아는 자기 스스로의 진로에 대해 부모의 의견을 묻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 안토니오 왈슈는 딸의 결정을 존중하고 일절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동서독이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다. 이른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이다.

 


 

줄리아는 동독 청년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 청년과 함께 동독 할머니집으로 들어가 살려고 한다. 아버지 안토니 왈슈는 그녀가 잘못된 선택으로 공산주의 체제에서 불행에 빠질 것을 예측한다. 아버지로서는 부득이 그녀의 삶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동독 연인인 토마스와의 결별을 강요하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으려 한다. 이때부터 부녀간의 관계는 화해는커녕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만다. 그러나 사회적 이념의 차이, 딸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려 할 뿐, 강제하지는 않는다. 아버지 안토니 왈슈는 여전히 딸 줄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점점 더 아버지를 외면하고 감정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다시 사회적 변화가 소설의 전개를 급반전시킨다. 독일이 통일되자 아버지 안토니는 자신의 부적절한 관여로 줄리아의 연인이었던 토마스를 집으로 찾아가 구타하고 강제로 빼내오는 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줄리아는 첫사랑인 토마스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결혼 상대인 아담과의 결혼을 앞두고도 잊지 못하는 것을 알고, 딸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기발한 계획을 세운다. 즉 자신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장례식을 치르게 함으로써 당장 닥친 결혼을 미루게 만들고, 딸이 첫사랑인 토마스와의 마음의 관계를 정리한 후 새로 맞이할 남편과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한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변장해 줄리아에게 배송된 안토니 왈슈는 딸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어서 그녀의 생각을 가로챌 수 있었고, 마침내 그녀와 둘이서 6일간의 여행이라는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여행 기간 안토니 왈슈는 줄리아의 출생 전 줄리아의 엄마와 만난 이야기부터 줄리아가 어릴 적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겨 보게 한다. 서서히 부녀 간의 거리를 가깝게 하자는 생각에서다. 당초 신혼여행지로 잡았던 몬트리올로 여행을 떠난 줄리아는 안토니의 계획에 따라 미리 배치해 둔 초상화를 그리는 여자 화가가 걸어 둔 토마스의 초상화를 보고 토마스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애틋함을 알게 된다.

 


 

줄리아는 토마스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안토니의 정보통은 그가 아직 생존해 있고, 여전히 기자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것을 안드로이드가 전해준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줄리아는 여전히 토마스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와의 사랑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이 사실을 확신한 안토니는 베를린으로 토마스를 찾으러 가서 그의 친구였던 크나프를 만나게 되고, 그의 계략으로 토마스와의 연락이 끊겼음도 알게 된다. 크나프의 계략은 줄리아의 행적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히게 되고 마침내 줄리아와 토마스는 18년 만의 재회시간을 갖는다. 안토니의 마지막 과업은 결혼을 약속한 아담과의 관계를 끝장내는 것이었다. 아담으로 하여금 안토니의 음모임을 깨닫게 하여 영원히 줄리아로부터 떠나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토마스가 들어오게 만든다. 다소 황당하지만 안토니는 그게 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먼저 읽은 독자로서 이 소설은 올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임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사랑의 가치와 부모와 자신 간 사랑, 연인 간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고 날 나무랐지? 그럼 자식들이 떠나는 날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고 있니?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어떤 기분이라는 걸 알고 있니? 내가 설명해주마. 부모들은 자식이 떠나는 모습을 문턱에서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야. 다 큰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내 피요 살인 자식을 떠나게 만드는 그 무심함, 자식들로 하여금 부모를 떠나게 하는 그 무심함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

이젠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지. 떠난 자식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야. 알겠니, 줄리아? 하지만 그 어떤 아버지도, 또 그 어떤 어머니도 덕을 보자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야.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린 자식을 사랑하니까 말이다.(p.388~389)

 


 

저자 : 마르크 레비(Marc Levy)

 

영혼을 울리는 로맨스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작가. 1961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의 교외 불로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그는 적십자 청년봉사단에 지원해 6년 동안 제3세계를 위한 인도적 활동에 참가했는데, 이 때의 경험은 그의 두 번째 소설 『너 어디 있니?』에 잘 녹아 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 첫 회사 '로지텍 프랑스'를 설립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영상관련회사 CEO로 일했으며, 이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건축 설계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

1991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차린 건축 사무소가 4년 만에 프랑스 최대의 오피스 건축설계 회사로 발전하면서 코카콜라, 렉스프레스 등 굵직한 대기업들의 사옥 건축을 맡았다. 이 경험은 그의 저서 『행복한 프랑스 책방』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건축가 앙투안을 통해 잘 묘사되어 있다. 1998년, 유아불면증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아들 루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하면서 소설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방송작가인 누이동생의 권유로 출판사에 보낸 『저스트 라이크 헤븐』의 원고가 출간이 결정되었고, 소설의 스토리를 본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작품의 시나리오 판권을 200만 달러에 사들이기로 한다. 그렇게 제작된 영화가 바로 [저스트 라이크 헤븐 Just Like Heaven]이다. 이후 마르크 레비는 건축회사 대표직을 사임하고 런던으로 이주해 글쓰기에만 전념하는데, 이렇게 직접 경험한 런던 생활이 매력적으로 반영된 작품이 바로 『행복한 프랑스 책방』이다. 이 작품 역시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영화화되었는데, 2007년 9월 4일 런던에서의 첫 촬영을 시작으로 10월에는 파리 근교에서의 촬영을 거쳐 2008년 7월 2일 프랑스에서 개봉하였다.

지금까지 발표한 여덟 권의 작품은 모두 프랑스 아마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첫 번째 작품인 『저스트 라이크 헤븐』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도서로 기록되었으며, 두 번째 소설 『너 어디 있니?』와 세 번째 소설 『영원을 위한 7일』 역시 2003년 프랑스에서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소설이 되었다. 또한 『행복한 프랑스 책방』 역시 2006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52만 5천부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마크 레비의 소설들은 모두가 작품마다 프랑스에서 최고 판매량을 기록, 총 1,7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또한 41개국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독일에서만 2백만 부 이상 팔린 것을 비롯하여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작품으로 『너 어디 있니?(Ou es tu)』(2001), 『영원을 위한 7일(Sept jours pour une eternite)』(2003), 『다음 생에(La prochaine Fois)』(2004), 『그대를 다시 만나기(Vous revoir)』(2005), 『내 친구 내 사랑(Mes amis Mes amours)』(2006), 『자유의 아이들(Les enfants de la liberte)』(2008), 『낮(Le premier jour)』(2009), 『밤(La premiere nuit)』(2009), 『행복한 프랑스 책방』, 『낮』 등이 있다.

 

역자 : 강미란

 

프랑스 문학 및 프랑스어 교육공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르아브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마크 레비, 마르탱 파주, 프랑수아 글로르 등의 작품들을 다수 번역했다.

지금까지 옮긴 책으로는 『그림자 도둑』『밤1, 2』『낮1, 2』『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꼬마 꾸뻬, 인생을 배우다』『아빠, 어디가?』『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나는 지진이다』『다이어트 소설』『그 후에…』『백장의 백지』『샤바의 소년』『꼬마 꾸뻬, 인생을 배우다』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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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 -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
로저 스크루턴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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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간의 본질』은 표제어가 드러내듯 인간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사유하고 연구하는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다. '인간의 본질'이란 명제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은 고대부터 이미 있어 온 것이긴 하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철학의 영역에서 사유해야 할, 철학자의 몫이었다. 수천 년간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사유를 거듭해 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그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내세운 본질 탐구 이론을 집대성한 책 『이정표』(해제)를 통해 「인간의 본질로서의 탈존」이라는 이론을 설명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본질 규정은 올바른 것이긴 하되, 참된 것은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를 확장시켜 인간의 본질은 존재자의 차원에서 동물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다시 말해 인간에게 이성적 활동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이 이미 존재의 밝음 안에 들어 서 있기 때문이라는 탁월한 이론에 접근한다. 이러한 사태를 우리는 '탈존'이라 부르고 우리는 여기에서 종래의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이 망각했던 인간의 본질을 발견한다고 밝혔다. 즉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밝음 안에로의 탈존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인간은 존재의 밝음 안에 서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받아들이므로, 존재의 밝음에로의 탈존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이성의 가능 근거라고 강조한다.

이 책 『인간의 본질』은 저자 로저 스크루턴(Roger Scruton)의 짤막한 저서로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풀이하자면 인간의 본질은 현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을 오히려 후퇴시켰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현재까지의 과학의 발전의 총아로 군림하고 있는 "AI(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대체할까?"라는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과학은 AI가 결국 인간을 대체할 것이며, 인간은 AI에게 오히려 굴복하는 종으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내용의 책이다.

 


 

영국의 위대한 지성으로 손꼽히는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의 본질’을 꺼내 보인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의 분명한 ‘인격체’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또 다른 타인을 마주하며 책임을 다하는 인격체로서의 인간, 바로 그곳에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자리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진행된 저자 스크루턴의 특강을 현장감을 살려 담았다고 책의 역자 노정태는 밝힌다. 이 책은 과학과 현대 철학이 간과한 인간에 대한 논의를 정교하게 펼쳐낸다. 책의 서문 격인 글에서 저자가 강의한 내용 중 강의 내용의 핵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도 결국 동물일 뿐이라는 과학의 냉랭한 시선이 팽배하고 AI의 발전으로 로봇과 인간의 경계마저 흐려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인간성'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물과 똑같은 생물학적 개체만으로 해석해도 안 되는, 로봇을 닮은 계산 기계도 아닌,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게 만드는 인간 고유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무엇보다 인간은, 스스로와 타인을 인식하는 '인격체'이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고 또 다른 인격체인 타인을 마주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무와 권리, 책임감을 부과받는 정신적 존재"라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는다. 또 이런 인격체만의 도덕성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루는 근본적인 바탕이라고 강조한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 피터 싱어나 존 톨즈 같은 현대철학자들은 모두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과 도덕성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면 끝이라는 현대적 오만함을 넘어 도덕을 계산 가능한 딜레마로 축소하려는 협소한 시도를 넘어 '나'와 '너'라는 두 인격체의 만남이 드러내는 근본적인 도덕성에 주목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도덕을 회복해야 할 때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 로저 스크루턴은 1944년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젊은 시절 68혁명을 목격한 이후 평생 반지성주의에 반대하여 꾸준한 연구, 강연, 사회 참여를 이어 나갔다. 런던대학교 버크벡칼리지에서 미학을 20년간 가르쳤으며, 올곧은 철학적 소신과 정교한 논리로 현대 사상계의 유행과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활발히 개진했다. 일생에 걸친 철학 연구와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2020년 타계했다. 이에 따라 이번 번역판은 역자인 노정태가 책 첫머리에 〈옮긴이의 말〉을 썼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저자 스크루턴의 강의 내용을 잘 풀어 '해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역자에 따르면 2023년을 사는 우리는 마치 꾸준히 돌려줘야 기계가 잘 굴러가듯, '단백질로 만들어진 기계'인 우리도 예측 가능한 일상을 꼬박꼬박 해나간다. 우리는 바야흐로 뇌과학에 입각한 '루틴'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존재인 나를 잘 이해하자'. 좋은 말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나 자신을 통제하고 관리해 보자고 누군가 말하면, 그에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게 맞는 말일까? 내가 나를 이렇게만 바라보고 이해해도 되는 걸까? 파블로프가 개를 훈련시킬 때 썼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 자신을 취급하고 있다면,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역자는 이 질문이 영국 보수주의 철학자인 저자가 바로 이 책 『인간의 본질』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실험실의 동물을 바라보는 과학자의 그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20세기 초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는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역자는 지적한다. 이유는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서 출발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이해' 담론이 지니는 장점을 생각해볼 것을 역자는 주문한다. 재미있고 실용적이어서 과학에 따른 이론은 '나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질문, 주장, 답변을 번갈아가며 주장을 담는다. 책에 따르면 도파민과 유전자가 당신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을까? 뇌과학, 신경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인간이라는 ‘생물종’을 설명하려 열중인 시대, 우리는 점차 자기 자신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대하는 데 익숙해지고 말았다. 인간을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 개체로 여기는 과학적 시선은 객관성에 치우친 과학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외면했고, 사람들이 묵묵히 지켜오던 도덕적 의무감과 타인을 향한 애정과 관심은 힘을 잃었다. “냉소를 존경의 대상으로, 인색함을 멋진 것“으로 만든 시대에서, 과학적으로는 해명할 수도 없을 ‘삶의 의미’를 더 이상 묻지 않는 인간은 ”마지못해 살아가는“ 하나의 동물로 남았다.

이 책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지적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이 책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현대 철학이 간과한 인격의 특성과 도덕성의 관계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고찰한다.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개체로만 보는 과학,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간과한 철학과 대결하며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있던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향해 우아하게 나아간다. 이 책은 인간을 어떻게 동물로 여길 수 있냐고 따지며 인간의 특권만을 부르짖는 고상한 논의가 아니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인간이라는 종 HUMAN KIND-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 2장 「인간 관계 HUMAN RELATIONS-인격,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철학의 열쇠」, 3장 「도덕적 삶 THE MORAL LIFE-도덕에 대한 현대 윤리학의 오해를 바로잡기」, 4장 「신성한 의무 SACRED OBLIGATIONS-근대적 회의로 가득한 세상, 인간과 도덕을 회복하는 길」 등이다. 1장에서는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과학적 접근의 맹점을 돌아본다. 인간은 당연히 동물이다. 그런데 과연, 동물이기만 할까? 우리는 다른 동물처럼 육체를 가진 존재이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뛰어넘기 어려운 분명한 간극이 있다. 과학은 온전히 해명할 수 없는 그 간극에 인간 고유의 본질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다.

 


 

2장은 인격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개인과 사회의 상보적인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바로 ‘인격’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본성으로 향하는 철학적 열쇠다. 유전자와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몸에 대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해 줄 수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해 주지 못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나’로서 느끼는 감각,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할 때 느끼는 도덕 감정을 우리 뇌 속 신호체계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과학적 사실은 우리가 느끼는 삶의 감각을 해명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1인칭’의 인격체로 인식하며, 또 다른 인격체인 타인을 인식한다. 두 인격체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근본적인 도덕 감정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지는 인격체로서의 우리 삶을 해명한다.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며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 우리 자신을 해명하는 철학적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철학의 오랜 소명을 붙들고“ 있겠다고 말하며 과학이 축소한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명확한 논리로 다시 불러낸다. 그동안 ‘본능’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온 웃음, 성적 쾌락 등의 문제 또한 ‘인격’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따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음을 철학적으로 밝혀낸다. ‘나’에서 시작해 ‘너’로 향하는 상호인격적 관계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풍부한 삶의 경험에 접근할 수 없다. 인간의 공동체는 생물학적 개체들이 모인 군집을 넘어서 인격체들의 관계로 형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과학뿐 아니라 여러 현대 철학 역시 근본적인 인간성과 도덕 감정에 집중하지 못했다.

3장은 ‘피터 싱어로 대표되는 현대 윤리 철학의 주류와의 한판 승부’로 이어진다. 현대 윤리학은 ‘트롤리 문제’로 대표되는 윤리적 딜레마에 사로잡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허깨비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도덕의 문제가 ‘트롤리를 굴려서 한 명을 죽일지 다섯 명을 죽일지 고민하는’ 계산의 문제로 축소될 수 있을까? 피터 싱어를 포함한 결과주의자들은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도덕적 계산기를 두드리지만 “행복에 무엇이 포함되는지, 어떤 잣대로 특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도덕적 감정과 상식에 벗어나는 '책상물림' 철학자들의 계산기를 넘어,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도덕에 집중해야 한다. 도덕적 결과주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호인격’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도덕을 이해할 수 있다. 도덕은 무엇보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맞댐으로써 도달하는 인격적 관계의 침전물”이다. 현실과 괴리된 철학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4장에서 다루어낸 존 롤즈나 로버트 노직 같은 미국의 사회철학자들, 자유주의자들 또한 인간 삶의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사회를 인격체들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적이 있던가?라고 저자는 반문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약의 문제가 설득력을 잃는 것은 우리 삶에서 겪는 많은 상황이 계약 없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합의 없이 특정한 상황에 놓이고, 그에 맞는 미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으로부터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부과받는다. 도덕을 계산이나 계약의 문제로 접근할 때 우리는 도덕에 대한 냉소로 빠져들기에 십상이다.

우리가 애써 지켜오던 전통적인 도덕과 미덕이 쉽게 냉소 받는 사회, 다시 ‘인간의 본질’에 집중해 우리의 도덕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도덕은 지난 시대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도덕 감정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노력했던 ‘인간’의 미덕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미덕을 “이성이 권하는 바에 따를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했던 것처럼, 도덕은 내가 아닌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 타인의 요청에 답하는 인격 고유의 능력에 가깝다. 나를 ‘넘어선’ 곳에서 내게 다가오는 ‘의무’. 저자가 강연 이후 추가로 덧붙인 4장의 제목이 “신성한 의무”인 이유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종교를 “도덕적 삶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것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라고 말한 대목을 이해할 수 있다. 특정한 종교나 교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인격의 근본적인 특성인 ‘종교적’ 태도를 회복하자는 의미다. ‘나’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나’를 초월하는 요청에 성실히 응답할 것. 꿋꿋이 자신과 타인의 삶에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인격체로서의 우리의 행동과 마음에 책임을 질 것. 과학의 세례 속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종교적’ 태도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동물도, 기계도 아닌 하나의 ‘인격’인 우리를 돌아보기. “나”와 “너”라는 두 인격이 마주하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의 본질’이 있다.

 

저자 : 로저 스크루턴(Roger Scruton)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는 철학자. 1944년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젊은 시절 68혁명을 목격한 이후 평생 반지성주의에 반대하여 꾸준한 연구, 강연, 사회 참여를 이어 나갔다. 런던대학교 버크벡칼리지에서 미학을 20년간 가르쳤으며, 올곧은 철학적 소신과 정교한 논리로 현대 사상계의 유행과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활발히 개진했다. 일생에 걸친 철학 연구와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2020년 타계했다.

런던대학교 버크벡칼리지 재임 이후 보스턴대학교 초빙교수, 미국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워싱턴 윤리공공정책센터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그 외 케임브리지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 루뱅대학교 등 세계 각국 명문교육기관에 초빙된 바 있다. 이 책은 2013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진행했던 특별 강연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철학, 미학, 정치학에 관한 4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는 『현대 철학 강의』,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 『Art and Imagination』, 『The Meaning of Conservatism』, 『How to be a Conservative』 등이 있다.

 

역자 : 노정태

 

자유기고가·번역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칸트 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시사·정치 전문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경향신문』·『주간경향』·『프레시안』·『GQ』 등에 기고했다. 현재 『조선일보』와 『신동아』에 칼럼을 쓰고 있고,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탄탈로스의 신화』, 『논객시대』 등이 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 『실전 격투』, 『정념과 이해관계』, 『밀레니얼 선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아웃라이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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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레스토랑 - 오지랖 엉뚱모녀의 굽신굽신 영업일기
변혜정.안백린 지음 / 파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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