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 구로베 협곡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고노가와 준코 외 지음, 박은정 외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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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는 일본에 있는 댐 공사에 왜 한국인들이 노동자로 일했을까?란 의문에 대해 답하는 역사서이다. 표제어로만 본다면 자칫 소설 작품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고노가와 준코, 호리에 세쓰코, 우에다 스에노 등 3명의 일본인 저자들이 직접 뛰고 취재해 발굴한 논문과 르포 형식의 글을 책에 실었다. 의문점이 한 가지 더 늘었다. 왜 일본인들이 구로베 댐 공사에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고, 희생 당한 사실을 밝혀 내려는 것일까. 구로베 댐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높이로도 유명한 일본 최대의 댐으로 손꼽힌다. 이 댐은 일본 도야마현에 있으며 협곡의 풍광이 아름다워 일년 내내 관광객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곳이라고 한다. 수력발전을 위해 지어졌으며 이 거대한 댐 건설을 위해 일본 건축 기술을 집대성한 구조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을 자랑하는 구로베댐 아래 조선인 강제 징용의 역사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은 쓰여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물론 일본 정부의 공식 기록이 아니다. 강제 징용이다보니 착공 당시부터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를 부정했을까? 그러나 저자들이 확인하 바로는 착공 당시 징용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선인 신분을 일부러 숨긴 것인지 전후에 삭제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조선인 노동자는 없었는지 불분명한 상태로 일본 최대의 댐은 묵묵히 제 기능을 오늘날까지 수행해 왔다. 이 댐은 40년 걸려 1963년 완공한 것이라면 일제 때인 1922년 안팎의 시기에 착공했다는 이야긱다. 당시 신문이나 정부 문서, 혹은 기업 임금 등의 문서에 남겨져 있을 텐데 조선인은 없다고 일본 정부는 주장하고 있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강제 징용이라면 댐 공사 중 사고 등으로 사망하거나 병사하는 등은 역사적 문제로 비화될 문제다. 일본 정부는 당시 댐 구역 행정기관인 도야마현의 기록 부재만 되풀이하고 있다.

 


 

강제 징용은 전후에 문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완공된 후 철저하게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이에 저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입소문이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일했던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어 혹시 그들을 만난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아무튼 패전 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피해 당사자 국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구로베 댐 공사에 조선인도 강제 징용이든 자원 노동자이든 일한 사실까지 왜 숨기려 하는가.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면 외교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일까? 똑같은 전쟁을 수행하고 일제보다 더 잔혹한 학살의 경험을 가진 독일인들은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과 진정한 사과 등을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데 일본은 너무나도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입으로 전해진 말이라도 파헤쳐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피해자 입장 아니겠는가. 저자들은 한국인들이 아닌데 일본 정부에 반하는 기록물을 썼을까? 양심적 일본인인가? 책도 저자들도 처음 보고 들어서 독자 역시 확인된 사항이 아니라 조사 결과로서 조심스럽게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사안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한국인인 독자는 일본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다. 일제의 태도와는 다른 일본인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했다.

공식적 일본 정부의 주장은 아니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말이라서 오히려 한국인이 조사 발굴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신뢰감이 가기도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일본인 저자 3명이 공동 입장으로 구로베 댐 공사에 한국인(당시에는 '반도인', '조선인'이라고 칭했다고 함)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대규모 눈사태로 목숨을 잃거나 공사중 사고로 생명을 잃은 한 많은 죽음이 많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늦게나마 저자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저자들은 당시 조선인이 왜 바다 건너 구로베까지 와서 일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존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구로베댐의 건설 과정, 특히 구로3과 구로4를 중심으로 추적한다.(구로베 댐 4개의 공식 명칭은 구로베 1수력발전소, 구로베 2수력발전소, 구로베 3수력발전소, 구로베 4수력발전소이지만 저자들은 약칭으로 '구로1' '구로2' '구로3' '구로4'로 사용했다) 숫자를 매긴 것은 구로베 댐이 4개로 인근에 지어졌으니 공사 순으로 순서를 매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로3' 구간은 구로베댐 공사 중 가장 가혹한 환경이었다. 저자 3명 중 한 명인 호리에 세쓰코가 쓴 책 〈머리말〉에 따르면 구로베강 제3발전소에서 터널을 통과하여 6km 상류에 있는 센닝다니까지의 댐을 말한다. 이 댐은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기 바로 직전인 1936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0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이 지역 사람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돈을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조선인들도 상당수 건설공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구로3' 댐 공사를 포함한 구로베강 전원 개발에 종사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신으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함바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들은 구로베 협곡 입구인 우나즈키에 살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현재 오륙십 대 나이인 현지 사람들에게는 분명 조선인 동급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전 세대에서도 구로베 선상지의 농가에서는 농한기가 되면 협곡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도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으므로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들은 당시 일본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위험을 줄이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주장했지만, 사전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하려 무리하게 강행한 공사였다는 점도 밝혀내고 있다.

 


 

저자들이 밝힌 바로는 1940년 '구로3' 댐이 완성되던 시기에는, 공사 기지인 우나즈키를 포함해서 우치야마의 인구는 4,830명이었다. 우치야마의 인구와는 별개로 '구로베 오쿠야마 국유림'의 함바집에 기거하는 공사 관계자가 3,500명이었는데 그 중 약 3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노동자 혹은 주민으로서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 공헌한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나즈키 마을의 역사나, '구로3' 댐 건설을 모델로 하는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고열수도』에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 어려운 공사를 이뤄낸 사토공업주식회사(사토구미)의 회사 연혁인 『110년의 발자취』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역사적인 건축물 공사에 종사했다고 해서 기술자나 노동자들이 언급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가 없었으면 '구로3' 댐은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었고, 당시 신문에도 일본인 이름과 함께 사고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이름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공사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조선인 '황민화' 추진 정책이 한창이어서 신문에도 미담 기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 각지에서 이미 10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동자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저자들이 왜 이 책을 쓰기 위해 구로베 댐 건설 조선인 노동자의 유무를 추적해는지의 이유다. 이 댐 공사 때는 폭발, 고열, 눈사태 등으로 인한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더불어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댐 공사가 시작되었던 1900년대 초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었고, 이미 일본 각지에 10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동자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에 관한 연구나 간행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당시 댐 건설 관계자와 그 가족, 유족들을 취재하고 신문 기사, 잡지, 영상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강제 징용·노동에 대한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구로베강 제3발전소 건설」(고나가와 준코)에서는 공사 자료와 관계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제2장 「조선인 유족들의 반세기」(호리에 세쓰코)에서는 ‘구로3’ 시아이다니 눈사태를 중심으로 구로3의 노동자들, 사고 유족들을 찾아간 한국 여정을 보고한다. 마지막 제3장 「도야마현의 조선인 노동자」(우치다 스에노)에서는 구로베의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적 배경을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확인한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조선인 노동자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일본이 저지른 잘못의 근거를 조명함으로써 앞으로의 한일관계까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 책이 "저 발전소에, 이 도로에 당신네 나라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계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라고 독자는 기대한다.

 

3장 「도야마현의 조선인 노동자」에는 〈'강제연행' 이전사〉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장에서 저자 우치다 스에노는 공사장에서 조선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도야마현의 대응을 5가지 점에서 살펴본 기록을 모두 적었다. ① 싼 임금과 가혹한 처우로 불안정한 노동-함바에서 ②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③ 일상적, 치안 단속 대상으로서의 조선인 ④ 지역, 노동 현장으로부터의 배척 ⑤ 자연 발생적 노동 쟁의 반발 등이다. 특히 ①에서의 사례를 나열하고 있는데 매우 구체적이다. 임금은 대부분의 큰 공사장이 하루 1엔 20전에서 90전으로 도야마현 사람에 비해 20~30전이 적다. 그러나 간부 당 2~3할이 공제되고 하루 식대 70~80전이 빠진다. 손에 쥔 일당은 60~70전. 이 돈은 하루 술값으로 사라지는 게 다반사다. 또 하루 12시간의 노동, 판잣집 주거지, 여자보다 술을 동경한다고 적었다.

 


 

"일본에 도항해온 조선인들은 악조건 속에서 노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많은 데이터와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박정식의 『조선인 강제 연행 기록』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의 50~70%에 불과했고 직종은 대부분 토목공이었다고 한다. 일용직 인부의 경우, 고용주나 인부 감독으로부터 평균 30~40%의 중간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생활수준은 최하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5년 도쿄의 토목 노동자 및 인부의 세대 당 월 평균 수입은 각각 20엔 78전과 19엔 60전으로 최저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p.61)

 

역자 : 박은정

건국대학교에서 일본어교육을 전공하고 일본 도야마대학교에서 석사, 히로시마대학교에서 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검도를 배우면서 문학과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9년 시즈오카 세계번역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시즈오카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수학했다. 옮긴 책으로는 다케다 타이준의 『반짝이끼』와 나카지마 아쓰시의 『빛과 바람과 꿈』 그리고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01』(공역), 『발칙한 그녀들: 일본문학 컬렉션 02』(공역)이 있으며,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別れの谷)』(공역)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역자 : 안영신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엔도 슈사쿠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동남보건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출강하였고, 타자론과 육체 담론에 관심을 갖고 일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엔도 슈사쿠 문학과 마르키 드 사드」, 「일본 전후문학과 노년의 젠더」, 「일본 전후문학에 나타난 육체의 표상」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선’ 표상의 문화지』(공역), 『황후의 초상』(공역),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일본문학 컬렉션 01』공역), 『발칙한 그녀들: 일본문학 컬렉션 02』(공역)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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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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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표제어로부터 오는 강렬함이 이 책의 내용과 잘 맞는다. 표지 그림을 볼 땐 소설 같다는 느낌이지만 제목만 따로 읽는다면 '유전학' 논저로도 보인다. 표제어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멋진 제목을 주제로 잘 구성된 소설이어서 독자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은 우리 나라가 아닌 구소련 직전과 이후 '소련'의 일을 다루지만 정치적 실제 인물이 중심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이색적'이거나 특이한 느낌으로부터 오는 생소함을 완화시킨다. 과학(의학) 소설임도 확실하다. 19세기 이후에야 체계를 갖춘 '유전학'이 주요 소재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이야기의 발단도 구소련의 탄생 직전이다. 1913년, 시베리아 지역. 극한의 추위가 몰아쳐 사람이 살기 힘든 러시아 제정 변방의 한 도시다. 소비에트 이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왕 때의 이야기다. 다른 유럽 여러 나라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농노제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해 민주주의 체제와 함께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제정 러시아는 농노제를 여전히 유지하며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할 상태여서 민심은 흉흉하고 러시아는 숨만 쉬고 있는 빈사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미 유럽의 변방으로 치부되던 때다.

당연히 국민들, 특히 농노를 비롯한 농사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도시 노동자의 폭동이 오늘 내일 할 정도로 정세는 악화됐다. 큰 거리에서 대낮에도 틈만 나면 범죄가 일상이 될 수밖에 없는 최악의 국가 재정 상태다. 뜻 있는 지식인들은 노동자·농민 등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날짜를 기다린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해 유럽이 온통 전쟁터로 바뀌어도 전쟁보다 생계를 위한 음식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소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한 작은 도시에서 스스럼없이 강도 행각을 벌이는 한 사내에 집중하고 있다. 일을 끝내고 마차에 올라탄 사내가 움켜쥔 손에는 돈자루가 들려 있다. 이 정도면 사내의 윗선인 '그분'이 세상을 뒤엎을 공작금으로 넉넉하다고 속으로 되뇌인다. 30만 루블. 사내는 그 길로 부모와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유유히 고향을 떠난다.

 


 

이 극악무도한 사내가 훗날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주변 이웃나라를 모두 통합해 소비에트연맹을 수립한 레닌의 후계자이다. 바로 스탈린이다. 냉혹한 권력의 대명사, 스탈린은 넓은 동토의 소련에 '철의 장막'을 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다. 냉혹한 성격으로 러시아는 소련으로 거듭나며 일정 성과를 거둔다. 그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공산주의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그가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일원이 되었는지 이 책에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역대 소련의 서기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도 2차 대전 후 소련의 영향력으로 분단됐고, 지금도 반쪽 국가로 한 많은 사람들을 많이도 만든 '악'의 구체적 실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 소설은 스탈린이 태어나고 이후 소련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후 자신들의 나라처럼 냉혹한 권력자의 '유전한 실험'이다. 이 소설의 소재와 주제를 제공한 자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리센코 후작이다. 리센코는 러시아에서 빈농이나 다름없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영재였다고 한다. 그의 능력을 알아 본 제정 러시아 황제는 그의 유학을 지원했고, 유전학과 진화론에 관심이 있었던 리센코는 저명한 스승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세운 가설을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해 실험해 보기로 한다. 추위를 타지 않는 강한 민족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절대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서양 의학의 기본에 입각해서도 인간을 직접 실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의사 이전에 누구도 해서는 안 될 금지 사항 아닌가?

 


 

이 책 『악의 유전학』에서 실험을 주도하는 리센코 후작은 실존 인물인 생물학자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를 모델로 해 탄생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는 리센코 외에도 여러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담겨 있다.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실존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고 여기에 있는 모든 사건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주요 사건이나 일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자 임야비가 소설로 재구성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팩션(faction, 허구+사실)이다. 인간 대상 실험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제도 했던 일이라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우리도 일본에 의해 유능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옥사한 것으로 처리된 예를 배우고 들었다. 독자로서는 '731부대', '마루타'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증오심이 불탔지만 두 번째 들으니 그때만큼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일제가 시도한 것보다 이전이란 사실에 '인간 실험'이란 게 일제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에 인간의 '악'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됐다.

이 책에서 리센코가 유전학에서 배우고 느낌 점 중에서 가장 영향을 준 학자와 학설은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용불용설'을 발표한 라마르크의 『동물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다. 이때 라마르크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은 환경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발달, 불필요한 부분은 퇴화되어 유전된다는 ‘용불용설’ 이론을 발표했다. 환경에 의해 ‘획득’한 ‘형질’은 이후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힌 것이다. 그 이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완두콩 실험을 통해 얻어진 '멘델의 법칙' 등 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게다가 프랜시스 골턴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열성 인간의 임신과 출산을 막고, 우성 인간의 출생률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우생학’을 주장하며 더 뛰어난 인류를 만들기 위한 주장들이 대두되기도 했다.

 


 

저자 임야비는 의사 출신 작가다. 그가 유전학을 소설 작품으로 쓴 것은 유전학의 실체를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짐작되는 부분이다. 또 실명을 사용함으로써 소설의 구체적 내용들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의 꼬리표가 붙지만 너무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사로서 저자가 의학이나 생물학에 깊은 조예가 있을 것이고, 작가로의 저자는 허구와 사실의 구분을 하고 소설로 구성했을 터이다. 옳다 그르다를 위한 사실 관계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게 독자의 생각이다. 사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대화나 기타 표현, 묘사, 인물 연관 관계 등이 저자가 창조한 내용이지, 사실 기록은 아닐 터이니 내용만 파악하면서 읽으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구성을 잘하면 스토리는 가끔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독자들이 사실, 진실로 믿게 되기 쉽다. 이런 점만 배제한다면 이 소설 작품은 한결 재미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리센코가 스물한 살이 되던 1856년, 자신만의 확고한 이론을 완성한 그는 내로라하는 유전학자들의 책을 모두 덮어 버렸다. 그는 세계 최초로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인간에게 적용해보기로 결심한다. 영국에서 '일란성 쌍둥이'와 '천재의 혈통' 연구의 권위자인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을 무작정 찾아가 자신이 확립한 이론을 대학자인 골턴에게 내민다. 골턴은 젊은 '러시아 천재'의 이론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론이 법칙으로 성립하려면, 반드시 실험적 증명과 과학적 통계가 수반돼야만 한다고 조언해준다. 자신이 고안한 통계학을 전수해 줄 수 있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시간적, 윤리적, 재정적 문제로 시도 자체가 힘들다는 쓴소리도 건넨다. 하지만 리센코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러시아로 되돌아온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을 적용해 법칙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한 인간 대상 실험을 실천을 옮긴다. 자신의 유전학을 이용해 인간을 강한 유전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세운 이론을 법칙으로 정립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 황제의 도움을 받는다. 정확히 1년 후 리센코는 연구원들과 50명 정도의 군인을 이끌고 유쥐나야로 들어온다. 이들은 곧장 홀로드나야의 수도원으로 가서 250명의 남자아이와 250명의 여자아이가 들어와 있었다. 이 중의 한 명이 케케, 스탈린의 어머니가 있었다.

 


 

인간을 개조하겠다는 목적으로 자행된 루센코의 실험에서 피실험자였던 사내의 어머니(케케)는 한 살 때 투루한스크 지역의 산속 마을로 옮겨졌다. ‘기적의 케케’라 불리며 행복하고 사랑과 설렘이 있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실험체로 철저히 이용당하며 처절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베소(스탈린의 아버지)와 그곳을 탈출하게 된 20년 동안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들과 함께하는 날 밤, 케케는 자신이 살아온 곳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모든 진실을 꺼내 놓는다.

그로부터 6년 후, 사내는 다시 고향 마을을 찾아온다. 그사이 사내의 아내 카토와 아버지 베소는 죽어 세상에 없었다. 사내는 각종 폭동, 테러, 파업, 방화, 강도, 암살 등을 일삼으며 잡혔다 탈출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는 멀고도 추운 지역,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가게 되었고, 유형 가기 전날 밤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들른 것이었다. 투루한스크로 가게 되었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케케는 그동안 품어 왔던 비밀을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네 아비 베소는 악마가 될 만한 배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낱 불쌍한 주정뱅이일 뿐이었어.”

평생 술을 입에 대 본 적 없는 노파가 테이블로 잔을 가져와 보드카를 따랐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악마는 따로 있다. 그 악마가 베소와 나를 완전히 망가뜨렸어.”

노파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보드카를 반 잔이나 마셨다. 아들은 난생처음 보는 어머니의 음주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을 막 풀려는 참이었다.(p.19)

 


 

의사 출신의 저자는 ‘유전학’과 ‘우생학’이라는 과학 지식과 정치적 이념이 일상을 지배했던 19~20세기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악의 유전학』을 구상했다. 우생학을 통해 ‘강한 나라’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진 과학자 ‘리센코’와 그 과학자의 실험체로 20년 동안 산속 마을에 갇혀 살았던 수백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실험체 ‘케케’. 그리고 케케의 아들, 반전의 ‘사내’.

이 책 『악의 유전학』에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과학적 사유와 역사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엮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완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20개월 동안 1600여 쌍의 쌍둥이로 인체 실험을 자행했던 것처럼 당시 러시아에서도 실제로 이와 같은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촘촘한 구성과 철저한 고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케케는 저수지로 걸어갔다. 후작의 방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하얗고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저수지 옆에 놓인 큰 돌을 양손으로 들고 빙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누군가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이 있었다. 큰 돌로 구멍 주변의 얼음을 깨 커다란 검은자를 만들었다. 케케는 돌을 품에 안고 얼음 구멍 앞에 섰다. 각막이 간지러워 올려다본 밤하늘은 오롯이 오로라 차지였다. 케케는 언덕 위 수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녕, 베소.”

엄마의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케케는 흰자 속으로 가라앉았다.(p.208)

 

저자 : 임야비

 

서울. 시월생.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유리알 유희를 하며 여러 유형의 글을 쓴다. 대학로 극단에서 연출부 드라마투르그로 일하며, 총체극과 클래식 연주회를 기획 및 연출한다. 2020년 장편 소설 《클락헨Clock-Hen》을 출간했고, 2022년에 출간한 증언 문학 《그 의사의 코로나》는 <신과 함께>를 제작한 대형 영화 제작사, 리얼라이즈 픽처스와 영상화 계약을 완료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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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머츠가 치워드립니다
이언 맥웨시.캐리 매크로슨 지음, 이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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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아웃사이더 ‘고딩‘, 열입곱 살의 소녀 마고 머츠가 꽁꽁 숨은 악마 같은 성범죄자들의 정체를 밝히고 정의를 실현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법과 행정의 부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디지털 탐정의 분투기로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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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머츠가 치워드립니다
이언 맥웨시.캐리 매크로슨 지음, 이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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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순간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n번방’을 떠올랐다. 처음 이 사건이 수면 위로 올랐을 땐 단순 포로노물 제작 유포로 알았으나 내용이 수사로 드러나자 사회적으로 큰 경고음을 냈다. 특히 수많은 피해자들이 아동 및 미성년자들이어서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그 전에는 이런 범죄가 다수의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데 작은 조직으로 가능한 이유가 인터넷이라든지 디지털 시스템이 곳곳에서 허점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범죄의 지능화·흉포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랐다. 다량의 개인정보 유출 문제도 굉장히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지만 '해외 사이트'라는 이유로, SNS의 개인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손쉽게 가능해진다는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 『마고 머츠가 치워드립니다』는 ‘리벤지 포르노 사이트’의 실상을 열일곱 소녀의 시각으로 파헤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톡톡 튀는 열일곱 살 소녀의 시선으로 진지한 사회 문제를 발랄하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칫 진지한 주제 탓에 무거울 것 같은 이야기는 마고 머츠라는 풋풋하고 톡톡 튀는 주인공을 통해 발랄하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우리나라에 앞서 고도화·지능화된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미국에서 이 소설은 “깊이 있고 흥미진진하면서도, 마땅히 분노해야 할 정의로운 문제를 다룬 소설(Kirkus Reviews)”, “희생자들을 보호하고 정의를 되찾으려는 그녀의 노력에 빠져든다(BCCB)” 등의 찬사를 받으며 언론과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주인공인 마고는 루스벨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개인적인 고민(교실 내 파벌, 연애, 고만고만한 친구 관계 등)보다 사회적 시스템의 미비점, 정치적 캠페인에 더 관심을 두는 그녀는 학교에서도 대표적인 괴짜이자 '아웃사이더'로 통한다. 하지만 또래 고등학생부터 교사는 물론 직장인까지 그녀를 수소문해서 찾아올 만큼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탁월한 해킹 수준과 탐정 능력을 갖춘 ‘디지털 장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우관계와 사회성은 자신과 엇비슷하지만, 해킹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이웃사촌이자 한 살 위 오빠인 새미 산토스와 한 팀을 이뤄 인터넷에서 감추고 싶은 온갖 스캔들을 은밀하게 삭제한다.

점점 늘어나는 수요에 효율적이면서도 합법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그녀는 아예 ‘MCYE(마고 머츠가 치워드립니다Mertz Cleans Your Filth의 약자)’라는 회사명으로 사업자등록까지 한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정상인일 수 있는 곳”인 스탠퍼드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등록금을 벌 때까지 고등학생과 사업자로서 이중의 삶을 버티기로 한다.

하지만 졸업반 섀넌의 간절한 의뢰를 듣게 되면서 ‘본캐’와 ‘부캐’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그녀의 일상에도 커다란 균열이 생긴다. 그렇잖아도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며 정신이 없었던 마고는 섀넌의 부탁을 듣기도 전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루비(루스벨트 비치스의 약자)’라는 리벤지 포르노 사이트의 피해자라는 사실과 그녀 말고도 루스벨트고교의 피해 여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기로 한다. 사회성은 별로 없지만 인지력은 최고라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을 듣는 마고의 활약을 어디까지 기대해도 좋을 것인가? 독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마고는 인터넷 해결사답게 꽁꽁 숨은 악마 같은 성범죄자들의 정체를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응한다.

 

 

독자로서는 이 소설의 가치를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이나, 친구들과의 사교성도 부족한 열일곱 살의 주인공이 사회적 모순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꿰뚫어볼 줄 아는 사춘기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동 저자 이언 맥웨시, 캐리 매크로슨의 캐릭터 창조력이 탁월하다고 본다. 마고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불륜을 저지르고, 도박 때문에 빚에 시달리는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적절한 위치에 있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노력도 지녔다. 그리고 목표를 향한 열정과 의지는 남 못지않다는 진취적인 성격을 복합적으로 가진 인물이다. 맡은 일을 하기 위해 감정의 동요 없이 문제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다.

주인공 마고는 실제로 개인을 넘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공의 영역에서 정의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 사실에 몹시 분개한다. 마고가 혼자 힘으로 리벤지 포르노 사이트 ‘루비’를 박살 내고 주모자들을 밝혀낼 것을 다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고는 이웃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섹스팅 스캔들’의 전모가 밝혀지고 난 뒤 가해자 몇몇이 정학을 당했을 뿐, 오히려 피해자인 여학생들 전원이 경찰에서 주관하는 ‘사생활 보호와 신체 지각’이라는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심지어 피해자 중 몇몇도 정학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나 행정당국에서 명확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건 순진한 생각임을 깨닫는다. 정의는 평등한 법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 그리고 성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이야기는 미국에서 일어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적용해도 하나도 다른 게 없을 것 같다는 것이 독자의 독후 소감이다. 독자는 그녀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사회성이 부족한 그녀가 용의선상에 떠오른 이들에게 어떤 기지를 발휘해서 사건을 파헤쳐 나갈지, 과연 그녀의 뜻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 그 뒤를 흥미진진하게 쫓아가게 된다.

 


 

리벤지 포르노 사이트를 박멸하려는 마고의 노력은 다른 한편으로 은둔형 외톨이 기질을 지닌 그녀가 동굴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과정으로 공동 저자의 은유적 표현이다. 또래와 마땅한 공감대를 찾을 수 없었던 마고는 감성보다 이성으로 사람이나 상황을 분석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때문에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람을 평가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고, 말도 섞기 싫은 용의선상의 인물들에게 접근해야 하는 일들을 겪으면서 마고는 조금씩 변화한다. 표면적인 대인관계에 배려와 연모, 실망과 증오 등 복잡한 감정이 파고들면서 감정의 고저가 휘몰아치고 마고는 어느새 사람 냄새가 나면서도 한층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줄 알게 된다. 이 소설에는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지적 능력은 뛰어난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서사가 담겨있다.

굉장한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특히 미성년자인데도 사회적 인지력은 높고,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아직은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진취적 성격의 열입곱 살 마고는 과연 극악무도한 악마 같은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정체를 밝히고,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을까? 마고를 창조해낸 저자들은 이 책이 소설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공동 저자인 경우가 드문데도 이를 원활하고 매끄럽게 처리했다. 사실 현실에서 열일곱 살이란 나이는 아직 미성년자이고 인생관, 가치관 등이 명확한 사람은 드물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공동 저자는 다분히 현실적인 결말로 밀도 높은 인과관계를 완성하고, 독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두 저자의 성격을 합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독자의 판단이다. 마고가 가진 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두 작가의 공통적인 능력 사회 통찰력의 결과 아닌가 싶다. 리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위해를 가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과 범죄에 비해 너무도 부족한 사법 제도의 시스템, 더 나아가 사건이 밝혀져도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불행해지는 사회의 부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문제가 제기되면 수사 담당자가 아닌 정책자들이 관심을 갖고 마땅히 연구해야 한다.

 


 

디지털 최첨단의 시대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이미 우리 사회는 접어들었다. 아직 초기이기 때문에 모든 게 완벽하진 않지만 다른 1~3차 산업혁명 시대보다 시간은 빨라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수많은 개선 과제에서 우선 가장 밑바탕이 되는 AI와 빅데이터, 자율주행과 무인 항공기 발전 등은 상당한 위치에 와 있다고 말하는 시대이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자신의 직업이 없어지는 것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다시피 혁명은 소수가 반대한다고 멈출 수는 없다. 혁명은 가다 멈춘다면 혁명이 아니라 퇴보로 이어진다. 일단 같은 배에 올라탄 우리들은 배가 잘 가고 안정된 속도로, 안착되어가릴 바란다. 초기의 범죄에 대해 마땅한 처벌은 이어지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가혹한 처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이 완성된다면 많은 인간이 퇴출될 것이다. 그 많은 인간에 들어가는 첫 번째 순서는 당연히 범죄자들이다. 그것은 어떤 혁명이든 마찬가지 결과라는 게 지금까지의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증명되어 온 사실이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사실 인간의 노동력에 의지하던 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결국 퇴출됐다. 기존 직업자들의 대부분은 직업을 바꿔야 했다. 어떻게?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구제 받는다. 퇴출될 사람들은 범죄자들이다.

사회가 바뀌면 바뀐 사회라는 것을 대중들이 인식하기에 범죄자 퇴출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또 범죄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더 강력한 처벌을 할 것이다. 디지털 세상에 와서도 이 소설 속의 사람들은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아동이나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다. 당연히 3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는 느끼겠지만 3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더 강력한 처벌 방식을 선택했다. '신종' '다수 피해' '큰돈' 등의 범죄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해 기존 법보다 더 엄하게 처벌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중간에서 저지른 범죄는 디지털 시대에는 이 작품 속의 범죄자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인간의 순리다.

 


 

섀넌은 그린바움 직원들이 보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 내게 조심스레 핸드폰을 건넸다. 곧이어 나도 이유를 알게 됐다. 한눈에도 ‘루스벨트 비치스’는 비밀번호 보안이 걸린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보복성 성 영상물-옮긴이) 사이트였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의 반라 또는 전라 사진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본인의 허락 없이 올린 사진들이었다. 여자애가 누군가와 섹스팅을 하면 그 사진들이 ‘루비’에 실린다. 전 남자친구가 홧김에 올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카일처럼 악감정은 없지만 미성년 여성들의 벗은 몸 사진 모음에 단순히 몇 장 보태고 싶어 하는 놈들이 올리는 경우도 있다.(p.68)

 

저자 : 이언 맥웨시(Ian McWethy)

50개 넘는 나라에서 공연한 희곡을 쓰고, 미국에서 가장 많은 단막극을 만든 베테랑 작가로 손꼽힌다. 아내인 캐리 매크로슨과 함께 《마고 머츠가 치워드립니다Margot Mertz Takes It Down》, 《Margot Mertz for the Win》을 집필했다.

 

저자 : 캐리 매크로슨(Carrie McCrossen)

배우 겸 작가 겸 코미디언. 〈The New Yorker’s Daily Shouts〉, 〈the Lifetime network〉, 〈Funny or Die〉에 글을 기고했으며, 남편인 이언 맥웨시와 소설을 썼다. 아들에게 수제 나무 장난감을 사주는 걸 즐기며,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역자 : 이신

영미권 도서 번역가. 원저자의 문체와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한국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을 추구한다. 옮긴 책으로는 문학수첩의 [펜더개스트] 시리즈와 [셀렉션] 시리즈를 비롯해 《죽기 위해 산다》, 《신비한 소년 44호》,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 [블레이드] 시리즈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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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 인생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
러셀 로버츠 지음, 이지연 옮김 / 세계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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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은 ‘고민하는 존재’인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눈 뜨고 있는 한 생각을 계속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하루에도 수천 번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경험한다. 모두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예를 들거나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 필요도 없는 말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일 수도 있고, 별 의미 없는 소소한 일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러셀 로버츠는 '답이 없는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선택을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제(답이 없는 문제)를 세운다. 저자는 몇 년 전 친구와 산책하다가 그 친구가 자녀를 가질지 말지를 아내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녀가 생겼을 때 잃는 것과 얻는 것을 종이에 죽 적어 보았는데도, 이게 과연 좋은 생각인지 어떤지 두 사람 다 확신이 없다면서 조언을 구했다고 전한다. 저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자녀를 갖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달리 해줄 말이 별로 없어서이다. 대신 부모가 되는 게 실제로 어떤 건지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하는지 되물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녀를 갖기 전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희생(일할 시간과 쉴 시간이 줄어들고, 휴가 때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고, 기저귓값·분윳값·교육비와 같은 비용이 발생하는 등)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점을 압도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도 답변으로 적절치 않은 것 같아 답을 해주지 못한 것처럼 저자의 의도가 읽힌다.

저자는 이처럼 주장한다. "자녀를 갖는 게 비이성적인 행동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수많은 부모가 증언해 줄 것이다. 부모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삶을 경험하는 방식의 중심에 자녀가 있다"고 말이다. 수많은 부모가 자녀가 삶에 의미를 준다고 말할 것이다고 장담한다. 이런 괴리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자녀 가질 것이냐, 말 것이냐 같은 문제를 '답이 없는 문제(wild problems)'라고 부른다. 저자의 깊고 심오한 사유가 이 책에 적혀 있다.

 


 

저자는 답이 없는 문제라는 다소 추상적 물음에 정의를 내린다. '인생의 갈림길' 같은 것이라고. 어느 쪽이 옳은지도 분명하지 않고, 이 길이 아닌 저 길을 택했을 때의 기쁨과 고통이 무엇일지 끝까지 알 수 없으며, 여기서의 내 선택이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고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답이 없는 문제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들이다. 저자가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깊은 연구와 사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의 중요한 의사 결정들, 예를 들어 마느냐, 누구와 하느냐, 자녀를 가질 것이냐, 어떤 커리어를 추구할 것이냐, 친구와 가족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을 바칠 것이냐,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등과 같은 답이 없는 문제들은 데이터나 과학적 방법론 혹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합리적 접근법으로는 결정이 되지 않는다."(p.17)

저자는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생 시절 경제학과 건물 벽에 캘빈 경(Lord Kelvin, William Thomson)의 말이 새겨져 있었음을 기억해 낸다. "측정할 수 없는 지식은 빈약하고 불충분하다." 현대인들은 켈빈 경의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자연과학이, 다음에는 서서히 사회과학이, 심지어는 인문학까지도 '측정(데이터 수집)'이 곧 더 나은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측정 과정을 개선해야 하고, 그렇게 측정된 내용을 이해해서 더 유능해지고 생산적이고 건강해지는 게 더 나은 삶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그러나 답이 없는 문제들은 측정을 거부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당신에게는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 나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이유이다. 어제는 맞았던 방법이 내일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이유를 추가한다. 답이 없는 문제들은 다스려지지도, 길들여지지도 않으며 그때그때 저절로 생겨나고, 유기적이고, 복잡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해진 합리적 방법을 따라가면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답이 있는 문제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답이 없는 문제들을 다스린 것은 권위와 전통이었다고 강조한다. "왕이 나와 내 부모를 지배했고, 태어날 때부터 종교가 있었고, 문화가 우리를 둘러쌌다. 그러나 이제 왕은 죽었다. 종교의 장악력도 꾸준히 약해진다. 전통? 우리는 가뿐히 떨쳐 보리고 나 자신을 백지상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연필을 들고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깊은 철학적 사색에 의해 표현된 답이 없는 문제들은 은유와 상징적 표현들로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표현이다. 한때는 운명이었던 것이 이제는 선택이다는 말을 저자는 자유와 함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어렵기도 하고 종종 불안하기도 하다는 말로 선택의 불안함을 표현하고 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주는 레시피도, 알고리즘도, 앱도 없는 상황에서 이 드넓은 자유를 대체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고민에 부닥친다.

저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답이 없는 이 어려운 문제들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측정하려고 노력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최선을 다해 계량화해 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이게 좀 더 나아 보이기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도 있다고 단언한다. 정답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옳은 방향으로 한 걸음 더 가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앞서 언급한 친구가 조언을 구했을 때, 즉 자녀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라는 답이 없는 문제에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을 하도록 충분한 조언이 되고, 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을 많이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필요하면 '옳은 결정'이라는 것 없다는 걸 보여주기도 할 것이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여행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2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답이 없는 문제들-지도 없이 인생을 여행하는 법」, 2장 「다윈의 딜레마-사랑과 결혼, 우뇌와 좌뇌가 충돌할 때」, 3장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엄청난 사고를 친 바보들의 기쁨과 슬픔」, 4장 「천재들의 생각법-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계산을 푸는 101가지 방법들」, 5장 「돼지냐, 소크라테스냐-탐욕스럽게 혹은 우아하게, 삶의 조건을 탐하는 법」, 6장 「인간의 성장-쾌락과 목적 사이에서 삶의 균형 잡기」, 7장 「페넬로페와 108명의 구혼자-복수의 선택지가 있을 때 최선을 택하는 전략」, 8장 「세상과 나-비틀거리지 않고 관계에 대처하는 법」, 9장 「성자와 청소부-내 양심의 가격은 얼마일까?」, 10장 「슈퍼볼 감독의 불패 전략-실패하기 싫어 선택하지 않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11장 「잘 산다는 것-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12장 「최고의 질문들-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 등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출처 및 읽을거리」는 책에서 인용된 저서나 논문, 그리고 저자들과 그들이 쓴 책의 제목 등을 일일이 기록해놓아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이해를 위해 그들이 쓴 책의 목록도 실어놓음으로써 색인, 참고, 해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천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범인(凡人)과 마찬가지로 자신 앞에 닥친 어둠에 대처하기 위해 두뇌를 총동원했다. 1838년 위대한 과학자 다윈은 결혼이 자신의 인생에 끼칠 영향을 따지기 위해 이른바 ‘장단점 목록’을 만들었다. 그보다 앞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똑같은 목록을 만들었고, 20세기 초 프란츠 카프카도 결혼의 장단점을 저울질한 기록을 일기에 고스란히 남겼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한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계량화하려는 이런 시도에 대해 저자는 가로등과 열쇠의 비유를 들며 그 위험을 경고한다. 우리는 흔히 잃어버린 열쇠를 찾기 위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찾는 게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하지만, 열쇠가 가로등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경우 우리는 결코 그 열쇠를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이나 상상할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 외의 수많은 선택지를 결코 만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쓰기 전 저자의 분석과 성찰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앞의 각 장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천재와 성자, 청소부, 과학자, 경제학자, 심지어 고인(故人)까지도. 물론 고인은 그들의 생애 동안 남긴 업적과 저서, 논문, 생애를 쓴 평전 등도 가리지 않았다. 잠시 잊었을 독자들이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독자가 다시 한 번 무슨 답을 구하려는지에 대해 저자가 찾아가는 것을 소환해 본다. 바로 살면서 부닥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법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여러 학자들의 실험을 소개하고, 실수와 후회를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슈퍼볼 감독의 일화도 인용한다. 인생을 잘 사는 법을 설명하기 위해 예술가와 문인들의 창작 습관이 거론되는가 하면,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군상들의 심리와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저자의 깊은 성찰과 사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쾌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채로운 비유와 은유가 동원되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라고 출판사 측은 책 소개글에서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쾌락과 고통의 총량을 비교해 결정을 내리는 우리의 관점에 대해서는 ‘돼지와 철학자’의 비유를 들며(각 장의 제목에도 나와 있다), 과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욕망과 습관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착한 개와 못된 개’의 우화를 언급하고, 인간에게 있어 성장과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밝은 길과 어두운 길’을 대비시킨다. 경험의 한계를 공감시키기 위해 ‘뱀파이어 되기’라는 은유를 끌어들이고, 결심과 충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예시인 ‘동전 던지기’로 우리의 통념을 깨기도 한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주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저자의 재능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책이 재미 있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에 따라 평생을 숫자와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한 경제학자가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기록한 사려 깊은 조언이자, 실수가 두려워 선택을 주저하는 세상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힘찬 응원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두렵지만 그에 맞서 한 걸음을 뗀 우리의 무모한 도전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전략을 제시하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불확실성이라는 숙명을 안고 산다. 후회가 무서워 선택을 망설이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에 급급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선택을 위한 원하는 데이터가 수집될 때까지 두려워하지 말고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팩트가 모두 수집되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으며,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해도 버그는 발생한다"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 내가 바랐던 것과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그게 실수는 아니"며 그냥 나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 "하나의 선택일 뿐"이라고.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길이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 길을 직접 걸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피카소의 말처럼 “뭘 그릴지 알려면, 일단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인생에서 최고의 성취는 보통 나에게 잘 안 맞을 것 같은 일을 수락했을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쓰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선택권을 늘리고 그 결과에 대처할 방법을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라고 조언을 덧붙인다.

이처럼 저자는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방향을 잡아 가는 생각법,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필요한 삶의 태도, 언제 버티고 언제 그만둘지를 아는 용기 등 거친 세상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을 들려준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민거리로 가득한 이 세상이 점차 아름다워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삶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도대체 어떤 역학이 작용하길래 이기적인 우리가 희생을 감수하기도 하는지, 신뢰란 단어가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쾌락이나 행복을 넘어서는 ‘삶의 질감’이란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결국 ‘잘 산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발간 취지이자 저자가 노년에 쓴 훌륭한 인생 지침서이다.

 


 

저자는 역설한다.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또한 정답이 없다는 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인생에는 감정의 기복, 재미, 행복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삶은 경험하고 맛보고 음미해야 할 미스터리라고. “우리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어떤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최고의 질문은 답이 없는 질문들이다.” 세상이 그처럼 마법 같을 수 있는 것은 인생이 탐험이기 때문이다.

 

저자 : 러셀 로버츠(Russell Roberts)

 

노벨상 수상자, 세계적 석학 그리고 당대의 거장들이 인정한 미국의 경제학자. 현재 예루살렘에 위치한 샬렘 칼리지의 총장이자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이다. 매주 8만 회 이상 다운로드되는 인기 팟캐스트 이콘토크EconTalk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이콘토크는 세계적 석학과 사상가들이 출연해 경제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밀턴 프리드먼, 조지프 스티글리츠, 로널드 코스, 로버트 로플린 등 12명 이상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마사 누스바움, 앤절라 더크워스, 토마 피케티,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크리스토퍼 히친스, 마이클 루이스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다수 출연했다. 대중의 경제학 이해를 위해 여러 동영상도 제작했는데, 20세기 경제학자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비교한 랩 배틀 비디오는 조회수 1,300만을 넘었고, 11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조지메이슨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스탠퍼드 대학교, 로체스터 대학교, UCLA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올해의 교수’로 3회 선정되었다. 워싱턴 대학교 경험학습센터의 초대 소장을 지냈고,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하고 있으며, 미국공영라디오NPR의 경제 프로그램 ‘모닝 에디션’의 고정 평론가이다. 저서로는 대표작인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외에 《가격의 비밀》과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첫 책 《초이스》는 1994년 〈비즈니스위크〉와 〈파이낸셜타임스〉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역자 : 이지연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후 삼성전자 기획팀, 마케팅팀에서 일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시작의 기술』, 『인간 본성의 법칙』, 『위험한 과학책』, 『볼드』, 『제로 투 원』, 『빅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기하급수 시대가 온다』, 『빈곤을 착취하다』, 『룬샷』, 『만들어진 진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인문학 이펙트』, 『토킹 투 크레이지』, 『행복의 신화』, 『평온』, 『매달리지 않는 삶의 즐거움』, 『다크 사이드』, 『포제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아웃퍼포머』 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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