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버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들 -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는 내려놓음의 기술
고미야 노보루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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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책을 읽다보면 옛날 사람들의 기대 수명을 느낄 수 있는 근거가 자주 발견된다. 나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서일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양 사람들의 경우 기대 수명은 고대를 기준으로 60세이고 서양 사람들은 근대 이후 75세쯤이다. 아마 동양의 기준은 공자에 의해 이야기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 학자들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대 수명'이라고 독자가 표현한 것은 일반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이지 당시 문헌이나 논저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양의 한 곳(독일)에서는 인간의 수명과 수명에 맞춰 할 일에 대한 민담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이 민담 주제는 "사람은 30세까지는 사람으로 살고, 이후 45세까지는 소의 삶, 60세까지는 개의 삶, 75세까지는 원숭이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어느 날 하느님이 사람과 소, 개, 원숭이를 모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각각 30년의 수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사람은 "너무 짧다"고 항의했고, 나머지 짐승들은 "너무 길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너그러운 하느님은 그럼 너무 길다고 말한 짐승들의 수명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15년으로, 사람에게 모아서 주었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이 75세가 되었다는 짧은 민담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민담이지만 30세 이후의 삶은 세 동물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니 그들이 하는 일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즉, 45세까지는 부지런히 일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60세까지는 개를 대신해 가족을 지켜야 하며, 75세까지는 너무 오래 살았다고 원숭이처럼 조롱받으며 살 것이라는 내용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 전해져 오는 민담이지만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 이야기다.

 


 

동양은 조금 다르다. 공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했던 일을 중심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70세까지의 인간의 삶을 가르쳤다. 그 유명한 40세 '불혹설(不惑說)‘이다. 공자는 "나는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三十而立).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六十而耳順)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성인의 반열에 든 공자이지만 일반 사람들도 이에 따라 살라는 정도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인 것은 제자들이고 후세 사람들이지만 충분히 교훈이 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40세 불혹'이란 말은 유독 후세 사람들이 자주 인용해 쓰다보니 아마 삶을 사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살다가 좋지 않은 일이 닥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때 그 일(사람)만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불안, 분노, 슬픔,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이나 불안, 후회 등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후세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바꿔 생각하기도 한다. 이 책 『마흔에 버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들』은 이 같은 생각과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방해할 때는 그것들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꽉 막히고 어질러진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가득 찬 상태로는 원하는 삶을 향한 걸음을 내디딜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 는 부정적인 감정이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빚어지는 삶의 방식에서 문제를 찾는다. 우리가 잘 아는 인간의 '탐욕'이 대표적인 감정일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위대한 세계 종교들도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고 '버려야 할 것'으로 꼽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삼독(3毒)'라고 말하며 수행을 통해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독은 탐욕(貪欲), 진에(瞋? : 분노), 우치(愚癡 : 어리석음)로서 흔히 '탐·진·치'라 한다. 기독교 역시 탐욕은 7가지 죄악의 하나로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저자 고미야 노보루는 '버리기'보다 ‘내려놓음’이라는 표현을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정말 소중한 것을 남기는 기술에 대해 쓴 책이다. '내려놓음'은 심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이며,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능력, 더 좋은 삶을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내려놓음을 포기나 실패로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령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일지라도 말이다. 불필요한 것들까지 버리지 않고 끌어안으려다 그것들에 잠식되며, 그런 일은 나이가 들수록 비일비재해진다.

수많은 카운슬러를 육성한 심리학 교수이자 공인심리치료사, 임상심리사로 사람들의 마음의 집을 고쳐온 고미야 노보루 박사는 지난 30년간 내려놓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왔다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은 삶을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려놓음의 본질도, 방법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펴냈다. 이에 따라 저자는 내려놓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그동안 사람들을 심리 상담하며 축적한 내려놓음의 지식과 기술을 한 권의 책으로 썼다.

『마흔에 버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는 법부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는 법,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을 버리고 내면을 안정된 상태로 만드는 법,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찾아내 얻는 법까지, 내려놓음에 대한 핵심 지식과 실용적인 심리 활동을 제공한다. 이 책은 감정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필요 없는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는 지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책에 따르면 다가오는 내일이 두렵다.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홀로 고립되어 외롭다. 인생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뿐더러 무슨 일을 해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이런 생각과 감정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이유도, 그것을 해결할 열쇠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다. 우리는 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히는 걸까?

30년 넘게 미국, 뉴질랜드, 일본에서 심리학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집을 고쳐온 저자는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잠식되는 이유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내면이 안정된 상태’이며,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억만장자이자 저명한 명상가 마이클 싱어 역시 ‘아주 편안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의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 아닌 다른 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경청(傾聽)’이라고 하며,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을 ‘내성(內省)’이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타인의 소리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는 책에서 여성 A의 사례를 소개한다. A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유명 대학의 대학원까지 진학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도저히 학교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등교를 거부하게 되었다. 또 책에서는 회사 안팎의 여러 관계자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주요 업무인 B도 소개된다.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우라고 생각하고 무시해버렸다. 그러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무렵 이곳저곳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고, 결국 프로젝트는 백지화되었다.

 


 

저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역시 두 사람처럼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줄곧 무시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느라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설명이다. 이 경우 저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역설한다.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감정과 생각의 파도가 우리에게 유용한 신호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덮치고 압도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려놓음이란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능력, 더 좋은 삶을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생각이나 감정처럼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정말 소중한 것을 남기려면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내려놓음의 지식과 기술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①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먼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유한한 삶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죽음이라는 숙명을 건설적으로 직시하도록 돕는 심리 활동을 알려준다.

②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다음으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내려놓지 않아야 할까. 그 선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감정, 감각에 민감해져야 한다. 그를 위해 주의할 점들을 설명한다.

③ 마음을 안정된 상태로 만든다

하지만 불안, 분노, 후회를 느끼는 마음으로는 좀처럼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선은 마음이 안정된 상태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마음을 안정된 상태로 이끄는 심리 활동을 소개한다.

 


 

④ ‘정말 중요한 것’을 명확히 한다

자신에게 가치를 느끼며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정말 소중한 것을 생활의 중심에 두고 매진하며 살아가는 일, 그것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는 일. 이 두 가지를 이룰 때 인생이 의미 있고 충실하게 변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시크릿』의 대가이자 뛰어난 치료사, 철학자인 존 F. 디마티니 박사가 개발한 ‘밸류 팩터’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최우선 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준다.

⑤ 감사하며 살아간다

현재에 대해서도, 과거에 대해서도 감사하며 살아갈수록 자신에게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고, ‘정말 중요한 것’을 생활의 중심에 둘 수 있다. 그때 자신이 바라던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갈 기회가 찾아온다.

 

저자 : 고미야 노보루(古宮昇)

 

심리학 박사(Ph.D), 공인심리치료사, 임상심리사. 미주리대학교 컬럼비아 캠퍼스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주립 아동상담소, 정신과 병동 등에서 심리 카운슬러로 근무하며 모교인 미주리대학교 심리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귀국한 후에는 심료내과 의원과 대학교 내 학생 심리상담소의 카운슬러로 활동했고 오사카경제대학교 인간과학부 교수, 뉴질랜드 오클랜드공과대학 심리치료학대학원 객원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고베에서 ‘카운슬링 룸 가가야키’를 설립해 운영한다. 또한 심리학과 영적인 지혜를 통해 삶을 행복하고 충실하게 바꾸는 ‘스피리츄얼 심리학 온라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자기긍정감이 내려갔을 때 읽는 책』 『프로 카운슬러가 가르쳐주는 첫 경청술』 『함께 있어 편안한 사람, 피곤한 사람』 등 28권이 있다. 심리학자로서 국제 논문을 포함한 전문 논문을 50편 이상 발표했다.

 

역자 : 김해용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편집자로 일하며 다수의 일본 소설과 만화를 번역하고 편집했다. 주요 번역 작품으로, 이사카 고타로의 『AX』, 미야베 미유키의 『브레이브 스토리』, 『퍼펙트 블루』, 오쿠다 히데오의 『버라이어티』, 『방해자 1~3』, 『나오미와 가나코』, 이시다 이라의 『도쿄 돌』, 『슬로 굿바이』, 마미야 유리코의 『존댓말로 여행하는 네 명의 남자』, 히구치 타쿠지의 『내 아내와 결혼해주세요』, 다니 미즈에의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1~4』, 『조류학자라고 새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성만이 무기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도라에몽 : 진구의 달 탐사기』 『조류학자라고 새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성만이 무기다』, 『도라에몽 : 진구의 달 탐사기』, 『신공룡 도감 : 만약에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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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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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는 '영어 어원'을 밝혀 우리 삶의 상식을 넓혀 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는 물론 고유 명사나 전문 용어에 이르기까지 단어의 어원을 밝혀 찾아들어가면 언어 지식은 물론 삶의 지혜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 한글이나 영어, 한자 등 세계의 언어들은 2,500개 정도의 낱말을 안다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언어학자들은 밝힌다. 또 5만~6만 개의 어휘를 익히면 전문 서적도 이해하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공용어로 쓰이는 영어권의 가장 큰 사전은 『옥스포드 영어사전』으로 첫 표준판이 1884년부터 부분적으로 나오기 시작해 44년 만인 1928년에 비로소 초판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초판은 모두 12권 분량의 책에 41만4,825개의 어휘와 500만개 인용문 중 고르고 골라 182만7308개의 보기인용문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단어 수집과 기획 작업으로 무려 71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이후 1989년 20만개가 늘어나 60만개의 단어가 실린 2판 개정판이 발행되었다고 알려진다. 지금은 추가된 신조어 수록 포함, 90만~100만 단어에 달할 것으로 밝힌다.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는 영어권 나라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에 깃든 의미심장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엄선해 한 권으로 엮은 영어 어원 책이다. ‘Goodbye’나 ‘OK’처럼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도 의외의 사연이 숨어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저자 데버라 워런은 어휘가 사용되는 문장의 맥락과 코드를 알고 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지는 단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데, 웃으면서 읽다 보면 단어의 기원과 족보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세계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문자 훨씬 이전에 생겨난 말들이다. 문자는 기록의 필요성이 있어 발명한 언어 전달 수단이다. 말은 시공간의 범위가 작지만 문자는 시공을 초월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발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매력은 어원학, 문학, 역사, 신화 등을 두루 다루면서도 그 시작은 평범한 일상의 단어라는 데 있다. 베이글, 비스킷, 에클레르 같은 먹을거리부터 뮬, 튀튀 같은 패션 아이템, 소렌토나 팰리세이드 같은 자동차 이름까지 익숙한 사물들에 숨겨진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쏟아진다. 저자 데버라 워런은 취미가 라틴어 독서이고,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며, 프로그램 언어로 코딩을 하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언어라면 가리지 않고 빠져드는 '언어 덕후'이자 다채로운 수상 경력에 빛나는 시인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는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에 “다른 어원 책에서는 보기 힘든 예술성”이 담겨 있다고 극찬을 보냈다.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의 한국어 번역판인 이 책은 교양 어원 분야의 베스트셀러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의 빼곡한 정보와 수다를 정확하고도 글맛 있게 옮긴 것으로 이름난 번역가 홍한결이 이 새로운 어원 여왕의 역작을 위트 있게 번역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단어가 걸어온 길마다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과 역사적 장면, 그 사이사이로 난 오솔길과 뒷길을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독자가 영어 어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는 '수학' 하면 『수학의 정석』 하듯이 '영어' 하면 『성문 종합 영어』가 교과서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너도 나도 이 책을 공부했다. 대학 수험생 치고 이 책을 한 권 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른 영어 참고서가 많았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책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회화 중심의 영어가 아니라 문법 중심의 영어를 배우고 시험도 문법 위주로 나왔기에 더욱 이 책이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독점적 위치에 반기를 들듯이 나타난 책이 어휘 중심의 책 『voccabllary 22,000』이었다. 어휘를 많이 알아야 영어 시험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무려 '22,000단어'를 수록했다고 내세운 책이다. 그때 이 책이 어휘 중심의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어휘 공부 책이 어원을 찾아가 파생어까지 합친 게 22,000단어라고 강조한 것이다.

 


 

독자도 부분적으로 보았을 뿐 한 권을 구경하는 데 그쳤던 것은 어휘의 중요성보다 문법이 강조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제어처럼 어원을 밝힌 언어는 영어다. 영어의 명칭(English)의 어원은, 앵글족이 사용하던 고대영어 '앵글리쉬'(Ænglisc)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이 고대영어는 5세기부터 형성되었는데, 르네상스를 거치며 라틴어, 그리스어 어휘를 대량 수용하다가 성서의 보급으로 영어는 널리 전파된다. 또 영국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사용자수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계통적으로는 인도유럽어 > 게르만어족 > 서게르만어에 속하며, A부터 Z까지 26개의 알파벳 문자로 표기한다. 오늘날 지구권에서 영어 사용자는 대략 20억 명, 즉 세계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되며,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공용어의 위상을 갖고 있다. 우리가 어원을 찾아가는 것은 문자로 표현된 이후부터의 일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미리 알아야 한다.

이 책은 5부 3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이런 말 저런 말〉, 2부 〈좋은 말 나쁜 말〉, 3부 〈동물의 세계〉, 4부 〈무엇이라 부르랴〉, 5부 〈말도 가지가지〉 등이다. 1부는 「말 바꾸기: 단어의 진화」, 「한 입으로 두말하기: 앵글로색슨어와 라틴어」, 「발 없는 말: 이동」, 「먹고 사는 이야기: 음식」, 「말이 오락가락: 술」, 「건강한 언어 생활」, 「꽃에 담긴 말」, 「웃기는 이야기」, 「이 옷으로 말하자면」, 「떠도는 말: 유랑」 등 10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엔 11장 「악담」, 12장 「믿음이 가는 말」, 13장 「애들 이야기」, 14장 「주문을 외워보자」, 15장 「마지막 한마디」 등이 있다. 또 3부는 「고양이 소리」, 「개 짖는 소리」, 「말발굽 소리」 등 동물의 울음이나 동물들이 내는 소리 등을 다루고 있다. 4부는 우리가 쓰는 이름과 성, 족보, 지명 등에 대한 어원 설명이다. 19장 「성씨의 기원」, 20장 「이름의 기원」, 21장 「족보와 정치」, 22장 「장안의 화제: 지명」, 23장 「나오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말라프롭과 몬더그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마지막 5부엔 「하나 둘 셋」, 「감옥살이 말글살이」, 「피리 부는 사나이」, 「대신하는 말」, 「입 운동: 스포츠」, 「게임의 언어」, 「각양각색: 색깔」, 「때를 이르는 말: 시간과 시기」, 「몸으로 말해요: 신체 부위」, 「참 이상한 말들」, 「언어의 끝없는 여정」 등 11개 장으로 나뉘어 있다. 각 장에 쓰인 단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일상 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동·서양 구분이 없지만 사람의 성씨(우리 한글의 김·이·박 씨)가 동양에서는 직업과 관련이 없지만 서양 특히 영어에서는 직업이 성씨와 관련된 것이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책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먹고, 타고, 입고, 쓰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각 이름에는 그 대상만큼이나 긴 역사가 서려 있다. ‘빵’이라는 이름에 관한 역사는 ‘빵’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그 이름의 역사를 알면 자연스레 대상에 관해서도 알게 된다. 이것이 어원이 그토록 흥미로운 이유다. 저자는 “단어는 생명체처럼 진화한다”고 이 책에서 말한다. 〈하버드 매거진〉 역시 이 책을 “단어의 진화에 대한 확실하고 재미있는 안내서”라며 추천한다. 단어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형태가 바뀌기도 하고, 그 안에 실린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단어를 잘 알려면 어원과 변이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앞뒤 맥락이 잘린 채 사전에 실린 뜻만으로는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억지로 뜻만 외운 단어는 뒤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사연을 아는 단어는 웬만해선 까먹지 않는다. 이 점은 독자가 앞서 언급한 『voccabllary 22,000』에서 이미 밝힌 대로다.

예를 들어 캡모자(cap), 수도를 뜻하는 캐피털(capital),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의 음악 용어 다 카포(da capo)가 모두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caput’에서 왔으며 프랑스에서는 'p'가 'f'로 바뀌며 주방의 대장을 뜻하는 셰프(chef)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 각 단어를 일일이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의미가 이해된다.

단순히 'a=b'라는 식으로 단어를 외우기만 할 거라면 사전이나 단어장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전의 짧은 정의에 다 들어갈 수 없는 법이다. 누군가는 “어원이라니?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어를 요모조모 살펴가며 뒷이야기까지 들춰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캐고 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의 어원 이야기에서 오히려 더 큰 재미를 느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저절로 영어 단어가 머리에 들어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라틴어와 영어 교사로 활동해온 저자 데버라 워런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워런은 능숙한 선생님들이 그러하듯 배워야 할 내용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절묘한 비율로 배합해놓았다. 그리고 독자들이 호기심을 따라 스스로 지식을 넓힐 수 있도록 이야기를 책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단어 암기에 지친 학생과 영어 공부를 지속하고자 하는 성인 모두에게 부담 없으면서도 알찬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또한 워런은 한때 프로그래밍 언어로 컴퓨터 코드를 짜던 개발자였다. 그래서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에서는 세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구조화하고자 하는 개발자의 감수성이 엿보인다. 언어를 유전 정보를 담은 DNA에 비유하고 영어의 두 유전자로 라틴어와 앵글로색슨어를 지목한 것이나, 이진숫자 비트에 관한 설명 등은 그의 이력에서 기인한 독특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워런은 미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시집을 출간하고 있다. 출간한 시집 대다수가 문학상을 받았을 정도로 평단의 인정도 받고 있다. 그중 『행복의 크기(The Size of Happiness)』는 두음전환을 활용한 말장난으로 “호들갑의 절정(The Highs of Sappiness)”이라고 부르기 좋아한다고 하는데, 말장난을 좋아하는 그답게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에도 잘못 말하거나(말라프롭) 잘못 듣는(몬더그린) 말실수, 신데렐라의 가죽 구두를 유리로 바꾸거나 판도라의 항아리를 상자로 바꾼 우연한 실수 등도 다양하게 소개해놓았다. 사소한 말장난이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우리의 언어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어 들어가면 갈수록 쏠쏠한 재미가 쏟아지는데, 저자가 단어의 여정에 있어 커다란 길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샛길들까지 알뜰하게 담았기 때문이다. 역사 깊은 도시일수록 진짜 노포는 골목골목에 숨어 있듯이,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역시 곳곳으로 뻗어나간 샛길마다 진풍경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 청바지(jean)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청바지의 탄생에 엮여 있는 남유럽의 두 도시 이야기를 꺼내고, 그중 이탈리아의 도시 제노바에서 jean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는 이야기까지는 아직 큰길 한가운데이지만, 저자는 여기서 제노바라는 도시에 대한 샛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제노바가 상인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기항지였다는 사실과 이곳에서 출발한 배가 시칠리아에 페스트를 옮겼고, 그 후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는 이야기로 역사적 교양이 쌓이고 나면, 이제 이탈리아에서는 병의 잠복기를 감안해 외부에서 입항한 배를 앞바다에 40일간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기에 이른다. 이 샛길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단어는 ‘격리’를 뜻하는 영단어 'quarantine'이다. 이탈리아어로 숫자 40이 'quaranta'이며, 프랑스에서는 바다에서 상륙을 기다리는 그 기간을 'quarantaine'이라 했고, 이것이 영어의 'quarantine'이 되어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격리’를 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샛길이 속속들이 그려진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는 그 어떤 어원을 다룬 책보다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저자가 이끄는 대로 새로운 샛길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어느새 두 손이 무겁도록 상식과 교양이 들려 있을 것이다.

 

‘어원=진화’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돌연변이의 연속입니다. 진화가 그렇듯이, 이 책도 정해진 목표가 없습니다. 단어가 가는 길을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진화가 그렇듯이, 저도 어원 이야기를 할 때 가끔 횡설수설합니다(참고로 ‘횡설수설하다’를 뜻하는' meander'는 터키의 구불구불한 강 이름에서 왔어요).(p.12)

 


 

도시의 이름은 그 역사를 말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는 원래 그리스의 ‘새 도시’를 뜻하는 'Neapolis'였습니다. 그리스는 한때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대그리스)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식민화했죠. 그리스어 'polis'에서 라틴어 'politicus(정치의)'도 유래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는 원래 그리스에서 ‘시내(inside the city)’라는 뜻으로 'eis tan polin'이라 부르던 도시입니다. 거기에서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오늘날의 이름이 유래했죠. 그리스 도시국가의 언덕을 부르던 이름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높은 도시’라는 뜻입니다. 슈퍼맨의 활동 무대인 가상의 대도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는 ‘어머니 도시’이고요(그리스어 'meter'=‘어머니’).(p.230)

 

저자 : 데버라 워런(Deborah Warren)

 

하버드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라틴어 교사, 영어 교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출간한 시집으로는 『벌레 미식가(Connoisseurs of Worms)』 『행복의 크기(The Size of Happiness)』 등이 있으며, 『본초자오선(Zero Meridian)』은 뉴 크라이티리언상을 수상했고, 『꽃과 과일 그릇의 꿈(Dream With Flowers and Bowl of Fruit)』은 리처드 윌버상을 수상했다.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 시선 『모셀라강 외』를 번역하기도 했다. 《뉴요커》 《파리 리뷰》 등에도 기고했다. 9명의 자녀가 있으며, 현재 잠수함 탐지용 탑이 있는 매사추세츠의 옛 군사 부지에서 살고 있다. 취미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서다.

 

역자 : 홍한결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나와 책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쉽게 읽히면서 오래 두고 보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옮긴 책으로 『스토리만이 살길』 『어른의 문답법』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책 좀 빌려줄래?』 『인간의 흑역사』 『진실의 흑역사』 『신의 화살』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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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권력 - 권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스탠퍼드 명강의
데버라 그룬펠드 지음, 김효정 옮김 / 센시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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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수평적 권력』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력'(權力, power)과는 관점이 다른 설명을 한다. 권력은 타인 또는 조직단위의 행태를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일컫는다는 것이 사전적 의미다. 프렌치(J. French)와 레이븐(B. Raven)은 권력의 원천에 따라 권력을 합법적 권력(legitimate power)·보상적 권력(reward power)·강압적 권력·전문적 권력(expert power)·준거적 권력(reference power)의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타인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화된 힘을 권력이라 한다. 좁은 뜻으로는 국가가 갖는 강제력인 정치권력·국가권력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넓은 뜻으로는 다른 사람을 부종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힘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행정학사전에서도 권력의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을 자기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힘이 정치적 기능을 하기 위하여 형성된 경우를 정치권력이라 하고, 법학 부문에서는 공권력 또는 국가권력이라 부른다고 구분한다. 이런 의미의 권력은 사실상 수직적 관계, 종속적 관계로 이해된다.

이 책의 저자 데버라 그룬펠드(Deborah Gruenfeld)는 권력을 다른 관점으로 살펴본다. 권력이라 하면 흔히 우리들은 앞서 말한 권력, 즉 수직적 권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권력의 속성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어 권력자는 지배자이고, 권력이 없는 사람은 피지배자의 위치에 놓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권력이란 수평적 관계에서 획득하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따라오는 것이며, 이 권력은 속한 집단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능력에 관련 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권력을 잘 쓰려면 권력을 지금과는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는 대체로 권력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회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은 나쁜 것이며, 부패하기 쉽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권력을 누리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며, 심지어 잠재적인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편견에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표제어에서 보여주듯이 ‘권력의 수평성’이다. '수평적'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존재하며,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인간 간의 사회적 역할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권력자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평적 권력』은 권력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권력을 재정의하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불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력은 뛰어난 한 명의 개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할과 관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자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권력에 따르는 책임을 인식하고 잘 사용할 때 권력은 민주적이고 선하게 발현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권력을 특별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우리는 권력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권력은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스탠퍼드대학교에서 25년 연속 최고 명강의로 뽑힌 데버라 그룬펠드 석좌교수는 이 책 『수평적 권력』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권력에 대한 상식을 뒤엎으며 권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권력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권력은 사회적 지위가 아니고 권한도, 권위도 아니라고 말한다. 영향력과도 다르며, 부, 명예, 카리스마, 야망, 매력과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자원이라고 말한다. 권력은 모든 사회적 역할과 모든 관계에 존재하며,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권력자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권력을 제대로 쓰려면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이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한 당신은 권력을 가졌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권력자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의 양보다도 그 사용 방법이라며, 권력은 우리가 남들로부터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 되는지, 그리고 남을 얼마나 잘 보살피는지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가진 권력에 따르는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다. 권력의 역할과 책임을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권력을 배우가 연기(Acting)하는 것에 비유해 설명한다. 배우가 역할을 맞게 연기하듯이 우리가 사회와 직장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게 권력을 사용하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역할에는 다른 역할보다 큰 권력이 주어지는데 이 역할에 맞게 권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면 온갖 사회제도를 유해하게 만드는 권력 남용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권력의 핵심으로 접근하는 데 수많은 심리학 이론과 실험을 동원하지만, 결코 지루한 논리로 다가서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치인, 연예인, 기업가 등의 실제 사례를 통해 권력을 잘 활용하는 인물과 부정하게 활용하는 인물들을 대비하여 보여주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정치적 비화, 평범한 인물들이 직장에서 겪은 수많은 사례 등을 통해 이해를 돕는다.

 


 

권력을 다룬 기존의 책들이 어떻게 해야 권력자가 되는가, 혹은 위대한 권력자들은 어떻게 권력을 획득했고 행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 『수평적 권력』은 우리가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그 권력을 드러내고 숨기는 법, 오용된 권력에 저항하는 법, 권력에 따른 불안을 다스리는 법, 부패한 권력에 맞서는 법, 권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법 등 우리가 권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권력자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권력자의 세 가지 기준은 첫째,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달성하는 데 힘을 쏟는 ‘성취 지향’의 권력자. 둘째, 유능하면서도 배려와 헌신을 다하는 ‘헌신 지향’의 권력자. 셋째, 한 집단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에 따라 권력을 공격적으로 발휘하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집단 지향’의 권력자다. 즉 새로운 권력은 개인의 명예와 파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권력, 집단을 위한 권력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권력의 오남용과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리더십을 자신이 맡은 배역이나 역할로 보면, 조직에서 가장 주목 받는 배우들은 조직에서 가장 신성한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리더는 결과만 이끌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리더의 역할은 “조직의 목적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 길러주며, 희망과 신뢰를 가꿔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리더는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무언가를 상징한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소통은 신뢰를 높이고 전략적 협력을 유도한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전략을 구사할 기회를 준다.:(p.293~294)

 


 

저자는 리더십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을 이 책에 적어 놓았다. 영화 많은 조직이 〈매드 맥스 3〉은 종말 이후의 미래를 다룬 4부작 시리즈의 제 3편의 내용을 예로 든다. 이 영화는 세상이 끝나고 미성숙한 사람들만 남아서 새 세상을 건설한다면 어떤 일이 벌이질지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 바터타운의 주민들은 순진하고 옹졸하고 미숙하며, 세상에 대한 유치한 믿음을 품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들이 세우는 새 세상은 사회 질서도 없고, 누구도 안전하지도 않으며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문화가 만연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때 새 리더가 필요하다며 「리더십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① 성취 지향성 ② 헌신 지향성 ③ 집단에 대한 헌신 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리더의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에 대해 저자는 책에 설명을 하고 있다. ① 성취 지향성 : 권력을 잘 쓰는 비결은 집단적 요구에 주목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런 행동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기자 샘 워커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유능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에 속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당이 원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출마했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치 있는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의무로 여기는 리더들은 지위, 인정, 평판에 대한 자신의 욕구보다는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달성하는 데 힘을 쏟는다.

② 헌신 지향성 : 불행히도 카리스마나 호감도를 기준으로 권력자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지만 이 기준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자신이 관리하는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데 신경 쓰는 관리자들은 대체로 권력자로서 성과가 좋지 못하다고 셜명한다. 카리스마는 특정 인물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많이 발산하는 매력을 가리키는데, 대인관계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카리스마는 실제로 집단과 조직의 성공과 생존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③ 집단에 대한 헌신 : 선행은 발달 성숙의 증거다. 하지만 권력자를 캐스팅할 때 이 자질을 거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화와 심리적 이론 전반에서 성숙이란 이기적 충동을 통제하고 타인들에게 혜택을 줄 만한 행동을 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매클렐런드도 권력에 대한 성숙한 접근을 비슷하게 정의한다.

 


 

이 책 『수평적 권력』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권력을 다루는 방법을 완전히 뒤바꿔줄 책이다. 가진 줄도 몰랐던 권력을 직시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권력을 적절히 사용하고 때로는 멈추는 방법을 말해주는 책이다. 큰 역할에 발을 들여놓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과, 더 작은 역할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조금 더 존중받기 위해 한 단계 올라서고 싶은 사람들, 공격성을 내려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권력을 요구하는 이 시대를 위한 책이다.

 

저자 : 데버라 그룬펠드(Deborah Gruenfeld)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조지프 맥도널드 석좌교수.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심리학 박사이자 사회심리학의 권위자. 권력의 심리학과 집단행동에 관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개개인은 조직과 사회 구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주제로 수많은 연구와 강의를 진행했다. 스탠퍼드대학교에 개설된 ‘권력의 본질과 역할’에 관한 그의 강좌는,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밖에도 노스웨스턴대학교의 J.L. 켈로그 경영대학원 등에서 경영학 석사 학생들과 임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뉴요커] [오프라 매거진]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의 주요 일간지와 다수의 학술지에 기고했으며, 여성 지도자를 위한 스탠퍼드 최고경영자 프로그램과 여성 리더십 발전센터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

 

역자 : 김효정

 

연세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글밥 아카데미 수료 후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당신의 감정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 『상황의 심리학』, 『최고의 교육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변화를 끌어낼 것인가』, 『야생이 인생에 주는 서바이벌 지혜 75』, 『철학하는 십대가 세상을 바꾼다』 등이 있고 계간지 『우먼카인드』와 『스켑틱』 한국어판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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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 - 남겨진 것과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기억록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
김시덕 지음 / 북트리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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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엔 〈대동여지도〉를 그린 조선시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떠올랐다. 교통이나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대에 일일이 우리나라의 산수를 걸어다니며 지도를 만들었던 분이다. 조선시대 지도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국가가 관장하는 국책사업이었다고 한다. 국방이나 교통을 위해 지도를 만들었던 시대라서 그럴 것이다. 이 책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1, 2권으로 출판됐다. 이 책에는 김정호의 지도 못지 않게 저자 김시덕이 일일이 걸어서 찾아다니며 기록한 소중한 우리의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근대화되면서 변하고 사라진 옛 모습도 일부 남은 것을 토대로 자료나 사료 등을 보충해,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그의 노력이 책 전편에 흐르고 있어 감동까지 준다. 요즘 흔한 말로 영혼을 바쳐 답사한 기록물이다. 답사기록은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도 있어야 하고,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야 시작할 엄두가 날 일인데 문헌학자가 왜 이런 힘든 답사 기록을 위한 출발선에 섰을까. 체력도 만만찮게 필요한 일인데 말이다.

2017년 여름부터 ‘도시 답사’를 결심한 저자는 그렇게 엄청난 일일 줄은 미처 물랐다고 털어놓는다. "답사 기행을 결심할 무렵 농촌 마을 어귀의 이장(里長) 공덕비를 읽고, 간척지의 제방 위를 걷고, 산길을 헤치며 화전민의 흔적을 찾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고백한다. 답사 시작했을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실천에 옮겨 시작하다 보니 사명감도 생기고 우리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욕심도 생겼다는 설명이다. 거기에는 중간 중간 저자의 계획에 응원을 보내고 힘을 보태준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책을 내면서 겨우 감사의 말을 전하게 된다고도 밝힌다. 여담이지만 운전면허도 없는 분이라는 데 현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조금은 특이한 분이라는 느낌이다.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답사를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대서울의 경계를 넘어 한국으로」란 제목의 〈들어가며〉를 통해 "전국 답사 이야기는 물론 자신만의 답사 방법론도 담았다. 답사는 각 개인마다 방법이 다르다. 자신은 답사를 통해 얻은 것과 사전 계획에서 마주한 것은 대략 50 대 50의 비율로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다"고 밝힌다. 서울과 경기도라는 도시지역에 관심을 두고 출발한 저자의 답사는 어느덧 전국 곳곳의 도시는 물론 농촌, 산촌, 어촌 지역에까지 이르러 일종의 ‘문명론 탐구’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급변하는 21세기 초 한국의 모습, 오늘날까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온 시민들의 다채로운 삶을 김시덕은 생생히 포착해 낸다. 오롯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모든 곳을 샅샅이 누비고 깨닫고,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을 담았다. 이 책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자다. 답사 기행을 위해서는 세밀한 계획과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문헌과 역사자료는 물론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위성사진과 로드 뷰 등 도움이 되는 최근의 자료도 이용한다. 국토 답사 여행이나 국토대장정처럼 기간을 정해놓고 어디서 어디까지 걸어서 종주한다는 의미와 또 다르다. 산을 넘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골목을 돌고 돌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위성사진으로 실시간 상황의 지도를 언제든지 원하면 살펴볼 수 있는 시대에 걸어서 우리 국토 곳곳을 찾아다닌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호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현대 한국의 ‘현재사’를 들여다본다. 거의 눈여겨보는 사람 없는 고문헌 뭉치 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굴하듯, 전국 곳곳의 골목을 걸으며 집과 비석 등에 숨은 시민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낸다. 도시문헌학자가 바라보는 현대 한국의 모습은 어떨까? 가난하지만 허술하게 살아가지 않겠다는, 어떻게든 아름다운 삶을 꾸려 보겠다는 의지가 낳은 동네 여기저기의 포인트가 빛이 나는 이유는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저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곳곳에서 문명 충돌이 일어나며 남겨지고 사라진 것들이 전하는 이야기.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은 우리 앞에 살아온 존재들을 되짚고, 우리 뒤에 살아갈 존재들을 호명하며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비춘다. 이 책은 1, 2권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1권 1부 〈산책하며 발견하는 현대 한국〉에는 답사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대부분 내용은 2022년 한 해 동안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기 간행물인 그 책에 〈문헌학자의 도시 산책〉이라는 코너의 연재물이다. '고교생'들을 위한 책이기에 비교적 평이하게 기술했다고 한다. 2부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문명 충돌〉부터 2권의 1, 2부는 본격 답사 기행물이다. 특히 저자가 전국을 누비며 직접 찍은 풍부한 사진 자료가 돋보인다. 각 장의 도입부에는 주요 답사지를 구글 지도에서 볼 수 있는 QR 코드를 배치해,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걸어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책을 들고 동네 곳곳을 답사해 보면 어떨까? 혼자서도 좋고, 여럿이면 더 좋다. 그리고 저자처럼 내 지역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면 금상첨화다. 다음에 올 ‘미래 한국’의 독자를 위해.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수원, 울산, 용인, 고양…. 대한민국 어디든지 살고 있다면 그곳에 저자는 반드시 한 번 이상 간 곳이다. 울릉, 영양, 장수, 양구, 진안, 무주, 구례, 청송, 화천, 양양…. 독자들이 태어난 곳이 아니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곳이 이 책에 상세히 담겨 있다. 전자는 대한민국의 군 단위 이상 지방자치단체 중 인구수 상위 10개 도시이고, 후자는 하위 10개 지역(2022년 11월 인구 기준)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어디에 살든 어디를 가든,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출퇴근과 등하교, 돈벌이와 살림살이의 고단함 가운데 눈 돌릴 틈도 없이 하루하루 바삐 ‘목적지’를 향해 가기 일쑤니까.

 


 

그렇다면 독자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안락한 보금자리인가? 또는 ‘인스타’를 도배하는 꿈의 휴양지인가? 꼭 시간을 내어 멀리 떠나야만, 돈을 많이 들여야만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몸소 증명한다. 문헌학자의 시선으로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는 저자는 우리에게 ‘답사’를 즐길 거리의 하나로 제안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일상을 바꿔 놓을 '탐험의 비법'을 속속들이 알려 준다. 답사라니, 어디 유적지라도 가서 안내판 읽고 기념사진 찍고는 주변 맛집을 찾아 주린 배를 채운 뒤 막힌 길을 되돌아오는 여행과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유적은 바로 내 곁에, 우리 동네에 있다.

1부에서 저자는 크게 12가지 답사 포인트를 제시한다. 간판, 문화주택, 화분과 장독대, 민가, 공동주택, 아파트,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 철도, 버스 정류장 등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길을 오가며 매번 접하면서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여기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늦추고 거기에 눈길을 던져 보면 '다름'이 보인다. 전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전국 곳곳의 사물과 동네가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장 「간판 : 일상에서 도시 읽기」, 2장 「문화주택 : 중심에서 주변으로, 한 세기를 풍미하다」, 3장 「시민 예술 : 아름다운 삶을 꾸려 가려는 주체적 태도」, 4장 「화분과 장독대 : 불굴의 텃밭 정신을 찾아서」, 5장 「냉면과 청요리와 누룩 : 한식의 어제, 오늘, 내일」, 6장 「민가 : 한반도 주거의 다양한 세계」, 7장 「개량 기와집 : ‘한옥’을 둘러싼 모순」, 8장 「공동주택 : 느슨하게 함께 사는 모습」, 9장 「아파트 : 베고 짓고 기억하다」, 10장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 : 우리 곁의 문화유산」, 11장 「철도 : 서울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12장 「버스 정류장 : 붙은 이름, 남은 이름」 등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 상 시대별 구분과 잘 맞지 않는다. 세계와 문 닫고 귀 막고 산 탓이다. 세계의 흐름에 뒤처졌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 식민지 시대 일본이 먼저 개화한 탓에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더 큰 야욕을 드러내는 사이 우리의 '근대'는 지나갔다.

 


 

도시 안에 숨은 답사 포인트를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도시의 경계를 성큼 넘을 차례다. 해방 후부터가 우리나라 역사로는 '현대'에 해당한다. 거기에 민족상잔의 전쟁도 겪었다.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독재 시대를 맞았다.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겼다. 국민들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밑바탕으로 산업화를 불과 반 세기도 안 돼 이뤄냈다. 개발독재 시대에 맞춰 반정부, 즉 민주화 운동도 엄청난 희생을 딛고 결실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지금은 경제 대국이라 불리울 만큼 세계 경제 10위권의 살 만한 나라라고 칭송 받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겪은 아픈 희생들이 국토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 곳곳에 우리의 '의식주', 삶의 모습에 그대로 배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저자의 눈은 더 날카롭게 빛났을 것이다. 그 결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2부 8개 장(章)으로 나뉘어 남겼다. 1장 「농민과 어민 : 바다에 논을 만들다」, 2장 「화전민과 농민 : 울창한 산림의 뒷면」, 3장 「도시와 공장에 흡수된 농촌 : 지워진 길, 토막 난 마을」, 4장 「공업 도시 울산의 탄생 : 망향비를 따라 걷다」, 5장 「제주 탑동로 : 제주도의 과거, 현재, 미래」, 6장 「조치원 : 도농 복합 도시 세종의 정체성」, 7장 「부천 역곡동 고택 : 알 박기 혹은 ‘이곳만은 꼭 지키자!’」, 8장 「영남대로 : 사라져 가는 길을 발로 잇다」 등이다. 농민 대 어민, 화전민, 도시 대 농촌 등 이 땅에서 치열히 부딪친 두 집단 혹은 세력을 들여다본다. 공업 도시 울산의 망향비들, 열차가 달리던 섬 제주도, 세종시를 둘러싼 지역민의 정체성 문제, 택지 개발과 전통 마을, 옛길의 흔적을 따라 걷는 도시 안팎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역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다.

독자는 이젠 중년의 나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이나 흔적들을 직접 부딪쳤던 것도 있다. 버스 정류장의 풍경도 어렴풋이 기억나고, 아파트 시대의 '알박기'라는 말도 당시 처음 들어서 이제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개발 시대 이해 집단간의 충돌이 잦았다. 시위가 일상이고, 민주화 시위와 함께 대한민국은 시위가 일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부에서도 시위대 막는 경찰 이외에 전담 무술 경찰로 이루어진 부대를 따로 창설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던 때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처럼 생각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화전민'에 관한 기억과 아파트 투기 기억은 뚜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화전민을 직접 보거나 사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70년대 산업화가 한참일 때 화전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전민들이 농민들의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들이 자주 보도됐다. 식량이 모자랄 시기지만 산지녹화 사업은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 슬로건의 하나였다. 화전민들은 화재에 늘 노출되어 있기에 산을 태우기 십상이라고 했다. 이 책 2부 2장 「화전민과 농민 : 울창한 산림의 뒷면」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독자가 기억하던 바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아마 독자는 당시 보도 등으로만 접했기에 화전민의 어려움을 몰랐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농사 지을 땅도 없고, 집도 없는 유랑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내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가여운 상태의 사라들을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한다는 주장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 책의 내용이 아련한 것은 다같이 가난했던 시절 악다구니 쓰고 더 가지려고 싸우고 했던 시절엔 그나마 사람 사이에는 온정(溫情)이란 게 있었는데 더 잘살고 먹을 것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세상인데 왜 온정은 점점 식어가는 것일까. 그런 흔적은 분명히 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 동네부터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다.

 

저자 : 김시덕

 

일주일에 서너 번은 동네 근처에서 먼 지방까지 다니며 도시 곳곳을 촬영하고 기록하는 도시 답사가이자, 도시에 남아 있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과 자취를 추적하며 도시의 역사와 현재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도시문헌학자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쳐,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를 역임했다.

주류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서울이라는 도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서울 선언’ 시리즈 『서울 선언』(2018 세종도서 선정), 『갈등 도시』(2020 세종도서 선정), 『대서울의 길』을 통해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관악구의 과거와 현재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관악구 문화 예술 기초 자료집: 관악 동네 역사』를 출간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2021년 제70회 서울특별시 문화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2015 세종도서 선정), 『일본인 이야기 1·2』, 『양천 동네 이야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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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보이지 않는 도시, 퍼머루트 1부 : 공중에 떠 있는 집 1~2 세트 - 전2권 스토리 D
E. S. 호버트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11월
평점 :
절판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도시는 늘 새롭고, 신선하다. 퍼머루트라는 도시 이름을 들었을 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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