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
고혜원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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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면 군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는 민간인, 그중에서도 어린이나 노약자가 죽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도 있다. 어떤 게 사실인지 여부는 별 의미가 없다. 현대전은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무기의 발달로 최첨단 무기까지 동원되는 현대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장거리 미사일이나 항공 폭격, 심지어 무인 드론까지 후방에 폭격을 가할 수 있으니 위험 지역이 따로 없다는 것이 실감난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을 뉴스를 통해 볼 때 그 생각은 더욱 강력하게 전쟁은 예방 이외의 답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나지 않도록 최선의 방어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합리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치른 가장 최근의 전쟁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희생자는 군인이었다는 전후 통계에서 보여주고 있다.

현대전이야 전후방이 따로 없다지만 그때만 해도 군인들이 밀고 밀리는 전선에서 가장 많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 『래빗』을 읽어보면 가장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는 후방의 사람들도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는 없다. 이 책은 한국전쟁 때 실존했던 소녀 첩보원을 모티프로 한 소설 작품이다.

1950년 여름, 전쟁이 났다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주인공 홍주는 아직 어린 소녀로서 전쟁이 실감나지 않는다. 더욱이 워낙 산골이어서인지 군인들이 왔다가지도 않았고, 흔한 총소리나 폭격도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로만 들었지 아직 전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순박할 시골 소녀였다. 여느 때처럼 약초를 캐러 산을 헤매다 운 좋게 산삼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되돌아오다 말로만 듣던 은빛 비행기의 폭격을 목격하면서 홍주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폭격으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홍주는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잃고 군부대에 자원한다. 작전에 나간 열 명 중 아홉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켈로 부대 소속 소녀 첩보원 ‘래빗’이 된다.

 


 

'켈로 부대'는 독자로서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한국전쟁 때 활약했던 유명한 부대 이름이다.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켈로 부대는 어렸을 때 만화 등을 통해 자주 들어왔던 부대 이름이었다. 나중에 TV를 통해 확인도 했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기에 전후 세대인 독자가 전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시 백과사전을 통해 보충 지식을 더했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켈로 부대'는 1949년 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비정규전 부대이다. 한국전쟁 중에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등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4년 해체되었으며, 오늘날 특전사의 모체가 되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직할한 '주한 연락처(Korea Liaison Office)'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명칭이며, KLO의 한국어 발음을 따서 '켈로 부대'라고도 한다. 1949년 창설 후 6·25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제8240부대로 알려진 주한국제연합유격군(United Nations Partisan Infantry Korea; UNPIK)에 편입되었다. 제8240부대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8월 대한민국 육군본부 산하의 제8250부대로 재편되었다가, 1954년 3월 육군에 분산 편입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었다. 군대에 잔류한 일부 대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1958년 제1전투단(제7725부대)가 창설된 뒤 제1전투단은 1959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되었으며, 1969년 제1공수특전단과 제1·제2 유격여단이 통합되어 특수전사령부(특전사)가 창설되었다.

KLO부대는 고트(Goat)·선(Sun)·위스키(Whiskey)·이글(Eagle)·불도그(Bulldog)·리바이벌(Revival)·파인애플(Pineapple) 등 10여 개의 독립된 지대로 구성되었다. 부대원들은 창설 당시에는 북한 출신들로 채워졌으나 한국전쟁 중에 사망자와 실종자가 늘어가자 남한 출신도 모집하였으며, 전체 대원 가운데 약 20%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으로서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방해 공작, 양민 구출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KLO 부대원들은 어민으로 가장하여 북한군이 도처에 설치한 기뢰를 찾아내는 동시에 연합군 군함이 무사히 인천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바다의 상태와 항로의 수심을 측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작전 개시를 몇 시간 앞둔 9월 14일 밤에 고트 지대장 최규봉을 포함한 한국측 3명과 미군측 3명의 특공조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여 디데이(d-day)인 9월 15일에 등대불을 밝힘으로써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웠다. 인천상륙작전 때 이들의 활약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대로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

이 책 『래빗』은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역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녀 첩보원 ‘래빗’을 다룬다. 당연한 보호 대상이기에 오히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첩보원이 되었고, 첩보원이었기에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소녀들이다. 하지만 저자 고혜원이 그려내는 이들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않다. 전쟁 중에도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하듯, 죽음과 상실이 만연한 곳에서 래빗들은 미제 초콜릿을 나누어 먹고, 고향 이야기를 꽃피우고, 살아 돌아온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주인공 홍주는 '독한 년'이라 불리며 가장 오래 살아남지만, 돌아온 것은 '변절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전쟁이 가녀린 소녀가 삶을 이어가는 데 일찍 깨달음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의심을 뒤로 하고 떳떳함을 증명하기 위해 작전지로 향한 홍주는 또 다른 래빗 유경과 만나 친구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입대했다는 유경과 있으면서 홍주는 처음으로 전쟁이 끝난 뒤의 삶을 생각한다. 이 무렵 두 사람이 있는 작전지로 아군의 폭격이 예정되어 있다는 첩보가 들려온다.

 


 

이 소설 『래빗』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작전을 펼쳤던 첩보원 ‘래빗’들의 활동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적에게 의심받지 않는 효율적인 정보원이 필요해 시작된 작전명, 래빗. ‘전쟁 승리’라는 국운을 건 중대한 사명 아래 힘없는 개개인의 운명은 손쉽게 스러지고 묻힌다. 무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으므로, 아군의 지뢰, 미사일, 총칼에 희생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심지어 첩보원인 래빗은 작전 중에 적군에게 회유되어 변절하지는 않았는지 늘 아군의 의심을 견뎌야 한다. 적군의 총칼 앞에서 살아 돌아와도 아군의 의심을 피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존재다. 첩보 부대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래빗들은 철두철미하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성과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죽이는 게 당연해진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고, 비겁하고 비정한 마음에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꼿꼿한 마음이 귀해서 더 빛난다. 더욱이 총상을 입은 동료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돌아오는 강인한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 온 고혜원 작가는 뛰어난 캐릭터 설정과 철저한 사전조사를 거쳐 한편의 웰메이드 영화를 보는 듯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갓 스물이 된 두 명의 여성 첩보원, 홍주와 유경이 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홍주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살고 싶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나 첩보 부대에 입대했다. 또 다른 래빗, 유경은 첩보원 활동을 하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거래에 응했다. 또,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유경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3년 후, 홍주와 유경은 적군 점령지에서 마주친다. 우연히 두 사람 다 래빗이라는 걸 알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전쟁이 시작되고는 처음으로 사귄 벗이 된다. 홍주는 유경 덕분에 전쟁이 끝난 뒤의 미래를 꿈꾸고, 유경은 홍주 앞에서 〈옥중화〉 연극을 선보이며 배우라는 제 꿈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유경의 꿈과 미래는 잃어버린 과거를 붙잡고 있던 홍주에게로 전해진다.

 


 

첩보 부대 켈로(KLO)에서 적진으로 향한 래빗들은 열에 아홉이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홍주는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해 캐비닛에 바를 정(正) 자를 새겨 그 숫자를 기억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료들의 빈자리를 보며 홍주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고 싶어서 왔는데, 아군으로부터 변절을 의심받으면서도 왜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남고 있나.’ 자기모순에 갇힌 홍주에게,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보라는 유경의 말은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으려는 데는 이유가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언제나 앞을 보고 걷는 유경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제자리걸음 중이던 홍주의 손을 이끈다.

 

“이 전쟁이 곧 끝나면 너는 뭘 하고 싶어? 나는 무대에 설 거라고 이미 말했잖아.”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제부터 상상하고 생각해. 전쟁이 끝나면 너는 무엇을 할지.”(p.178)

 

소설 속에서 래빗들이 켈로 부대에 들어온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막 해방된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또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앗아간 적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라져 가고, 래빗들은 저마다 생존의 이유를 찾는다.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모든 게 망가지고 소실된 전쟁터. 하지만 보도블록 깔린 길에서도 틈새를 비집고 새싹이 피어나듯, 래빗들은 미제 초콜릿을 나누고, 공기놀이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폭격으로 공포에 질린 동료를 감싸 안아준다. 이렇듯 작가는 가볍지도, 너무 비장하지도 않게 래빗들의 삶을 올곧고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소설 작품은 2022 제2회 K-스토리 공모전에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활동했던 소녀 첩보원들의 삶을 생생하고 감동적이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대상을 수상했다. 전년에 이어 올해도 심사를 맡은 이미예 작가는 “흰토끼가 시각적으로 첩보원 소녀들과 맞아떨어지면서 이야기의 고유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됐고,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생생한 영상화가 기대되는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수작이어서 대상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다.

 

저자 고혜원은 책 뒷 부분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한국전쟁 뒤에 사라진 이야기들을 재조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전쟁 중이기에 모든 것들이 쉽게 사라지던 시대를 되돌아보며, 그 시대여서 잃어버린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대를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마음은 미래를 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자 : 고혜원

 

벚꽃이 만발한 봄에 태어났다. 서로의 온기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2019년 〈경희〉가 한경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되었다. 2022년 제1회 KT스튜디오지니 시리즈 공모전에서 〈연화〉로 우수상을, 제2회 K-스토리 공모전에서 장편소설 《래빗》으로 대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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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삶이 된다 - 지치지 않고 꿈을 실현한 청년의사 폴 파머 이야기
트레이시 키더 지음, 서유라 옮김 / 디케이제이에스(DKJS)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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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게, 꺾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다면 이 책은 당연히 롤 모델의 역할을 할 것이며, 청년 의사로서 ‘21세기 슈바이처‘로 불리까지의 한 의사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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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삶이 된다 - 지치지 않고 꿈을 실현한 청년의사 폴 파머 이야기
트레이시 키더 지음, 서유라 옮김 / 디케이제이에스(DKJS)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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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슈바이처’라고 불리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점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헌신 의료활동을 펼친 슈바이처 박사에 대해 우리는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든 슈바이처가 벌인 봉사 활동은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의 주인공 폴 파머 박사는 젊은 미국인 의사다. 그는 앞의 별칭 이외에도 ‘국제보건의 아버지’, ‘현대판 로빈 후드’, ‘세상을 고치는 의사’, ‘전염병학 전문가이자 인류학자’ 등 수많은 별칭으로 수식되는 위인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가 어떤 활동을 펼쳤기에 위인의 반열에 올릴 정도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국제의료 구호단체 ‘파트너스 인 헬스(PIH)’를 설립한 폴 파머(Paul Farmer) 박사는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의료봉사 활동 쓴 사람은 트레이시 키더(Tracy Kidder)로,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자 논픽션 서사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파머가 세상을 떠난 후 논픽션의 대가 트레이시 키더는 왜 펜을 잡았을까?

키더는 파머의 젊은 날을 밀착해 그려내며 이 질문에 대한 생생한 대답을 내놓는다. 이 책 『꿈은 삶이 된다』는 아이티의 작은 마을 캉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파머가 펼친 의료활동을 현장감 있게 기록한 현장일지이며, 특히 그가 어떤 가치관과 태도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꿈을 실현해나갔는지 알아보는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은 키더와 파머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치 한 편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의 글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 사건으로부터 6년이 지난 어느 날, 폴 에드워드 파머 박사는 우리의 첫 만남을 이렇게 추억했다.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우린 하필이면 목이 잘린 시체 때문에 만났죠."

때는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1994년 겨울이었다. 사건의 무대는 아이티의 중부 고원지대에 자리한 소규모 상업도시 미르발레스로, 상업도시라고 해도 도로가 드문드문 포장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p.11)

 


 

당시 저자 키더는 아이티에 주둔 중이던 미군을 취재하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고 국민을 잔혹하게 통치하던 아이티 군사정권의 권력을 박탈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복권시키는 임무를 위해 파견된 미군 2만 명을 파견했다. 캐럴 대위의 부대에 소속된 군인은 고작 여덟 명뿐이었지만 그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약 2,5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시골 지역에서 인구 15만여 명의 평화를 유지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중부 고원지대에서는 정치적 폭력이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캐럴 대위가 들어온 후 일어난 살인사건은 딱 한 건뿐이었다. 유난히도 끔찍한 사건이긴 했지만.

사건 몇 주 전, 캐럴 대위의 부하들은 아르티보니트 강에서 미르발레스 전 부시장의 머리 없는 시신을 건졌다. 투표로 선출된 그는 조만간 복권될 예정인 민주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는 군사정권 치하의 지방 관리자였던 시골 보안관 네르바 쥐스테가 지목됐다. 그는 주민 대부분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였다. 캐럴 대위와 부하들은 쥐스테를 체포해 심문했지만 증거나 목격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그를 풀어줘야 했다.

만 29세인 대위는 앨라배마 출신의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저자는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아이티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타국의 '국가 재건'은 미군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적극적인 협조를 거부했다. 한번은 대위가 임신한 아이티 여성을 이송하기 위해 미 육군의 응급 헬리콥터를 가동시켰다가 윗선의 질책을 받은 일도 있었다. 발코니에서 그가 최근에 느낀 분노와 무력감에 대해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웬 미국인이 그를 찾는다고 누가 전했다.

 


 

방문객은 미국인 한 명과 아이티인 네 명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티인들은 점점 길어지는 막사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고, 미국인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캐럴 대위에게 자신의 이름이 폴 파머이며 미르발레스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밝혔다. 저자 키더는 그 당시 상황을 캐럴 대위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파머는 창백하지만 태도는 오만하다 싶을 만큼 위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둘의 대화는 이어졌고, 파머는 미국 정부가 아이티 경제를 바로잡는답시고 내놓는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기업의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아이티 국민의 고통을 더는 면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사정권의 고위관리가 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미국이 쿠데타의 뒷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의견은 아이티에는 딱 두 가지 부류만 존재한다고 것이다.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파머는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의 편이었다고 저자는 첫 만남의 인상을 밝히고 있다.

이후 우연히 저자 키더는 파머가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는 일등석에 앉아 있었고, 마이애미와 아이티를 오가는 항공편을 자주 이용하며, 몇 번인가 응급의료 상황에 도움을 준 보답으로 승무원이 좌석을 업그레이드줬다고 말했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서로의 인적 사항을 알게 됐고, 그가 스스로 밝힌 그는 만 35세의 의사로,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 중 4개월은 보스톤의 가난한 동네 교회에 머물며 환자를 보고, 나머지 8개월은 아이티에서 무보수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이티의 환자는 대부분 수력발전소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은 가난한 소작농이라는 사실도 그의 말을 들어 알았다.

 

 

몇 주 후 저자가 보스톤에 가서 저녁 대접을 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당시 키더는 자신이 쓰고 있던 글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 덕분에 저자는 아이티의 역사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이티보다는 '빈민을 위한 의사'를 자처하는 폴 파머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그날 저녁, 자신이 누리는 여유 있는 삶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듯한 그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저자 키더는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지저분한 교회의 쪽방과 아이티 중부의 황무지 대신 보스톤의 큰 병원과 교외의 쾌적한 주택단지를 오가며 젊고 성공한 의사로서의 인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됐다. 하지만 아이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에서 소작농들과 함께 지내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듯한,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다고 한다.

파머는 저자 트레이시 키더에게 “저는 절망이 뭔지 몰라요. 앞으로도 알게 될 것 같지 않고요”라고 편지에서 말한 적 있다고 한다. 하지만 파머가 아무리 낙천적이라 한들 그 역시 좌절한 적이 없을 리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은 완전무결한 위인의 모습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사적 인상이나 감성을 모두 배제하는 노련한 작가의 글솜씨를 보여준다. 저자는 생명과 긴밀하게 얽힐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료인을 소재로 다룰 때는 그들을 신격화하고 위인화하기 쉽다. 읽는 이가 안전하고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그를 롤모델로 삼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더는 정반대 글쓰기 전략을 취한다. 때로 갈등하고 흔들리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는 파머의 젊은 날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이 정한 가치를 지키고 자기 안의 모순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의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를 롤모델로 삼기보다는 그의 가치에 공감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나은 시스템과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려보게 한다. 역시 논픽션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다운 솜씨다.

 


 

책은 파머의 유년시절과 대학시절, 그리고 하버드 의과대학에 재학하는 동시에 캉주를 오가며 의료활동을 펼치던 시기를 되짚는다. 그리고 PIH를 설립하고 에이즈, 다제내성 결핵 등 세계를 휩쓴 질병 퇴치에 앞장서는 모습을 그려낸다. 파머는 유복하기는커녕 괴짜 같은 아버지 덕분에 버스와 보트를 집 삼아 자랐지만,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여러 관심 분야를 탐색하며 인류학자이자 의료인이라는 꿈을 키웠고,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의 환자로 여기며 의술과 인술을 펼쳤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PIH를 설립하면서는 전 세계은행 총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용(Jim Yong Kim)과 유명 소설가인 로알드 달의 딸이기도 한 오필리아 달(Ophelia Dahl)과 의기투합해 혼자만의 꿈을 함께하는 꿈으로 확장해나간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는 일을 하나씩 이루는 놀라운 결과 앞에서도 그는 한두 명의 가난한 환자를 직접 살피고 치료하기 위해 일곱 시간을 들여 산을 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의 주인공인 폴 파머 박사는 2022년 2월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든지 편안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는 하루에 70~80통에 이르는 이메일에 성심껏 답장을 쓰고, 보스턴과 캉주를 쉴 새 없이 오가며 환자를 돌보고,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회의와 연설을 하고, PIH 기부자들에게 일일이 감사장을 보내는 ‘무모한 열정’으로 가득한 일생을 보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올바름을 믿었고, 그 일을 끝내 제대로 해낸다면 설령 지금 실패할지언정 헛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파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저자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환자에 대한 구체적인 애정, 좌절에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태도,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섬세함, 함께하자고 말할 용기와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마음은 여전히 큰 울림을 전한다.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헌신적인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그의 젊은 날을 보는 동안 가슴 절절히 새겨지도록 저자는 글에 담았다. 어떤 일을 하든 책을 읽으며 ‘내 일의 본질’,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깊고 폭넓게 고민하고 자기 삶의 지도를 그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독자에게 심어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파머는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구매할 수 없는 사람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의술을 파는 현실에 모순을 느끼기에 그 불편함을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숭고한 영혼에서 비롯된 말이리라. 이처럼 자신의 가치관을 단단하게 세운 사람은 수많은 역경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저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파머가 스스로를 ‘절망을 모르는 사람’으로 칭한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라고 추단하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실패를 해도 자신의 길에 확신이 있고, 그 실패가 자기 내부의 불편함을 줄여나가는 과정임을 안다면 잠시 좌절할지언정 종국에는 꿈을 이룰 것이기에.

저자는 말한다. 원대한 꿈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고. 폴 파머의 꿈은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 더 크고 건실해졌다고. 특히 오필리아 달 그리고 김용은 그의 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료이었다고. 그들은 쉴 새 없이 토론하며 각자의 나아갈 바, 함께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정립했으며 서로를 신뢰하고 응원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릭이 총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벤딩 디 아크: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특히 맷 데이먼은 “폴 파머, 김용, 오필리아 달은 나의 영웅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용기와 실천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또한 PIH의 열렬한 후원자인 톰 화이트(Tom White)와 파머의 인연도 감동적이다. “이승을 떠날 때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사회봉사에 뜻이 깊은 톰 화이트였지만, 그조차도 파머와 김용이 자신이 죽기도 전에 돈을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는 많은 돈을 PIH에 기부했다. 그리고 걱정과 별개로 그는 단 한 번도 파머와 김용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만큼이나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인생을 바꾸었으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세상의 변화에도 기여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진정 쓰고 싶은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다들 비용 대비 효과니 뭐니 떠들어대는데, 살면서 단 한 사람의 목숨만 구해낸대도 꽤 괜찮은 인생이라는 거예요. 비용 찾고 효과 찾는 인간이 대체 누구를 구했습니까? 저는 죽어가던 미켈라를 살려냈고, 억울한 젊은이를 감옥에서 구해낼 거예요. 이거면 제 인생은 이미 성공한 셈이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정말 끝내주겠죠?”(p. 309)

 

저자 : 트레이시 키더(Tracy Kidder)

‘살아 있는 휴머니즘의 펜촉’으로 불리는 미국 최고의 논픽션 작가. 1945년에 태어났으며, 하버드대학교와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들의 장인 정신을 다룬 《새로운 기계의 영혼》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미 도서상, 로버트 F. 케네디상 등을 수상했다.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 《홈타운(Home Town)》 《오랜 친구(Old Friends)》 《아이들 사이에서(Among Schoolchildren)》 《하우스(House)》 《노숙인(Rough Sleepers)》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현재는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

 

역자 : 서유라

서강대학교 영미어문학과 및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백화점 의류패션팀과 법률사무소 기획팀을 거쳐 현재 전문번역가 및 작가로 활동 중이다.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좋은 권위』 , 『태도의 품격』 , 『인듀어』 , 『인재로 승리하라』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일러스트 에세이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 『나와 작은 아씨들』 을 펴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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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02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글이었어요. 고맙게 읽었습니다.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2024 세종도서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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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열대 지역에서 만나는 우리들은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야만의 행위를 덮으려고 내세운 편견과 오해를 거둬들여야 한다. 열대 지역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수많은 지구 환경이 파괴된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파괴자들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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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2024 세종도서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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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해외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지만 불과 30년여 전만 하더라도 그리 쉽지 않았다.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그랬다. 뿐만 아니라 해외 여행은 경비가 만만찮은 데다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들이 많아 무척 제한적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유로운 해외 여행이란 '아직 먼' 이야기이고 꿈 같은 현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외 여행 자유화가 실시됐다. 정말 자고 일어나 보니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고, 갖고 나가는 현금도 1인 5,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두 배 늘었다. 획기적이었다. 당시 YS 정부의 '세계화' 계획에 따른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국교가 정상화되는 동유럽, 러시아,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도 국교 정상화 맞춰 비자도 필요없이 여권만 가지고 가면 됐다. 여권만 있으면 여행국의 입국은 OK였다. 너도나도 해외 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국내 신혼여행지 1위로 꼽히던 국내 관광업계는 불황의 시기가 됐다. 
독자도 그때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었다. 영어도 안 되고, 홀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여행으로 첫 해외 여행의 테이프를 끊었다. 관광업체의 알선으로 다녔기 때문에 여행이라기보다 시찰이나 연수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관광업체는 수익을 목적으로 모집을 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화려한, 국내에서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만으로 구성됐다. 주마간산식 관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태어났으면 유럽 여행 한 번쯤은..."이라는 생각으로 앞다퉈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정말 말 그대로 붐이 일었다. 불과 몇 년 뒤 IMF라는 엄청난 시련이 닥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규제에 묶였던 해외 여행 자유화로 '돈 모아 해외 여행'이라는 평생 소원이 될 지경이었다. 주부들은 친목계 등을 통해 해외 여행 계를 만들어 너도나도 해외 여행을 갈 정도였다. 그야말로 정부의 해외 여행 억제 조치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무분별한 해외 여행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관광'이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배움'보다는 '사치'였다. 국민 소득이 오르고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가 일시에 해외 여행으로 몰려서 그때부터는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한국말을 조금씩 할 줄 아는 관광지 상인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관광지에서 쇼핑은 '면세품'이라는 이유로 있는 대로 다 사가지고 돌아올 심산으로 사들여 왔다.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IMF에 해외 여행 붐이 한몫 거든 셈이다라고 말한다. 지금이야 다 지나간 이야기라 쉽게들 말하지만 학교에서 이름만 배웠던 IMF가 살벌한 곳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열대 지역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 개념을 제시하는 이 책 소개를 하기에 앞서 사설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독자가 여행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이 앞서 몇 마디 덧붙인 것이니 양해 바란다.

이 책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이 새로운 여행 개념뿐만 아니라 여행의 원래 뜻에 가장 가깝게 쓰여졌기에 사적인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관광'과 '여행'의 참뜻을 알고 여행을 즐기자는 의미에서다. 지구의 기후별로 나눈 열대 지역은 일년 내내 덥고 햇볕에 탄 새까만 피부의 사람들로 연상된다. 아직도 문명의 혜택을 못 받는 '미개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 곳이다. 저자 이영민도 책에서 지적하지만 "열대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위험하다는 인식은 역사적으로 덧씌워진 편견"일 뿐이다. 무력 침입해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사람들이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덧씌운 '의도적 편견'이다. 실제로 이 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비문명화된 곳이 아직 많다는 점을 악용한 사례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식민지로 만들어 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었다. 우리도 식민지를 겪었지만 똑 같은 논리로 일제 강점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들의 말이 얼마나 사리에 맞지 않는 비논리적 말인지 알 수 있다.

 

 

열대 지방 여행이 꺼려졌던 이유는 감염병이나 너무 더운 날씨에 의한 풍토병 등의 위험이 크고, 교통도 불편한 데다 치안마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점은 있을 것이다. 사실 독자도 몇 번이나 열대 지역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매번 건강상의 우려로 계획을 철회하곤 했다. 전쟁 중인 나라에는 미리 외교부나 문화부 등에서 여행을 자제하는 단계별 경보를 주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면 전쟁에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할 우려는 크지 않다. 다만 예방 접종이나 풍토병에 대해 지식이 없이는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긴 하다. 치안도 다소 불안한 곳이 많지만 아무리 뒤떨어진 문명 시대에 살고 있어도 이쪽이 공격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공격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또 열대 지방은 대부분 교통이 불편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낯선 기후에 오래 노출될 경우 풍토병은 물론 각종 감염병으로 고생할 수 있다는 경고는 무조건 수용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표제어에도 나오듯이 '지리학자'로서의 여행이라서 탐사의 성격이 강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수 여행의 목적임이 맞다. 지리학에 관한 지식을 지역에 관한 여행 상식에 슬쩍 덧붙이는 형식으로 쓰였다. 앞서 말한 대로 기후에 의해 열대, 아열대, 온대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경계가 북위 몇 도? 하는식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대체로 산이나 강, 바다 등의 경계에 따라 구분되어짐을 확연하게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열대림이라고 하는 지역도 열대 지방부터 아열대 지역까지 걸쳐 발달된 곳이고, 외부와의 접촉이 어렵고, 강을 따라 나라의 경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대면할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 아무래도 소통이 불편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경계할 수밖에 없을 터, 소통이 안 된 곳은 탐험 정신을 앞세우지 말고,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는 여행객으로서의 자세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리학자의 여행답게 중요한 지리적 정보 중 하나인 기후를 중심으로 카리브해의 휴양지부터 생명의 보고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전 세계 곳곳의 열대 지역을 여행한다. 기후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기후의 특성을 이해하고 여행지를 바라본다면 더 깊이, 더 많이,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첫 번째 여행지로 ‘열대’를 선택했을까? 우리에게 가장 낯설면서도 친숙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위험하고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쉽게 여행지로 선택하기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저자는 이 책에 열대에 덧씌워진 오해와 편견을 거둬내고 총천연색의 다양함이 살아 숨쉬는 있는 그대로의 열대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1부에서는 열대 지역의 자연환경과 독특한 지리적 현상을 정리하고, 2부에서는 가장 전형적인 열대 기후 특성이 나타나는 보르네오섬, 아마존, 빅토리아호,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열대 고산지대, 열대 바다휴양지의 6개 지역을 중심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열대의 자연이 여행자들에게 어떤 매력을 선사하는지 담아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열대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어져왔던 교류의 흔적들과 그곳 사람들의 삶과 그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 남기게 될 것이다. 첫째, 열대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위험하다는 인식은 역사적으로 덧씌워진 편견이라는 점, 둘째 열대 지역의 자연환경은 무덥고 습한 게 전부가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다는 점, 셋째 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열대우림 파괴와 같은 일들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열대에 덧씌워진 유토피아의 이미지와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열대를 소비하는 방식이 잘못된 이미지에 근거했던 것이 아닌지를 성찰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열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오해와 편견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했다. 이 책은 ‘다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며, 독자들은 지리학적 여행이 어떤 앎과 경험의 즐거움을 선사해주는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은 한 가지 더 있다. 열대는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지만 실은 그곳의 삶이 우리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열대 동물들의 서식처인 열대우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기름야자에서 짜낸 팜유는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으며, 보르네오섬의 아름드리 열대 나무는 원목으로 수출되어 가구 제품의 원료가 되고 있다. 아마존 개발에 따른 열대우림의 파괴는 지구 온난화를 가속하고 있다. 이를 열대 지역 사람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열대가 주는 풍요로움의 혜택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은 결국 선진국 사람들이다. 이런 깨달음은 오늘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누구나 깨우쳐 다시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제공한다. 열대 지방 여행은 인간이 편의를 위해 수많은 지구 환경을 파괴된 현장에서 파괴자들의 민낯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장소·사람·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지리학자의 여행은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도 시선이 닿는다. 낯선 것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낯익은 것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 책은 지리학적 여행이 어떤 앎과 경험의 즐거움을 선사해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장 낯선 열대라는 지역을 통해 생동감 있게 전해준다.

 

저자 : 이영민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다문화·상호문화 협동과정/아시아 여성학 협동과정 교수.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지리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소와 사람, 그리고 문화의 관계를 밝히는 인문지리학을 연구한다. 특히 여행과 국제 이주에 초점을 맞추어 글로벌 이동성과 장소 재구성의 관계를 밝히면서 그 속에 펼쳐지는 인간의 삶과 행복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지리학자의 인문여행』, 『나를 읽는 인문학 수업』(공저)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문화·장소·흔적: 문화지리로 세상 읽기』,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 『국가·경계·질서: 21세기 경계의 비판적 이해』, 『쿠바의 경관: 전통유산과 기억, 그리고 장소』 등 다수의 번역서를 공동으로 출간했다. 또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온·오프라인 미디어에 여행의 지리학, 국제 이주와 한국의 다문화 현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아울러 지자체 평생교육원, 공공도서관, 백화점 문화센터, 초중고 교사연수와 인문학 특강 등에서 관련 내용을 전파하는 일에도 주력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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