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 - 일상, 영감의 트리거
정진 지음 / 디페랑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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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미술가 정진은 "영감의 순간은 생각을 촉발하는 트리거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뒤의 지속적인 시간들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겐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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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 - 일상, 영감의 트리거
정진 지음 / 디페랑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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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 일상』은 저자 정진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적어 놓은 글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읽어도 될 글들은 아니다. 저자는 미술가로서 자신의 '쓰기'에 대한 말부터 내어놓는다. 하나는, 두서없이 뻗고 흩어지는 생각들을 부여잡기 위한 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을 할 때마다 적는 노트들이라고 한다.(p.5) 저자는 매일 생각하고 매일 작품하니, 매일 적는단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 지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둔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작자에게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모았다가 글도 쓰고 미술도 한다. 글쓰기와 미술의 재료로 쓴다는 말일 게다. 이것들은 저자와 세상을 향한 고백이나 다짐들, 궁금증 같은 것들이며 일상이자 고민의 흔적들이라고 털어놓는다. 삶의 어느 시기마다 흥미로웠던 것을 적어 모은다고 고백한다. 이것의 주제에는 범위가 없어 한없이 작은 입자가 되기도, 끝없이 거대한 우주가 되기도, 더 이해 못 할 자신이 되기도 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책은 글들마다 제목이 붙어 있지만 〈목차〉에 적어놓지 않았다. 목차에는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 사이에 5개의 제목만 덩그러니 적었다. 1. 「밤 12시」, 2. 「마음 풍경」, 3. 「영역 인간」, 4. 「남겨진 감정들」, 5. 「낮 12시」 등이다. 밤 12시부터 낮 12까지의 일상을 의미하는지 편의상 구분해 놓은 것인지 독자로서는 갈팡질팡하지만 책을 읽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으니 그만이다. 다만 제목에 적힌 '아무런'이란 의미를 쓴 글을 찾으려면 제목이 따로 없어 애를 먹는다.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찾아낸다. 3장(章) 「영역 인간」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아무러하다'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무렇다.와 아무렇지 않다.의 차이를 모르겠다.

사전을 열심히 찾아보고, 예시를 정성껏 읽어 봐도 알 수가 없다.

아무렇지 않다는, 아무렇가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그 의미가 반대라는 것인데,

내게 둘은 같은 말 같다.

만약 같다면, 왜 그럴까.

아무러함과 아무렇지 않음을 구별치 못하는 나는, 드넓은 인간의 범주 안에서도,

그 극과 극의 반응을 헷갈려한다.

나를 참으로 좋아하는 이와 싫어하는 이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내게 인간으로서 호감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호와 불호는 극의 감정을 띠지 않으니까.

(중략)

-넌 항상, 당연한 걸 어려워하더라.(p.160~161)

 


 

이 책의 글들은 짧은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문장 부호들까지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다. 함축적 의미와 작가 자신만의 미학으로부터, 편집의 일반성은 잠시 접어 두어도 좋을 만큼, 예술에 관한 글인 동시에 생각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독자가 읽어본 바로서는 함축과 다중 의미, 부정적 표현과 뜻이 밖으로 강렬하게 드러나는 언어 등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미술을 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독자의 오판일지 모르지만 글쓰기에도 부정적 표현이나 애매모호한 표현의 글은 잘 쓰지 않는 듯하다. 문학은 함축과 은유, 상징과 다중 의미어 등을 무척 좋아하는데··· 미술을 하는 예술가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도 하다.

3장의 '나에게 예술'이란 글에서도 감지된다. 예술과 어머니에 대한 표현이다.

 

어떤 감정도 생각이나 행동도 강요하지 않지만,

스스로 변화할 기회를 주는 것.

몇 번이고 주는 것.

 

나는 그것이,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주변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지만,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거대한 존재.

그녀를 매일 보는 것은 생활의 일부이지만,사실 그녀는 내게 새상을 있게 한, 그 처음이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가 함께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어머니란 존재가 그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는 것도 아니다.

그것조차, 예술과 닮았다.

 


 

저자는 '밤 12시의 이야기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자신은 밤 12시에 글을 쓴다고 암시한다. 저자는 '글을 만든다'라고 표현한다. 1장 「밤 12시」의 글 속에 있다. 언어유희 같은 부분도 있지만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으면 결코 언어유희가 아니다. 앞뒤 맥락을 이어 읽어야 한 문장, 하나의 글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글을 쓰는 맛이고 글을 읽는 멋이다.

 

밤 12시에는 글을 만든다.

만든다는 동사가 멋없지만 적합하다. 단어들을 이리저리 짓고, 쌓고, 깎고, 붙이는데, 그것들을 아우르려면 만든다가 알맞다.

결국 원래의 것이 아닌 새로운 상태를 이루어 내는 것.

그리고 나의 글은 원래 멋없다. 그래서 괜찮다.

(중략)

왜곡은 환영(歡迎)한다. 어차피

왜곡은 환영(幻影)이다.

밤의 시간들은 그것에 도가 텄다.

사상이나 감각의 착오를 보이게 하는 것.

그대로 두는 것이 글에 이롭다.

낮 12시가 궁금의 시간이라면,

밤 12시는 궁극(窮極)의 시간인가.

 


 

책을 뒤적이다 그림이 눈에 띄어 시선을 꽂는다. 무지개를 표현하는 듯한 유화 물감의 부드러운 선과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질감과 색감이 도드라진다. '무지개 감정'이란 글이다. 무지개 감정이란 무슨 감정이고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붉다고 하기엔 너무 파랗고,

푸르다고 하기엔 너무 빨갛다.

딱히, 보라도 아니다.

이름이 없다.

감정을 나누는 일은,

많은 시대 많은 사람들이 해온 일인데,

그것이 하나의 색으로 나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감정은 무지개를 닮았다.

기쁨도 슬픔도 여러 색을 가진다.

하나의 색을 가진 순수한 감정이 존재는 했었나?

 

저자의 마음은 이미 결론에 가 있다. 이렇게 표현돼 있다. "난 그런 게, 사람 같다."(p.78)

 


 

4장 「남겨진 감정들」에 유독 눈에 띄는 그림과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 제목 '믿음'이다. 그림은 세 개의 원 안에 산을 그린 유화의 붓터치가 멋진 그림이 등장한다. 세 개의 원 안에 같은 느낌이 아니다. 오른쪽 그림과 왼쪽 그림은 분명 제대로 인쇄돼 나왔지만 가운데 그림은 접혀 세로 타원형 안에 갇힌 산이, 그나마 찌그러지고 작아진 듯 보인다. 의도적으로 가운데 산을 그렇게 보이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책 제작 상 불가피한 모습이다. 불가피했지만 독자들이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 믿기 쉽다.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술이 '가장' 고결한 직업이라 믿지 않는다.

펜이 칼보다 '더' 강하다 밎지 않는다.

지금 가진 그의 것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나를 믿어! 하는 대부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어쩌면 믿음은 속함과 비슷하다.

(중략)

믿지 않으면 분주하고 외롭지만,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저자는 5장 「낮 12시」에서 '요즘 하는 작품'에 대해 말한다. 단 넉 줄로 썼다.

 

- 질서에 대한 공부 〈높고 낮음, 흐름, 깊고 얕음〉

 

대단한 것 말고,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질서.

일부러 줄 세우고 좌우로 정렬하는 그런 것 말고,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지는 그런 질서.(p.320)

 

저자 : 정진

 

대기업을 퇴사하고 로드 아일랜드로 미술유학을 떠났다.

2011년 졸업 후, 계속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과 방법으로,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며 글 쓰고 미술 한다.

“글을 쓴다는 것과 미술을 한다는 것이 교차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이, 내게는 환희(歡喜)하다.”

www.JungJean.com

@jungjean_jungjean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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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
봄비눈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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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는 죽음 후 1년 간의 삶이 주어진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답하는 내용이다. 누구가 그렇겠지만 살아온 날 중 '가장 빛났던 시절'이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여름은 첫사랑의 상대인 유현과 연애(?)-불과 2개월-시절로 되돌아간다. 여름은 철학과 강사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 강사직을 3년 간 유지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교수 영입으로 다음 학기는 강사직마저 불투명한 상태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학생들과 헤어지며 한 학생으로부터 다음 해에도 여름의 철학과 강의를 더 들으려 한다는 덕담도 한다. 그러나 여름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앞날에 적잖은 걱정을 한다. 덕담을 한 여학생의 눈빛에서 삶을 긍정하라는 니체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삶은 후회투성이였음을 자성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과는 다르게살 용기조차 없는 최악의 상태라고 자신을 단정짓는다.

여름은 이미 남자 친구인 태형과 결혼하기로 날짜까지 잡아놓은 상태지만 들뜨거나 즐거운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날은 태형과 웨딩드레스를 고르기로 한 날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왠지 마뜩찮은 심정으로 태형과 통화를 한다. "출발? 아, 그게 오늘이었나? 깜빡했네. 회의 있어서 못 갈 것 같은데 그냥 혼자 다녀올래? 드레스 뭐 별거 있나, 뭘 입어도 어울릴 텐데." 태형의 반응에 여름도 "그러자, 태형 씨. 혼자 보면 나도 편하지 뭐. 일 봐요." 둘 사이에 어떤 기대감이나 죽고 못 사는 사랑의 느낌이 없다. 독자들은 분위기를 이 대목에서 눈치 챌 수 있다. 둘 사이가 곧 결혼할 커플이지만 지극히 서로를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무슨 이유인지 마지못해 결혼하는 것처럼 무덤덤한 분위기다. 저자 봄비눈은 둘 사이의 간절함이 없다는 사실을 첫 키스의 장면을 끼워 넣어 함축적으로 표현해 낸다. 첫 키스를 할 땐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고,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이 사람이다' 싶다고 하던데, 나는 둘 다 느끼지 못했다.(p.14)

 


 

이런 분위기는 〈프롤로그〉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여름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프롤로그는 끝을 맺고 소설은 본격 막이 올라간다. 2학기 종강 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거리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여름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끝이 시려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 내려가는데 뒤에서 타이어가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불빛에 눈이 시렸다. 곧이어 머리가 뜨거워진다.

막이 바뀌고 여름은 커피 향이 코끝에 감돌아 눈을 뜬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주위를 살핀다. 전체적인 골조가 목재로 되어 있어 싱그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 안이다. 여름이 앉은 자리는 아주 큰 창문 옆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넓은 연둣빛 잔디밭이 보인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들어온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고요한 적막과 따스한 바람에 이곳이 평범한 카페가 아님을 여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 70대로 보이는 여인이 여름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일러준다. "먼저, 조의를 표합니다. 백여름 님은 금일, 교통사고로 사람하셨습니다. 이 카페는 이승에서 죽은 사람들이 완전한 죽음의 세계, 저승으로 가기 전 머무는 공간입니다."

여름은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익숙한 어조로 그녀는 말을 잇는다. "이곳은 BCD 카페 4호점입니다. 이승에서는 BCD를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해석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C는 'Choice'가 아니라 'Chance'입니다. 우리에게 삶이 끝나고 죽음으로 가는 사이,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이가 죽은 게 아닌가? 하고 독자들은 의문을 품겠지만 그 기대는 여인의 다음 말로 산산조각 난다. "죽음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삶을 1년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p.19)

 

 

지금까지 저자가 기술한 사항들을 함축적으로 말한다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주인공 여름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 여름이 다시 눈을 뜬 곳은 BCD 카페라고 불리는, 낯선 공간이다. 자신을 BCD 카페의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사람이 혼란스러운 여름에게 뜻밖의 말을 꺼낸다. 바로 죽기 전 과거의 삶을 1년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급작스레 주어진 기회에 여름은 지나온 삶을 회상한다. 젊고 다정했던 부모님의 모습, 부모님께 짜증 내던 기억, 친한 친구와 다른 학교에 가게 되어 울던 자신의 모습과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던 추억, 그리고 생을 마감하기 직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모습까지.

그리고 행복해 보이지 않은 자신을 직면한 여름은 문득 첫사랑이었던 유현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타이밍 때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맘을 내보이지 못하고 끝난 첫사랑, 안유현. 여름은 그때 자신이 좀 더 솔직하고 용기 있었다면, 그래서 유현과 만났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생각한다. 첫사랑과 이어졌다면 여름의 인생은 더 반짝였을까? 여름은 카페의 규칙을 지킬 것을 서약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주어진 1년, 유현을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카페의 여인은 여름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단 5분간의 영상을 되돌려 보여준다. 살아온 나날들을 5분 동안 되돌려보며 여름은 그간 자신이 살아온 도중 무심했던 부모의 사랑과 왜 부모들이 그 고생을 했으며, 자신의 결혼과 사랑, 진정으로 사랑을 느꼈던 순간을 모두 알아낸다. 다시 고인이 원하는 시점으로 돌려보내 1년 간의 삶을 더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카페 규칙대로 한 것이다. 여름은 비로소 짧은 영상에서 친한 친구와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되어 우는 모습, 고등학교 때 코피 흘리며 공부하던 모습이 연달아 나온 것도 본다. 수능을 치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머리를 염색하고 서툰 화장을 하는 모습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학 입학해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며 취한 모습이 나온 순간 놀라기도 하지만 정말 놀란 모습은 그 다음 순간이다. 많이 놀라 두 눈을 번쩍 떴지만 그 순간 영상도 끊긴다.

 


 

안유현. 나의 첫사랑. 여름이 놀라는 순간 스치듯 지나간 모습이 분명 그 사람이었다. 그는 15년이 넘은 동안 내 마음속 한 부분을 차지했던,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서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날 수 없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21살에 만난 그와의 추억은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운 얼굴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소설 작품은 우리에게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조금은 허무맹랑한 질문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야기는 두 번째 삶이 주어져도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삶의 모습을 존중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삶은 늘 성공과 행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을까?란 저자의 질문엔 '그렇지 않을 것이다'란 답이 내포된 것이나 다름없다. 책에서 다시 주어진 삶의 기회에 여름은 이번에는 지난 첫 번째 삶에 비해 훨씬 잘해 낼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결코 녹록치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에서도 두 번째 삶 또한 그리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첫 번째 삶의 후회를 껴안은 채 유현에게 다가가는 여름의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슬그머니 미소와 함께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스치는 코끝이 찡해지는 향수와 추억의 장면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추억이야 오죽하겠는가. 주인공은 여자이고, 독자는 남자이지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모두 아련한 그리움을 연상케 하고, 눈물마저 고이게 한다. 이름도 기억나고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풋풋하고 싱그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다른 나이든 모습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게 모습이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독자의 경우엔 그렇다. 이 소설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여름의 두 번째 삶을 통해 우리에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찰하게 만든다.

 


 

이 소설 작품의 완성도는 구성에서 약간의 아쉬운 점이 드러난다. BCD 카페의 존재가 이 소설의 전개에 기장 기본적 역할을 하는데 1년의 삶의 연장 혜택이 주어지는 이유나 원칙의 제시 없이 서명 날인한 3조 9개항의 〈주의 사항〉만 주어진다. 주의 사항도 이용 전, 이용 중, 이용 후 3개조에 각 2~4개의 항목뿐이다. 이 가운데 '이용 전' 4항의 경우 "모든 계약자에겐 1년의 기회가 주어진다. 단, 때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여러 번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는 항목도 너무 작의적인 느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 명기해야 할 듯하다. 독자가 이 주의 사항에 집중하는 이유는 BCD 카페가 죽은 사람에게 1년 간의 삶이 더 주어지는 특이한 설정인데, 이를 관장하는 카페의 분위기와 지켜야 할 사항을 명기해놓은 것이 조금은 허술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남자 주인공 유현은 카페에서 두 번의 혜택을 받았다. 여름과 헤어진 후 한참 있다 우연히 다시 만나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 이를 명기한 〈주의 사항〉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아쉬운 점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에 따라 〈에필로그〉에서 안유현이 태어날 때부터의 삼장 이상의 증세가 있었고, 또 여름의 입장에서 전혀 모르는 이 일들이 따로 밝혀야 하는 불필요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런 타임슬립 소설에서 아쉬운 점이 대개 기본 설정에서 허술할 경우 뒤에서 꿰맞춰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문장이나 구성 부분에서는 이 소설은 탁월하다. 특히 싱그러운 시절의 첫사랑이나 연애 감정을 되새겨볼 독자들에게는 그리움을 선물하는 타임슬립 소설로 안성맞춤의 이야기다.

 

저자 : 봄비눈

 

해가 뜨면 철학을 가르치고, 달이 뜨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당신의 '여름'은 언제인가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여름 이야기를 읽는 시간보다,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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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테라피 -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
모경자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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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영화엔 연기자의 연기, 스토리 작가에 의한 극본, 연출자가 영상, 음향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수많은 예술 분야가 한 작품에 투입된다고 해서 종합예술임에 틀림없다. 영화는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대중매체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도 수백만 명이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 관람도 영화관만을 이용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젠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양한 스크린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이제 한갓 취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 관객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다양한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는 인간에게 ‘희로애락’을 선물한다. 영화는 꿈과 희망, 기쁨과 슬픔, 낭만과 사랑, 시련과 아픔 혹은 악몽과 불안감 등을 반영하며 다양한 형태로 세상에 나와 인간과 조우한다.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 『시네마 테라피』는 표제어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이자 부제인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를 소개한다. 수많은 영화 중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마음 치유를 이끌어내는 영화를 주로 저자 모경자가 소개한다. 단순히 영화 내용을 소개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이 테라피(therapy)는 단어 그 자체로 '치료, 요법'을 의미한다. 시네마 테라피란 영화를 감상하며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시네마가 테라피예요!”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영화를 통한 자기 이야기로 연결하여 자기 수용이 일어날 수 있게 돕고 싶어 이 책을 썼다. 아픈 부분을 보고 인정하는 것은 마음을 잘 돌보는 것 중 하나이다. 시네마 테라피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문화까지 영화에서 보며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 이념과 개념들을 현실의 내 문제와 결부해서 새로운 해석으로 나올 때만 확장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특히, 빠르게 돌아가는 현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성, 정서 등 정체성의 문제들은 용납은 놔두고서라도 이해만이라도 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삶은 물론 가족, 직장, 사회, 관계가 힘들어지게 된다.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닌 마음 작용의 원리와 이해라는 것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함께하는 친구들과 스토리텔링으로 쉽게 나누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영화가 나온 지 100년이 조금 넘었지만 예술은 물론 대중 전달 능력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대중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영화 관람은 급변하는 영상 기기 발달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영화 관람 방식도 영화관만 이용하는 시대는 지났다. 관객들은 다양한 윈도(TV, 인터넷, SNS, 스마트폰, DVD, VOD, 기타 저장장치 등)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관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관객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과 함께 영화가 추구하는 최고의 궁극적 목적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 영화는 탄생부터 남다른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영화는 알면 알수록 그 내부가 복잡하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재미있다. 책 내용에 앞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6가지 정의에 따라 간략하게 살펴본다. ① 영화는 과학이다 ② 영화는 스토리다 ③ 영화는 예술이다 ④ 영화는 산업이다 ⑤ 영화는 힐링이다 ⑥ 영화는 소통이다로 나뉜다. 영화란 이처럼 다양한 면을 가진 현대 예술의 총아로 자리잡고 있다. '상업성'을 이유로 '예술성'과 따로 떼어놓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영화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본다는 명제에는 반박하지 않는다.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 여섯 가지 영화의 특징을 따로 떼놓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책 『시네마 테라피』도 영화의 특성을 미리 알고 읽는다면 훨씬 도움이 될 듯해서 독자가 임의로 책 이외의 내용을 첨언한 것이니 미리 양해 바란다.

 


 

영화가 탄생된 가장 큰 힘은 과학의 힘이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과학자인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과학자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고도 한다. 에디슨이 없었다면 영화는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도 모른다. 영화는 과학기술과 떨어질 수 없는 공생관계다. 과학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다양한 영화적 표현이 가능해진다. 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영화기술의 발전 단계를 살펴보면, 1세대는 무성에서 유성으로, 2세대는 흑백에서 컬러로, 3세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4세대는 2D에서 3D 입체영화로 발전하고 있다. 영화는 앞으로도 4D를 넘어 홀로그램 영화로 발전할 것이며,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창조와 혁신을 거듭해 나갈 것이다. 또 소설이 작가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고, 시가 작가의 생각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작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영상으로 만든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스토리 없이는 영화가 존재하지 못한다. 실험 영화라 할지라도 작가의 생각, 즉 아이디어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스토리의 탄생은 스토리메이커(storymaker)가 스토리메이킹(storymaking)하여 스토리가 되고 스토리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에 의해 스토리텔링(storytelling)되는 것이다.

예술은 시공간을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구분하고 있다. 영화는 어떤 형태의 예술인가?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영화는 예술인가 아닌가? 이러한 논란은 영화가 탄생되면서부터 많은 고민을 가져왔다. 결론은,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다. 1911년 이탈리아 영화평론가 리치오도 카뉴도(Ricciotto Canudo)는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술의 구분은 크게 시간예술과 공간예술 그리고 시공간예술로 구분한다. 시간예술은 문학과 음악, 공간예술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 시공간예술은 무용과 연극 그리고 영화 등으로 구분한다. 시간예술은 시간을 대상으로 하고 공간예술은 공간을 중심으로 시공간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대상으로 하는 예술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학이 시간예술에 속하는 것을 의아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이와 함께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다. 영화가 완성되면 다양한 윈도를 통해 부가 산업을 활성화시켜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업적 특징을 가진 영화가 〈스타워즈〉 시리즈다. 〈스타워즈〉는 1977년 세상과 조우하면서부터 다양한 부대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내 거의 모든 대형 서점에는 항상 〈스타워즈〉 관련 상품을 특별 섹션으로 구성하여 전시 판매하고 있다. 도서, 음반, 의상, 야광검 등은 기본이고 아이들의 레고 장난감까지 그 영역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디즈니랜드에서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쇼를 보여 주며 콘텐츠 활용을 이어가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 그 밖에 픽사나 디즈니 등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영화가 산업적으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영화의 특성 중 이 책 『시네마 테라피』와 가장 가까운 점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하고 불쌍한 이웃을 생각하게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술 치료 개념에서 보자면 미술 치료, 연극 치료, 음악 치료 등과 같이 영화 치료로 활용된다. 영화는 타 장르와 달리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내용을 같이 보며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 감상으로 인권을 생각하기도 하고 친구 혹은 가족 관계의 회복에 대해 함께 토론할 수도 있다.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영화를 통해 꿈과 자존감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청소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다. 〈블랙〉을 통해 스승의 가르침과 사랑에 관해 토론할 수도 있다. 〈울지마 톤즈〉를 통해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힐링 시네마로 우리 삶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특성도 이 책과 관련이 깊다. 영화의 운명은 대중과 만나기 위해 존재한다.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감상할 대중이 없다면 존재 가치가 무의미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 영화, 실험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불변의 명제다. 그야말로 “관객이 있기에 존재한다”로 정의할 수 있다. 영화는 소통의 의무로 태어났다. 영화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 각 극장은 영화 상영 시간이 각 극장 좌석 개별로 설정될 것이며, 관객들은 자신만이 관람할 수 있는 개별 스크린 헬멧을 착용하고 영화를 보는 등, 색다르고 다양한 형태로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책은 5부 2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가족의 이름으로〉, 2부 〈사랑의 이름으로〉, 3부 〈만남의 이름으로〉, 4부 〈독립의 이름으로〉, 5부 〈중독의 이름으로〉 등이다. 각 부에는 2~7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하나의 영화를 소재로 한다. 1부는 7장으로 이루어져 7개의 영화를 이야기한다. 첫 장에서는 「세 자매(아버지 사과하세요! 목사님한테 말고 언니와 우리한테요.)」 영화 〈세 자매〉 이야기다. 저자는 "완벽한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살아가는 세 자매가 어린 시절 술을 먹고 가족을 폭행했던 아버지에게 진정한 사과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진심을 발견하게 하는 영화"라고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술 먹고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하고 때리며 살림을 때려 부순다. 아버지는 넷째인 아들 진섭과 혼외 자식인 첫째 딸 화숙을 허리띠로 두들겨 팬다. 세월이 흘러 세 자매는 성인으로 성장했으나 상처 입은 어린 영혼들은 고스란히 그 성인들 속에 숨어 살며 자신도 모르는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들을 한다. 넷째 아들까지 4남매다. 아버지 생일에 4남매가 모이면서 일이 벌어진다. 영화 내용상 술을 먹고 폭력적인 예전의 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가 아닌 듯하다. 교회에 다니며 지난날의 잘못을 혼자서 뉘우쳤을 것이다.

저자는 이날 벌어진 일에 집중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뷔페에서 목사님까지 모시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다. 장로님이신 아버지가 대표 기도를 할 때 소주를 따라 마시는 셋째 미옥, 늦게 나타난 막내 남동생 집섭이가 대표 기도를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오줌을 싸 버린다. 생일 파티는 졸지에 아수라장이 디어 버렸고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화가 난 둘째인 미연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사과하세요. 목사님한테 말고 언니와 우리한테요." 이 말을 들은 세 자매의 부모는 생일 파티에 기도해 주려고 온 목사님을 챙기기 바빴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며 목사님이나 예수님께 지난날 잘못을 빌었기에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만약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음에도 상대가 못 받아들인다면 시간이 걸려도 그냥 기다려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기도이고 구원이고 신앙의 완성이다. 아버지는 기도는 헛된 것이고, 진실도 아니고, 진심도 아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영화 〈플라이트〉를 통해 '중독'의 문제를 꺼내든다. 「중독-혹독한 대가」란 제목이 붙어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아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또 저자처럼 중독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며 어쩌면 중독으로부터 해방(탈출)하는 계기를 마련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알코올 중독을 다루고 있지만 마약 중독은 더 심할 수 있다. 저자는 최근 한국이 마약 중독의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여러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날 뉴스에서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도 마약이 3만 원대부터 거래가 되고 있다는 말에 놀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자도 이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약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다고? 당국의 발표 역시 놀라운 지표를 보여준다. 마약 사범의 30%가 19세 이하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약으로 입건된 3분이 1 가량이 고등학생 이하라니. 이런 사실은 저자가 중독의 문제로 이 영화를 선택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영화 〈플라이트〉의 주인공 휘태커는 유능한 비행 조종사이다. 휘태커는 동료 여자 승무원과 한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휘태커만 당일 아침 비행 전에도 술을 마셨고 비행 중에도 오렌지 주스에 기내용 보드카 2명을 타서 마셨다. 승객 102명을 태우고 비행을 하던 중 비행기 결함의 문제로 죽음을 눈앞에 둔 위험한 상황 속에서 비행기를 뒤집는 탁월한 기술로 승무원 포함 96명을 살려 낸 휘태커는 가벼운 열상과 타박상 및 약간의 뇌진탕만 입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 애인 트리나마케즈가 승객을 구하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빠른 회복 후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 있는 술을 모두 버린다. 그러나 중독의 문제는 그를 알코올에서 그리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조사를 받던 휘태커의 약물 반응 검사에서 알코올 농도 기준치를 넘는 0.24로 나왔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닥치는 휘태커는 다시 더 많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자신을 변호하는 변호사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어김없이 술을 마신다. 청문회만 잘 통과하면 휘태커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청문회 전날 경호 및 감시인까지 호텔 문 앞에 세워 두고 룸 안 냉장고의 술도 모두 없애지만 우연히 옆 룸으로 이어지는 문만 통과하면 술이 가득한 냉장고을 발견한다.

 


 

마지막 청문회장에서 비행기의 결함 부분이 인정되고 휘태커의 공로는 박수를 받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질문 하나를 받는다. 비행 전날 호텔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자고 다음 날 같이 비행했던 승무원인 트리나마케즈의 사진을 보여 주며 하는 질문이다.

"비행 당일 기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드카 빈 병 2개가 기내에서 나왔다. 죽은 트리나마케즈에게서도 알코올 양성 반응이 나왔는데 트리나마케즈가 보드카 2병을 마셨다고 생각하는가?" 트리나마케즈에게 알코올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은 보드카를 마신 것이 아닌, 비행 전날 자신과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휘태커는 순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물을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다가 이렇게 고백한다.

"트리나마케즈는 보드카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보드카는 제가 마셨고 비행 4일 전부터 계속 술을 마셨고 지금도 취한 상태입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p.164)

 

저자 : 모경자

 

가이아 코칭 연구소 대표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육심리학, 숙명여자대학교 사회대학원/리더십학, 감정노동자자격증과정 고용노동부(2014), 감정코칭 프로그램 안내, 1992년~현재, 약 2,000군데 이상 강의하였다. (사 KAC)한국코치협회 KAC, KPC ICF/PCC국제코치로 활동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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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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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잃어버린 사람』은 중견 작가 김숨의 가장 최근 신작 장편소설이다. 그를 우리 문단의 중견 작가라고 칭하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직 50세도 되지 않은 작가에게 중견 작가로 부르는 것은 정작 작가 본인에게만 실례되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를 '우리 문단의 독보적 중견 작가'라고 부른다.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가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산업화 시대의 그늘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집중 조명했다는 점 때문이다. '조국 경제 발전의 산업 역군'으로 허울만 좋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여전히 소외 계층으로 살아가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사랑과 따뜻한 감성이 담겨 있다. 저자 김숨은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어 첫 장편 『백치들』(2006년), 『철』(2008년),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2009년)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받았다. 독자와 인연도 이때부터다. 산업화 시대를 재조명하는 그의 소설을 만날 때마다 젊은 작가라기보다 중견 이상의 소설가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소설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 역시 갈고 다듬은 흔적이 역력한 간결한 문체를 선보였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가라고 독자만의 판단으로 단정지었다. 아날로그 세대인 독자의 취향에 맞았기에 독자는 김숨 작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우리 문단을 이끌 주자로 손꼽았던 것이다. 당연히 평단도 그의 등장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호평을 쏟아냈다.

그가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작가와 신세대 작가를 연결하는 한가운데 서 있는 작가로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고 독자는 믿는다. 특히 새 밀레니엄에 접어들면서 신세대 작가들은 인터넷, 정보화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을 때 김숨 작가는 산업화의 그늘을 뚝심 있게 조명했다. 특히 이번 소설 『잃어버린 사람』은 해방 직후 부산에서 벌어지는 소란과 난장 속에서 수많은 보통의(혹은 익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시대와 역사의 부침을 어떻게 견디고 어떤 기억들을 담아둔 채 생명을 이어갔는지 담담하면서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실과 역사, 이 둘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여러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이 소설에서 김숨은 특유의 ‘거대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 둘을 움켜쥐어 바로 지금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의 문학적 확대는 곧 한국 문학의 확장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저자 김숨은 등단 작품들도 대단했지만 2006년부터 잇따라 발표한 장편소설이 그의 소설의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지 주목할 만한 솜씨를 보여준다. 첫 장편 『백치들』의 주무대와 등장인물은 백치들이 모여 사는 곳 ‘대전시 중구 구장동 15번지’라는 변두리 동네이다. 대부분 백치들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중동의 산업역군으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들을 일컫는데, 그들은‘백치’가 되어 작중화자인 ‘나’의 집 옥상에 모여앉아 무위의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백치들이라는 언표에서 읽히듯 무능한 존재에 대한 비난과 경멸이라는 의미가 각인되어 있지만, 『백치들』 안에 존재하는 ‘백치’는 역설적으로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약자를 대변하고 있다. 인간의 무력한 실존을 드러내는 밀도 높은 상징들로 이루어진 시적인 문체가 인상적이다.

이어 출간한 『철』에서도 저자는 ‘철’로 상징된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 한 페이지를 차근차근 적어 내려간다.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고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평생을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번째 장편소설 『백치들』을 통해 70년대에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중동의 모래사막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저자는, 두번째 장편소설 『철』로 나날이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했던, 철저하게 이용되다가 마모되어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그 시기의 아버지를 작품 속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자기소외된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족의 얼굴 없는 삶을 자본과 노동 그리고 계급의 문제로 짱짱하게 조여서 그려냈다.

 

 

이어 발표한 장편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에서는 산업화 시대 소외계층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일곱 살의 동화(冬花)는 할머니 댁에 맡겨지고, 백 밤이 지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는 좀체 연락이 없다. 1980년대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할머니 댁에는 내 이름(동화)을 토해놓고 중풍에 쓰러진 할아버지가 골방에 누워 있고, 양은대야 공장에 다니는 춘자 고모는 공장장과 바람이 나 밤 늦게야 들어온다. 그리고 까도 까도 끝없는 마늘을 쏟아놓는 할머니는 내게 도망간 엄마를 닮았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마늘 독보다 더 독한 년’이라고 여기는 내 눈에 추부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가장 가까운 존재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그 업보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듯하다.

방앗간 기계에 한 팔을 잃은 ‘방앗간 할머니’는 아들의 간청에도 방앗간을 팔지 않으려 하고, 간질병을 앓으면서도 형의 담배농사를 지어야 하는 ‘장대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을 일으키면서도 마을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해 시댁에서 쫓겨난 뒤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옥천 할마’는 자신이 전생에 황후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트럭에 치여 비명횡사한 아들의 보상금으로 금니를 해 넣은 ‘인자 아줌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중에도 아들을 산 처녀와 결혼시킬 생각을 품고 있다. 개조한 축사에는 양은대야 공장에서 일하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좀처럼 희망을 찾을 길 없는 청년들은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열여덟의 나이에 아이를 밴 ‘정희 언니’는 아이가 죽어버리기를 바란다. 사랑의 상처, 인생의 좌절, 그리고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절망감들을 지닌 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어린 동화의 눈에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처럼만 보인다.

 


 

이후 여러 편의 장편과 작품집을 꾸준히 발표한 김숨 저자는 이번 작품 『잃어버린 사람』에서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47년 9월 16일의 하루에 머문다. 지역은 부산이다. 동이 튼 때부터 일몰 후까지 단 하루의 일들이 원고지 1,880장에 달하는 긴 분량 속에 담겼다. 그 시절 부산에는 돌아온 사람들, 돌아가다 그대로 머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책은 밝힌다. 그들은 중국에서, 만주에서, 일본에서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귀환 동포들이다. 그들은 거지 떼처럼 들어와 눌러앉아 골치를 썩이는 존재들로 취급받는다. 이 소설은 그들 온갖 귀향자들이 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의 주름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슬프고도 처연한, 처연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다.

당시 부산은 ‘뜨내기들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온갖 잡새가 아니라 온갖 잡다한 인간”이 귀환선 타고, 열차 타고 흘러들어와 떠돌았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공간이었지만 “사람은 더 넘쳐나 가장 헐한 게 사람”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돌아온 자들이라는 유대감이 흐르지 않았다.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고, 가족의 생계를 부지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 민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식민의 경험이 남긴 상흔이 낙인처럼 찍혀 있다. 떠난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떠나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고,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사람이 있다. 그들 모두 “늑골이 주저앉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한다.

중국을 떠돌다 돌아왔으나 죽어도 육신을 거둬줄 부모 형제 하나 없는 이, 강제 징용으로 먼 타지에 끌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자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문드러진 사람,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이나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자들, 가난에 신음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돈 벌러 부산에 온 자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겨우 돌아왔으나 다시 사창가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 조선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으나 버림받고 오도 가도 못하는 일본 여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그대로 눌러앉은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고아가 돼 구걸하는 수많은 거지 아이들···. 그중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에 죽은 아내의 시신을 등에 업고 걸으며 쓸쓸한 독백을 읊조리는 백 씨의 모습(p.126~131)은 ‘슬픔’의 극치를 보여준다.

 


 

당시 해방된 땅에는 무지하고 나약하고 비루한 인간들로 들끓는 세상이었다. 암시장이 성행하고 무질서가 판을 치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입에 배고픔을 주렁주렁 달고 살며 고통과 분노에 허덕여야 했다. 식민의 가혹함이 남긴 광풍이 휘몰아치는 그때에 그들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비정한 삶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뿐이었다. 푸념과 투정, 회한과 하소연만이 그들의 일상을 무겁게 차지했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책 뒷 부분에 「김숨의 최후이자 김숨의 최초」란 제목의 〈발문〉에서 그 시절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애끓던 그 시절엔 늑골이 주저앉는 이별이 이다지도 흔했다.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별한 뒤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으며, 기적같이 재회했을 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의 무게가 생에 얹혀졌다. 무겁고 무서운 시절이었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이 많은 시절이었다.”(p.659)

이 소설 『잃어버린 사람』에서는 수많은 인간 군상의 ‘슬픈’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채 펼쳐진다. 식민과 전쟁으로 빼앗긴 삶의 비극이 곳곳에 흩어져 떠돈다.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은 역사에서 몫을 빼앗긴 자들이다. 역사의 바깥, 시대의 변두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다. 몫이 없어진, “바깥으로 밀려난” 이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작가는 자기 목소리로 말하게 그들을 일으켜 세운다. 굴곡진 시대에 농락당한 어둑한 삶이지만 그들이 토하는 제 목소리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담담하게 전달하면서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역사의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 삶이 지니는 난잡함과 다채로움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운명의 날카로운 조각에 베이고,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사람들, 그 보통의 사람들이 곧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자화상이다.

 


 

해방 직후 부산의 역사적 현실을 첨예하게 그려낸 이 소설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등장하면서 허다한 사연과 에피소드들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현실에 뿌리를 두었으되 현실을 넘어서는 비애와 애탄과 한의 이야기가 나무가 가지를 뻗듯 이어진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소설 한 편 한 편으로 읽힐 정도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과 목소리를 담은 각각의 에피소드는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밀물처럼 밀려들고, 소용돌이치고, 때로 교차하고 중첩된다. 역사의 저수지에 고였다가 범람하고, 넘쳤다가는 다시 잔잔히 흐른다. 그 고임과 넘침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중단 없이 읽게 되는 묘한 힘에 이끌리게 된다.

이 소설은 미도리마치(綠町)라는 유곽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애신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마주치는 여러 공간들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게중심을 잡아주지만,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이 없고 딱히 주인공도 없으며 뚜렷한 스토리라인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김숨 저자의 새로운 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인공 없는 장편소설이라니···. 쉽게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긴 장편소설을 이끌고, 독자들의 집중력이나 가독성을 높이려면 당연히 특출하거나 탁월한 주인공이 있어야 쓰기도 쉽지 않을까 하는 일반론에서 벗어나는 듯한 시도이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물이 중첩되고 사연이 교차하는 이야기 구조가 얽히고설켜 있다. 이 교차와 중첩의 구성을 의도적으로 정교하게 짜 맞춰 통일성을 갖추도록 한 직조 솜씨는 경이로울 정도다. 마치 큰그림을 갖고 세부 묘사를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유기적 구성의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일 수도. 해방된 기쁨보다 당장 살아갈 의지마저 잃은 듯한 이 땅의 모습은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 '슬픔'이 흐른다. 희망과 중풍으로 비뚤어진 입의 어부는 언청이로 태어나 찢어진 입의 여자와 겹치고, 은발의 눈먼 숭어 망지기는 도둑맞을까 가자미를 지키고 앉아 있는 눈이 먼 노파와 겹치고, 드럼통 같은 원자폭탄은 날품팔이 하역꾼들이 곰장어를 구워 먹는 드럼통으로 겹친다. 또 조선인 남편에게 버림받아 부두를 떠도는 일본 여자는 기모노를 걸치고 수레에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조선인 노파와 어긋나면서도 묘하게 겹치고, 국수를 끓여 파는 여자가 양은솥을 훔치는 장면은 발가벗은 사내애를 위해 남의 집 옷을 훔치는 여자애의 모습과 겹친다.

 


 

여기서 읽은 사연이 저기서 읽은 사연과 겹치는 것, 이것은 그 시대 그들의 삶이 이 시대 우리의 삶과 연결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람과 역사를 향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역사의 시공간을 현재로 재구성한 작가의 결연한 자세 앞에서 숨을 멈추고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읽으며 인물과 이야기의 촘촘한 짜임새를 따져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해 언청이 여자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게 되는 장면으로 끝난다. 떠오른 태양 빛이 넘쳐나는 땅과 바다로 시작해 하루가 저물어 이 마을 저 마을, 이 집 저 집에 등불 빛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난다(마지막 부의 제목은 ‘빛’이다). ‘장대한 슬픔의 드라마’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진정한 의지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삶이란 “아기가 태어나 더해지고 빛이 더해져 세상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다. 또한 허우재가 “모자라지도 않지만 넘치지도 않는군”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청요릿집 사해루의 어항에 금붕어가 항상 여덟 마리에서 모자라거나 남는 걸 싫어하는 것은 혼란을 벗어나 질서와 안정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 터이다.

 

저자 : 김숨

 

소설가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백치들』,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물』, 『노란 개를 버리러』,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한 명』, 『흐르는 편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너는 너로 살고 있니』, 소설집 『투견』, 『침대』, 『간과 쓸개』, 『국수』, 『당신의 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중편소설 『듣기 시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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