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밥상 - 우리의 밥상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을까
김상보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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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극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각 방송국에서 사극 경쟁을 하다시피 한 시절이 있었다. TV 평론가들은 "일주일 내내 사극을 즐길 수 있는 시대"라고 평가하면서 사극이 우리가 옛날 사는 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극에 반영했기 때문으로 인기 요인을 꼽았다. '일주일 내내'란 의미는 3개 방송국에서 월·화, 수·목, 토·일로 요일을 두루 이용했기 때문이다. 시간 대도 뉴스가 막 끝난 후 '프라임 시간'이라 시청률이 높은 데 한몫 했다고 평자들은 풀이하기도 했다. 독자도 사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에 맞춰 TV 앞에서 충분한 시간 시청할 수 있었다. 〈대장금〉이란 프로그램은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는 프로그램으로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조선 시대 왕들은 무엇을 먹었나'에 맞춰져 있었지만 높은 인기를 유지했다. 프로그램은 동남아시아 등 외국으로 팔려나가 최근까지도 그곳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때 독자는 양반과 일반 백성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자세하게 방송했던 사극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독자 역시 사학이나 음식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그저 의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다시 그때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왕들이 먹은 음식이야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 중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음식 장인들이 만들어 제공했기에 신기함은 있었지만 약간의 위화감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 예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왕의 음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고,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음식이 자주 나왔기에 하는 말이다.

 


 

이 책 『조선의 밥상』은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무얼 먹고 살았나에 중심을 둔 것은 아니고, 주로 양반이나 잔치 음식 등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쉬운 대로 궁금증은 조금 면한 보람은 있었다. 어쩌면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양반 이상 계층의 음식이었을 것이란 추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이 먹던 음식을 누가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책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이미 화려한 음식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음식'은 모두 양반 계층에서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저자 김상보는 이익의 『성호사설』에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하루에 일곱 차례 먹는데,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으로 백 사람을 먹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외국인의 시선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인이 쓴 『조선만화』에는 “신선로 속에 들어가는 국물은 소머리를 끓여서 만든 즙으로 이 속에 잣, 밤이 들어가기 때문에 맛이 있다. 신선로 냄비를 중심으로 4~5명이 둘러앉아서 먹는데, 건더기를 다 먹고 즙만 남으면 이번에는 조선 명물 우동을 넣어 끓여 먹는다. 신선로의 묘미는 이 우동을 끓여 먹는 데에 있다. 특히 기둥의 노와 냄비가 일체 되어 있는 것이 신선로의 특색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조선의 실정』에서는 “조선인의 체격은 대개 우량하다. 키가 크고 골격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민)족이 이러한 체질을 가지게 된 것은 일반의 풍습으로서 육식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육은 말할 필요도 없이 소고기,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데, 도저히 일본 민족에 비할 바가 아니며 옛날부터 조선의 집단지에는 어느 곳에도 상당의 도살장이 있다.”고 쓰여 있다.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7끼 밥과 국수 등을 먹고, 화려한 모임 음식을 다양하게 즐겼으며, 1년 내내 고기를 즐겨 먹은 듯하다. 이때 조선 사람 중에는 양반 아래 계층은 없다. 슬프게도.

 


 

그러나 저자 김상보는 많은 자료를 취재하고 수집하고 분석 연구한 결과 이 책 『조선의 밥상』을 펴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구한말까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요리해 먹었던 이런 다양한 음식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음식 문화와 조선 민중의 삶에는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음식 문화가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폭넓게 예로 들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범위는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까지 포함된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궁중의 음식 문화가 일반 서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큰 기틀이었다. 서양의 귀족 계급에 해당될 터다. 그런 중요한 규율이니만큼 의식주에 있어 반상의 법도가 아주 엄격했고, 일상생활의 규범에서도 세세하게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조선의 밥상』은 궁중, 관청, 양반가, 중인가로 나누어 왕족, 양반, 중인의 밥상을 들여다보고, 그 작은 상 안에 담긴 법도와 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조선왕조에서는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밥·국·반찬 모두를 포함해 왕과 왕족은 7기, 양반은 4기, 중인은 2기를 차려 먹었다. 그렇다면 ‘그 밥상을 차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궁중에서 왕족들이 직접 밥상을 차리지 않았음은 확실하고, 궂은일은 죄다 솔거노비에게 맡겼을 종가의 귀한 마나님들이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있는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사무역을 통해 양반을 뛰어넘는 부를 축적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잘사는 중인 집안의 여인들이 요리하는 모습도 잘 연상되지 않는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채 부엌에서는 한 달에 거의 한두 번 꼴로 있는 제사에 올릴 음식과 사랑채에 든 바깥손님을 위한 음식 및 일상 음식을 만들었다. 제사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떡 치는 일은 물론 남자종의 몫이었다. 그 외에 솔거노비 중 통지기라는 여자종은 물통이나 밥통을 지거나 찬거리를 사 오는 여자종이었고, 대개 밥을 하거나 장 담그고 반찬을 만드는 여자종을 식모라 불렀으며 반찬 만드는 여자종을 찬모라고도 하였다. 한편 관아와 역의 부엌에서는 주방장 격인 총책임자 칼자, 그 바로 아래 부주방장 격인 국을 끓이는 갱자를 필두로 생선을 잡아 오는 사람, 채소를 기르는 사람, 꿩을 잡아오는 사람들이 소속되어 각자 식재료 공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결혼의 풍습도 음식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 뻔하다. 고려시대서부터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처가살이혼은 조선시대 들어와 시집살이혼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사실 고려시대 때부터 시집살이혼으로 사회 관행을 변화시키려는 지도자들의 시도가 있긴 했다는 게 저자의 연구 결과다. 1349년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결혼할 때 북경에서 친영(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함으로써, 시집살이혼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고려 말의 개혁조치는 더 이상 그 빛을 보지 못하다가 다음 정권으로 이행되었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시집살이혼이 본격화됐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혼인은 물론 자유혼이었다. 이때 신랑집에서는 혼례 때 드는 잔치 비용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돼지와 술을 피로연에 소용되는 ‘이바지’용으로 신부집으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이외의 폐물을 신부집에 보내는 것은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가부장제가 강화되며 시집살이혼이 완벽하게 사회에 정착하게 되고, 혼례 과정에서 준비되는 음식들과 그 음식을 사용하는 관례가 변화하게 됐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변화한 관례들을 예식에 준비했던 음식과 더불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외식 메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들이 무척 생생하고 자세하여 흥미롭다. 장시에서 판매하는 국밥을 이야기하면서 서술된 그 앞에 꽂아 놓은 소머리와 밥을 먹으면 숙박까지 가능했던 주막의 풍경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경하기까지 하다. 가끔씩 사극에서 접하기는 했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토대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돼 있어 이채롭다. 이 책에서는 특히 구한말 궁중음식을 술안주로 선보인 요릿집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한일합방 이후 세워진 조선식 요릿집의 대표 격인 ‘명월관’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담당했던 안순환이 1909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서 문을 연 곳인데, 그해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일본 요릿집에 게이샤를 두듯이 자연스럽게 관기들이 명월관에 모여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궁중요리와 관기들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의 여성들은 주로 집안의 음식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하며 직접 손에 물을 묻히진 않았던 듯하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집안마다의 특색 있는 음식들과 가양주의 제조법은 어떻게 전수되어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지도 않은 음식 제조법을 어떻게 가르쳤으며 전승되어 왔을까? 하는 자연스러운 궁금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조리서라 불리는 『음식지미방』은 다른 이름으로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한다. 이는 ‘규방에 거처하는 부녀자가 쓴 책’이란 뜻이다. 이 외에도 『주식시의』나 『규합총서』 등과 같이 안주인이 쓴 필사본 조리서가 등장한 것은 며느리에게 술과 술안주를 포함한 집안 내력 음식에 대한 조리비법을 전하려는 시어머니들의 노력의 결과라 생각된다는 게 저자의 연구 분석 결과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와 같은 책을 통해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비록 집안의 궂은일은 노비들이 도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안주인들은 직접 요리하기도 했을 것이란 추측이 그리 어렵진 않다.

 


 

또 조선왕조에서는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적어 책으로 남겼다. 우리들이 잘 아는 ‘의궤’이다. 이 책 『조선의 밥상』에서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조선시대 궁중 밥상(수라)에 올랐던 주식류, 탕류, 찜류, 구이류, 젓갈류, 나물류를 포함하여 회, 버터(수유), 포와 다식 같은 음식과 유밀과, 떡 등의 간식과 술, 계절별·절기별로 먹었던 풍류 가득한 음식까지 두루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살면서 숱하게 먹어 온 자연스러운 식단부터,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음식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는 『조선의 밥상』.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가끔은 책에 기술된 시기와 절기에 따른 음식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챙겨 먹어 보는 것으로 옛 풍류를 재현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난로회란 10월 초하루에 화로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면서 먹는 모임으로, 이때 술안주로 화로 위에 올려놓은 번철 위에 양념한 소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것이다. ……전립꼴의 사면에서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 우묵한 곳에는 고기를 구울 때 생기는 고기즙이 모이게 되고, 여기에 갖은 야채를 넣어서 잠시 끓여 먹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전철 또는 전립투는 냄비 이름이었다. ……이 전철을 19세기 말경에는 전골로 부르게 되었다.(p.198) - 「제2부 찬품 각론, 탕류」 중에서

 

저자 : 김상보

 

1986년 한양대학교 이학박사 학위 취득. 1993~1994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객원교수. 1978~2015년 대전보건대학교 교수. 현재 전통식생활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의 식음료 문화를 평생에 걸쳐 연구한 학자로, 우리 문화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에 다수의 저서가 선정되어 그 노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도 전통식생활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1995),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1997), 《조선왕조 궁중음식》(2004), 《다시보는 조선왕조 궁중음식》(2011), 《약선으로 본 우리 전통음식의 영양과 조리》(2012), 《우리 음식문화 이야기》(2013), 《화폭에 담긴 한식》(2015), 《조선왕실의 풍정연향》(2016), 《한식의 도를 담다》(2017), 《전통주 인문학》(2022) 외 다수. 역서로는 《원행을묘정리의궤》, 《찬품조》, 《어장과 식해의 연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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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12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내용이 많은 도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약, 알고 먹는 거니? - 그림으로 보는 우리 집 약국
최서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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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 때는 약국을 찾는 일이 잦았다. 전 국민건강보험(의료보험) 시대가 열리기 전의 일이다. 병원비가 비싸서 웬만한 것은 약국을 찾아 해결했다. 가령 감기라든지, 타박상, 또는 사소한 피부병 같은 것들은 약국을 찾아 약사가 조제, 혹은 건네 준 약을 받아 치료했다. 지금처럼 의사에게 가서 진료받도 처방전으로 약국 가지 않았다. 병원으로 바로 갈 경우에도 처방전 발행을 하지 않고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직접 조제약을 내밀곤 했다. 의약분업 전까지 그렇게 했다. 심한 의약 분쟁을 거치고 오늘날의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시스템이 확립됐다. 의약분쟁 이후라고 해서 의료 문제가 완전 해결되진 않았겠지만 그나마 의약 갈등이나 조제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져 다툼을 벌이지는 않은 모습으로 볼 때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의 약사도 예전에는 4년제 약학대학을 거친 후 시험을 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약학전문대학원이 생겨 6년을 약학을 배워야 시험을 칠 수 있다고 자격이 바뀌었다. 약국의 숫자도, 병의원의 숫자도 많아진 것은 분명한데 왜 필요할 때는 모자라는 것일까. 지난 코로나 팬데믹 때 의사 부족으로 공중보건의, 지방의대 문제 등이 불거진 바 있지만 감염병이 유행병이라 극한의 상항을 지나니 의사 부족 문제는 잠잠해진 듯하다. 당국의 의료정책도 좀 더 세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독자의 생각은 여전하다. 약국도 의원(의원급 병원)들처럼 돈 잘 버는 약국과 못 버는 약국의 차이가 극심한 것 같다. 독자가 사는 동네에도 한 약국은 유별나게 잘 되는 것 같은데 그 이외는 자꾸 생겼다 폐업하고, 다시 생겼다 폐업을 자주 한다.

 


 

이 책 『약, 알고 먹는 거니?』는 저자 최서연이 직접 그림까지 그린 약 관련 건강에세이다. '광고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국내 광고시장은 여전하다. 잘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봐온 광고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아마 식품과 약 광고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약 광고는 많다. 특히 전문 치료약이 아닌 경우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돼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의약품 수가 많아지면서 'OOO이 좋대'라는 입소문, 'XXX가 OO에 잘 듣는다던데...' 등의 소문만 나면 제약 회사는 이른바 '대박'이 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약국에 가서도 약사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고 'OOXX 주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독자도 가끔은 그렇다. 그것은 자주 이용하는(습관적) 약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기약을 하나 사더라도 "감기약 좀 주세요. 증세가 ~해요. 감기 같긴 한데..." 정도였는데 이젠 아예 약 브랜드 이름을 대고 달라고 한다. 공익광고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자'가 무색하다. 감기약도 여러 제약 회사에서 만들어 내고, 콧물엔 어떤 약이 좋은지, 해열엔 또 어떤 약이 효과적인지 등은 당연히 약사가 더 잘 알 텐데 약사의 의견은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환자 본인이 의사처럼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미는 꼴이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공익광고 약의 오남용을 예방하고, 증세에 따라 구급약으로 집에 비치해 둘 정도의 약에 대한 지식과 개념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저자가 그림 솜씨까지 발휘해 그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대학은 약학을 공부했지만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공부도 했다고 한다. 아마 약에 대한 지식과 그림 실력으로 광고 그림이나 웹툰 제작에도 참여한 것 같다. 해박한 약에 대한 지식을 그림으로 그려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약리 작용도 필요할 경우 알려주는 가정상비약처럼 한 권 집에 비치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약국을 찾는 순서일지도 모른다. 독자 입장에서 보면 자주 약국을 찾는 이유로도 보인다. 물론 아니더라도 상관 없다. 자신과 관련된 부분만 봐도 충분하다. 이 책을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다면 감기 걸렸을 때나 몸에 상처가 났을 때 들여야 할 노력과 시간의 10분의 1이면 된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면 된다. 이 책엔 우리가 약국을 자주 찾는 가벼운 질병 혹은 의사의 치료가 아니더라도 치료가 가능한 정도의 약과 질병에 대한 상식도 굉장히 높여줄 것이다. 이는 질병의 예방 차원에서 해야 할 일도 포함되고 있으니 병이 나서 찾는 약을 알려주기보다는 질병을 예방해야 할 때 할 일 등에도 중점을 두고 썼으니 좋은 참고서 혹은 치료 기본서 등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구급약 상자와 함께 있으면 더욱 빛날 책으로 보인다.

1장 「감기에 걸렸어요」에서는 〈감기약 사는 법〉부터 감기 증상에 따라 〈해열제〉, 〈항히스타민제(콧물)〉, 〈비충혈 제거제(코막힘)〉, 〈진해거담제〉, 〈인후통 국소 제제〉 등의 사용법 등에 관해 쓰여 있다. 간결한 대화체인 데다 핵심 내용만 적어 놓아 독자들의 읽기와 이해하기가 말로 들은 것보다 훨씬 쉽다. 심지어는 책에서 일반 브랜드명을 잘 쓰지 않고 약품의 성분명으로 쓰는 게 보통인데 이 책에서는 일부 약 브랜드명도 그대로 제시하고 있어 그림만 보아도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약국에서 일반 의약품을 사다가 먹는 약의 일부 부작용도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은 부작용이지만 전혀 없는 부작용이 아니니 만큼 〈주의사항〉도 꼼꼼히 챙겨야 할 일이다. 또 연령별 복용 용량 등도 놓치지 말 것을 저자는 조언하다. 콧물 감기약에 들어 있는 항히스타민제는 졸음을 유발한다는 점도 주의할 사항이다. 기계 조작이나 운전할 때는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독자의 지인 한 분은 콧물 감기약을 약국에서 사먹고 운전하다고 사고를 내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1장의 맨 끝에는 〈알고 먹자, 편의점 약〉에서는 편의점에서 일상적인 약을 판매 허가했는데 이에 대한 주의사항이다.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서도 역시 약의 브랜드명을 명기하고 있어 어린이용과 어른용, 증상에 따라 사서 주의사항을 통해 용량도 조절해야 할 일이다. 또 편의점 소화제는 모두 '소화 효소제'로서 음식물의 분해를 돕지만 만 7세 이하는 복용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어야 한다. 훼스탈, 베아제, 닥터베아제 등 브랜드명을 밝히고 있다. 소화 효소 부족으로 인한 증상이 아니라면 약국으로 가야 하며, 심하거나 만성적일 때는 의사 진료를 저자는 권유하고 있다. 이 밖에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중 파스는 '제일쿨파프', '신신파스 아렉스'라는 2개 제품이 있고 이와 다른 파스들은 의약품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차이점은 진통 소염제의 유무다. 즉 의약외품 파스에는 진통소염제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알고 사용해야 오용이 없을 터다.

2장 「상처」가 났을 때 예전에는 상처 부위의 무조건 소독부터 실시했지만 이는 상태를 봐야 한다는 것. 소독이 필요없는데도 소독부터 실시하면 본 치료가 늦어질 수 있고, 환자에게 고통만 안겨 줄 수도 있어 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더러운 곳에서 상처가 난 경우(더러운 칼에 베이거나 공중 화장실에서 넘어져 피가 날 때)엔 소독의 필요성이 있지만 깨끗한 상처로서 2차 감염이 적은 경우에는 흐르는 물로 씻어내 감염원을 씻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알코올과 과산화수소의 사용은 주의해야 한다. 환자에게 고통을 심하게 주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상처난 곳에는 주로 항생제 연고 약을 바른다. 감염을 막기 위해 항생제가 필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연고 제품으로 후시딘과 마데카솔의 브랜드명을 밝히고 말한다. 후시딘은 상처 발생 초기와 감염 위험이 높은 경우에 좋고, 마데카솔은 아물기 시작한 상처로 감염의 위험이 낮을 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두 가지 약품이 워낙 오랫동안 쓰이다 보니까 국내 세균이 두 약에 대한 내성률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내성률이 낮은 다른 연고를 추천 받으려면 약사와 상의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이 밖에 습윤 밴드 사용상의 주의 사항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특히 흉터 치료는 매우 중요한 일로서 특히 외부로부터 노출되는 곳이 대부분인 만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보기 흉할 평생 흉터로 남을 수도 있으니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저자는 흉터 치료의 열쇠는? '타이밍'과 '인내심'이라고 강조한다. 상처가 아물기 전도 안 되고, 너무 늦어지면 효과가 떨어지는 점을 감안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난 뒤 치료를 시작해 3~6개월,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흉터 치료제는 두 가지 성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헤파린 겔'(의약품)과 '실리콘 겔'(의료기기)이다. 색소가 침착된 흉터에는 헤파린 겔이, 볼록 튀어나온 흉터에는 실리콘 겔이 더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두 가지를 병용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꿀팁을 준다. 단 두 약 모두 피부 안쪽으로 패인 흉터에는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니 유의할 사항이다.

특히 화상 치료는 주의 사항이 많다. 당연히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면 병원으로 즉시 가야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1도 화상부터 얕은 2도 화상까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도 화상의 경우 물집이 생기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물집이 생긴다면 2도 화상 이상이 된다. 약국 이용으로 가능한 범위는 1도 화상이 대부분이다. 물집이 생기면 아주 작은 상태가 아니라면 병원으로 가야 한다. 이때도 특히 주의할 사항은 물집을 절대 터트리지 않고 가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물집은 2차 감염을 막는 주요 예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작고 가벼운 정도의 물집이어서 집에서 치료할 때도 물집을 터트리지 않고 연고나 바르는 약, 항생제 등을 물집 위에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3장 「속이 불편해요」에서는 '소화제'를 다루고 4장 「피부에 뭐가 나요」는 일반적인 피부 트러블(여드름 등)에 대한 치료를 언급한다. 5장 「여성들만 아는」에서는 여성 특유의 통증, 염증 등에 대한 치료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6장 「이럴 땐, 어떤 약을 써야 하나요?」에서는 '잠이 안 와요'(수면 유도제) '눈이 건조해요'(인공 눈물) '머리가 빠져요'(탈모) '입에 빵꾸가 났어요'(구내염) '입술에 물집이 생겨요'(구순 포진)처럼 일상적이지만 생소한 정보들을 다룬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각 장의 마지막에는 〈편의점 약〉, 〈칼슘제〉, 〈오메가3〉, 〈비타민D〉, 〈철분제〉, 〈눈 영양제〉 등 팁 항목을 넣어 실생활에 유용한 내용을 다루었다. 많은 사람들이 약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약 사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지식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약사가 직접 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말해 준다. 모든 가정에 한 권씩 보관해 둔다면 막상 일에 닥쳐도 그리 당황하지 않고 최선의 대처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응급처치 능력을 습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독자는 믿는다.

 

저자 : 최서연

 

그림 그리는 약사.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사로 근무하면서, 접근하기 어렵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정보가 약학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본적인 약 사용법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약사의 전문성을 요하는 광고 및 웹툰 등의 일러스트 작업을 해 오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입시 미술을 했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를 수료하고 미술업계에서도 일했다. 미술 곁을 맴돌던 학생은 돌고 돌고 돌아 그림 그리는 약사가 되었고, 텍스트의 문턱을 낮추어 주는 그림의 힘을 믿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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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마스터피스 -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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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수많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명화를 보다 더 풍요롭고 다양한 면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은 감상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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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마스터피스 -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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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그림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따로 한 적도 없다. 다만 그림을 좋아해서 전시회를 가끔씩 다녔을 뿐이다. 그것도 세계 유명 화가들의 특별 전시전이 열릴 때 한 번씩 가보는 정도였다. 몇 번은 도록을 구입한 적도 있긴 하지만 일년에 한 번 꼴이나 되었을까. 이 책 『화가들의 마스터피스』에 나온 화가 기준으로 한다면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회가 유일하다. 그때의 놀라움과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억제하느라 혼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직접 가서 본 적이 있을 뿐 이 책에 나온 작품 중에는 직접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미술에는 문외한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개인적으로 시간이 많이 났지만 상대적으로 전시회가 거의 없어지는 바람에 최근 몇 년 동안은 전시회에도 다닌 적이 없다. 대신 미술 관련 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주로 서양 미술 관련 책이었지만 감염병 여파로 소통 부재에서 오는 감정의 흔들림이나 장애를 해소하기에 그림 감상이 매우 유용한 탓이리라. 덕분에 독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림 이론 공부의 기회가 되었다.

그림 출판물이 많은 까닭에 그림 감상법이나 해설이나 설명 식의 책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 책은 저자 데브라 N. 맨커프의 독창적 그림 감상법을 중심으로 명화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을 해주고 있어 독자의 그림 감상법을 바로잡기에 큰 힘이 되었다. 저자 맨커프는 12명의 근·현대 화가를 대상으로 작품 해설, 제작 과정, 뒷 이야기, 역사적 배경 등을 모두 망라하고 있어 풍부한 그림 감상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명화'라 이름 붙일 때는 '조건'이 있다고 주장한다. "명화란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도 예술가 개인의 독특한 비전을 함께 보여주는 실물 오브제를 말하며, 국가와 문화적 경계는 물론 시대를 초월하는 내재적 우수성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일컫는다."고 저자는 정의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 옷을 입은 여인〉 등을 이 책 안에서 '조건'을 충족하고 있음을 다양한 방면에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예술품 중에서도 이 작품들은 어떻게 ‘명화’라 불리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과정이나 미의식, 상황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명화’라고 불린다는 사실만 전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 『화가들의 마스터피스』는 그림이 가진 위대함에 감탄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지 질문을 던진다. 모든 작품 뒤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예술품이 가진 예술성 너머에 다른 요소들이 존재함을 알려준다.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살펴보는 이 책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명화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책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시작으로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에이미 셰럴드의 〈미셸 오바마 초상화〉까지, 많은 인기를 누리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친숙한 그림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들이 지금의 명성을 갖게 된 길을 온전히 살피고자 각 그림의 과거를 살펴보고, 상징적인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낸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화가들이 명성을 얻게 된 길은 절도, 스캔들, 법적 분쟁, 정치권력 등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명화가 만들어지는 환경과 명성이 높아지는 과정을 재조명해 현재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공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에 담긴 매혹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이젤에서 대중의 환호 속으로 가는 여정이 명화 그 자체만큼 매력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품 자체로도, 영화로도, 패러디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발견되었을 당시, 이 작품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고 낡은 그림이었다. 복원 작업을 거쳐 ‘기가 막히게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는 것.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었고 흥미로운 궁금증들을 불러일으켰다. 학자들은 수 년 동안 그림 속 모델을 누군가와 연결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맨커프는 우리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끌리는 이유를 회화적 기술과 모델의 아름다움이 아닌, 바로 이러한 초월적 면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녀의 의상은 네덜란드 여성과 소녀가 흔히 입는 평상복이지만, 터번은 그 시대의 여성들이 선호하던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 또한 눈물 모양의 진주는 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소녀의 얼굴 모양과 윤곽을 강조하는 요소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한발 물러선 자세와 애타는 눈빛으로 우리의 시선에 화답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명확한 이름, 역사, 목적을 가진 실체로 드러내려 집착할수록 이미지는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모델이 실제로 누구인지, 왜 베르메르(페이메르)가 그림의 모델로 선택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처럼 이 책은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자세, 시선, 태도 등은 물론 화가와 얽힌 사건을 따라감으로써 작품이 오래도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요인을 분석해 그림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끈다.

'명화'라 부르기 이전에는 '명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중세 후기 유럽의 길드 제도에서 기원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당시 명작은 최고의 업적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전문가로서 없어서는 안 될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음을 증명하는 단어였다. 명화라는 단어는 15세기 말부터 회화, 건축, 조각 등의 미술 범주가 제작, 금속 세공, 직물 등을 포괄하는 공예와 분리되고 전자가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마스터(master)'는 '고도의 능력'이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 이후 두 세기가 지나는 동안 미술 아카데미는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선호하는 훈련장으로 여겨지며 기존 길드의 존재를 대체했다.

 


 

저자는 또 '명화'는 긴 역사를 가진 용어이지만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부담을 내포한다고 말하낟. 명화 개념의 핵심인 배타성이 오늘날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예술 세계와 상충한다는 이유에서다. 현대의 우리는 예전과 달리 예술 작품이 정해진 기준을 따라야 한다거나, 시공을 초월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질 혹은 본질적인 가치를 구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옹호하며, 작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고 싶어한다는 것. 이와 함께 '명화'에는 논쟁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주인과 하인, 나아가서는 주인과 노예 등 지배와 통제, 위계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젠더 개념이 내재된 용어이기도 하다는 것. 위계적 의미와 명화라는 단어가 사실 무관하지도 않은 것이, 특정 예술 작품에 명화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면 결국 뭇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명화가 명화라 불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을 능동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저자는 이에 따라 시대를 초월하면서 세계적으로 호소력을 갖춘 작품에 대한 우리의 찬미와 명화 개념에 대한 현대의 질문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점에 주목하고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명화가 만들어지는 환경과 명성이 높아지는 과정을 재조명해 현재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공한다. 앞으로 이야기할 작품들은 많은 인기를 누리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만큼 모두 친숙하다. 저자의 말대로 '명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많은 이야기들이 함께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작가 개개인의 창작 세계를 발전시킨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들인 동시에 그만의 상징적인 작품들의 인정받게 된 명화들이라고 확신한다. 그 이야기를 이 책에서 쓰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밖에 이것들이 가진 더 흥미로운 공통점을 제시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봐야만 지금의 명성을 갖게 된 길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1차 자료를 탐구하며 그림의 과거를 살펴봄으로써 지금 얻은 상징적 의미 뒤에 숨겨진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절도, 스캔들, 법적 분쟁, 정치, 심지어 예술계 관습에 저항하는 행위 모두 우리가 현재 명화라고 간주하는 작품에 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한몫했다는 말이다.

 


 

첫 번째로 등장한 화가는 산드로 보티첼리다. 보티첼리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서도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과 함께 소개되어 알고 있다. 당연히 화가의 업적이나 그림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전부였다. 이후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없기에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와 그의 작품을 '명화' 이야기의 첫 번째로 등장시켰다.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의 배경 설명으로 시작된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권위 있는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갓 돌아온 보티첼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힘 있고 부유한 예술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1480년대 중반에 제작한 작품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식인 집단이 가진 혁신적인 철학을 반영하게 되었다. 보티첼리가 당시 작업한 그림들은 제한된 몇몇 관람자를 위해 만들어진, 사적이고 난해한 의미를 담은 것들이었다. 〈비너스의 탄생〉은 19세기 초 일반 관람자에게 공개되었을 때도 여전히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런던에서 처음 전시되면서 비로소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이후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소수 엘리트 관람자의 흥미를 모으는 일에서부터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까지의 놀라운 여정을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이유들이 이 작품을 명화로 만들었는지에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가문인 메디치가의 한 구성원(잘생기고 마상시합 우승자)과 결혼한 아름다운 여성 시모네타 베스푸치에게 반했고, 그녀를 모델로 비너스를 그렸다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스캔들이라기보다 한 화가의 '순애보' 같은 사랑이 '비너스'를 탄생시킨 것이다. 마상 시합 후 10년이 지나 그려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그동안 존재하던 신화, 플리치아노의 이야기, 그리고 화가 자신의 회화적 창조가 결합해 탄생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시인 헤시오도스가 판테온 신들의 계보를 담은 작품 『신통기』에서 크로노스의 폭력과 복수를 다룬 이야기를 차용한 것, 즉 어머니를 향한 복수와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잘린 생식기를 바다에 던져 버린 신화를 말한다. 그 바다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나 '연인들'의 미소와 섹스에서 비롯되는 모든 쾌락을 다스렸다는 내용에서 '바다에서 나타난 여신'이 '비너스'가 된 것이다.

 


 

독자들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20세기 이전에는 서양에서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엄격히 통제되고,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심지어 예술 분야에서도 여성 화가나 여성 작곡가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듯, 한 여성 화가가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도발적인 여성 화가가 등장한다. 바로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다. 로마의 저명한 화가이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영향으로 그림을 잘 그렸던 듯하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의 젊은 시절은 여러 면에서 같은 세대와 환경에 있던 다른 여성들과 비슷했다. 그녀의 세계는 16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명의 남동생을 돌보면서 가사를 하는 데에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할 수 없었고,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는 일은 무례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611년 아버지의 가까운 동료이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한다. 다음해 3월 오라치오는 타시가 딸을 성폭행한 수 결혼하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처녀성 강탈' 혐의로 고소했다. 성폭행범 타시는 로마에서 영원히 추방당했으며 이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법률 고문인 피에란토니오 디 벤첸초 스티아테시와 결혼해 1613년 피렌체로 이주했다.

책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는 재판 기간 중 혹은 직후, 유디트 주제에 대한 그녀의 첫 번째 해석을 시작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유디트를 주제로 한 작품이 과연 그녀가 겪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영향인지, 여성 영웅주의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예술가가 삶에서 경험한 일들은 당연히 그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왜 이 주제에 집중했는지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맥락들을 탐구해보아야 한다. 유디트 이야기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보티첼리, 안드레아 만테냐, 조르조네,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눈에 띄는 작품들과 함께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고귀함과 용감함, 여성미를 한 인물에 담아 그려낼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무튼 피렌체에 있는 도나텔로의 장엄한 조각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칼을 들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웅장한 유디트 금동 조각은 무자비한 침략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나타낸다.

 


 

주제를 결정한 직후, 그는 불과 6주 만에 거대한 그림을 완성했다. 전시관이 공개되었을 때 일부 비평가들은 〈게르니카〉의 폭발적인 구성이 과도하게 위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에는 명확성이 부족해 보였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적 표현은 최근에 일어난 폭격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피카소의 의도를 오히려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은 피카소의 목표에 끔찍한 사건을 추모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인식했다. 피카소는 관람자로 하여금 기존의 전통적 서사와 비유가 지닌 평온하고 지적인 영역 너머의 세계를 보고 느끼도록 함으로써 〈게르니카〉를 보편적인 명화로 만들었다.(p.147) -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중에서

 

저자 : 데브라 N. 맨커프(Debra N. Mancoff)

 

미술사학자이자 작가로 영국과 미국의 예술, 역사, 문화, 패션에 관해 연구해왔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시카고 뉴베리 도서관 레지던스 학자로 일하고 있다. 『경고! 일하는 여성 예술가(Danger! Women Artists at Work)』, 『파리 인상주의 패션(Fashion in Impressionist Paris)』, 『패션 뮤즈: 아이코닉 디자인에 숨은 영감(Fashion Muse: The Inspiration Behind Iconic Design)』 등 예술과 문화에 관한 다수의 책을 집필했으며 브리태니커 블로그(Britanica Blog)의 패션 분야 공동작가로도 활동했다.

 

역자 : 조아라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난 10년 동안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등 다양한 문화예술 기관에서 일했다.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SeMA Green: 윤석남-심장》, 《사진과 미디어: 새벽 4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망각에 부치는 노래》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2019년부터는 개관을 준비 중이던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둥지를 옮겨 새로운 뮤지엄이 탄생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지금은 잠시 한국을 떠나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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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케이지 : 짐승의 집
보니 키스틀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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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 『더 케이지: 짐승의 집』은 미스터리 추리 소설 같지만 범죄에 중점이 주어지기보다는 병리적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시작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내내 범죄자로 지목되는 주인공 셰이 램버트의 시선과 심리는 사회 시스템이 병든 상태임에 주목한다.

소설 발단의 분위기는 조금은 스산한 듯하지만 낭만적이라고 해도 별 무리 없는 평범한 분위기다. "도시 위 높은 하늘에서 안개가 서성인다. 차가운 밤하늘은 온통 캄캄하고 보이는 것이라곤 난반사된 도시의 불빛뿐이다. 안개가 닿은 건물은 단 하나, 마켓플레이스 타워, 도시에서 가장 높은 최신 건물이다. 반짝이는 첨탑의 모든 면면에는 서리가 뒤덮여 있다. 누구라도 그걸 본다면 설탕을 입힌 동화 속 나라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안개 속에서, 이 어둠 속에서."(p.7)

주인공 셰이 램버트는 명문 아이비리그 로스쿨 출신에다 모두가 선망하는 명품 패션 대기업에서 얼마 전부터 일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런데 주말(휴일)의 늦은 밤, 다른 여성 직원과 함께 회사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사고에 휘말린다. 첫째로, 엘리베이터가 타자마자 멈추었다. 불이 다 나간 작은 공간에서는 같이 탄 직원조차 잘 보이지 않고 거친 숨소리만 울린다. 밀실 공포증이 절로 생기는 환경에서도 셰이는 7분 후 동료의 변화에 걱정스러워하며 911 신고도 직접 한다. 권총을 꺼낸 직원과 생각지 못한 몸싸움도 일어난다. 결국 엘리베이터가 열렸을 때는 셰이만 살아 있었다. 사건은 셰이가 구출되고 수사 원칙상 살인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죽은 직원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셰이는 그 권총이 직원의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며 직원이 권총을 꺼내들고 쏘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지만, 무죄를 증명할 뚜렷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외부의 증거가 계속해서 조작된다.

 


 

범죄 발생 부분을 압축해서 썼지만 제대로 전달된 지는 독자도 장담할 수는 없다. 셰이는 고등학교에서 전교 회장, 대학은 아이비리그 장학생, 로스쿨부터 뉴욕 최고 로펌의 우등생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며 살아왔다. 사건에 휘말리고 난 뒤부터 숨겨온 비밀이 예기치 않은 시점에 드러나면서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설 『더 케이지』는 누구라도 언제고 겪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 고장 사고에 현직 변호사조차 무죄를 자신할 수 없는 교묘한 상황 설정을 통해 독자들의 호기심과 몰입감을 높인다. 작가의 몫이다. 저자의 구성 능력이다. 모두 잘 쓰고 잘 짜여진 철저한 계획과 설정이다. 단순한 흥미 위주가 아닌 사회성 높은 소설 작품임을 직감할 수 있다. 다만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을 도입한 것은 독자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다면 1, 2부로 구분된 단순한 형식이다. 다만 1부와 2부 사이에 〈인터벌〉 부분이 끼어들어가 있다. 마치 콘서트 구성처럼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소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내용과 사건이 일어나는 부분까지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사건이 터지자 피해자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지 않고 급히 911에 전화를 걸어 사건 발생 신고를 한다. 응급 환자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피해자는 사망했다. 총으로 피살된 것으로 밝혀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셰이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할 처지에 선다.

 

 

이제 이야기는 현재 시점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구조된 직후의 셰이, 셰이를 살인자로 몰려 하는 회사 고위층 임원인 법무팀 고문 배럿 잉그럼, 그리고 지금은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이 된 과거 시점의 셰이까지 세 가지 이야기로 장마다 초점을 바꿔가며 진행된다. 변호사로서 온갖 증거를 제시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셰이는 물론이고 역시 변호사로서 셰이의 유죄를 증명하고자 팽팽히 맞서는 배럿 잉그럼의 한 발 한 발은 서로가 무기로 삼고 살아온 법률을 칼로 휘두르는 두뇌 싸움이다. 상대를 완전히 매장시킬 생각으로 최고급 법률 인재들이 서로의 수를 읽고 반격하며 이어지는 반전들은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셰이를 살인자로 몰려 하는 외부의 움직임이 결국은 배럿 잉그럼이다. 사건은 시시각각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몇 차례의 대결 속에서 대기업의 비리, 변호사 직업 윤리 준수 규칙이 엮이기도 한다. 서로간 명운을 건 싸움으로 비화된다.

이에 따라 거대한 스케일로 부풀어 오른 사건은 교묘하게 맞물리고, 절묘하게 쌓아 올린 복선으로 한꺼번에 폭포처럼 터져나오는 흐름은 독자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충격을 남긴다. 책의 저자 보니 키스틀러는 기업 소송을 전문으로 미국 전역에서 사건을 수임해 성공적으로 활동한 소송 전문 변호사라고 한다. 유능한 변호사답게 자신의 이력을 백분 살려, 작중에서 엘리베이터에 갇힌 변호사 주인공 셰이가 엘리베이터 내 사망 사고 때문에 복잡한 법적 문제에 휘말리며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을 생생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변호사 주인공이 난제에 맞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싸우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내는 데 매우 능숙한 실력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은 주인공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교묘한 이야기 설계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더 케이지』에서는 주인공 셰이가 명품 패션 대기업에 하필 모종의 일을 맡는 변호사로 취직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묘한 공방에 휘말린 것이다.

작중에서는 〈짐승 우리(더 케이지the Cage)〉라는 말이 여러 번 변용되어 등장한다. 난데없이 발생한 엘리베이터 사고는 엘리베이터에서 시체가 된 동료와 함께 갇혀 있던 시간 때문에 셰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끔찍한 사건으로 변모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생긴 일의 진실을 아는 것은 주인공 셰이뿐이지만 아무도 셰이가 진짜 겪은 일에는 관심이 없고 엘리베이터 사고로 촉발된 각자의 생존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급급하다. 셰이는 전 직장에서 오래전 해고당한 이후 질기고 독하게 버텨온 과거의 경험과 현재 이어지는 위기를 두고, 자신이 있는 세계가 짐승들의 세계임을 깨닫고 각성한다. 꺼풀이 벗겨지듯 조금씩 밝혀지는 셰이의 비밀에 더해 생존을 위한 강렬한 의지가 더해져 셰이는 독자들의 상상한 한계를 넘는 캐릭터로 완성되어 간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마지막 장까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셰이와 배럿의 비밀은 공개될 경우 각자에게 치명적이다. 그만큼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인물들이 죽을 힘을 다해 치는 몸부림은 독자들의 허를 찌르며 감탄사가 절로 나게 한다. 또한 미국 명품 패션 대기업을 대표하는 도시의 고층 건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묘사와 공방전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화려한 묘사와 더불어 돌연 찬물을 끼얹는 듯이 소름 돋는 장면 배치까지, 독자들이 한 번 손대면 그대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도록 치밀하게 완성한 소설이다.

 


 

소설의 서평을 쓰려면 스포가 될 만한 사실은 감춰야 한다. 그것은 읽는 독자들의 흥미와 추리를 하는 재미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스릴러나 추리, 범죄 소설은 더욱 그렇다. 이 소설도 치밀하게 구성해 쌓아 올라가는 독자들의 흥미를 스포 한 번으로 망가뜨릴 수 있다. 더욱이 주인공 셰이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혹시 변호사로서의 범죄와 법적 문제의 소지까지 전부 감안해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독자의 생각도 끌어냈으니 하는 말이다. 아무튼 최대한 스포를 없애도 1부까지의 결과마저 모두 통째로 뺄 수는 없다는 게 독자의 판단이다. 1부까지의 결과는 결국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건의 마무리가 아니고 한참 꼬이고 혼란스러워 가는 진전의 물살에 휩싸이는 것이다. 저자의 소설 구성 능력이고 미스터리 스릴러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1부가 끝나는 지점에서 셰이는 드디어 정식 체포된다.

 

크루즈 : "그래서 불이 나갔을 때······."

라일리 : "정신이 나간 건 카터 존스가 아니었죠."

크루즈 : "그건 당신이었어!"

"아니 아니에요. 그건 루시······." 나는 그들이 한마디씩 마칠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일어나세요." 크루즈가 탁자에서 물러났다.

"네?"

그가 내 뒤로 다가왔다.

"아니 진짜로 당신들 지금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는 거예요!"

크루즈는 나를 밭잡아 일으켜 세운 후 두 팔을 뒤로 꺾었다.

"샤로나 챈스 램버트, 당신을 루시 카터 존스 살해 혐의로 체포합니다."

차가운 수갑이 손목에 채워졌다.(p.211)

 


 

“모르세요?” 피비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 얘기는 인터넷에서 그야말로 난리였어요. 온갖 게시판에서 그 사건에 대해 토론을 벌였는데 ‘셰이 편’이 이기고 있었죠. ‘#셰이에게자유를’이라는 해시태그까지 생겼다니까요. 그리고 누군가 당신 변호를 위해 펀딩을 시작했죠.”

“뭐라고요? 누가요?”

피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십중팔구 당신에 대해 환상을 품은 방구석 얼간이겠죠. 근데 중요한 건, 그것 때문에 불이 붙었다는 거예요. 5만 달러까지 모였을걸요.”

“뭐라고요? 아니, 왜요?”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당신 이야기가 사람들 주목을 끄니까요.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누군가 자살을 한다? 이런 일은 우리 누구든 겪을 수 있어요. 그랬는데 그걸로 죄를 뒤집어쓴 거잖아요.”(p.279)

 

저자 : 보니 키스틀러(Bonnie Kistler)

 

보니 키스틀러는 기업 소송을 전문으로, 전국적으로 사건을 수임해 성공적으로 소송을 진행한 바 있는 변호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모의 재판에서 우승하고 법률적 글쓰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영문학 학위도 가진 키스틀러는 법률가로서 이력을 더해가는 동시에 서스펜스 스릴러 작품을 여럿 내놓아 작가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는 『하우스 온 파이어(2019)』, 『더 케이지(2022)』, 『그녀(2023)』가 있다.

키스틀러는 변호사 주인공이 난제에 맞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싸우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내는 데 능한데, 키스틀러의 작품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은 주인공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교묘한 이야기 설계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더 케이지』에서 주인공 셰이는 명품 패션 대기업에 하필 모종의 일을 맡는 변호사로 취직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묘한 공방에 휘말린다.

 

역자 : 안은주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0년 동안 라디오 및 TV 방송작가로 일했다. 이후 한국방송통신대학 불문학과에 진학하며 번역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졸업 후 영어와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이란 멀리 떨어진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행위라 믿으며 이에 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카티 보니당의 『128호실의 원고』, 찰리 돈리의 『수어사이드 하우스』와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세라 게일리의 『일회용 아내』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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