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무임술차 좀 할게요 - 방구석 혼술 유튜버의 인생 해장 에세이
이다정 지음 / 북라이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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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 인생에 무임술차 좀 할게요』의 저자는 인기 유튜버다. 그의 유튜브에서는 '혼술러'들의 인생철학이 난무한다. 술 먹고 하는 말엔 거짓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술 좋아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독자도 술깨나 마셨기에 기초적인 내용은 안다. 다만 저자와 독자의 세대 차이가 느껴질 뿐이다. 저자가 프로 혼술러 유튜버라서 관심이 갔다. 유튜버에서는 못할 말이 없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독자는 아날로그 세대라서 유튜브와 친하지 않다. 거의 안 본다. 그들은 독자를 '꼰대'로 볼지 모른다. 나이만 가지고 꼰대로 보이기엔 독자도 자존심 상 허락치 않는다. 그들의 언어와 그들이 하는 말의 중심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살짝 유튜브에 들어가서 보고 싶진 않다. 그 자체가 '몰래' 하는 일 같아서다.

유튜버이자 저자인 이다정을 소개하는 출판사 측의 글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함, 고급진 푼수미와 해맑은 광기, 그리고 긍정 마인드로 17만 구독자에게 사랑을 받은 방구석 프로 혼술 유튜버 무임술차 이다정"이라고 쓰여 있다. 저자는 유튜브에서 미처 하기 어려운 말, 유튜브 영상이라서 차마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큰 맘 먹고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첫 책 『내 인생에 무임술차 좀 할게요』의 탄생 비화가 책에 등장한다. "유튜브에 첫 영상을 올렸을 때, 그 찰나의 순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 소위 얼굴 팔리는 짓이라고들 했다. 인터넷에는 '유튜브를 시작하려는데 해보니 어떠냐'는 상담 글이 의외로 많았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달리는 댓글이 바로 얼굴 깔 용기였다. 나는 '얼굴 좀 깐다고 닳겠어?'라는 다소 초점 나간 엉뚱한 결론으로 얼굴을 노출해 버렸다. 멍청하면 정말 몸이 고생이다."(p.207)

 


 

오전 9시, 편의점에서 모닝 소주를 달리며 “숨 참고 소주 다이브~♪”를 외치는 무임술차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팍팍한 현생에 지쳐 마음 나눌 술친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곤조곤 웃기는 입담과 유쾌발랄한 매력으로 다가간 무임술차는 단숨에 17만 구독자를 사로잡았다.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한 무임술차의 일상은 웃을 일 없고 외로운 혼술러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위안이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금세 국내 혼술 유튜버 1위가 되며 누적 조회수 6,300만 뷰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 유튜버 이름이자 이 책의 표제어로 쓰인 '무임술차' 주인공이 여성인지 몰랐다. 당연히 남성으로 생각한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술로 인한 이 정도의 에피소드를 가지려면 국내 내로라하는 술꾼, 알코올 중독자들도 어렵다. '인생술차'는 그의 주장대로 '인생 무임승차'에 성공한 듯하다. 삶의 만족도가 최상인 그만의 독특한 삶의 방법에 자긍심에 존경심마저 생길 지경이다. 유튜브에서 검증되지 않은 말들이 난무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유튜브를 멀리 했는데, 거기서 다하지 못한 말이 무엇일까? 독자로선 궁금하기만 했다. 더욱이 '팍팍한 현생'에 지쳐 마음 나눌 술친구가 필요한 MZ세대들이 열광한다는데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저자는 덜 고민하고 덜 슬퍼하고 덜 노력하고 덜 걱정하며 힘 빼고 살아가는 법과 ‘진지한 이 세상 진짜 철들면 병난다’며 삶의 엄숙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인생 마인드를 통해 뭉친 근육을 풀어 유연하게 사는 법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하루 저녁부터 새벽까지 4차(章, '幕'(막)이라고 해도 무난할 듯)로 나뉘어 구성돼 있다. 흔히 술자리 옮기는 횟수에 따라 1차, 2차로 말하는 것과 같다. 1차 「소화 잘되는 죽 같은 인생」이란 제목이다. 시계는 오후 6시 20분으로 쓰여 있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서른일곱 살 어린이〉는 저자의 나이일 것이고, 〈넌 아침부터 술이냐?〉는 부모님의 걱정과 한탄의 말일 듯하다. 독자도 들은 적 있다. 아침부터 술을 대놓고 먹을 수 없으니 몰래 마셨으나 들켰을 때 들었으리라. 1차 제목으로 선택된 〈소화 잘되는 죽 같은 인생〉은 무슨 이야길까? 세상이 공평한가?에 대한 저자의 변명 같은 답변이다. "내가 떠드는 말이 거짓말 같지만 거짓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 손! 아무도 안 들 것 같아서 일단 내가 들었다. 어쩌면 시련을 시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함이 지금의 나를 만든 듯싶다. 아니다, 지금부터 '특별함'이라 부르겠다."(p.40) 기막히지만 솔직함이 드러난다.

〈돌연변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에서는 '나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개 나이대가 전해주는 당연한 사건들이 있다. 10대에는 공부하고, 20대에는 연애하고, 30대는 결혼해서 출산하고, 40대에는 블라블라. 나이가 주는 이런 이미지들은 누가 만든 걸까? 인간은 AI처럼 정확한 코드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 아니 보통의 부모님들이 원하는 건 AI 같은 획일화되고 평범한 삶이다. 요즘은 부모님들이 코드를 제대로 입력해줘도 미션에 성공하는 자식들이 드물다. 돌연변이들이 넘쳐나는 세상.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과거엔 돌연변이들이 손가락질을 받았다면 이젠 박수받는 일이 많아졌다. 언론 매체에서는 돌연변이들을 찾아서 주인공으로 모신다. 소위 말해 잘 팔리는 상품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 저자의 가치관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저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했다.(물론 독자가 조금 과장되게 표현했다) 독자가 궁금한 건 구독자 수나 조회수가 아니다. 왜?란 질문을 하고 싶다. 책의 출간 취지로 답을 대신한다. "언제나 인생 허들에 대한 고민은 모든 사람의 숙제다. 숙제의 정답은 없다. 대신 이왕 가는 길 재미있게 즐기며 가자며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말이다. 저녁 9시가 넘었다. 이젠 2차로 갈 시간이다. 한 번 달리면 새벽까지 계속 달리는 게 인생술차의 특기인지 모르지만 사실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토이기도 하다. 자리를 옮겨 다시 시작한다. 처음 마음으로 다시 또, 1차 시작 때의 마음으로... 저자의 넉두리인가, 인생관인가 모를 말이 서두를 꿴다. '적당히 살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힘들어하고, 적당히 일하는 게 범죄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저자에겐 인생은 항상 물음표란다. 신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고 한다. 왜 이렇게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문제들을 던져주는 거냐고. 저자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하며 세상 사는 것은 아니란 반증이 된다. 수많은 문제들에 부닥쳐 풀려고 노력했다는 증거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인생에 질문이 없다면 그야말로 천국에서 놀고 먹는 사람이나 하는 말일 거니까.

누군가는 답을 찾았고(개인 생각이지만), 찾아가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고민과 불안이 생겼나 보다. 혹시 저자 자신만 이렇게 앞뒤 꽉 막힌 느낌인 건가 싶어 불안할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제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 있다고 수많은 사람이 외치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답도 없는 인생 재미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냐고요. 이번 생이 처음인 인간들이 모여 함께 답을 찾아가면서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인생. 정말 재밌게 살고 싶다고 저자는 외친다.

 


 

2차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저자의 취기가 조금 오른 듯하다. 옛날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낸다. "아주 잠깐 계획적이고 완변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어서 소위 말해 지랄을 떨던 때가 있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도 한쪽이 살짝 엇나가면 제대로 될 때까지 그리곤 했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더 심했다. 시간과 동선을 계산해서 모든 계획을 짰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다. 친구와 둘이서 첫 해외 여행길에 올랐을 때다. 계획한 대로 서로 짜증 내지 말고 잘 지내고 오자고. 친구도 저자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첫날과 둘째 날은 무사히 넘겼지만 셋째 날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로 자존심을 세우려고 그랬는지 힘들어도 서로를 위해 티를 내지 않고 계획대로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은 한국에 더 가까이 갔다고 고백한다. 그 친구와는 다시 여행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저자는 느꼈나 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도 계획만큼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루쯤 계획을 무시하고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비가 내리면 그냥 맞으면 되는 거였다. 느낌이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다른 친구가 야구 보러 대구 여행을 제안했단다. 야구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 데다 첫 해외 여행 때의 안 좋은 추억 때문에 거절하려 했는데 이 친구 제안이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딱 야구 보는 것만 정하고 나머지 시간은 즉흥적으로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정말 계획대로 구체화되고 실현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혼잣말 하듯 읊조린다. "누구나 소나기에 옷이 젖는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럴 때는 선택지가 있다. 어딘가로 피하느냐, 일단 맞고 나중에 잘 말리느냐, 다시 샤워를 하느냐다. 누구나 맞는 소나기, 앞으로도 잘 맞을 테다. 갑자기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우리의 인생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이젠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이 좋아졌다."(p.103)

 


 

시계가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독자는 저자와의 술자리를 여기서 줄인다. 더 있고 싶은 독자들은 3차, 4차를 함께하시길 바란다. 그의 '무임술차'는 계속된다. 독자가 지면에 모두 옮길 수 없어 여기서 줄이려 한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진짜다. 독자는 너무 너무 궁금해서 미리 3차와 4차 계획표를 읽어버렸다. 재미 있고, 때로는 시원하다. ‘등짝 스매싱은 참아도 혼술은 못 참는, 집에서 쫓겨나도 소주는 먹고 싶어 할 동네 누나(언니)’ 같은 술먹방 유튜버 '무임술차'는 계속된다. 특히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와서 삶에 조금 틈을 주고 싶은 사람들, 번아웃이 온 사람들, 심리적 방황기를 겪는 사람들,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3차, 4차로 이어지는 저자의 '인생 무임승차론'을 더 들으시면 아까운 시간 보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 철학은 유쾌한 위안과 유연한 소신을 갖고 있어 현실을 보다 가볍게 느낄 수 있게 도와줄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이다정

 

17만 구독자와 콘텐츠 누적 조회 6,300만 뷰를 달성한 이다정은 ‘방구석 프로 혼술러’이자 조곤조곤 웃기는 입담으로 팍팍한 현실에 지쳐 마음 나눌 술친구가 필요한 MZ세대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혼술 유튜브계의 장윤정’으로 불리며 국내 혼술 유튜버 1위가 되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함, 고급진 푼수미와 우아한 광기, 그리고 솔직함이 매력이다. 오늘도 “숨 참고 소주 다이브~♪”를 외치며 시트콤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영상으로 다하지 못한 인생 내공 이야기를 담아 첫 에세이 《내 인생에 무임술차 좀 할게요》를 썼다.

▶유튜브 @Freetea

▶문학특기생으로 대학교 입학

▶YTN을 거쳐 현재 모 지상파 방송사에 근무 중

▶하이트진로 ‘처음처럼’ 인터뷰 촬영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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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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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독자가 가입한 온라인 서점으로부터 책을 홍보하는 레터가 한 통 도착했다. 무슨 책인가 하고 클릭해 들어가 읽어보니 '이야미스'라는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앞뒤 맥락을 살펴가며 한참 읽다 보니 이야미스라는 단어를 아예 풀이해 놓았다. '이야미스'는 읽고 나면 기분이 언짢아진다고 해서 싫다는 뜻의 ‘이야다(いやだ)’와 ‘미스’터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일본의 신조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읽고 나면 싫은 미스터리라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책의 저자는 미나토 가나에라는 일본 중견 작가라고 한다. 당시 일련의 몇 권 책 『고백』, 『리버스』란 책을 통해 '이야미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책 홍보차 온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이야미스란 말은 싫어하지만 '여왕'이라면 좀 달라진다"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인터뷰의 요지는 우리 유행어로 '불편한 진실'을 책에 주제와 소재로 삼아 쓴 책이 크게 히트를 친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이 책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도 일본 신조어 '이야미스'에 틀림없다고 독자는 본다. 출판사 측도 이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교묘하게 파헤쳐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미스’, 데뷔하자마자 이 장르의 대표 작가로 떠오른 아시자와 요의 두 번째 장편소설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이 국내에 발간됐다. 아시자와 요가 발표한 작품들은 섬세하게 설계된 전개로 정평이 나 있으며 전부 나오키상, 서점대상, 추리작가협회상 등 유수의 문학상 후보로 지목되어 일찌감치 평단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자가 이야미스 작품이라고 한다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독자가 읽고 나서 찜찜한 마음이 영 가시지 않기에 굳이 이 말을 써본다.

 


 

출판사 측은 앞선 소개글에 이어 아시자와 요는 사건의 극악함으로 독자를 사로잡기보다 안정감 있는 서사를 구축해 독자들을 서서히 어둑어둑한 이야기에 빠지게 만드는 솜씨가 남다르다. 각종 문학상에 지명된 저력이 있는 만큼, 이번 장편에서는 본래의 강점을 한껏 살려 두 여성 관계의 침잠에 무게를 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은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면서도 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에가 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녀의 곁에는 결혼한 후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자원봉사를 하는 나쓰코가 있다. 오래전부터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등감과 부러움을 느끼는 한편 남편보다 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데 익숙하다. 두 사람의 이상하리만치 끈끈한 관계는 사에의 남편 다이시가 사에에게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백한 뒤 실종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더구나 다이시가 죽은 채 발견되면서 둘은 서로에게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하나씩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살해되던 순간 사에는 정말 직장에 있었을까? 나쓰코는 왜 사에가 출근한 시간에 사에의 집 앞을 서성인 걸까? 사건은 언론 취재와 경찰 탐문으로 이어지며 생생히 펼쳐진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겨 결말에 이르러서야 또 속았구나! 깨닫게 되었다”라는 독자 후기가 많았다는 출판사 측 이야기가 이야미스 소설임을 반증해 주고 있으리라. 이 책은 여름에 걸맞은 페이지터너 소설임에 틀림없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6장(章)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 작품의 〈프롤로그〉 맨 마지막 부분이다.

나쓰코는 몸을 웅크리고 오열을 토해냈다. 딸은 놀라고 무서웠는지 한순간 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엄마에게 달라붙어 한층 소리 높여 울었다. 엄마를 무서워하면서도 엄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딸. 나쓰코는 목이 콱 멜 듯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의 입에 젖을 물렸다.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p.15)

 

 

미스터리 소설인 만큼 스토리를 자세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이에게 천 기저귀를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나쓰코의 남편과 시댁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되고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며 직장 동료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는 사에의 남편. 그런 남자들과 사는 사에와 나쓰코,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리만치 특별하다. 반찬거리를 나눠야 할 때, 철야 근무를 마친 새벽녘 휴대전화를 열었을 때, 무심하게 마음을 긁어놓는 남편에게서 야속함을 느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서로였던 것. 그래서인지 사에가 쉴 수 있는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나쓰코의 집이며, 휴대전화 통화목록에 남겨진 나쓰코의 이름만 봐도 ‘피가 시원스레 흘러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에의 여동생조차 안부를 물을 때마다 나쓰코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에를 힐난한다. 다른 친구와의 시간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기실 사에는 나쓰코를 좋아했다. 내내 나쓰코가 사에의 전부였고, 나쓰코로부터 인정받으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때론 온전히 나쓰코가 되고 싶기도 했다.

남편은 아이를 키우면서 기저귀를 갈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안고 있다가도 아이가 울면 나쓰코를 불러 기저귀 갈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따름이었다.

나쓰코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았다. 지금도 단물만 쪽 빨아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러워진 속옷을 빠는 것도, 다다미방에서 욕실까지 바닥을 닦는 것도 전부 나쓰코가 할 일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종이 기저귀를 쓴 건 아니잖아. 하지만 괜히 천 기저귀에 연연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힘에도 부치니까…… 그래서.”

나쓰코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내가 딸을 위해 내내 천 기저귀를 사용하며 애써왔음을 남편도 모를 리 없다.(p.59)

 


 

저자가 첫 번째 장편 『죄의 여백』에서 살인에 얽힌 여러 용의자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에게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개가 돋보였다면, 이 책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은 소중한 존재에게 제목만큼 언제까지고 불행은 피하고 행복한 순간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넘쳐버리며 파국을 맞이한 쓰디쓴 미스터리다.

시에와 나쓰코는 늘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실은 외면한 채 억지로 가족의 모습을 끼워 나가는 면모도 유사하다. 그러나 둘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일면 차이를 보인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고백한 남편을 기다리고, 그에게서 아이를 밸 기회를 엿보는 사에와 그런 사에를 ‘남자 복’이 없다며 안쓰러워하다가도 다이시 때문에 사에가 불행하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쓰코. 결국 나쓰코는 사에에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길 바라며 불행의 원흉을 대신 제거해 버린다. 살인이 일어나기까지 이야기는 2장에 불과하다.

이야기는 사라진 남편을 기다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에의 심리와 당장은 진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위해 모두 짊어지는 결연한 나쓰코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준다. 관계자들의 진술이 이어지며 독자들을 남은 하나의 퍼즐을 향해 다가간다. 사에는 왜 그토록 나쓰코에게 집착했을까? 나쓰코는 사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한 걸까? 그리고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예상했던 밑그림은 전부 사라지고 색채부터 배경, 캐릭터, 플롯까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것이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아시자와 요 미스터리의 전형이다. 일본 독자들에게서 '서스펜스의 여왕'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독자는 저자 아시자와 요의 전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읽은 적이 있다.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악재가 눈덩이같이 불어나는 이야기들을 수록한 작품집이다.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선택이 그야말로 악화일로의 시작이 되어 주인공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야기에, 예측을 불허하는 섬찟한 범죄 동기가 뒤따른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립된 인간이 범죄를 일으키게 되는 과정과 위태로운 심리를 유감없이 담아낸 것이다. 범행을 저지른 충격적인 동기를 감성적으로 풀어낸 작품집임과 동시에 독자들을 속이는 서술 트릭도 숨어 있어 미스터리를 읽는 재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출간 후 낸 소감에서 아시자와 요는 "개개인의 힘든 삶이나 짓밟히고 있는 뭔가를 직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내가 믿는 정의’를 지킬 수 있는 건 운이 좋아서 그럴 뿐이고,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무섭기도 해서인지 작은 실수나 우연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등장인물을 그릴 때가 많습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단순히 극적 긴장감이 높다는 이유로 '서스펜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따른 게 아니라는 생각을 더 굳혀주는 소감 한마디였다.

나쓰코는 임신 소식을 듣고도 냉대와 무시를 일삼는 남편 다카오와 어정쩡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형제자매도 없이 그녀만을 바라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홀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어머니처럼 아이를 지배하진 않으려 오직 양육에만 힘써왔다. 다카오의 무심함 속에 일정한 소속도 없이 오직 엄마의 이름으로만 살아온 나쓰코에게 사에라는 존재는 매일 그녀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 그런 사에를 위해 나쓰코는 진짜 행복을 주고 싶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독자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다. 워낙 심리적 묘사 처리가 치밀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것까지 노련한 저자에게서 허점을 찾아내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부각시키지도 않아서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축 사에와 나쓰코다. 늘 엄마의 그늘에서 살아온 시에가 엄마 없는 곳에서 퇴근 후 만나서 이야기하는 유일한 상대가 나쓰코다. 둘에겐 어쩐 일인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도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로서 우정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엄마에게 칭찬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사에와 그런 사에에게 한없는 동정과 연민, 친절과 희생을 감수하는 나쓰코는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역시 저자의 인물 설정과 스토리와의 관계, 이를 극적으로 짜맞추는 유기적 구성 능력이 모두 어우러져 멋진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빚어냈다고 생각된다.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붙임성 있는 사에와 아내를 무시하고 집안 일도 도와주지 않는 매너 '0'점의 남편. 어느 날 다른 여자가 임신을 했다며 외도를 고백한 후 실종된 나쓰코의 남편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고. 나쓰코가 범인으로 구속되어 기소될 상황으로까지 일사천리로 치닫는다.

사건은 치닫지만 사실 사건이 벌어진 후 며칠 사이다. 워낙 심리 묘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치밀하다 못해 답답한 증인 출두 증언 기록 등을 뒤져가며 사건이 단순 살인 사건이 아님을 독자들이 인식하기까지가 끝없는 미스터리의 연속처럼 느껴지게 한다. 저자의 소설 구성 능력도 한몫 했으리라. 책에서 본문체에 비해 색이 옅은 글씨로 적혀 있는 부분이 혼자만의 생각이나 심리적 변화를 일으킴을 감지하게 해준다. 독자들이 못 느끼고 그냥 읽어도 스토리의 진전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심리의 변화를 감지하면 사건의 실체에 조금 빨리 다가갈 수 있을 것이지만.

 


 

저자 : 아시자와 요(あしざわ よう, 芹澤 央)

 

198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2006년 지바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2012년 《죄의 여백》으로 제3회 야성시대 프론티어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2016년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가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후보 및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5위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으로 제7회 시즈오카 서점대상을 수상했다. 2020년에는 《더러워진 손을 거기에 닦지 마》가 제164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고, 2023년에는 《밤의 이정표夜の道標》로 제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및 연작단편집 부문을 수상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충격적인 반전을 탄탄한 스토리로 엮어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역시 여성 캐릭터가 맞닥뜨릴 수 있는 뻔한 사건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결말로 이끌어 수많은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 수작이다.

 

역자 : 김은모

 

일본 문학 번역가. 198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던 도중 일본 미스터리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테후테후장에 어서 오세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여자 친구』를 비롯하여 아시베 다쿠의 고바야시 히로키의 『Q&A』, 미치오 슈스케의 『투명 카멜레온』, 『달과 게』, 『기담을 파는 가게』,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 『후가는 유가』 야쿠마루 가쿠의 『우죄』,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클라라 죽이기』, 『도로시 죽이기』, 지넨 미키토의 병동 시리즈 『가면병동』, 『시한병동』,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 『프리즘』, 미야베 미유키의 『비탄의 문 1, 2』,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 『마안갑의 살인』을 비롯하여,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의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지나가는 녹색 바람』, 『검찰 측 죄인』, 『달과 게』, 『성스러운 검은 밤』, 『열대야』, 『밀실살인게임』, 『사이언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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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망루
배이유 지음 / 알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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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밤의 망루에서 저자가 본 것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은 서로 상반된 삶의 부조리와 생명에의 이중적 갈구로서 충분히 모순 속에서 살아가며 감내하고 있다. 그것 자체가 삶일까, 부조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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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망루
배이유 지음 / 알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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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밤의 망루』는 배이유 작가의 소설집이다. 저자 배이유는 8년 만의 침묵을 깨고 새 단편 소설집을 펴냈다. 부산에서 활동하면서 매우 탄탄하게 작품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배이유는 『퍼즐 위의 새』(2015)로 2016년 제16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이 소설집을 처음 냈다. 오랜 침묵 속에서도 창작의 열정은 식지 않는 것인지 이 소설집 『밤의 망루』에는 저자 특유의 작품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어 반갑다. 전작 『퍼즐 위의 새』는 한 번 읽어서 독자의 기억 속에 아직 살아 남아 있다. 독자가 저자 배이유를 처음 알게 된 『퍼즐 위의 새』에는 단편 소설들은 세상의 비루함과 낡음에 대해 끈질긴 희망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 속에 있다. 이 작품 『밤의 망루』를 읽다보니 『퍼즐 위의 새』에 실렸던 작품들이 스멀스멀 기억 밖으로 배어 나온다.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뭔가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은 이유일 것이다. 이번 신작 『밤의 망루』에는 2022년 제27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 「소리와 흐름: 록의 부치지 못한 노래」와 2018년 제10회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검은 붓꽃」을 비롯한 일곱 편의 소설들이 담겨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밤의 망루』에서 저자 배이유는 ‘자유’에 관해 말한다. 일곱 편의 소설은 저마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품고 있다. 그런 자유에 대한 의지는 물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물에서 비롯되는 ‘흐른다’, ‘흘러간다’, ‘부드럽다’, ‘유연하다’, ‘지나간다’, ‘스친다’, ‘젖다’, ‘적신다’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물은 갇히지 않으려는, 끊임없이 흘러가려는 속성을 가진다. 이슬이나 비나 눈의 물은 결국 자유를 꿈꾸며 바다로 흘러 나아간다. 저자는 이번 소설집이 종이, 돌멩이, 나뭇가지, 색유리, 털실, 모래 등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시간의 조각배에서 흔들리는 삶의 파편들’의 모자이크라고 말한다. 그 삶의 파편들 속에서 독자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고뇌하고, 상실한 인물들을 통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작 「밤의 망루」는 저자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을 오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품고 있다가 쓴 소설이라고 한다. 「밤의 망루」에서는 표지화처럼 고독한 망루에 홀로 서서 거대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임무를 안은 채,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홀로 성을 지켜야만 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불가항력의 본연적 임무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 안개로 휩싸인 적막한 공간에 발을 딛으며 헤맸다. 오리무중. 추상에서 구체화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다”고 털어놓는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파수꾼의 삶은, 한 여인의 등장으로, 그리고 그녀의 탈주로 요동치게 된다. 파수꾼과 같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그런 그녀가 파수꾼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저자의 말대로 카프카의 『성(城)』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문학 사전을 뒤적여 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작가로 알려진 카프카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함으로써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여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는 카프카는 '부조리의 작가'로 불리웠다. 카프카는 『변신』, 『심판』 등을 통해 인간 실존과 부조리에 대해 집중력 있는 소설을 발표했다. 특히 1916년 간행한 『변신』은 독자의 기억 속에 강렬한 느낌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미완성 장편소설로 남은 『성』은 미완성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 소개되었다고 한다. 측량 기사 K가 성을 둘러싼 마을에 도착해,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비교적 단순한 이 요점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전형적인 악몽이다.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불합리와 리얼리즘을 가장 미묘하게 결합시켰다. 사건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일 뿐이지만 어딘가 완벽하게 이질적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페이지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도 피할 수 없다.

 


 

『성』은 이야기에 앞서 끊임없이 불안정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료사회의 끊임없는 장애물에 의해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공포가 서서히 스며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꿈 속에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목소리를 전달해줄 공기가 없고,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는 최후의 순간과도 같다. 문학 평론가들의 일반적 견해를 인용한 것이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음은 아마 독자가 학창 시절 이후 카프카를 멀리 해서인 것 같아 아쉽다. 「밤의 망루」와 비슷한 느낌이 있긴 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짚어 내지 못한 것은 아직 문학적 소양이 제대로 쌓지 못한 독자의 이해 부족 탓인가 생각한다.

이 소설집의 첫 작품은 앞서 언급한 대로 「검은 붓꽃」은 2018년 제10회 현진건문학상 추천작이다. 몸의 소리를 애써 부정하고 가두려던 시대의 이야기이자, 그런 시대를 살아온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다. 「검은 붓꽃」은 매우 은유적 표현이지만 무슨 뜻인지 금세 알 수 있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레드 칸나보다 검은 붓꽃에 더 눈길이 간다. 레드 칸나는 오렌지와 자줏빛의 붉은 꽃잎이 겹겹이 속살을 드러내며 도박적인 생명력을 보여 주지만, 검은 붓꽃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깊숙이 감춰진 성기를 드러내어 똑바로 바라보긴 처음이었다.”(p.11) 그녀는 자신의 성기를 보며 '눈에 보이는 부분만 봐왔지 다리 사이에 가려진 ㅗㄳ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마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한다. "얘도 음지에서 이렇게 늙어가고 있구나.'는 생각에서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사람 안에 고착된 고정 관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의 관습적인 시선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해서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 그동안 여성들은 자기 신체의 주인 노릇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질문한다. 과연 지금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느냐고.

 


 

두 번째 이야기 「홍천」은 어느 해 여름, 장의차처럼 검은 차를 탄 네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그날 서로 처음 본 그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다. 과연 그들은 왜 홍천으로 가는가. 저자는 언젠가 홍천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전부터 어떤 정보도 없었음에도 ‘홍천’이란 장소로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을 둘러보며 어떤 이야기가 자신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마치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내 안에서 흘러나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알아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간 것이다.” 시작 부분에서 첫 문장, 첫 장면이 암시하는 부분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긴다.

"그래 여름의 햇빛이 기억난다.

온통 초록이었던 숲과 계곡 위에 투명한 유리막으로 덮여 있던 빛이.

벌써 삼 년이나 지나갔군.

태풍이 비켜나자 지속적으로 내리던 비가 그치고 보녁적으로 태양이 빛을 뿌리던 7월 중순이었다."(p.36)

 

여기 모인 분들은 혼자 죽는 게 두려워 여행길에 동참한 거 아닙니까. 이번에도 같이 해보죠. 하루만 더 사용해 봐요. 본이 한 말 중에 제일 길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전열이 흐트러지고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제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긴소매의 팔을 긁어댔다. 착화탄에서 불꽃이 튀며 연기가 올라왔다. 매캐한 연기가 바깥으로 맘껏 뻗어나가지 못하고 천정에 부딪치며 옆으로 퍼졌다. 탁은 연거푸 기침을 했다.(p.52)

 


 

「홍천」은 얼마 전 뉴스를 온통 도배하다시피 한 '동반 자살'이라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소재로 삼았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로 이번 일을 계기로 처음 만나는 사이다. 네 사람의 젊은이들은 번개탄을 이용해 함께 죽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펜션으로 들어가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번개탄을 준비하고 창문을 꼼꼼히 막기 시작한다. 그런데 밖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들리기도 하고 키타소리와 노래소리들이 들린다. 누군가가 제안한다. 너무 빨리 일을 치르면 빨리 들통날 수 있으니 새벽까지 더 때를 기다리자고. 그러자 옆 사람은 이왕 죽는거 시간이 있으니 해보고 싶은것 해보자고 말한다.

이로 인해 이들은 다음날 죽음을 잠시 미루고 홍천의 급류타기를 하러 간다. 급류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하듯이 래프팅을 시작한다. 래프팅을 시작합니다. 보트 탈 때 지켜야 할 안전수칙 교육도 착실히 받는다. 구명조끼도 착용하는 등 안전한 래프팅을 위한 준비를 착착 알아서 잘 챙긴다. 보트가 뒤집힐 우려가 큰 급류 구간에서는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팀의 호흡이 척척 잘 들어 맞는다. 히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그 급류구간과 폭포구간을 지날때는 팀이 호흡을 착착 맞춥니다. 모두 합세하여 무사히 도착한다. 죽으러 간 곳에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는 자신들을 보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이러니이지만 어쩌면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부분이다. 래프팅이 끝나자 잠수도하고 미끄러운 바위도 만져보고 자연도 느껴보고... 서로 웃는다. 죽을 생각을 했던 사람들의 행위로 보여지지 않는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속으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다. 조금 더 정확히는 상운의 아내 ‘이순’의 이야기이다. 한때는 그들에게도 “서로의 심장에도 반짝하고 불이 켜지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과 상운은 “각자 다른 별”이 되었을 뿐이다. 어느 날 상운이 이순을 위한 선물로 사들고 온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것이, 이순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넓지도 않은 집 안에서 이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살아온 부부 사이라 해도 가장 가까이 밀착해서 산다 해도 서로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눈치조차 못 채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다른 성향이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이 인내하지 않으면 가정을 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물밑의 가라앉은 속말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착하다, 천사 같다, 자애롭다, 자비롭다’ 같은 칭송 뒤에 가려진 불편함, 거북함 등을 말함이다.

이순은 앉아서 망연히 하늘과 구름과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발목에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신발을 벗어 맨발을 내밀었다. 따끈한 모래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발가락들이 저마다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집 안이 아닌 곳에서는 늘 감춰져 있는 발가락들이 해를 볼 일이 있겠는가. 역사적인 사건인데, 서로 햇빛을 쐬려고 구멍에서 얼굴을 내미는 두더지 같았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p.74)

 

저자 : 배이유

 

논산과 진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문자를 깨친 이후로 오랜 시간 부산에서 살아왔다. 2011년 《한국소설》에 단편소설로 등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상으로 2015년 소설집 『퍼즐 위의 새』를 발간했다. 첫 창작집으로 2016년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2021년 뉴욕의 문예지 《The Hopper》에 단편소설 「압정 위의 패랭이꽃」이 ‘The Last Days’로 번역(양은미) 게재. 2022년 「소리와 흐름: 록의 부치지 못한 노래」로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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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인문학 - 뮤지컬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송진완.한정아 지음 / 알렙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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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 그리고 드라마로 표현하는 뮤지컬은 인류가 그린 역사적 무늬를 탐구하는 인문학과 관련돼 있다. 두 공동 저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 명작과 넘버들에 관한 소개와 해석으로 삶의 의미를 되묻는 인문학적 질문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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