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
진하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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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웃들』은 소설가 진하리의 첫 소설집이다. 단편 여섯 편으로 구성된 단출한 느낌이지만 쓰는 기간은 꽤 오래 걸렸다고 한다. 저자 진하리는 이 책의 여섯 편의 소설이 2019년 여름부터 2022년 봄 사이에 쓴 것이라고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힌다. 고치고 다듬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창작의 고통을 은근히 내비친다. 애정을 쏟는다고 자식이 내 뜻대로 자라주지는 않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더라고 고백한다.

저자의 한 친구가 몇 년 전 깊은 산속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귀촌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해발 700미터의 친구의 산장에서 발밑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향기롭고 쌉쌀한' 이야기를 구상했다다. 그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연작소설로 이어졌다고 털어놓는다. '향기롭고 쌉쌀한'은 이 소설집의 시작인 셈이다. 퇴고를 거쳐 소설이 완성될 즈음 산장의 주인이었던 한나(친구의 이름인 듯하다)는 그곳을 떠났다. 산장에서 1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적한 마을로 이사해 카페를 열었다고 전한다. 낮엔 이즈니 버터와 잠봉햄을 듬뿍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고 밤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시를 쓰게 되었다. 요즘은 가끔 저자에게 카톡으로 시를 보낸다고 전한다. 아직은 미완인 그녀의 시가 나는 참 좋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제목처럼 '이웃들'의 삶을 그렸다. 평범한 삶인 듯하지만 '세상물' 다 든 사람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 대해 문학평론가 허 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물인 세상"이라는 제목의 글로 평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마지막에 수록된 「휴가」는 가장 나중에 쓴 소설이고 다른 다섯 편과는 결이 다르다고 굳이 〈작가의 말〉을 통해 밝혔다. 왜일까? 저자는 연남동(서울 마포구)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연 사촌동생을 찾아갔다가 그 애의 뒷모습을 보며 구상한 이야기란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잇는 새로운 연작소설을 쓰고 있다.

 


 

저자는 왜 소설을 쓴 동기를 밝히는 것인가? 아마 저자가 지향하는 소설의 성격을 암시하는 듯하다. 독자의 추정이지만 저자는 우리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은 것이다. 아마 저자가 앞으로도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소설을 쓸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는 심훈문학상 수상자로서 작가 입문을 한 분이다.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써내려간 소설들은 심훈문학상 심사 당시에도 “중산층의 복잡한 세태와 심리를 끌어내는 관점과 주제의식이 새롭다”는 평을 받았다. “스노비즘이 장악한 현실의 양상을 투시도처럼 재현”하며 독자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책 『이웃들』에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 중 마지막 작품 「휴가」를 제외한 다섯 편의 소설은 연작의 성격을 갖는다. 저자가 〈작가의 말〉을 통해 이미 언급했다. 「야외수업」의 주인공 ‘태미’는 「해피버스데이」에, 「해피버스데이」의 ‘한나’ 부부는 「향기롭고 쌉쌀한」에 다시 나온다. 이 외에 「이웃들」과 「지나간 이야기」도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한다. 어느 작품에서는 조연이던 인물이 또 다른 작품에서는 주연으로, 혹은 그 반대로 전환된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일상의 조각들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호출할 뿐 다정한 ‘이웃들’은 아니다. 이들은 친밀함을 연기하고, 위로하는 척하면서 슬며시 배신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타인의 행운과 성공 앞에서 자신의 불운을 들추어내 견주고 마는 인간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들의 속물성을 끄집어내 폭로한 뒤에 자기반성으로 이어진다거나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말의 무게를 감당하며 계속 살아가야 하는 날들이 이어질 뿐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추천평〉을 통해 여섯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벼랑 끝에 서게 된다고 지적한다. 몰락 직전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문득 눈을 뜨고 보니 발아래가 까마득하다. 거기가 바로 그들의 내면이다. 그들은 일상의 어느 순간 과거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를 맞닥뜨린다. "타인의 비밀은 언제나 흥미롭지 않던가.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죄처럼 말이다. 정작 그들이 목격하는 건 흥미롭지 않은 자신의 비밀에 불과하지만.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준 비밀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살면서 한 번쯤 겪게 되는 운명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을 견디고 맞이하는 내일 역시 희망적일 것이라는 암시 따위는 없다. 그렇다. 깨달음조차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간절히 바라던 것을 손에 쥐고도 행복해지기는커녕 불행해진 아니, 불행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삶이라니. 모든 게 그들 탓인데 차마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는 까닭은 쓸쓸하다거나 서글프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외로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눈에 보여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했으니 이 여섯 편의 소설은 한 편 한 편이 눈부신 언어도단이다. 『이웃들』은 진하리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첫 소설집이 이토록 무시무시해도 되는 건가. 아마도 독자는 낯선 이 작가의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허희 평론가의 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이웃의 내면이나 삶의 모습을 소설 내 인물에 국한시키지 않고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본다. "친밀하다기보다는 친밀함을 연기하고, 위로하는 척하면서 슬며시 배신하는 인물은 중산층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현재의 군상이다. 이에 대한 어떠한 소설적 대안이 있을 수 있나. 진하리는 섣부른 해결책을 논하지 않는다. 그저 스노비즘이 장악한 현실의 양상을 투시도처럼 재현하였을 따름이다. 단편의 임무는 이로써 완수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의 일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늘날 살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내면이고 삶의 양태다. 평론가 허 희는 이를 〈표리부동의 처세술〉이라고 말한다. 허 평론가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나는 진정한 교제를 고통스럽게 갈망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소망'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세속에서의 생활이 마치 스스로를 죽이는 일인 것 같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 대신 자연에 머물기를 희망했으리라. 오늘날 사람들을 피해 은거하는 '자연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소로의 정신이 현대에도 면면히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가 소로를 비롯한 자연인처럼 살지는 못한다. 실상 이들은 예외적 존재라서 주목받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은 타인과 얽힌 사회에서 살아간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선택보다는 무리에 속해 있는 편이 자연스러워진다. 사회의 평범한 일원이 아닌 괴짜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을 필요로 한다고 허 평론가는 강조한다.

사회의 평범한 일원으로 사는 길도 편안하지만은 않다. 1997년 이른바 'IMF체제' 성립 이후 한국은 속물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허 평론가의 말에 귀기울여본다. 이에 따르면 한 사회학자는 속물이 지배하는 사회를 스노보크라시(snobocracy)라고 규정한다. 그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진정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지향적 삶을 추종하며, 도구적 성찰성만을 발휘하는 소노비즘이 2000년대를 관통하는 마음의 레짐(regime)이라고 정의 내린다. 특징적인 점은 만연화된 스노비즘을 비판하는 사람조차 본인이 속물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물인 세상은 구성원들을 기만하고 상처 입힌다. 그러는 한에서 속물은 나이고, 당신이며, 곧 '이웃들'의 얼굴이다. 이때의 이웃은 살가운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얼마 전 〈완벽한 타인〉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어린시절부터 친구였고 결혼을 한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시작된 휴대폰 공유 게임으로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리메이크 작품으로 원작이 따로 있다.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라고 한다. 개봉 후 3년 만에 한국, 스페인, 터키, 인도, 프랑스, 그리스에서 리메이크를 했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로 평가된 수작이라고 한다. 우리의 리메이크 작품 〈완벽한 타인〉도 원작 못지않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무언가를 숨기고 사는 인간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다. 휴대폰 속에 다들 한 가지 비밀쯤은 있지 않은가?

갑자기 독자가 영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이 책 『이웃들』에서 저자가 메타포로 쓰고 있는 '이웃'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허 평론가가 제시한 〈타인이라는 적〉의 명제에 다가서기 위해서다. 표제작 「이웃들」은 세 부부의 모임에 초점을 맞춘다. 태하아빠와 엄마, 재이아빠와 엄마(파라: 제이엄마의 이름이 '파라'인 것은 「지나간 이야기」에서 밝혀진다), 루키아빠와 엄마(주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주연'인데, 다른 인물과 달리 그녀만 서술자에게 이름으로 불리면, 그녀와 '노인' 및 '여자' 사이에 에피소드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세 부부가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이들은 태하아빠의 제안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그 게임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웃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자기 의견은 제외하고 직접 본 것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어느새 경계는 흐릿해진다. 허 평론가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직접 본 것이라는 제한을 두고 객관성을 담보하는 척하지만, 이러한 이웃 이야기는 가십과 뒷소문의 속성을 띤다. 남에 대한 음험한 대화를 통하여 그들은 본인만은 결백한 존재라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속물적이고 의뭉스러운 남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구설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안도감, 그러한 구별 짓기가 빚어내는 효과야말로 이웃의 비밀을 화제로 올리는 이유이라는 지적이다.

 


 

'정치적 적'에 대하여 『이웃들』의 인물들은 노골적으로 적대하지 않는다. 배타성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은 세련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간에 비난받을 일을 저질렀을지언정, 알려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여기며 그들은 타인과 본인마저 속인다. 한나 남편(준성)은 소리친다. "다들 정신 차리라고." 이는 타인에게만 향하는 일갈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외침이다. 허 평론가는 그들이 정신 차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한다. '왜'와 '어떻게'라는 메타적 질문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저자 전하리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도 다르지 않음을 「휴가」에서 예증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휴가」는 '영주'는 사촌동생 '준왕'이개업한 '펍을 겸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고모들과 같이 방문한면서 옛날 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전남편에게 연락이 왔을 때 파라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였고 태양이 작열했고 모든 사물이 정신없이 햇빛을 튕겨냈다. 아들 재이는 친구들과 정글짐 위를 날아다니듯 뛰어다녔다. 파라는 동네 엄마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벤치를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그가 전하는 진부한 안부 인사를 들으며 이제 그와는 인사 너머의 마음은 짐작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p.69) - 「지나간 이야기」 중에서

 

그는 뒤늦게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오래전, 컬렉터들이 남편을 쫓아다닐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정대가 한나에게 호감을 보였을 때 그녀는 그를 돈만 많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뜻밖의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한나가 기대하고 짐작했던 것들은 모두 틀렸다.

한나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벽마다 걸린 유화 작품에서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났다. 언젠가 한나의 작품도 이곳에 걸렸었다. 동남방앗간이 갤러리였을 때 한나는 여기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작품 한 점을 이정대에게 팔았다. 그 그림이 컬렉터들의 눈에 띄어 중견작가와 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좋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의 그림은 점점 정형화되어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했다.(p.106) - 「해피버스데이」 중에서

 

저자 : 진하리

 

2022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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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돋는다 -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
배예람 지음 / 참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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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이라면 누가 뭐래도 공포(호러) 소설이다. 물론 모든 독자들이 공포 소설을 다 읽는 것은 아니다. 공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년 내내 공포 소설을 찾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의외로 공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적었다. 때문에 공포 소설 작가도 많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탐정·추리·미스터리 소설 등도 분류상 공포 소설과 한 카테고리에 들어가겠지만 아무래도 결은 좀 다른 것 같다. 이 책 『소름이 돋는다』의 저자 배예람은 공포 소설 작가로서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고 한다. 독자도 공포 소설 작가라고 하니 저자의 이름을 들은 것 같다. 모 출판사에서 엔솔로지 소설집을 펴낼 때 배예람 작가가 글을 함께 실은 것 같다.

그런데 배예람 작가는 '겁이 많다'고 스스로 털어놓는다. 그런데 어떻게 공포 소설을 쓸 생각을 했고, 실제 공포 소설 작가가 되었을까? 혹시 엄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실 저자는 출판 관계자 몇몇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공포 영화 좋아하시겠네요?" 저자는 늘 같은 대답으로 위기를 넘긴다고 한다. "좋아하긴 하는데, 겁이 많아서 잘 못 봐요." 당연히 웃음 섞인 답이 돌아온단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진지하게 자신이 겁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지만 공포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에 애를 먹는다고 고백한다. 열변을 토하면 이야기가 점점 수렁으로 빠져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자들에게 되묻는다. '겁쟁이'와 '공포 애호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수식어인 걸까? 그렇지만 저자는 정말로 겁이 많고 또 호러라는 장르를 좋아한다고 한다. 양립할 수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공포 소설을 쓰고 있으니 고개가 갸우뚱거린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공포 소설이 아니다. 공포 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경향, 그리고 공포 소설의 세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주로 풀어 쓴 에세이다. 간혹 겁쟁이면서 공포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던지는 힐난조의 말 "모르는 사람들은 ‘어차피 눈 감고 있을 거면서 돈 아깝게 왜 자꾸 공포영화를 보고 싶어 하느냐."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 괴담을 읽지 마라." 핀잔을 준다. 힐난이든 핀잔이든 저자는 겁쟁이 호러 애호가 편에 선다. 겁쟁이들은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대변도 한다. “겁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오고 심장이 뜨거워지며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하고 즐거운지 말이다.”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겁쟁이의 삶이란 이토록 모순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할 필요가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저자의 겁쟁이의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오래전 일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 집 거실에 밤마다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 정체 모를 형체의 첫 발견자였다고 한다. 편의상 '귀신'이라고 한다며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에 따르면 초등학생 때 귀신을 처음 만났다.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거실에서, 소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를 똑똑히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파가 움푹 들어간 자리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것뿐이며, 내일이면 소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겁에 질린 가운데서도 뇌가 의외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했던 듯하다. 하지만 다음 날 밤에도 귀신은 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자에게는 그 모습이 성인 여성이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이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밤마다 화장실에 가는 저자를 쳐다보곤 했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설명할 것도 없이 허무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학에 갈 때까지 그 집에서 자랐다. 귀신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밤늦게 화장실에 가다 말고 이유 모를 충동에 이끌려 거실을 돌아본 적도 종종 있었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여전히 저자는 그가 정말 귀신이었는지 어둠에 겁먹은 초등학생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저자가 인생 처음으로 '진짜' 공포를 마주한 순간이었지만, 당시 단순한 공포를 뛰어넘어 다양한 감정을 맛보았다고 밝힌다. 자신이 보고 있는 존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진짜 귀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바람. 하필 왜 자신의 집에 나타난 건지, 왜 항상 움직이지 않고 소파에 앉아만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고도 한다. 용기 내서 귀신 옆에 앉은 건 나름의 소통을 해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겁쟁이는 아닌 듯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저자는 공포 추억 하나를 더 풀어놓는다.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순간을 미묘하게 즐겼던 기억은 이뿐만 아니다. '소파 귀신'을 만나기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아동용 애니메이션 〈꼬마 펭귄 핑구〉를 보았을 때라고 한다. 〈꼬마 펭귄 핑구〉는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팽귄 '핑구'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글루에 사는 핑구 가족의 일상을 다룬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란다. 독자는 본 적이 없지만. 푹신해 보이는 클레이의 질감과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목소리가 일품이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그 당시 저자 또래 친구들은 모두 핑구를 보았고, 저자 역시 핑구의 열렬한 애청자 중 한 명이었다고. 그중에서도 저자가 가장 좋아했고 여러 번 돌려본 에피소드는 '핑구의 악몽' 편이라고 한다.

 


 

저자가 당시 '핑구의 악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어린아이 중 하나였다. 소소하고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한 일상을 보내던 핑구의 꿈속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다니! 일일이 저자의 말을 전부 여기에 적을 수 없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압축해 보면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애니메이선에서 주인공이 꿈을 꾸었는데 포식자로서 바다표범이 보여준 짙은 갈색 피부 위에서 번득이는 거대한 눈, 빗자루처럼 꽂힌 수염 아래로 빼곡히 자리 잡은 이빨들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해 아마 저자의 기억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등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처럼 어린 시절 한밤중에 거실 소파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검은 형체, 오프라인 공포 체험에서 나를 소스라치게 했던 귀신(?) 등 일상 속에서 소름 돋는 감각을 느꼈던 경험을 이 책에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2000년대 초 우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빨간 마스크 괴담도 어김없이 저자의 기억속에 각인돼 있고. 그즈음 ‘엽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쏟아져 나왔던 공포 플래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독자도 향수가 느껴진다.

이 책은 으스스하고 음산한 소리를 흘리며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괴담들과 호러 문학, 공포영화, 공포 게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호러 콘텐츠를 나름의 기준으로 정리해 나간다. 하우스 호러, 각종 괴생명체가 등장하는 크리처물과 좀비물, 고어 호러, 스페이스 호러, 시선과 물의 이미지를 활용한 공포 콘텐츠 등 주제별로 세분하여 분석하고 있어 호러 장르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비교적 새로이 등장한 규칙 괴담이라는 장르를 다루는 편에서는 호러 소설가인 작가가 직접 쓴 규칙 괴담도 에피소드처럼 한 편 담겨 있다. 관심 독자는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먼저 읽은 독자로서 권유한다. 많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저자가 소설가라서 그런지 스토리텔링이 굉장하다는 느낌을 독자는 받는다. 처음 소개한 '소파 귀신'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이후 호러를 분류하는 데서도 독자로서는 처음 듣는 단어들도 많은데 저자는 누구나 잘 아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을 동원해 대입시켜 설명한다. 흥미롭고 이해가 제대로 된다. 독자들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읽고 싶은 호러 소설, 보고 싶은 공포영화, 플레이하고 싶은 공포 게임 등 각종 호러 콘텐츠 위시 리스트가 마음속에 가득 쌓일 것으로 믿는다. 놀이공원 귀신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소리를 꽥꽥 질러서 함께 간 친구가 다른 손님들에게 사과하게 만들지만, 팔다리 수십 개 달린 괴물 앞에서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탄성을 지른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아아, 너무 멋지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군말 없이 또 가서 즐긴다. 놀라움과 소름이 돋고, 숨도 헉헉거리게 되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우리의 그런 모순적인 모습을 타박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호러 마니아’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다.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정해서도 안 된다.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괴물의 위용이 얼마나 멋졌는지 신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모습은 조금 버릇없는 표현이지만 귀엽다. 그러면서도 호러 장르를 진지한 자세로 대하는 모습은 그 좋아하는 감정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고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독자는 감히 추정한다.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누명까지 쓴 여성이 원귀가 되어 사또에게 해원(解?)을 부탁하였다는 아랑 설화. 이 이야기는 시대를 거듭하며 변천했고 그때마다 그 메시지 또한 변화하였다. 이 책은 아랑 설화의 변천을 되짚어가며 왜 귀신은 항상 여자였을지 궁금해하며 우리가 무서워하는 대상에 대하여 고민한다.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 이후 또래 사이에 돌았던 괴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깊이 반성하며 진지하게 질문한다.

 


 

‘우리가 진정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한 일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책임감이 따르는 법이니까.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좋아하는 마음의 또 다른 형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상적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그 모든 범죄와 사건이 그저 괴담으로 남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상에서,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모두가 안전한 가운데 괴담을 읽으며 소름이 돋는 감각을 즐기고 싶다. 늦은 밤에 아무 걱정 없이 거리를 거닐고, 뒤따라오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며 걷고, 편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다. 뉴스에서 끔찍한 범죄 소식이 흘러나올 때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기를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괴담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겁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괴담 속 일들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덜덜 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p.165) - 「10. 사실은 사람이 제일 무서워」 중에서

 

저자 : 배예람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내일 무엇을 쓸지 상상만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독한 게으름뱅이. 게으름을 이겨 내고 한 줄이라도 쓰는 것이 매일매일의 목표. 2019년 안전가옥 앤솔로지 『대스타』에 수록된 「스타 이즈 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안온북스 ‘내러티브온’ 소설 편 『왜가리 클럽』에 수록된 「인어의 시간」을,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엔조이 시티전(傳)」을 썼다. 오래오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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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비가 사랑한 책들 - 소더비 경매에서 찾은 11편의 책과 고문서 이야기
김유석 지음 / 틈새책방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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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비' 하면 '경매 회사'라고 자동 연상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별로 독자의 기억에 없다. 경매에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르는 데다, 경매 현장에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다. 그런데도 소더비가 독자의 기억 속에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 뉴스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리라. 특히 유명 화가의 그림 〈OOO〉이 사상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을 때는 꽤 비중 있는 뉴스로 전 세계로 타전되는 탓에 관심이 갔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뉴스나 독자나 '최고 경매가'에 관심이 더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사실 크게 놀랐다. 그림 한 점에 몇 백억 원이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몇 백억 원'이라는 것도 지금은 큰 뉴스거리도 안 된다. 수천 억 원을 기록하는 시대이니... 돈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인류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에 아는 대로 말해 보라고 요구받는다면 선뜻 예술 작품을 꼽는 경우는 독자도 자주 접해봤다. 그러나 화폐 가치로 계산하니 영 실감이 안 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세계의 걸작이라고 하더라도 그림 한 점을 수천억 원을 주고 샀다면 과연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집에 걸어놓고 감상한다면 하루가 달라질까? 아니면 안 좋은 기분을 좋은 기분으로 바꾸어 줄까? 별별 생각이 들지만 "돈이 너무 많아 쓸 데가 없구만" 하고 일축하고 만다.

재산 가치로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천억 원씩 투자해 갖고 있을 가치가 있을까? 아, 돈이 필요할 때 되팔면 되겠구나... 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돈 버는 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될 경우 과연 그림의 가치를 화페로 누가 환산하는 것일까? 경매의 의미도 제대로 모른 독자에게 이 책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은 소더비 회사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그동안 소더비가 경매에 올려 팔렸던 고가의 상품 목록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문서가 남아 있는 것을 단순히 가치로만 평가가 가능할까 하는 새로운 숙제를 독자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김유석은 세계 최고의 경매 회사로 손꼽히는 소더비(Sotheby’s)에서 거래된 책과 고문서에 얽힌 이야기를 추적한다. 소더비는 크리스티와 함께 세계 경매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소더비는 미술품, 크리스티는 보석류가 유명하다. 특히 소더비는 경매 역사에 남을 마케팅을 통해 최고의 미술품 경매 회사로 거듭났다. 지금 우리가 고가의 미술품 경매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모두 소더비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명사들이 이브닝 파티를 즐기며 경매에 참여하는 모습들 말이다. 하지만 소더비의 근본이자 진가는 책과 고문서 경매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1744년에 설립된 소더비는 원래 책 경매에서 시작한 회사다. 그래서 책과 고문서에 관한 이름난 경매들은 대부분 소더비의 몫이었다. 서구에서 고서적이나 문서 경매의 대명사는 소더비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소더비의 역사를 장식한 책과 고문서 경매들 중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은 소더비의 역사와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을 소개하는 글로 시작해, 크게 세 파트로 소더비의 역사를 장식한 경매들을 소개한다. 모두 3개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1부 〈희소성이라는 보물〉, 2부 〈신에게 바치다〉, 3부 〈세상을 바꾸다〉 등이다. 1부는 희소성이 만들어지는 서사에 관한 내용이다. 1장(章) 「황제 나폴레옹의 마지막 흔적이 담긴 책을 찾아서」에서는 황제 나폴레옹의 메모를 찾아 경매에 뛰어든 영국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2장 「‘문화 전쟁’을 야기한, 단테가 쓰고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 이야기다. 보티첼리가 『신곡』에 그린 그림을 두고 영국과 독일이 벌인 자존심 싸움을 소개한다. 3장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책에 따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유일무이한 원본에 숨겨진 비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당연히 원작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루이스 캐럴이 직접 손으로 쓰고 삽화를 그려 만든 『땅속 나라의 앨리스』다. 하나하나 손수 써 내려간 글과 서툴지만 꼼꼼하게 채색까지 되어 있는 삽화들. 이 책의 맨 앞 장에는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채색한 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어느 여름날을 추억하며, 사랑하는 아이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A Christmas Gift to a Dear Child in Memory of a Summer Day).) 이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초판본이 나오기 약 1년 전, 루이스 캐럴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 한 소녀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그리고 소더비에 등장한 이는 바로 캐럴에게 직접 선물받은 소녀였던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1852~1934) 자신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경매장에는 전쟁터 같은 긴장감이 흘렀을 것이다. 낙찰 금액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로젠바흐 박사라는 한 미국인 수집가에게 1만5,400파운드, 한화로는 약 18억 원이라는 경이로운 금액이다.

 


 

희소성을 다룬 이 파트에서는 단테의 『신곡』 이야기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단테가 쓰고 보티첼리가 그린 삽화가 들어간 책이라면 기존 다른 경매품에 비해 굉장한 가치를 가질 만하다는 생각이 경매 문외한인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이전 문제도 확인되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보티첼리와 단테가 친했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한 단테와 보티첼리가 친분 관계가 있었을 것은 추정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더비 전시회에 참석한 한 학생이 전시회 해설사에게 물어 듣게 된 답변을 저자가 옆에서 함께 들었다는 것. 그 해설사는 "사실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고 전제하고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지만 보티첼리는 단테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했고, 마치 자신의 이루지 못한 이야기와 동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신곡』에 삽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는 설명이다. 『신곡』에서의 단테의 사랑 이야기가 보티첼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단테는 다른 여타 귀족 가문들이 그렇듯 관습에 따라 13세의 어린 나이에 당시 피렌체의 유력 가문의 딸과 약혼했고, 9년 후인 1286년에 그녀와 혼인했다. 그러나 단테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따라 방문한 은행가의 집에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를 만난 것이다. 첫눈에 반했던가, 그녀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보티첼리 역시 비슷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보티첼리는 자신의 영원한 마돈나였던 시모네타 베스푸치(1453~1476)가 있었다. 제노아의 카타네오라는 유력 가문에서 태어난 세모네타는 베스푸치 가문의 마르코와 결혼하기 위해 피렌체로 왔고, 그때 보티첼리의 눈에 띄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결국은 그리워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2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사랑의 서사는 단테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런 일로 단테의 『신곡』에 삽화를 그려넣은 이유가 됐다니 그들의 예술혼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사회적 관습이나 문화와 사랑 가운데 고통을 당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을 듯하다.

 


 

두 번째 파트 4장 「프랑스 왕국의 첫 여왕이 될 뻔한 여인의 책, 『잔 드 나바르의 기도서』」에서는 유럽에서 기독교 문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책과 문서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희대의 간통 사건에서 시작된 막장 드라마가 프랑스의 여왕이 될 뻔했던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 주는 『잔 드 나바르의 기도서』, 5장 「신의 소명으로 완성한 미국 최초의 인쇄물, 『베이 시편집』」은 신의 소명을 받아 미국으로 인쇄기를 들고 건너가 최초의 책을 찍어 낸 일화를 다룬다. 6장 「‘마지막 연금술사’ 아이작 뉴턴의 노트」는 과학자 뉴턴이 아닌 연금술사이자 신학자의 면모를 밝혀낸 불에 탄 노트에 관한 이야기다. 7장 「구텐베르크의 사업가적 집념이 담긴 『성경』과 〈면죄부〉」는 구텐베르크가 찍어 낸 〈면죄부〉가 종교 개혁까지 이어졌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는 종교와 신앙이 역사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세 번째 파트는 '세상을 바꾼 문서'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문서들이 실제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보물이어야 할 〈마그나카르타〉를 영국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미국, 2021년 소더비 경매에서 4,317만 3,000달러(약 500억 원)의 경매가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문서가 된 미국의 〈헌법〉 사본, 〈노예 해방 선언문〉에 대한 링컨의 진의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마오쩌둥이 영국 노동당 당수에게 보낸 편지의 수수께끼를 끈질기게 추척해 풀어내는 부분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소더비가 주목한 11개의 경매는 인류가 만들어 낸 기록 문화가 어떻게 세상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가치가 어찌 부여되는지 보여 준다. 역사적으로도 경매 회사나 경매 응찰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많은 생각거리까지 던져주는 셈이다. 책과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물론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소더비를 통해 문서와 책들은 텍스트와 텍스트의 가치와 존재에서 엄청난 역사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경매 회사가 국내 언론에 소개될 때는 보통 유명 미술품이나 보석류의 최고가가 경신되었을 때라고 저자는 밝힌다. ‘고흐의 작품이 얼마에 낙찰되어 최고가를 경신했고, 이전 최고 기록은 얼마였다’는 식의 기사다. 그런데 경매에 관한 이런 기사들을 보면 궁금해진다. 인류의 문화유산급인 작품들이니 비싸다곤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가치는 보편적인 것일까. 저자도 앞서 독자가 언급한 의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답을 주려 한다.

예를 들어보자. 영국인들과 미국인 중 누가 더 〈마그나카르타〉를 소중하게 여길까. 소중함의 척도를 가격으로 삼는다면, 미국이 승자가 될 것이다. 영국에서 〈마그나카르타〉는 잊혀진 문서였지만 이를 발굴해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삼은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경매에 올라온 적이 없는 이 문서는 미국에서 미국인에 의해 2,130달러라는 가격이 매겨졌다. 즉 〈마그나카르타〉는 미국인들에게 더욱 가치가 있는 종잇조각이라는 의미다.

소더비와 같은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 중 눈길을 끄는 것들은 희소성과 함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서사를 담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유명인이 소장했거나 손길이 묻은 물건, 역사적인 사건에 연루된 물건, 최초로 만들어진 물건에 담긴 사연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곧 물건에 담긴 시간과 역사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 책 『소더비가 사랑한 책들』은 바로 물건에 담긴 역사, 그중에서도 책이나 문서들에 얽힌 사연을 추적하는, 텍스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소더비의 경매품 중 책과 문서들을 선택한 이유는, 소더비가 원래 책 경매로 시작된 회사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고서나 고문서 경매라면 소더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만큼 중요한 경매, 역사적인 경매가 많았다. 황재 나폴레옹의 서재, 보티첼리가 삽화를 그린 유일무이한 『신곡』,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일컬어지는 『잔 드 나바르의 기도서』, 구텐베르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찍어낸 『성경』과 〈마그나카르타〉, 미국 〈헌법〉, 〈노예 해방 선언문〉 같은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문서들까지, 소더비는 인류의 기록 문화의 정수를 거래하는 장터였다.

이 장터는 인류가 쓰고 기록한 것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를 부여받은 물건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문명의 발전은 옛것들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게 되면서일지 모른다. 옛것들 중에서도 책과 문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서 머물렀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오래된 책과 문서를 뒤적이는 일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의 지도를 펼치는 일과 같다. 이 책은 그 작업 중 일부를 들춰내 텍스트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곰팡내 나는 물건들에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소더비가 경매에 올린 물건에 얽힌 작은 역사들은 우리 문명이 닿아 있는 곳을 찾아가는 추적기다. 책과 역사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이 추적기는 지적인 즐거움과 역사를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김유석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네이버에 ‘뜻밖의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역사 칼럼을 연재했고, 현재는 영국에 머물며 일상 속 역사적 소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역사 이야기를 쓰는 게 목표다. 저서로는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2017), 《Q&A 세계사: 서양사편》(2010)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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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참 멋있다 - 당신에게 남기는 첫 번째 댓글
김현 지음, 줄리아 조 그림 / 스토리텔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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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는 이 책 『당신 참 멋있다』의 저자 김현을 처음 만난다. 일면식도 없는데 책을 통해 독자와 저자로 만났지만 '참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글을 잘 쓰는지, 아니면 잘생겼는지, 그렇잖으면 매너 좋은 신사 스타일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글 몇 편과 〈작가의 말〉을 통해 그는 멋있는 사람이란 확신이 든다. 출판사 측을 통해 내놓은 〈작가의 말〉에 “거리를 걷다가 들려오는 노래 한 곡에 한참을 멈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긴 적이 있었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였다. 늘 들었고 좋아하는 노래였지만, 새삼 걸음을 멈추게 했던 아름다운 선율과 인생을 관통하는 가사에 나도 그러한 ‘인생작’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썼다. 이른바 '인생 노래'도 밝힌다. 영화 〈비열한 거리〉(2006)의 OST로도 사용한 곡이다. 가사 일부를 인용한다.

 

내 눈이 볼 수 있을 때까지

날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들이 있어

내가 떠날때 쯤에, 네가 알아줬으면 해

난 내 가장 속에 있는 얘기를 너와 함께 했고 너는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와줬어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고 현명해진 순간에는

쓰디쓴 말들은 내겐 별 의미가 없어지더라

가을 바람은 나를 향해 불겠지

그러고는 점차 시간에 묻혀갈거야

그것들이 나에게 너를 아냐고 묻거든 너는 내 하나뿐인 친구였다고 웃으며 말할 거야

그러면 내 눈가에서 슬픔은 사라지겠지

 


 

독자가 최근의 읽은 책 중의 하나인 『음악은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가』는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른바 '인생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노래가 어떻게 인생 노래가 되었나? 어떤 노래가 인생 노래가 되려면 '네 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며 네 박자의 조건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결정적 시기다. 남들이 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 순간에 어떤 음악을 만났다면 그 음악은 잊지 못할 노래로 남는다. 그러나 특별한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 노래를 만나는 결정적 시기는 엇비슷하다고 말한다.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결정되는 시기도, 정치적 성향이 확립되는 시기도, 그리고 인생 노래가 각인되는 시기도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시기, 즉 투표권이 생길 때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 때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 노래가 결정되는 시기는 언제일까? 저자는 최고의 시기를 빛나게 해준 순간이어었거나 반대로 최악의 순간에 위로받았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한다.

기나긴 줄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더라도 꼭 먹고 싶은 맛집, 휴가 때 방문하리라 마음먹은 SNS 명소, 언제든 들을 수 있는 세계 각국의 노래, OTT로 골라볼 수 있는 높은 평점의 영화들. 삶의 여력이야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소비의 삶은 평행에 가까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에 반해 일상에서 쉼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사람들은 마치 밀물과 썰물 같다. 그런 우리 인생에서 엔딩은 멀고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려면 비상은 필요하다. 세상은 복잡하고 관계는 위태롭고 평평하지 않다.

 


 

그렇게 문득 기우뚱해졌을 때 이 책 『당신 참 멋있다』를 한 권 내밀어보면 이 책이 가진 위로의 힘을 충분히 실감할 것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잔잔하고 평평한 파동과 그 물결에 실린 위로가 이 책에는 가득 차 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로, 또 우리가 흔히 겪는 감정의 적절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에겐 ‘시절 인연’이 있고, ‘시절 음악’이 있다. 앞으로도 시절 따라 변함없이 나타날 테고 분명 추억의 한 장면으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다. 이 책의 구절들이 ‘시절 인연’과 ‘시절 음악’과 함께 ‘시절 구절’이 되기를 저자는 바란다. 그 시절, 그날, 그 시간의 구절을 남기고 또 되뇌고 싶은 독자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느끼라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시간이 하락할 때 부담 없이 들춰볼 수 있는 페이지들이 되었으면 하면서. ‘신파’이거나 ‘참신’하거나 관계없이 가슴 짠해지게 말이다.

 

우리 사는 동안에 무수한 인연 중에 단 하나가 되었으니

헛된 꿈을 꾸기보다 살고 있는 이야기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고

네 탓 내 탓 하기보다 우리 함께 해결하자며 진실로 위로해 주고

힘이 들어 흔들릴 때 튼튼하고 촘촘하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밉더라도 티 내지 말고 싸우더라도 먼저 손 내밀며 마주 앉아 속내 터놓고

한순간의 틈이 굳건한 바위를 쪼개지 않도록 믿음을 거스르지 말며

오늘 울어도 같이 울고 내일 웃어도 같이 웃고 서로의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며

우리 사는 동안에 무조건 사랑하자.(p.118)

- 「우리 사는 동안에」 중에서

 


 

저자 김현은 〈프롤로그〉를 통해 "인생은 좋아하는 영화를 닮는다"고 말한다. 대세가 바뀌어 버림받은 스파이나 의리를 따르다 배신을 당해 최후를 맞는 갱스터, 주군에게 토사구팽을 당하는 최측근 공신. 그러한 일들은 너무나 현실에 기반한 사실이었음을 모진 세월을 겪으며 알 수 있었고 사랑 역시 그 시련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허구를 담은 영화로 보고 좋아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온 영화 같은 이야기들. 그래서 인생은 좋아하는 영화를 닮는다. 남루한 티셔츠에 닳은 운동화를 신고 쓰디쓴 소주 한 잔을 앞에 둔 채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겪어야 했으니 이젠 원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는 인생이 던진 수많은 시험과 시련에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지.

자랑스럽게 걸고 다녀야 할 전리품들이니까…….

살다 보면 사람이 참 우습고도 싫어질 때가 많지?

그런데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도 타격을 주지만 나 또한 타격을 받더라고.

우습게도 싫어하는 사람 생각하느라 정신 에너지랑 시간 허비하는 게 타격이고

삶의 질마저 떨어뜨리는 거지.

(중략)

그저 좋았으면 추억이고 나빴으면 경험이야.

아브라카다브라. 멋있게 살자고.(p.148~149)

- 「당신 참 멋있다」 중에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하나가 저자의 여린 마음이다. 여린 마음이라 세상의 상처를 누구보다 많이 받고, 많이 받다 면역력도 커졌다. 그래 이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씻어주고 치유해줄 자체 면역력을 가졌다. 슬픔과 고통, 괴로움과 좌절은 그렇게 저자의 면역력을 키웠으리라. 저자는 평소 독서를 할 때도 소심함이 드러나는 성격이었다. 〈에필로그〉를 통해 고백한다. '내일 하루 읽을 것이 있고 볼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때란 생각을 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추리소설이라도 딱 멈추고 내일을 위해 살짝 남겨둔다.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서 '너는 새까만 오지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는데 그 울림들이 삶에 큰 힘이 되는구나 여기기도 하는 때다고 자신의 성장을 풀어놓는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각오 대신 체념으로

하루하루 맞이하는 우리의 공허함.

힘내라는 말을 매일같이 다른 이에게 하면서

한 번쯤 힘차게 안아 주지 못하는 우리의 건조함.

진심이란 단어는 참 쉽게 쓰면서도

정작 그 마음은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무심함.

참을 수 없는 우리의 가벼움.(p.18)

- 「참을 수 없는 우리의 가벼움」 중에서

 


 

저자의 글은 책의 글 전편을 통해 하나의 사실로 수렴되고 있다. ‘당신 참 멋있다’이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들과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감성 글귀들을 보며 저자는 더는 같은 말을 하지 않는 참신한 글들을 쓰겠다 했었다.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톤으로 누군가 건넸던 한마디가 가슴에 유난히 남았던 기억처럼 휘발되지 않는 글들을 쓰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은 힘 나는 댓글 같은, 무심해 보여 전혀 뜻밖이었던 사람의 격려와 응원 같은 글들을 말이다. 그리고 댓글처럼 말하고 싶었다. ‘당신 참 멋있다’라고. 그 결심이 실현되고 있다.

 

잡초가 새싹과 꽃들이 서 있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 생각지 마라.

뿌리로부터 초록으로 먼저 깨어나 눈을 뜰 새싹과 피어날 꽃들을 품는,

봄이 봄답게 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잡초가 단풍잎과 은행잎이 누울 자리를 줄이는 것이라 생각지 마라.

뿌리로부터 힘차게 손에 손잡고 여름의 태풍과 폭우로부터 토양을 지켜 내

가을을 맞게 하는 고마운 배려를 지녔으니까.

억세고 하찮다고 막사는 인생 같다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마라.

잡초로 인해 더 귀하게 여겨지는 화려한 꽃들과 아름드리 뽐내는 나무들아,

잡초가 살아가는 낮은 자리까지 빼앗지는 마라.(p.161)

- 「잡초」 중에서

 


 

인생은 말줄임표처럼 신중히 침묵하고

인생은 물음표처럼 끝없이 질문하고

인생은 느낌표처럼 한없이 감탄하고

인생은 따옴표처럼 때로는 특별하고

인생은 쉼표처럼 가끔은 쉬어가야 하는 것.(p.63)

- 「인생」 중에서

 

저자 : 김현

 

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중에 ‘아동문예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쪽나라 아동문학상’을 수상했고, 동시집 《우리 둘이》와 《가위바위보》를 출간했다. 감성 시집 《너를 만난 이후에》, 《다음사랑》, 《그대를 만난 날 난 오늘과 같은 내일을 생각합니다》, 산문집으로는 《까까머리 바람났네》, 《사랑하니까 눈물이 난다》, 《고맙다 사랑, 그립다 그대》를 출간했다. 이 책들에 실린 사랑에 관한 글들은 오래도록 회자되고 유명 가수의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이번에 출간한 《당신 참 멋있다》는 작가의 흥미로운 인생 항해 일지이기도 하다.

 

그림 : 줄리아 조(Julia Cho)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 11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국내외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열린 여러 미술대회에서 입상하였다. 평소 감성적인 시와 에세이 읽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김현 작가의 《당신 참 멋있다》 글들에서 받은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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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울수록 풍요로운 삶
노혜령 지음 / 한사람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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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울수록 삶은 더 단순해지고 명료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가진 것에 감사하며 의연하게 살면 존재만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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