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수록 풍요로운 삶
노혜령 지음 / 한사람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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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비움'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교차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비우라는 말을 들을 때도 그렇고, 많이 살기 위해서 비우라는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덕담으로 들린다는데 왜 독자에게는 악담으로 들리는 걸까? 독자가 비움에 대해 들은 것도 스무 해가 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법정 스님이 생전에 '무소요'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무소유는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구도자 스님으로서는 당연한 가르침이라고만 생각했다. 소유하겠다는 생각은 욕심이고, 남보다 많이 갖고자 한다면 죄악이라고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속세든 구도자들이 사는 절이든 소유는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책을 읽었을 때 '무소유'의 본뜻에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 이상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됐다. 마침 다른 책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설명하실 때 후자의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줌으로써 더 이상의 의심은 필요없었다. 독자는 원래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 가진 것이 없지만 필요한 것까지 갖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면 더 이상 무소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는 것, 보이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마다 "남보다는 적은데 뭘?", "이 정도는 가져야 살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함도 인지하게 됐다. 생각이 조금 바뀌자 소유욕은 점점 커졌다. 나이 들어 결혼할 때쯤엔 '남보다 예쁜 배우자'를 찾게 되고,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자 내 자녀에게 이 정도 해주는 것은 과욕이 아니야, 당연한 의무지'라는 합리화도 더 심해졌다. 그리고 좌절이 올 때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뚜렷하게 다가왔다. 예전에 없던 돈 욕심도 자라나고, 먹을 것도 더 먹게 되고, 잠자리도 더 호화로워지기를 바랄 정도가 됐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가 살아온 삶이 그랬다고 고백한다. 법정 스님이 왜 무소유를 가르치셨는지 새삼 느꼈을 때는 많이 늦은 때였다. 생각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가진 후에는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 의무감도 없어졌고, 더 많이 벌어서 풍요롭게 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소유를 시작하면 돼, 어렵지만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조언도 들었다. 이 책 『비울수록 풍요로운 삶』의 의미도 선뜻 한눈에 안 들어온다. 두 번, 세 번 되뇌이고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독자는 이미 선을 넘는 욕심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란 것은 삶의 수단이란 핑계로 많을수록 좋다는 무한욕심을 갖게 하면서 커진다. 당초 작았을 때 잡지 않는다면 어쩌면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로 커질 수 있는 게 욕심이다. 책의 저자 노혜령은 '마음을 비울수록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의미로 쓴 것으로 읽힌다. “비운다는 것은 적게 소유하며 풍요롭게 사는 일이다.”

저자는 삶의 커다란 위기와 좌절이 찾아왔는데 우리가 지나온 2008 금융 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IMF 때는 독자도 직업에 이상이 생겼고 직접 어려움을 느꼈기에 잘 알지만 2008 금융 위기는 독자와 별 상관 없이 지나왔다. 때문인지 2008 금융 위기를 말하는 것을 들어도 별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저자는 남편의 사업이 흔들리고 타격을 받아 주거 보증금만 손에 쥔 채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고심 끝에 나 자신에게 내린 처방은 '삶을 단순화하라'는 것이었다"고 책의 〈여는 글〉을 통해 털어놓고 있다.(p.9) 그 질문은 저자에게 삶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됐고, 위기는 기회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낯선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비워내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할 의무감이 들었습니다."고 쓰고 있다. 적은 돈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는 '책'에서 구하는 답을 찾았다고 말한다. 과정이 많이 생략된 탓에 쉽게 답에 접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느낌이다.

 


 

요즘이야 심플 라이프(단순함), 비우는 삶(무소유) 등이 다시 떠오르고 삶의 이유로까지 부각되고 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교과서에나 나오는 현실 무시한 물정 모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저자처럼 가진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사실 글 몇 줄 읽었다고, 책 몇 권 읽었다고 비움이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 간단하다면 왜 구도자들이 비움의 실천을 강조하겠는가? 책의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저자는 말로 쓰는 것보다 경험으로 실천했던 것을 책의 주요 내용으로 적었다. 저자는 "단순한 삶을 선택하면 굳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독자의 경험에 비춰보더라도 사실적이다. 저자는 이로써 생활을 간결하게 만들어 적은 돈으로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그 기술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독자도 이젠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며 말 그대로 마음을 많이 비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생각도 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욕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돈을 버는 비결이 담긴 책이 아니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있는 자리에는 욕심 그 자체만으로도 자리는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다. 다른 무슨 행위도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관심 밖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간다면 어떤 욕심이 많은지 한 번 생각해볼 것을 독자로서 제안해본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든 옆에 세워놓고 비교해 볼 것을 권한다. 원래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한 다른 어떤 것을 채워도 선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독자의 경험으로 감히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많이 소유할수록 삶은 복잡해집니다. 진정한 부는 소유가 아닌 내면의 부입니다."(p.10)

 


 

이 책은 모두 4부로 이뤄져 있다. 1부 〈돈 걱정 없이 살기〉, 2부 〈집〉, 3부 〈음식〉, 4부 〈비움으로 채우는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원리는 돈을 굴러가면서 커지고,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자본이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되며, 모든 경제 행위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는 기업이 이윤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만큼 명백한 자본주의 원리이다. 그 안의 개인은 돈보다 더 큰 무게를 갖지 못하며 투자된 가치 이상의 돈을 벌어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인정된다. '돈의 노예'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는 사람 죽이는 일도 별 의식 없이 행하는 사람도 많이 나온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란 말도 나올 수 있는 이유다. 또 일부는 합리적인 일이라고도 한다. 돈을 벌어서 가치 있는 곳에 쓴다고 말이다. 저자는 돈의 가치를 사회적 통념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은 돈으로도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모순된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독자의 개념에도 딱 들어맞는다. 부의 척도를 '삶에 필요한 만큼 가진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래야 비로소 법정의 무소유 개념에 접근해 갈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필요없는 것을 갖지 말라였다는 의미라고 독자도 이해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저자는 2부와 3부에서 집과 음식을 등장시키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집은 뭔가? 집의 목적은 휴식과 치유 또는 자유의 공간이다. 추위와 더위 등 외부 환경이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그 전에는 집 지을 기술이 없어 동굴이나 나무 밑 등 비교적 안전한 공간에서 살았을 것이다. 이 집은 현대적 의미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원래 목적을 버리지 않았다. 원래 목적에 문명이 발달해 편리함이 추가됐을 뿐이다. 그런데 집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서 많은 것이 변했다. 아무리 사회가 변해도 집의 원래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

 


 

3부 음식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움직이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몸에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에너지가 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다. 그런데 부가 쌓이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부자들은 쓸 데가 별로 없다. 그러니 먹는 것에 많은 돈을 들인다. 이른바 '맛있는 것'을 찾아 지나치게 먹는 것이다. '탐식'이다. 원래 인간 세상에는 탐식만 없으면 먹는 것이 인간에 골고루 돌아만 간다면 굶는 사람 없이 삶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는 먹을 것이 남아 버리는데도 굶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심지어는 굶어죽는 사람도 많다.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들도 과식은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한다. 과식은 만병의 근원이라고도 한다. 무절제한 식습관은 몸을 상하게 할 뿐 자신의 건강에 결코 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고단백 저칼로리로 일정 기간 문제가 안 되지만 지속할 경우 그것도 병이 된다고 한다. 또 과식 습관은 포만감 부족으로 계속 과식하는 습관으로 굳어질 경우 각종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신체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신적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의사들은 경고하고 있다. 굳이 단식이나 식이요법 등을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잘 알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책의 제목에 딱 맞게 욕심에 대해 지나침이 없게 하라는 교훈서라고 읽어도 어색할 게 없다.

저자 : 노혜령

 

미니멀라이프 8년 차 주부로 금융위기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단순한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서와 재테크에 몰두하며,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면서 적은 것으로도 부족함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적게 소유해도 만족할 수 있고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물건을 비울수록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짐을, 식탐을 비울수록 몸과 마음이 건강해짐을 체험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알게 된 ‘비움’이라는 단순한 철학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 지금도 그녀는 살림을 간소화해 효율적으로 일하고 여가를 즐기며 사는 방법을 생각한다. 풍요로움은 소유보다 존재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하며 텃밭 가꾸기,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행복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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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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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니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참이다. 독자가 장요세파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화가의 작품세계와 삶, 성과 속, 소박함과 화려함의 경계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이 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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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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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세파 수녀의 전작 『그림이 기도가 될 때』를 읽은 적 있다. 『그림이~ 』는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독자가 그림을 잘 알거나 장요세파 수녀의 뛰어난 감상평 때문이 아니다. 그림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매우 평온해서다. 그림을 대하는 마음 자체가 감정이 실려 있다면 제대로 감상을 하거나 감상의 느낌을 글로 옮기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독자는 그림을 좋아할 뿐, 그림을 그린 적도 없고, 따로 배운 적도 없다. 그래도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올라오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이고 평온하게 해주어서 자주 그림을 들여다보게 된다. 저자 장요세파 수녀에게 그림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니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참이다. 독자가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모든 뛰어난 작품에는 한 시대의 모습뿐만 아니라, 시대를 관통해도 변함없는 우리 삶의 진실이 들어 있다고 한다. 화가도, 비평가도, 또 그림을 잘 아는 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인류의 문화적 정보가 한 장으로 압축된 것이 곧 그림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에서 그림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이라는 압축파일을 제대로 풀어내 봐야 한다고 말한. 미술관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똑같은 그림이라도 안내자가 곁에 있을 때 감상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은 그래서일 테다. 『그림이 기도가 될 때』,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 등, 최근 몇 년 사이에만 벌써 여러 권의 그림 묵상 책을 펴낸 요세파 수녀는 이 책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에서도 회색빛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의 마음의 창을 지치지 않고 두드리는 중이다.

 


 

'창을 두드린다'는 저자의 설명에도 공감한다. 저자는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이라는 〈머리말〉을 통해 "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무언가 비밀스럽고 두 사람만의 오고 감이 있을 것 같고, 따뜻함과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창을 두드린다는 말을 들을 때 다가오는 첫 장면은 연인들 사이의 그 애틋함,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절박함, 가족들의 반대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사랑의 간절함 앞에 마주서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저자 자신이 그림을 볼 때, 반대로 그림이 저자의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는 연결되는 순간이다. 만일 벗이 일부러 문을 통하지 않고 창을 두드린다면 무슨 재밌는 일이 있을지 살짝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벗과 걸어온 그 여정과 이제 막 일어날 조금은 흥미진진한 일 앞에서 삶의 일상성이 살짝 한 단계 올라가는 긴장의 에스컬레이터가 펼쳐지는 순간임을 고백한다. 벗이나 연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혹시 귀여운 옆집 아이가 놀러 온다면, 그리고 나무통을 밟고 올라서 방을 두드린다면 또 다른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어쨌든 창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렇게 저자 장요세파 수녀에게는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설명하고 있다. 수도자인 수녀로서는 하느님 혹은 예수님이 늘 창을 두드리는 분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두드리는 일은 수녀로서 당연하겠지만, 또 하나의 창을 두드리는 행위를 하는 이는 누굴까? 저자는 단연 '그림'을 꼽고 있다. 지치거나 나태해지거나 삶에서 열정이 식어버릴 위험에 처할 때 그림은 늘 저자의 창을 두드린다고 털어놓는다. 하느님이나 예수님에게 기도 드리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 할 때는 그림을 본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뜨거움이 부글거리거나 냉기가 싸아 하니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피울 때에도 그림은 저자의 마음에 평화의 강물이 초원 위 풀잎 사이를 흐르듯, 숲속 안개처럼 고요함이 찾아오듯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전작 『그림이 기도가 될 때』에서 저자는 그림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림과 기도를 동일시했다. '동일시'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에 '공감'으로 바꾸어야 할 듯하다. “그림 앞에 서면 눈이 환해집니다. 침침했던 눈에서 무엇인가 걷히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림은 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제 몸이 무거워 들어가지 못했던 신비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생명, 자유, 용서, 사랑, 초월적인 것,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은 가만히 있는 저를 잡아당겨 세웁니다. 우선 화가의 삶이 그 안에 녹아 있고, 더 들어가면 화가 자신마저 넘어 저 먼 어떤 것, 인간의 눈에 희미한 어떤 것 혹은 실재가 우리 앞에 턱 놓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설픈 종교체험보다 훨씬 강렬하게 인간을 초월적 실재 앞에 놓아줍니다. 더욱이 형식적인 예배, 틀에 박힌 기복적 기도로는 가까이 가보지도 못할 세계를 열어줍니다."

저자의 그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이 책을 통해 한층 엄그레이드 됨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저자는 화가의 작품에 담긴 내면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한 작품은 실로 화가에게 하나의 세계와 같다. 작품이라는 세계 안에서 화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며, 화가의 어떠한 고뇌가 그러한 세계를 창조해냈는지를 저자 요세파 수녀는 추적해간다. 독자는 요세파 수녀의 글을 따라가며 좀 더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림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이해하고, 마침내 작가가 꿈꾸던 하나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수도자인 저자에게 그림 읽기는 기도행위와 일치한다고 독자가 이미 간파했다.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성과 속, 소박함과 화려함 등 인간이 그어 놓은 모든 경계를 넘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물이 조화롭게 아우러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장요세파 수녀의 그림 읽기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이기도 하다. 이 책이 환경파괴와 인간성 파괴를 동반하는, 위기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는 까닭도 된다. 요세파 수녀가 그림 읽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건네고자 하는 메시지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문화적 지식의 축적 이상으로 삶을 바라보는 신선하고도 예민한 지혜와 통찰이 담긴 책이다. 저자의 그림 읽기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더 깊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에게 그림은 더 많은 것을 품고 마음을 더 깊게 두드려주는 매개 역할을 해준다. 그림이라는 수단은 눈을 통해 마음의 창을 두드려준다. 요세파 수녀는 그림 이야기를 통해 평면적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더욱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초대한다. 또한 우리가 미처 못 보았던 것들을 들여다보게 하고, 우리가 넋 놓고 당연하게 바라보았던 사물과 풍경을 달리 보게 한다. 어찌 저자의 글을 안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공감과 감동이 빠질 수 있겠는가?

독자로서는 그림을 통해 어떻게 이처럼 풍성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지 저자의 능력에 놀랍기만 하다. 거기에는 요세파 수녀의 글이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맥이 있다고 이해된다. 그림을 지식의 관점이 아닌 지혜의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점이다. 그림이 저자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 그림과 저자의 대화를 엿듣다가 깊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하찮게 여기던 것들과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며,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준다.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것만큼 위로와 치유를 안겨주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는 현대문명의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카스피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보기에 따라 호연지기를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선 인간의 모습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오만한 의지를 엿본다. 저자는 개인 내면의 성찰과 문명 비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이어진다고 얘기하며,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서야 할 인간상을 그려내길 갈망한다.

저자는 그림이 화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손가락과도 같다고 한다, 그림이라는 창 안에서 화가 자신의 고통과 기쁨, 삶의 질곡과 환희, 승리와 패배의 모든 역동성은 어우러지고 상징으로 버무려져 관찰자에게 참으로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저자는 자신의 창을 두드리는 그 손가락들을 함께 나눌 기쁨과 설렘, 긴장이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한다고 고백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화가의 생애나 삶 또한 마음의 창을 두드리는 손가락들이다. 수많은 화가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 삶의 깊은 계곡에서 그들이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건져 올리며, 요세파 수녀는 그들이 품었던 그 깊은 울림을 번뜩이는 통찰과 함께 전해준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었던 아름다움, 두려움, 평화, 혼돈마저 우리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

누구보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였던 탄광촌 광부들에게 애정을 가졌던, 열정의 사나이 고흐는 광부들과 함께하다가 깊은 좌절을 맛본다. 하지만 그 좌절이 그를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이끈다. 살아생전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아보지 못한 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며 생계를 이었던 이 가난한 화가는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방탕한 삶을 이어가다가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 카라바조는 인간적인 약점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의 약함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회심의 명작을 탄생시켰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화가와 그림이 혼연일체된 경지를 그려냄으로써, 그림 하나 안에서 화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다. 「한 사람 여기, '자기 잊음'과 '자기 비움' 사이」란 제목의 글에서 작가 에른스트 바를라흐(1870~1930)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짐을 느낀다고 말한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렁거리며 낮은 노랫가락이 흘러 나올 것 같다고 한다. 실제 이 자세를 취해보면 마음이 한껏 가라앉으면서 눈이 감긴다고도 한다. 이 조각상의 모습은 어떤 해석이나 분석에 앞서 마치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는 양 그냥 사람 안으로 슥 들어와버린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 삶 안의 다른 것은 뒤로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자신마저도 잊어버리고 함께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고 덧붙인다. 자신마저 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을 잊어도 될까? 잊을 수나 있는 것일까? 여러 개의 질문을 독자들과 스스로에게게 던진다. 그리고 "한마디로 표혅하자면 자신을 잊어야 참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하나의 표지라고 말한다. 저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기를 바라볼 때, 악기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절정에 달할 때를 생각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한다. 이 조각처럼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에 집중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잊었기에 생겨난 집중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열어준다고 나지막하게 전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잊음과 자기 비움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자신을 비우고 타인에게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채우고 또 채워도 모자라 더 긁어모으기를 온 인생 바쳐 찾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을 누르고라도 자신이 1등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자아는 얼마나 굳어 있겠느냐며 저자는 반문한다.

 


 

봉쇄수도원의 수도자인 저자에게 ‘그림 읽기’는 또한 지극히 간절한 신앙행위이자 구도의 과정이다. 세속의 사람이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성화는 글을 읽지 못하던 신자들에게 ‘성스러움’을 전하기 위해 발전되어, 그리스도교가 번성하던 시기에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성화는 직접적으로 성경 속 이야기를 전하지만, 요세파 수녀는 굳이 성화가 아니더라도 모든 그림 안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평소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다 헤아릴 만큼 늘 함께하는 하느님을 믿는다.

고된 노동 후에 국밥을 나누는 소박한 이웃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 밑바닥 인생의 거친 삶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다. 요세파 수녀가 그리는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원대해 모든 것을 온전히 꼭 안아준다. 기도이자 묵상이기도 한 그림 읽기는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영적 가치를 돌아보게 해준다. 이 책은 저자 요세파 수녀와 그림의 깊은 대화다. 독자는 처음에 엿듣는 심정으로 귀 기울이는 청자에서, 이내 직접 그림과 대화하는 화자로 변해갈 것이다. 그림과 함께 온갖 하소연을 나누며 치유와 위로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장요세파 수녀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 현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다. 지은 책으로 시집 『바람 따라 눕고 바람 따라 일어서며』와 그림 에세이 『수녀님, 서툰 그림읽기』, 『수녀님, 화백의 안경을 빌려 쓰다』, 『그림이 기도가 될 때』,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가 있다. 엄격한 수도회의 규율에 따라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해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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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아 타임스 - 외국인이 본 신기한 100년 전 우리나라
이돈수.배은영 지음, 토리아트 그림 / 제제의숲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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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조선과 대한 제국의 모습은 우리가 강국을 만들어야 후손들이 비참한 상황을 처하지 않을 것이란 경계심을 들게 해준다. 또 올바른 역사 인식 키우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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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아 타임스 - 외국인이 본 신기한 100년 전 우리나라
이돈수.배은영 지음, 토리아트 그림 / 제제의숲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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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간지 〈하퍼스 위클리〉 1898년 1월 15일자에 말을 타고 꼬레아를 유람한 사진 작가 W. H. 잭슨의 글이 실렸다. 제물포항으로 '꼬레아'에 들어간 잭슨은 항구의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조랑말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초가지붕을 올린 흙집이 줄지어 선 꼬레아의 마을과 거리를 지나가면서 마주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보며 꼬레아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도 했지요. 잭슨은 처음 본 꼬레아의 경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관은 다양하고 낭만적이었다. 산맥은 선이 굵어 아름답고 섬세한 푸른색과 보라색을 띤다. 만듦새도 조악하고 사용된 자재도 지저분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의 작은 집들조차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19세기 말 세계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졌던 작은 나라 꼬레아. 외국인들이 부르다 지금도 코리아로 정착된 우리나라의 이름이다. 꼬레아는 발음상 아무래도 불어나 스페인어 계통이 아니었을까? 신문과 잡지가 만들어져 머나먼 나라의 소식까지 다루었던 세계의 언론. 그 언론에서 다룬 조선 후기와 개화기,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를 세계 언론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그들에게 비친 우리나라 꼬레아의 모습은 어땠을까? 많지는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사를 남긴 언론이 있었다. 주로 우리에게 개항을 요구했던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이다. 이 책 『꼬레아 타임스』는 우리가 몰랐던 세계에서 회자된 우리나라의 모습과 역사를 보여 준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없던 아이뿐만 아니라 제대로 몰랐던 성인들도 이 책에서 얻을 것이 많다.

 


 

이 책은 이돈수, 배은영이 공동으로 썼다. 우리나라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면 무조건 구하고 봤던, 외국 자료에 실린 우리나라 자료 수집가인 저자의 고해상도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사료로서 가치도 높다. 또 책장만 넘기며 사진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고리타분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에 아이들에게 색다른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만 최초 공개되는 미공개 이미지는 물론, 희귀하거나 구하기 힘든 역사 자료도 적잖게 실려 있다. 독자가 꽤 오래 전에 『꼬레아, 꼬레아』란 체목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도 개화기, 대한제국의 시기,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는 100년의 역사를 중심으로 쓰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진 자료나 신문 기사 등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인지 사진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서 보는 사진 상당 부분이 독자로서는 처음 보는 사진이다. 독자가 그 시기의 우리나라 실상에 관심이 컸던 것이 아니기에 한 번 읽고 잊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아쉽다. 훌륭한 생각 자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특히 이 책은 사진뿐 아니라 사진과 기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도 많이 들어 있어 어린이들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더욱의 책의 맨 뒤에는 잘라 쓸 수 있게 만든 이미지 자료 부록까지 들어 있어 활용도 높은 소장용 책이라는 게 출판사 측의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람이나, 우리가 처음 본 서양 사람이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경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의 개화기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일제의 침략 의도가 노골화되는 시점이어서 외부인이나 외국인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그들에게는 더욱 냉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의 신문에 실린 글을 토대로 이 책에 실은 잭슨의 감상기는 적대적이지 않지만 매우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로 들어선 잭슨은 북새통을 이루는 사람들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언덕과 구릉, 유서 깊은 궁궐 앞을 지키고 있는 몇몇 군인을 보았다. 그리고 곧 내부대신(조선 후기 내무행정을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벼슬) 남정철을 만나 꼬레아 왕실에 들어가 따뜻한 샴페인과 달콤한 케이크를 대접받았다"고 공동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왕을 기다리는 동안 알현실과 경복궁의 흥미로운 사진 몇 장을 찍었고, 얼마 후 잭슨은 꼬레아의 왕과 세자를 만났다. 잭슨은 이렇게 신문에서 기술하고 있다.

"왕은 밝은색 천으로 덮인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탁자에 있는 두 개의 등유 램프가 방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왕은 키가 큰 내시들 옆이라 오히려 왜소해 보였으나, 대화를 시작하자 왕의 얼굴은 흥미와 지적 호기심으로 밝아졌다." (중략) 왕은 통역관을 통해서 많은 질문을 했는데, 특히 내가 꼬레아에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를 궁금해 하는 듯했다. (중략) 함께 자리한 세자는 얼굴이 둥글고 졸려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자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오가는 이야기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으며, 단답형의 대답 말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거나 짧게 대답하였다. 특별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 공손하게 왕을 알현한 후 절을 세 번 한 뒤에 뒷걸음으로 나왔다."(p.4~5)

잭슨은 남은 여정 동안 도와줄 안내자를 알렌 박사한데 소개받았는데, 박내원이라는 꼬레아인이었다. 이튿날 아침, 잭슨은 왕이 하사한 호랑이 가죽, 은 상자 등 다양하느 선물을 가지고 박내원과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책은 또 잭슨의 이후 일정을 쫓아가면서 몇 가지 사실을 더 기록한다. 서울과 원산(함경남도 남쪽)의 중간 지점에서는 쾌활한 성격의 어느 지방관의 대접을 받았다. 그 지방관은 잭슨에게 가진 것 중에서 최고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접해 주었고, 잭슨은 라이 위스키(미국과 캐나다에서 생산되는 위스키의 한 종류)로 답례했다. 여행의 후반부에 잭슨은 기사에서 꼬레아가 더욱 다양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소감을 밝혔다고 기록한다. 꼬레아 유람을 마친 잭슨의 마음은 원산의 잘 익은 논밭처럼 꼬레아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알알이 꽉 차 있었다고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책은 영국 런던 주간지 〈더 그래픽〉 기사를 발굴, 소개한다. 기사의 제목이 「이채로운 조선인의 모습」이었던 듯하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특이한 모자를 쓰는 나라다. 조선인 누구나 입는 길게 늘어뜨린 하얀 가운은 수의를 연상시켜 오싹함이 느껴진다. 책은 이 기사가 실린 날짜를 1909년 12월 4일자라고 밝힌다. 나라의 운명의 풍전등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리고 1909년이면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숨졌다. 12월의 시사라면 안중근 의사도 사형을 언도 받고 이미 숨졌을 때다. 〈더 그래픽〉은 사진 기자 톰 브라운이 작성한 기사를 사진과 실었던 듯하다. 지게를 메고 지팡이를 든 짐꾼, 아기를 업고 있는 낮은 신분의 여자, 수도인 한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고 하는 외국인을 둘러싼 조선 사람들, 열네 살의 어린 신랑, 가마꾼, 인력거꾼, 장옷을 쓴 여성, 등에 짐으 가득 실은 수소와 앞에 앉은 남자 등 조선을 여행하며 만난 다체로운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공동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특히 톰 브라운의 기사 일부 내용을 직접 인용해 여기에 적었다.

"말총으로 촘촘히 엮어 만든 뻣뻣하고 투명한 모자(갓)는 결혼한 남성이 쓴다. 우산처럼 쓰는 모자(삿갓)는 효과적으로 몸을 보호해 준다. 조선 사람 누구나 입는 길게 늘어뜨린 하얀 가운(두루마기)은 수의를 연상시켜 오싹함이 느껴진다."(p.11)

 


 

이 책은 파트나 장(章)의 구별 없이 각 사안에 대해 한 건씩 기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아마 여러 나라, 여러 신문에서 발굴, 발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빵과 잼을 처음 맛본 조선인」(p.14), 「조선의 민속놀이, 석전」(p.18), 「수도 나들이에 나선 상류 계층 여성」(p.22) 등으로 한 제목 당 한 건씩의 기사를 처리했다. 이를 테면 「빵과 잼을 처음 맛본 조선인」이라는 제목 밑에 '- 영국 런던 주간지 〈더 그래픽〉'이라고 적어 출처를 밝힌다. 다음 부제목처럼 '자, 이거 한 번 먹어 보세요.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푹신한 빵, 고소한 버터, 달콤한 잼, 처음 먹어 보는 신비로운 맛에 홀딱 반할 거예요'라고 적고 있다. 기사 본문은 다음 이렇게 쓰여 있다.

"1888년 12월 22일자 영국 런던 주간지 〈더 그래픽〉에는 난생처음 빵과 버터와 잼을 맛본 조선 사람들의 모습과 외국인이 건네는 담배를 집는 조선인의 모습이 실렸다.(어린이들이 읽을 것을 대비해 존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 서평에서는 존칭 생략) 이 기사에 실린 그림은 영국인 여행자가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에요. 노란 머리에 파란 눈, 하얀 피부색의 서양인을 처음 본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게다가 서양인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을 멀리했다. 이때 한 영국인 여행자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빵과 버터와 잼, 담배와 성냥 등을 나눠 주며 호감을 샀다. 서양 음식과 물건을 처음 본 사람들은 경계심을 풀고 영국인 여행자가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림 속 우리나라 사람들의 표정을 잘 보라. 처음 빵과 잼을 맛본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묘한 표정과 몸짓이 그 맛을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곰방대를 입에 문 조선인과 궐련(얇은 종이로 말아 놓은 담배)을 피우는 영국인의 대조적인 자세와 외국인이 신은 구두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작거리는 어린아이의 몸짓이 웃음을 준다."(p.15)

 


 

이 책에는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가 눈에 띈다. 이탈리아 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루스트라타〉 표지 기사로 소개되어 있다. 이 기사 역시 앞서 언급한 영국 주간지 〈더 그래픽〉 보도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해 다시 두 저자가 쓴 형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번역한 후 동일하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단 말이다. 사진도 없이 그림으로 대신했다. 아마 저격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남은 것은 없을 것 같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역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고 현장에서 체포된 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고,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한 중심 인물이며,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 자리에 앉아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는 등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의병 활동을 하고 구국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만나기 위해 만주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와 궁내대신 비서관 등 일본 주요 인물에게 중상을 입히고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p.131)

 

글 : 이돈수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뒤, 스페인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어요. 명지대학교 연구 교수로 활동했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고지도, 옛 사진, 신문과 책 등 우리나라 관련 자료를 40년 가까이 모으고 있는 수집가이기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역사 문화 관련 이미지 아카이브인 “이미지로 떠나는 역사 문화 기행” 사이트 ‘코리아니티닷컴’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다양한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 TV 다큐멘터리 및 출판 등에 지금껏 수집해 온 이미지를 제공해 주고 있어요. 현재는 현대 미술을 기획 전시하는 갤러리 ‘북과바디’의 대표입니다.

 

글 : 배은영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으며, 아동·청소년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국어 천재가 된 철수와 영희의 배틀』 시리즈 네 권과 『기시니 스릴러툰』 등을 썼고,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책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그림 : 토리아트

상상하는 모든 것을 그리고 디자인하는 푸른 꿈이 있는 곳, 무한한 상상력을 갖고 색다른 기획과 그림, 디자인으로 수준 높은 창작물을 만들려는 회사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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