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 쓰는 춤
김윤정 지음 / 오렌지디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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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안무가'란 직업은 주위에 흔히 있는 직업은 아니다. 무용에 대해 문외한인 독자로서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소하다. 무용가 혹은 현대무용가, 영어로 발레리나 정도를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어쨌든 춤을 추는 일과 관련된 분인 것으로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 한참을 읽다가 글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인용하는 말이나 저자들이 무용은 당연하겠지만 철학자나 화가, 음악가 등 다양하다. 어쩔 수 없이 저자 소개를 들춰본다. "안무가, 공연예술가. 수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현대무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로 돼 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무용 공부를 더 하신 것 같다. 또 현장 활동도 유럽 현지에서 많이 활동하신 것 같다.

이 책 『펜으로 쓰는 춤』이 말하듯이 본업인 공연 예술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여러 예술을 책이나 사색을 통해 깊은 연구를 하시는 분으로 짐작된다. 재독 안무가 김윤정의 예술과 인생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펜으로 쓰는 춤』은 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과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해 다른 점을 연구하기도 하는 예술인이 쓴 책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독자의 무지로 빚어진 오류였음을 밝힌다. 이 책은 한 무용가가 무용의 예술적인 부분을 독자들에게 깊이 있게 알리기 위해 쓴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 김윤정은 이미 ‘철학하는 무용가, 사유하는 예술가’라고 불리우고 있다니 독자의 무지함만 드러나는 것 같아 송구할 따름이다. 저자는 공연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미술 등 인문학과 예술 분야에도 해박하다고 한다. 모두가 책읽기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다른 예술과의 결합성, 비교적 고찰 등을 통해 글로써 현대무용의 예술성을 표현해 내는 데 독보적 글쟁이이기 때문이란 사실도 독자는 뉘늦게 이해한다. 다양한 사상가와 예술가에게 받은 영감과 끊임없는 고뇌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저자는 예술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무엇이 나를 춤추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시작되었다는 글쓰기는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는 안무가의 삶, 타국에 사는 이방인의 삶을 그려낸다. 공연예술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세계 여행기, 문화 감상록에 이르는 다채로운 글들은 때로는 기분 좋은 유쾌함을, 때로는 진지한 사유를 건네며 독자들을 지적인 사색의 세계로 이끈다. 국내에서 석사학위까지 마치고 유럽(독일)로 건너간 것은 현대무용은 물론 타 예술이 보여주는 예술성과 현대무용이 보여주는 예술성의 다름을 인지하고 자신의 예술 세계 확대를 꾀하려고 유학 갔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가 독일에서 니체를 만난 것도 그의 끊임없는 예술에 대한 사유를 더하기 위해서였을까? 책의 맨 앞에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란 제목의 〈들어가며〉 통해 니체를 말한다. 제목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도 니체의 일부를 인용했다. 첫 문장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내면에 혼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다. 이 아포리즘*은 "무엇이 나를 춤추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끊임없이 창작하려는 의지와 집착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질문하게 했고, 늘 혼란스러웠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깊은 사색을 거듭하고 성찰했을 것이다. 질문은 늘 있었고, 저자는 늘 생각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 질문과 혼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춤을 만들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가의 깨달음은 예술의 깊이를 더하고 예술은 그 예술가의 사유를 깊게 한다. 여기서 얻은 통찰력은 저자에게 삶에 대한 지혜에 이른다. "글을 쓰면서 내 삶의 혼란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삶을 다양하게, 흥미롭게, 가치 있게 해주는 생산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p.7)

* 아포리즘 : 경구나 격언, 금언이나 잠언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인생의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기록한 명상물로서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긴 문장의 설교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이나 기지를 짧은 글로 나타냄으로써 어떠한 원리나 인생의 교훈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2006)

 


 

『펜으로 쓰는 춤』은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는 한 안무가의 삶, 타국에 사는 이방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 책은 공연 예술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세계 여행기, 문화 감상록에 이르는 다채로운 글들은 때로는 기분 좋은 유쾌함을, 때로는 진지한 사유를 건네며 독자들을 지적인 사색의 세계로 이끈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힘을 말할 때마다 "삶이 힘들 때 더욱 빛을 발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것이 예술의 힘일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들이 예술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술이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을 구원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난제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다운 삶의 모습을 찾아 일상을 사소한 행복으로 채우다 보면 진정한 삶의 완성에 이르게 되지 않겠느냐는 답을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소소한 것들이 사실은 훨씬 크고 고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게 진실이란 걸 알고 있다."(p.55) - 「인터넷 시대 우리에게 행복이란」 중에서

 

이 책은 모두 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무대와 인생 - 삶이라는 예술에 대하여〉, 2장 〈친밀한 이방인 - 독일살이와 세계 여행기〉, 3장 〈나를 채우는 조각들 - 보고 읽는 것에 대한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생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연예술가에게 ‘무대’가 지니는 의미와 예술에 주어지는 상에 대한 단상부터, 독서와 공연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일화들은 예술이 인생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2장에서는 무대를 바깥으로 옮겨 독일살이와 여행기를 다룬다.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늘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에 익숙하다 보니, 어디를 가도 관찰하고 영감을 받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는 저자는 20여 년 넘게 이방인으로 살면서 겪은 경험을 털어놓는다. 또한 공연을 위해, 개인적인 여행을 위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떠난 수많은 여행은 내면을 한 뼘씩 성장시켰음을 발견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는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여행은 자기라는 실체를 잊고 다시 태어난 듯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일상에서 형성된 의식들이 새로운 공기와 섞이는 순간, 기분 좋게 자기 부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의 법칙과 공간의 법칙을 넘나들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p.141) - 「아프리카, 카보베르데」 중에서

 

3장은 저자에게 영감을 준 전시와 영화,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록이다. 쿠사마 야요이, 페데리코 펠리니,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버지니아 울프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결과물은 저자의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문장이 만들어진 과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결같이 삶을 예찬하는 긍정의 힘이 있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랑, 죽음, 만남과 이별을 말하면서도 비관이 아닌 긍정주의를 견지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준다. “내일, 아니 한 시간 뒤, 10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매 순간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표현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1장 〈무대와 인생 - 삶이라는 예술에 대하여〉에서 8개의 항목으로 나눠 자신의 예술관이나 무용예술의 속성, 무용의 힘 등을 '삶'과 연결해 매우 깊은 사유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한참 읽다보면 '예술가인가, 철학자인가' 하는 혼란이 올 정도다. 첫번 째 항목에서 '무대'라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에 따르면 움직임만으로 부족해서 언어를 쓰고, 언어를 표현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움직임을 찾는 것은 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90세가 넘도록 평생 창작에만 몰두하던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인생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한다고 했다. 춤을 출 때마다 살아 있음의 자유를 온전히 누린다. 춤을 추는 그 순간만큼은 백(百)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서는 자신은 오로지 무대 위에서만 '100% 나'로 존재함을 느낀다는 말이다. 충분히 몰입해서, 다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예술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혼신을 힘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읽힌다.

여기에 저자는 '예술의 시간성'에 대해서도 덧붙인다. "창작을 한다는 건 어딘가 깊숙이 갇히면서도 모든 감각을 열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성을 내포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시간의 늪이자 고독한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와, 시간의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예술',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따로 또 같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방향성을 지닌 신체와 어떤 방향성도 지니지 않는 예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춤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답은 "연마한 기술과 영혼이 담긴 표현의 자유가 있는 움직임이다.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춤은 그 자체로 본질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 의미가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작업은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세상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이처럼 1장에서는 예술의 속성, 공연 예술의 특수성, 창조로서의 예술 등 무용과 예술의 일반론에 대해서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워낙 해박한 지식이라 내용이 독자의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마침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깊은 사유의 표출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또 2장에서는 '독일살이'와 세계 여행기'로 꾸몄다. 문화 충격의 부분과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이야기, 아프리카의 원색의 힘 등에 대해 저자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풀이해준다. 마지막 3장은 '보고 읽는 것'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전시회를 관람하며 떠오르는 추억, 햇살 예찬, 죽음의 사유 등에 대해서의 생각들이다. 생각에는 느낌과 저자의 견해가 포함된다. 마지막 '가을날,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란 제목의 글은 독자에게도 비슷한 감정의 사연이 있는 탓인지 '공감 백(百)'이다.

 

가을은 왠지 고독해도 될 것 같은 계절이다. 가을에는 불행 속에 빠져들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은 듯하여 마음껏 불행해진다. 기왕이면 매우 근원적이면서도 시작도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불행이었으면 하는 열망에도 빠진다. 불행하고 싶은 열망이라니! 가당치 않은 소리 같지만 우리에게 가을이 없었다면 이 불안함에, 이 고독에 기댈 근거가 없었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p.288) - 「가을날,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중에서

 

저자 : 김윤정

 

안무가, 공연예술가. 수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현대무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아시아인 최초로 네덜란드 아른험 예술대학에서 무용으로 디플롬을 받았다. 독일 주정부의 지원으로 첫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미국, 러시아, 영국, 일본 등 전 세계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펼치며 해외 평론가들로부터 “춤 안에서 명확히 표현되어야 할 자신만의 언어를 알고 있는 안무가”로 인정받았다. 2001년 독일 푀르데룽 프라이스 후보에 올랐으며, 2006년 〈닻을 내리다〉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올해의 예술상을, 2007년 〈베케트의 방〉으로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2018년 〈인터뷰〉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로 2021년을 빛낸 안무가상과 한국춤비평가협회 베스트 6 작품상에 선정되었다. 예술의 전당과 LIG아트홀, 나비아트센터에서 제작 공연을 맡았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서울세계무용축제 등 다양한 무용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에도 매혹되어 문화예술 웹진 ‘더 프리뷰’에서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는 ‘YJK 댄스 프로젝트’ 대표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무용 장르를 해체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언어로서의 춤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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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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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Second World War / World War II)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전쟁 사가들은 기록한다. 이 기간에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운 제2차 세계대전의 개요다.

하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각 진영에 가담한 국가들은 변동이 있으며, 중립을 표방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어느 한 진영에 적극 가담한 나라도 있다고 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엄청난 개별적 행위들로서 결과적으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성립하였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현대 세계사나 전쟁사, 군사 관련 책 등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쓰여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개요 부분이다.

 


 

이 책 『원자 스파이』는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스파이'란 단어로 독자는 소설 작품인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의 원자폭탄 제조를 저지할 목적으로 첩보전을 펼치는 소설 작품쯤으로 독자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책 소개글을 읽고서야 실록에 근거한 논픽션임을 알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앞섰으며 유럽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제3제국 건설을 주창한 독일 군부와 권부 세력들은 이를 근거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유럽에서도 낙후된 독일의 전 명칭 〈프로이센〉 말기에 나온 걸출한 인물 비스마르크 재상을 세계사 책에서 배운 바 있다. 그는 독일이란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 세계가 놀랄 만한 추진력으로 '철혈 재상' 이란 별칭이 붙은 정도로 독일 부흥에 가장 영향력을 준 재상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올렸다. 또 경제적 정책에도 크게 기여해 튼튼한 재정에도 과학기술 선도에도 많은 힘을 기울인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자 역시 독일 과학의 기틀을 세운 사람은 비스마르크란 사실을 몇 권의 책에서 확인한 바 있다.

원자폭탄의 열쇠를 쥐고 있는 라듐을 발견한 폴란트 태생의 마리 퀴리는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물질의 결정을 연구하는 피에르라는 과학자였다. 두 사람이 결혼한 해인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의 특이한 성질, 즉 인광(燐光) 방출 현상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발견에 자극을 받은 마리는 그런 특이한 성질에 관해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 피에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라늄의 성질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중, 마리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는 이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1898년 7월, 폴로늄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마리는 〈방사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그것에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과학 인력을 죽이는 것은··특별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주도한 맨해튼 계획의 총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한 보고서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나치에 비해 원자 폭탄 연구가 크게 뒤졌던 연합국은 히틀러의 손에 원자 폭탄이 들어갈까 전전긍긍했다. 그로브스는 나치의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만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표적 자체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고, 독일의 폭탄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과학자를 납치하고 심문하는 특공대 〈알소스 부대〉를 탄생시킨다. 이른바 ‘원자 스파이’. 과학자와 군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과학자를 스파이로 만들어 첩보 활동을 맡겼다.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시도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로버트 오펜하이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졸리오-퀴리 부부, 리제 마이트너… 이 책에 나오는 많은 과학자들의 이름은 들어보면 불멸의 업적을 남긴 20세기의 전설적인 과학자들이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참화에서 생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과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돈 많은 이들의 독특한 취미 생활로 여겨졌던 과학은 어느 순간부터 전쟁의 향방을 가를 수 있는 정보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험한 무기인 원자폭탄이 있었다. “과학자와 군인 모두 원자핵에 숨어 있는 초자연적 힘이 곧 미치광이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때로는 부풀려진 소문을 믿어서, 때로는 진실된 정보를 최악의 방향으로 잘못 해석해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나치와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어서 런던과 뉴욕이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때문에 연합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계획을 실행함과 동시에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방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퍼부었다.

 


 

이 책 『원자 스파이』는 탁월한 과학 스토리텔러 샘 킨이 처음으로 쓴 물리학 책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운영되었던 과학자와 스파이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알소스 부대’의 활동을 추적하면서, 과학이 처음으로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서게 된 과정을 들려준다. 오늘날 가장 탁월한 과학 이야기꾼인 샘 킨의 다섯 번째 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자와 스파이로 구성된 과학 특공대가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이 책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비밀을 파헤쳐 흥미진진한 대서사시로 들려준다. 연합군의 과학자들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특수 부대를 만들어 적국 영토 깊숙이 침투시켜 정보 수집과 파괴 공작, 심지어 나치 독일의 우라늄 클럽 회원 암살 작전까지 벌였다. 소설 작품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들의 마음속까지 표현해낼 정도로 자료 수집과 기록 검토를 충분히 했다는 게 독자로서는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이 책을 빛내는 것은 믿기 힘든 등장인물들이다. 그중에는 메이저 리그 야구 포수 출신에서 스파이로 변신한 모 버그도 있고, 훗날 대통령이 된 동생 존 F. 케네디보다 나은 전공을 세우려고 애쓴 조 케네디 주니어도 있다. 또, 독일의 최고 과학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자신의 유대인 부모를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하려고 애쓴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학자도 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과학자들과 군인들은 국제 첩보전의 어두운 세계로 뛰어들어 인류사에서 가장 어두운 역사의 물결을 되돌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 몇몇은 이름마저 생소한 사람들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나 이후 세계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일을 저자 샘 킨이 세밀하게 파악해 이 책에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에 헷갈릴 수도 있지만, 저자가 책 뒤에 따로 분류해 놓은 「주연급 등장인물」과 「조연급 등장인물」를 별도 소개하고 있어 책을 읽다가 헷갈리면 다시 뒤적여 찾아보면 혼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량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 저자의 배려도 놀랄 만하다.

 


 

샘 킨은 미국 메이저 리그 선수였던 모 버그를 '흥미로운 인물'로 묘사한다. 우크라니아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그는 야구 성적보다 다른 면모로 충분히 화제가 될 만 했다. 라틴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장 이채로운 이력은 1940년대초 메이저 리그에서 코치로 일하다 OSS(전략정보원), 즉 미국 정보기관 CIA의 전신인 조직에 합류한 점. 쉽게 말해 스파이가 되어 유럽의 과학자들과 접촉하거나 심지어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핵심적 과학자를 제거해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가 쓴 이 책은 그를 비롯한 여러 인물에 초점에 맞추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한 여러 활동을 그린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면, 나치 독일이 자국의 화학자·물리학자들을 소집한 모임은 〈우라늄 클럽〉으로 불렸다. 일찌감치 30대 초반에 노벨상을 받은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비슷한 연구를 진행한 퀴리 가문을 앞질러 1938년 핵분열 연구 논문을 가장 먼저 발표한 화학자 오토 한 등이 포함됐다.

이들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은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독일의 중수 확보를 막기 위한 작전을 필사적으로 벌인 것도 이를 짐작하게 한다. 노르웨이 발전소의 중수 생산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과 노르웨이가 연합해 펼친 첫 번째 작전은 참담한 희생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지만, 노르웨이는 정예 군인들을 투입해 두 번째 작전을 펼친다.

물리학·영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원자폭탄 관련 연구의 내용과 의미 등도 짚어가는데, 책 전체로 보면 과학사보다 군사작전과 첩보전에 무게가 실린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등장인물들의 면면. 퀴리 부부의 딸인 이렌과 그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 같은 과학자들도 그렇다. 이 부부는 결혼 이후 '졸리오-퀴리'라는 성을 쓰면서 노벨상도 함께 받았는데, 나치의 점령 이후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 프레데리크는 연구실에 있던 사이클로트론(입자가속기가)가 독일 측에 넘어가면서 한때 부역자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실은 직접 화염병까지 만들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저자는 영웅이나 위인전의 주인공처럼 인물을 묘사하는 대신 각자의 약점이라고도 할 만한 부분을 포함해 대중의 눈높이에서 흥미로운 일화나 면면을 그려낸다. 흥미로운 접근이되, 특정한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고국을 비밀리에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주변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 물론 그의 수다가 단지 일화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그가 미국 측에 전달한 정보는, 비록 하이젠베르크와의 몇 년 전 만남에서 얻는 것이라고 해도, 독일의 연구 속도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이는 군인에 과학자들까지 참여해 첩보 수집 등의 활동을 하는 특수 부대, 이름하여 '알소스' 부대가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가장 인상적으로 그려내는 과학자는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던 그는 나치의 점령 이후 고국의 부모와는 소식이 끊어졌고, 가까운 사이였던 하이젠베르크와는 공적인 관계에서부터 적대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는 알소스에서 스파이로 활동한 과학계 인사를 탈출시키거나, 연합군에 붙잡힌 과학자들을 심문하고 나치의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책에 따르면, 그는 몇 달 전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이 원자폭탄을 쓸 일도 없으리라고 낙관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즉,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무기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단순히 방어 무기로 사용한다는 개념도 사라졌다."

책에는 비밀 편지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전달하거나, BBC 뉴스 앵커 멘트에 작전 개시 암호를 넣는 등 당시의 첩보전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면면이 드러난다. 포로로 붙잡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도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의 연구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책에는 관련 동향을 전혀 엉뚱하게 판단했던 사례도 나온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한 이유는 견해가 분분하다. 이 책에도 나오는 대로 사랑에 빠진 어느 과학자가 실험에서 실수를 한 게 영향을 미쳤는지, 과연 나치가 어느 정도 자원을 쏟아부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흥미롭게 읽히는 책인데, 전문 역사가의 책처럼 본문 내용에 대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출처를 밝혀 놓지는 않은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사족으로, 모 버그는 종전 이후의 행적도 예사롭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은 마다하고 권총과 청산가리 캡슐을 기념품으로 챙겼다고 한다.

 


 

저자 샘 킨은 이처럼 방대한 사료와 연구를 토대로 그동안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굴하고, 영웅과 불한당을 비롯해 제2차 세계 대전기에 활약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내면 심리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때문에 『원자 스파이』는 마치 한 권의 스파이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사진들을 포함하는 40여 장의 사진과 도판, 과학적 내용을 해설하는 일러스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 : 샘 킨(Sam Kean)

 

베스트셀러 『사라진 스푼』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뇌과학자들』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얼음송곳 의사』의 저자. 미국 워싱턴 D.C.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뉴욕 타임스 매거진〉 〈슬레이트〉 〈뉴 사이언티스트〉에 글을 썼다. 미국과학작가협회 특별상(2009)을 수상했다. 『사라진 스푼』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미국 아마존 ‘사이언스 Top 10 Books’에 꼽혔고,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최고의 책’, 미국 아마존 ‘올해의 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에디터스 픽’에 선정되었다. 『뇌과학자들』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와 함께 PEN/E.O. 윌슨 문학적 과학 작품상과 AAAS/Subaru SB&F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미국 아마존 ‘올해의 책’, A.V. 클럽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으며, 굿리드 초이스상 비문학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역자 : 이충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교양과학과 인문 분야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는가』를 번역하여 2001년 제20회 한국과학기술도서 번역상을 받았다. 옮긴 책으로 『진화심리학』, 『사라진 스푼』, 『이야기 파라독스』, 『화학이 화끈화끈』, 『59초』, 『내 안의 유인원』, 『많아지면 달라진다』, 『루시퍼 이펙트』, 『행복은 전염된다』, 『우주의 비밀』, 『세계의 모든 신화』, 『루시, 최초의 인류』, 『공포의 먼지 폭풍』, 『흙보다 더 오래된 지구』, 『처음 읽는 양자물리학』, 『돈의 물리학』, 『원소의 이름』, 『유전자가위 크리스퍼』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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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여행 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이재형 지음 / 디이니셔티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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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독자는 지중해성 기후의 프랑스 남부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풍광과 기후가 좋아 연중 따뜻한 날씨와 지중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안 도시들의 동화 같은 집도 잇따라 떠오르는 풍경이다. 독자는 프랑스 여행 때 니스를 중심으로 한 몇 개의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때가 1월인 데도 바닷가 백사장에는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경험도 있다. 멀리 눈 쌓인 알프스를 배경으로 그야말로 이국적 풍경을 실감했었다. 연중 화창한 날씨 탓인지 이쪽 사람들은 성격도 온화하고 온순하다고 하니 여행지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바닷가 언덕을 따라 층층이 줄 지어 서 있는 저택들을 보고 혹시 옛날 로마가 이런 휴양지가 탐나서 유럽 전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었나 싶기도 했다. 지중해변을 따라 지금도 이 도시와 마을의 경계는 모호한 편이라고 한다. 자연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전망에 여행자들이 매혹되는 이유다.

이 책 『프로방스 여행』는 이곳 프로방스에서 십여 년을 살았다는 저자 이재형에게는 지금 사는 파리를 떠나 이곳 프로방스로 자주 여행을 오는가 싶다. 이번에도 프로방스 여행으로 이를 계기로 프로방스 전역의 도시들을 들러 소개해 준다. 특히 이 지역이 배출한 예술가들과 그들은 떠났지만 여전히 그들과 함께 숨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프로방스 주민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프로방스 23개 도시를 예술가와 그들의 예술에 초점을 맞췄다.

 


 

〈아를〉은 누가 뭐래도 고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아를은 프랑스의 코뮌(주민자치제) 중 가장 넓은 지역이라고 한다. 이곳은 론강이 흐르고 황량한 크로 평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공동묘지, 극장, 공중목욕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이 옛 로마령 갈리아의 주요 도시였음을 알려준다. 이 도시에는 박물관도 많고 축제도 다양하다. 고흐, 고갱, 피카소가 이곳에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 현대 미술의 거장 이우환 미술관도 있다. 이곳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로는 단연 고흐다. 그가 이곳에서 산 지낸 시간은 겨우 2년 여밖에 안 되지만 수많은 그림과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 저자는 안내한다.

 

1888년 2월 2일, 반 고흐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15시간을 여행한 끝에 아를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프로방스의 강렬한 빛과 눈부시게 선명한 하늘, 투명한 공기 속에서 꽃을 피운 과실수와 협죽도, 보라색 땅, 올리브나무의 은빛, 실편백나무의 진한 녹색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 “난 새로운 예술의 미래가 프로방스에 있다고 믿어.”(p.14)

 

책에 따르면 1988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반 고흐는 아를 시내에 있는 카페의 밤 풍경을 그린다. 〈밤 카페〉는 라마르틴 광장에 있었던 역전 카페를 그린 것인데, 이 카페는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시내 한가운데의 포룸 광장에 가면 노란색으로 칠해진 반 고흐 카페가 단번에 시선을 잡아끈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소재인 이 카페- 당시에는 '테라스'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카페라고 불리운다- 는 아직 남아 있어서 이름을 찾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아를을 떠나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마르세유〉로 간다. 기원전 6세기 경 그리스에 살던 포카이아 사람들이 건너와 건설한 마르세유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이민자들의 물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 도시는 율리우스 케사르에게 점령당하면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연이어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손에 넘어가면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이탈리아인, 코르시카인, 유대인, 스페인인,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 북아프리카인, 베트남인, 캄보디아인, 코모르인 등 전 세계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이곳 수많은 이민자들은 갈등과 투쟁, 화해를 거치며 마르세유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이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마르세유만큼 조화롭게 결합시킨 프랑스의 도시는 없다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가 즐겨 찾았지만, 특히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 이곳을 선택한 영화인들이 많다고 한다. 프로방스의 작가로는 마르셀 파뇰(1895~1974)은 작품에서 자신의 고향인 프로방스 지역 사람들 특유의 정서와 일상, 사고방식, 풍속을 세심하게 묘사한 '프로방스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마르셀 파뇰은 연극과 영화에 집중하여 '영화화된 연극'의 거장이 되었다. 이는 특히 희곡으로 쓰였다가 영화화된 그의 유명한 마르세유 3부작 〈마리우스〉와 〈파니〉, 〈세자르〉 덕분이라고 전한다. 또 〈빵집 마누라〉는 프랑스의 국민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다. 독자는 읽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이 영화는 마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영화라고 한다. 이 공동체 구성원 중 한 명이 당하는 불명예는 곧 공동체 전체의 불명예이며, 빵집 주인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모두가 나서야 한다. 바로 이것이 마르셀 파뇰의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 바스티드 뇌브 남쪽의 라 트레이으 마을에서 찍은 영화도 수없이 많다. 독자도 본 적이 있는 〈마농의 샘〉 역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살짝 전해준다. 이 영화에는 그의 아내 자클린 파뇰이 마농 역을 연기했다. 독자의 머릿속에 〈마농의 샘〉 한 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소설 『마농의 샘』은 마르셀 파뇰의 작품이지만 그의 부인이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그 마을의 묘지에 마르셀 파뇰의 묘지에 가족과 함께 묻혀 있으며 묘비에는 "그는 샘과 친구들, 아내를 사랑했다"고 쓰여 있다.

 


 

이 책에서 도시 〈아게〉에는 「어린 왕자의 영혼이 머무는 바다」란 부제가 붙어 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리옹 출신이지만 이 마을과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의 누이동생 가브리엘이 1923년 피에르 다게와 결혼을 했고, 그 얼마 전부터 항공 우편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아게에 있는 동생 부부의 성(18세기에 지어진)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아게 성당에서 엘살바도르 출신 예술가 수엘로 순신 산도발과 종교 결혼식을 올렸다. "아게는 심지어 먼지에서조차 향기가 푸익는 천국이다"고 생텍쥐페리는 썼다 이 마을에 매혹된 생텍쥐페리는 1940년 마지막으로 아게에 머무르면서 『성채』를 썼다고 한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쓴 『어린 왕자』는 1946년 처음으로 프랑스 서점에서 볼 수 있게 됐다고 저자는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어린 왕자』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는 걸 보지 못했다. 어린 왕자가 지구별 여행을 끝내고 자기 별로 돌아간 것처럼 생텍쥐페리도 1944년 7월 31일 저 높은 하늘로 날아 자기 별로 떠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게 풍경은 강렬한 원색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하늘과 바다의 파랑, 숲의 초록, 바위산의 빨강. 이 강렬한 원색들은 19세기 말에 후기 인상파 화가들, 특히 야수파 화가들을 매혹시켰다. 1897년 아르망 귀요맹은 이 마을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아게의 바위산〉을 그렸다. 1911년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붉은 바위와 뒤틀린 나무를 그리는 걸 좋아한다. 나는 이미 주홍색과 다른 붉은색 튜브를 다섯 개나 썼다."(p.103)

 


 

저자는 기차를 갈아타고 영화제로 유명한 곳 칸(Cannes)까지 갔다가 다시 발로리스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탄다. 프로방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 두 곳 중 한 곳인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다. 파블로 피카소는 1948년에서 1955년까지 발로리스에 머물렀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이 도시에서 피카소는 도자기 예술의 세계에 입문하여 4,500점의 도자기 작품을 남겼다는 새로운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독자는 파카소를 좋아하지만 그가 그렇게 많은 도자기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저자로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다. 피카소는 또 이곳에 많은 조각 작품과 회화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중 대표작이 바로 〈전쟁과 평화〉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그렸다고 저자는 전한다. 아마 한국전쟁을 소재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을 떠올렸기 때문에 의외의 사실을 전해주는 듯하다.

이 전언에 따르면 발로리스의 도자기 예술가들이 그의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아 발로리스성의 소 예배당에서 열어준 축하 파티에서 피카소는 예배당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그는 버려져 있던 이 오래된 성소를 '평화의 사원'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그의 이러한 바람은 실현되었다. 〈전쟁과 평화〉는 마주보고 있으며 둥근 천장의 꼭대기에서 만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 그림은 〈전쟁〉이고 오른쪽 그림은 〈평화〉이며, 안쪽에는 반원형 그림이 있다. 어두운 색조의 〈전쟁〉에는 혼란스러운 전투 장면과 이 장면을 지켜보는 평화의 전사가 보인다. 반면 〈평화〉에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놀이를 하고 있다. 안쪽 그림 〈세계의 네 부분〉에서는 네 사람이 함께 비둘기가 그려진 원반을 들고 있다. 피카소가 혹시 시스티나에 그린 벽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영감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세상에는 신의 세상이지만 피카소가 그린 세상에는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인간의 세상을 말하려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도 가본 적이 있는 도시 〈니스〉로 발길을 옮긴다. 니스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기후도 매우 온화해서 살기 좋은 도시다. 이 도시에서는 천사의 만을 따라 이어져 있는 영국인들의 산책길(이 길 이름은 엣날 니스에 살았던 부자 영국인들에게서 따왔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하염없이 지중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다. 니스는 매우 오래된 도시다.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인들의 니카이아와 기원전 100년경 로마인들이 세운 세메넬룸이 합쳐서 생겨났다. 중세 때 니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지금은 공원이 된 산 위의 성에 모여 살다가 14세기부터는 지금 옛 니스(Vieux-Nice)라고 불리는 성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꽃의 도시'라고 불리울 만큼 꽃과 대규모 꽃 도매시장이 새벽을 깨운다고 하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꽃으로부터 아침 인사를 받는 셈이다. 바로크 예술로 탄생한 생트레파라트 성당을 지나 마세나 광장에 이른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니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다니 때맞춰 오면 굉장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될 것 같다.

니스의 가장 큰 자부심은 아마도 파리 다음으로 미술관이 많은 도시라는 점일 것이다. 니스를 사랑한 샤갈과 마티스 미술관 외에도 현대 미술관, 팔레 라스카리, 마세나 빌라, 보자르 미술관, 아니톨 자코브스키나이브 아트 미술관 , 샤를 네그르 사진 미술관, 사미에 고고학 박물관 등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는 듯 예술과 미술의 역사를 니스 한 곳에 다 몰아넣은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니스는 앙리 마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마티스는 니스에서 대단한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티스는 1917년 처음으로 니스에 왔다. 프로방스의 맑고 투명한 빛에 매료된 그는 니스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다가 결정적으로 시미에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지금 시미에 수도원 공원묘지의 수수한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 1954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자신의 작품 전부를 니스시에 유증했다. 니스시는 17세기에 건축된 아렌느 빌라를 마티스 미술관으로 만들고 마티스가 유증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 목록을 구성했다. 관람객은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데생과 판화, 조각 작품을 통해서도 그의 예술 세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올리브나무, 아몬드나무, 무화과나무가 길 양쪽에 서 있는 커브 길을 벌써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치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피라미드 모양으로 지어진 이 성채 마을이 프로방스의 태양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략) 해가 서산마루에 뉘엿거리면 고르드의 돌집들은 빨갛게 물들고 저 아래 계곡은 초록 바다로 변한다. 고르드는 이때가 가장 아름답다.(p.216)

 

이번 여행의 종착지이며 파리에서 남쪽으로 600km 떨어져 있는 아비뇽(Avignon)에 도착했다. 교통의 요지였던 이 도시는 14세기에 교황청이 자리 잡으면서(흔히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모습이 확 달라졌다. 교황청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비뇽은 세계 최대의 연극제가 열리는 연극의 도시이기도 하다. 매년 7월이 되면 아비뇽은 거대한 연극 무대로 바뀌어, 3주 동안 도시 곳곳에서 연극이 공연된다.(p.233)

 

저자 : 이재형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원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프랑스 소설의 세계를 소개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많은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지금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의 용도』 『부엔 까미노』 『어느 하녀의 일기』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꾸뻬 씨의 시간 여행』 『꾸뻬 씨의 사랑 여행』 『마르셀의 여름 1, 2』 『사막의 정원사 무싸』 『카트린 드 메디치』 『장미와 에델바이스』 『이중설계』 『시티 오브 조이』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 『레이스 뜨는 여자』 『정원으로 가는 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 『사회계약론』 『법의 정신』 『군중심리』 『사회계약론』 『패자의 기억』 『최후의 성 말빌』 『세월의 거품』 『밤의 노예』 『지구는 우리의 조국』 『마법의 백과사전』 『말빌』 『신혼여행』 『어느 나무의 일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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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 - 202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 선정작
윤관 지음 / 헤르츠나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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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길어올린 일상의 언어를 시로 쓰고, 시집으로 펴냈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가 아닌 ‘일기 쓴다‘고 말한다. 시가 일기이고 일기가 시이다. 우리가 이 시집의 시에 대해 쉽게 공감하고 감동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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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지음 / 헤르츠나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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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만에 공감과 감동이 되는 시를 읽었다. 독자는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시집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의 시는 여러 편이 쉬운 언어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로 쓰였다. 일부러 멋내는 언어도 없고 평범한 언어가 대부분이다. 물론 시인들이 특별한 언어로, 특별한 시어를 따로 쓰진 않는다. 현대의 독자들은 난해한 시어나 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상이 글자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는 시대, 글로 쓴 시들이 어렵다면 누가 읽기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난해한 시는 나름대로 선택되기도 한다. 형상화를 매우 뛰어나게 해서 가치를 인정받는 시도 있다. 아무튼 현대의 시는 난해하면 읽히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집의 저자 윤관은 이 책을 펴냄으로써 '시인'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얻게 됐지만 그는 시인 이전에 일상적인 '생업을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시를 쓴다'가 아니라 '일기를 쓴다'고 표현한다. 시집을 펼쳐 들면 한두 편의 시를 먼저 읽지만, 그 '맛보기'가 끝나면 대체로 시인의 시 세계가 궁금해진다. 독자만의 시 감상법은 아닐 것이다. 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라 독자는 생각한다.

시인은 〈들어가며〉에서 시집을 내게 된 소감과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설명한다. "우주는 나를 제외한 세상이었습니다. 우주는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하여 그것을 짐작하고 정의 내리는 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를 통해 보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어 시인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조차 나를 통하여 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세상은 없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나를 키우면 세상이 커지고", "나를 가두면 세상은 감옥"이었다고 말한다. 이젠 시인은 자신 있게 말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대단한 것의 일부로 끊임없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때부터 삶은 견딜 만한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나조차 섞이지 않는 나’의 시선으로 우주를 둘러본다. 온통 귀하고 귀하다. 내 아내, 내 아이, 내 어미, 내 아비 그들의 작은 마음조차 귀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귀하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인 윤관은 시를 ‘안과 바깥을 이어주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떼어낸 아주 작은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를 지닌 것’으로 바라본다. 윤관의 첫 시집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가 꼭 그렇다고 소개한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 누구나 경험하는 평범한 정황이라는 보편의 바깥을 가로지르는, 윤관의 안쪽에 드리운 특별한 감각은 일상어의 낯선 구성과 문장의 극적인 배열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다. 안쪽에서 자란 깊은 사유는 내밀한 감정의 소요를 치밀한 관찰을 통해 시세계에 담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의 다리를 놓아준다. 그런데 이는 윤관만의 것은 아니다. 역시 시집을 출판한 전문가로서의 평가다.

시인은 지금의 자아와 처음의 자아가 다름을 인정한다. 세상에 섞여서 달라진 자아 이전의 원래 자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찾아가는 여정과 흡사하다.

 

두껍아, 두껍아

한꺼번에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어둠처럼

나의 전부를 주마

헌것도 새것도 아닌

처음의 나를 다오

 

처음의 내가 생각나질 않아

내가 섞이지 않은 나

처음의 나를 다오(p.59~60) - 「두꺼비집」 중에서

 


 

출판사 측은 또 이 시집 읽기의 또 다른 방식을 귀뜀한다. 이에 따르면 윤관의 시에 흐르는 뚜렷한 정서이긴 하지만, 무릇 시인이라면 마땅히 발현하는 ‘문학’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윤관을 읽어야 하는지, 왜 윤관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시정신을 ‘배제의 존재’에서 찾고자 한다. ‘윤관은 일기 쓰듯 시를 쓴다’는 최돈선 시인의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윤관의 시가 일기가 아닌 것은 바로 배제의 존재라는 시정신이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적 자아로부터 떠오르는 모든 것을 하나씩 배제해 간다. 가족, 욕망, 사랑, 이별, 우정, 찰나의 감각, 바람, 커피…. 이 배제하는 과정이 시로 태어나고, 결국 모든 걸 다 배제하고 난 나머지는, 무한한 우주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로서 윤관 자신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러한 자신조차 ‘내가 섞이지 않도록’ 처음의 내가 되고자 무(無)를 향한 갈망을 쉬지 않고 염원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제목이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가 된 것이다.

 

잊혀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꽃 지고 알았다

작은 오솔길오 숲이 걸어가는 소리

산 전체가 묻히는 아득한 역광

그 무게 없는 쓸쓸함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가장 오래 머물렀음을(p.61)

- 「잊혀지는 것」 중에서

 

꿈을 꾸었다

내가 깨끗이 사라지는 꿈이었다(p.99)

- 「완전변태」 중에서

 


 

삶은 한 번뿐이고

순식간에

사라진다고(p.27)

- 「바람의 경전」 중에서

 

나를 제외한 전체와 전체에서 배제된 나, 전체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바로 인연. 윤관은 아무리 소소하다 하더라도 인연을 깊이 바라본다.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리움조차, 여전한 갈등조차 인연의 마음으로 깊이 바라본다. 거기서 오래도록 성숙한 깨달음이 연꽃처럼 환하게 떠오른다. 윤관에게 인연은 바로 안과 밖을 이어주는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인데, 그의 시가 바로 윤관의 내면과 세상을 이어주는 인연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하루」에서 반전을 만난다. 윤관의 시가 쉽게 읽힌다는, 또는 반면에 깊은 사유와 깨달음 담은 시라는 양쪽의 편견을 불식한다. 개성 있는 시어, 반짝이는 문장을 넘어, 글이 흐르는 리듬과 사유의 충돌이 빚어내는 말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시간은 늘 흐르고

멈춘 채 흔들린다, 나는

깊어지는 고요를 감당할 수 없어

입자 고운 커피를 내리고

그대에게 편지를

그 편지는 기억이 겪어야 하는 미래

당신은 과거를 찢어내고 있겠지(p.36)

- 「좋은 하루」 중에서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은 현란한 사유의 행보 속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감각의 향연은 과연 무슨 생각으로 시를 지었을까 싶은 순간에 물 흐르듯 흐르는 언어의 리듬으로 속도감을 부여하고, 과감한 생략으로 시적 엇박자를 부여하며 흥미를 이끈다. 한 연으로 구성한 시 속에 이 엇박자를 배치한 것 자체가 뛰어나다. 시라는 것이 어떤 문법에 의해 구축된 의미의 완성이라기보다 시적 미학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표현이라고 했을 때, 독자로 하여금 추상과 구상 사이의 절묘한 긴장을 체험하게 하는 이 감각은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자아로서 부끄러움 뒤에 숨는 윤관은 실제로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좋은 하루」에서 슬쩍 자신감을 드러내는데, 사실 시집 곳곳에 자존의 자락을 안개처럼 깔아놓았다.

 


 

다만 내가 좋아 나를 쫓았고

내가 쓴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아

누군가를 속일 일도 사라져갔다(p.128)

- 「생각벌레」 중에서

 

말이나 글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으며

표현하지 못한 것들의 서러움이 밀려온다(p.69)

- 「나는 시를 꿈꾸지 않는다」 중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힘을 가진, 그리고 오래도록 생각의 층위를 다지며 사유와 실천의 인연을 이어온 자의 당당함이다. 그의 생각 어느 하나라도 순간적으로 떠오른 게 아니다. 오래오래 익은 것들이다. 시인은 그 무르익은 것들이 썩어서 그 어떤 사소한 것의 거름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 : 윤관(윤여성)

 

생업에 종사하며 일기 쓰듯 시를 씁니다. 1971년 태어났고, 대전에 삽니다. 적정선의 고민과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무게를 지고 날마다 걸어갑니다. 나는 이 길과 그 길을 걸어가는 작고 속된 이를 사랑합니다. 예전에 품었던 희망과 꿈들은 아득하지만, 이젠 중심도 변두리도 아닌 나로 살고 싶습니다. 이 한 권의 시집에 내가 남아 있습니다. 남겨진 나를 읽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모두가 인연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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