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지 - 시공을 초월한 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공원국.박찬철 지음 / 시공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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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지』는 시종일관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것’과 ‘사이비 인재 판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소는 사람의 타고난 성정과 재질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럴듯하지만 진짜가 아닌 재질을 가진 사이비 인재를 조심하라고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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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지 - 시공을 초월한 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공원국.박찬철 지음 / 시공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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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인물지』는 조조의 인사참모인 유소(劉邵) 조조의 능력주의를 포괄하면서 다양한 인물들을 판별해 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용인(用人)술과 지인(知人)술을 집대성한 책이다. 독자가 지금 소개하는 이 책 『인물지』는 공원국, 박찬철 두 저자가 「시공을 초월한 제왕들의 인사 교과서」(이하 『인물지』)라는 부제를 붙여 유소가 쓴 원전을 현대적으로 해설하고 중국 고대 상·주시대부터 명·청시대까지 약 100여 명의 인물을 선별해 그들의 이야기를 용인과 지인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원전 『인물지』가 전하는 〈인물 파악의 방법〉과 〈사이비 인재를 감별하는 방법〉, 〈인재 자신이 경계해야 할 일〉 등은 2,000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임을 두 저자는 말한다. 공동 저자는 편재들이 갖는 성공과 좌절, 또 리더들의 성공과 좌절을 살펴보고 인사에 관한 철학과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구성, 목차도 재배열했다. 이 책은 인성론과 조직론으로 구성된 의 조직론을 보강해, 각 편의 고사들을 당시의 사회상에 맞추어 배열하고 분석했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원소처럼 대단한 배경도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과 순욱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신하들의 힘에 의지해 나라를 세운 조조는 “능력이 있으면, 도덕적인 하자가 있어도 된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한나라 대에 만연했던 허명만 갖춘 인사들의 폐단을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소는 이러한 조조의 능력주의를 포괄하면서 인재 감별과 등용을 위한 체계를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원전 『인물지』라는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유소는 원전 『인물지』에서 사람마다 타고난 자질과 성정이 다른 이유를 규명하고,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파악하며, 그 자질에 따라 그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여 쓸 것인지 등 지인과 용인의 방법을 구징, 체별, 유업, 재리, 재능, 이해, 영웅, 접식, 팔관, 칠류, 효난, 석쟁 등 열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두 저자는 유소의 『인물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풀이하면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인사’를 살펴본다. 과거의 사례가 현재의 교훈이 되는 당연한 까닭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기존의 경서들과 달리 지인과 용인에 대한 매우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조조, 손권, 유비가 활약한 『삼국지』의 시대이다. 사실 삼국시대는 과거의 인사 제도의 모순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대체로 전한의 외척과 후한의 환관들, 그리고 상서의 직위를 장악하고 파벌을 형성한 파당들의 인사 전횡은 한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황건적의 난으로 각지의 군웅들이 할거하는 시대에 돌입했다. 대단한 배경도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과 순욱*으로 대표되는 모신들의 힘에 의지해 나라를 세운 조조는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조조는 극단적으로 “능력이 있으면, 도덕적인 하자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허명만 갖춘 인사들의 폐단을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소는 조조의 능력주의를 포괄하면서 그보다 더 체계적인 체제를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원전 『인물지』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원리들을 정리해냈다. 『인물지』는 한나라 이전의 인사 제도에서 수당 이후의 과거제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과도기적 저작이다. 그래서 『인물지』에서 다루는 내용은 후대의 도식적인 과거제나 전대의 협소한 인재 추천 관행들보다 더 풍부하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리더의 조건으로 업적 달성 능력, 조직 운영 능력과 더불어 인재 육성 능력을 꼽는다. 즉, 인재 없이는 목표한 업적도, 안정된 조직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인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적재적소에 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리더들이 고민하는 과제다.

* 순욱 : 삼방순욱(三訪荀彧)에서 축약 인용된 말로,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함을 이르는 뜻이다.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가 순욱(荀彧)을 세 번 방문한 끝에 그를 얻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두 저자의 『인물지』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두 저자는 『인물지』에서 원전 독해와 함께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인사’를 살펴보고 있다. 고전의 세계는 비록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류의 사유와 경험을 집적한 지혜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전 읽기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실제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고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저자는 이번 〈개정판 서문〉을 통해 "요즈음은 사회는 복잡해지는 반면 정보는 비대칭적으로 소유되고 불완전하게 유통된다. 알다시피 중고차 시장처럼 비대칭·불완전정보 시장은 사이비들의 요람이다. 예쁘게 포장된 중고차의 외관은 다 같지만 속은 완연히 다른 것처럼. 그렇다고 속을 알기 위해 차 전체를 해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고 밝힌다.

요컨대 요즘의 세계는 소수가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이 삼국시대 유소가 이 책을 쓸 때보다 커진 데다 사이비가 등장할 조건까지 다 갖춰졌으니, 큰 인사에 한 번 실패하면 해댱 조직은 물론 사회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 부도덕한 금융가 한 사람이 전체 금융시장을 무너뜨리고 어리석은 지도자 한 명이 한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다고 두 저자는 강조한다. 『인물지』에서 유소는 "그럴 듯하지만 아닌 일곱 가지 사이비"를 정의하고 이를 "극히 주의하라"고 경계했다. 유소가 정의한 사이비는 시대가 달라도 여전히 적절하다고 두 저자는 단언한다. 이 책에서도 중요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 유소의 원전 원문과 기타 역사에서 거론한 사실들을 들어가며 세밀하게 풀이하고 있다.

길을 잃으면 원점으로 돌아가듯 상황이 복잡할수록 다시 교과서를 펼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인사의 원리는 조직이 커지고 급이 높아질수록 더 단순해진다고 두 저자는 말한다. 어떤 이에게 큰 자리를 줄 때는 그의 말보다 행동을 근거로 하고, 친소나 호오를 버리고 이룬 업적에 따라 일을 주면 될 뿐이다고 설명한다. 두 저자는 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원칙을 덧붙인다. "싸울 때 화살과 갑옷이 모두 필요하지만, 조직 안에서는 반드시 갑옷 만드는 이를 화살 만드는 이 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원전 『인물지』를 쓴 유소는 위나라의 명신으로 조조의 인사참모였다. 원전 『인물지』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유소의 삶과 사상에 대해 조금 더 알 필요가 있겠다 싶다. 두 저자도 이 책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당시에 왜 이런 책이 등장했는지를 유소의 삶과 조위(조씨의 위나라)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살피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소는 원래 조조의 모사들 중 으뜸이었던 상서령 순욱(荀彧)의 관부에 있었다. 순욱은 그의 말을 매우 좋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태자사인, 비서랑, 상서랑, 산기시랑 등으로 승진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기밀과 인사를 처리하는 직책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상서랑은 황제에게 들어가는 문서를 먼저 검토하는 직위이고, 산기시랑은 황제가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비서와 같은 역할이다.

황제가 인재를 구하는 조서를 내리자, 당시의 산기시랑인 하후혜가 유소를 천거하며 이렇게 평했다. "성실한 인사들은 그의 화평하고 방정함에 감복하고, 청정한 인사들은 그의 현묘하고 겸양함을 흠모하고, 문학하는 인사들은 그의 논리의 정치함을 찬양하고, 법리를 다루는 인사들은 그의 정밀한 해석을 익히 알고 있으며, 사색하는 인사들은 그의 깊고 확고함을 알고 있으며, 문장을 쓰는 인사들은 그의 저술, 논변 및 문장들을 사랑하며, 제도를 다루는 인사들은 그의 제도에 대한 인식과 요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귀하게 여기며, 책략을 내는 인사들은 그의 명철한 사고와 기미에 통달한 점을 연모합니다.(p.11)

당시의 유소는 학문적으로 이미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위로부터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유소를 평가한 인물 기준은 『인물지』에서도 모두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재 유형들이다. 유소는 『인물지』 외에도 『법론』 등 100여 편을 저술했다고 하니 중앙정계에서 정치와 학문을 연결시킨 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황제의 조서를 받아 저술한 『도관고과都官考課』라는 저술이다. 이 조서는 위나라 명제 조예의 경초 원년에 내려졌으므로, 제국을 반석에 올리고자 하는 황제의 의중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그 제목을 풀면 “관리를 감독하고 성과를 측정한다”는 뜻인데 역시 조씨 위나라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유소는 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백관의 고과는 왕도정치의 큰 기본이지만, 역대로 여기에 힘쓰지 않아서, 통치의 법전이 완비되지 못했지만 이를 보충하지 않아서, 능력이 없는 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구분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유소가 말하는 것은 한나라 이래 시행된 중국의 인사제도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대체로 전한의 외척과 동한의 환관들, 그리고 상서의 직위를 장악하고 파벌을 형성한 파당들의 인사 전횡은 한나라의 근간을 휘둘렀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학자이면서 인사권의 중심에 있었던 유소의 분석이 집약된 『인물지』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두 저자는 역설한다.

책에 따르면 『인물지』는 황제와 그 하위의 인사권자를 위해 도식적이리만치 자세하게 인물 파악의 방법을 설명해 놓았다. 인물의 특징, 그 인물을 간파하는 법, 인사권자의 자질, 그리고 인재 자신이 경계해야 할 일까지 조목조목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물지』의 중심은 인성론이고 절반은 조직론이다. 즉, 조직에는 어떤 인재가 필요하며, 그 인재들의 본성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러나 저자가 본질적으로 더 강조하는 것은 인성론이다. 『인물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매우 명료해서 알아듣기가 쉽다. 이 책의 원문을 한 번 통독해도 얻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라 두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인 인성론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인성은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조직은 오랜 시간을 통해 진화해왔다. 예를 들어 3천년 전 춘추시대의 인사와 오늘날의 인사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중앙집권제와 봉건제가 섞인 한나라와 거의 완전한 관료제 국가인 청나라의 인사를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저자는 최근 고전을 기반으로 한 인재 활용 서적들이 상당히 등장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여러 고전의 문맥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그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 고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수준의 책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래서 고전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이야기들을 현대의 상황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현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위해 고전을 이용하는 경우도 생겼다. 물론 이런 방식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더 큰 맥락을 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지』라는 고전을 좀더 현대적인 의미로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두 저자는 『인물지』의 인성론을 가지고 한 권의 계통성 있는 작은 인물사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선 『인물지』의 각 항목과 부합하는 중국 역사상의 고사들을 취합하되, 중구난방식이 아니라 계통성 있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두 저자는 『인물지』의 각 편의 고사들을 당시의 사회상에 맞추어 배열하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요약한 중국사의 인사편’, 혹은 ‘인사로 본 중국사’ 정도가 되겠다. 이를 통해 『인물지』의 조직론을 보강하여 『인물지』의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상고 시절의 이상적인 인사에서 시작하여 춘추전국시대로 나가고, 진한대의 극적인 국면에서의 인사를 검토한 후,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시대의 군웅들의 인사로 나아가고, 대 혼란기인 5호16국과 남북조시대 및 재통일 정권들인 수와 당의 인사를 살핀 후, 특이한 문치 시대를 만든 송의 인사와 그리고 거친 초원 민족들의 활달함을 보여주는 요ㆍ금ㆍ원의 인사를 대비시켰다.

이후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황제의 전권을 이룩한 명대의 인사와 또 중원에 새 활력을 불어넣은 청조의 인사를 함께 살피면서 마무리했다. 각 시대마다 왕조가 처한 상황과,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이 차이가 있었기에 인사의 유형도 차이가 있었다. 물론 차이의 이면에는 변함없는 인사의 원칙들이 놓여 있었다. 이 시기들을 따라가며 함께 인사를 고민한다면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두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은 모두 4부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총론: 인재를 알아보는 첫 단계〉, 2부 〈인재의 분류와 용인의 기술〉, 3부 〈지인의 기술〉, 4부 〈결어〉이다. 1부에서는 1장 「드러나는 것으로 재질을 알아볼 수 있는가-구징(九徵)」에서 '인물의 성정과 재질의 아홉 가지 형태'와 '인재의 다섯 가지 등급'에 관해 설명한다. 2장 「사람의 재질은 왜 차이가 나는가-체별(體別)」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마다 타고나는 성정이 있다' '성정에 따라 하는 일에도 장단이 있다' '유약한 사람의 지혜는 두렵지 않다' '한 가지 재질에 치우친 성정은 바뀌기 어렵다' '인물 알기의 어려움과 묘미' 등을 말한다. 3장은 「인재는 재질과 유파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가-유업(流業)」에 관한 기술이다. '덕·법·술, 각 방면의 최고 고수: 청절가, 법가, 술가' '덕·법·술의 재질을 모두 갖춘 최상의 인재: 국체, 기능' '덕·법·술, 각 방면의 지류: 장비, 기량, 지의' '기능별 전문가들: 문장, 유학, 구변, 웅걸' '사람을 아는 것이 군주의 도다' 등으로 나뉘어 설명한다. 또 4장에서는 「인재는 말하는 능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재리(材理)」에 대해 말한다. 이 장에서는 '사이비 인재의 일곱 유형'에 대해 풀이하고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두루 살펴 적용해볼 만하다는 것이 독자의 심경이다. 5장은 「어떤 인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재능(材能)」에 관한 설명으로서 '적재적소'라는 낯익은 단어로 설명되니 이해하기 쉽다.

6장은 「인재를 쓸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이해(利害)」편으로 '덕·법·술'의 장단점을 모두 자세히 적시함으로써 인사권자의 올바른 사용을 꾀한다. 7장은 「어떤 인재가 성과를 내는가-영웅(英雄)」을 설명하고, '영웅은 지혜와 힘의 결합'이라고 표현한다. '영(英)'과 '웅(雄)'의 글자 풀이로부터 이 말의 유래까지도 함께 알 수 있는 재미도 있다. 8장에서는 「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어려운가-접식(接識)」에 대한 설명으로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생기는 오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8장은 「인재를 감별하는 여덟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팔관(八觀)」에 대해 '전후 관계를 살펴 사이비를 알아내는 법' '자애와 공경의 태도를 살펴 소통하는지를 알아내는 법'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살펴 군자인지 알아내는 법' '단점을 살펴 장점을 알아내는 법' '총명함의 정도를 살펴 수준을 알아내는 법'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10장은 「인재를 감별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는 무엇인가-칠류(七繆)」로서 '명성' '자신의 기준' '포부의 크기' '성취' '배척' '지금 상황으로 판단'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7가지 오류를 말한다. 11장은 사실상 마지막 장으로 「왜 인재 발굴과 추천이 어려운가-효난(效難)」, 12장의 경우 「진정한 인재는 어떤 사람인가-석쟁(釋爭)」을 다룬다. 특히 12장의 석쟁은 "다투지 말라"는 뜻으로 자기의 공을 앞세우거나 자랑하지 말라, 이기기를 좋아하지 말라 등의 겸손과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라"는 공자의 말이나 "겸양", "공은 이룬 후 물러서라"는 등 공자의 가르침과 매우 흡사한 부분이 많다.

 


 

동서고금, 모든 리더들이 인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좋은 인재를 찾아 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사이비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2,000여년 전에 쓴 인사 교과서 책이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고전이 될 정도로 책을 잘 쓴 것보다 오히려 그때보다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면서 사이비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저자는 사이비이기에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원전 『인물지』와 함께 두 저자의 『인물지』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바로 겉으로 넘친다는 것이다. 사이비들은 대체로 ‘막힘없는 듯’, ‘박식한 듯’,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가, 막상 궁지에 몰리면 ‘응답하지 않거나’ ‘이해했다고 하거나’ ‘물 타기’를 시도해서 비기려고 한다. 이런 사이비들은 내실이 없는 데도 말이 화려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치 유능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특히 이들에게 현혹되어 중책을 맡겼을 경우 그 폐해는 예나 지금이나 상상 이상이다. 이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혹세무민하는 사이비의 다양한 유형은 『인물지』가 선사하는 또 다른 재미다.

 

저자 : 공원국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공부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인류학자의 시각으로 대안적 세계사를 제시하기 위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하며 《유목, 세계사의 절반》(가제)을 집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10년간의 대장정 끝에 집필한 《춘추전국이야기》(전 11권), 《귀곡자》(공저),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 기행》,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가문비 탁자》, 《나의 첫 한문 공부》,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 기행》, 《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 병법》,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하버드 C.H. 베크의 세계사 1350~1750》,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말, 바퀴, 언어》, 《중국의 서진》 등이 있다.

 

저자 : 박찬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출판기획사 Culture Map을 운영하며 중국 관련 콘텐츠를 개발, 번역한다. 동양고전을 비롯한 역사 인물과 사례 등을 통해, 진지하지만 다른 시각을 담은 담론과 교훈을, 때로는 실재하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귀곡자》(공저),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나를 지켜낸다는 것》, 《세계사를 바꾼 15번의 무역전쟁》, 《주역의 정석 1》, 《참모의 진심, 살아남은 자의 비밀》, 《운이 스스로 돕게 하라》,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판세를 읽는 승부사, 조조》,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 《격탕 30년: 현대 중국의 탄생 드라마와 역사, 미래》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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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 2 - 자본주의부터 세계대전까지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오미야 오사무 지음, 김정환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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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벽두부터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 공포됐다. 바이러스의 인류 대공습이 100년 만에 또 시작된 것이다. 그때는 바이러스의 공습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몰랐다. 의학자들과 각 나라 정치인들은 팬데믹이 얼마나 갈지 모르고 더 큰 문제는 치료제는 물론 백신도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암담하고 막막한 국경 폐쇄와 자국 내에서도 이동이 제한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우리나라 환자 발생, 사망, 확산 등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적절한 대처 시스템도 능력도 없었다. 치료제나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의사나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오로지 예비 감염자 예방 수칙만 되풀이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감염자가 발생할 경우 역학 추적 조사하던 일마저 너무 많은 감염자 앞에서는 손을 들었다.

이젠 개인 방역 철저, 외출 자제밖엔 답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암담해졌다. 연인 수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보고되며 마치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올라가는 자동미터기처럼 사망자 수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사망자 수가 전 세계적으로 수백 만을 넘어서자 사망자 수 발표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된 이후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백신과 치료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일부 나라에선 집단 방역 체계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가운데 돈을 벌어야 그날 먹고 사는 돈 없는 서민들이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침묵의 행진을 계속했고, 이젠 코로나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는 엔데믹 선언도 있었다. 물론 백신과 치료제도 발명돼 엔데믹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 책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 2』는 이번 코로나 팬데믹으로 느낀 인류의 생존 문제를 최일선에서 다루는 학문인 '화학 이야기' 두 번째 책이다. 전편에 이어 시대 배경은 19~20세기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고 제국주의가 횡행하는 와중에 세계 열강의 끝간 데를 모르는 욕망이 서로 충돌하다가 종국에 제1·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전쟁을 해온 인류의 역사는 화학 등의 발전으로 근현대에 200년 간 치른 전쟁의 사망자 수에 못 미친다. 화학 등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삶에 이로운 점을 접목시키기 이전에 전쟁과 무기 발달을 가져왔다. 당초 전쟁 무기를 목적으로 발명되거나 발달하지 않았지만 전쟁은 꾸준히 과학 지식을 전쟁에 이용한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이 빚어내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욕망과 이기심이 그대로 또 적용되는 악순환 현상이다. 이전 교보문고 65주 연속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교보문고 ‘2019년을 빛낸 역사책 100권’ 1위(『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2021년 교육청 학생교육문화원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행복한 아침독서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교보문고 CEO를 위한 북모닝도서(『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우주 탄생부터 산업혁명까지』) 등 주요 온·오프라인서점에서 베스트&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꾸준히 판매되어 왔다. 특히 내용과 가치 면에서도 평론가들이나 독자들로부터 모두 인정받은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책 중 하나다.

 


 

이 책에는 인류가 수천 년간 해결하지 못한 식품 장기 보존 문제를 해결하여 세계 전쟁사를 바꾼 프랑스 요리사 아페르의 ‘밀폐 보존 용기’와 양국 발명가 듀란드의 ‘통조림’ 발명 이야기에서부터 영국의 ‘로켓 개발 실패’가 초강대국 미국 탄생의 원동력이 된 아이러니한 이야기,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고층빌딩 건설을 가능케 하는 영국 벽돌공 조지프 애스프딘의 ‘포틀랜드시멘트’ 발명 이야기, 산모에게 치명적인 산욕열의 원인을 밝혀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도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학대받다가 비참하게 죽은 헝가리 의사 겸 과학자 제멜바이스의 가슴 아픈 이야기, 19세기 중반 무렵 발명된 초기 냉장고·냉동고의 냉매로 ‘독가스’가 사용된 섬뜩한 이야기, 20세기 초반에 엄격히 시행된 ‘금주법’이 ‘코카콜라 제국’의 버팀목이 된 이야기, 평범한 일하는 여성의 위상을 왕후·귀족의 위상과 동등하게 만들어준 인조 견직물 ‘레이온’ 이야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양상을 크게 바꾼 투명 아크릴 플라스틱 ‘유기유리’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열쇠였던 ‘성능이 향상된 휘발유’ 이야기 등 화학을 둘러싼 흥미진진하면서도 뇌세포를 활성화시킬 만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이 가운데 몇 가지만 뽑아서 알아본다. 모두 다 굉장한 발명이고 발견이지만 여기에 내용을 다 쓸 수는 없기에 독자가 임의로 좋아하는 몇 개의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한다. 건축 패러다임을 바꾼 ‘철근 콘크리트’ 개발, 자동차 사회의 주춧돌이 된 ‘공기를 넣은 고무 타이어’ 발명에 이르기까지 최첨단 문명을 꽃피운 물질의 중심에는 ‘화학’이 있었다. 독자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화학이란 물질의 정체와 변환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핵심 분야이다. 화학은 물질의 정체와 성질을 원자와 분자의 수준에서 설명하고,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하는 화학 반응의 특성을 연구한다. 인류는 50만 년 전 불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화학적 변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화학은 수천 년 전부터 여러 문명권에서 발달했던 다양한 형태의 '연금술'이나 '연단술'에서 비롯되었고, 오늘날 화학은 자연과 인간의 정체와 생명 현상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첨단과학으로 발전했다. 화학을 기반으로 하는 화학산업은 인류의 삶에 필요한 다양한 소재와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풍요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한 삶은 화학에 의해 마련된 물질적 기반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화학 기술의 무분별한 오용과 남용에 의한 환경 오염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화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전 지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학 기술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운명이라고 하면 너무 문학적 표현이 될까? 콘크리트는 석회암 지대에서 가장 먼저 발명되고 발전해 왔다고 한다. 고대 로마가 콘크리트를 발명해 수많은 곳에 적용함으로써 완벽한(?) 건축물을 완성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2,000년이 지나서야 고층건물을 지을 때 필요한 철근콘크리가 발명되고 건축 패러다임이 바뀐다.

프랑스 정원사 조제프 모니에가 철근과 콘크리트의 장점을 결합해 만든 ‘철근 콘크리트’가 건축 패러다임을 바꾸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 특허를 취득한 지 19년째 되던 1885년, 독일 건축가 구스타프 바이스가 모니에의 ‘철근 콘크리트’의 뛰어난 내구성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200만 마르크라는 거액에 특허권을 사들이면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였다. 이후 바이스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빌딩·교량·콘서트홀 등 대규모 건설에 폭넓게 활용하며 건축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해 나갔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계기로 ‘철근 콘크리트 공법’은 20세기 건축의 확실한 주류로 자리 잡았고 현대 문명의 발전 방향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대지진으로 초토화된 거리에 파손되지 않고 건재한 창고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이 ‘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였다.

 


 

오늘날의 자동차 사회를 지탱하는 주춧돌 격인 ‘공기를 채운 타이어’를 발명하고 상용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의외의 인물이 있다. 존 보이드 던롭으로, 그는 과학자나 공학자가 아닌 아일랜드 출신 수의사였다. 그는 어떻게 ‘공기를 채운 타이어’라는, 시대를 바꾸고 세계사를 바꾸는 혁신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던롭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당시 열 살이던 아들의 자전거 경주 대회 참가 준비를 돕는 과정에 발생한 상황이었다. 나무 바퀴에 고무 막대를 붙여서 만든 자전거 바퀴의 고무가 닳아서 끊어지고 만 탓이었다. 난감한 문제를 해결할 묘책을 궁리하던 던롭의 머릿속에 갑자기 쌈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 예전에 내가 치료한 적 있는 어느 동물의 배가 팽팽하게 부풀어 몸이 팽창했었지? 그런 식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팽팽해진 고무 튜브를 바퀴에 붙이면 되지 않을까?’

그는 지체 없이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바람이 잔뜩 들어가 팽팽해진 고무 튜브를 나무 바퀴 바깥쪽에 도넛 모양으로 붙여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공기를 채운 고무 타이어’는 던롭의 아들에게는 자전거 경주 대회 우승 트로피를, 던롭에게는 특허와 함께 엄청난 부와 명예를 선사해주었으며, 오늘날의 자동차 사회를 지탱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이 자신의 동물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의 자전거 경주 대회 참가를 돕고자 바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리하던 중 일어난 ‘세렌디피티’이자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흥미진진한 일화다.

 

"제1병동의 산욕열 발병률이 제2병동과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1847년 이후의 상황이다. 이는 전적으로 제멜바이스가 깨끗이 손을 씻고 철저히 소독하도록 한 덕분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848년부터 소독 대상을 의료기구로까지 확대하자 산모가 산욕열로 사망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제멜바이스는 논문을 통해 의사의 손이 산욕열을 전염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온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산욕열을 예방하려면 염소수를 이용한 소독이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사회는 “의사를 살인자 취급하다니!”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그를 의사회에서 추방해버렸다. 결국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는 모욕적이고도 참담한 일까지 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질게 학대받는 과정에 생긴 상처가 원인이 되어 감염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잔혹한 운명에 농락당하면서도 인류를 구원한 비운의 천재였다."(p.102~103)

 


 

앞서 언급한 대로 바이러스 습격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죽이는 물질을 발견한 것도 필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이다. ‘우연한 생물학적 발견과 발명’으로 인류사의 난제 중 난제였던 ‘높은 영유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세계인의 평균 수명을 크게 늘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 있다. 영국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플레밍은 어떻게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런던 세인트메리병원에서 세균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한천 배지를 많이 만들어 황색포도상구균(감기에 걸렸을 때 콧물이 노래지는 원인이 되는 균과 같은 부류)을 샬레에 배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여름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휴가 기간 동안 다른 연구자에게 연구실을 빌려주기 위해 정리하느라 그 샬레들을 그늘진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급하게 치우느라 미처 뚜껑을 덮지 못한 샬레도 몇 개 있었다.

긴 휴가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온 플레밍은 배지에 푸른곰팡이가 생긴 샬레를 발견했다. 그는 다시 황색포도상구균을 배양하기 위해 소독을 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푸른곰팡이가 생긴 이상 순수 배양은 실패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플레밍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푸른곰팡이가 생긴 샬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푸른곰팡이가 번식한 곳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죽어서 배지가 투명해져 있었다. 플레밍은 그 푸른곰팡이가 세균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푸른곰팡이 연구와 배양에 착수했다. 이후 플레밍은 그 푸른곰팡이가 생산하는 미지의 물질을 ‘페니실린’으로 명명했다. 그는 또 푸른곰팡이의 배양액을 여과한 물질이 세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플레밍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영예를 안겨주고 세계 의학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푸른곰팡이는 어디서 날아왔을까? 그의 연구실에서 공기를 타고 올라와 샬레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된 푸른곰팡이와 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이 1900년대에 31세였던 세계인의 평균 수명을 오늘날 73세 정도까지 획기적으로 늘려놓았으니 세계 의학사는 물론이고 세계사 그 자체를 크게 바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저자 : 오미야 오사무(おおみや おさむ, 大宮理)

 

도립 니시고등학교, 와세다대학교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대형 입시학원 화학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가와이주쿠(河合塾, 대형 입시학원으로, 일본 전국에 수백 개의 지점 보유) 나고야 지구 강사로 나고야와 도쿄를 오가며 강사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독서, 식도락, 술, 요리, 미식, 자전거, 바다 수영, 여행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사는 저자는 인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시리즈 전작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 ─ 우주 탄생부터 산업혁명까지』와 이 책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 ─ 자본주의부터 세계대전까지』는 그 값진 첫 열매라 할 수 있다.

 

역자 : 김정환(金廷桓)

 

건국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통번역과를 수료했다.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 권에 흥미를 느끼고 번역 세계에 발을 들였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자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경력이 쌓일수록 번역의 오묘함과 어려움을 느끼면서 항상 다음 책에서는 더 나은 번역,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번역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공대 출신 번역가로서 논리성을 살리면서도 문과적 감성을 접목하는 것이 목표다. 야구를 좋아해 한때 iMBC스포츠에서 일본 야구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번역 도서로는 『재밌어서 밤새 읽는 화학 이야기』『법칙, 원리, 공식을 쉽게 정리한 수학 사전』『자동차 구조 교과서』『비행기 조종 교과서』『근현대 전쟁으로 읽는 지정학적 세계』『세상의 모든 법칙』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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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로리 넬슨 스필먼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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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한 전설로부터 비롯된다. 전설의 내용이 책의 「프롤로그」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에 이탈리아 트레스피아노 마을에 얼굴도 심성도 별로인 필로미나 폰타나라는 소녀가 살았다. 소녀는 폰타나 가문의 모든 둘째딸들에게 평생 사랑 없이 살라는 저주를 내렸다. 소녀의 여동생 마리아는 미모를 타고나는 복을 받았다. 소녀는 갓난아이 마리아가 엄마의 품에 다정히 안겨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순간부터 그 아이를 원망했다.

세월이 흘러 두 자매는 십 대가 되었고 필로미나의 어린 시절 시샘은 곪아 터질 정도로 깊어졌다. 필로미나의 애인인 코시모는 바람기가 다분한 청년이었는데 마리아를 보자마자 홀딱 반했다. 마리아는 피하려 했지만 그는 끈질겼다. 필로미나는 마리아에게 경고했다. "네가 내 애인 코시모를 뺏으면 넌 모든 둘째딸들과 함께 평생 저주를 받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코시모가 폰타나 가족과 소풍을 갔을 때,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겠다 싶은 강가로 마리아를 몰아갔다. 코시모는 마리아를 와락 붙들고 억지로 입을 맞추었다. 마리아가 코시모를 홱 밀치려는 찰나 필로미나가 나타났다. 입맞춤하는 장면만 본 필로미나는 격분했다. 그녀는 강가에서 돌멩이를 집어들어 동생에게 던졌다. 돌멩이가 마리아의 한쪽 눈에 맞았다. 마리아는 시력을 잃었다. 다친 쪽 눈이 갈수록 찌그러져 내려앉았다. 마리아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며 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이 일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이 씨가 된 경우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사실이 있다. 200여년 전에 필로미나가 저주를 내린 이래로 폰타나 가문의 둘째딸 중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람을 찾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자가 이 저주의 전설을 자세하게 프롤로그를 대신해 쓰는 이유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세 여성이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시민들이고 지금은 주인공 에밀리아의 가족이 운영하는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있는 스물아홉 살의 미혼이기 때문이다. 또 사촌인 스무 살의 루시아나, 이모할머니 포피도 모두 둘째딸이다.

 


 

토스카나(Toscana)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광역행정구역이며 주도는 르네상스 발상지로 유명한 도시 피렌체다. 이곳에는 우피치 미술관, 피티 궁전 등 유명한 건축물이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회화의 아버지 치마부에, 조토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문인으로는 피렌체 출신으로 '신곡'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가 있다. 카라라의 대리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인기 있는 여행지는 피렌체, 피사, 그로세토, 시에나 등이다. 카스티글리오네 델라 페스카아 마을은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찾는 해변 휴양지이다. 토스카나주에는 피렌체의 역사적 중심지(1982년), 피사의 대성당 광장(1987년), 산지미냐노의 역사 중심지(1990년), 시에나 역사 중심지(1995년), 피엔자 역사 중심지(1996년), 발 도르시아의 역사 중심지(2004년), 메디치 빌라를 포함한 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유럽지명사전에 따르면 토스카나라는 지명은 BC 1000년경 이곳에 정착한 에트루스칸 부족에서 유래되었다. 3세기 고대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어 롬바르드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 이미 카노사, 모데나, 레지오, 만투아를 소유하고 있던 아토니 가문이 토스카나 주를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중부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1115년 토스카나주 도시들은 독립을 지향하며 서로 투쟁하였다. 피사와 피렌체가 연이어 지배권을 차지했다. 1434년 메디치 가문이 등장하고 권력이 통합되면서 토스카나 공국으로 변모했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공작 지안 가스톤이 사망하자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사의 남편인 프란츠에게 배속되었고, 그의 아들 레오폴트 1세가 물려받았다. 당시 교회 특권이 취소되며 내부 무역 장벽이 제거되고 사형이 폐지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어 페르디난트 3세가 토스카나 공국을 다스렸다. 1790년대 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됐고 1808년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페르디난트 3세가 대공의 지위를 회복하고 다시 통치자로 복권했다. 프랑스인들이 도입한 개혁 중 상당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848년 이탈리아 전역에 자유주의 혁명이 확산되면서 1849년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860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이토록 길게 독자가 토스카나에 대해 여기에 적고 있는 것은 주인공 세 여성이 이곳을 방문하는 여정이 이 소설에 담겼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은 베이커리에서 파티시에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 에밀리아와 사촌인 스물한 살 루시아나는 모두 둘째딸임이 밝혀지는 과정이다. 둘은 또 다른 둘째딸이자 집안에서 만남이 금지된 이모할머니 포피의 여든 번째 생일맞이 이탈리아 여행에 초대된다. 포피는 여행에 동행해준다면 자신이 여든 살 생일에 라벨로 대성당 계단에서 평생의 사랑과 재회해 폰타나 가문 둘째딸들의 저주를 완전히 깨주겠다고 약속한다. 저주를 믿지 않는다면서도 내심 스스로 희생자를 자처하며 싱글의 삶에 만족하는 에밀리아와, 저주를 믿기에 오히려 그것을 깨고자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루시아나는 가문의 ‘이단아’ 포피 이모할머니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이 8일간의 여정에는 이탈리아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과 이탈리아 음식의 그윽한 풍미가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날 무렵,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이야기가 그들을, 독자들을 기다린다.

옛 노래가 울려 퍼지고 옛 이탈리안 레시피가 그대로 살아 있는 뉴욕 브루클린의 베이커리. 토스카나 출신 가족이 운영하는 이 가게에서 주인 할머니 로사 폰타나 루케시가 올리브와 구운 고추와 페타 치즈를 정리하고, 사위가 얇게 썬 프로슈토를 진열대에 옮기는 사이 스물아홉 살의 손녀 에밀리아는 주방에서 72개의 카놀리를 채울 크림을 만든다. 에밀리아는, 자신이 만든 이탈리안 디저트들에 대한 수많은 칭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손님들 앞에 자랑스레 파티시에로 내세우지 않는 가족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아기자기한 집과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있고 빚이 없는 데다, 폰타나 가문 ‘둘째딸의 저주’를 갖고 태어났으니까. 둘째딸은 영원히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저주를 에밀리아는 물론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연애 관계의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안전한 싱글의 삶에 만족하는 데 유용한 구실이 되어주는 게 사실이다.

 

 

오래된 저주와 가족 미스터리, 러브스토리가 함께 녹아든 이 소설은 자지 스필먼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자매들처럼 가족 내 여성들의 관계를 중심에 두면서도 유럽의 냉전 시대와 이민자 세대의 고달픈 삶, 향기로운 이탈리아 여행기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전개된다.

에밀리아와 달리 저주를 철석같이 믿는 사촌 루시아나(루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지만 역시나 저주 탓인지 아름다운 외모에도 연애 운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에밀리아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발신인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던 이모할머니(외할머니의 여동생) 포피 폰타나.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 가족과 불화를 일으킨 탓에 집안 전체에서 만남을 금지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에밀리아는 사이 좋게 지내는 돌피 삼촌이 가져다 준 우편물 속에 보라색 봉투를 발견하고 확인한다. 필라델피아 소인이 찍혀 있고 손으로 주소를 쓴 봉투다. 에밀리아의 미소가 사라진다. 몸이 굳는다. 화려한 서체로 적인 이름과 주소가 왼쪽 위 구석에서 확 띈다. 포피 폰타나. 할머니랑 돌피 삼촌과 소원해진 여자 형제. 파올리나. 멀리 있지만 항상 에밀리아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수께끼 같은 이모할머니의 이름이다. 그는 할머니 가운데 에밀리아가 만나는 것이 금지된 유일한 친척이다.

 

"사랑하는 에밀리아에게,

부탁을 하려고 편지를 쓴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냥 부탁은 이나구나. 사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려고 해. 있잖아, 내가 하려는 제안이 네 인생을 바꿔놓을 거란다. (중략) 나는 여든 살 생일을 기념해서 올가을에 내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간다단다. 너랑 함께 가면 좋겠구나. 헉 소리가 나온다. 이탈리아에? 나랑? 나는 이모할머니를 잘 모른다. 그래도 넓게 펼쳐진 포도밭과 해바라기 들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다. (중략) 나와 이탈리아에 가면, 너와 루시아나는 저주에서 벗어나 돌아오게 될 거야.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중략) 무엇이 진실인지 네가 스스로 결정해서 믿을 때 생길 일을 상상해보렴.”(p.32~33)

 


 

이모할머니 포피가 계획한 여행 일정에 따르면 그들은 8일간의 여정 마지막 날인 포피의 여든 살 생일에 아말피 해안의 마을 라벨로에 꼭 도착해야 한다. 수십 년 전 약속에 따라 일생에 단 하나뿐인 사랑과 라벨로 대성당에서 재회하고 집안의 저주를 깨기 위해서다. 에밀리아는 외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시와 함께 포피를 따라 이탈리아로 떠난다. 포피는 날렵한 몸에 건강한 올리브색 피부를 가졌으며 팔과 어깨를 드러낸 원피스를 즐겨 입는 멋쟁이로 유쾌하고 다정하며 매혹적이다. 초반에는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세 사람은 여행길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베니스에서 토스카나를 거쳐 아말피 해안에 이르는 동안 포피는 가족에 얽힌 이야기와 스무 살 무렵 이탈리아에서 만난 첫사랑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애절한 사연을 들려준다.

그 속에서 에밀리아와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던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주체적으로 변해간다. 엄마 대신 키워준 외할머니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늘 소심했던 에밀리아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매력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루시는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루하루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 앞에 가족사의 숨겨진 진실이 비로소 드러난다.

세대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은 물론 성격도 제각각인 세 여성의 이탈리아 여행은, 동시에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너무 일찍 죽어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해 에밀리아가 물어볼 때마다 포피의 입에서 한 타래씩 풀려 나오는 폰타나 가문의 이야기는, 1959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트레스피아노에서 소작농이었던 가족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미국 이주를 꿈꾸던 시기로부터 시작된다. 땅을 가진 자들만이 부유하던 이탈리아의 호황기에 미국에서의 새 출발을 준비하던 이들, 다른 한편 가족을 떠나고 환경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던 이들이 한 지붕 아래 살던 그 시절은, 냉전 시대 동독을 탈출하거나, 탈출했다가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거나, 장벽 건설로 그곳에 유폐된 사람들도 함께하던 시절이었다.

 


 

이 소설은 에밀리아와 포피 두 사람의 화자가 이끌어간다. 포피가 에밀리아와 루시에게 들려주는 독백 같은 말속에서 포피의 비밀스러운 과거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아룸다우면서도 서글프게 펼쳐진다. 여행에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고 포피에게 회의적이던 두 사람은 점차 포피의 아픔과 그리움에 공감하고 여든 살 생일날에 아말피 해안의 성당 계단에 도착해야 한다는 오랜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자유와 사랑이 있는 삶을 꿈꾸는 젊은 세대가 전통을 혹은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가족들과 부딪치며 얽히고설킨 역사가 포피의 입을 통해 또 다른 세대인 에밀리아와 루시아나에게 전해진다. 이 이야기 전승과 달콤하고 때로는 씁쓸한 우여곡절 가득한 이탈리아 여행으로 그들은 가족이라는 엉킨 매듭 안에서 서로의 뿌리를 이해하고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공감에 이른다.

에밀리아와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던 헛된 믿음에서 빠져나와 주체적으로 변해간다. 엄마 대신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구박을 감수하는 데다 언니에게도 늘 이용당하던 에밀리아는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게 되고 스스로 선택하여 자유롭게 살기로 한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매력을 깨닫게 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잘 소개돼 있다고 이 책의 역자 신승미는 「이탈리아로 떠난 세 여자의 자아와 사랑 찾기」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에서 확인해준다. 그리고 에밀리아와 루시는 모든 고정 관념처럼, 진짜 저주는 미신이 일으키는 절망감, 자신감 붕괴,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우리 안에 감춰진 회복력을 깨어나게 하는 이 가족 성장소설에서 ‘둘째딸들’은 두려움과 죄책감과 거짓 믿음을 떨치고 운명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이름이 된다.

“언젠가 알게 될 게다, 에밀리아. 삶이 항상 동그란 원은 아님을. 그보다는 우회로와 막다른 길, 거짓된 시작과 가슴 아픈 이별이 있는 뒤얽힌 매듭일 때가 더 많단다. 길을 찾을 수 없고 지도가 있어봐야 소용없는, 부아가 치밀고 어찔어찔한 미로지.” 포피가 내 손을 꽉 쥔다. “하지만 모퉁이 하나도, 커브 길 하나도 절대로,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된단다.”(p.330)

 


 

어둠 속에서 포피의 눈이 반짝인다. “결국 삶은 간단한 방정식이란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마다-그 대상이 남자든 아이든, 고양이든 말이든-이 세상에 색채를 더하게 되지.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면 색을 지우게 되고.” 포피가 씩 웃는다. “암울한 흑백의 연필 스케치에서 진정 아름다운 유화로 가는 이 여정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란다. 그 사랑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p.444~445)

 

저자 : 로리 넬슨 스필먼(Lori Nelson Spielman)

 

미국 미시간주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어치료사와 생활지도 상담사, 가정방문 교사로 일하다 첫 소설 『라이프 리스트』로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라이프 리스트』는 30여 개국에서 27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독일, 이스라엘, 대만 등 6개국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20세기 스튜디오에서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 데뷔작의 놀랄 만한 성공 이후 두 번째 소설 『달콤한 용서(Sweet Forgiveness)』와 세 번째 소설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The Star-Crossed Sisters of Tuscany)』을 발표하며 계속해서 작가로서의 저력을 입증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어머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자매들처럼 가족 내 여성들의 관계에서 반짝이는 이야기가 탄생하곤 한다. 이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와 활기 넘치는 모험은 늘 독자를 가슴 뛰는 발견으로 이끈다. 스필먼은 현재 미시간에서 남편과 말썽쟁이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역자 : 신승미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잡지 기자로 일했다. 국문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 인문,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살인 플롯 짜는 노파』 『파친코』(전2권) 『삶, 죽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 『여보세요, 제가 지금 죽고 싶은데요』 『진홍빛 하늘 아래』 『인형의 집』 『몽키 마인드』 『나는 나부터 사랑하기로 했다』 『살며 사랑하며 글을 쓴다는 것』 『언브로큰』(전2권)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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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딸들의 완벽한 범죄
테스 샤프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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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 『완벽한 딸들의 완벽한 범죄』의 주인공 노라는 겉으론 여느 10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실제 이름도 노라 오말리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이름 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이름일 뿐이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노는 듯 보여도 그건 단지 연기이자 엄마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방식일 뿐이다. 노라는 그렇게 다양한 성격, 외모뿐만 아니라 여러 이름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레베카, 사만다, 헤일리, 케이티, 애슐리. 이들은 모두 노라의 엄마가 그녀 자신이 목표로 삼고 싶은 잠재적인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기반으로 훈련시킨 소녀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모두 현재의 사기꾼에 걸맞게 설계된 모녀의 외관이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노라는 그 모든 소녀에게서 벗어났다. 한때 자기처럼 엄마의 제자로 단련되었던 언니 덕분에 노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재구성한 끔찍한 엄마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전직 사기꾼 노라는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인 다역'이 가능한 영화처럼. 하지만 은행 강도 사건의 인질이 되었을 때 노라는 극한의 시험에 들고 만다. 이번만큼은 탈출 계획이 없다. 이제 친구들을 살려내려면 한때 그 소녀였던 ‘딸들’의 모든 사기 기술을 총동원해야 한다. 총잡이들이 노라 오말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에.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은행 강도의 인질이 된 노라와 친구 아이리스, 웨스의 현재 시점과 노라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노라와 언니 리가 어떻게 엄마로부터 벗어났는지, 노라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짓까지 저질러야 했는지 과거 회상식으로 이어진다. 노라의 친구 두 명의 과거도 함께 저자 테스 샤프는 보여준다. 그들간의 관계와 현재 노라의 처지에 대해서도 천천히 유기적 관계를 이루어 스토리 전개에 쌓는다. 소설은 모두 6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영화의 신 넘버처럼 장면이 바뀌고 넘버가 바뀐다. 소설 읽는 동안 영상처럼 머리를 스치는 장면들이 오래 남을 듯하다.

 


 

소설의 주인공 노라 오말리는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여러 인생을 살았다. 사기꾼의 딸로 태어난 노라는 자연스럽게 사기를 배웠고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수제자로 자란다. 하지만 엄마가 목표물과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 노라는 궁극의 사기를 치기로 결심한다. 엄마와 그 목표물로부터의 탈출. 그 후 5년 동안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을 하던 노라는 녹슨 기술을 다시 발휘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은행 강도에게 인질로 잡힌 것이다. 한때 희대의 사기극 중심에 섰던 노라의 정체에 대해 은행강도범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이 인질이 바로 그 유명한 여자아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노라는 레베카, 사만다, 헤일리, 케이티, 애슐리라는 이름을 상황에 맞춰 변신하고 변신했다. 실제 변신은 아니지만 상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고 적절하게 대처해왔다. 작품 속 주인공은 독백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

 

"나는 이런 소녀들을 거쳐왔다. 우리 엄마가 먹잇감을 완벽하게 사기 치기 위해 분신하는 여자들의 완벽한 딸. 이 딸들은 나였지만 모두 제각각 달랐다. “최고의 사기꾼은 그럴듯해야 해. 진실의 향기가 나야 한단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진실의 향기를 뿜기 위해 엄마는 이야기를 지어내었는데, 너무나 그럴듯한 사연들을 지어내서, 사람들은 그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p.53)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운 없게도, 정말 운 없게도 마음 잡고 사는 중에 은행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은행 강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 10대 사기꾼 노라 오말리. 노라는 여자친구인 아이리스, 그리고 전 남자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웨스와 함께 초조하게 탈출을 계획하고 있다. 저자 테스 샤프는 거짓말과 폭력의 삶 속에서 태어난 노라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노라의 엄마는 폭군(학대라는 의미로 들린다), 범죄자들을 상대하는 사기꾼으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딸에게 각기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여 그에 맞는 성격과 머리 색깔을 갖도록 했다. 따라서 노라는 착하고 순진한 소녀나 여린 피해자 같은 역할을 맡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니 지금 은행에서 총을 들고 있는 자들은 노라에게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를 써 자신과 친구들이 살아남도록 해야 하는 목표물일 뿐이다.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노라가 엄마로부터 배운 기술을 활용하는 동안, 저자는 노라의 과거 정체를 하나씩 공개하고 노라의 언니 리가 어떻게 엄마를 벗어났고 또 어떻게 노라를 엄마에게서 떼어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했는지 이야기해나간다.

 

어쨌든 우리 자매는 깨진 조각들을 억지로 갖다 붙인 그런 여자를 엄마로 두고 자란 상처투성이의 아이들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사기꾼이었으니까, 나는 사기꾼의 딸로 태어났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엄마처럼 미소로 상대를 현혹하는 자질도 타고났다. 사람들은 이걸 ‘매력’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것을 ‘유용한 것’이라 부른다.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에 따라 어느 상황에서건 그에 적응하여 상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거울처럼 행동하는 능력. 이건 자질도 저주도 아니었고 그냥 쓰기 좋은 도구였다. (p.37)

 


 

이로 인해 소설은 기상천외한 사기 행각과 거대한 슬픔 그리고 10대들의 누아르가 결합돼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진 데 이어 마침내 영화화됐다. 〈기묘한 이야기〉, 〈에놀라 홈즈〉 스타 밀리 바비 브라운 주연의 넷플릭스 스릴러 영화로 제작키로 했다. 또한 소설은 노라와 리, 웨스, 아이리스, 이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를 밝히면서 이들을 충격적인 가치나 싸구려 스릴의 도구로 그려내기보다 10대들의 상처를 세심하게 살피고 보듬어준다. 이 캐릭터들이 경험한 모든 폭력 행위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에 무게를 더하고 그들이 어떤 자아를 지닌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노라는 놀랍도록 강한 주인공이지만, 소설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내 엉덩이에는 휘어진 말발굽처럼 보이는 흉터가 있고, 그 흉터는 웨스 어깨에 깊이 새겨진 그 마디처럼 생긴 흉터와는 달랐다. 하지만 웨스는 우리가 아직 어렸던, 10대가 채 되기도 전이었던 시절 내 흉터를 보고 한번 더듬어보더니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한 거야?”라고 물었다. 웨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그 긴장감, 그리고 웨스가 피부 위에 그런 흉터를 남길 수 있는 게 부츠 뒷굽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에 난 흉터를 더듬으며 되물었다. “누가 널 이렇게 때린 거야?” 그때 우리는 서로의 인생이 어떠했을지 짐작했다. 웨스의 어깨에 난 이상한 사각형 모양의 흉터가 허리띠 벨트버클 때문에 생긴 거란 사실을 난 알았다. 우린 그런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흉터…… 그리고 흉터에 얽힌 사연과 애초 안락은커녕 최소한도의 ‘안전’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란 걸. 우리 둘의 차이점이라면 웨스는 그런 나무에서 자랐지만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고, 나는 속으로부터 썩어버렸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나는 열심히 숨기고 있었지만 썩은 건 어쩔 수 없었다.(p.67~68)

 

 

노라의 어린 시절엔 의지할 어른이라고는 엄마뿐이었다. 그것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기꾼 엄마다. 범죄자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엄마의 남자들은 노라의 삶에 더 끔찍한 불운을 안겨준다. 계부라고 해봤자 소아성애자이거나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다. 웨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체적으로 심한 학대를 가하고 아이리스의 아버지가 딸에게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라 역시 이렇듯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다 악마일까?” 아이리스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소설은 단지 은행 강도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을 헤쳐 나가는 스릴러물을 넘어서 부모의 학대와 폭력, 거기다 성 정체성 및 종교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이슈들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가 주목한 이유다.

 

“이제 레이먼드가 너의 아빠란다.”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는 그게 아주 멋지고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 선언했고, 그런 엄마를 보는 내 마음은 미칠 것 같았다. 엄마는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아니라 정말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엄마의 사랑 병이 깊었던 것이다. (중략) 내가 아는 한 상대를 통제하려 하는 성향 그게 바로 부성이었다. 그것도 상대방의 마음과 육체를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게 부성이었다. 엘리야가 헤일리에게 원했던 것이 바로 그거였다. 끊임없이 상냥하고 정숙해야 한다고 주문했으니까. 결국 내 손으로 그만두게 만들 때까지 조셉이 케이티에게 원한 것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레이먼드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주도권은 레이먼드에게 있었고, 그가 내 아버지 역할을 하기로 했다면 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p.325~326)

 


 

엄마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후 노라는 가짜 소녀로서의 삶이 아닌, 진짜 삶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잠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뒤엎을 만한 위협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앞서 말한 대로 절친 둘과 함께 동네 은행을 찾은 날 불시에 은행 강도 인질이 되었던 것이다. 은행 안의 다른 인질들이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안 노라는 즉시 몸에 밴 훈련 방식대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치밀한 계획 세우기에 돌입한다. 그러는 사이 소설은 노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아슬아슬했던 삶의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웨스, 아이리스와의 관계를 통해 숨겨왔던 사연을 폭로한다. 은행에 갇힌 인질들과 노라를 비롯한 세 명의 10대, 그리고 총으로 무장한 두 명의 은행 강도,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치닫게 될지, 소설은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흐른다.

 

“네 진짜 이름은 뭐야? 애슐리 킨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아.”

나는 입이 바싹 말랐다. 마치 누군가가 나의 손목에 짱짱한 고무줄을 끼워 조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레베카야, 탁. 넌 사만다야, 탁. 넌 헤일리야, 탁. 넌 케이티야, 탁. 난 그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이들은 아무도 건들지 못하게 내 안 어디엔가 안전하게 숨어 있어야 했다. 나는 언니와 플로리다의 그 호텔방을 뜬 이후로 딱 한 번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리고 웨스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해주었는데 그때는 웨스가 그 이름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결국 그것으로 우리 관계가 산산조각 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웨스는 그렇게 일그러지고 너덜너덜한 나를 프랑켄프렌드로 만들어주었고, 그는 항상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연민을 보여주었다. 아이리스도 그런 연민을 가진 아이인데 오늘 내가 그걸 산산조각 내버린 듯했다.

“지금 나는 애슐리일 수밖에 없어.”(p.213)

 


 

필요하다면 싸울 것이다. 레이먼드가 내 뒤를 쫓아온다면, 머리 회전은 빠르지만 제대로 총을 쏘지는 못했던, 공포에 떠는 애슐리를 맞이하는 대신 내가 나의 분신으로 살았던 모든 소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레베카는 나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사만다는 숨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헤일리는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케이티는 나에게 두려움을 가르쳐주었고 애슐리는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노라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어. 레베카 내 이름은 레베카야. 일어나 사만다. 내 이름은 사만다야. 눈물 닦아. 헤일리. 내 이름은 헤일리야. 어깨를 활쫙 펴. 케이티. 내 이름은 케이티야. 한 걸음씩 차근차근. 애슐리. 내 이름은 애슐리야. 문을 열고 나가자. 노라. 나는 빛을 향해 걸어갔다. 내 이름은 로라.((p.465~466))

 

저자 : 테스 샤프(Tess Sharpe)

 

산속 산장에서 펑크 음악을 좋아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난 테스 샤프는 캘리포니아 시골 마을에서 성장했다. 지금도 깊은 산속에서 여러 무리의 개와 갈수록 대가족으로 늘어나는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작가이자 문학 작품집 편집자로 일하면서 여러 편의 수상작을 집필했으며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린이, 성인을 위한 책을 쓰고 있다. tess-sharpe.com

 

역자 : 고상숙

 

연세대학교 영문과, 한국외대통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KBS에서 외신 번역과 통역을 담당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레드 세일즈 북』, 『아이를 바꾸는 교육의 절대 원칙 11』,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희망과 함께 가라』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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