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
의자 지음 / 마음의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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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디론가 떠나길 망설이는 이들에게 뉴욕에서 1,100일 동안 600만 원으로 살며 얻은 것은? 불안과 불확신 속에서 만나는 생의 감동과 영혼의 울림, 그리고 내면의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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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
의자 지음 / 마음의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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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는 저자가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을 마다하고 무모(?-저자의 표현대로)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어이가 없고 황당한 느낌마저 받았다. 낯선 곳, 그것도 해외를 혼자 여행한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저자의 계획이 너무나 무모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더욱이 단순 여행도 아니고 장기 체류를 계획하고 특별한 대안도 없이 무작정 떠난다는 생각은 독자로서는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앞섰다. 결혼을 하지 않은 혼자 몸이라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하다는 게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림 에세이를 쓴 것으로 보아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 관련 일을 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결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부를 위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 의자가 계획한 뉴욕은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부각된 곳이니까.

독자의 염려가 부끄럽게 저자는 말한다. "익숙한 곳에서의 안위와 평온보다 낯선 곳에서의 불안을 바탕으로 성장할 때 비로소 인생에서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서른다섯 살 여성인 저자는 자신이 전공한 미술에 대한 노력 끝에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일자리까지 박차고 훌쩍 머나먼 뉴욕으로 떠나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이 풍족한 상태도 아닌데 어떻게 뉴욕행 편도 티켓 한 장과 현금 600만 원을 들고 떠날 수 있었을까. 앞서 저자의 언급대로 불안을 떨치고 성장하기 위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독자의 생각이지만 저자는 정글 같은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우려된다.

 


 

돌아와 책을 내고 독자들에게 그곳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보여준 저자는 과연 어떤 것을 기대했고 어떤 것을 얻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읽힌다. 조금 모호한 표현이지만 '삶에 대한 자신감'이 아닐까. 낯선 곳에서의 저자의 일상은 저자의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돈마저 부족한데 저자가 택한 방법은 뭔가를 만들든, 그리든, 쓰든 끊임없이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은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사회 최상층에 있는 도시 아닌가. 뉴요커들의 일상이 평범하고 검소하다고 들은 바는 있지만 소문난 자본주의 도시인데... 물론 저자가 물욕이나 돈 욕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느낌은 책을 읽으며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려 햇수로 5년,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젊은 여성인데 불안감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에서도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돈으로... 결국은 아르바이트 생활도 하며 들어가는 돈을 보태기는 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당차고 야무지다는 표현을 저자에 실례가 안 된다면 독자로서는 쓰고 싶다. 그래도 어이없고 황당하다에서 책을 읽고 나니 약간은 이해심이 들어간 표현이다. 사실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책을 덮을 때쯤엔 젊은 여성 혼자서도 해내는 일을 왜 독자는 한 번도 실천은커녕 계획도 세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겸연쩍기도 했다. 저자만의 생존 방법이 이 책에 여러 가지가 나와 있다.

불안하거나 소심한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충분히 세상 살아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독자는 판단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투 두 리스트가 뭉클하며 신선하다. 우연과 불확신 속에서 만나는 삶의 떨림과 감동, 정신과 영혼의 울림이 저자가 그린 뉴욕의 그림들과 함께 펼쳐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쯤 다시 한 번 그림이라도 더 보기 위해 빠르게 제목과 그림만으로 한 번 훑어본 사람은 독자만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처음 부분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삶에 더 이상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난다. 삶의 진정한 의미, 가치와 값어치를 깨달아가는 한 화가의 삶에 대한 치열한 도전기라고 보면 알맞을 것 같다.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가 이 책 곳곳에서 빛을 낸다. 저자의 표현대로 사람은 저마다 빛을 낸다고 말하고 그림도 여러 점 남겼다. 가난과 불안이 행복보다 났다는 보장은 없지만 안락하고 안전한 삶의 길보다 화려한 뉴욕의 한가운데서 생의 정면과 맞부딪치며 만나는 영혼의 떨림은 이 책만이 갖는 또 다른 울림이 된다.

저자는 낯선 곳 뉴욕에서 밖으로 나갈 차비조차 없는 상황에서 무서운 고독감에 혼자 울고 쓰러져있으면서도 무의식의 저편을 탐구한다. 내면의 빛을 찾아가며 일어서는 저자의 오롯한 정신이 그림과 문장에서 살아 번뜩인다. 이 책은 뉴욕만이 아닌, 세상의 어느 낯선 곳으로 떠나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용기와 위로를 안겨줄 수 있다. 여행의 결말이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되돌아옴일지라도 그래서 더 가치 있고 값어치 있음을, 어느 날 쓸쓸함과 불안함이 삶을 덮쳐도 그것을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라고. 이번 생을 더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의 주장에 신뢰가 간다.

서른다섯 살 미혼의 여자란 사실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내놓은 이력서의 전부다. 아, 화가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림을 책에 남겼으니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저자의 손에는 뉴욕행 편도 티켓과 현금 600만 원이 전부였다. 익숙한 곳을 벗어날 용기는 시간과 돈을 담보로 한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어도 저자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다음에 충분히 돈이 모이면’ 같은 말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저자이기에 즉시 행동에 옮겼다. 이제 저자는 말한다. "'나중에’와 ‘다음에’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입버릇으로만 중얼거리게 될 것 같았다. 나도 한 번쯤 뉴욕에 살고 싶었다고."

 


 

책의 목차를 보다 에피소드를 적은 제목 왼쪽에 숫자가 적혀 있다. 그 앞에 'Day'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뉴욕에서의 체류 일수인 것 같다. 「어려운 쪽을 붙잡는 일」이란 제목 옆에 '293'이란 숫자에 따라 체류 293일째 되는 날이나 보다. "나 역시도 쉽고 편한 길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안다. 험난한 인생에 쉽고 편한 길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달콤하다. 내 무거운 짐을 다 대신 지어준다는 어느 종교 광고에 마음이 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을 살아내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 재력 좋은 보호자가 갈고닦아준 길이라도 장애물 없는 인생은 없다. 보호막이 사라져 내 심장이 칼바람 맞는 거 같아도, 그 고통 온전히 겪어 내 힘으로 이겨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낯설고 아픈 일을 견디면서 천천히 걸을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 꽃피고 열매 맺지 않을까?"(p.132~133)

익숙한 곳을 떠나 보호막이 사라진 자신을 노출하는 일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낯선 곳에 두는 것은 꽃피는 생명력, 어려움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일, 그것에서 생의 울림을 발견하고 온전히 ‘나’로 태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안을 인정하고 빈 곳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힌다고 말한다. 뉴욕 거주 1년도 채 안 됐는데 '도사'나 '수행자' 같은 생각이다.

248일째, 저자는 주머니에 남은 전 재산 오만 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심하다가 커피에 투자했다. 거의 절반에 이르는 이만 원을 스타벅스 카드 충전하는 데 냉큼 써버렸다. "나는 지금 여기서 내 삶이 좀 위태롭다고 해서 보이지도 않는 탈출구가 보인다고 말하는 소용없는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금액으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으니. 그러면 또 견딜 만할 테니까. 커피가 내 불안의 시간을 달래주는 달콤한 눈속임일 뿐이라도, 달게 쉬고 또 씩씩하게 걸어가면 좀 더 멀리 갈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멀리 떠나온 여행길이니 대범하게 나만의 사치를 부려본 것이다. 그것이 고깟 커피 한잔이라도."라는 글을 만들어냈다.

 


 

이내 저자의 직업을 생각해낸다. 저자의 빈 곳은 허식과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경제적 안정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안정감이라는 단어는 저자에게 크나큰 빈 곳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을 통해 결국 불안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 불안을 어떻게 견디는지가 중요함을 알게 됐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여전히 철없고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성격은 아직 고치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곧 수긍이 간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빈 곳은 불안함이다. 이 불안함은 경제적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내면을 단단히 만들어 불안함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빈 곳을 찾아내고 다시는 빈 곳에 침식되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굳센 심지를 다져낸다. 우리가 불안함에 흔들릴 때 이 책을 펼친다면 중심을 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날이었을까? 1127일차, 「내 마음의 빈 곳」에서 저자는 "인생의 깨달음은 책상 앞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나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이렇게 시끄러운 맨해튼 한복판에도 소리 없이 오는 거구나. 이 답 하나 얻으러 내가 먼 길을 애쓰면서 왔구나! 그래 낯섦과 생경함, 그에 따른 두려움과 불안함 열렬히 감수할 만하다. 사하라사막에서 뉴욕까지 이토록 헤맬 만하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뉴욕이라는 낯선 정글을 홀로 헤매다가, 나의 아름다운 빈 곳 하나를 찾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빈 곳이 요동치고 발화하는 순간은 아주 특별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본 작가였기에 자신의 찰나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한 감회일까, 체화된 느낌일까?

 


 

저자는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사는 것은 낯선 이와 대책 없이 사랑하는 일」이란 제목의 〈에필로그〉를 통해 "되돌아보는 나의 흔적들. 때론 처절한 사투였고, 때론 달콤한 연애편지였고, 때론 궁상맞은 하소연이었던 지난 오 년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그림들. 지난 그림들 속에서 홀로 던져져 아프고 몇 번이고 무너지는 나를 만났다. 그렇지만 그 무너진 자리에 서니,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고, 사람들의 따스한 빛이 보였고, 나의 빈 곳이 거기 있었다."(p.234) 저자는 그 순간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아름다움은 장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서사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가 경험한 사하라사막이 그렇고 뉴욕이 그렇고 지금의 일상이 그렇다. 서사가 쌓이고 쌓여 빈 곳의 발견을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자신의 빈 곳을 피하지 않고 함께 살아보자고 다짐해 낸다. 그리고 그림책 공부를 위해 다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으로 떠났을 때처럼 그렇게, 그렇지만 조금은 다른 나의 런던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밝히며 이 책의 마침표를 찍는다.

 

저자 : 의자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6년 뉴욕에 거주하면서 아우어 골든 아워(Our Golden Hour)가 진행하는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2020년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석사를 마쳤다. 뉴욕에서의 일상이 담긴 그림은 로스앤젤레스의 프록시플레이스 갤러리 개관전에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이후 뉴욕과 서울에서 전시했다. 출간한 책으로는 『사막의 농부』, 『그림 좀 아는 고양이 루이』, 『캠핑 좀 하는 고양이 루이』 등이 있다. 어른을 위한 글 없는 그림책 『얼굴』이 출간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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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자본주의 - 개정판
윤루카스 지음 / RISE(떠오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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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capitalism, 資本主義)란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이윤 획득을 위해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를 일컫는다. 현재 서유럽과 미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자본주의체제’라는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제가 발생한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오래지 않은 일이다. 이 경제체제는 16세기 무렵부터 점차로 봉건제도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는데, 18세기 중엽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점차 발달해 산업혁명에 의해서 확립되었다고 경제학자들은 보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독일과 미국 등으로 파급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말은 처음에 사회주의자가 쓰기 시작하여 점차 보급된 용어라고 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명확한 정의(定義)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말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윤획득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도, 단순히 화폐경제와 동의어로도 쓰이며(이 경우 부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에도 자본주의가 존재하였다고 가정),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대하여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으로 보았다. 독일의 역사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체제란 ‘서로 다른 두 인구군, 즉 지배권을 가지며 동시에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가 시장에서 결합되어 함께 활동하는, 그리고 영리주의와 경제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경제적 조직이다’라고 정의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근대자본주의는 ‘직업으로서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란 상품생산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하며, 자본주의체제 또는 자본주의경제란, 이와 같은 태도하에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는 유통경제조직을 말한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①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②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 ③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 ④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⑤ 생산은 전체로서 볼 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책 『차가운 자본주의』는 저자 윤루카스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서다. 단순한 사전식 설명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에서 '돈을 버는 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가치평가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용설명서'로 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은 독자의 생각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돈이 인생의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인생에서 중요한 건 돈이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 ‘있는 놈’을 욕하고 돈 벌려는 사람을 속물 취급하지만, 정작 자신도 많은 돈을 원하며 ‘있는 놈’처럼 보이려고 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실인가? 돈을 벌려는 욕망과 속물근성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돈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원천적 감정인 욕망은 나쁜 게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움켜쥘 기회를 제공한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기회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주어진 환경을 전부라 여기며 세상을 표독하게 바라보는 이들을 나는 혐오한다.”

 

 

이 정도 되면 설명서라기보다 찬양서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곁눈으로 흘겨보는 사람은 부자에 대한 시기심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부자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부러운 대상에 대한 질투와 비난이 아닌 솔직한 심정을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또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자기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자본주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혐오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능력 부족이라는 주장으로 읽힌다. 논리적으로도 하자가 없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자본주의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덧붙여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도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자본주의나 시장경제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돈 벌기만을 목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일일 뿐이라는 각성을 주기 위해서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또 시장경제는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속성과 시장경제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또 사람들이 안다고 믿는 것은 과연 진짜일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설명하며 풀어간다.

저자가 이 책을 쓰는 이유이자 대전제가 되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늘 욕망과 가치의 조화를 비범하게 이뤄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란 경제체제를 설명하는 책의 제목에 '차가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왜 자본주의를 차갑다고 하는 것인가? '냉정하고 잔혹하다'는 이유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살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하고 화폐로 바꾸어 되돌려받는 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의 잔혹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책은 10일 만에 10만, 반년 만에 30만 경제 유튜버가 된 윤루카스 저자의 첫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지식과 통찰로 수많은 이들에게 시장경제의 진실을 전하며 수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진실을 알고 싶고, 불안한 경제 상황 속에서 자기 역량을 키워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잔혹하지만 자본주의가 최선이며, 경제에 대한 이해는 삶의 근간이다. 이 책을 통해 차가운 세상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진실은 물론 당연한 이익 추구를 적폐로 만드는 수법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저자는 믿고 있다. 이 책은 210페이지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다. 흔히 경제학 관련 서적은 두께(분량)에 있어서 다른 어느 서적보다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왜 분량이 적을까? 자본주의의 속성과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부자가 되는 길을 안내하는 데는 자본주의 무엇이며, 자본주의의 속성을 제대로 말해주면 그것이 곧 부자되는 방법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다음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고, 각자가 처해진 환경이나 선택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돈 버는 방법'이나 '부자 되는 비결'을 가르쳐준다는 말이나 글은 모두 '사기다'는 극단적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욕망은 인간의 가장 원천척인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대한 욕망만은 업신여기는 것이 우리의 풍토다"고 말하며 "욕망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인간 개인에게 삶의 원동력을 준다고 믿는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독 돈에 대해 역겨울 정도로 이중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있는 놈'들을 욕하지만, 욕하는 그들의 SNS를 보면 너도나도 '있는 놈'처럼 보이려고 발광한다고 말한다.(지나친 표현이라 주저되지만 저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그대로 옮겼다.)

저자의 뜻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하지만, 이처럼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을 '돈만 밝히는 속물' 취급하면서 정작 자신 또한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그 부류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습기에 다소 과한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럼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내 편으로 만들어라」이다. 돈은 자본주의 시대에나, 자본주의 이전 시대나 최고의 가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가 인간 중심의 문화가 지양되고 생겼다며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단어들로 사람들을 오해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는 오히려 인간이 존중되면서 생겨나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물질보다 인간의 가치를 더 위에 두기 시작한 때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을 좇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 가능성의 토대 위에 쌓였기 때문이다. 독자로서는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경제는 물론 경제학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교과서 이야기만 배웠기 때문이다. 그 경제도 원칙이나 용어 등 대학 입시를 위한 것이지 경제의 흐름이나 순환, 원리 등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저자의 주장에 논리적 하자가 없어 설득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에 빠져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저자의 설명은 계속된다. 저자는 돈을 위해 일하는 인간들이 일류다. 그들이 지금의 인류를 일류로 만들었다고도 말한다. 이유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삼성의 이건희, 현대의 정주영, SK의 최태원, LG의 구본무. 이들을 사례로 제시하니 반론에 자신이 없다. 약간은 망설이는 독자들 저자는 거칠게 몰아세운다. 기꺼이 납득시키고, 그 이상의 가치를 주어 독자들의 삶을 개혁할 테니 이 책에 집중해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을 위해,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나약한 동물이어서 지금 현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말도 인용한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을 향하는 변화라고 해도 말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 왼쪽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불행한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는 길은 불행할 수도 있지만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는 길이다. 어디를 택하겠는가?라고 독자들에게 답을 요청한다. 당연히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는 오른쪽 길이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틀렸다고 판정한다. 보통은 왼쪽 길을 택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행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불확실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잔혹하지만 자본주의가 최선이다」, 2장 「본질을 읽는 눈을 가져라」, 3장 「경제의 흐름을 읽는 눈을 키워라」, 4장 「사탕 발린 말에 속지 말라」 등이다. 저자는 이 4개의 장으로 나뉘어진 각 부분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이 책에서 펼치고 있다. "인간은 악하다. 동시에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다. 그 욕망을 잘 건드리면 세상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고, 인류를 더 발전시킬 엄청난 발견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아름다움이다. 인간이 좋은 일을 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돈’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따뜻하며 인간은 선한 존재라 믿고 법을 만든다면 분명 망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인간은 악하고 돈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잔혹하며 자본주의의 속성은 얼음처럼 차갑고 잔혹하다. 인간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열망이 있으면서도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돈을 벌려는 사람을 ‘돈만 밝히는 속물’ 취급하면서 자신은 더 강한 욕망을 품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원천적인 감정이며, 자본주의에서 ‘이익 추구’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적폐로 몰아간다면 자신의 기회와 가능성을 스스로 날리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세상에 도박성이 없는 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가짜를 한두 명 만나봤겠는가? (…) 속지 말라. 존재하지도 않는 ‘구루’를 찾지도 말라. 당신이 공부하고, 당신이 판단해서, 당신이 확신을 만들고, 당신이 도박성을 안고 베팅하라.(p.197~199)

- 「Chapter 4. 〈06. 투자와 도박성〉」 중에서

 

저자 : 윤루카스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SAC) 무용과를 자퇴한 30만 경제 유튜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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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5
나카노 교코 지음, 조사연 옮김 / 한경arte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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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전 명칭이 '프로이센'이었다는 사실은 독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가문의 명칭인 줄은 이 책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은 명화를 통해 유럽 왕조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시리즈’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 합스부르크 역사』, 『~ 부르봉 역사』, 『~ 영국 역사』, 『~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에 이어 완결작이라고 한다. 저자 나카노 교코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시작해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Hohen Zollern) 왕가는 현대 유럽 지도의 원형을 만든 주인공이다. 몇 세기나 신성로마제국 아래 있으면서 300개나 되는 중소 주권국가로 분열돼 있었던 독일은 호엔촐레른가 역대 가주들의 분투 덕분에 19세기에 마침내 하나로 통합된다. 더욱이 이때 같은 게르만 민족이었던 합스부르크가를 배제하는 형태로 독립해 세계 최강국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며 유럽 역사의 주목받는 나라로 탈바꿈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왕조가 와해되기 전까지 프로이센 왕조의 찬란한 역사는 지속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려진 명화를 선정해 소개하고, 명화 속 인물에 얽힌 사건과 시대 배경을 알려준다. 그리고 왕가 계보도와 연표를 함께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프로이센을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친근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독일 근대 역사와 함께 명화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가가 스위스에서 탄생 후 빈으로 이주해 찬란한 꽃을 피웠듯이, 처음부터 프로이센이 본거지는 아니었다. 처음은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이었는데, 11세기 중반 이후부터 13세기 어느 시점까지 힘을 기른 후 해발 850미터쯤 되는 호엔촐레른산 정상에 성을 세웠다. 그리고 이때 가문의 이름을 호엔촐레른가로 바꿨다.

13세기 프로이센 지역에 살던 옛 독일인은 고대 토착 프로이센인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이유는 종교 문제였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신도인 독일인에게 다신교였던 고대 프로이센인은 정벌해야 하는 이교도 종족에 불과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곳에 종교기사단을 파견한다. 이때 파견된 기사단이 템플기사단, 성요한기사단과 함께 중세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독일기사단(튜턴기사단)이다. 독일기사단은 수십 년에 걸친 분쟁을 제압하고 프로이센을 지배하며 영토를 차지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일종의 수도회 국가가 되지만 어디까지나 바티칸과 신성로마제국의 속박 아래 있었고, 수장인 총장은 공화정처럼 선거로 선출했다.

이로부터 250년이 더 지난 1510년. 20대 젊은이가 제37대 총장에 선출된다. 바로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기사단령이었던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가의 공국으로 거듭난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 때 에스파냐 계승전쟁에서 합스부르크가 진영에 가담하기로 약속하면서 중간 규모의 공국에서 작지만 왕국으로 격상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 왕조 초대 왕이 된다. 이후 9명의 왕이 217년 동안 통치하며 부국강병을 이룬다.

 


 

책에 따르면 프로이센 왕조 역사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18세기 유럽은 절대군주가 계몽사상을 몸에 두르고자 했던 시대다. 각 국왕은 중세적인 강권 일변도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에 기초해 국민을 지도함으로써 국가 근대화를 촉진하고자 했다. 이 이상적인 계몽 전제군주상에 꼭 들어맞은 인물이 프리드리히 대왕이었고, 이 점이 프로이센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드리히 시대”였다. 그 옛날 베르사유에 군림했던 금빛 태양왕 루이 14세 대신, 새 시대를 맞이한 지금은 군복 차림의 지식인 대왕이 슈퍼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초상화가 안톤 그라프가 그린 〈프리드리히 대왕〉은 70세를 앞둔 노년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많은 동시대인에게 왕의 특징을 가장 잘 포착한 초상화라고 인정받은 작품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필연적으로 화가의 대표작이 됐으며, 대량의 복제와 판화가 나돌 정도였다. 이 그림은 눈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힘 있고 생기 넘치는 큰 눈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에 걸렸다가는 모든 게 다 들통 나 체념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비록 세월의 무게에 눌려 등은 굽고 피부는 처지고 이마, 눈가, 볼, 입가를 비롯한 온 얼굴에 주름이 깊지만, 왕의 강인한 정신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보인다.

그림 속 앞가슴에 찬 검은 독수리 훈장에는 ‘SUUM CUIQUE’라는 라틴어 문자가 새겨져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에서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한 각 개인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왕국의 일체감 및 자유주의와 종교적 관용의 기초가 되는 문구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목표로 삼고 마침내 이뤄낸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3대 왕인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프로이센은 점차 세력을 키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3세, 4세를 거쳐 흰수염왕으로도 불리는 빌헬름 1세 때 이르러 독일 제국을 통일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라는 이인삼각 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 왕조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로써 호엔촐레른 왕조 217년의 역사는 빌헬름 2세를 끝으로 종언을 맞이했다.

프로이센은 자그마한 공국에서 시작해 왕국으로 성장한 후 독일 통일을 이룬 뒤 제국으로 발돋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조, 로마노프 왕조들처럼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정신이 밑바탕에 있었기에 이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잘 극복하고 지금도 여전히 대국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근검절약,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프로이센의 명화와 역사를 명쾌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프로이센이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역사가 아닌 더 알고 싶은 역사로 다가올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호엔촐레른성은 15세기 중반에 발생한 전란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고 책은 언급하고 있다. 얼마 후 같은 곳에 두 번째 성을 재건하지만 합스부르크가에 빼앗겼고, 18세기 말 합스부르크가가 버리다시피 한 뒤로 폐허가 됐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세 번째 성으로, 19세기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폐허가 된 성을 다시 세우고 아름답게 단장했다. 왕태자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일족 발상지인 호엔촐레른성이 무참히 파괴된 모습으 보고 재건을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북부 프로이센(발트해 연안 지역)이 거점이 된 지 이미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자손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센과 독일의 역사는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배울 때 익혔던 것이 전부이지만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 재상〉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독일의 중흥기에 뛰어난 활약을 했던 인물들이라고 배웠기에 그렇다. 이 책에는 70세를 앞둔 시절의 '노년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눈에 띈다. 스위스 출신의 초상화가 안톤 그라프가 그렸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많은 동시대인에게 왕의 특징을 가장 잘 포착한 초상화라고 인정받은 작품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화가의 대표작이 됐으며, 대량의 복제와 판화가 나돌았던 사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다. 한 가지 덧붙일 말은 히틀러의 지하 참호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유일한 그림으로도 유명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프리드리히 대왕 노년의 초상화를 그려 이름을 널리 알린 안톤 그라프는 그로부터 약 10년 후 새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재위 1786~1797)에게도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그 작품이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이어 42세의 나이로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왕태자 시절이던 21세에 사촌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지만 3년 만에 이혼 후 같은 해 재혼해 여덟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그러나 초혼과 재혼 상대 모두 대왕이 밀어붙인 정략결혼이라서 왕비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죽을 때까지 화려한 엽색가 기질을 발휘해 왕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전해진다.

빌헬름 2세는 끊임없이 애접과 연인을 만들었는데, 개중에는 비밀 결혼한 여성(물론 중혼이다)도 두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사랑한 여성은 아홉 살 연하인 빌헬미네 엘케뿐이었다. 빌헬미네는 아버지가 궁정악사로 신분은 천했다. 하지만 15세 때 왕태자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왕태자의 애인이 됐고, 나중에는 리히테나우 여백작 지위를 받아 공식 총회에까지 올랐다. 폴란드인 여류 화가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가 그린 벨헬미네의 초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풍성한 핑크빛 새틴 드레서 타조 깃털 장식을 곁들인 맵시 있는 모자에 뺨에 그려 넣은 점까지 완벽한 프랑스 로코코 복장이다. 아름다운 눈썹과 고집 있어 보이는 눈, 두툼한 입술이 특징인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은 '프로이센의 퐁파두르'였다. 총회 퐁파두르 후작이 루이 15세 대신 정치를 움직였듯이 빌헬미네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뒤에서 정치적으로 조정했을까? 저자도 의문부호를 남긴다.

 


 

이 시기 독일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한 인물은 아무래도 비스마르크다. 우리에게 '철혈 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는 과도한 업무와 폭음, 폭식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눈빛만은 여전히 상대를 압도할 듯 날카로웠다고 한다. '귀공자 화가'라는 별명을 가진 부유층 출신의 프란츠 폰 렌바흐는 60대부터 만년에 이르는 비스마르크 후작의 정장, 평상복, 군복 차림을 비롯해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 철모나 중절모자를 쓴 모습, 당당히 서 있는 모습, 피곤하게 앉아 있는 모습 등 실로 다양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 있다. 일어서면 그 거구(190cm, 100kg)에 압도될 듯하다. 더욱이 젊은 시절부터 수십 번이나 결투를 치른 용사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 자신감과 위엄을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을 '독일인'이라기보다 '프로이센인'이라고 생각했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오스트리아가 됐든 독일 영방이 됐든 전쟁을 일으키는 데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노구에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열정으로 프로이센의 강대국 만들기에 앞장 섰다. 그의 외교력은 물론 국제 감각, 전쟁에서의 승리하는 방식 등 한 나라의 왕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정치가였던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게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랜 준비와 함께 결코 중단 없는 추진력을 발휘한다. 중간 중간 필요하다면 어느 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한다. 아니 어쩌면 유도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전쟁 대비에도 철저했다고 한다. 주위 강대국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전쟁을 '이길 전쟁'으로 바꾸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주변국의 모든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비스마르크에게 가장 눈엣가시는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독일 통일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불가피 상황을 만들어놓은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관광객으로 가장한 프로이센의 스파이가 프랑스 각지의 전장이 될 만한 곳을 돌며 몰래 조사했으며, 철도망, 무기와 탄약, 병사, 병참 모두를 파악하고 대비했다. 프랑스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스당전투는 불과 하루 반 만에 끝났다. 나폴레옹 3세는 8만3,000명의 장병과 함께 항복했다.

 


 

근심 따위 없는 이 아담한 궁전에서 대왕은 전쟁과 정무 틈틈이 플루트 콘서트를 열고 시 쓰기와 작곡, 독서를 하고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기력을 충전했다. 선별된 소수만이 이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었는데, 대왕의 누이와 여동생과 그들의 시녀를 빼고는 거의 남성뿐이었다. 당연히 별거 중인 왕비를 초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쌍한 왕비는 남편을 존경했다고 하는데, 대왕은 가끔 왕비와 마주칠 때마다 “마담, 조금 살이 찌셨나요?”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p.80) - 「제4장 아돌프 폰 멘첼, 〈상수시궁전의 식탁〉」중에서

 

저자 : 나카노 교코(なかの きょうこ, 中野 京子)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독문학자이자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 《나카노 교코와 읽는 명화의 수수께끼》, 《명화와 함께 읽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다리를 둘러싼 이야기》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옮겼다. 월간 〈분게이슌주〉에 ‘나카노 교코의 명화가 말하는 서양사’를 연재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 《명화의 거짓말》 시리즈,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욕망의 명화》, 《운명의 그림》, 《처음 가는 루브르》, 《내 생애 마지막 그림》, 《오페라처럼 살다》, 《명화로 보는 남자의 패션》,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세계의 다리를 읽다》,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등이 있다.

 

역자 : 조사연

일본 도쿄가쿠게대학 대학원에서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일본 교도통신의 한국어 번역팀에서 근무했으며, 글밥 아카데미 수료 후 지금은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경영전략으로서의 영업』, 『구독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 『나는 낯을 가립니다』, 『질과 골반이 건강해야 여자가 행복하다』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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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세계사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잘난 척 인문학
이상화 지음 / 노마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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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지금까지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의 책을 꽤 여러 권 읽었다. 백과사전처럼 돼 있는 책이어서 인내심을 요구했지만 지식욕을 자극하는 책이었기에 여러 권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이 책 『악인의 세계사』의 저자 이상화와 『신화와 성서에서 유래한 영어표현사전』의 저자 김대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책 자체가 상식사전이나 백과사전처럼 만들어져서 하루에 읽기엔 부담스럽고 분량도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두고두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기'를 하면서 내용을 익힐 수 있도록 편집돼 있었다. 이 책은 기존 시리즈와 조금은 결이 다르다. 아마 이 때문에 〈잘난 척 인문학〉이라는 시리즈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악인'에 대한 명확한 뜻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악인'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종교로부터 시작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교회용어사전』에 따르면 악인(惡人, the wicked, evildoer)이란 죄에 사로잡혀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성질이 악한 사람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나 태도와 상반되는 삶을 사는 자 곧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시1:4),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 말씀을 순종치 않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렘30:23). 악인은 ① 교만하고(시10:2-4), ② 가증하며(딛1:16), ③ 완고하고(겔3:7), ④ 영적으로 무지하며(엡4:18), ⑤ 신성을 모독하는(계16:9) 특징을 갖는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미워하시며(시11:5; 사1:10-15), 마침내 멸하신다(시145:20)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악인의 세계사』에 등재될 사람은 인류 역사에 큰 악을 저지른 사람들일 것이다. 죄의 목록도 수없이 많은 데다 종류별로 따져도 각양각색이다. 인류사에서 빼버리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정도다.

 


 

이 책은 악인의 종류별로 6장(章)으로 이루어졌다. 1장 「학살자들」, 2장 「악녀들」, 3장 「폭군과 제자들」, 4장 「흑인 노예」, 5장 「연쇄살인마」, 6장 「엽기적 악인들」 등이다. 이 가운데 4장은 '흑인 노예'를 악인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 개척자들, 노예 상인, 노예 무역선주 등 노예 무역 관련된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악인의 등장은 시대나 장소에 따라 무척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또 사람을 죽인 악인 중에는 수백 만 명 이상부터 몇 명을 개인적으로 죽인 사람 등 여러 가지다. 궁금한 점 악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란 질문이 무색할 정도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을 담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 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으로 빼놓을 수 없는 악마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전범재판소에서 본 그의 모습은 냉혹한 악마의 모습이 아닌 너무나도 평범하고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어떻게 악마가 되었을까? 악이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누구든 악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악의 평범성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끔 나오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범죄자를 언론에 이름과 얼굴 공개를 통해 발표된 적이 있다. 물론 관련법에 의한 조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범죄자 평소 성향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범죄나 악인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높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폭력화되고, 선정적인 것에 관심을 주는 범죄성 사회로 변화해 간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해 소름이 돋는다.

 


 

첫 번째 장 「학살자들」은 말 그대로 다중의 사람을 이유없이 죽이는 행위다. 이는 대체적으로 정지적·군사적 행위일 가능성이 크다.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 원정대, 정복자들, 난징대학살의 일본 군인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도자 폴 포트 등이 쉽게 생각난다. 또 인종 싸움이 잦았던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웠던 슬로보단 말로셰비치, 600만 유대인 학살의 주범자들, 아프리카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의 학살 경쟁, 최악의 사이비 교주 짐 존스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모두 기록된 일이고 인물들이다. 학살의 주범들은 우월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상대를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희생자의 수가 수십 만 명에서 수백 만 명이 넘는다. 일부는 처형되기도 했고, 일부는 처형받지 않고 잘 살아 남았다는 점은 우리를 경악케하고 좌절케 하기도 한다. 그런 악인을 법으로 처형하지 못한다면 법이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갖게도 한다.

이 학살자들 가운데 우리와 관계가 있어서인지 유독 증오심이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다.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사령관으로 그는 전범 재판소에서도 미군에 실험 자료를 건네준다는 조건으로 무죄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끝까지 살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평안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그의 만행은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은 있다. 또 적에게는 총을 쏘아도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민간인에게는 총을 쏘아서도, 살해해서도 안 된다는 국제 규약이 있다. 전범국 일본은 그런 의식도 없었나, 잔혹한 생체실험을 비밀리에 강행했다. 이 사실은 이젠 비밀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고, 중국, 동남아인, 러시아인 등 가리지 않았고,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조건에 맞는 사람이면 무조건 끌어다 생체 실험을 가했다. 무려 3,000여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리의 영원한 시인 윤동주도 실험 대상으로 희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이 피실험자들을 '마루타'라고 했다고 기억한다. 이 책에도 나와 있다. '껍질을 벗긴 통나무'란 뜻의 일본어라고 한다.

 


 

수백 만 명씩 죽인 악인들이 줄줄이 책에 나오는 바람에 겨우 3,000명이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잔학성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로 끌고 가면 달라진다. 독자는 선과 악의 판단은 인간의 양심이 기준이 된다고 본다. 양심에 그르치면 악이고 양심에 따르면 선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 명을 죽이더라도 악마가 될 수 있고, 그 이상을 죽이더라도 선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세균전을 염두에 둔 생체실험은 어떤 말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 행위고 악마의 짓이다. 또 의학에서도 어떤 실험도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서는 안 된다는 실험 규정이 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방대하고 다양했다. 산 사람을 마취도 하지 않고 해부하여 위·장·간·폐 등을 꺼내거나 제거하여 생존 상태를 관찰하는 해부 실험이 자행되었고, 피부를 벗겨서 피부 표본을 얻기도 했다. 이같이 끔찍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희생자들의 고통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하 20~30도의 혹한에 산 사람의 팔에 찬물을 잔뜩 뿌리고 얼마 후 다시 뜨거운 물을 퍼붓는 동상 실험 또는 냉동 실험, 작고 밀폐된 공간에 어머니와 아이를 집어넣은 후 공기(산소)를 빼내 압력을 낮추거나 높여가면서 그들이 각각 얼마나 사는지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사람 몸에 가스를 주입하거나 페스트균·콜레라균 등을 주입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얼마나 버티는지를 실험했다. 또 남녀에게 매독균을 주입한 후 진행 결과를 지켜보거나, 산 사람에게 총을 쏘거나 칼을 찌르며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했다. 이런 악독한 실험 과정에서 죽은 희생자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페스트균을 배양해서 만주 일대에 일부러 퍼뜨려 감염 경과와 증세를 관찰하는 세균 실험으로 수많은 현지 주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책의 2장에는 「악녀들」 이야기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덜 폭력적이고, 덜 잔혹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남성에 비해 힘이 약한 대신 그들은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남성의 폭력성을 완화시키는 것이 대체적이다. 놀랍게도(?) 인류 최초의 악녀로 '살로메'라는 여성이 기독교 성서에 등장한다. 그녀를 묘사한 마태복음(제14장)와 마가복음서(제6장)에는 '헤로디아의 딸' 또는 '소녀'로만 기록되어 있고 이름은 없다. 기독교의 교리·교훈 등이 담긴 성서에는 가상과 상징적 표현이 적지 않아 살로메가 실존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 의문이 든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기독교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살로메가 살았던 연대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실존 인물이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예컨대 1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유대 고사기』에 살로메라는 이름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기원전 7~6년 경에 유대의 왕은 성서에 헤롯와으로 표현된 헤로데 1세였다. 그는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이 임명한 왕이었다.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던 그는 장차의 유대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과 나사렛 지역의 남자아이를 모조리 죽여 없앴다. 헤로데 1세는 수많은 건축물과 기념물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유대의 성지로 만드는 등 공적도 많았지만, 집권 말기에는 아내와 그녀가 낳은 두 아들, 장모까지 처형했다. 하지만 여섯 번이나 결혼해서 자녀가 많았다. 그중 헤로데 안티파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다시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헤롯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인 헤로데 빌립보 1세와 결혼해서 딸 살로메를 낳았고 이혼 후 조카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재혼했다. 고대 사회에서 근친혼은 보편적이었으나, 세례자 요한은 헤로디아의 재혼은 모세의 율법에 벗어나는 불법행위라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분노한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라고 헤로데 안티파스를 부추겼다. 요한을 옥에 가두고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 연회를 맞아 살로메가 앞에 나와 춤을 추었다. 살로메가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넋을 잃었다. 무엇이든 줄 테니 한 번 더 춤을 추라고 하자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헤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담아서 가져 오라고 지시했다. 어머니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에게 나름대로 통쾌한 복수를 한 것이다. 기독교 성서에 나타난 살로메의 악행은 그뿐이다. 과연 악녀의 범주에 넣을 만한 악행을 저지른 것인가.

 


 

독자가 보기에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악행도 과연 악마, 악인의 범주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18세기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러시아가 흑해에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크림반도 일대는 강력한 오스칸튀르크 제국의 것이었다. 물론 한때 러시아 부흥의 시기도 있었다. 표트르 대제 때다. 표트르는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여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발트해에 진출했다. 또한 프랑스와 프로이센 등 서유럽의 신기룻을 배우려 본인이 신분을 속이고 직접 프로이센에 가기도 했었다. 열정적인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의 근대화가 일부 이뤄지면서 국격과 국력이 모두 신장됐으나 아직 서부 유럽 강대국과의 동등한 교류는 어려웠다. 표트르 사후 포트르 2세, 안나 이바노브나, 이반 6세 등을 거쳐 일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즉위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다재다능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러시아 통치에만 몰두하면서 조카 카를 페터 율리히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 프로이센에서 나고 자란 카를은 프로이센에 친화적이었고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는 러시아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무능하고 정신적으로 미숙했다. 더욱이 그의 종교는 루터교였다. 그러나 정교회로 개종하고 '포트르 포도로비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프로이센 공국의 귀족 딸과 결혼했다. 그녀의 본명은 조피 프리데리케 아우그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두 살 때부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궁정에 출입하며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배웠다. 어머니는 러시와 황실과 먼 친척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와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나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무엇보다 성격 차이가 크고 교양과 소양도 차이가 컸다. 그런데다 표트르에게는 다른 여성이 있었다. 예카테리나와 결혼 뒤에도 그녀를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한다. 각방을 쓰고 별거 상태인 예카테리나도 다른 남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표트르는 정교회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국유화했으며, 정교회 성직자에게 전통적으로 길렀던 수염을 깎게 하고 루터교 목사처럼 옷을 입도록 강요했다. 농노 반란도 이어졌다. 즉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예카테리나 친위부대와 귀족에 의해 폐위되었다. 표트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으로 피신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으려고 했지만 8일 만에 피살당했다.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영토를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했다. 크림반도와 캅카스까지 확대하고, 알래스카를 정복하여 아메리카 대륙에도 식민지를 확보했다. '대제'란 칭호까지 받았다. 문화예술 함양에도 적극적이었고, 러시아의 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악녀로 지적되는 것은 아무래도 '성생활' 때문인 것으로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12~22명의 정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많은 토지를 주고 농노를 비롯한 노예들을 주어 충분히 보상하여 후환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용도로 국가 예산의 10%를 소요했다고 한다. 악녀의 조건을 충분하게 갖췄다고 보기에는 미흡하지 않나 하는 게 저자의 생각이고 독자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저자 : 이상화

 

1973년 방송작가로 데뷔하여 30여 년 동안 〈TV 손자병법〉, 〈호랑이 선생님〉 등 수많은 TV 드라마와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했다. 특히 1990년대 초 KBS-2TV에서 방영된 〈TV 손자병법〉은 서민과 직장인들의 애환을 해학적이고 심도 있게 다룬 문제작으로 ‘안방 관객’들을 사로잡은 공전의 히트작이다. 경원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KBS와 MBC 방송아카데미 등에서 지속적으로 후진들을 양성했으며, 방송작가의 업(業)과 더불어 ‘미래성문화연구소’를 개설해 인간이 지닌 성적 역할과 그 심층적 의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성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 집필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는 민족의 기원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한국인의 성의식과 성 행태를 추적해 에로스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

저서로 ‘잘난 척 인문학’ 시리즈인 《설화와 기담사전》, 《사라진 것들》을 비롯해 《아줌마 손자병법》, 《천재를 만드는 엄마, 바보를 만드는 엄마》, 《여자에게 다 줘라》, 《여자의 자격》, 《혼돈의 시대, 당신의 멘토는?》, 《최후의 툰드라》, 《여자의 사생활》, 《류중일 업포스 리더십》, 《호감력》, 《생각의 투망을 던져라》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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