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박미옥
박미옥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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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형사 박미옥』은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의 이야기다. 탈옥수 신창원 사건,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 속에 형사 박미옥이 있었다. 이 책은 30년간 강력계 형사로 살아가면서 파헤쳐나간 굵직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뉴스에 한 줄 나가지 못한 소매치기 일당이나 스토커, 차량 절도범들과의 이야기가 담긴 치열하고 뜨거운 기록이다. 최초의 여형사인 만큼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을 듯하다. 특히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는 전설의 여형사가 바로 박미옥이라고 한다. 1991년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됐다. 그는 초임 순경 시절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가 됐다.

그가 교통순경으로서 거리에서 힘차게 수신호를 하던 때 여자형사기동대를 지원하는 여자 형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사이던 분이 '자네도 지원해봐' 한마디가 박미옥을 대한민국 전설의 여형사가 된 단초였다. 초보 형사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후 30년간 강력계 여형사로 살아가며 그가 어떤 지옥 같은 사건과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지를. 그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를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가 그 선함을 지키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지를.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맡았던 형사 박미옥이 직접 쓴 이 책은 여형사로서, 남성들의 세계라던 강력계 형사들 사이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 여형사의 전설이 됐다.

 


 

당시 여성 형사, 강력계 형사는 경찰 내에서도 낯선 존재였기에 사건뿐 아니라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그는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냐”는 인사에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하고, “립스틱 정책이냐”는 비아냥에 머뭇거림 없이 맞받아쳤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사건은 여경과 남경의 성 대결이 아니라 팀워크로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통해 이른바 ‘여경 무용론’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성 편견을 정당하게 부숴버렸다. 그리고 강력범죄 현장에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선과 악의 끝을 마주한 형사 박미옥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 남모르는 아픔들로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 책을 통해 안부 인사를 건넨다.

형사로 살면 살수록 세상과 사람에 대해 점점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형사 박미옥은 되돌아본다. 점점 더 아는 게 많아지고 매사에 명확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온갖 사건들은 내게 사람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세상은 그렇게 흑백으로 선명하게 갈리지 않는다고 이 책을 통해 말한다. 그렇게 모르기 때문에 점점 더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도 강조한다.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한 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속속들이 관찰하고 파헤치고 묻는 것만이 사건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모르는 인생 앞에, 쉽게 안다고 표현 못 하는 타인 앞에 저자 박미옥은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러할 것이라고 장래도 밝힌다. 영원히 잘 모르므로 눈과 손발이나마 부지런히 굴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고. 공직자로서 자세도 확고하게 자리잡은 듯한 모습이다.

 

 

예전에 몇몇 사건들로 인해 세간에 ‘여경 무용론’이 유행처럼 입길에 오르곤 했다. 그때나 이제나 형사 박미옥은 아무 말도 히지 않았다. 기존 남자 형사들은 물론 국민들도 여형사라는 존재를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기던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강력범죄 현장을 누비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해온 여경이 나서서 반론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뿌리 깊은 여성 비하 의식이 하루아침 한 사람의 말로 사라지겠는가? 오히려 더 큰 후폭풍이 우려될 뿐이다. 그는 당시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오직 범죄 척결과 범죄 척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후배들에게 몸으로 가르치는 데 익숙해 있다. 그의 그런 소신과 성격은 책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수식어도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가 처음 강력계 형사가 되었을 때,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남자 형사들에게도 여자 형사란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고 한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여경들은 복사 심부름이나 보조업무 같은 행정 파트에나 있는 줄 알았다. 또 대부분의 여경들이 비교적 힘들지 않은 파트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다. 91년 당시에는 여형사가 배치되면 ‘형사기동대 차로 운전연습을 하더라’ 같은 유언비어성 비난이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여형사들끼리 거의 다 해결해놓은 사건을 막판에 ‘여형사가 범인을 직접 검거하기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남자 형사에게 고스란히 공을 돌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형사들은 이렇게 사건뿐만 아니라 세간의 편견과도 싸워야 한 것이다. 하물며 최고의 검거 실적을 쌓아가던 박미옥 형사가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그는 공식석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탈옥수 신창원 검거 특별팀에 투입되었을 때는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느냐는 거친 언사도 들었지만, 그는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하며 곧장 현장에 집중했다. 결국 현장에서 사건은 여경과 남경의 성대결이 아니라, 언제나 긴밀한 팀워크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범인을 검거하다가 도리어 경찰이 부상당하거나 때론 사망하기도 하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현장. 그는 이 현장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의 삶과 죽음들을 곡진한 문장으로 위로하고 쓰다듬는다.

 

애통하게 떠난 두 형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날, 나는 그곳에서 두 형사를 보내는 진혼시를 낭독했다. 그때 내 안에서 나 자신과 내가 아는 모든 형사들의 영혼이 목놓아 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형사의 울음이었다. 경찰관으로서 제복 입고 가슴에는 흉장을 달고서 밤낮없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경찰 정신을 안고 살지만, 실은 언제 칼 맞고 총 맞을지 모르는 운명. 경찰관 이전에 우리도 흉기를 보면 두렵고 괴한에게 죽임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대놓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우리 동료들끼리만 아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현장을 함께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남녀 불문 우리 모두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때론 나의 불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경찰의 세계는 여경과 남경으로 갈리지 않는다. 한마음으로, 서로 함께하는 호흡과 노력으로, 오던 칼도 멈추게 하고 가던 범인도 우리 손 안에 들어오게 하는 기운은 오직 팀워크에 있다.(p.22~23)

 


 

이 책에는 대한민국의 국보 1호(숭례문)가 잿더미가 되어가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온 국민에게 생중계된 숭례문 방화사건, 국민들 사이에 의적이라도 된 듯 신드롬을 일으켰던 탈주범 신창원을 검거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의 일기장을 분석했던 때의 일을 비롯해 그가 파헤쳐나간 수많은 사건들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 특진과 포상을 안기며 그의 이름을 인구에 회자되게 한 것은 대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큰 사건과 지독한 범죄자들일 테지만, 이 책에서 그가 특히 공들여 기록한 것은 뉴스에 한 줄 나가지 못한 소매치기 일당이나 스토커, 차량 절도범들과의 전투다.

소매치기는 반드시 현장검거를 해야만 하는데, 훔치는 손은 너무도 빨라서 그의 눈에 잡히지 않는다. 형사 박미옥은 만원 전철 속으로 스며들어가 소매치기로 추정되는 이의 등에 슬그머니 제 어깨를 기대본다. 그리고 가만히 포착한다, 범인의 어깨뼈가 움직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눈보다 예리한 감각으로 마침내 그는 소매치기 일당을 현장검거한다.

흔히 형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사건이나 흉악범들이 회자될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지만, 형사들이 자신의 업에 뿌듯함을 느끼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범죄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 범죄 피해를 막아냈을 때, 뉴스에도 한 줄 나가지 못할 작은 사건일지라도 서민들이 가슴 칠 일을 막아냈을 때라고 회고한다.

 

"내가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 일이 필요했을 때, 소매치기 두목과 기술자를 잡았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자주 내 일에 대한 성과와 보답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을 향해 넘어갈 수 있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한다. 일의 고통을 이겨낼 힘도, 일하다 얻은 상처를 싸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모두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 속에 있었다."(p.165~166)

 


 

형사 박미옥은 취조의 달인이자 범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기술자다. 범인의 화려한 범죄경력보다 살이 다 터지고 때가 낀 범인의 손등에 담긴 표정을 읽어내 기댈 곳 없는 범인의 마음을 달래고, 자백을 닦달하며 취조하기보다 질문하고 대화하며 속이야기를 끌어낸다. 위험천만한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그는 “지금 당신의 얘기를 듣고 도울 사람은 바로 나”라고 외치며 범인과 인질 모두를 살려낸다.

범인에게 ‘당신 왜 그랬느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더 정확하게 묻기 위해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고 서울과학수사계 프로파일링 팀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또다른 삶의 도구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그가 돌연 경찰 조직을 떠난다고 했을 때, 불치병에 걸렸다더라는 소문이 퍼질 만큼 그는 경찰로서의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는 이제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인생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들-그 복잡하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그는 듣고 싶다고 말한다.

30년 형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경청과 응시로 사건을 해결했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범죄자라고, 전과자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판단하고 막 대하지 않는 법을 몸과 마음에 새겼다.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들이 수시로 터져나오는 강력범죄 현장에서 선과 악의 끝을 목격한 형사 박미옥-이 책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 남모르는 아픔들로 앓고 있는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 건네는 그의 안부인사이다. 그는 책을 통해 말한다. 오래된 상처와 원한들이 터져 피와 눈물이 되어 흐르는 현장에서 끝없이 후회하고 애도하지만 말고, 이제는 일상 속에서 서로 이해하고 풀며 살자고. 우리는 끝내 그럴 수 있다고.

 


 

"사람들의 욕망과 슬픔이 버글거리는 그 현장에서 나는 결코 이기적일 수 없었다. 때론 기꺼이 이익 앞에 물러나고 불편함을 감수한 것은 그것이 곧 형사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이미 현장이 된 사람보다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제 나는 일상의 당신들을 만나고 싶다."(p.295)

 

저자 : 박미옥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순경 공채 시험에 합격하며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여자형사기동대를 창설할 때 선발되어, 23세에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가 되었다. 경찰이 된 뒤 익힌 수준급의 유도, 태권도, 검도 솜씨로 사람들을 압도하며 출중한 검거 실적을 쌓아갔다. 순경에서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했다. 청송교도소 출신 납치범을 검거하며 경사를 달았고, 탈옥수 신창원을 잡는 데 기여한 공로로 경위가 되며 특진을 거듭했다.

2000년 최초로 여성 강력반장이 되었고, 2002년 양천경찰서 최초의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부터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프로파일링)팀장과 화재감식팀장을 겸임하며 숭례문 방화사건 현장의 화재감식을 총괄지휘했다. 2010년에는 마포경찰서 강력계장으로 발령받아 만삭 의사 부인 살인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등을 해결했다. 이어서 2011년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을 맡고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을 스스로 갈아치우며 여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다.

드라마 〈시그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괴물〉 〈히트〉 〈미세스 캅〉 〈너희들은 포위됐다〉, 영화 〈조폭 마누라〉 〈감시자들〉 〈하울링〉 등 수많은 작품에서 형사의 현장과 사건에 대해 자문을 맡고, 극의 모티브가 되었다. 2021년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했다. 언론은 그를 ‘여경의 전설’이라 칭했다. 현재 제주에서 후배 여형사와 한 마당에 각자의 집을 짓고서, 마당 한쪽에는 인간의 선악과 마음에 대한 책들을 가득 채운 서재 겸 책방을 열어둔 채 살고 있다. 두 여형사의 집에 온 사람들은 고단하고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울고 읽고 쉬어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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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퉁이 집
이영희 지음 / 델피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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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 모퉁이 집』은 장르 소설로 분류되지만 역사 소설에 가깝다. 표제어로 쓰인 '그 모퉁이 집'은 일제 강점기 불에 타 80년째 버려진 폐가이다. 어느 날 신비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꽃집에 3만 원짜리 꽃다발을 주문하고, 꽃잎 향과 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내는 남자들. 꽃집의 딸이자 아쟁 연주자인 ‘한마디’가 그 모퉁이 집에 꽃 배달을 간다. 저자 이영희는 일제 강점기 때로 모퉁이 집의 기원을 끌어올린다. 일제 강점기-여성(소녀)-위안부란 상상적 공식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소재의 연결이다. 주인공 한마디는 어릴 적 기억을 잃었지만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 독특한 인물 설정으로 독자들을 신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솜씨는 중견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는 꽃 전문가로서 다양한 꽃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역사적 상상력을 보태어 새로운 장르인 〈플라워 판타지〉를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마디가 매일 아침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는 모퉁이 집에서는 두 남자가 살며, 꽃잎 향과 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낸다. 생계인 셈이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그 모퉁이 집에 홀려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비밀로 가득한 집의 베일이 차츰 벗겨진다. 저자는 마치 한 잎 한 잎 꽃잎을 떼어내듯 특유의 몽환적이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공간의 배경도 80년을 사이에 두고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종횡무진 오고 간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매력적 인물들을 통해 씨줄과 날줄로 엮듯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환상적인 세계를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책 『그 모퉁이 집』은 책을 읽는 내내 향긋한 꽃 향기에 휩싸인 듯한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1944년 12월, 짓밟혀 누운 경성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차디찬 싸리꽃 송이들이 목조건물을 스쳐 날리는 밤 풍경은 동화 같았다. 하지만 상복을 입은 나라는 눈이 동화와 직결된다는 것이 서글펐다. 혀가 잘려 버린 말(語)이나 겁탈을 당한 인간의 존엄은 서글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p.11)

소설의 도입 부분이다. 80년 전 우리나라 서울의 모습을 설명한다. 눈발이 날리지만 싸리꽃이 등장하며 분위기를 완화시킨다. 그러나 '혀가 잘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힌 서울이 온전한 모습일 리 없다. 1944년 12월의 겨울이면 사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로 치달을 때다. 이미 독일군은 항복 직전이고 일본 역시 오키나와를 넘어 일본 본토에 폭격을 당하는 파국 직전이다. 그 서울의 한 기생집에서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매화실〉에 앉아 술자리를 갖고 있다. 매화실은 이 기생집에서 최고의 예인들이 매일 공연을 펼치는 곳이다. 그들은 이미 거나하게 술기운이 도는 상태다. 예인이 등장한다. 아쟁을 연주하는 악사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눈썹부터 콧날을 지나 입술까지 흐르는 선이 참으로 처연한 미색이라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여인은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열려있던 방문으로 창포 꽃이 심긴 토분 몇 개가 따라 들어왔다. 봉오리만 맺힌 꽃대들이었다. 비록 꽃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12월에 창포 꽃을 본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였다. 이어 활대를 잡아 쥐는 여인의 손가락은 창포 꽃대처럼 길고도 희었다. 그제야 관리들과 윤송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채(異彩)란 낯선 단어지만 큰 뜻은 없다. 사전식 풀이로는 이상한 광채나 색다른 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겨울에 등장하는 창포 꽃과 예인으로 등장해 연주하는 악기가 아쟁 등에 관심이 쏠린다. 윤송이란 인물이 등장하지만 아직은 총독부 관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조선인 하급 관리쯤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듯하다.

 


 

책을 펴낸 출판사 측에 따르면 꽃마다 창조주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뜻으로 모든 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각각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직접 말이나 편지로 전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의 뜻을 가진 꽃을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니 하루 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미의 꽃말은 낭만적인 사랑, 해바라기의 꽃말은 숭배이다. 예로부터 꽃은 각 민족·종교·민속 등에서 여러 가지 상징·표장(標章)으로 사용되었다. 꽃의 특징·성질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인데 이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페르시아·아라비아 등의 풍습을 받아들였다는 설(說), 이것을 영국에 전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행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두산백과는 밝히고 있다. 많이 아는 꽃말로 장미는 '사랑' '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제비꽃은 '겸손', 월계수는 '영광', 올리브는 '평화' 등이 있다. 이들 꽃은 특질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로 붙인 말이다. 앞서 언급한 노랑꽃창포의 꽃말은 '우아한 심정', '당신을 믿는다', '그대는 정숙하다'라고 한다. 이 책의 뒷 부분에 「그 이름 은. 조.」란 일곱 번째 장(章)에서 '노랑창포꽃' 이야기를 다룬다.

 

“우쨌든 그 천녀님은 그대로 마을에 머물게 댔는데, 이 천녀님이 참말 하늘에서 온 사람인 게, 꽃을 피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누만.”

“꽃을 피우는 재주요?”

“암. 그 천녀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믄 그라고 꽃들이 피어났다고 하제.”(p.283)

 


 

이 소설은 이런 꽃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신비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 ‘꽃’들을 소재로 펼쳐지는 판타지라 더욱 아름답고 흥미롭다. 버튼 하나면 자극적인 영상물들이 주르륵 쏟아지는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잔잔하고 신비하리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드물고 귀하다. 물론 주인공인 ‘한마디’가 국악원의 아쟁 연주자인 설정도 예사롭지 않다. 다른 악기들과 달리 아쟁 연주가 갖는 처연한 느낌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배경인 일제 강점기를 넘나들며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한마디가 다루는 아쟁(牙箏)이란 악기는 아시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아시아 금쟁(琴箏, 치터)류 악기 중 유일한 찰현(擦絃 또는 궁현弓絃, 줄비빔)악기로, 안족(雁足, 기러기발) 위에 음높이 순으로 얹은 7~10개의 줄을 막대기나 말총활로 문질러 연주한다. 정악에 쓰이는 대아쟁과 민속악용 소아쟁(산조아쟁) 외에, 창작곡 연주를 위해 개량된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아쟁이 있다고 한다. 대아쟁(大牙箏)은 한국 전통 선율악기 중에서 음역이 가장 낮은 악기이며, 현악기 중 크기가 가장 큰 악기이기도 하다. 아쟁은 현악기이지만, 전통음악에서 아쟁 파트는 해금과 함께 흔히 관악으로 취급한다. 이는 전통음악에서 현악기 하면 주로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줄을 뜯어 연주하는 치터(flucked zither)를 가리키고, 아쟁이나 해금과 같은 찰현악기는 지속음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 특성이 관악기와 유사하다 보기 때문이라고 두산백과는 전하고 있다.

 

"흰 장미를 닮은 여자가 사의 찬미를 아쟁의 선율로 만들어 흘려보내는 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꽃들이, 나무들이, 그 남자가, 그 선율 때문에 숨죽여 흐느끼는 밤. 누군가는 덜컹 박자를 놓치고 누군가의 꽃마차는 덜컹 바퀴가 걸렸다."(p.157)

 

 

소설을 읽다 보면 백과사전을 찾아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꽃은 물론 악기나 일제 강점기 막바지의 모습 등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찮지 않다.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읽는 재미가 한 번에 죽 읽어내리는 소설보다 더하다. 특히 저자의 꽃에 대한 해박한 저자의 지식은 한 번 읽고 지나쳐 버리기 아까운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다. 또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인식과 현재의 우리나라로 80년을 뛰어넘어 사건을 전개시키는 저자의 상상력과 그것을 그려내는 필치는 가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누군가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순간을 글로 옮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주인공 ‘한마디’가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다 모퉁이 집의 새 주인 ‘모도유’를 만나고 마음을 여는 과정은 마치 꽃잎을 하나씩 세는 듯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저자는 섬세하고도 가녀린 그렇지만 강인한 한 떨기 꽃과 같은 문장으로 한마디를 비롯한 인물들을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쟁 산조를 함께 들어보기를 권한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고 구슬픈 아쟁의 선율은 한 여성의 기구하고도 애절한 삶을 넘어 독자가 1945년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한마디’가 연주하는 아쟁의 선율 〈사의 찬미〉에 깨어나는 80여 년 전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일까? 이 소설은 구슬프고 아련하게 귓가에 울리는 아쟁 연주와 주위를 가득 채우는 창포꽃 향기의 몽환 속으로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전한다. 누구든 모퉁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꽃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플라워 판타지’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아입니더. 지는 나리께 목숨을 끊어 바쳐야 할 죄인입니더. 그래도 우짜믄 죄값은 쪼끔은 치렀십니더. 지가, 이 한 많은 목숨이, 아들 내외, 손자 내외 다 먼저 잡아묵고 이리 추악하게 혼자 늙었십니더.”

“그리 말씀하시 마세요. 저 또한 아들 내외를 한날한시에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걸 어찌 누군가의 죗값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인생의 우거진 수풀 속에 놓여 있던 덫에 걸렸던 것뿐이지요.”(p.323)

 

〈어제도 말씀드렸죠? 저는 다 감사한 일뿐이라고요. 해서 더 이상의 바람은 제게 없어요.〉

”그 바람이 어디 너의 언덕에만 불고 있었더냐? 나는? 도유는? 마디 양은? 우리의 언덕에서는 여전히 그치지 않은 이 바람은 이제 누구를 향해 불어야 하는 건데?”(p.346)

 

저자 : 이영희

 

경남 진주시 하대동 거주.

꽃을 사랑해서 꽃으로 글을 쓰는 글쟁이.

<영남문학> 중편소설 등단.

통일부 통일창작동화 수상.

대한민국 e작가상 수상.

제 7회 진주시 북 페스티벌 초청 강연.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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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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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제한되고 폐쇄된 공간에서 사진 예술가가 선택한 것은 글의 예술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스스로 경험한 아픈 고통을 사진 찍듯 써 내려간 글로 사진을 대신했다. 카메라와 양각대 대신 종이와 펜을 들고 사진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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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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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카메라 없는 사진가』는 표제어 자체로만 보아도 '슬픔'과 '고통'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붓 없는 화가', '펜 없는 문필가'를 연상케 한다. 이 글의 저자 이용순은 사진가다. 저자는 미국 시카고의 콜롬비아 칼리지와 뉴욕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정통 포토그래퍼이며, 미국과 서울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중견 작가이다. 또 최근의 아홉 번째 개인전에선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내면의 풍경과 문학적 서정의 순간들을 포착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카메라 없는 사진가'가 되었을까.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이 책이 출간된 과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느 날 카메라가 들려있어야 마땅할 사진가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알고 지내던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해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범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 어리숙한 예술가는 2년여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낯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며, 영상에 대한 감각을 문자의 형식으로 풀어낸 또 다른 창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교도소)에서 에세이 형식으로, 때로는 시의 형식으로 카메라를 대신해 내 생각을 표현해왔다. 그 노트가 무려 17권에 달했다. 다행이었다. 글과 사진은 정말 많은 것에서 비슷했다. 서툰 내 생각이 온전하게 글로 들어와 박혔는지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이 행위를 두고, 어느 사진가가 카메라가 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노라고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p.9)

 


 

사진가 이용순이 사진이 아닌 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해냈다. 극한의 환경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극복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스스로 훌륭하게 이겨낸 자신을 오히려 사진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깊은 울림을 준다. 사실 사진과 문학은 엄격히 다른 분야의 예술이다. 그러나 저자의 글로 쓴 사진은 예술이 무엇을 표현하든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작가 정신, 공감은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에 흐르는 것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시켜 준다. 사진가가 글로써 자신의 예술을 어찌 다 표현해낼 수 있으랴. 사진 예술의 독창성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저자는 두 가지 예술의 공통점을 뽑아내 서로 다른 분야에 스며 있는 예술 감각은 같다는 점을 인식시켜준다.

이 책에 수록된 시와 산문도 예사롭지는 않다. 탄탄한 문장력과 문학적 안목이 눈길을 잡아끌 정도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 보인다. 시 작품의 수준 또한 저자가 사진가가 맞나 싶을 정도다. 책에는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내면의 심층에 다가가는 깊은 시선이 돋보이는 저자의 아름다운 사진 작품 20여 점을 수록되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일상과 주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관찰, 따뜻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매우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책이 됐다. 사진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고독하지만 평온함을 준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교도소 안의 생활을 표현한 부분을 읽을 때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을까. 모든 것을 감수하고 교도소에서의 생활에도 적응하면서 저자의 마음속에서 숨어 있던 예술 감각과 예술혼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것이라도 있어야 살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독자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독자의 심정도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저자를 만난 일도 없을 일반 독자들은 교도소 생활을 견딘 것만으로도 위로 격려가 된다. 그러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풀리겠는가? 저자는 자신의 사진 20장을 곳곳에 배치해 답답한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이 평온함을 보여준다. 또 어쩌면 분노할 독자들을 위해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도 보여준다. 물론 여러 장의 「비 오는 날」 중에는 비는 보이지 않는데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이 바닷가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서 '모순된 행동'을 표현하는 듯하다. 또 「하얀 아침」에서는 자욱한 안개로 흐릿한 시야로 자신의 교도소 생활을 떠올리게도 한다. 「자화상」은 그야말로 고독한 모습의 한 사람만 텅빈 바닷가에 서 있다. 철저하게 고립된 자아의 표출인 것 같다. 몇 장의 같은 제목 「사막에서」에는 사람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덩그러니 사막의 모습만 드러내고 있다. 이 또한 철저한 고독과 함께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다.

예술가에게 획일적 질서의 강요는 치명적일 것이다. 더욱이 통제와 감시 속의 예술가는 뭍에 오른 물고기나 다를 바 없을 터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예술가들이 일제에 항거했는지를 되돌아보면 예술가와 통제, 감시, 획일적 질서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가 교도소에서 보냈을 인고의 시간은 수백 배 더 길게 느껴졌으르리라. 또 사진 예술가인 저자에게 더 견디기 힘든 건 창작 도구(카메라)의 상실이었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이해된다. 자, 이제 어찌할 것인가. 머릿속에 들끓은 이미지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끄집어내 형상화할 것인가. 저자가 주저 없이 펜을 든 이유다.

 

 

그가 교도소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종일 떠들어대는 TV 소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들었던 초기의 몇 개월이 지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일을 〈책 머리에〉 적었다. 이에 따르면 첫째는 독서였다. 사람은 정말로 적응하는 존재 같았다. 그 소음 속에서 마침내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오래전 글을 쓰던 기억을 더듬어 주섬주섬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보다는 그동안 읽지 못했던 철학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원해서 교도소 안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가다. 표현의 욕구가 강한, 카메라가 없는 사진가다.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이낙. 어떻게 사진을 찍을 것이가. 어떻게 이 눈에 보이는 생소한 그러나 충만하게 내 가슴을 적셔오는 이 오브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혼란스러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내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될 것이다. 첫째, 사진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개념을 좀 더 현대에 맞게 풀어낸다면 아무래도 그 의미의 폭이 넓어져야만 한다. 둘째, 종이에 프린트된 것만이 사진이라고 하지 말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영상의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으며 사진도 그 영상의 중심 언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역시 문제는 없다. (중략) 사진은 분명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가슴으로부터 토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 인해서 사진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써 내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내적 경험은 감정으로서의 경험이며 이는 생각 혹은 사고에 의존하다. 또 이는 외적 경험에 대한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다. (중략) 요즘의 나는 종종 시를 쓴다. 나는 결단코 나의 시가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사진으로 환원되어 보이기를 바란다. 나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p.28~30) - 「시는 사진이다」 중에서

 


 

저자는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조리개로 들어오는 광원을 계산하며 셔터를 누르는 대신, 용수철 없는 재소자용 플라스틱 펜에 마음의 빛을 비추며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계절이 열 번쯤 바뀌고 그가 일상에 복귀할 때, 그의 손에는 이 책의 초고가 될 열일곱 권의 노트가 들려있었다. 이곳에 담긴 글에는 역시나 ‘사진가다움’이 선명히 드러난다. 사진이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한 지점을 포착하여 물성을 부여하는 것. 그래서 사진을 흔히 기록의 동의어처럼 취급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진은 그곳에 콘텍스트가 부여된 기억(memory)에 가깝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진은 역사를 담고, 어떤 사진은 인물의 개성을 담고, 어떤 사진은 정치를, 어떤 사진은 철학이나 과학을 담고, 어떤 사진은 거짓말도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저자는 그렇게 포착한 사물, 인물, 사건을 감방이라는 암실에서 종이와 펜으로 인화한다. 교도소 운동장의 맨드라미, 창살 바깥 산과 구름들, 동료 재소자들의 얼굴, 죄수들끼리 몰래 만든 요리의 메뉴들, 사동 안에서 소문으로 떠도는 사건들까지. 특히 저자가 즐겨 다루는 방식은 시(poem)다. 마치 오브제를 놓고 장면을 구성하듯, 때로는 연작사진을 이어 사건을 구성하듯 기억을 사로잡는다.

저자에 따르면 출소 후, 교도소의 노트에 등장하는 테마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책은 사진이 출품되는 전시회에 맞추어 출간된 것인데, 해당 작품들은 책에도 대부분 수록되었다. 동일한 모티브가 글과 사진으로 어떻게 텍스트화되고 이미지화되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저자가 교도소에서 기억을 글로 남기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이다. 자신이 끌어안아야 할 삶이며 타인의 삶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너무 익숙하고 당당하게 수감생활을 시작하는 살인범, 억울하다고 푸념만 늘어놓고 ‘고문관’ 노릇만 하는 목사님, 은박지와 건전지로 불을 붙이고, 수건과 옷에서 실을 뽑아서 십자가 기념품을 만드는 예술가들, 누가 벌금의 대납 대신 초코파이 15박스를 넣어준 노역수, 아무도 보지 않는 TV 화면 옆에서 각자의 일거리에 몰두하는 재소자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 바로 삶이다. 진부함과 반전이 늘 공존하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삶. 그곳에는 당연히 온갖 비열함과 야비함 곁의 명예로움과 인간다움이 존재한다. 재소자들은 미국의 주가 몇 개인가 하는 따위의, 언뜻 사소한 사실을 놓고 수십만 원 내기를 건다. 심판은 교도관들이다. 미국 유학파인 저자는 내기에 자주 이겨 (교도소 기준으로) 엄청난 돈을 딴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누구도 돈을 건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의 시간이 다 허비는 아닙니다. 여기에도 분명 유익함이 머무는 곳이라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을 얘기한다면 저는 생각하는 시간이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거창하게 철학이 아니어도 부디 사고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밥 먹고 잠자며 달력에는 엑스표 해가며 자신을 죽여 가는 시간이 아니라 꿈을 꾸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 꿈은 곧 여러분의 미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p.71) - 「세상에서 가장 큰 죄」 중에서

 

저자 : 이용순

 

경기 광주 출생. 콜롬비아 칼리지 시카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23년 5월 개인전 〈비 오는 날〉을 포함해 서울과 미국에서 9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1995년 사진예술사가 주최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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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숲 차 - 나의 몸을 존중하고 계절의 감각을 찾고 산뜻하게 회복한다
신미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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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명은 다른 생명체에 비해 긴 편이지만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희망하지만 누구나 죽는다. 인간의 희망을 담아 노력 끝에 의과학의 발전으로 인간 수명을 크게 늘렸다. 그 유명한 '100세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유명한 〈백세 인생〉이란 노래가 미디어나 휴대폰 벨소리 등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란 듯 코로나 팬데믹은 일시에 '100세 찬가'를 잠재워 버렸다. 오만한 인간에게 경고를 준 것인가? 아니면 성찰의 기회를 준 것인가? 팬데믹을 가까스로 넘겨온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장수'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자리에 이젠 '건강'이 다시 화두에 오른다. 역시 장수보다는 건강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침대에 누워 지낸다면 그 기간이 길어진다면 장수보다는 오히려 단명이 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건강이 담보되지 않은 장수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요가 숲 차』는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모든 것의 건강을 이야기한다. 사실 "건강은 스스로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병 들어 후회 말고 평소에 건강 관리해야 오래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 의사뿐만 아니라 장수하는 분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 책에서 저자 신미경은 "지금 나는 건강을 탐내는 삶을 산다. 부와 명예에 대한 탐심은 삐걱거리는 몸 앞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건강해야 욕심도 생긴다. 그러고 보면 체력이야말로 행복의 척도 같다."고 말한다. 스스로 건강치 못한 몸을 방치해 심하게 병원 생활도 해봤고, 이후 건강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큰 병원에 다닐 만큼 아프기도 하며 건강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어간다고 토로한다.

 


 

저자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체력을 저금하기 가장 좋았던 젊은 시절을 흘려보냈지만, 지금이라도 살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요가를 시작했지만, 입문자의 '만만하다'는 엄청난 착각임이 첫 번째 수업이 끝나자마자 밝혀졌다는 후회도 남긴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고 2년 같은 5년 동안 요가를 꾸준히 해왔단다. 처음으로 매일 운동하는 뿌듯함을 느껴봤다고 털어놓는다.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은 낯선 산으로 하이킹을 다녀온다. 산을 10여 분만 올라도 숨을 헐떡였던 10년 전과 지금은 천지차이라고 밝힌다. 나이와 체력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한다고도 소회를 털어놓기도 한다. 저자는 "무엇이든 단련한 만큼 강해지고 반복한 만큼 는다"는 귀중한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겼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말한 몸이 지극히 실무적 시스템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젠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시간을 들여 단속적, 구체적으로 고통을 주면 몸이 메시지를 이해하고 주어진 운동량을 자진해서 수용한다고 했던 것을 일컫는 것을 말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 시대를 웰니스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웰빙(Well-being)과 행복(Happiness), 건강(Fitness)을 합한 개념으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심신의 안녕을 바라며 집중하는 활동으로 웰니스란 매우 사적인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으면 기운이 없고,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괴롭고, 개인 스포츠를 선호하며, 혼자 있기 좋아하는 기질이고, 명상을 하며 차분함을 배우고 화가 날 때는 호흡으로 다스리는 방법이 자신에게 가장 알맞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해온 경험을 토대로 밝히는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성격이나 체질적으로 이와 반대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건강에 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고, 절대적인 건강법을 찾기보다 스스로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모아 자신만의 복지 생활을 꾸려 나갈 것. 저자는 그게 바로 개인이 지향해야 할 웰니스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제호처럼 요가, 숲, 차를 매개로 하는 자신의 소소한 웰니스 라이프에 대한 기록이라고 저자는 「나의 골디락스를 찾아서」란 '프롤로그'를 통해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체력 단련에 한정하기보다 몸과 마음 모두를 잘 보듬는 시간을 갖고, 집이나 사무실처럼 나를 둘러싼 환경을 관리하고 좋아하는 차를 마시는 휴식 시간으로 나를 되돌아보며 반성과 나아감이 있는 나날이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 아니고, 출퇴근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고, 이렇게밖에 못 사는 건가, 다른 삶의 방식은 없나? 등으로 종종 고민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컨디션을 가져보겠노라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10년 후에 '인생을 다시 한 번 산다면'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메모가 지금과 같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까지 해온 대로 더 열심히 할 작정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완벽하게 만족하는 인생이 뭔지 모르지만, 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정체된 삶이 아님은 안다는 저자의 경험을 이어 받아 실천함으로써 독자 역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을 뜻하는 '골디락스를 찾고 싶다.

이 책은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요가 : 내 몸에 대한 존중」, 2장 「숲 : 치유의 공간」, 3장 「차 : 일상의 위안」, 4장 「느슨하게 산다 : 나는 내게 좋은 사람」 등이다. 저자는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로 극단적인 두 가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했다고 한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 저자의 일상을 지켜주는 지금의 세 가지 ‘복지’는 바로 요가, 숲, 차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생을 다시 산다면’ 혹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새로운 공부, 더 많은 곳으로 여행 가기,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매달리지 않기, 좋아하는 운동 갖기 등 사람마다 각자의 리스트는 다르겠지만 이 모든 바람의 공통점은 바로 ‘나에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를 시작으로 미니멀한 자신의 삶을 균형 있게 가꿔온 신미경 저자는 이번 책에서 유해한 것들을 더 최소화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중심에는 바로 ‘요가, 숲, 차’가 있다.

 

 

책에 따르면 수시로 번아웃되기 좋은 도시에서 일을 한다는 건 출퇴근 교통체증, 대충 때우는 밥, 노트북 모니터만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기, 예측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그런 생활을 하며 20대와 30대를 보냈고 그 결과 얻은 건 훅 망가진 몸뚱아리였다.

잠을 줄이고 체력을 저금하기 가장 좋았던 젊은 시절을 흘려보냈지만, 지금이라도 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5년 동안 요가를 꾸준히 하며 처음으로 매일 운동하는 뿌듯함을 느껴보기 시작했다. 고요한 차의 시간을 가지며 손에 쥐는 따스한 찻잔의 온기로 알게 모르게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저자는 이를 자기만의 ‘복지 생활’이라고 표현한다. 일상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보통의 삶에 녹아 있는 편안함 말이다.

저자는 책 출간 후 가진 예스24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건강이 정말 좋지 않았고, 운동마저 싫어해 체력도 완전 밑바닥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70대 후반에 가까워진 아버지보다 체력이 약해요. 그런데 운동이 너무 싫었어요. 그러다 젊은 나이에 남은 수명을 걱정할 만큼 많이 아프기도 했고요. 컨디션이 나쁘니까 매사 예민해져서 못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도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건강 관리에 집착하기보다는 컨디션 관리를 최우선으로 두기 시작했어요. 건강책이나 친구나 사회 선배들이 좋다고 하는 여러 건강법을 삶에 시도해본 시기가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를 쓸 무렵이었고, 세월이 흘러 『요가 숲 차』는 그 시도 끝에 내게 좋은 것, 잘 맞는 것을 남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결과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만 골라내 일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터득한 건강의 지식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다른 일이 그러듯 '노력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란 말을 뼛속에 새겼다. 마치 농부가 곡식을 재배할 때 자주 쓰는 '땅은 농부가 흘린 땀만큼 돌려준다'는 지혜다. 지금의 상태로 꾸준히 해나간다면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건강이나 체력 등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도 남겼다. 어쩌면 '매일 꾸준히 노력하면 결실은 반드시 맺는다'는 자신감도 붙은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저자의 말에서도 자신감과 겸허함이 함께 묻어나온다. "10년 후에는 지금 제가 고민하는 것들을 아마도 이루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것들을 분명하게 마음에 그리고 있고, 표로 정리도 해두고 계획대로 못하는 날도 있지만, 중단할 땐 하더라도 어쨌든 조금씩 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바라는 대로 풀릴지는 알 수 없죠. 산에 오르면 보이는 풍경, 그건 오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거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살면서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어떤 것을 만나고 무엇이 보일지는 모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연스레 하고 살면 그뿐이고요. 거기에 저는 나중에라도 제 자신을 혹독하게 평가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일은 이 책의 마지막 장 「느슨하게 살기」인 것 같다. 요가, 숲, 차를 가까이 하는 생활로 만족하고 있지만 '느슨하게 살기'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요가 2년을 하다 보니 체력이 좋아져서인지 '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한다'는 버릇을 아직 완전히 깨부수지는 못한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흘러가는 삶이 아깝다고 하니 '느슨하게 살기'가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던 듯하다. 번아웃과 인생 권태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잠깐 쉴 때 회복된 줄 알고 다시 일하다 보니 쉽게 고쳐지지 않은 습관 중의 하나인 듯하다. 고착화됐다고 할까. 그러나 요가 숲 차로 이미 훌륭한 효과를 얻었고 충분한 성과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10년 후 생각하면 「느슨하게 살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지금 내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불필요한 긴장을 내려놓는다. 느슨한 마음이 나를 구한다."(p.165)

 


 

오랫동안 여러 라이프스타일을 실험해보았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고민하며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기보다 근사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나는 정작 먹고살기 바쁘면 삶의 기본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함을 알게 되었지만. 내게 기분 좋은 생활 방식이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지금 나에게는 좋은 컨디션을 만드는 방법이 삶에서 가장 앞서 있다.(p.31)

 

가끔 패잔병 같은 청춘의 시기를 떠올린다. 다시 오지 않을 그때의 고민과 걱정은 지났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의 모든 헛발질을 포용하겠노라고. 늘 실패만 하지도 않았고, 손에 꼽는 잔잔한 성공은 칭찬받을 만하다고. 앞서 나가는 사람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도 잘 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경쟁자는 때때로 나와 가장 닮은 동료이기도 하다.(p.169~170)

 

저자 : 신미경

 

수필가. 주로 더 나은 일상을 위한 실천과 철학이 담긴 글을 쓴다.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로 극단적인 두 가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한 후 산다는 건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마흔, 생활·건강·일과 같은 삶의 주요 영역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취미에 가까운 지적 생활로 더 나 다운 내가 되는 오늘을 보내고 있다. 저서로는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 《나를 바꾼 기록 생활》 등이 있다.

블로그: blog.naver.com/mikyangel

인스타그램: @shin_mikyong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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