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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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란 이름의 금박이 벗겨진 인간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잔인한 야수일 뿐이다." 선하고 성실한 사람에 의해 왜곡된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처절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부조리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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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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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구원』은 표제어부터 종교적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교적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에게 '구원'(救援)'이란 단어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면 좋겠다고 제안해 본다. 구원이란 기독교 등 서양의 종교에서 주로 쓰던 말이다. 국어사전은 ①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② [기독교]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 임성순이 〈작가의 말〉에서 쓴 대로 소설을 쓴 것은 '이상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작가의 말'이 두 번 씌어 있다. 하나는 초판을 낼 때 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정판'의 〈작가의 말〉이다. 저자는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이 첫 작가의 말에서는 작품의 내용에 집중했다. 작품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이자 베스트셀러(성경을 말하는 것)에서 송두리째 별려 왔음을 밝힌다. "고급스럽고 고상해 보이는 부분들은 지난 2,000년간 그분(예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학문과 생각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딜레마들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작품은 종교의 입장이나 교리를 대변하기 위해 쓴 게 아니라, 교리나 이론, 철학이 아닌 '사람'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새로 쓴 작가의 말은 뉘앙스가 다르다. 정확하게는, 작품 내용에 대해 변화한 저자의 의식이나 신념에 일어난 변화를 덧붙이고 있다.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안일하게도. 이미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지고 있을 테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잔혹한 현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낙관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일어났던 일이라 믿었던 비극이 최근 다시 일어났거나, 또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으니까요.(p.361) 새로 쓴 저자의 말 주제는 '이상한 시대'라는 의문을 담고 있다. 과거 이뤘다 믿었던 시대정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르고,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가치관은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라는 저자의 지적은 묘하게도 우리 사회에 다시 일어날 일이 아닌, 적어도 저자가 그렇게 믿었던 일이 다시 일어났다는 뜻이다.



저자 임성순은 본격 문학과 미스터리 스릴러의 절묘한 접합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저자는 만화영화 같은 포복절도할 스토리와 기법, B급 영화 같은 키치적인 유머 속에 순문학의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신(新) 하이브리드 문학으로 한국 문학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독창적인 소재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우리 사회를 파헤치는 소설가로 더 알려져 있다. 모두 정확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 임성순이 쓴 말은 아마도 지난 겨울 12·3 비상계엄 선포를 지목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의료계 공백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직 의사였던 범준.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을 돕는 회사를 설립해 그들의 장기를 시한부들에게 이식해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던 그의 앞에 과거 만난 적 있던 신부(神父) 현석이 나타난다. 그들이 처음 마주쳤던 것은 15년 전 내전이 끊이지 않던 아프리카에서였다. 의술로 사람들을 구원하려 의료봉사를 하러 온 젊은 의사 범준과, 신에게 헌신하며 종교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고자 주임신부를 담당하게 된 신부 현석은 모두 거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이상적인 구원론을 펼치고자 도달한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 내면에 숨겨진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날 노동자 한 명이 현장에서 사고로 병원으로 실려 왔다. 범준이 수술을 맡았다. 범준에게 수술 명령이 떨어졌다. 환자를 본 범준은 그러나 당혹스러웠다. "가슴을 열자 환자의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철근은 심장을 아슬하슬하게 빗겨나 있었지만, 무명동맥을 찢었다. 외막뿐만 아니라 내막까지 손상된 동맥에서는 심장이 뛸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꽂힌 철근을 빼지 않고 절단해 온 응급 요원의 처치는 훌륭했다. 이 상태라면 빼는 즉시 1분 내에 출혈 과다로 사망할 터였다."(p.45)


범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찢어진 무명동맥 주변의 혈류를 차단하고, 손상된 혈관을 벗겨낸 후, 인공 혈관을 봉합하면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수술 경험이 많은 레지던트 3, 4년차라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수술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피로 얼룩져 미끈거리는 동맥을 얼마만큼 세기로 단단히 잡아야 하는가부터 레지던트 1년 차인 그에게는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시간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환자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혈압이 지나치게 떨어지고 있다. 범준은 심호흡을 하고 '겸자'를 들었다. 겸자의 끝이 가늘게 떨렸다. 시선을 마주치자 주임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처치가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그녀 역시 범준이 집도하는 첫 수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풋내기 이사에게 능숙한 간호사만큼 의지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범준이 필요한 수술 도구를 말하기도 전에 넘겨주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처음 해보는 수술치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과장이 들어와 처치를 잘못했음을 알아챈다. 범준이 어려움을 겪었던 겸자의 끝을 너무 꽉 잡아맸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장은 범준의 실수를 탓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집도했다고 말하겠다고 한다. 이날 이렇게 범준은 의료사고로 한 생명을 죽게 한다. 그러나 그 죽은 생명의 장기로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 과장은 범준의 실수를 비밀에 부치고, 세 사람의 생명을 살린 사실만 세상이 떠들썩하게 드러낸다.

철근을 뽑아낸 사내의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지 못했다. 우려했던 대로 과다 출혈과 심정지로 뇌세포에 제대로 산소가 공급되지 못한 것이다. 범준은 틈만 나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 환자를 보러 갔다. 환자의 곁은 중학생 딸이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 뺑소니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열넷의 여자아이는 범준이 찾아오면 기대가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버지가 언제 깨어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범준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차라리 침대에 누운 환자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제 문제는 환자의 뇌사 상태를 검진해 선언하는 일이다. 신경외과에서 검사를 시작했고, 잠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남은 것은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뇌사자의 처리 절차를 밟아가는 것뿐이다. 


수술 중 실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도 했지만 스태프들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과다 출혈에 대한 진실은 침묵 속에 묻힌다. 그는 그저 응급실에 너무 늦게 도착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안타까운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과장이 수술실을 나가며 말했던 자신이 집도한 것으로 하라는 한마디의 숨은 의미를 그제서야 범준은 깨닫는다. 과장은 이미 빈맥이 일어났을 때부터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뇌보다 심장이 산소 없이 오래 버틴다. 그래서 과장은 일치감치 포기한 채 심장만을 되살린 것이다. 보호자인 여자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사실의 정황을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것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뿐 뇌사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은 의사로서 잘 안다. 때문에 어린 소녀에게 보호자의 삶을 위해서라도 엄청난 병원비 대신해 장기 이식을 위해 기증을 권하기도 한다. 

과장과 함께 범준이 갔던 곳은 6인용 병실이다. 회진 시간이 아닌데도 찾아온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과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환자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장 안쪽의 창가에 누워 있는 한 부인에게로 간다. 

"오늘은 좀 어때?"

방금 전까지 장기 기증을 권하던 목소리와 너무 다른 말투에 범준이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살집이 있는 창백한 안색의 아주머니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와 창문 사이의 보호자 침대에서 두 개의 작은 사람 형상이 따라 일어난다. 아이들이다. 일곱 살과 다섯 살 남짓의 아이들은 행색이 꾀죄죄하다. 목에는 씻지 않아 검은 줄이 있고, 입은 옷은 언제 빨았는지 다섯 살짜리 옷소매는 흰 콧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과장이 환자에게 다가가 '좋은 소식'이라며 전한다.

"기증자 찾았어. 내일 검사하고, 몸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바로 수술 잡자고."


과장의 눈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드러났지만 환자 아주머니는 기쁨에 겨워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연신 굽실거릴 뿐이다.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과장의 시선과 아주머니의 비굴함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너무나 극적이다. 범준은 애써 시선을 돌린다. 어리둥절한 막내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연방 흘러내리는 콧물을 소매로 닦고 있다. 병실은 나온 과장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복도에 비치된 손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범준의 눈빛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투로 과장은 말한다. "자넨 저 아줌마를 죽일 수 있나?"

"예?"

"이제 자네가 돌아가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저 아줌마는 죽겠지."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네의 자기만족이, 그 잘난 윤리가 저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 있나?"

열린 병실 문 너머로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아이들과 얼싸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큰아이 옆에서 막내는 목을 감은 엄마의 팔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숨이 막힌 것은 범준 자신이었다. 


의술이 인술이라고? 개뿔. 의술은 기술이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발판 삼아 지금까지 발전한 거야. 알량한 도덕 나부랭이가 의학 발전에 기여한 것은 없어. 한 명을 실수로 죽이면 그렇게 배운 기술로 열 명을 살리면 돼. 그게 의학의 도리지.(p.58)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인간 본성을 진중하고 깊이 있게 파헤친다. 모순으로 이지러진 세계에서 인간은 얼마만큼 악해질 수 있을까. 성(性)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부 박현석과 속(俗)의 세계를 표상하는 의사 최범준. 두 명의 인물은 처음에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제3세계에서 마주한 참혹한 광경을 겪으며 변화를 맞이한다. 이들에게 시시각각 주어지는 문제들은 독자들 역시 자신을 반추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비합리적인 사회와 시대를 향한 묵직하고 처절한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출판사 측이 제공한 작품 소개글에 이 말이 나온다. "각자의 부끄러움을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끝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 지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범준과 현석은 무엇을 목격하고 느꼈는가. 이처럼 이들의 포부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이야기는 선과 악이 뒤섞인 모순적인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은 홀로코스트, 불법 장기 적출 및 이식, 자살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적 사안에서부터 개인의 윤리와 도덕에 기대는 사소한 문제들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와 성과 속의 혼재를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비열한 면모를 통감하게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유리창 너머의 저 신부는 어쩌면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곳의 기억을 공감하고 이해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도 15년 전 그곳에 남았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처럼 그 지옥을 어떻게든 겪어 나왔으리라. 그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기억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던 것일까? 마치 자신처럼.(p.156)


저자 : 임성순


1976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학창시절 대부분을 경기도 안양에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만화, 영화, 게임 등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처음 접한 디지털 1세대이자 미완성형 오타쿠로서 작가를 꿈꾸었으나 대학 시절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의 영향으로 연출부 생활을 하게 되어 여러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였다. 장편소설 『컨설턴트』로 제6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자본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회사 3부작」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선상 반란을 소재로 한 『극해』, 40대 기러기 가장의 은밀한 즐거움을 그린 『자기 개발의 정석』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SF 장편소설 『우로보로스』 출간하였다. 2018년 단편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포식자들』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독특한 상상력과 능숙한 스토리텔링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늘 새로운 소재와 주제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도 늘 주류가 아닌 주변부에서 투철한 B급 정신으로 세련된 아큐(阿Q)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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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들
이남 지음 / 미메시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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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봉준호 영화들』은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휩쓸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준다. 이 책이 〈기생충〉이란 영화를 평론하는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카데미상의 권위를 다루고 있진 않지만 독자 개인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이었기에 다른 어느 기억보다 독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 영화는 이제 막 100년이 넘어서고 있는데 세계가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룬 것은 절대적으로 탁월한 봉준호 감독의 재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동안 영화계 안팎에서 노력했던 많은 영화인들도 생각나게 한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수상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이 책은 분석하고 있다. 책의 저자 이남은 풍자, 유머, 순수한 오락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봉준호의 재능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모두 성공을 거둔 그의 30여 년에 걸친 경력에 먼저 존중을 표한다. 불안한 현재의 한국을 영화로 표현하는 봉준호 감독, 그리고 그를 사회학적으로 비평하는 영화학자이자 평론가 이남의 세계가 매우 조화롭다.

영화 평론가인 저자가 봉준호의 모든 영화를 파헤치고 뜯어보고 해석하여 우리 앞에 내놓은 이 책 『봉준호 영화들』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실현하는 봉준호의 영화 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채프먼 대학교 영화학과 교수이기도 한 저자가 수년간 봉준호를 추적하여 글로 풀어낸 이 책은 첫 장편 영화 〈플란다스의 개〉부터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키 17〉까지 봉준호가 자기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세밀히 분석해 밝히고 있다. "좁게는 한국 사회, 그리고 넓게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구체적 사회 현실에 뿌리내리는 봉준호의 영화들은 개인의 삶, 특히 사회 주변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개개인의 삶은 늘 더 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 안에서 그려진다. 봉준호는 사회적 약자인 서민들이 겪는 어려움뿐 아니라 그들이 직면하는 사적인 문제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곤경의 근본 원인을 이루는 사회 시스템과 공적인 문제들도 함께 드러낸다."는 게 저자 이남의 집필 취지이다.


저자가 살펴본 봉준호의 영화들을 둘러보면, 우선 〈살인의 추억〉은 연쇄 살인범을 잡지 못하는 형사들의 무능을 1980년대 군사 독재 정권이라는 더 큰 맥락 안에 위치 지어 바라보면서 당대 미결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회학적 해석을 내놓는 작품이다. 〈괴물〉은 박씨 가족이 겪는 비극의 근본 원인이 한국의 식민지 시대 이후의 상황들, 즉 미국에 관한 종속적인 관계뿐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당국에 뿌리 둔다고 평한다. 〈플란다스의 개〉와 〈마더〉에서 주인공들의 도덕적 타락은 개개인의 괴물 같은 본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약자들에게 강요된 가혹한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묘사된다. 

〈설국열차〉와 〈옥자〉에서는 봉준호의 영화 사회학이 더욱 노골적으로 정치화되어 기업의 탐욕으로 지구 온난화와 공장형 축산에 의한 동물 학대라는 심각한 문제들이 무시되어 버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세계화 현상을 고발한다. 〈기생충〉은 신자유주의하에서 더욱 심화하는 계급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경쟁의 사다리에서 추락해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신분 상승의 가망이 없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봉준호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이자 세 번째 영어 영화, 그리고 첫 본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미키 17〉은 원작 소설이 천착하는 '인간 프린팅의 윤리와 정체성' 문제를 넘어 파시즘적 독재 체제, 식민주의, 자본주의의 노동 착취와 인명 경시에 대한 사회 비판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미키 17〉은 그가 기존 SF 블록버스터 장르를 재구성하는 창의적 실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사회 정치적 변혁과 21세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이라는 맥락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함으로써 그 영화들이 어떻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커지는 불공정의 감정과 실패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같은 감정 혹은 의식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오늘날의 시대적 추세에 의해 해외 관객들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감정 혹은 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화는 그들을 발생시킨 그 문화적 체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영화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확신을 저자가 갖고 있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저자는 봉준호의 영화를 군사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한국 역사의 전환과 동시에 전개된 한국 영화 산업의 변화라는 이중적 맥락으로 바라보는 분석과 풍부한 한국 하위 텍스트의 문맥들이 그의 영화를 더욱 심도 있게 이해하고 즐기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해 "봉준호 감독과 처음 그의 작품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11년 11월 몸담고 채프먼 대학교 닷지 영화 및 미디어 예술 대학에서 두 번째 부산웨스트 아시아 영화제를 조직하고 개최했을 때였다"고 말한다. 이 두 번째 영화제의 메인 게스트이자 〈부산웨스트 아이콘상〉 수상자로 초청돼 2박3일 동안 캠퍼스에 머물면서 영화 상영과 함께 마스터 클래스 등 학생들과 다양한 만남을 통해 영화와 영화만들기에 관한 자기 생각을 나누었다고 되새겨낸다. 이 영화제에서는 봉준호의 〈괴물〉 3D버전이 개막작으로 상영됨과 동시에 봉준호 작품의 미니 회고전이 개최됐다. 2009년 작품인 〈마더〉는 첫 부산웨스트 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됐던 터라 이 해에는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과 함께 그의 한국 영화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단편 〈지리멸렬〉과 감시 카메라로 포착된 영상들로 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단편 〈인플루엔자〉가 상영됐다고 저자는 전한다.

책에 따르면 당시 봉준호 감독은 〈괴물〉과 〈마더〉가 미국에서 개봉하고 비평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이후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쌓은 세계적인 명성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떠오르는 한국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저자가 한국에서 영화에서 영화 기자를 하다 뒤늦게 영화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인 2000년에 데뷔했으므로, 그의 영화들을 DVD로, 혹은 영화제나 시사회 등을 통해 미국에서 챙겨 보았다. 또 대학원 졸업 후 채프먼 대학교에서 아시아 영화와 한국 영화 수업을 개설하면서 한국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그리고 〈괴물〉 등을 소개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밝힌 이 같은 사실은 저자 이남이 오래 전부터 봉준호 감독을 주목해 왔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어 저자는 "내가 봉준호 영화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한국의 1980년대를 다룬 방식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군사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운동이 가장 격렬히 이루어지던 연대였고, 마침내 1987년 군사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쟁취한 역사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저자는 한국 영화에서 1980년대 만들어진 영화들(특히 군사 독재 체제의 혹독한 검열하에 만들어졌던 이장호 감독의 1980년대 초 영화들과 1980년대 후반 등장한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들)과 함께 현대 한국 영화에서 1980년대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는 이야기다. 

2000년대에 부상한 뉴 코리안 시네마에서 1980년대가 어떻게 기억되고 묘사되느냐는 관점에서 볼 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고 지적한다.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건의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이 잇따라 일어난 서울 근교의 한 시골 마을은 물론 한국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다룬 범죄/연쇄 살인범 영화지만 기존의 영화들처럼 살인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시대적인 맥락을 짚어냈다는 점이 독특한 영화였다고 말한다. 형사들이 범인을 끝내 잡지 못했던 주된 이유로 시민 보호보다는 정권 유지에 공권력을 동원한 1980년대 군사 독재 체제에 눈을 돌린 점, 즉 상업적인 장르 영화 안에 1980년대에 대한 감독의 사회적 해설/논평을 담고 있다는 점이 1980년대를 다룬 기존 영화들과는 확연히 달랐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이와 함께 〈괴물〉은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학생 운동가 출신인 박남일 캐릭터를 통해 1980년대 학생 운동의 유산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뿐 아니라 1980년대 민중 운동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많아 1980년대가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되는 영화였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 책은 모두 7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새로운 문화 세대의 등장」 2장 「영화적 '변태': 전조(轉調), 시각적 개그, 낯설게하기의 기법」 3장 「사회 부조리와 실패의 내러티브: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의 글로벌 장르와 지역 정치」 4장 「내면의 괴물들: 〈플란다스의 개〉와 〈마더〉에서의 도덕적 모호성과 아노미 215」 5장 「지역을 넘어서: 〈설국열차〉와 〈옥자〉에 나타나는 글로벌 정치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6장 「〈기생충〉의 파국적 상상력」 7장 「〈미키 17〉: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SF 장르의 봉준호식 변조」 등이다.


1장에서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다양하고 혼종적인 문화적 영향들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또 장편 영화로 데뷔하기 전 만들었던 단편들과 시나리오 작가로서 작업한 작품들을 분석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배경과 함께 봉준호와 그의 영화들을 '뉴 코리안 시네마'의 맥락 속에 배치한다. 2장은 봉준호 영화의 형식적 기법과 시각적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봉준호의 관심이 어떻게 시각적인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지 자세히 살핀다. 구체적으로, 봉준호의 장르 꺾기와 혼합, 그리고 서로 다른 톤을 뒤섞는 전조(轉調)와 같은 영화 기법, 한국화의 진경산수에 비견할 만한 할리우드 장르의 한국적인 변용과 리얼리즘 미학, 그리고 일상적 공간을 낯설게하기 기법에 대해 논한다. 봉준호는 〈플란다스의 개〉의 평범한 아파트 지하실, 〈괴물〉 속의 한강 하수도 등 종종 사람들이 간과하는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는 이러한 일상적인 공간들을 공포나 재난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3장에서 저자는 범죄 영화(〈살인의 추억〉)와 괴물 영화(〈괴물〉)의 내러티브에서 봉준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의 지역 정치를 중심으로 할리우드식 장르를 전복하고 재발명하는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봉준호는 '실패의 내러티브'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이 실패의 이야기들이야말로 특별히 한국적인 내러티브 형태를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특히 1980년대를 현대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전환기로 보고 있다. 4장에서는 〈플란다스의 개〉와 〈마더〉에서의 도덕적 모호성과 아노미를 다룬다. '압축된 근대성'이라는 전후 한국의 집단적 체험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들이 이 두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를 탐구한다. 두 영화는 1990년대 후반 평범한 한국인들이 한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채택으로 인해 야기된 도덕적 딜레마를 끌어안고 마주하면서 벌여야 했던 감정적인 혼란과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 한국이 겪은 주요한 정치, 산업, 경제적인 변화의 결과가 초래한 도덕적 혼란과 아노미가 개개인의 삶 속에서 심화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저자는 5장에서 〈설국열차〉와 〈옥자〉에 나타나는 글로벌 정치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다룬다. 저자는 두 영화를 세계 영화의 맥락 속에 두고 그 급진적인 정치성을 서술한다. 먼저 〈설국열차〉의 열차와 〈옥자〉의 미란도 그룹이 어떻게 현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축소판인가를 살펴보고, 이어 영화를 둘러싼 초국적 공감대 형성이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장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두 영화는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부정과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사회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새롭게 상상하고 제안한 초국적인 '정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어 6장에서 저자는 〈기생충〉을 봉준호의 이전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고 봉준호 영화의 특징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한편 이전 영화들과 대비되는 새로운 점들을 부각한다. 〈기생충〉은 그의 이전 작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환기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흔히 개별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온 감정의 사회학적인 측면을 천착하는 새로운 면모로 전작들에서 벗어나고 있다. 영화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모멸감이 형성되는지 보여 주고, 이 감정들의 폭발이 어떻게,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총체적 파국으로 이어지는지를 드러낸다.

또 7장은 가장 최근 개봉한 영화 〈미키 17〉이 대상이다. 저자는 이 영화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SF 장르의 봉준호식 변조'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흔히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워 서사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과 달리, 주인공 미키 17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객을 몰입시킨 후,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특수 효과 스펙터클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구성을 택함으로써 장르적 쾌감과 이야기의 완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연출 방식을 보여 준다. 〈미키 17〉은 봉준호의 영화적 확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향후 그의 영화적 실천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키 17〉은 한국적 로컬리티에서 구축해 온 장르적 감각과 비판적 시선을 세계적 블록버스터라는 산업적 조건 안에서 재구성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조율해 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383)


저자 : 이남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언론 대학원 영상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로 활동하다 2000년 유학을 떠나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영화 대학에서 아녜스 바르다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주 채프먼 대학교 영화 및 미디어 대학에서 영화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영화와 동아시아 영화, 여성 영화 등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 2018년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가 기획한 [비주얼 히스토리]의 하나로 이창동 감독에 관한 연구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2023년 권위 있는 학술 참고 자료 시리즈인 웹 사이트 Oxford Bibliographies의 [봉준호] 항목을 맡아 주요 연구 문헌을 선별하고 해설을 작성했다. 2024년에는 비디오 에세이 「Aging, Empathy, and Cinematic Metamorphosis: Through the Lens of Agnes Varda」를 학술 비디오 에세이 저널 『[in]Transition』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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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지정학 전쟁사 지식 도감 지도로 읽는다
조지무쇼 지음, 안정미 옮김 / 이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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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인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말하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그만큼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변화·발전을 가져 오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일 것으로 독자는 이해한다. 사실 이 말은 서양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서양, 특히 유럽은 오랜 역사와 함께 엄청난 전쟁을 끝없이 치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럽은 유사 이래 고대부터 현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멈춘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지금도 역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시대에 따라 크고 작은 전쟁이 모두 전쟁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볼 때 이는 조금은 과장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지만, 사실은 일부 서양 사학자들의 말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인류의 삶은 전쟁과 함께한다고 말해도 틀린 지적은 아니다. 서양 사학자들이 보는 견해로는 유럽 지역의 경우 1885~1914년 30년 정도가 유럽에 전쟁이 없던 평화롭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서양사에서 고대 도시국가로부터 현대의 가장 부유한 대륙이 되기까지 전쟁은 유럽인들과 함께했다는 이야기다.

왜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만 했을까? 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략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능은 늘 남과 비교해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자존심과 욕망의 결과가 전쟁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부터 전쟁의 원인은 의식주에 크게 좌우됐다. 영토 싸움이고 국가간 전쟁이다. 영토 싸움이란 결국 전쟁으로 귀결된다. 근현대로 들어올 때부터는 국가간 협력과 상호 무역에 의해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제도적 장치도 만들었지만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전쟁 휴지기를 틈타 오히려 더 큰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이를 증명한다.

이 책 『지정학 전쟁사 지식 도감』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전쟁사를 지정학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라는 점에서 일본 학자가 썼다는 이유로 배척할 수는 없다. 전쟁을 통해 본 세계 역사의 흐름을 짚어내는 데에는 오히려 적절할 수도 있다. 단 전쟁을 조망하는 선에서 책은 집필돼야만 하고,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전쟁에 관한 논점은 극우단체나 극우정치인의 논리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 일본의 책임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다행히 이 책은 저자 조지무쇼((ぞうじむし) 자신의의 저서 『한눈에 꿰뚫는 전쟁사 도감』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책을 재출간했다는 점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과 전쟁에 대한 관점이 세계사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독자의 마음이다.


재출간된 이 책은 초판 발간 때의 책 속 도판을 전면적으로 보완하고, 지도와 본문의 내용도 결정적인 전투의 전술과 전략을 보충해 전쟁사를 다양한 각도로 해설하고 있다는 게 공감대를 형성할 있다고 독자는 판단한다. 저자도 〈들어가는 말〉을 통해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전쟁이 인간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발전해 왔다. 또한 세계사이든 국가 단위의 역사이든 역사는 크고 작은 전쟁의 기록물일 뿐이다. 인간의 갈등은 정치가 해결하고, 정치의 갈등은 전쟁이 해결한다. 집단과 집단, 그리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에 이르게 된 경위는 실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전쟁에는 몇 가지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세계의 전쟁의 패턴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①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 가치관의 대립

② 기독교와 이슬람교 - 종교의 대립

③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 경제의 대립

④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 이데올로기의 대립

⑤ 동서 냉전과 민족 분쟁 - 민족의 대립


이 책에서는 인류사의 지정학적 충돌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전쟁을 다루고 있다. 대륙 국가끼리의 영토 분쟁, 대륙 국가와 해양 국가의 대립,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분쟁, 제국주의 전쟁, 이데올로기 갈등, 각 지역과 민족 별 분쟁 등 시대의 흐름을 상징하는 전쟁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 전투를 하나씩 살펴보는 과정에서 시대나 지역이 전혀 다른 전쟁인데도 원인, 과정, 결과에서 의외의 공통점이나 역사적 진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이 책에서는 표제어에서 나타나듯이 인류사의 지정학적 충돌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전쟁을 다루고 있다. 영토 분쟁, 대륙 국가-해양 국가의 대립, 기독교-이슬람교의 종교분쟁, 제국주의 전쟁, 이데올로기 갈등 등이며 각 지역과 민족 별 분쟁 등 시대의 흐름을 상징하는 전쟁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별 전투를 하나씩 살펴보는 과정에서 시대나 지역이 전혀 다른 전쟁인데도 원인, 과정, 결과에서 의외의 공통점이나 역사적 진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부모와 형제 간에도 서로 칼과 총을 겨누는 참혹한 곳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전쟁터로 얼룩진 지 76년이 지났고 이 땅에 전쟁이 멈춘 지 68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지구에는 전쟁이 멈춘 적이 없지만, 이 땅에서는 인간의 삶을 가장 처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전쟁이 없는 시기였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을 뿐 우리의 삶은 평화와 행복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칼, 총으로 상대를 겨누는 전쟁과 다름없는 삶의 전쟁이 계속돼 왔다. 이념의 대립, 권력 다툼, 독재와의 전면전 등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이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저자가 이에 증거로 내세우는 거의 모두가 반박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사회의 혼란과 법과 양심이 결핍된 세상은 사회적 약자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고아가 된 아이들, 장애를 가진 사람을 청소하듯이 모아 강제로 집단 수용소에 가두고 노동 착취와 감옥 생활을 방불케 하는 삶을 살게 했으며 여성은 납치, 사기, 협박, 감금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한 해 몇 만 명씩 실종되어도 생사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과거의 전쟁은 물론,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은 지정학적 갈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충돌이나 경제전쟁, 민족분쟁 등도 이런 전쟁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빈발하는 각종 테러도 앞서 열거한 갈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도시 국가 로마와 해양 강국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고, 섬나라 영국과 대륙 국가 스페인이 맞붙은 아르마다 해전은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이 세계 최강국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전투였다.


또 중동의 시나이반도와 지중해 연안의 발칸반도도 고대로부터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화약고로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부터 십자군 원정과 세계대전 등 대규모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늘 전쟁의 불길에 노출되었던 이유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유도 있다. 즉 다른 문명이 만나는 교차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로 변하기도 했다. 이 책은 세상을 바꾼 28가지 중요한 전쟁을 입체 그래픽 지도와 풍부한 컬러 도판을 활용해 쉽고 흥미롭게 설명한다. 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배경, 역사적 인물, 전쟁의 전술과 전략 등 당시 전투 상황을 그래픽 지도 위에다 생생하게 재현했다. 이런 그래픽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 전쟁사는 물론 복잡한 세계사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분류한 대로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2장 〈기독교와 이슬람교〉 3장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4장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5장 〈동서 냉전과 민족 분쟁〉 등이다. 책에 기술한 순서대로 28가지 전쟁을 지정학의 구도로 살펴보면 세계사의 중요한 포인트를 파악할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한다면 현재의 국제정세는 물론이고, 앞으로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전쟁이 인류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할 수 있는 윤곽이 갖춰진 셈이다. 다음으로는 이를 연대순으로 머릿속에 새기면서 언제 일어난 전쟁인지, 왜 일어났는지, 결과가 세계 역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잠깐 잠깐 대입해 생각하면서 읽어나가면 세계 역사에 대한 명확한 흐름은 물론 세부적인 분석의 논거를 마련한 셈이다. 

책의 순서대로 1장에서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의 충돌을 살펴본다.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일어난 전쟁의 배경은 지정학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기원전 2~3세기의 100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은 내륙으로부터 팽창해 나간 대륙 국가 로마와 지중해의 해양 교역로를 장악해 나간 해양 국가 카르타고의 전쟁이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해양 국가 간의 충돌이었다. 이처럼 특정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전쟁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쟁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대륙국과 해양국의 전쟁은 해양국은 섬나라 및 연안국으로서 해양 교역을 산업의 중심으로 삼는 국가를 말한다. 사람이 살기 위한 영토의 획득보다는 항구 등 교역 거점의 확보를 가장 중요시 한다. 영국과 일본, 네덜란드, 미국 등이 대표적 나라이다. 앞의 세 나라는 해양 국가로서 묶어 판단할 수 있지만 미국을 해양 국가로 분류한다는 것은 지리적 잇점을 통한 교역 국가를 부의 원천으로 삼은 것으로 독자에는 읽힌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독자는 선뜻 공감하기는 어렵다. 미국은 내륙국도 하닌 하나의 거대한 대륙에 위치한 대륙국가이다. 또 서양인들이 신대륙이라고 발견해 수많은 사람이 이주한 곳으로 이주민의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이주민 대부분이 서양인들이고, 개척한 사람들이 해외 식민지 개척의 일환으로 아루어진 나라다. 미국은 대부분이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고 1750년대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국가로 발돋움한 나라다. 이를 교역을 위한 섬나라와 함께 해양 국가로 분류하기에는 독자로서는 선뜻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쓴 내용에 대해 독자로서 이를 인정하고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저자도 "대륙 국가는 대륙의 중앙부에 주축을 두고, 내륙 자원의 생산과 이동을 산업의 중심으로 삼는 국가"를 정의하고 있다. 육상 운송과 강을 이용한 수상 운송을 중시하며, 군사적인 전략에서는 영토 획득을 가장 우선시 한다.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대표적인 나라다. 저자의 관점이 미국에 관해서 독자와 조금 다른 점은 분명하다. 미국은 18세기 후반 독립한 신생국이다. 뿌리가 유럽인들이라고 해양 국가로 분류한 것은 다소 의외다. 자칫 이 분류가 시선이 다르다면 20세기 들어 가장 큰 전쟁, 1-2차 세계대전을 누가 일으켰는지 살펴보면 다른 분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전쟁의 원인을 큰 묶음으로 분류하다 실수가 있으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도 있다. 전쟁사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원인도 굉장히 중요하다. 

1장에서는 「고대~중세의 전쟁사」(개괄) 「포에니 전쟁 BC 264∼146년」, 「가우가멜라 전투 BC 331년」, 「진시황의 중국 통일 BC 221~210년」, 「투르-푸아티에 전투 732년」, 「십자군 전쟁 1096~1270년」, 「레그니차 전투 1241년」 등 6개의 주요 전쟁이 기술된다. 비전공 독자로서 잘 모르는 「투르-푸아티에 전투 732년」가 눈에 띈다. 이 전쟁은 서유럽을 침공한 이슬람 세력을 기독교의 프랑크 왕국이 방어했다는 전투를 말한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현재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의 국가였다.


8세기에 현재의 프랑스 서부를 무대로 일어났던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기독교 교권과 이슬람 교권이 역사상 처음 대규모로 격돌했던 전쟁이다. 책에 따르면 원래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서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소국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현재의 프랑스에서 독일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던 프랑크 왕국이다. 이에 비해 중동에서는 7세기에 이슬람교가 발흥한 이후로 서아시아 전역부터 북아프리카까지 교단의 세력이 확산하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 문화권은 여러 분야에서 서유럽 국가들에 앞서 있었다. 특히, 본래 유목민이 중심이었던 만큼 기병의 운용이나 군마의 품종도 서유럽에 비해 월등했다. 이슬람 세력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데 이어, 71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격전 끝에 이슬람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점점 프랑크 왕국령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이처럼 확대되어 가는 이슬람 세력 앞에 위기를 느낀 서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이 방어전의 하나로 치른 결전이 바로 732년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였다. 


저자 : 조지무쇼(Zojimusho,ぞうじむし, 造事務所)


‘쉽게, 재미있게, 정확하게!’라는 3대 슬로건을 내걸고 1985년 창립한 일본의 기획편집집단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획, 집필, 편집에 참여해 복잡하고 어려운 지식과 정보를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 종교, 문화 등에 조예가 깊고, 경제를 비롯한 생활실용서까지 여러 분야에서 단행본을 중심으로 다양한 출판활동을 하고 있다. 1년에 평균 40여 종의 단행본을 펴내고, 다수의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독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주요 도서로는 『세계의 신들을 알 수 있는 책』, 『천사와 악마를 알 수 있는 책』, 『세계를 알 수 있는 지도장』, 『100글자로 알 수 있는 심리학』,『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30가지 발명품으로 읽는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전쟁사도감』,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황제의 세계사』 등 다수가 있다.


역자 : 안정미


부산에서 출생해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잡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현재프랑스어와 일본어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J'aime lire’시리즈 아동용 동화 5권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십자군 전쟁』, 『영원한 일본』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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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스파이 전쟁 - 간첩, 공작원, 인간 병기로 불린 첩보원들의 세계
고대훈.김민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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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졌다"고 일반 국민들은 두려워했다. 3공화국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생긴 조직이다. 정보부서는 원래 설치 목적이 해외의 첩보나 정보 활동을 하는 요원들로 이루어진 특수조직이다. 이들은 '공작원' '첩보원' '간첩' '스파이' '블랙요원' 등으로 불리며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될 때까지 해외 공작보다 국내 문제 개입이 훨씬 많았다. 또 가끔씩 들리는 이들의 활동은 학생운동이나 노동가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무튼 군사정부 수십 년간 정보부의 위세는 막강했다. 정보부는 북한과 휴전 중이고 여전히 무력 대치 상태라는 점을 들어 각종 국내 문제에 개입했다. 특히 학생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련자나 관련 의심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정보 당국에게는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반정부 세력'이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조합도 불허했고 민주화 운동도 학생 운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노동조합은 70년대 말인가, 80년대 초에 설립이 인가되었다. 그러니 조직적인 노동 운동은 할 수 없었다. 정부가 노동조합 설립을 인허하면서도 노동운동가들에게는 결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군사 정권이 문민 정부에 이전된 후로는 더 이상의 노동조합 감시는 줄었고,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 시위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2000년 들어서기 직전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국내 문제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도록 법률도 개정했다. 아직 북한과의 무력 대치 중이기에 간첩 혐의자 색출에는 국정원 내의 국내 조직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보 당국의 국내 문제 개입이 없어지면서 첩보원이나 스파이 등의 단어는 국민 의식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국민들의 일상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던 공작원, 첩보원 등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부터다. 당시 윤석열 정부가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와 행위로 국가 운영이 막다른 상황에 처했다는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일사분란한 의원들과 시민들의 발빠른 대처로 비상계엄 해제 결의를 마치고 정부는 새벽이 다 될 무렵 비상계엄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시민이나 국민들이 다치지 않는 상황에서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나 윤석열 대통령은 위헌·내란행위로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이 제출됐고, 검찰은 내란죄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 중이다. 형사 재판은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피소추인의 파면을 인용함으로써 그는 대통령 자리에 물러나 이제 자택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이 비상계엄 선포 때 사전 모의 과정에서 '외환' 혐의가 있다는 일부 증인들이 위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가림막을 설치한 채 증언에 임하는 일이 벌어짐으로써 '블랙요원'이란 말이 다시 되새겨졌다. 이후 헌법재판소 결정 여부와 검찰 기소에 더욱 많은 눈과 귀가 쏠림으로써 조금은 잊혀져 가는 듯하다. 이는 더 이상의 증거나 증언 확보가 어려워 기소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국정원의 존재가 새삼 드러나고 첩보원이라는 말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바람에 군사 정권 시절의 공포감을 다시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회 청문회장에서는 '간첩'이란 단어가 자꾸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외환 혐의도 입증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내란 혐의만으로도 충분히 탄핵하고 법의 처벌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더 이상의 수사 의뢰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 간첩이 한국의 선거에 관여했다”는 주장부터 “사상 최악의 영남권 산불은 중국 또는 간첩 소행”이라는 음모론까지 실체 없는 간첩 담론이 판쳤다. 반면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았지만 현재 재판중인 간첩 혐의 사건들이 있다. 제주 ‘ㅎㄱㅎ’(‘한길회’의 초성으로 추정), 창원 ‘자주통일민중전위’, 청주 ‘자주통일충북동지회’ 등이다. 가짜와 진짜 간첩 혐의를 구분해 실체를 밝히는 노력이 중요해진 이유다. 이 책 『남북 스파이 전쟁』은 그런 노력에 여러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남과 북에서 양성한 두 스파이를 추적해, 분단이 지속되는 한 실존적 문제일 수밖에 없는 남북 간첩전쟁의 진정한 속살을 꽤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은 남파간첩 김동식(63)과 대북공작관 정구왕(66) 두 사람이다. 이들은 각각 남한의 체제 전복을 꾀하고, 북한의 붕괴를 도모하며 하루하루 생사의 줄타기를 탔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른바 블랙요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이름이 당연히 없는 채 일종의 암호명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양측 모두에게 극비의 사항일 것이다.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되면 법정 최고형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도(投刀, 칼 던지기)는 10m 거리에 있는 직경 40㎝ 목표물에 단도를 꽂히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단도뿐 아니라 젓가락 · 식칼 · 도끼도 투도의 도구로 활용됐다. 임무 수행 중 식당 같은 곳에서 위험한 순간에 직면했을 때 숟가락 · 젓가락 · 포크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던져 위기를 탈출하는 연습이었다. 학생 대부분은 명사수로 길러졌다. 소련제 TT 권총, AK 자동소총, 소련제 대전차 로켓 R--- p.G-7, 체코제 기관권총을 가지고 각종 자세를 취하며 실탄사격을 수시로 했다. 철탑 꼭대기에 올라 이동하는 목표물을 조준사격하는 저격 훈련도 있었다. 김동식의 경험담이다.(p.90)


이 책은 두 명의 사건 전문 기자들이 직접 취재한 생생한 '간첩 추적의 기록'이라고 출판사 측의 소개글에 나온다. 첩보원들의 생활은 사실 사생활은 거의 없을 것이라 보인다. 일반인들과 같은 사생활을 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고대훈과 김민상 두 저자는 첩보원들의 파란만장한 발자취와 절절한 육성을 담아 이 책을 펴냈다. 군대 갔다 온 이외에는 공무원 생활은 해본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우리 공작원으로 북한에 갔다 온 사람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지만 기자가 직접 취재해 전해준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책과 영상을 통해서 알게 된 게 전부이다. 영화나 책(소설)으로 것이기에 어디까지 진짜인지, 어디서부터 상상력인지 알 수 없어 오히려 답답할 정도이다. 이 책은 독자의 궁금증과 답답함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 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두 저자는 각각 37년, 17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하며 대형 사건을 취재해 온 분들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이들 저자는 간첩 잡는 수사관 등 50여 명을 만나 간첩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발굴한 뒤 두 스파이의 인생 역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요즘도 남북이 스파이 전쟁을 하느냐”고 묻는다면」이란 제목의 〈들어가는 말〉을 통해 어렵고 지난한 노력으로 비로소 책이 나와 다행이라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국군 정보사령부 중령 출신의 정구왕은 1998년 중국 단둥에서 블랙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중 자택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납치당해 평양까지 끌려갔다 살아난 기적의 주인공이다. 220일 동안 평양에 감금됐다가 이중스파이가 되겠다고 속여 탈출에 성공한 뒤 가까스로 생환했다."(p.7~8) 

저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총살해달라"던 그의 비참한 절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처절함, 국내에서 '사망'으로 처리된 기막힌 사연을 들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함경북도 회령, 중국 옌지·베이징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수천km의 대장정을 설명하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탈출기는 이름 이니셜을 딴 'CKW 사건'으로 전설처럼 입소문으로만 전해오다 처음으로 공개된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어 이 책은 단순한 첩보 스릴러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김동식·정구왕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신념을 좇은 게 아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부름을 받아 스파이가 되고, 남과 북의 조국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들의 고백과 궤적 하나하나는 우리가 모르던 남북 간 치열한 공작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 한 곳이 아프게 저며 왔음을 고백한다. 저자가 이번 취재를 하며 느낀 감정은 직업으로서의 스파이라는 가면을 걷어내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나약한 인간 갈대였다는 점이다. 각자가 '공화국의 배신자' '버림받은 공작원'으로 추락하는 불행에 빠졌지만 홀로 이겨내야만 했다. 남북 분단이 낳은 기구한 운명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인터뷰 대상자들과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듯하다. 저자는 한 가지 전하고 싶은 말은 "스파이·공작원·간첩을 이념적 낡은 유물로 치부하는 사회적 거부감이 일부 있다. 하지만 스파이 전쟁에는 휴전도 종전도 없다. 우방이든 적이든 스파이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면 망상이라고 경계한다. 

이 책은 2부로 나뉘어 있다. 김동식과 정구왕이 각각 한 부씩을 차지한다. 각 부에는 각각 9~10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진다. 1부 〈인간 병기 남파간첩 김동식〉, 2부 〈북한에 납치된 대북공작관 정구왕〉이다. 1부엔 「간첩전쟁」「74세 할머니 간첩 이선실」「밤 12시 지령 내린 평양방송」「브래지어 싸들고 잠수정 탄 할머니 간첩」「북한의 ‘혁명 전사’로 길러지다」「서울 사람이 된 평양 간첩」「남한 누빈 공작조 10팀」「포섭 1순위는 SKY 출신」「대선 2년 전 “고은을 포섭하라”」「경찰관 2명을 쏜 남파간첩」 등 10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에는 「“북한이 26년 전 날 납치했다”」「목숨의 대가로 제안한 ‘이중스파이’」「위조여권과 평양 탈출극」「김동식·정구왕·수미 테리」「“사우나서 보자”던 협조자」「내게 눈가리개 씌운 조국」「스파이 본능에 만난 리계향」「“1998년 3월 13일, 나를 죽였다”」「정구왕이 26년 비밀 푼 이유」 등 9개장이다. 

책에 따름녀 남파간첩 김동식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10년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인간병기다. 1990년대 서울에 잠입해 지하당을 구축하고, 여성 거물 간첩 이선실을 북한으로 복귀시키는 공적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두 번째 남파 때 운동권 인사 포섭을 시도하다 체포돼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그의 이야기는 남북 간첩 활동의 긴박함과 비장미를 보여준다. 대북공작관 정구왕은 정보사령부 중령 출신으로, 1998년 중국 단둥에서 활동 중 북한에 납치돼 평양에 220일간 감금됐다. 이중 스파이를 자처하며 탈출에 성공한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귀환했다. ‘CKW 사건’으로 알려진 그의 탈출기를 담은 책은 본 도서가 최초이다.


이 책은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남북 스파이 전쟁의 이면을 조명한다. 김동식의 포섭 활동과 정구왕의 탈출기는 첩보전의 긴장감과 인간적 갈등을 동시에 담았다. 할머니 간첩 실화의 주인공인 간첩 이선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분단 현실 속 생사의 줄타기를 한 그들의 발자취는 단순한 무용담이 아닌, 우리 시대에 던지는 교훈이다. 사건 전문 기자들이 발굴한 이 기록은 독자를 특별한 첩보의 세계로 초대한다. 중앙일보 더중앙플러스에 연재된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를 바탕으로 엮은 이 책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스파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며, 분단 현실이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뒤바꿨는지 성찰한다. 저자들은 “스파이 전쟁은 휴전도 종전도 없는 실존적 문제”라며, AI 시대에도 변치 않는 첩보전의 본질을 강조한다. 두 스파이의 격정적 인생과 남북 대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며, 독자에게 진실에 다가가는 통찰을 선사하는 유일무이한 책이다.

김동식은 28세에 북한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1990년대 서울에 잠입해 지하당을 구축하고 여성 거물 고정간첩 이선실을 북한으로 복귀시킨 공적을 인정받았다. 김일성은 “지난 40~50년보다 더 큰일을 했다”고 치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35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국에서 간첩 잡는 일을 돕는 전문가로 일한다. 두 번째 남파 때인 1995년 이인영·함운경·우상호 등 유명 운동권 인사와 고은 시인을 포섭하려다 실패한 후, 총격전 끝에 붙잡혀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정구왕은 정보사령부 중령 출신이다. 1998년 중국 단둥에서 블랙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중 북한에 납치돼 평양에 220일간 감금됐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이중스파이를 자처하며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의 이름 이니셜을 따 ‘CKW 사건’으로 알려진 그의 탈출기는 정보 세계의 치부가 담겨 이제껏 금기로 통했으나 이 책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 책의 백미는 스파이라는 가면 뒤에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김동식이 전하는 ‘맨땅에 헤딩’식 포섭 방식은 의외의 허술함과 동시에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유효할 첩보전의 본질을 보여줘 흥미롭다. 정구왕이 귀환 이후 한국에서 받은 대우는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블랙 요원으로 남지 못한 미안함을 동료 공작관들에게 전한다.할머니 간첩 스토리, 북한이 남파간첩들에게 여성을 대할 때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처럼 하라고 교육하는 이유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이들의 증언은 우리가 모르던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최근 정국으로 간첩에 관심이 많아진 이들이나, “요즘 간첩이 어딨냐”고 말하던 이들 모두에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재미를 선사할 책이다.


이중스파이. 국군 정보사 소속 대북공작관 정구왕 중령은 운명의 기로에 섰다. 1998년 3월 13일 중국 단둥에서 신분을 숨긴 채 흑색(비밀)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다 북한에 납치된 정구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북한을 살아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지만 24시간 철저히 감시당하는 처지에서 암담했다. 

조국과 가족을 등진 반역자가 되어 북한에 눌러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중스파이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짜 변절을 제안하고, 북한이 이를 덥석 물면 가능한 절박한 도박이었다. 역용(逆用)공작. 적의 스파이를 포섭해 우리 편을 돕는 이중스파이로 만드는 활동이다. 적의 기밀을 빼내거나 역(逆)정보를 흘려 혼란시키는 데 유용하다. 북한은 정구왕을 역용공작에 활용하려는 속셈이 있는 듯했다.(p.181~182)


공작에는 휴민트(HUMINT·인간정보), 테킨트(TECHINT·기술정보), 오신트(OSINT·공개정보)라는 첩보 수집 수단이 동원된다. 휴민트는 공작원이나 협조자 등에게서 채취한다. 테킨트는 도·감청, 사진, 레이더, 해킹 등 영상이나 신호를 활용한다. 오신트는 언론·자료·인터넷 등 대중에게 공개된 정보다.(p.223)


저자 : 고대훈


1988년부터 중앙일보에서 사회부를 시작으로 파리특파원 · 사회부장 · 수석논설위원 · 기획 취재국장을 지낸 기자다. ‘한국기자상’을 수상하는 등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든 대형 사건을 다수 취재했다.


저자 : 김민상


2008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경제부, 국제부, 사회부를 거쳐 기획취재국에서 일하고 있다. 통일부를 취재하면서 남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현재 남북 스파이에 대해 집중 취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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