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 안전가옥 앤솔로지 10
최현수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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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일상에서 페르소나(persona)란 단어를 자주 쓴다. 원래 ‘인격’ ‘위격(位格)’ 등의 뜻으로 쓰이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본디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점차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인 인간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두산백과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점점 쓰임새가 확대돼 철학용어로는 이성적인 본성(本性)을 가진 개별적 존재자를 가리키며, 인간·천사·신 등이 페르소나로 불린다. 즉,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자유로이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주체를 말한다. 또 신학용어로는, 의지와 이성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실체를 가리키며, 삼위일체의 신 곧, 제1 페르소나인 성부(聖父), 제2 페르소나인 성자, 제3 페르소나인 성령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의학, 심리학, 마케팅에서도 이 말을 차용해 쓴다고 하니 우리 일상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이중생활자가 페르소나를 쓴 우리 중의 한 명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어서 든 독자의 생각이다.

이 책 『이중생활자』는 비밀스럽고, 종잡을 수 없고, 아슬아슬해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중심인 엔솔로지 소설집이다.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과 종합 콘텐츠 플랫폼 〈왓챠〉가 함께 진행한 스토리 공모전에서 찾고자 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모두 2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종 당선작 속의 주인공들은, 뜻밖의 정체에 흥미를 품은 독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는 각양각색의 활약상을 이 책에서 보여 준다.

스파이라는 전형적인 이중생활자가 등장하는 밀리터리 드라마 「열일곱, 여름, 전쟁」이 소설집의 문을 연다. 이 작품은 명국(明國)의 군인인 '영'은 비밀리에 암국(暗國)의 특수 용병 훈련소로 파견된다. 암국 전력의 핵심인 ‘데이터 디스펜서’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기 위해서다. 영은 자신의 몸속에 도시 하나를 없애 버릴 만큼 강력한 생체 폭탄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암국의 동갑내기들과 함께 군사 훈련을 받는다.

 


 

훈련소 규칙에 의해 암국의 소년 이비와 한 팀이 된 영은 그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서서히 마음을 열어 가지만, 영에게 예정된 미래는 머잖아 이비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 최연수가 썼다. 비정한 딜레마 앞에 선 17세 소년들의 마음결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며, 히어로이자 공무원인 교사와 히어로를 동경하는 아이의 파트너십이 돋보이는 판타지 「드림센스」는 꿈꾸는 모두를 밝은 에너지로 응원한다. 초등학교 6학년생 '설이'의 귀 뒤에는 더듬이가 있다. 더듬이가 생긴 뒤로 설이는 다른 사람의 꿈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설이가 갖게 된 능력을 알아차린 또 다른 감각자, 설이의 담임 화식조는 감각자들이 꿈을 먹는 자들인 ‘두억시니’에 맞서 오랜 세월 동안 싸워 왔음을 알려 준다. 두억시니는 밤에 꾸는 꿈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 기억에 감정을 담는 능력까지 앗아 간다. 게다가 자신을 막으려는 감각자를 공격해 죽이기도 한다. 화식조가 위험하다며 말리는데도, 자신이 마냥 평범하다고 생각해 온 설이는 모처럼 얻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의 꿈을 지키려 한다. 작가 나혜림의 작품이다.

비밀스러운 공간의 노(老)주인이 이끌어 가는 미스터리 「부귀수산」은 전직 해녀 춘단은 양식장 겸 횟집 '부귀수산'을 운영하는데, 늦은 밤에는 특별한 손님을 받는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야만 하는 그들이 숨기려는 물건을 건네면 춘단은 해녀다운 방식으로 물건을 감춘다. 어느 날 부귀수산을 찾아온 재연은 춘단에게 피가 묻은 음악 콩쿠르 트로피를 건네며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일주일만 숨겨 달라고 말한다. 재연의 모습에 오래전에 집을 떠난 딸을 떠올린 춘단은 트로피를 보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춘단의 마음은 바로 이튿날부터 흔들리고 만다. 경찰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작가 김해일이 썼다.

 

 

「부처핸접」은 엄마와 딸, 저지른 자와 숨기는 자, 죄와 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랩 하는 스님의 고군분투를 담은 오컬트 코미디다. 이 소설은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가치들을 경쾌하게 되짚는다. 설악산 근처의 작은 절인 학선사에 기거하고 있는 여승 지거(知去)는 랩 연습 중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주지 스님이 사채업자에게 빌린 5억 원을 강원랜드에서 탕진했기에 랩 경연 프로그램 〈샤워 미 더 머니〉의 우승 상금 5억 원을 노리게 된 것이다.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템플스테이를 하러 학선사를 찾았던 무량이지만, 그는 가발과 비니 차림에 가명을 쓴 지거를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학선사의 기운이 좋다고 믿어 팀 회의를 열겠다며 거듭 찾아오기까지 한다. 정체를 숨기고 무량 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지거는 ‘악귀 때문에 절의 결계가 약해진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주지 스님의 치매 증세까지 감당해야 하는 신세다. 작가 전효원이 썼다.

마지막 작품은 세탁편의점 사장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늘한 추적극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릴러 소설이다. 「단골손님」은 1949년생, 세탁편의점 주인인 '나'가 주인공이다. 나는 가까이 지내던 형을 만나러 갔다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형의 집 뒤편에는 기이하게도 고양이들이 포개진 채 죽어 있었고, 고양이들의 송곳니는 모두 빠진 상태였다. 이튿날 손님들이 맡긴 옷의 주머니 속을 확인하던 나는 낯선 물건 안에 보관된 동물의 송곳니를 발견한다. 물건의 주인은 평소 점잖은 태도를 보여 온 단골 청년이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내가 청년의 뒤를 밟기 시작하자, 청년은 내 예상대로 조용히 대응에 나선다. 이 소설은 삶의 쓸쓸한 순간들을 차분하게 응시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주인공들을 떠나보내기가 못내 아쉬운 까닭은, 강렬한 캐릭터란 무릇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이산복이 썼다.

 


 

히어로의 대명사 격인 슈퍼맨은 어리숙한 기자 클라크 켄트와 동일 인물이다. 초등학생 탐정 에도가와 코난의 정체는 고등학생 탐정 쿠도 신이치다. 이들은 상반된 매력을 지닌 두 인물 사이를 오가며 다채로운 활약을 선보이고, 때때로 숨겨 온 모습을 들킬지도 모르는 위기에 휘말려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한다. 이중생활을 하는 마법 소녀, 스파이, 괴도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오랜 세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한 사람의 몸으로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이중생활자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또 다른 자신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동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들은 왜 굳이 험난한 길을 걷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들에게 그토록 끌리는 것일까? 이 책 『이중생활자』의 수록작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있다.

이중생활자들은 세계의 이면을 본다. 군사 스파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적국의 용병 훈련소에 입소한 「열일곱, 여름, 전쟁」의 영은 약소국 국민들이 강대국의 점령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조국에 헌신한다는 강의를 듣는다. 침략에 저항한 대가로 강제 징용된 부모를 둔 영이 잠자코 듣기에는 무리가 있는 내용이다.

작가 최현수는 「작가 후기」를 통해 "이 이야기는 전쟁으로부터 무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혹은 나도 모르게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이아기이기도 하다. 처음엔 '이중생활자'는 특별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나?라고 우리 모두가 이중생활자인 것 같다.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너는 그 우유 배달부 같은 거야. 조금 다른 점이라면, 네가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부이자 우유 그 자체라는 거지. 그 우유가 적어도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지만 어떤 검역 시설도 잡아낼 수 없는 생체 폭탄이라는 점도, 그리고 그게 네 몸속을 흐르고 있다는 것도.”(p.12) - 「열일곱, 여름, 전쟁」 중에서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숨기기 때문에 '이중생활자'가 된다. 「드림센스」의 초등교사 화식조는 꿈을 먹는 자 ‘두억시니’에 대적할 수 있는 ‘감각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설이 감각자가 되었음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힘에 대해 함구한다. 「부귀수산」의 춘단은 경찰이 수사 중인 강력 사건의 전말을 짐작하고 있지만 입을 다문다.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을 이해하기에 발휘된 직감이다. 일단 이해하고 나면 각자의 죄와 벌을 간단히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깨닫게 되고 만다. 「부처핸접」의 승려 지거는 자신이 출연하는 랩 경연 프로그램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챈 뒤 위험을 대중에게 직접 알리는 대신 다른 길을 걷는다. 이는 본인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한데, 『이중생활자』의 주인공들은 모두 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단골손님」의 주인공 ‘나’는 70대 노인으로, 죽지 못해 살아온 긴 시간에 대한 반동을 동력 삼아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게임의 설계자가 된다. 물정에 어두운 눈과 허술하고 느린 몸짓 안쪽에서 모험을 원하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은 모른다. 그러니 승산이 있는 것이다.

"젊은이가 나를 관찰하고 있듯이, 나 또한 집에 들어오면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도중에 TV 소리를 키워 놓고 샛문으로 나가 나만의 은신처에서 젊은이가 도사린 곳을 바라본다. 그도 나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공을 들였다. 젊은이가 관찰을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은 일정했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대범해졌다.(p.332) - 「단골손님」 중에서

「단골손님」의 작가 이산복은 "독거노인이나 고독사, 동물학대 등 사회문제에 평소 관심이나 조예가 있었는지 물어오면 부끄러워진다. 나는 남들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다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길 바란다."는 「작가 후기」를 남겼다.

 


 

저자 : 최현수

이야기를 쓴다. 주로 소설과 희곡. 이야기가 필요한 이름들을 종이와 무대 위로 호명하기 위해 읽고 쓴다.

 

저자 : 나혜림

단편소설 「달의 뒷면에서」로 소설집 『항체의 딜레마』에 참여하였다. 장편소설 『클로버』로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 : 김해일

바다 위로 작열하고 싶다. 읽는 이에게 들이닥치고 싶다. 영원하고 싶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이중생활자》의 〈부귀수산〉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저자 : 전효원

잘 벼려 낸 칼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손에서 칼을 내려놓은 동안에는 휴대폰과 엄지 두 개를 사용하여 글을 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한두 가지 정도 담아 내는 이야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삼라만상에 다양한 관심을 두고 있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은 많지만, 어느 분야든 깊이 파지 않는 성격으로 심도 있는 지식은 부족한 편이다. 대자연 속에서의 휴식을 즐기지만 잠은 튼튼한 지붕 아래에서 자야 하는 모순적인 취향의 소유자이다.

 

저자 : 이산복

시나리오와 소설을 습작하며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작가 대접을 해 주었으나 사실상 육아빠로 지냈다. 막연한 앞날에 동기부여 결여로 무념무상하게 지내다 안전가옥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반전을 맞아 인생의 후반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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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교양
지식스쿨 지음 / 메이트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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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벌거벗은 교양』은 국가 등 단체의 기밀이었다가 해제됐거나, 누구나 알지만 굳이 거론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한 묶음 지식들을 나열한다. 또 관점을 조금 달리 하거나 비틀 경우 보편적 지식이 특별한 지식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책으로 출간되기 전 이미 구독자 29만 명에 누적 조회수 1억 회를 기록한 화제의 유튜브 채널인 지식스쿨에서 풀었던 보따리다. 그렇다고 단순 흥미거리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어쩌면 남들이 모르는 것을 혼자만 아는 이상 지식 욕구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접근법에 대한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지식스쿨은 역사, 문화, 사회, 과학, 정치, 경제 등을 넘나드는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지식을 TOP 10 형식으로 너무나 재미있고 유익하게 풀어주는 유튜브 채널이다.

이 책에 소개된 흥미진진한 35가지 주제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정확한 테이터를 기반으로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이해를 돕는 이미지까지 친절하게 전달하면서 재미를 더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키워주는 역사의 흔적과 사회마다 차이가 있는 문화적 차이를 각 주제마다 1위부터 10위까지의 순위로 분류해 서술했기에 입체적으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을 통해 빠르게 발전하면서 발생하는 사회 현상, 21세기의 과학적 지식, 심지어 복잡하게 얽힌 정치와 경제적 이슈까지 한눈에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식스쿨 채널은 세상에 숨겨진 각종 정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방법을 기획하면서 탄생했다고 한다. 다양한 영상들은 호기심으로 시작되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궁금했던 하나의 주제를 영상으로 풀어나간다. 그중 ‘TOP 10’ 컨셉의 콘텐츠는 호기심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숨겨진 세상의 지식을 모두와 공유하고자 하는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기존의 나열식 방식이 아닌 순위로 구분해 설명하니 더 집중할 수 있고 궁금증도 자연스럽게 커지면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그간 지식스쿨이 영상으로 만든 TOP 10 콘텐츠 중에서도 각별히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았던 것을 특별히 엄선해 묶었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이나 화장실에서 가볍게 읽다 보면 어느덧 양질의 상식이 가득 쌓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내용은 어디서나 쉽게 접하던 흔한 정보들이 아니라 그 어떤 교과서나 책에서도 미처 알려주지 않은 신박한 교양상식들로 가득해 읽어나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 책은 모두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뚜렷하게 남아 있는 독특한 역사의 흔적」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키워주는 역사의 흔적을 전해준다. 과거의 흔적들을 TOP 10으로 되짚으면 역사적 사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것이다. 나치 독일이 발명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의 순위와 산업혁명 당시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충격적인 관행의 순위가 TOP 10으로 정리되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2장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계의 문화 이슈」에서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 문화적 차이를 흥미롭게 알려준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문화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호기심과 재미를 안겨준다. 전 세계 과일 중 가장 이국적이고 특이한 과일과 세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테마파크를 순위별로 알 수 있다.

3장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사회 현상」에서는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사회 현상을 알려준다. 세계가 빠르게 변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 사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전 세계 국경 중 가장 이상하고 특이한 국경의 순위와 미국의 모든 주에서 영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의 순위를 TOP 10으로 확인할 수 있다. 4장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과학적 지식」에서는 21세기에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지식을 TOP 10으로 정리하였다. 현실적으로 인류의 화성유인탐사가 어려운 이유의 순위와 달이 사라졌을 때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의 순위를 TOP 10으로 알아보자. 5장 「정치와 경제의 특이한 이슈」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특이했던 이슈들을 TOP 10으로 정리하였다. 정치와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독특한 일들을 엄선한 것이다. 한때 가난에 허덕였지만 현재 부유해진 국가의 순위와 중립국이 되려 했지만 최종 지위를 상실해 실패한 국가의 순위를 알 수 있다. TOP 10으로 정리한 역사, 문화, 사회, 과학, 정치와 경제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질문들로부터 지적 호기심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독자들마다 관심과 관점이 달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정리 정돈해준다는 의미에서 큰 가치를 지닌 이 책은 자칫 잘못된 정보를 올렸다가는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점에서 치열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독자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 잘못 알고 있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서평을 대신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은?이라는 질문의 주제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에서 가끔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군대 이야기하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으리라 믿는다. 독자는 학창 시절에 배운 교양 지식으로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즉 직·간접적 지배라는 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칭기스칸은 말타는 실력(기동력과 민첩성) 웅혼한 기상으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아시아-유럽에 이르는 대 영토를 장악했다. '정복했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직접 지배했다는 의미에서 단연 세계 최대의 영토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간접 지배력까지 포함한다면 대영제국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유럽의 변방 섬나라인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식민지 건설에 나섰다. 당연히 수탈을 위한 것이고, 수탈한 물자나 각종 보물 등은 자국의 부강한 나라 건설로 이어진다. 대항해 시대 직후 벌어진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포함한다면 단연 세계 최대의 나라이다. 또 이는 근대에 이루어진 일이라 지금도 영연방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많다. 이는 영연방의 나라들은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진작 인정받았지만 지금은 피지배가 아닌 연대·유대의 성격으로 남아 있는 식민주의 시대의 잔재다. 대영제국은 1920년대 최대 규모를 보였고, 약 3,55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 면적이다. 전 세계 영토의 36.35%라고 한다. 산업혁명까지 마친 대영제국의 국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이 '팍스 로마나'를 외쳤듯이 '팍스 브리타니카'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대영제국의 뒤를 몽골제국, 러시아제국, 청나라 순이다.

 


 

'전쟁은 과학을 낳고, 과학은 전쟁을 낳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기 개발은 기술 집약적이고 강력한 무기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이는 인류가 벌여온 크고 작은 승부에서 무기의 우수함과 강력함이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기에 나온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은 많은 대량살상 무기가 등장한 반면 우리 생활에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신소재 등이 많이 등장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스테인리스강'이다. 책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에는 금속의 부식 방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에 여러 야금술사들이 특허를 시도했으면, 영국군도 총기에 더 알맞은 금속을 찾고 있었다. 총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게 되면 총신이 마찰과 열 때문에 변형되거나 부식됐기 때문이다. 1912년 영국군은 영국 셰필드 브라운 퍼스 연구소의 해리 브리얼리에게 더 강한 합금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던 중 그는 그동안 공장에서 총신에 어울리는 합금을 찾는 실험을 하다가 버린 고철 스크랩 사이에서 우연히 반짝이는 금속을 발견했다.

이 금속은 비가 오고 외부 습기에 노출된 지 오래됐음에도 금속이 부식되지 않은 원래 상태 그래도 있었다. 1913년 이 우연으로 스테인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고, 영국군은 신속히 총신에 적용시키기 위해 이를 채택했다. 영국군의 무기는 성능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월등한 위치에 섰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독일은 2차대전뿐만 아니라 1차대전도 일으킨 장본인이다. 유럽 전역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독일군은 1915년 4월 연합군을 상대로 독가스를 최초로 사용했다. 위력적이었고,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방독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초에는 투명한 렌즈가 부착된 화학흡수 직물로 만든 조잡한 형태의 마스크였다. 더욱 확실한 방어가 필요했고, 지속된 개선 작업을 거쳐 1915년 호스가 연결된 대형 박스 형태의 호흡 보호구가 개발됐다. 1916년 2월부터 제작됐는데 전장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거듭 개선 작업이 이뤄졌고, 1916년 8월부터는 작은 크기로 제작됐다. 개선된 방독면은 1917년 1월에 영국군의 표준 방독면으로 자리 잡게 됐다.

 


 

전쟁이 큰 관심을 끌긴 하지만 문화적으로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는 곳이 많다. 사막에서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이 없다는 사막에서 그들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물'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했고, 그 표현은 문학적 메타포를 머금고 명언 반열에 올랐다. 인간이 제 아무리 강인하다고 해도 물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이 책에서 '사막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표현한 오아시스 10곳도 소개하고 있다. Top으로 선정된 〈와카치나 오아시스〉는 잉카문명으로 잘 알려진 페루에 있는 오아시스다. 이 오아시스는 페루의 이카 지역에 있다. 주변이 모래 언덕으로 된 사막 한가운데에 지하수가 용천에 형성된 곳인데 오아시스 규모는 크지 않다. 이 때문에 오아시스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는 인구 100명 정도로 적은 인구만이 거주한다. 오히려 관광객이 매년 수만 명이 몰리고 있다. 관광객들은 오아시스 주변에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질주하는 버기 투어나 샌드 보딩 등을 즐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오아시스지만 이곳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하수 시추 및 사용의 증가로 인해 오아시스의 수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독자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데다 규모도 만만치 않은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렌소이스 마라넨지스 국립공원〉이다. 이곳은 사막이 흰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유명세를 탔다. 대부분 지역이 사막인 이곳은 바람에 의해 높이 40m의 모래 언덕이 형성되는데 이 모래 언덕이 놀라운 장면을 만든다고 한다. 매년 1월부터 6월까지 우기에 내리는 비가 모래 언덕 사이사이에 모아진 빗물은 수백 개의 오아시스 장면을 만들기 때문이다.<사진> 이렇게 모아진 빗물은 각각 길이 100m, 깊이 3m 정도의 규모를 보여주는데, 면적으로만 본다면 많을 때는 공원 전제 면적의 40%에 육박할 정도이다. 모래임에도 이렇게 물이 모아질 수 있는 것은 모래 아래에 바위층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건기가 되면 빠르게 증발해버려 다시 장마철을 기다려야 볼 수 있다.

 


 

이 책이 세계의 Top10을 다루다보니 잘 알려진 것은 이 책에서 배제돼 우리나라가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조선업이나 컴퓨터 반도체, 휴대전화 수출 등을 따진다면 우리가 세계 Top10은 물론 1위에도 랭크될 만한 것이 많은데도 말이다. 그러나 찾아보면 자랑스러워 할 것이지만 누군가의 관점에 따라 매우 당당한 국민, 모범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책의 소제목 '한때 가난에 허덕였지만 현재 부유해진 국가 Top10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자리하고 있다. 7위에 랭크된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대단한 경제적 성장과 민주 국가로서의 위치도 굳건히 지켜 선진국은 물론 강대국 대열에 올라섰다.

저자에 따르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가뜩이나 별게 없었던 한국 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몰고 갔다. 1961년부터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해 산업화의 초석을 다졌다. 국민의 자유가 억압됐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경제만 놓고 봤을 때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특히 한국의 대기업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며 높은 성장을 이끌었는데, 이러한 결과 19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약 9%를, 1980년대에는 3저호황에 힘입어 평균 약 9.7%를 기록했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를 겪었지만 경제의 체질 개선을 통해 현재는 선진국으로 올라선 상황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GDP는 3만5,196달러였는데, 이는 1960년 158달러에 비교했을 때 무려 222.7배 높은 수준이다.

1위에는 룩셈부르크가 선정됐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서유럽 3소국으로 배웠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중의 가장 작은 룩셈부르크가 영예의 1위다. 바다에 인접하지도 않은 이중내륙국인 룩셈부르크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인구의 33% 정도가 해외로 이주했을 정도로 국민들의 삶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척박해 보였던 영토에서 철광석이 발견되고 1876년 영국의 야금술이 도입되면서 룩셈부르크에서 가난은 옛말이 됐다. 유럽의 주요 철강생산국으로서 룩셈부르크의 경제는 급성장했다. 세계대전의 위기도 있었지만 철강산업은 20세기 초중반 룩셈부르크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2021년 룩셈부르크의 1인당 GDP는 무려 13만1,302달러에 이른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치러진 독립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국경이 폐쇄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경제는 1979년까지 영국의 법정 통화인 파운드 스털링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게다가 아일랜드의 경제는 농업에 기반을 둔 터라 상당히 취약했습니다. 그럼에도 1932년에 보호주의를 도입해 더욱 침체됐는데, 이 때문에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유럽경제는 호황이었지만 아일랜드는 이에 편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났을 정도였습니다.(p.325)

 

세계에서 희토류를 가장 많이 매장하고 있는 국가는 중국입니다. 중국의 희토류 매장량은 4,400만 톤입니다. 이는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36.6%의 비중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매장량의 비중을 넘어선 희토류의 생산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1년 중국이 생산한 희토류는 총 16만 8,000t이었는데, 이는 전 세계 생산량의 60%로 절반이 넘는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p.348)

 

저자 : 지식스쿨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7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의 콘텐츠를 TOP 10 형식으로 제공하는 유튜브 채널이다. 단순히 가십성 이슈보다는 진지한 이슈들을 알기 쉽게 다루고 있어 지식에 목말라 있던 이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스포츠채널에서 임원으로 재직하다 퇴사한 뒤 정보의 홍수 속에 사라져가는 주변의 모든 지식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유튜버로서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다. 한양대학교 졸업 후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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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고통 -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이기병 지음 / 아몬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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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실재하는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인류의 미래를 내다본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의사 이기병은 인류학과 의학을 접목하면서 깨달았다. 향후 저자의 의학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더욱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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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고통 -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이기병 지음 / 아몬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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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연결된 고통』은 한 공중보건의가 3년간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하 외노의원)에서 근무하며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고통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복원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의사 이기병은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의사 대 환자'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이었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전문의 수련을 막 마치고 나온 의사로서 저자는 외노의원에서 다양하고 고유한 아픈 몸들을 만나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실감한다. 그때의 그 고단함과 좌충우돌했던 분투를 그저 ‘미숙’의 결과로만 생각하기엔 갑갑함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더 나은 진료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을 안고 있던 저자는 마침내,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만난다. 저자는 건강과 불건강,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나와 너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시대에 의학이라는 단일의 카테고리에 포섭될 수 없는 아픈 몸들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고민했다. 이 고민은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환자 진료에서 치료 경험이 쌓인 것이라 더 값진 것이라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의학의 진단 및 치료 체계는 특정 증상을 보이면 특정 질병으로 이어지는 병인론에 근거해 정해진 프로토콜에 의해 움직인다. 의학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며 인류 전체의 건강한 삶을 견인했으나 한편으론 환자 개개인이 겪는 질병 서사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이야기보다는 과학이, 숨은 맥락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중요했다. 저자의 이 같은 깨달음은 의사 개인뿐만 아니라 의학 전체에 치료 체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잊히지 않아야 할 크고 작은 세계의 기록」이란 제목의 '머리말'에서 "그 3년은 고통스럽게 반성하고 망설이며 좌절했던 기억이면서 삶이 때때로 보여주는 것처럼 간혹 기쁘고 감사한 나날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이 때문에 함께했던 환자들에 빚지고 있다는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2011년부터 3년간, 외노의원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조선족에 이르기까지 10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권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내국인 환자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일련의 난관에 봉착한다. 우선 소통의 문제였다. 타국의 진료실에 환자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곳 언어를 할 줄 알아도 진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을 터, 언어가 능통하지 않다면 더욱 곤란하고 당혹스러울 것이다. 책에는 실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코트디부아르 청년의 사례가 등장한다.(7장 「고통의 이분법」) 진료실을 찾은 그는 한국어도, 영어도 그리고 불어도(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령이었다)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자기가 살던 지역의 토착어만 할 줄 알았던 그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오해’는 왠지 낯이 익다. 비록 단적이긴 해도, 진료실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소통은 충분하지 않을 텐데 (배경지식이) 동등하지 않은 ‘의사와 환자’ 같은 관계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일이다.

다음엔 국내와는 다른 환경에서 태동한 다양한 질병을 감별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저자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문진에 한두 가지 주요 증상이 아닌 여덟아홉 가지의 증상을 토로하는 조선족의 (한결같은) 사례에서 황망함을 느꼈다. 특정 증상을 증상의 원인인 장기와 질병으로 좁혀 들어가 마침내 진단에 이르는 ‘생의학’의 훈련만 받아왔기에 이런 상황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인류학 문헌을 통해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원인이 다분히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일 수도 있음을 확인한 저자는, 일말의 해방감과 동시에 무거운 ‘의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환자들의 질환에 단지 진단명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서사’가 있고, 더 나은 진단과 진료를 위해 들어야 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려면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과 통증은 오직 개인적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층위 위에서 상연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저자의 깨달음과 노력은 외노의원을 거쳐 이후 의사로 살아가면서 ‘진료실 내 의료’의 한계에 회의를 느낀 계기가 됐다. 이후 저자는 별도로 인류학에 입문한다. 그는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의학(과 인류학)을 감히 안다거나 할 수는 없다"면서도 의학과 인류학의 경계에 서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독자는 저자의 이 자세와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경계에 서기를 누구나 꺼리는 시대에 자신이 그 자리에 설 것을 결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저자는 그 경계에서 바라보고 깨달은 이야기들은 뭉클하고, 때로는 즐겁고, 또 때로는 가슴 아프다. "우리 나라 의사의 대부분이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 우리 의학의 수준이 세계적이라고 하는구나"라는 자긍심을 갖고 존경심이 든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의학은 보편적 질병 범주와 함께 이를 진단, 치료하는 체계를 고안해냈다. 의학의 진단 체계가 정교해질수록, 치료법이 더 발전할수록 인간의 수명은 늘고, 고통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러나 그렇게 정확도와 속도, 효율과 효과가 강조될수록 인간의 삶은 ‘질병 코드’로 암호화되면서 고통이나 증상을 통해 아픈 몸이 말하고자 했던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목소리가 검열, 절삭되어 일개 디지털 부호로 납작해진다. 그 목소리는 다른 말로 하면, 환자의 ‘서사’다. 책에는 환자의 몸이 의학의 진단 체계보다 더 정확히 ‘말’했던 사례가 등장한다.(1장 「갑상선 호르몬의 진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인용한 신형철 평론가의 지적이 새삼 적절하다고 털어놓는다. "고통이 인지의 충격을 유발하며 주변에 전이되는 방식 중 가장 유서 깊고 탁월한 방식은 '이야기'다"는 말이다. '본질의 장악'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환자가 몸의 증상이나 감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면, 그것이 그 고통의 본질을 관통하고자 하는 몸의 의도가 아닌지를, 또 그 의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치료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사유가 나아간다.

 


 

알코올성 확장성 심근병증, 즉 술에 의한 심부전을 겪던 환자의 이야기(2장 「술과 심부전」)는 어떤 상황이나 결과가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짚고 있다. 일상을 ‘건강’과 ‘불건강’의 의료적 언어로 재편하는 의료화 시대에는, 질병과 은유가 서로 유착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노동자’인 환자에게 주어진 진단명 ‘알코올중독’에 모종의 경계와 위협, 나태한 일상, 잠재적 폭력 등이 상상되는 것처럼. 이런 차별적 시선과 낙인이 어쩌면 그의 병을 더 악화하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따라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혼자서) 건너는 것이 아님’을 촘촘하게 보여준다고 사고의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다.

저자의 이 같은 통찰은 HIV를 보유한 청년의 치료를 끈질기고 집요하게 설득하려 시도한 경험(3장 「어느 HIV 청년과 약혼자」)에서도 나타난다. 낙인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을 전방위적으로 다시 검토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을 반성하는 한편, 치료 현장에서 ‘사회적’ 관점이 언제나 잉여의 논의가 되기 십상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위층 쉼터에 전염병 ‘옴’이 번진 이야기(4장 「옴과 헤테로토피아」)에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와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연결시키는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인 장면이다. 의학과 철학의 통찰은 저자가 개인적 노력으로 얻어낸 의료 지혜로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여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 개념은 ‘이분법’이다.

저자는 근대적 사유의 핵심인 ‘이분법’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삶과 죽음, 몸과 마음, 주체와 객체, 개인과 사회 등으로 간편하게 나누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나뉘지 않으며 이분법적 도해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거나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의학이 지닌 어쩔 수 없는 이분법적 관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고, 나아가 대안을 이끌어낸다. 진정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의학의 문제를 풀이하려는 태도로 보여진다.

 


 

예컨대 의학에서 죽음은 삶을 위해 몰아내야 할, 적어도 지연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에는 완전히 연속적인 시계열상에 위치한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듯 보이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6장 「질병이나 죽음은 형벌일까」)를 통해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의제가 ‘고통’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성염증과 우울증을 동시에 겪던 환자의 사례(7장 「고통의 이분법」)를 통해서는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분리하려는 이분법에 사로잡혔던 시간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우리 삶과 질병을 재단해온 ‘이분법’이 고통을 줄이는지 아니면 되레 부추기는지는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 이 책에서 면면히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고통이 모두 그러하다.”(p.251)

책에 실린 얼굴들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게 된다. 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 삶과 죽음은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가. 질병과 죽음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돌봄이란 무엇이며, 좋은 돌봄은 가능한가. 어느 하나 가벼이 다룰 수 없는 묵직한 질문들에 이 책은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검토하게 만든다.

이 책은 친절한 의료 지식과 치열한 인류학적 해석을 넘나들며,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던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가리봉동의 어느 좁다란 진료실 한 편에 슬그머니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때로는 의사의 마음이 되어 환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연신 전화를 해대며 노파심과 불안을 느끼고, 때로는 환자가 되어 내 말을 성의껏 들어주지 않는 의사의 무심함에 서럽고 속상하다. 외국인노동자 ‘환자’로서의 삶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나의 고통을 맞대어 보게 된다.

 


 

국내외에서 터져 나오는 다양한 고통의 목소리들이 하루도 끊이지 않은 시대.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언젠가 나의 것일 수도 있음을, 이 책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연결된 고통』은 고통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석하고 줄여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 결국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한 걸음 한 걸음 알려주는 단단한 징검다리 말이다.

 

나는 석연치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 찜찜한 순간이 한 번쯤은 꼭 있기 마련인데 그날이 그랬다. 뒷목 언저리가 서늘했다. 진료가 끝난 뒤 나는 병원에 홀로 남아 기록과 정황을 새로 검토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상황을 다시 보는 방식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결국 왔던 길을 잠시라도 되짚어가야만 한다. 문득 환자의 기침 증상에 생각이 미쳐 엑스레이 사진을 열었다. 5분이 넘게 사진을 응시하던 나는 결국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p.196)

괜찮은, 정상적인 환자가 아니라 이상한 환자. 괜찮은 환자라니 여기부터 엄청난 역설이다. 정상적인 환자라니 무슨 말인가. 그럼에도 이분법은 간편하다. 망치를 든 사람 눈에는 못만 보이는 법이니까. 내 몸은 피곤하고 이 사람은 이상한 환자라고 일단 못 박고 나면 나머지 정보들은 상당히 탈색되거나 소거된다. 재고의 여지가 부족해진다. 이 환자를 향한 이분법은 자명한 검사 결과로 인해 다행히 망상 수준에서 끝이 났지만 이러한 선입견의 효과는 우리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서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괜찮은 것과 이상한 것을 나누며 여전히 진행 중일지 모른다.(p.223)

 

저자 : 이기병

 

내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 연구자.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교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에서 내과 수련을 받고 늦깎이로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의학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감염내과 전임의를 수료했으며 AI 패혈증 예측 스타트업 기업 AITRICS에서 의료 자문을 겸하고 있다. ‘고통받는 것만 실재’한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등 분리될 수 없으나 분리된 것들의 경계, 의학과 사회과학 등 기반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경계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아프면 보이는 것들』(공저)이 있으며, 논문으로 논문 「조선족 간병사들의 돌봄 낙인과 생명정치」, 「죽음과 애도에 대한 고찰과 교육 가능성 탐색」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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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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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행자와 달빛』의 저자 세르브 언털은 우리 대한민국과는 별로 친분 관계가 없는 나라, 헝가리의 저명한 문인이라고 한다. 헝가리는 동유럽 국가 중의 한 나라로 국력이나 영토의 크기가 막강한 나라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위성국가로 전락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만 하더라도 강국이었으나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국토의 3분의 2가 줄어든 채로 정치체제도 애매했던 듯하다. 이 책 뒷 부분에 나와 있는 김보국 역자의 「되살아난 꿈과 절망의 시절」이란 제목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세르브 언털은 마흔네 살에 사망했지만 그의 삶에는 헝가리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오-헝 제국의 교육을 받았으며, 가장 혈기 왕성한 대학 입학을 앞둔 시기를 보냈다. 이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약간의 외국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헝가리 왕국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헝가리는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왕국'도 아니고, 군주제를 채택했으나 군주가 있는 국가형태도 아니었다. 명명할 수 없는 정체(政體)의 실질적인 권력을 헝가리의 극우주의자들이 접수하자 유대인 출신인 세르브 언털은 결국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벌프에 있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저자는 두 권의 장편소설을 남겼는데, 두 편 모두 국내외 소설을 망라하여 헝가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100선에 포함되었으며 영화화되었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언어로 계속해서 출판되며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땨라서 이 작품 『여행자와 달빛』은 첫 번째 장편소설인 『펜드래건의 전설』(1934)과 함께 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의 저명한 문학사가인 터랸 터마시가 출판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헝가리 소설 303권』에는 세르브 언털의 작품 중 유일하게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헝가리 작품' 목록에서는 네 번째로 꼽힌 바 있다고 한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기로 한 것은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베네치아'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와 지중해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고, 또 유럽의 각국 문학 작품에도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곳이기도 하다. 독자로서는 첫 유럽 여행 방문지였고,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과 함께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관심이 더 높았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소설 첫 장(章)의 제목 「신혼여행」지로서의 베네치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주인공 미하이와 에르지가 신혼여행 중이다. 사실 낭만적인 분위기의 로맨스 작품을 기대했던 사실을 독자는 고백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소설을 읽으려 펼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시인 비용의 시구인 것 같은 문장이 인용돼 쓰인다. "나는 법과 질서를 불온하게 여긴다 / 그러면 무엇이 뒤따르는가? / 그 대가를 기다리리, / 이 세상은 나를 받아들이기도, 거부하기도 하기에"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자가 읽기에는 어둡고 부정적인 느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인용시를 쓴 비용은 독자도 이 책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이다. 비용은 143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452년 파리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학생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각지를 방랑했는데 1455년 생노브와 교회에서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으며,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서 파리로 돌아왔으나, 금괴 도난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방랑 생활 중에(1456~1460) 「유품 Le Lais(1456)」 등 많은 시를 썼는데 그의 시는 후회와 노여움과 소망과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고 『인명대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1463년부터 10년간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시는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닥친 인간이 외치는 비명과도 같은 절실한 느낌이 넘쳐 흐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근대 서정시의 길을 터놓은 보들레르와 비교 될 만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 표지는 베네치아의 한 풍경 사진이지만 어두운 밤을 실은 것은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어둠을 통해 빛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르브 언털의 문제작이자 마지막 소설인 이 작품은 국내 초역이라고 한다.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 앞에 남편 ‘미하이’의 옛 친구가 나타나고, 급격히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 미하이는 한순간의 실수로 아내 ‘에르지’와 다른 기차에 오른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고통과 열망이 은밀하고 매혹적인 메타포들로 몸 바꿔 되살아나고, 유혹의 순간을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자기만의 삶’ 앞으로 서서히 독자를 잡아끄는 기묘하고 독특한 소설이다. 작가이자 저명한 문학비평가였던 세르브 언털이 문학 세계의 정점에서 쓴 작품으로, 그의 인생 전체가 등장인물 설정, 동성애적 관점 등의 모티프가 되어 소설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작품 활동에 직간접적인 제약을 받았으나, 최근 몇십 년간 동시대 작가인 마러이 샨도르와 함께 재평가받고 있다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배네치아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신혼여행지로 이탈리아를 선택한 미하이와 에르지. 에르지는 부유한 사업가인 졸탄과 이혼하고 젊은 나이에 미하이와 재혼한다. 미하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중산층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자주 환영을 겪었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친구 터마시, 그리고 그의 여동생 에버와 함께 어울리며 암울한 청춘 시기를 보낸다. 이후 터마시가 자살하고, 에버마저 사라지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이사로 바쁘게 지내면서도 그 시절의 고민들을 풀지 못한다. 에르지와 결혼해 떠난 신혼여행에서 자신의 결혼 소식을 듣고 쫓아온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 세페트네키가 나타난다.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 그 시절의 향수, 그리고 에버와 이후 수도사가 된 친구 에르빈(소설 속에서 에르빈은 고등학생 때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역자 주)이 다시 그를 사로잡는다.

 


 

미하이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두었던 각종 기억들이 그의 의식 전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그에게 가장 의문이었던 터마시의 자살 경위가 알고 싶어졌고, 자신도 죽음의 망령에 지해를 받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나. 우연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한 기차역에서 아내인 에르지와 헤어지게 되고, 그는 혼자 이탈리아의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하기로 결정한다. 이전에 그를 괴롭혔던 환영들이 다시 나타나며 그는 정신적인 혼란과 과거에 대한 향수, 그리고 그때 풀지 못한 의문들로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급기야 병적인 상태에까지 이른다. 결국 병원으로 이송되어 엘슬리라는 영국 출신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그곳에서 알게 된 미국인 여학생과의 로맨스도 경험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그의 병적인 정신 상태는 치료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의사 엘슬리의 조언에 따라 그는 영적 치료를 위해 세베리누스라는 신부를 찾게 되는데, 그 신부는 다름 아닌 학창 시절의 친구 에르빈이다. 그곳에서 에버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 되돌아가지 않고 에버와의 만남을 갈망하며, 자신이 그동안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의 의문과 함께 죽음에의 유혹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그 와중에 신혼여행에서 혼자 남겨진 에르지는 파리로 가서 자신의 오랜 친구인 샤리와 함께 지내며 새로운 삶을 시도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이 안주할 곳은 현실의 세계, 부르주아의 삶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자신을 기다리던 전남편 졸탄에게 돌아간다.

미하이는 결국 에버와 만나 그녀로부터 직접 터마시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득게 되고, 자신도 터마시의 길을 따를 것이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우연히 참석하게 된 영세식에서 벌어진 일들로 자살을 실행하지 못한다. 이후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와 함께 부타페스트로 돌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마직막 장면에서 작가는 말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p.382)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해석된다고 역자 김보국은 작품해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그도 그럴 것이 86년 전에 출판된 소설이지만 2022년에도 두 곳의 출판사에서 새로이 출간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세르브 언털은 마리이 샨도르와 함께 최근 몇십 년간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헝가리 작가이며, 그들의 작품이 때늦게 재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후인 1940년대 초에 그가 썼던 문학사(『헝가리 문학사』 및 『세계 문학사』) 도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판금 조치되었고, 사회주의 시절에도 소련 문학을 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이유로 그 책들은 원본대로 출판될 수 없었다. 물론 『여행자와 달빛』이 판금 조치를 당한 것은 아니나, 비평가들이 '정치적인 낙인이 찍힌' 작가의 작품을 '기꺼이 비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그 밖에도 당시 사실주의와 이후 해석학적, 그리고 민족적 관점이 비평의 주된 경향을 이루었던 까닭에 외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내에서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축소되어 있었다. 그나마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분석은 종종 있어왔는데, 이는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세르브 언털의 관심이 잘 알려졌던 바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 달, 성(性), 신화, 종교, 장소 등의 수많은 모티프에서부터 등장인물의 소재가 된 실존 인물, 동성애적 관점(세르브 언털의 일기에서는 동성애를 직간접적으로 연상시키는 몇 차례의 언급이 나온다. 그는 한 여성과 두 번, 그리고 다른 여성과 한 번 결혼했다-역자 주) 이후 발견된 자료(예를 들면 1992년에 사망한 그의 부인 발린트 클라러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던 세르브 언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1995년에 발견되었다. 남편의 사망 이후 재혼하지 않았던 그녀는 1951년 한 아이를 세르브 언털의 영적인 자녀로 여기며 '세르브 야노시'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198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역자 주), 가다머의 놀이로서 미적 경험, 바흐친과 루카치의 서사 형식과 이 소설 속의 영적 모티프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인간은 망상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지옥과 죽음의 경계에 섰을 때는 누군가를 갈망한다. 그 누군가를 찾고 쫓아가지만, 그것은 헛된 것이며, 그의 삶은 향수에 잠긴 채 위축되어간다. 미하이가 로마에 머문 이래 그는 계속해서 이 순간을 기다렸고 준비했으나, 에버와 다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p.330)

에버는 미하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단 몇 마디로 그의 지난 괴로움을 정리한다. “너는 터마시가 아니야. 터마시의 죽음은 오직 터마시에게만 해당되는 거였어. 모든 이가 자신만의 죽음을 찾기를.” 뒤이은 장면에서 미하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앉아 다짐한다. 미하이는 마침내 일상으로 되돌아가지만, 독자는 이후로 펼쳐질 그의 삶이 이전과는 다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님을 이미 독자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근엄하고 엄중한 철학적 사상이나 역사적 사실의 재현을 중심으로 삼지는 않는다. 즉각적인 재미나 즐거움을 주지도 않는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모티프 역시 진부하다 싶을 만큼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헝가리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고, 지금까지 애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21세기의 독자가 20세기 초반에 출판된 작품의 에피스테메를 이해하고, 고전의 반열에서 소설을 읽고 있을까? 역자는 의미 있는 답을 내놓는다. "누구나 뜨겁지만 어쩐지 자주 어두워졌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과거와 현재의 장면들이 교차하고,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사건들로 가득한 이 소설은 언뜻 꿈을 꾸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마침내 언털이 우리 앞에 남겨두는 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다. 환상이 현실을, 우연이 선택을, 죽음이 삶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연한 사고로 페르시아인과 단둘이 남겨진 에르지가 자신의 본능을 깨달아 선택을 내리고, 미하이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 다음에야 비로소 삶에의 의지를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아직 마음은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계속 나아가자. 계속. 사람들이 내린 저 자동차처럼 텅 비어 있으나, 우리는 나아가야 해.(p.269)

 

저자 : 세르브 언털(Szerb Antal)

19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여섯 살에 아버지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 단편소설, 수필을 습작했고, 대학에서는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전공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익혔다.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작가뿐 아니라 번역가,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1933년에는 헝가리 문학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학자로서 집필한 《헝가리 문학사》와 첫 장편소설 《펜드래건의 전설》을 출판하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듬해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바움가르텐상을 수상했다. 《여행자와 달빛》(1937)은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문학 세계의 정점에서 쓰인 작품으로, 신혼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옛 친구를 만나 급격히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 남편의 현재와, 뜨겁지만 암울했던 청춘 시절을 환상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반드시 읽어야 할 헝가리 소설’을 꼽는 설문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이러한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경력과 삶에 제동이 걸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개종 여부와 무관하게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다. 《헝가리 문학사》는 공산주의 통치 기간 동안 판금 조치 되었고, 이는 그의 소설에 대한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44년 헝가리 벌프의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고, 1년 뒤인 1945년 그곳의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역자 : 김보국

한국외국어대학교 헝가리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동유럽어문학과와 헝가리의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헝가리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헝가리 문학과 관련된 다수의 논문 외에 저서로 『헝가리 외교문서로 본 북한의 문예』 『헝가리 외교기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 등이 있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 나더시 피테르의 『세렐렘』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채식주의자』 등을 헝가리어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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