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노테 다이빙 - 2023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노은지 지음 / 마시멜로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리브해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현조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장소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주제가 되는, 서사적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다. 우리 시대 사랑에 대한 시의적절한 질문과 함께 안정된 문장과 플롯이 일품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기 전 '카리브해에 있는 리조트' 낭만적 장소 배경에 마음이 닿았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을 꿈꾸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곳이다. 꿈결에서나 만날 듯한 그곳을 오가는 크루즈선은 덤이다. 서두의 말은 은희경 소설가와 이기호 광주대 교수의 추천평이다. '우리 시대 사랑법'과 '서사적 완결성'을 추천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실제 배경 묘사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뭔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도입부가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 소설의 도입 부분은 말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한 숨 넘어갈 듯 아름다운 배경을 묘사하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 현조의 움직임은 진한 어둠이 깔려 있다.

"깨끗한 흰 벽과 상아색 대리석 바닥. 에메랄드와 진홍색, 세련된 나뭇잎 패턴의 포인트 벽지. 두 사람의 것이 될 뻔했으나 한 명으로만 채워진 화사하고 화려한 스위트룸. 현조는 방 열쇠와 숄더백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테라스를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친 뒤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방 불을 죄다 꺼버리자 멕시코의 진한 햇살이 비치는 두꺼운 커튼 아랫부분만이 방 안에서 어둠이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 되었다."(p.11)

 


유카탄 반도 카리브해 연안의 한 리조트 <사진출처 : 열정의 대륙 남미 기행>

 

배경 설명으로 묘사되는 서너 개의 단어는 사실 '이국적' 분위기 묘사에 적절한 곳이다. 이 가운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소한 용어 풀이를 미리 해둔다. 세노테(cenote)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발견되는 자연 현상으로, 석회 기반암(基盤岩)이 오랜 세월 빗물에 무너져 내리며 표면을 드러낸 지하수 샘을 말한다. 낮은 저지대, 섬, 해안가 등지의 토양 발달이 견고하지 않은 고생대 지층 석회암 지대에서 발생하는 지질학적 형태이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doline) 또는 싱크홀(sinkhole)과 동일한 개념이다. 석회암이 용해되어 지표 아래에 공간이 생기면서 동굴이 형성되기도 하고, 연속적인 구조적 붕괴로 위가 뚫려 천연 수영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물 아래의 석회암 바위는 용해 작용으로 세월이 흐르며 점차 사라진다.

칸쿤(Cancun)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카리브 해안에 위치한 국제 관광 도시로, 아카풀코와 함께 멕시코 해양 관광의 중심지이다. 치첸이트사(Chichen Itza-책에서는 치첸이사로 표기한다) 도시 유적이란 멕시코 유카탄주(州)에 있는 7~13세기 후반의 대도시 유적을 말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700년경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최성기인 900~1000년경에는 유카탄 지역의 광대한 지대를 통괄하는 국제도시로 번영하였다. 도시 면적은 최소한 30km2 이상이며, 삭베(포장 둑길)만 69개소나 되었다. 이는 메소아메리카에서 최다에 속한다.

맹그로브 숲은 열대에서 아열대 지역의 하구 기수역의 염성 습지에 형성되는 삼림의 일종이다. 세계적으로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호주, 인도 근해,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분포하는데, 일본에도 오키나와현과 가고시마현에 자연 분포하고 혼슈 일부 지역에도 인공적으로 옮겨 심은 맹그로브 숲이 존재한다.

 


 

멕시코 칸쿤으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현조. 그녀는 연인과 가족으로 가득한 리조트에 홀로 들어오자마자 직원에게 남편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현조는 대답한다. 그녀의 연인은 죽었다고. 마야 유적지인 치첸이사 투어에서, 와인을 마시러 간 야외 풀 바에서, 현조는 왜 혼자 신혼여행을 왔는지 묻는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그 리조트로 여행을 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혼자 여행을 온 동양 여자 현조에게 사람들의 관심은 집중된다. 그리고 체크인 할 때 직원에게 그녀의 연인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 어느 샌가 리조트 전체로 퍼져, 진짜 그녀의 연인이 죽어 혼자 온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 궁금증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궁금하다. 작가의 소설 구성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때마다 현조는 굳이 그녀의 연인, 도훈이 죽은 경위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현조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훈은 결혼식 일주일 전에 총각파티를 하다 실랑이가 붙어 맞다가 넘어져 죽고, 도훈의 여동생을 스토킹하던 전 남자친구와의 싸움 도중 칼에 맞아 사고사하기도 하며, 단순한 교통사고로 죽기도 한다. 연인의 죽음을 때에 따라 여러 이유로 말하는 현조에겐 과연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실제 독자들이 느끼기에도 소설 도입부부터 두세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작가가 2018년 신혼여행지에서 처음 구상한 이 책은 카리브해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주인공 ‘현조’의 여정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특히 작가 특유의 자연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이국적인 장소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주체가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현조는 왜 신혼여행을 혼자 온 걸까?

 


 

현조가 지인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된 도훈은 처음엔 그녀의 이상형과는 부합하지 않는 모습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배려와 이해를 접하며, 현조는 굳게 닫힌 마음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후 도훈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가 위험에 처한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본 현조는 그를 자신만의 유일한 보석 같은 존재이자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도훈은 그녀에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고백해온다. 그러나 현조는 그런 그를 놓지 못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선택을 하고 마는데… 이들 사이에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도훈의 죽음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이 소설에서 현조는 신혼여행지로 온 이곳 리조트에서의 궁금증을 계속 쌓아가는 현조는 장(章)을 거듭하면서(이 소설은 모두 12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도훈과의 관계를 풀이해 내고 있지만 독자들이 기대하는 명쾌한 원인과 답은 작가가 직접 내비치지 않는다. 독자들 개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죽은 남자」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저자 노은지는 강렬한 묘사를 쏟아낸다. "눈을 감으면 죽어버린 연인의 눈이 떠올랐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머리가 아플 만큼 칸쿤의 햇빛이 택시 창문을 뚫고 쏟아졌다. 농도 짙은 카나리아 빛깔의 햇살, 새파란 하늘, 가장자리가 은색으로 빛나는 구름 뭉치, 하늘로 손을 쫙 펼친 채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푸르른 야자수들과 키 작은 관목들. 대기에 스며 있는 물기는 세상의 제도를 높여주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현조의 눈은 흐린 회색이었다." 리조트 체크인 하는 데스크에서 여직원 글로리아 후아레즈가 함께 예약한 도훈의 행방을 묻자 현조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He's dead." 현조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리라고 믿었다.

 


 

책 뒷 부분에 부연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의 초고는 단편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원고를 쓰고 지우는 고통스런 시간의 반복 끝에 완성된 작품이 이 책이다. 작가는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길을 바꾼 것들이 많았지만 소설만은 달랐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곡괭이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작가가 제일 공력을 들인 부분은 바로 자연과 와인에 대한 묘사다. 칸쿤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을 문장으로 그려내기 위해 현지에서 들은 세노테에 대한 설명과 관련 사진을 참고했다고 털어놓는다. 와인 공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여러 차례 퇴고를 거쳤다고 한다. 그 노력은 고스란히 전해져 소설 속 와인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읽다 보면 금방이라도 그 맛과 향이 입안에 맴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현조가 세노테를 마주한 부분에서는 마치 고요한 바닷속에 들어간 듯 같이 숨을 죽이게 된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에 빠져들게 되는 또 하나의 묘미가 될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내게 있어 소설은 현실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이제는 내 소설이 누군가에게 도피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현조와 함께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 속 세노테에 같이 빠져 들게 되길 바란다.(p.193)

 


 

순간 현조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미소, 크고 둥근 눈, 햇살에 반짝이는 짙은 눈썹과 촘촘하고 긴 속눈썹, 도톰한 입술. 무엇 하나만 집어낼 수 없었다. 미구엘의 많은 것들이 그녀에게서 불특정한 감정과 감각을 가닥가닥 살려냈다. 조심스러운 태도와 수줍은 미소, 초식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무해한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단단함, 도훈을 이루던 조각들. 현조는 그것을 미구엘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닭살 돋은 팔을 쓸어내리고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p.51) - 「3. 순진한 남자, 해리 포터와 치첸이사의 목」 중에서

 

현조의 입술은 어떤 말들을 흘려보내기 위해 살짝 벌어졌으나, 도훈이 눈치 채기 전에 도로 닫혀버렸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과 비명이 점점 쪼그라드는 그녀의 육신 안으로 다시 자취를 감췄다. 현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도훈이 무언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잠깐,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말들이 있었다. 정적. 숨을 천천히 내쉬자 현조의 어깨가 아래로 떨어졌다.(p.86~87) - 「5. 모르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 모르는 여자」 중에서

 

저자 : 노은지

 

1986년 경기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다. 2023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곡자 - 장악하고 주도하는 궁극의 기술
공원국.박찬철 지음 / 시공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도 많고 학자들도 많은 시대였다. 수많은 국가의 명멸로 '군웅할거' 시대였다고도 표현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를 비롯, 노자·장자·묵자·순자·손자가 국가 부흥의 토양으로 군주들의 정치를 도왔다. 학문으로서도 거의 모든 토대가 갖춰지고 국가의 틀을 완성시키는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이들 학자들의 학문과 이론은 국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자처했고, 또 성숙해졌다. 이 가운데 이 책 『귀곡자』의 저자 귀곡자는 전국시대로 알려진, 2,500여년 전 중국에서 주로 전쟁에 필요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다만 손자의 『손자병법』과 다른 점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재주는 모두 동원된" 전쟁 이론이라고 치부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학문으로서 전수해야 할 정도의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어쩌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수단까지 모두 동원한다는 점이 학문으로서의 성취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책은 실천서이지 이론서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는 책이지 않았나 싶다. 뒤에 사마천의 『사기』 등에 짧게 언급되는 경우에도 정확한 학문적 확립이 없었던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간단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학문으로서 앞세울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실제로 후학들의 『귀곡자』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명(明)대의 학자 송렴은 "소진, 장의의 말로 어떠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귀곡자』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이는 정통 유학자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곡자』라는 책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번역·주석서인 『귀곡자』의 공동 저자 공원국·박진철은 "자신은 읽되 남은 읽히기 싫은 책"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현재 우리 시대는 당시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해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모두 현실화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변할지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의 시대'이다. 디지털의 시대로 바뀌면서 과학기술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놓으면서 뒤따라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주변인물들로 밀려나는 시기다. 이 시점에서 왜 중국에서 이 책 『귀곡자』의 해석·번역·주석서가 다시 주목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 역시 『귀곡자』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는 게 공동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의 정치인들은 『귀곡자』에 대해 구양수가 밝힌 바와 같이 "시에 따라서 적절하게 변화하고, 일을 가늠해서 적당한 방책을 내는 바는 족히 취할 바가 있다"라고 평가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마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평가와 기시감이 든다. 1513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군주론』 역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의 원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맞지만 그렇다고 『군주론』에 권모술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견지에서 그를 악마의 대변자로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게 그와 저서에 대한 평가이듯이 『귀곡자』 역시 평가가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 책을 악덕의 책으로 비판하면서도 군주로서는 마키아벨리즘적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마키아벨리즘은 그것으로부터 아무리 눈을 돌리고 싶어도 정치의 현실의 일면을 찌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종교나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한 정치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 마키아벨리가 근대정치학의 기초를 정립했다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귀곡자』에 대한 정확한 주석과 시대의 변화를 감안해 재해석되거나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형국이다.

 


 

공동 저자에 따르면 이 책 『귀곡자』의 요결을 ‘반드시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일의 시작을 결정할 때도,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도, 대세를 살펴 방향을 결정할 때도, 일의 마무리를 위해 결단할 때도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주도적인 자세다. 주도적이라는 말은 일에 휘둘리지 않고 일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귀곡자』의 요결은 저자들이 이 책의 재평가를 위해 덧붙인 40여 가지 고사와 조조, 제갈량, 이세민, 오삼계, 서희, 강유, 고선지,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역사상 중요한 전략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당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당 태종 이세민의 고사에서 주도하고 장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산해관의 문을 열어 명나라를 청나라에 받친 오삼계의 고사에서 장악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들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고사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귀곡자』가 제시하는 방법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 된다.

그렇다면 괴이한 이름의 소유자 '귀곡자'는 실재한 인물인가? 공동 저자는 「21세기와 귀곡자」라는 '서문(글을 시작하며)'을 통해 중국 전국시대 활약한 종횡가*의 비조(鼻祖-학문이나 기술을 처음으로 연 사람)로 알려져 있다. 그 문하생이던 소진과 장의는 합종책과 연횡책으로 각국의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손빈병법』으로 유명한 손빈과 전국시대 군사전략가 손빈과 위나라의 명장 방연도 그의 문하생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사기』에 귀곡자는 기원전 5~4세기경에 실재한 인물로 적고 있으며, 귀곡(鬼谷)에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자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귀곡자는 천문과 수학에 정통하고, 선견지명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계략을 결정하는 데 능란했다고 기술돼 있다고 한다. 또한 출사(出仕)를 원하는 제자들을 교육했는데, 학생의 특징에 맞추어 각기 유세, 병법, 음양, 술법 등의 학문을 연수했다. 요즘 말로는 쪽집게 과외선생이라 해야 할까?

 

 

실제로 그가 지었다는 『귀곡자』라는 기이한 책은 춘추전국시대의 다른 제자백가서들과는 달리 출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제적인 원칙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공동 저자들은 말한다. 유명한 합종책과 연횡책은 소진과 장의가 귀곡자에게 배운 바를 그대로 적용해서 얻은 전략이다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종횡가'란 명칭도 그래서 얻은 것이란 독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귀곡자』는 마치 정치적 책략의 교과서로 알려져 왔고, 그동안 명분과 도덕을 중시하는 유가들에 의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책'으로 홀대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 저자에 따르면 책의 내용은 오히려 일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주변의 객관적 상황을 파악하며, 항상 형세글 잘 살피고, 같이 일할 사람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 등 오늘날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분야에서 꼭 필요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귀곡자』는 하나의 큰일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설명한 책이다. 특히 일을 수행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일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하여 마무리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누가 일을 하는가? 물론 내가 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항상 남에게 제어당하지 않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바로 '주도권을 가진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을 어떻게 이루는가?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일을 '일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큰일을 진행하는 것이 바로 귀곡자가 밝히는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란 일을 정의하고, 상황을 분석하여, 전략을 세우고, 의사 결정권자들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는 과정이다. 『귀곡자』는 중국 고전 중에서 이러한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지혜와 방략을 제시하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부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총론〉, 2부 〈준비 단계〉, 3부 〈실행 단계〉, 4부 〈최종 단계〉다. 각 부는 1장 「패합(?闔)」, 2장 「반응(反應)」, 3장 「내건(內?)」, 4장 「저희(抵?)」, 5장 「오합(?)」, 6장 「췌마(?摩)」, 7장 「비겸(飛?)」, 8장 「권(權)」, 9장 「모(謀)」, 10장 「결(結)」 등이다. 제목에 쓰이는 한자는 지금 우리가 상용하는 한자에 포함된 것보다 그 이외의 것이 훨씬 많다. 이 책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 제목부터 해석을 해서 달아 놓았다.

1장 폐합이란 상황을 분석한 뒤 시작을 결정하라는 뜻이고, 2장 반응은 주변의 진심을 파악하라는 의미다. 3장 내견은 마음을 열어 굳게 결속하는 뜻으로 쓰였으며, 4장 저희는 틈이 생길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라는 의미로 쓰인 문자다. 5장에 보이는 오합은 비교적 쉬운 한자이지만 뜻은 대세슬 살피고 방향을 결정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또 6장 췌마는 정보에 우위를 차지할 것을 주문했고, 7장의 비겸은 상대를 높여 장악하라는 의미이다. 8~10장은 각각 한 자씩 돼 있지만 뜻은 명확하다. '권'은 말의 힘으로 상황을 주도하라는 뜻이고, 모는 사람에 따라 쓰는 방법도 다르다. 마지막 결은 결단으로 성과를 얻는다라는 의미다. 이처럼 각 장의 주제를 일렬로 주욱 세워놓고 보면 이 책이 담은 뜻이 점점 명확해진다. 일을 만들어,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꾸준히 성공을 만들어가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일을 성사시켜라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중국 전문가인 공동 저자가 중국의 40여 가지 고사와 조조, 제갈량, 이세민 등 역사상 위대한 전략가들이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을 덧붙여 전국시대 전략서인 『귀곡자』를 풀이하고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는 메시지로 재해석한 이유도 함께 드러난다. 저자들에 따르면 일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주변의 객관적 상황을 파악하며, 형세를 살피고, 같이 일할 사람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일의 시작부터 준비, 진행, 문제 해결, 결단, 일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중견 기업의 임원이나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담당자라면 계획을 세우고 인력과 자원을 배치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작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담당자라면 실행 방법을 수립하고, 주변을 설득해 필요한 자원을 얻고 조직 내에서 성과를 이루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한자가 쓰인 6장 「췌마(?摩)」편을 옮겨본다. 앞선 장에서 큰 추세를 읽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6장은 '적극적으로 능력을 쓸 단계'라고 공동 저자는 말한다. 지금껏 전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내가 공략하려는 상대를 직접 파악해야 할 차례라고 풀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의지를 파악하는 테크닉이 췌(?-재다)와 마(摩-갈다)다. 공동 저자의 주석으로는 췌란 헤아린다, 즉 추측한다는 뜻이다. 물론 추측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마'란 추측을 하기 위한 방법인데, 그 본뜻은 만져본다는 것이다. 이 장은 마치 귀곡자가 옆에서 이야기를 속삭이듯이 생동감이 넘치고, 같은 내용이 정도를 더해가며 반복된다. 상대에게 지혜를 쓰기 전에 상대를 면밀하게 탐색하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들은 정치학, 경제학에서 한때 유행이었던 '게임이론'을 예로 들면서 말한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혹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등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기업 활동이든, 외교 정책이든 협상 전 사전 정보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대방이 나를 예측하지 못하고, 내가 상대방을 예측한 상태라면 게임의 결과는 명백하다는 것이다. 상대가 게임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내가 주도하는 게임이라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현대 게임이론의 핵심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6장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말한다. 상대의 패를 미리 알고 술책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고전적이지만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귀곡자』 원문에는 '췌'와 '마'가 나뉘어 있으나 두 편을 같이 보는 것이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한데 묶었음도 밝히고 있다.

 


 

저자 : 공원국

 

탐험하는 인류학자이자 작가. 10년간의 대장정 끝에 『춘추전국이야기』 11권을 집필했다. 장대한 역사 이야기를 끝내고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오고가면서 만나고 겪은 사람과 세상, 비현실적인 현실을 견뎌내는 현실의 인간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학자이자 작가에게 진실을 좇는 작업은 소설이어야 했다. 티베트 고원 가상의 시한부 도시를 무대로 무심한 문명의 힘에 짓밟힌 삶과 사랑,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썼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공부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인류학자의 시각으로 대안적 세계사를 제시하기 위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하며 《유목, 세계사의 절반》(가제)을 집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10년간의 대장정 끝에 집필한 《춘추전국이야기》(전 11권),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 기행》,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 기행》, 《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 병법》, 《여행하는 인문학자》, 《인물지》(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하버드 C.H. 베크의 세계사 1350~1750》,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말, 바퀴, 언어》, 《중국의 서진》 등이 있다.

 

저자 : 박찬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출판기획사 Culture Map을 운영하며 중국 관련 콘텐츠를 개발, 번역한다. 동양 고전을 비롯한 역사 인물과 사례 등을 통해, 진지하지만 다른 시각을 담은 담론과 교훈을, 때로는 실재하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인물지》(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나를 지켜낸다는 것》, 《세계사를 바꾼 15번의 무역전쟁》, 《주역의 정석 1》, 《참모의 진심, 살아남은 자의 비밀》, 《운이 스스로 돕게 하라》,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판세를 읽는 승부사, 조조》,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 《격탕 30년: 현대 중국 탄생의 드라마와 역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스프 리플렉스
김강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공 장기는 극히 일부만 법 테두리 내에서 실시된다. 가까운 미래 인공 장기가 더 발전되고 법적 규제도 완화된다면 인간의 탐욕이 수명 연장에 과연 초연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근미래의 과학기술 발전과 인간의 탐욕의 실상을 통해 함수관계를 조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스프 리플렉스
김강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를 맞았다. 얼마 전 열풍을 일으킨 노래 〈백세 인생〉은 "육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간다고 전해라"라고 시작한다. 이 노래 원래 제목은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말하리〉인데 여러 번 재편곡과 개사 과정을 거치고 2013년 〈백세인생〉이라는 제목이 되었다. 이후 '백세인생'은 입소문을 타고 고속도로에서 많이 찾는 노래 1위로 올라서고 짤방까지 더해져 젊은 층으로까지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노래가 리바이벌돼 큰 인기를 끈 것은 우리의 '100세 시대'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가요계 평가다. 우리 국민 평균 수명이 '100세 시대'로 불릴 만큼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2009년 출생아 기준으로 80.5세다. 40년 전 보다 평균 수명이 약 18년 늘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100세 이상 인구가 머지않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공식 선언할 무렵이었으니 추정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열풍을 가져 온 이 노래는 리바이벌된 지 10년을 버티지 못했다. 유행가라는 게 원래 일시적이긴 하지만 당시 열풍으로 미루어본다면 너무 일찍 '100세 시대'가 수면 밑으로 가라앚은 듯하다. 아직 ‘인생 100년’의 시대가 변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수명 100년은 건강하지 못하다면 '행복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자각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100세를 넘긴 사람이 많다. 불과 40~50년 전에는 꿈의 숫자였지만 현실화된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100세 시대’라 해도 모두가 90세, 100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90세, 100세를 맞이한다 해도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병간호를 받으면서 병석에 누워 지내기만 하거나, 치매가 되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죽을 때 만족하며 죽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그 점을 생각해보면 수명 연장이 마냥 즐겁고 행복할 일만은 아니라는 자각심이 든다.

 


 

이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초고령 사회를 배경으로 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 이상의 삶을 누리게 된 미래, 노인들의 세상이 온다.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노인들의 소비만으로도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권력과 부는 죽지 않는 자들의 것, 손에 쥔 것을 내어놓지 않는 그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식들. 노인이 자식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너도 언젠가 늙을 것 아니냐?”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 노인이 되기 위한 시간 혹은 누군가의 죽음. 김강 저자가 쓴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우리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담고 있다. 노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소득만으로 먹고살고, 출시되는 신제품은 온통 노인을 위한 것뿐이다. 새로운 정책들은 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급급하다. 그 와중에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20, 30대는 작중의 남매인 안나와 노마처럼 재벌의 마이걸이 되거나 노인들에게 나라에서 지급하는 로봇을 수리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노인이 되기까지 남은 30~40년이 까마득하다. 그런 노마에게 한 노인이 말한다. "자네도 언젠간 늙을 거 아냐?"

필립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아버지 만식의 그늘에 가려 오십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경영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인호는 이십여 년째 아버지의 지역구 영산시를 관리하며 정계 진출을 꿈처럼 간직하고만 있다. 어느 날, 만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의문투성이인 죽음을 뒤로 한 채 필립과 인호는 각자의 야망을 위한 계획에 시동을 건다.

김강 작가는 장편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에서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미래 사회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 노인들만 대상으로 사업을 해도 최대 재벌이 될 수 있는 기업인, 노인들을 위한 로봇을 수리하고, 수명 연장을 위한 인공 장기 밀매를 벌이는 청년들이 노인만을 위한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 속에서 노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소득만으로 먹고살고, 출시되는 신제품은 온통 노인을 위한 것뿐이다. 새로운 정책들은 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급급하다. 그 와중에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20, 30대는 작중의 남매인 안나와 노마처럼 재벌의 마이걸이 되거나 노인들에게 나라에서 지급하는 로봇을 수리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노인이 되기까지 남은 30~40년이 까마득하다. 그런 노마에게 한 노인이 말한다. "자네도 언젠간 늙을 거 아냐?" 노마는 노인들을 가리켜 "신 같다"라며 한탄한다. 노마는 여동생 안나가 만식의 아이를 가졌을 때, 인생의 큰 비극이 닥쳤다고 생각하고 분노하지만 앞으로 노마에게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다. 저자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사회의 거대한 힘을 다뤄왔고, 이 작품에서도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살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필립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아버지 만식의 그늘에 가려 오십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경영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만식은 늘 주변인들에게 '아직 경험이 부족한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인호는 이십여 년째 아버지 영권의 지역구 영산시를 관리하며 정계 진출을 꿈처럼 간직하고만 있다. 인호가 정계에 진출하겠다고 영권에게 말하자, 영권은 아들에게 평생 정계 진출을 하지 못하도록 못박는다. 어느 날, 만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권은 자신의 후원자가 당한 의문투성이인 죽음을 발판 삼아 정치적인 퍼포먼스에 열을 올린다. 필립과 인호는 노인 세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필립에게 안나의 일을 따지러 온 노마는 필립이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필립은 노마에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노마는 필립이 안나와 안나의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이들은 노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땅히 내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힌다. 만식과 영권, 필립과 인호, 노마와 안나가 모든 것을 불태워 부딪히고 난 후, 이들에게는 만식이 남긴 한 마디만 남는다.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2025년에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한다. 소설 속 영산시와 같은 지방 도시는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저자의 소설은 이러한 현실을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 겪어보는 사회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소설에는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의 단서가 숨겨져 있다.

저자는 책의 뒷 부분에서 「작가의 말-묻습니다」를 통해 초고령화 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들이 묻는 질문을 대신 하고 있다. 소설의 초고를 쓴 지 5년 만에 세상에 내놨다고 말한다. 저자 자신이 소설에서 하려는 말에 대해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용감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물을 용기. 이제야 소설로 출간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로서는 이 시점에 내놓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란 예상이다. 저자는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꽤 곁에 있기 때문"에 출간했다고 말한다. 지금이나 5년 전이나 세상이 바뀌지 않은 듯,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듯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때문이란 속내를 드러낸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일까? 따지지 말고,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냥 좀 따라오라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밝힌다. "하고 싶은 말을 어찌 다 하고 살아"라는 사람에게는 저자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말은 해봐야지, 물어보기는 해야지. 듣는 이 없으면 크게 소리를 내어보기도 해야지. 답하는 이 없으면 어떻게든 남겨 기억이라도 해야지."

 


 

이 소설은 여덟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마이걸」, 「올림퍼스의 노예들」, 「그 길밖엔 없어」,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하는 겁니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공 장기에 관한 시술자와 치료자, 그리고 혜택자의 관계를 유대 관계를 보여준다. 돈 때문에 시술하고 치료를 해주는 의사(이 교수), 돈으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재벌급 인물(만식)이 등장한다.

 

“갑자기 기계가 멈추고 그런 일은 없겠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이라 신경 쓰이는데.”

코디네이터는 인공 폐를 개발한 회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었다.

“그럼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환자가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일이 생겨도 인공 폐는 혼자 숨 쉬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지독한 노인네야. 그렇지 않아? 저 밑에서 일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이 교수는 만식의 몸에서 작동하고 있을 인공 심장과 인공 간, 인공 폐 그리고 인공 신장을 떠올렸다. 쉽게 죽지는 않겠어. 이 교수는 혼잣말을 했다.(p.10~11)

 


 

가까운 미래 소설 주요 등장 인물들로 꽉 찬 세상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면 지옥처럼 살벌하다. 인간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가장 중요 주제이지만 그 욕망을 빌붙어 사는 사람들의 행태도 볼 만하다. 어느 정치인은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정권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노인들만 상대하는 것 만으로도 재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기업인도 있는 세상이다. 또 노인들을 위한 로봇을 개발하고, 수명 연장을 위한 인공 장기 밀매를 벌이는 청년들이 노인만을 위한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면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면 지옥이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노인 환자들을 위한 폐·간·심장 등 인공 장기들도 자유로이 쓰여지는 세상이 오더라도 사회의 근본 정신이 변화하지 않는 한 기술의 발전이 지옥행 급행 열차로 변하리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이 인간의 욕망을 뺀다면 202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지옥'이란 단어가 저절로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것은 이미 책을 읽을 때부터 독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단어이다. 이에 따라 20~30대 청년들은 부모님 세대가 수명이 40년씩 늘어난다면...

이 소설은 세대간 차이와 의견이 다름을 경제적인 문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고도 부자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현재 닥친 문제에 대해 슬기롭게 이끌어가지 못할 경우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될지 생각해보는 소설로서의 구성은 저자의 소설적 재능이 한껏 발휘된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 그렇게 나아가는 방향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다면 짚어내 보여주는 것이 소설 쓰는 전업 작가로서의 보람이라면 저자는 그 직업에 매우 충실한 능력 있는 분이다.

 


 

만식은 영원히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그것도 건강하게. 그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챙겼고 수명 연장과 관계된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만식이 기댔던 것은 의학 기술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신소재를 앞세운 인공 장기 업체들은 고가의 상품을 사용할 수 있는 돈 많고 절실한 소비자가 필요했고 만식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술을 원했다. 새로운 기술과 소재들은 만식이 지불한 금액만큼 효과가 있었다. 만식이 여든이 되었을 때 만식의 심장과 만식의 콩팥 중 하나와 만식의 간, 그리고 관절의 일부는 만식이 태어날 때 가지고 왔던 그것들이 아니었다.(p.36~37)

 

영산시는 노인 복지에 있어서는 항상 다른 지역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노인들의 의료보험 본인 부담금을 지자체가 모두 부담하는 정책, 노인 전용 급식 식당의 개설, 노인용품 바우처 제도 등의 정책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었다. (중략) 영산시는 노년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노인들은 새업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다녔다.(p.190~191)

 

저자 : 김강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7년 단편 소설 「우리 아빠」로 21회 심훈 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2020, 아시아, 아르코 문학나눔 권장도서), 『소비노동조합』(2021, 아시아), 앤솔러지 『여행시절』(2021, 아시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과 어둠의 향연
검은 비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역경을 역경으로만 대하면 그 너머에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삶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미래로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절대 중간에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의무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