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슬퍼할 것 - 그만 잊으라는 말 대신 꼭 듣고 싶은 한마디
하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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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뇌는 이성적 판단을 하는 부분과 감정을 느끼는 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애오욕이라는 '감정'을 모두 느끼며 살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과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즐겁고 기쁜 감정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이고, 반대로 슬프거나 분노를 많이 느끼는 삶은 불행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 다르듯 뇌 안의 '감정뇌'도 똑같은 상황을 보고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감정의 폭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기에 굳이 감정의 크기를 따질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런데도 어떤 일을 닥쳤을 때 우리는 가장 큰 슬픔을 느끼느냐는 여론 조사 결과가 한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 설문조사는 슬픔을 느낄 때 인간은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어느 학자의 논문에 따른 것이라고 미리 밝히고 조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단연 압도적 1위는 '배우자의 죽음'이었다.

이는 사람의 삶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일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뿐만 아니라 조사결과 2, 3위 역시 가족이었다. 자식의 죽음과 부모님의 죽음이 각각 뒤를 이었다. 굳이 조사하지 않더라도 이 결과는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좀더 깊게 생각해보면 배우자의 죽음보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더 슬퍼하고 주위 사람마저 더 공감과 위로가 많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자 입장에서 직접 한 번도 느껴보지 맞이하지 못한 상황이라 그 슬픔의 크기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막연히 듣고, 책에서 읽은 것만으로는 슬픔의 크기를 상상하기에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배우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법이 서투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소리내어 울거나 그냥 앉아만 있어도 가서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유교를 통해 관습처럼 이어져온 부모님에 대한 '효'에 관한 문제여서 우리들에게 대체로 익숙하다. 그래서 부모님의 죽음으로 가장 슬퍼할 사람은 당연히 자녀일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배우자의 죽음에 맞닥뜨린 당사자가 엄청난 슬픔과 스트레스 상태에 있겠지만 어떻게 위로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친구의 죽음에 부닥친다 해도 그 배우자를 위로하는 것에 익숙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자의 죽음이든 부모의 죽음이든 슬픔의 크기에 관계 없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고, 슬픔인 것은 분명하다. 누가 죽어야 가장 크게 우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 『충분히 슬퍼할 것』은 저자 입장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너무 큰일이라 슬퍼하기는커녕 슬픈 마음인지조차 자신이 못 느낄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부모님의 죽음을 부여잡고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부모에 대한 도리는 아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유교적 관습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대처하는 방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조문을 가거나 위로의 말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수월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이유가 슬픔의 크기가 얼마나 컸기에 그럴까 하는 점에서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는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책 『충분히 슬퍼할 것』은 표현하지 못한 슬픔을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당사자가 그것을 지켜본 우리에게 먼저 겪은 이가 전하는 깊은 공감과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는 책이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단숨에 입소문을 타며 독립출판 독자들의 호평이 쏟아졌던 그림에세이가 올컬러 버전으로 정식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슬픔을 추스르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희망을 선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상실 이후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슬픔을 응축시키고 용해한 후 독자들에게 미리 삶의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쓰인 책이다. 책 속의 내용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이고 내용도 서로 다르지만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 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말없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림의 행동이나 제스처만 보아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독자들에게는 기억이 있다. 조금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머니의 자식 사랑, 희생적인 삶이 없었다면 자신의 존재마저 없었을 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지탱해 주던 존재를 잃는다는 건, 두 발을 딛고 서 있던 땅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과도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소의 나다움은 사라지고 자책과 후회 속에 상처를 곱씹는 동안 일상은 서서히 폐허가 된다고도 말한다.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한 더는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비탄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세이는 떠나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 충분히 슬퍼하기로 한 사람의 이야기다. 저자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안겨 준 크나큰 슬픔을 소화해 내고, 천천히 일상을 회복할 힘을 기르고, 마침내 오롯이 홀로서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히 펼쳐 보인다. 감정을 절제한 담담한 문체와 귀여운 그림체가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에 어느 순간 몰입해 읽게 된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 삶에서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에 하나뿐인 ‘의미 있는 타인’을 잃고 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저자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상실을 겪었든,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갖지 못하면 삶의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가기 어렵다. 가슴속 상처를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한 이에게 그만 잊으라고, 바쁘게 살다 보면 괜찮아진다고, 섣불리 재촉하는 말을 해선 안 되는 이유다. 저자는 아무에게나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그림에세이로 엮은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밝힌다. 현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상실의 아픔을 명징하게 마주하며, 애도의 끝에서 무르익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기에 “충분히 슬퍼한 후 다시 살아가자”는 다짐이 묵직한 감동을 준다.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싶은 독자,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이별을 감당해야 했던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아파할 수밖에 없었던 독자,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독자, 그들 곁에서 위로할 방법을 찾는 독자,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필요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차분히 어루만지는 책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실의 아픔과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기까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책에 따르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엄마가 사라졌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 버렸다. 슬픔에 표류한 채 그냥 흘러가는 삶이었다. 엄마는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법, 인생을 즐기는 법 등 살아나가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슬픔을 마주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처음 겪는 일이기에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언제까지 슬퍼해도 될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오랜 시간 방황했다. 바쁘게 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한동안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애써 억누른 감정은 이따금 불쑥 튀어나와 또다시 일상을 뒤집어놓곤 했다.

저자는 그러다 문득, 더 늦기 전에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사소하고 행복하고 괴로웠던 순간까지 모두 다, 글로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다독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는 동안 슬픔은 서서히 물러나고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혼자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다시 일어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온몸으로 부딪히며 겪어 낸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는 게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떠나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내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10년에 걸친 긴 애도의 끝에서 갈무리한 그림에세이 『충분히 슬퍼할 것』은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출판사 측의 소개글은 이 책의 성격에 대해 깔끔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보내며 살아간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는 법.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다양한 애도 반응을 긍정하고, 상실의 슬픔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은 인생을 건강하게 살아내기 위한 치유와 성장의 핵심이다. 이 책은 표현하지 못한 슬픔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처를 마주하고 단계적 애도를 계속해 나갈 때 조금씩 단단해지는 마음의 변화를 보여 준다. 사랑받았던 기억은 절망의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 내는 보호막이 되고, 심리상담가였던 엄마가 생전에 들려준 위로의 말들은 혼자 살아나가면서 힘들 때마다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된다. 감정의 물꼬가 터지도록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내며 표현하는 법,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마음의 구멍을 채워 줄 소소한 행복을 새롭게 발견해 가는 과정 등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다양한 방법들도 이 책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잠깐 같이 바람 쐬고 올래?”

“크게 소리 지르면 속이 후련해져.”

“내일부터 다시 힘내는 거야.”

내가 기운 없어 보이는 날, 엄마가 해 주던 말들. 그렇게 당신이 사랑했던 나를 사랑해 보기로 했다.

 


 

이 책의 출간에 부쳐 세 분의 작가들이 추천사를 썼다. 책 출간은 아마도 작가들의 공감을 사고 또 다시 삶에의 용기를 갖고 일어설 때까지의 과정에도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그들의 추천사 중 일부를 발췌해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일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우리는 아직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남 앞에서 슬픔을 표현하면 뭔가 큰일이라도 날 듯이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 이 눈물겨운 책은 수줍게 속삭인다. 더 많이 슬퍼해도 괜찮아요. 더 오래, 더 깊이 슬퍼해도 괜찮습니다. 슬픔은 마침내 당신을 더욱 당신답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표현하지 못한 슬픔이 우리 마음을 안으로부터 찌르기 전에 글과 그림과 노래와 춤과 요리, 그 모든 적극적인 표현의 몸짓으로 슬픔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심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침내 ‘참 나’와 만나게 될 테니까요. 슬픔을 제대로 표현할수록, 우리는 그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슬픔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더 깊고 아름다운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요." - 정여울(『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저자)

 

"책장을 넘기는 동안, 한 슬픈 사람의 오래달리기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더러 그가 넘어질 때면 숨죽여 응원하는 마음이 되곤 했는데 이상하지, 그러면서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사랑받은 기억이 끝내 그를 일으킬 것이므로. 어떤 사랑 앞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 그 사랑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 이것은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용기와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슬펐던 사람이 다음에 올 슬픈 사람에게 남기는 긴 엽서이기도 하다. 충분히 슬퍼할 것. 그리고 다시 살아갈 것. 이 삶은 이제 떠난 사람이 남긴 사랑의 증명이기도 하므로." - 김신지(『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저자)

 


 

"양념이 겉도는 깍두기, 오래된 노래방 녹음테이프, 토끼풀 반지 같은 소소한 것을 통해 저자는 엄마와 함께한 순간들을 구석구석 추억한다.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그려진 모녀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을 미소 지으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눈가가 시큰해진다. 그는 혼자 남겨졌다. 큰 슬픔 앞에 용기 있게 마주 선 그가 자기 자신과 만나고,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혼자 힘으로 어려울 때는 주변에서 건네는 손길을 붙잡으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감동을 준다. 슬픔을 딛고 비슷한 슬픔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따뜻한 공감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충분히 슬퍼할 것”이라고 소리 내어 말해 주어서, 애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어서 고맙다. 슬픔에 표류하지 않고 당차게 헤엄쳐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안도의 숨을 내쉴 것 같다. 넘어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힘이기에.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은 결국 내 곁에 있는 것이기에." - 엄유진(『어디로 가세요 펀자이씨?』,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 저자)

 

저자 : 하리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어디서든 상상의 세계로 떠나곤 했다. 사회에 나와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내가 좋아서 그리던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다람쥐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상툰을 연재하고 있다. 이 책을 마무리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된다. 오래 방황하는 동안 펜을 들고 그리다, 멈추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미 구멍 난 가슴에는 어떤 위로도 와닿지 않겠지만, 이런 길도 있다고 전하고 싶다. 그때의 나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냥 흘러가고 있을 누군가의 삶에 이 이야기가 닿았으면 한다.

인스타그램 @ha_ri_ha_ri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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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네 미국집 - 평범한 한국 엄마의 미국집 인테리어&살림법
스마일 엘리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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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미국 문화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다. 우리와 정치·경제 체제가 같고, 대한민국 정부와는 일제 패망에 따른 해방부터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민주주의를 함께 지키고 유지하는 데 협력자 관계이기도 하다. 특히 군사적으로는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남한에 편에서 북한 침략에 맞서 싸웠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6·25 이후에는 우리나라는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또 우리가 살아갈 길이기도 했다. 유무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밑거름을 해주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도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미국의 정신을 배웠고 심지어는 그들의 하층 문화도 우리나라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문화는 배울 점이 많았다. 그들이 내세우는 '개척정신'과 '청렴결백 추구'의 청교도 정신은 이제 기지개를 켜는 대한민국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앞선 과학기술이나 학문 등은 미국을 따라가기 바빴다.

독자도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과 똑같이 배웠기에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았고, 선진 문화의 대표격으로 생각했다. 우리와는 다른 큰 집, 큰 땅, 큰 자동차 등은 지형적 영향이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세계 최부국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청렴·결백의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고 특별히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의 겉모습과 우리가 우리 나라 안에서 보고 배우고 생각했던 이미지는 조금씩 부정적 이미지가 가해지기 시작한 것은 한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 책 『엘리네 미국집』은 저자 스마일 엘리가 한국인이지만 남편의 직장 때문에 미국으로 이사간 후 살던 집에 대한 인테리어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미국의 일반 가정집 인테리어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가장 최근의 인테리어 경향을 저자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글과 사진을 곁들여 만들어낸 책이다. 영화나 미국 드라마를 통해 미국의 일반 가정집을 자주 접했지만 인테리어까지 짚어낼 정도로 독자의 눈이 예리하지 못해 이 책은 더 흥미를 갖게 한다.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가정집 인테리어 트렌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도 겹쳤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2023년 인테리어 키워드로 ‘컴포트 코어(Comfortcore)’를 꼽았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안정’과 ‘편안함’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인테리어도 유행을 넘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공간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는 것. 이에 따라 이 책 『엘리네 미국집』은 미국집의 독특한 구조와 공간 활용 및 시즌별 장식을 통해 새로운 인테리어 인사이트를 주기 위해 펴낸 점이라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좁은 평수의 집이라도 공간을 넓고 색다르게 활용하여 더 안락한 공간으로 꾸밀 수 있을 것으로 저자는 기대한다. 또 시즌별 장식을 바꾸는 미국집의 특성을 살려, 대대적인 공사보다는 간단한 인테리어 팁과 소품 변화, 리폼 등을 통해 집의 분위기를 쉽고 편하게 바꿀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고 덧붙인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한국인의 검소와 미적 감각도 느낄 수 있어 미국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불어 그들의 최근의 삶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는 부가 지식을 선사해준다. 저자는 또 살림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집을 치우기 쉽게 만드는 살림 체크리스트, 수납함 라벨링 등 시스템 살림법과 팁을 함께 수록해 다양한 독자층을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예쁜 집'보다는 '살고 싶은 집'을, '꾸민 집'보다는 '살기 편안한 집'을 추구하는 저자의 집 인테리어 스타일이 책 곳곳에 배어 있어 독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씩 배워갈 만하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살림 또한 인테리어의 일부분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살림 환경과 루틴을 만드는 것이 아름다운 집을 온전히 누리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저자의 신념이 인테리어 책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편안한 기분이 마음마저 느긋하고 여유 있게 해준다.

이 책은 「평범한 한국 엄마의 미국집 인테리어&살림법」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책을 펼치려면 화려하거나 예쁘거나 아름다운 집 인테리어를 기대하지 말라는 엄포(?)처럼 느껴지는 것은 독자만의 기우일까? 모두 8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역시 집의 구조보다는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테리어 책이 대부분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은 다른 책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디테일한 부분보다는 용도상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디테일에 대한 부분이나 설명은 뒷 부분에 따로 묶어 처리했다. 이 부분은 필요한 사람만 읽어도 될 듯하다. 집 인테리어를 다룬 책을 보는 독자들은 대부분 설레는 마음이 있다. 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인테리어를 자신의 취향대로 하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직접 인테리어를 해볼 생각으로 책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다. 인테리어 책에서 예쁘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 기대했기 때문일 터다. 이 책은 화려한 기대감을 전혀 허락치 않는다.

 


 

거실, 침실, 주방, 욕실 등이 집의 구조를 이루고, 대부분은 이에 얼마만큼의 면적으로 배치하느냐가 주택 문화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집문화 비평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 책은 8개의 파트로 이루어졌다. 1부 「살림, 삶을 살다」, 2부 「집, 우리를 닮다」, 3부 「거실」, 4부 「주방」, 5부 「욕실」, 6부 「침실과 아이방」, 7부 「현관 & 포치」, 8부 「특별한 날」 등이다. 저자는 퇴근 후 지친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보송보송한 욕실, 계절마다 바뀌는 나만의 홈카페, 주말 저녁 따뜻한 벽난로 옆에 배를 깔고 누워 감상하는 영화 한 편, 시즌별 장식과 테이블 스타일링으로 즐기는 홈파티 등을 염두에 두고 우리집 인테리어를 상상할 것을 주문한다. 무엇보다 편안한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첫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루게 된 한국 엄마 스마일 엘리는 한국과 다른 구조와 환경의 미국집에 살면서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얻은 현실적이고 손쉬운 인테리어 법칙과 팁을 이 책에 담았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한국의 아파트나 주택에도 활용하고 응용해 볼 수 있는 인테리어 방법들을 통해 새로운 인테리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첫집의 실패 경험에서 두 번째 집은 좀더 나은 집으로 꾸며나가는 이야기를 하나씩 차분하게 밝혀가면서 독자들에게 살림과 인테리어를 한데 묶어 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의 호응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좁은 평수의 집이 많은 한국의 주거 특성을 감안한 듯 평수와 인테리어와의 관계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용도별 뒷 부분에 시즌별로 장식을 바꾸는 미국식 인테리어의 특성을 따로 묶어낸 이유이다. 대대적인 공사보다는 간단한 인테리어 팁과 소품 변화, 리폼 등을 이용해 집의 분위기를 쉽고 편하게 바꿀 수 있는 비결은 역시 꾸준한 노력과 관심이라는 점이 다른 인테리어 책과 차별화된다. 공간의 특성을 살리고 그 공간을 돋보이게 해주는 미국식 인테리어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저자는 특히 실패에서 가장 큰 지혜를 얻는다는 미국식 격언에 맞게 프롤로그에 실패담을 썼다. 독자 호응도를 높이기에 알맞은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넘쳐 나는 예쁜 인테리어 사진과 집 리모델링 사진을 보며 따라도 해보았습니다. 가구와 조명과 소품을 똑같이 따라 샀는데도 왜인지 그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인테리어 센스가 없는 제 탓도 있었을 테지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떠올려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 보자면 문제는 집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테리어의 시작점조차 몰랐으니까요. 기초 화장을 얼마나 공들여 했느냐에 따라 피부 표현과 발색이 달라지고, 똑같은 아이새도, 블러시, 립스틱을 쓴다고 해도 모두 똑같은 얼굴, 똑같은 분위기를 낼 수 없는 것처럼 내 집의 공간과 색을 이해하고, 모든 공간의 정리 정돈이 된 후에 인테리어라는 메이크업을 해주어야 내 집이 빛이 나고 사랑스러운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즉 꾸미기 전에 정리 정돈이 먼저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테리어의 시작은 정리 정돈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공간이 아름다워지는 아이디어와 함께 각 공간의 정리 정돈의 방법과 효율적이고도 쉽게 그것을 유지하는 살림 비법이 담겨 있습니다. 집은 저마다 다르지만, 각자의 공간에 맞게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되도록 공간별로 정리했답니다. 정리 정돈이 끝났다면 이젠 내 집에 예쁘게 메이크업해 줄 차례입니다. 인테리어 용품들을 구입하기 전에 알아 두면 좋을 소품 배치법, 색상 매치법, 큰돈 들이지 않고 직접 만들거나 기존의 소품을 재활용해서 분위기에 맞는 소품을 만드는 DIY 방법 등 제가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부하고 터득한 실전 인테리어 공식을 정리했습니다. 절대적 공식은 아니지만 인테리어 새내기에게는 하나씩 대입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기본 공식이 되어줄 거예요. 또 사진과 똑같은 제품, 또는 비슷한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제품 검색어도 수록했습니다." 경험이 쌓이고, 노력이 더해지면 전문가 못지 않은 인테리어 가능 수준이 된다는 점을 이웃집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저자는 독자에게 알려준다.

 


 

이 책은 거실, 주방, 욕실, 침실 등 4개의 공간을 별도로 다룬다.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용도별 집의 구조를 말한다. 용도별 인테리어 비법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 책은 앞의 세 파트를 살림과 집, 인테리어의 개념, 우리 삶과 인테리어 분위기 등의 개념 정리 정립에 중점을 두었다. 인테리어라는 구체적 방법도 추상적 개념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야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모든 모습과 학문이 그렇다. 1부 「살림, 삶을 살다」를 예로 들어본다. 살림과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생각해보면 모두 어원이 같은 듯하다. 이에 저자의 설명을 더해보면 확연히 우리 삶과 살림의 관계는 드러난다.

"살림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티는 많이 나지 않지만 매일 조금씩 집을 돌보는 일, 가끔을 지칠 때도 있지만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잘 정리 정돈된 깨끗한 집을 볼 때,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먹고, 다음날을 위한 에너지를 재충전할 때, 살림은 내 집의 안락함을 매일 조금씩 가꿔가는 것이라는 실감을 한다. 잘 해내기 위해 하루하루 힘을 쏟는다. 그리고 살림으로 인해 다시 힘을 얻는다."

 

저자 : 스마일 엘리

 

“스마일 엘리의 일상 시트콤”이라는 블로그에 미국 현지의 생활과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미국집 인테리어, 살림 노하우와 잘 안 먹는 아이들을 위한 미국 유아식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저서로는 『엘리네 미국 유아식』이 있으며, 뉴욕?사우스캐롤라이나?노스캐롤라이나에 발행되는 한인 신문 「Korean Life」에 미국 생활기를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는 중이다. 미국에 거주하며 안 먹는 아이 때문에 고민하다가 밥과 국, 반찬 중심의 한식 유아식에서 생각을 전환해 미국 유아식을 시도한 아이 둘의 엄마. 미국 유아식을 먹인 이후 음식 거부를 하던 아이의 식습관이 기적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같은 고민을 가진 엄마들에게 경험을 공유하고자 이 책을 썼다. 그녀의 노하우와 열정이 집약된 미국 유아식 레시피가 안 먹는 아이를 둔 엄마들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아이의 식사를 준비하는 부담과 스트레스를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현재 3살, 6살 에너지 넘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스마일 엘리의 일상 시트콤”이라는 블로그에 미국 현지의 생활과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아이들을 위한 유아식 레시피와 잘 먹이는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뉴욕,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에 발행되는 한인 신문 [Korean Life]에 ‘미국 생활기’를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는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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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여자들 - 최고의 쌍년을 찾아라
멜라니 블레이크 지음, 이규범 외 옮김 / 프로방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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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는 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시청자의 가장 사랑받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TV는 '안방극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TV방송국 개국 때부터 드라마는 역사를 같이 했다. 아마 뉴스와 스포츠 중계가 드라마와 함께 가장 인기를 끌던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연속극'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제작 방영됐다. TV 연속극은 매일 저녁 온 식구가 모여 앉아 한 방에서 TV를 함께 관람하던 진풍경을 연출한 주역이었다고 한다. 60년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드라마 제목이 두 개나 독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여로〉, 〈아씨〉다.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가늠이 될 정도다. 당시 미국 등 선진국의 드라마는 연속극이라는 명칭은 없었고, 대개 한 편의 영화처럼 단편만 방영했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 TV 드라마 비평가는 우리 국민의 정서(인내심) 때문에 매일 연속극이 가능했다고 분석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드라마는 TV 시대를 이끌던 큰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그 인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일일연속극보다 주말 연속극으로 인기가 조금 변화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 일일연속극은 유지되고 있다.

이 책 『무자비한 여자들』은 TV 방송국을 둘러싸고 방송국에 관계하는 사람들 사이에 욕망에 얽힌 원한, 복수 등을 그린,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막장 드라마'를 글로 쓴 듯한 느낌을 주는 스릴러 소설이다. 스릴러지만 호러는 아니고, 원한과 복수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인간의 욕망으로 얽히는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의 저자 멜라니 블레이크는 책의 시작인 「프롤로그」에서 자세히 소개된다. 서문을 작가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작가 소개로 사용되는 드문 경우의 하나인 셈이다. 이에 따르면 멜라니 블레이크의 첫 소설 『썬더 걸스(The Thunder Girls)』는 극본으로 각색되기 전에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멜라니는 정기적으로 중앙지에 칼럼을 썼고, 40시간이 넘는 신디케이션(방송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고 텔레비전 쇼 및 라디오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는 권리를 여러 텔레비전 방송국 및 라디오 방송국에 임대하는 관행) 텔레비전 방송을 공동제작했다. 그러나 멜라니는 연예계에서 ‘드라마의 여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런던에 본부를 둔 멜라니의 연예 기획사는 흥행에 성공했던 드라마의 대표 여배우들과 계약을 맺고 있으며 현재 멜라니의 고객에는 전설적인 미국 드라마 ‘다이너스티(Dynasty)’와 ‘코로네이션 스트리트’, ‘이스트 엔더스’, ‘에머데일’, ‘홀리오크’ 에 출연했던 스타들이 있다. 진정한 내부자로서 저자 멜라니는 연예계의 모든 속사정을 보아왔다. 그리고 이제 멜라니는 이 소설을 통해 그 비밀들을 파헤치고 있다.

이 책은 표제어부터 심상찮다. 번역서이니 원문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정도다. 혹시 호러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원제는 'Ruthless Women'이라고 한다. 단어뜻 그대로 '무자비한', '인정사정 없는'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제목은 직역한 셈이다. 무언가 스스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부제에 「최고의 쌍년을 찾아라」라는 문구를 버젓이 사용했다. 우리 출판문화에서는 욕설을 직접 표기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특히 생식기 표현이나 동물을 표현하는 것들은 대개 'X', 'XX', 'XX놈' 등으로 X로 표기하기도 한다. 우리식으로 이 책의 부제를 쓰려면 「최고의 XX을 찾아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대로 표기한 것을 보니 욕설로 사용되었다기보다 책의 내용 중의 문구를 그대로 옮기거나 응용한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의 작가적 역량이 탁월한 능력에 의해 '뻔한 스토리'를 흥미롭게 전개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너무 뻔한 복수극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작품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살 수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드라마 〈팔콘만〉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속극(드라마를 주마다 연속으로 이어 방송하기 때문에 연속극으로 표현한 것 같다)으로 작고 목가적인 섬에서 촬영되었다. 그러나 시청률이 떨어지자 방송국의 새 소유주인 아름답고 매혹적인 매들린 케인이 드라마를 1위로 되돌리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다. 지금 일하고 있는 작가인 파라, 39년동안 드라마의 스타였던 캐서린, 프로듀서 아만다는 모두 〈팔콘만〉이라는 드라마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던 유능하고 열정 넘치는 여성들이다. 그러나 세 소유주는 남성중심적인 방송국에서는 파라 대신, 남성 작가에게 라이브 쇼 진행의 기회를 주고, 캐서린조차 드라마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한다. 작중 인물들은 남녀간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질투와 복수심과 야심이 그들의 우정을 갈라놓을까? 아니면 더욱 결속시킬까? 이 점은 소설의 성패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독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읽어볼 것을 권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40년을 이끌어올 정도의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그동안의 인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팔콘만〉은 최고의 전성기도 있었고, 드라마로 꽤 오랜 시간을 시청자들과 함께했지만 이젠 시청률이 반토막이 난 상태다. 프로듀서 아만다, 작가 파라, 배우 캐서린 역시도 드라마와 동시에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새 소유주 케인의 남자 중용책에 따라 세 사람은 방송국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다. 회의를 거듭하면서 〈팔콘만〉을 살리기 위해 의견을 낸 결과, 상상하지도 못한 대책이 나온다. 그것은 최고의 악역 여자 캐릭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부제로 채택된 「최고의 쌍년을 찾아라」이란 슬로건이자 목표다.

 


 

이 책은 작중 인물들의 독특한 성격이 상승 작용을 한다. 저자의 글쓰기 역량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표현이 많아서 호흡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독자들은 손을 놓을 수가 없고 읽는 속도도 빨라진다. 소설에서의 외설적 표현 논란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외설 표현을 받아들이는 정도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독자로서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과연 〈팔콘만〉은 그들의 노력으로 과거의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복수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거침없는 표현, 다소 외설적인 정사 장면의 묘사 등은 이들 여성의 복수극에 맞춰져 읽기 거북하지 않다는 점이 작품의 우수성을 반증하기도 한다. 남성중용책을 내놓은 새 소유주와 방송국의 〈팔콘만〉 제작자들의 노력, 복수 심리 등이 저자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독자는 호흡이 거칠다 평온하다를 오가며 끝까지 내리 읽도록 잘 쓰인 소설이다.

이 책은 저자부터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성인 여성 서사적 작품이다. 초반부터 위기의 세 주인공은 새 소유주가 발탁하려는 남성에 밀려 커리어가 중단되어야 할 위기를 겪는다.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운 새로운 '쌍년' 캐릭터도 여성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여성 캐릭터들이 소설을 막장으로 끌고 가는 듯하지만 자신의 자리와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점에서는 서양 여성들의 적극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욕망과 분투가 우리들의 정서와 관점으로만 본다면 보통의 상식을 넘어선 것도 있긴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방송가의 이야기가 책으로도, 드라마로도 나와 여러 번 읽고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과 우리의 작품들이 다른 것 중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역시 개인적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사생활과는 완전 별도의 문제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외설적 표현이나 사생활에서 사회적 정서의 차이와 수용성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나 시청자들 대부분은 TV 프로그램의 드러난 부분(지적이고 교양 있고 열정적인 전문직)만 보고 판단되는 대로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 소설이나 드라마의 사장부터 가장 낮은 직급의 방송사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더욱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면 그들의 성격이나 이력도 모른 채 배역(드라마의 경우)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조직의 유기적 관계, 승진과 좌천, 남녀 간의 사생활이 아무런 장애 없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 작품이 왜 '19금' 소설이란 말이 나오는지에 대해 이해할 만도 하다. 이른바 사생활의 남녀 관계는 타인이 간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문화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녀 간에도 주고받는 방법이 여전히 '섹스'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받는 안타까운 느낌이다. 다만 이성간의 성이나 동성애도 표현에 거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배울 점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소설 일부 장면은 정상적이지 않은 섹스나 동성애의 사랑 이야기와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판물이라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기에 하는 말이다.

여성 서사적 작품인 만큼 이 책의 여성들은 대부분 '주도적' 성향의 사람들이다. 또 커리어 여성 특유의 자신만의 목표를 이루려는는 성취욕과 도전의식도 굉장히 높다. 게다가 목표 달성을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이는 새 소유주 매들린 케인도 마찬가지다. "난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바꾸어 주기만을 기다리면 안 되죠.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거저 얻는 겁니다." 그녀의 말보다 그런 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이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전투구식의 욕망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싸움은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고, 스스로의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결말로 이어져 책의 무게감을 더한다.

 


 

 

"서로의 몸을 몹시 흥분한 상태로 더듬고, 마침내 피부와 피부가 닿은 채로 혀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손끝을 어루만지고, 헐떡거리는 신음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을 때까지 그들은 단 하마디도 하지 않았다. 램프가 깜박거리더니 꺼졌다. 아만다는 눈을 감고 어둠에 굴복해 그를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계속해 줘." 아만다는 댄의 귀에 대고 속삭이더니 깊이 키스했다. 아만다는 댄의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두 손을 댄의 멋지고 단단한 엉덩이에 올려놓고 더 세게 밀었다. 폭죽 상자처럼 아만다는 속을 환하게 비추는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열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호흡은 거칠었고, 억제할 수 없는 흥분으로 헐떡거리며 일제히 절정으로 치달았다."(p.267)

 

저자 : 멜라니 블레이크

그녀의 첫 번째 책 The Thunder Girls는 2019년 여름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고 소설을 각색한 연극은 권위 있는 Lowry Theatre에서 신작으로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여전히 영국 텔레비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로 현재는 프로듀서, 작가 및 극작가로서 성공적으로 활동중이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MelanieBlakeUK에서 멜라니 블레이크를 팔로우하세요.

 

역자 : 이규범

N잡러, 개고양이 임상수의사 더하기 알파.

 

역자 : 손덕화

N잡러, 공무원수의사, 상담심리전문가, 유튜버&블로거(별과침묵), 옮긴책으로는 《위기와 기회사이》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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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 - 조선인들의 들숨과 날숨
송순기 지음, 간호윤 엮음 / 경진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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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은 야담집이다. 저자 송순기(1892~1927)는 일제 강점기 때 1919년에서 1927년까지 〈매일신보〉 편집기자, 논설부주임, 편집 겸 발행인을 지낸 근대적 지식인이자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유학자였다고 한다. 그가 이 야담집을 펴낸 것은 일제 강점기 신문기자 신분이었으니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다만 이 책의 원본은 『기인기사록』(奇人奇事錄)이라고 한자로 쓰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학자이자 유학을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을 잃은 슬픔과 지병인 폐질환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많은 책을 남기거나 사회 활동의 기록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야담집은 〈매일신보〉에 연재된 것을 모으고 더 첨가해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 , 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매일신보〉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조중환·이해조·이상협·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이광수(李光洙)가 데뷔작 『무정(無情)』, 『개척자(開拓者)』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후로는, 민족지와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은 이처럼 저자 송순기가 한자로 쓴 『奇人奇事錄』을 간호윤(簡鎬允)이 편역한 한글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당시 초간본 발행 때는 상·하 2권으로, 현토식(懸吐式) 한문으로 편찬한 신문연재구활자본야담집(新聞連載舊活字本野談集)을 텍스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신문연재구활자본야담집에는 상·하권 107화가 실려 있다고 한다. 상권(1921)은 51화 203쪽, 하권(1923)은 56화 195쪽이다. 당시 출판사는 〈文昌社〉이다. 이에 따르면 「서(序)」는 녹동(綠東) 최연택(崔演澤)이 썼다. 1910~1920년대는 우리 야담사에 꽤 의미 있는 공간이다. 문학사 속에서 필사와 식자의 여기라는 척박한 토양에 겨우 명맥을 잇던 야담이, 잠시나마 활자본 야담집의 간행으로 독서 대중화를 꾀했던 작품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인기사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이 시기 야담집의 중심에 놓인다고도 한다. 더욱이 시대를 고뇌하였던 야담작가 송순기는 『기인기사록』에 야담의 순기능인 ‘재미’와 ‘시대의 진정성’을 함께 녹여냈다는 평가다.

이 야담집의 특징에 하나 더할 것이 있다면 신문 연재이기에 글자 수에 따른 화소의 전략적 배려 속에 구조화된 야담집이란 점이다. 『기인기사록』은 신문연재야담집이기에 지면 관계상 글자 수를 고려하였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기인기사록』은 모든 작품이 대략 1,700자 내외로 한 화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작가가 다른 야담집에서 단순하게 작품을 발췌, 수록할 수 없다는 점과 대충대충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준다.

 


 

당시 책 발간 소식이자 광고문안에 "널리 전에 들은 이야기를 채록하고 또 여러 대가의 잡설을 수집하여 혹은 불필요한 글자나 글귀 따위를 지워 버리고 혹은 덧붙여서 자세히 설명하며 혹은 양쪽의 좋은 점을 골라 뽑아 알맞게 조화시켜서 한 편을 만들고 이름을 『기인기사록』이라 하였으니 이 책은 단지 기이한 일과 기이한 이야기만이 아니다."라는 것이 『기인기사록』의 요지인 셈이다. 그러함에도 이 야담집은 그동안 낙장된 ‘상권’으로 미루어 ‘하권’이 있음을 추정할 뿐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다가, 얼마 전 『기인기사록』(상·하)을 남윤수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그 뒤 남윤수 교수는 상권을 영인하였으며, 이윤석·정명기 교수에 의해 상권의 체계가 분석되어 학계에 소개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의 내용은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과 의리를 담은 이야기(1화, 2화, 4화), 남녀의 인연담을 담은 이야기(3화, 7화, 9화, 13화, 14화, 19화, 22화, 27화),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와 운명을 담은 이야기(5화, 15화, 23화, 24화), 충성과 절개 귀신과 대결을 담은 이야기(8화, 21화),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를 담은 이야기(10화, 11화, 12화, 20화), 스승과 제자의 배움을 담은 이야기(16화), 뜻을 펴지 못한 죄절담을 담은 이야기(17화, 18화, 26화), 뛰어난 여인들의 시재를 담은 이야기(25화) 등이다. 모두 우리네 삶에서 일어날 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 송순기의 요절로 그의 문학 또한 그만큼으로 멈췄지만 문학세계가 결코 녹록치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편역자 간호윤은 말한다. 간호윤은 또 1920년대 지식인 송순기의 대사회적 글쓰기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전방위적 글쓰기’라고 평가한다. 전방위적 글쓰기라 함은 기자로서 기사뿐만 아니라 야담, 소설, 한시, 논설, 기행문, 전(傳) 등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했기 때문이다. 기자 출신이니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고 독자 역시 생각한다. 그 중 이 책은 『기인기사록』 상(51화)을 중심으로 1차 번역을 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가치를 줄 만한 작품 27편을 선별하여 대중에 맞게 풀어 엮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간본 서문을 쓴 최연택은 "비록 좋은 술이 있으나 맛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옥덩이가 있더라도 다듬지 않으면 그것이 보배임을 알지 못한다"는 속담을 들어 송순기의 『기인기사록』 출간의 의의를 칭송했으며, 문학사적 위치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이어 이 책의 성격과 읽고 배울 것도 많은 내용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 어떤 이가 이러한 것을 수집하여 간행하려는 사람이 있지만도 대부분 그릇되었고 또 없어져 소략하여 그 전체를 알기 어려우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송물재(저자 송순기의 필명 勿齋) 군은 이 시대의 역사가이다. 송 군은 널리 들어 기억을 잘하고 독실하게 학문을 닦아 지혜가 많은 것이 정평이 나 있다. 이 송 군이 신문 지상에 집필하여 이로써 우리나라의 기이한 사람과 기이한 일을 천하에 알리려고 하였다. (중략) 그중에는 남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고 의로움에 감동한 일이 제법 많으니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치고 모범이 될 만하다."

 


 

편역자 간호윤은 편역한 이유와 의의를 책 서두에 부제로 사용된 「조선인의 들숨과 날숨」을 지어낸 분이고 책의 서두에 「들숨소리 하나」, 「들숨소리 둘」로 나눠 이 책의 발간 과정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기인기사'라. 검은 먹대로라면 맨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란 뜻이다. 허나 글줄을 따라잡다보면 '백문선이 헛문서' 같은 글이 아님을 안다.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로되, 삶의 꼼수와 기술을 터득한 축들이 여봐란 듯이 세상을 휘젓는 꾀부림 이야기가 아니요, 잇속을 얻어 부를 몸에 두르고, 권세를 얻어 머리꼭지에 금관자를 붙이고 '물렀거라' 외치는 권마성 소리만도 아니다. 조금만 살피면 깔깔대며 주고받는 그저 우리네 이웃 사람들의 엇구수한 삶의 소리이다"고 글의 성격을 밝힌다.

그는 또 "야담은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탬이 되려는 심결에서 나왔다. 이 책 속에는 재주놀음 하는 이, 풍 치는 이, 바른 맘결을 가진 이들이 나와 저러한 세상을 조롱하기도, 혼내기도, 생글 웃어넘기기도 한다. 때로는 적당히 허구도 섞어작 곁들였지만, 그렇다고 온통 '스님 얼레빗질'하는 흰소리만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여기엔 세상을 꼬느는 꼬장함도, 저기엔 고운 마음결로 평생을 눈물로 산 이들의 삶도, 땀땀이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때론 예리한 붓끝으로 사정없이 세상을 벼리고 불의를 산골하여, 문자의 표본실에 안치해둘 논객의 글발보다도 나은 영채 도는 이야기도 만난다"고 설명한다. 세상에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직접 채록해 저자의 글솜씨로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또 그 내용으로는 우리 이웃들의 평범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어 마음결 고운 우리의 인심을 설명하기도 하고, 타인의 삶의 도움이 될 일들은 언제나 서슴없이 앞장서 해주는 심성 고운 우리들의 심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간호윤은 「들숨소리 둘」에서 이 야담을 초승달에 비유한다. "야담은 우리네 부대끼는 삶의 실개천에서 건져 올린 초승달이다. 초승달은 음력 초사흗날 저녁에 서쪽 하늘에 낮게 뜨는 눈썹 모양의 달이다. '초승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 한다. 어쩌다 산머리에 낫 같은 초승달이 걸린들 아무나 보는 게 아니다. 건강하게 하루 삶을 보내고 고개를 들 줄 알아야만 우련한 저 초승달을 본다. 초승달이 앞서야 반짝이는 저녁별도 총총 나온다. 그래 별은 누구나 보지만, 초승달은 누구나 보는 게 아니다. 그림으로 치면 엷은 담묵 기법의 수묵화다. 그래 가만히 산머리를 치어다보고, 화지를 스치듯 지나간 엷은 붓 자국을 훑을 줄 아는 마음이 먼저 선손을 걸어야만 한다. 이렇듯 야담 속에 들어 있는 저 이들의 붓질은 보는 이의 마음이 있어야만 통 성명을 하고 따라잡는다. 모쪼록 이 책을 보시는 분들, 여명 우려든 아침 햇살이 창호 살을 투과하며 빚어내는 그 해맑고도 평안한 창안함이 넉넉한 들숨소리 한 꼭지 만나시기를 바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편역자 간호윤의 역할이다. 단순히 번역해 싣고 책을 만든 데 그치지 않는다. 100여 개의 이야기 중 비교적 우리 민심에 가깝고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기술한 27개를 선정했다. 이후 각 이야기의 끝에 「별별 이야기 간 선생 왈」이라는 별도의 난(欄)을 만들어 편역자 자신의 주석을 첨부했다. 이야기의 배경과 당시의 우리나라나 민심의 방향을 짚어주고, 필요하다면 등장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도 덧붙였다. 또 저자 송순기의 집필 시기와 100년이 지난 2023년 현재 대한민국과 나라 상황, 국민의식의 비교가 가능하다. 이는 이 책을 쓴 송순기의 시대와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켜 저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설령 편역자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편역자의 입장과 책의 집필 의도에 맞다고 생각돼 지지한다.

 


 

저자 : 송순기(宋淳夔)

 

송순기(宋淳夔, 1892~1927)는 춘천에서 태어났다. 봉의산인(鳳儀山人)과 물재(勿齋), 혹은 물재학인(勿齋學人)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그는 1919년에서 1927년까지 [매일신문] 편집기자, 논설부주임, 편집 겸 발행인을 지낸 근대적 지식인이자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36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의 바탕이 된 [기인기사록]은 엄혹한 일제를 살았던 송순기라는 지식인이 우리의 야사, 문집, 기담 따위를 신문에 현토식(懸吐式) 한문으로 연재한 것을 다시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평범한 일생을 기록하고 있지만 송순기는 매일신보에서의 발행인의 위치에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아 일제에 순응하거나 동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독자가 다른 백과사전에 등재된 손수기의 인명록에서 일부 발췌해 여기에 싣는다.

송순기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다. 호는 물재(勿齋). 본관은 은진이다. 한학에 밝은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개화파 한학자인 최영년의 제자이기도 하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1921년에 편집부 기자, 1922년에는 논설부 기자가 되어 활동했다. 1923년부터 약 4년 동안 매일신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근무했으며, 1927년 논설부장에 임명된 뒤 얼마 되지 않아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매일신보 기자이던 1921년 1월 1일 매일신보 신년호에 3·1 운동으로 활발해진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 내용은 독립운동이 일본에 대한 내란이며 조선총독의 문화정치는 조선인과 조선민중을 위한 시의적절한 정책이라는 것으로, 독립운동으로 혼란해진 사회상과 문화정치로 인해 좋아진 점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편역 : 간호윤(簡鎬允)

 

순천향대학교(국어국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국어교육학과)을 거쳐 인하대학교 대학원(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경기 화성, 물이 많아 이름한 ‘흥천’(興泉) 생이다. 예닐곱 살 때부터 명심보감을 끼고 두메산골 논둑을 걸어 큰할아버지께 갔다. 큰할아버지처럼 한자를 줄줄 읽는 꿈을 꾸었다. 12살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 꿈은 국어선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다. 고전을 가르치고 배우며 현대와 고전을 아우르는 글쓰기를 평생 갈 길로 삼는다. 그의 저서들은 특히 고전의 현대화에 잇대고 있다.

『한국 고소설 비평연구』(경인문화사, 2002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기인기사』(푸른역사, 2008), 『아름다운 우리 고소설』(김영사, 2010),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조율, 2012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그림과 소설이 만났을 때』(새문사, 2014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연암 박지원 소설집』(새물결플러스, 2016), 『아! 나는 조선인이다』(새물결플러스, 2017), 『욕망의 발견』(소명출판, 2018), 『연암 평전』(소명출판, 2019) 등 저서 모두 직간접적으로 고전을 이용하여 현대 글쓰기와 합주를 꾀한 글들이다. 연암 선생이 그렇게 싫어한 사이비 향원(鄕愿)은 아니 되겠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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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한복판의 유력 용의자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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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을 둘러싼 피해자 배상 문제는 해방 88년이 지나는 현 시점에서 또 한번의 방향 전환이 예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최근의 신문 기사가 보도됐다.

재일(在日)경제인들을 중심으로 한 재일교포들이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을 환영하며 피해자들의 제3자 변제를 맡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여하겠다고 10일(2023년 3월) 밝혔다. ‘자이니치(재일 한국인)’ 차원에서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대신 배상금을 변제하는 재단의 기금조성에 참여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처음이다. 이들은 17일 한일정상회담 후 일본 도쿄(東京) 모처에서 기여 의사를 공식 발표할 계획이다. 재일교포 2세인 김덕길 카네다(金田)홀딩스 회장(77)은 1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신오쿠보(도쿄 내 코리아타운)에서 사업하는 재일동포들이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에 대해 우리도 기부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겠냐’고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현재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회장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1~12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17일 공식 발표 후 그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김 회장은 “2018년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난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돼서 많은 기업인들과 교민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해법 발표로 양국 관계가 좋아지면 혜택도 입게 될 텐데 배상 문제에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어 “한국 내 일부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당초 27일쯤 발표하려고 했는데 한일 관계 개선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날짜를 앞당겼다”고 전했다. 앞서 민단은 7일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재단이 대신 판결금을 지급한다는 해법을 발표한 데 대해 담화문을 내고 환영의 뜻을 밝힌 바 있다.

민단은 “양국 최대의 현안이 된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한국 주도로 해결하겠다는 결단으로 악화한 한일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일본 정부도 이에 호응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에 성의 있는 대응에 나서달라고 주문했다.(동아일보 2023-03-10)

 


 

이에 앞서 지난 3월 6일 (한국) 정부가‘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3자 변제) 방식의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한 가운데 시민들은 “전범 국가와 기업에 면죄부를 주려고 한다”며 “피해자를 무시하는 굴욕적인 협상”이라고 규탄했다고 한 인터넷 신문이 보도했다. 정의기억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일역사정의공동행동(공동행동)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강제징용 피해배상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 발표를 규탄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윤석열 굴욕외교 OUT’, ‘강제동원 정부해법 철회’, ‘윤석열 퇴진’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과 촛불을 들고 “3월 6일은 ‘제2의 국치일’”이라고 비판했다.

공동행동 측은 “윤석열 정부가 일본의 사죄배상이 빠진 굴욕적인 강제동원 해법안을 기어이 공식 발표했다”며 “전범 기업은 한 푼도 안 내는 일본 정부의 완승이며 최악의 외교참사”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해법안에 대해 이미 수차례 강제동원 피해자와 대리인단, 시민사회단체, 야당 국회의원들까지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해법안을 강행 발표해 ‘1엔도 낼 수 없다’는 일본에 면죄부를 부여하려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피고기업의 배상 대신 한일 경제단체가 기금을 조성해 미래세대에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를 우롱하고 기만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윤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 장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을 ‘강제동원 계묘5적’으로 규정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 우리 대법원은 2018년 일제 강점기 당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최종 확정 판결한 바 있다. 일본은 그동안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이 협정은 정치적인 해석이며 개인의 청구권에 적용될 수 없다고 최종 판단한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인권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법이 아닌 정부의 권력으로 자의로 이용한 데 따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제국이 전쟁수행을 위하여 국민생활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노동자에 대하여는 노무수급조정령(勞務需給調整令)과 중요 사업장 노무관리령에 의하여 국가의 직접지배시책을 시행하여 징용제도로써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면서 발생된 문제인 것이다. 이 징용령에 의하여 강제노동에 끌려간 사람의 수는 1941년에 26만(한국인 5만), 1942년에 31만(한국인 11만), 1943년에는 70만(한국인 12만)에 이르렀고, 1944년에는 종군위안부를 포함하여 약 200만 명의 학도동원까지 실시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렇게 징용으로 끌려나간 사람들 중에 희생된 자의 수가 적지 않았으며, 현지에 눌러앉은 채 귀국을 하지 못하고, 사할린 동포의 경우처럼 아직도 고생을 하며 귀국을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독자가 강제 징용 문제를 갑자기 들먹이는 이유는 이 책 『도쿄 한복판의 유력 용의자』의 주인공인 준기가 태평양전쟁 강제동원희생자인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떠나는 손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특히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첫 삼일절 기념식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일제 강제징용 문제와 맞물려 있어 대일 외교는 물론 민족적 정서에도 벗어나는 정부의 외교 문제가 연일 지상이나 방송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소설 속 준기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차츰 드러나는 불행한 과거사에 접근하면서 다른 사건에 접하게 되고, 막상 찾아간 곳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받은 뜻밖의 문자.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고 싶다면 먼저 1986년에 실종된 유리코를 찾아내야만 한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는 것과 실종된 유리코를 찾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상상할 수조차 없던 ‘그곳’에서 메시지를 보낸 상대를 마침내 마주한 순간 깨닫는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두 사건의 접점을 깨닫는 준기가 어떻게 이 소설을 끌고 가는지에 따라 저자가 최근 일본과의 강제 징용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정부의 외교 방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때맞춰 발표된 소설이라 더욱 관심이 간다. 이 작품의 저자는 탄탄한 구성력으로 이미 인정받은 고호 작가로서, 이 작품에서도 예상을 뒤엎는 반전에 독자들은 또 한 번 놀라고 감탄하며 읽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을 꾸짖는 것보다 우리에게 진정한 반성과 용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배경은 2025년 일본이다. 아이코 공주가 납치됐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태평양전쟁의 강제동원희생자라고 알고 있던 손자인 준기는 우연한 기회에 기밀 해제된 외무부의 문건을 접한다. 그 안엔 일본 홋카이도에 끌려갔다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준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바로 일본 왕실의 유일한 적통인 아이코 공주를 납치하는 것. 전 세계 언론을 집중시켜 문제를 해결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갑작스레 날아온 익명의 메시지 한 통으로 제동이 걸리고 만다.

이 작품은 한국, 일본, 북한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제국주의와 냉전 시기에 동북아에 만연했던 첩보와 납치, 실종을 실감 나게 다룬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다. 굴곡진 역사의 격랑을 겪으며 가족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국적과 이념을 초월하여 그려냈다. 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포착해 탄탄한 스토리로 풀어내는 고호의 작품은 우리의 역사, 특히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근현대사의 중요 사건의 장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지금껏 발표한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악플러 수용소』, 『노비 종친회』 등의 작품도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에서 시작해 그간 묻혀있던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호 작가가 이번에는 태평양전쟁 강제동원희생자 문제와 납북 일본인 문제를 화려한 미스터리로 포장하여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독자들의 큰 관심을 모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놀랐던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마치 올해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사가 나라 안팎의 온갖 행태와 소문이 퍼질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작품 속에 은근히 비슷한 사태를 예견하고 있다.

 

"세월이 상처를 덮어줄 순 있어도 죄까지 덮지는 않는단다."

부왕이 나루히토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울며 돌아온 자신에게 해준 말이 귀에 맴돌았다.

굳이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애쓰지 마라, 시간이 피해자의 상처를 덮을지언정 가해자들의 죄는 덮지 않노라고. 언제고 대가는 치르게 된다고. 아이코는 뒤로 고개를 푹 기댔다. 고통스러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코 그거 알아?"

"응?"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던 몇몇 분은 돌아오셨어.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 그곳에서 고생만 했지 제대로 된 품삯을 받지 못했으니 억울할 수밖에."(p.118)

 


 

이 책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었다. 평범한 제목이긴 하지만 장의 구분을 나누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초월을 위한 것이고, 또 사건의 반전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각 장의 제목 아래 장의 성격을 미리 암시하는 듯한 내용의 인용문을 적어 놓은 점이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알 만한 인물의 유명한 말이나 문장들이다. 1장 「1991년」, 2장 「받은 메일함」, 3장 「재팬 넘버 투」, 4장 「문수용」, 5장 「유리코」, 6장 「문수용」, 7장 「유리코」, 8장 「문수용」, 9장 「기다리는 마음」, 10장 「신이 되기를 거부하다」, 11장 「다시, 1991년」으로 이어진다.

1장의 제목 아래에는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말이 있다. 톨스토이의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에서 나오는 문장이란다. 이 장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유심히 읽어가면 더 재미가 있을 듯하다. 2장에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격 실격』에 나오는 문장이다. "편파적일 것이 뻔하므로 인간에게 호소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3장에는 제목 아래를 읽기 전에 방송 보도문이 먼저 적혀 있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도쿄 경시청은 3월 21일 오늘 오후, 가쿠슈인에 재학 중인 아이코 공주가 실종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오늘 오후···" 그리고 제목 「재팬 넘버 투」 아래에 같은 형식으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동생 테오에게 쓴 편중 중에서 인용한 "지금 이곳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혼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구나."가 쓰여 있다. 4장엔 에밀 졸라의 『패주』의 문장 "전쟁이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이야."라고 적었다. 5장엔 "서글픈 건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아,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스운 자의 꿈』의 문장을 인용했다. 6장엔 마크 모펫의 『인간 무리』에서 "한 사람에게 국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장애 트라우마, 비극을 불러온다."는 문구를 게재했다.

 


 

7장에는 제임스 볼드윈(미국의 저명한 흑인 소설가)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내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적었다. 8장엔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 중의 "진실이 정치적 덕목으로 간주된 적이 있었으며, 거짓말은 정치적 거래에서 정당화가 가능한 도구로 늘 거래되어 왔다."는 문장을 인용 기록했다. 9장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인용한 말이다. "별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태양일 수 있다." 10장엔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중의 "우리는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가진다는 그 「관념자체」를 공개적으로 탄핵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썼다. 마지막 11장엔 『신당서(新唐書) 원행충전(元行沖傳)』 중의 "바둑을 두는 사람은 길을 잃기 쉬우나 도리어 곁에서 보는 사람은 형세를 읽을 줄 안다.(當局者迷 傍觀必審, 당국자미 방관필심)"는 말을 적었다.

 

늘 그렇듯이 인간은 그래서 재밌다.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음에도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p.258)

 

저자 : 고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그런 고민이 만들어낸 세계로는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와 『악플러 수용소』,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 『노비 종친회』 등이 있으며, 사회적 이슈를 문학적으로 녹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꾸준히 또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와 황토현 문학상, 의정부전국문학상, DMZ문학상 등에서 수상한 바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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