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고통 -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이기병 지음 / 아몬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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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연결된 고통』은 한 공중보건의가 3년간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하 외노의원)에서 근무하며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고통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복원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의사 이기병은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의사 대 환자'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이었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전문의 수련을 막 마치고 나온 의사로서 저자는 외노의원에서 다양하고 고유한 아픈 몸들을 만나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실감한다. 그때의 그 고단함과 좌충우돌했던 분투를 그저 ‘미숙’의 결과로만 생각하기엔 갑갑함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더 나은 진료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을 안고 있던 저자는 마침내,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만난다. 저자는 건강과 불건강,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나와 너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시대에 의학이라는 단일의 카테고리에 포섭될 수 없는 아픈 몸들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고민했다. 이 고민은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환자 진료에서 치료 경험이 쌓인 것이라 더 값진 것이라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의학의 진단 및 치료 체계는 특정 증상을 보이면 특정 질병으로 이어지는 병인론에 근거해 정해진 프로토콜에 의해 움직인다. 의학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며 인류 전체의 건강한 삶을 견인했으나 한편으론 환자 개개인이 겪는 질병 서사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이야기보다는 과학이, 숨은 맥락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중요했다. 저자의 이 같은 깨달음은 의사 개인뿐만 아니라 의학 전체에 치료 체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잊히지 않아야 할 크고 작은 세계의 기록」이란 제목의 '머리말'에서 "그 3년은 고통스럽게 반성하고 망설이며 좌절했던 기억이면서 삶이 때때로 보여주는 것처럼 간혹 기쁘고 감사한 나날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이 때문에 함께했던 환자들에 빚지고 있다는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2011년부터 3년간, 외노의원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조선족에 이르기까지 10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권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내국인 환자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일련의 난관에 봉착한다. 우선 소통의 문제였다. 타국의 진료실에 환자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곳 언어를 할 줄 알아도 진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을 터, 언어가 능통하지 않다면 더욱 곤란하고 당혹스러울 것이다. 책에는 실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코트디부아르 청년의 사례가 등장한다.(7장 「고통의 이분법」) 진료실을 찾은 그는 한국어도, 영어도 그리고 불어도(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령이었다)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자기가 살던 지역의 토착어만 할 줄 알았던 그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오해’는 왠지 낯이 익다. 비록 단적이긴 해도, 진료실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소통은 충분하지 않을 텐데 (배경지식이) 동등하지 않은 ‘의사와 환자’ 같은 관계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일이다.

다음엔 국내와는 다른 환경에서 태동한 다양한 질병을 감별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저자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문진에 한두 가지 주요 증상이 아닌 여덟아홉 가지의 증상을 토로하는 조선족의 (한결같은) 사례에서 황망함을 느꼈다. 특정 증상을 증상의 원인인 장기와 질병으로 좁혀 들어가 마침내 진단에 이르는 ‘생의학’의 훈련만 받아왔기에 이런 상황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인류학 문헌을 통해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원인이 다분히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일 수도 있음을 확인한 저자는, 일말의 해방감과 동시에 무거운 ‘의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환자들의 질환에 단지 진단명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서사’가 있고, 더 나은 진단과 진료를 위해 들어야 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려면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과 통증은 오직 개인적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층위 위에서 상연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저자의 깨달음과 노력은 외노의원을 거쳐 이후 의사로 살아가면서 ‘진료실 내 의료’의 한계에 회의를 느낀 계기가 됐다. 이후 저자는 별도로 인류학에 입문한다. 그는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의학(과 인류학)을 감히 안다거나 할 수는 없다"면서도 의학과 인류학의 경계에 서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독자는 저자의 이 자세와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경계에 서기를 누구나 꺼리는 시대에 자신이 그 자리에 설 것을 결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저자는 그 경계에서 바라보고 깨달은 이야기들은 뭉클하고, 때로는 즐겁고, 또 때로는 가슴 아프다. "우리 나라 의사의 대부분이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 우리 의학의 수준이 세계적이라고 하는구나"라는 자긍심을 갖고 존경심이 든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의학은 보편적 질병 범주와 함께 이를 진단, 치료하는 체계를 고안해냈다. 의학의 진단 체계가 정교해질수록, 치료법이 더 발전할수록 인간의 수명은 늘고, 고통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러나 그렇게 정확도와 속도, 효율과 효과가 강조될수록 인간의 삶은 ‘질병 코드’로 암호화되면서 고통이나 증상을 통해 아픈 몸이 말하고자 했던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목소리가 검열, 절삭되어 일개 디지털 부호로 납작해진다. 그 목소리는 다른 말로 하면, 환자의 ‘서사’다. 책에는 환자의 몸이 의학의 진단 체계보다 더 정확히 ‘말’했던 사례가 등장한다.(1장 「갑상선 호르몬의 진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인용한 신형철 평론가의 지적이 새삼 적절하다고 털어놓는다. "고통이 인지의 충격을 유발하며 주변에 전이되는 방식 중 가장 유서 깊고 탁월한 방식은 '이야기'다"는 말이다. '본질의 장악'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환자가 몸의 증상이나 감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면, 그것이 그 고통의 본질을 관통하고자 하는 몸의 의도가 아닌지를, 또 그 의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치료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사유가 나아간다.

 


 

알코올성 확장성 심근병증, 즉 술에 의한 심부전을 겪던 환자의 이야기(2장 「술과 심부전」)는 어떤 상황이나 결과가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짚고 있다. 일상을 ‘건강’과 ‘불건강’의 의료적 언어로 재편하는 의료화 시대에는, 질병과 은유가 서로 유착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노동자’인 환자에게 주어진 진단명 ‘알코올중독’에 모종의 경계와 위협, 나태한 일상, 잠재적 폭력 등이 상상되는 것처럼. 이런 차별적 시선과 낙인이 어쩌면 그의 병을 더 악화하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따라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혼자서) 건너는 것이 아님’을 촘촘하게 보여준다고 사고의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다.

저자의 이 같은 통찰은 HIV를 보유한 청년의 치료를 끈질기고 집요하게 설득하려 시도한 경험(3장 「어느 HIV 청년과 약혼자」)에서도 나타난다. 낙인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을 전방위적으로 다시 검토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을 반성하는 한편, 치료 현장에서 ‘사회적’ 관점이 언제나 잉여의 논의가 되기 십상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위층 쉼터에 전염병 ‘옴’이 번진 이야기(4장 「옴과 헤테로토피아」)에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와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연결시키는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인 장면이다. 의학과 철학의 통찰은 저자가 개인적 노력으로 얻어낸 의료 지혜로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여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 개념은 ‘이분법’이다.

저자는 근대적 사유의 핵심인 ‘이분법’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삶과 죽음, 몸과 마음, 주체와 객체, 개인과 사회 등으로 간편하게 나누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나뉘지 않으며 이분법적 도해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거나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의학이 지닌 어쩔 수 없는 이분법적 관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고, 나아가 대안을 이끌어낸다. 진정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의학의 문제를 풀이하려는 태도로 보여진다.

 


 

예컨대 의학에서 죽음은 삶을 위해 몰아내야 할, 적어도 지연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에는 완전히 연속적인 시계열상에 위치한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듯 보이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6장 「질병이나 죽음은 형벌일까」)를 통해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의제가 ‘고통’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성염증과 우울증을 동시에 겪던 환자의 사례(7장 「고통의 이분법」)를 통해서는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분리하려는 이분법에 사로잡혔던 시간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우리 삶과 질병을 재단해온 ‘이분법’이 고통을 줄이는지 아니면 되레 부추기는지는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 이 책에서 면면히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고통이 모두 그러하다.”(p.251)

책에 실린 얼굴들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게 된다. 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 삶과 죽음은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가. 질병과 죽음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돌봄이란 무엇이며, 좋은 돌봄은 가능한가. 어느 하나 가벼이 다룰 수 없는 묵직한 질문들에 이 책은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검토하게 만든다.

이 책은 친절한 의료 지식과 치열한 인류학적 해석을 넘나들며,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던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가리봉동의 어느 좁다란 진료실 한 편에 슬그머니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때로는 의사의 마음이 되어 환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연신 전화를 해대며 노파심과 불안을 느끼고, 때로는 환자가 되어 내 말을 성의껏 들어주지 않는 의사의 무심함에 서럽고 속상하다. 외국인노동자 ‘환자’로서의 삶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나의 고통을 맞대어 보게 된다.

 


 

국내외에서 터져 나오는 다양한 고통의 목소리들이 하루도 끊이지 않은 시대.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언젠가 나의 것일 수도 있음을, 이 책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연결된 고통』은 고통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석하고 줄여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 결국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한 걸음 한 걸음 알려주는 단단한 징검다리 말이다.

 

나는 석연치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 찜찜한 순간이 한 번쯤은 꼭 있기 마련인데 그날이 그랬다. 뒷목 언저리가 서늘했다. 진료가 끝난 뒤 나는 병원에 홀로 남아 기록과 정황을 새로 검토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상황을 다시 보는 방식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결국 왔던 길을 잠시라도 되짚어가야만 한다. 문득 환자의 기침 증상에 생각이 미쳐 엑스레이 사진을 열었다. 5분이 넘게 사진을 응시하던 나는 결국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p.196)

괜찮은, 정상적인 환자가 아니라 이상한 환자. 괜찮은 환자라니 여기부터 엄청난 역설이다. 정상적인 환자라니 무슨 말인가. 그럼에도 이분법은 간편하다. 망치를 든 사람 눈에는 못만 보이는 법이니까. 내 몸은 피곤하고 이 사람은 이상한 환자라고 일단 못 박고 나면 나머지 정보들은 상당히 탈색되거나 소거된다. 재고의 여지가 부족해진다. 이 환자를 향한 이분법은 자명한 검사 결과로 인해 다행히 망상 수준에서 끝이 났지만 이러한 선입견의 효과는 우리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서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괜찮은 것과 이상한 것을 나누며 여전히 진행 중일지 모른다.(p.223)

 

저자 : 이기병

 

내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 연구자.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교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에서 내과 수련을 받고 늦깎이로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의학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감염내과 전임의를 수료했으며 AI 패혈증 예측 스타트업 기업 AITRICS에서 의료 자문을 겸하고 있다. ‘고통받는 것만 실재’한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등 분리될 수 없으나 분리된 것들의 경계, 의학과 사회과학 등 기반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경계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아프면 보이는 것들』(공저)이 있으며, 논문으로 논문 「조선족 간병사들의 돌봄 낙인과 생명정치」, 「죽음과 애도에 대한 고찰과 교육 가능성 탐색」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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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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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행자와 달빛』의 저자 세르브 언털은 우리 대한민국과는 별로 친분 관계가 없는 나라, 헝가리의 저명한 문인이라고 한다. 헝가리는 동유럽 국가 중의 한 나라로 국력이나 영토의 크기가 막강한 나라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위성국가로 전락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만 하더라도 강국이었으나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국토의 3분의 2가 줄어든 채로 정치체제도 애매했던 듯하다. 이 책 뒷 부분에 나와 있는 김보국 역자의 「되살아난 꿈과 절망의 시절」이란 제목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세르브 언털은 마흔네 살에 사망했지만 그의 삶에는 헝가리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오-헝 제국의 교육을 받았으며, 가장 혈기 왕성한 대학 입학을 앞둔 시기를 보냈다. 이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약간의 외국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헝가리 왕국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헝가리는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왕국'도 아니고, 군주제를 채택했으나 군주가 있는 국가형태도 아니었다. 명명할 수 없는 정체(政體)의 실질적인 권력을 헝가리의 극우주의자들이 접수하자 유대인 출신인 세르브 언털은 결국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벌프에 있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저자는 두 권의 장편소설을 남겼는데, 두 편 모두 국내외 소설을 망라하여 헝가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100선에 포함되었으며 영화화되었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언어로 계속해서 출판되며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땨라서 이 작품 『여행자와 달빛』은 첫 번째 장편소설인 『펜드래건의 전설』(1934)과 함께 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의 저명한 문학사가인 터랸 터마시가 출판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헝가리 소설 303권』에는 세르브 언털의 작품 중 유일하게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헝가리 작품' 목록에서는 네 번째로 꼽힌 바 있다고 한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기로 한 것은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베네치아'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와 지중해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고, 또 유럽의 각국 문학 작품에도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곳이기도 하다. 독자로서는 첫 유럽 여행 방문지였고,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과 함께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관심이 더 높았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소설 첫 장(章)의 제목 「신혼여행」지로서의 베네치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주인공 미하이와 에르지가 신혼여행 중이다. 사실 낭만적인 분위기의 로맨스 작품을 기대했던 사실을 독자는 고백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소설을 읽으려 펼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시인 비용의 시구인 것 같은 문장이 인용돼 쓰인다. "나는 법과 질서를 불온하게 여긴다 / 그러면 무엇이 뒤따르는가? / 그 대가를 기다리리, / 이 세상은 나를 받아들이기도, 거부하기도 하기에"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자가 읽기에는 어둡고 부정적인 느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인용시를 쓴 비용은 독자도 이 책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이다. 비용은 143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452년 파리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학생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각지를 방랑했는데 1455년 생노브와 교회에서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으며,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서 파리로 돌아왔으나, 금괴 도난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방랑 생활 중에(1456~1460) 「유품 Le Lais(1456)」 등 많은 시를 썼는데 그의 시는 후회와 노여움과 소망과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고 『인명대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1463년부터 10년간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시는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닥친 인간이 외치는 비명과도 같은 절실한 느낌이 넘쳐 흐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근대 서정시의 길을 터놓은 보들레르와 비교 될 만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 표지는 베네치아의 한 풍경 사진이지만 어두운 밤을 실은 것은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어둠을 통해 빛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르브 언털의 문제작이자 마지막 소설인 이 작품은 국내 초역이라고 한다.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 앞에 남편 ‘미하이’의 옛 친구가 나타나고, 급격히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 미하이는 한순간의 실수로 아내 ‘에르지’와 다른 기차에 오른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고통과 열망이 은밀하고 매혹적인 메타포들로 몸 바꿔 되살아나고, 유혹의 순간을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자기만의 삶’ 앞으로 서서히 독자를 잡아끄는 기묘하고 독특한 소설이다. 작가이자 저명한 문학비평가였던 세르브 언털이 문학 세계의 정점에서 쓴 작품으로, 그의 인생 전체가 등장인물 설정, 동성애적 관점 등의 모티프가 되어 소설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작품 활동에 직간접적인 제약을 받았으나, 최근 몇십 년간 동시대 작가인 마러이 샨도르와 함께 재평가받고 있다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배네치아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신혼여행지로 이탈리아를 선택한 미하이와 에르지. 에르지는 부유한 사업가인 졸탄과 이혼하고 젊은 나이에 미하이와 재혼한다. 미하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중산층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자주 환영을 겪었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친구 터마시, 그리고 그의 여동생 에버와 함께 어울리며 암울한 청춘 시기를 보낸다. 이후 터마시가 자살하고, 에버마저 사라지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이사로 바쁘게 지내면서도 그 시절의 고민들을 풀지 못한다. 에르지와 결혼해 떠난 신혼여행에서 자신의 결혼 소식을 듣고 쫓아온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 세페트네키가 나타난다.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 그 시절의 향수, 그리고 에버와 이후 수도사가 된 친구 에르빈(소설 속에서 에르빈은 고등학생 때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역자 주)이 다시 그를 사로잡는다.

 


 

미하이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두었던 각종 기억들이 그의 의식 전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그에게 가장 의문이었던 터마시의 자살 경위가 알고 싶어졌고, 자신도 죽음의 망령에 지해를 받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나. 우연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한 기차역에서 아내인 에르지와 헤어지게 되고, 그는 혼자 이탈리아의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하기로 결정한다. 이전에 그를 괴롭혔던 환영들이 다시 나타나며 그는 정신적인 혼란과 과거에 대한 향수, 그리고 그때 풀지 못한 의문들로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급기야 병적인 상태에까지 이른다. 결국 병원으로 이송되어 엘슬리라는 영국 출신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그곳에서 알게 된 미국인 여학생과의 로맨스도 경험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그의 병적인 정신 상태는 치료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의사 엘슬리의 조언에 따라 그는 영적 치료를 위해 세베리누스라는 신부를 찾게 되는데, 그 신부는 다름 아닌 학창 시절의 친구 에르빈이다. 그곳에서 에버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 되돌아가지 않고 에버와의 만남을 갈망하며, 자신이 그동안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의 의문과 함께 죽음에의 유혹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그 와중에 신혼여행에서 혼자 남겨진 에르지는 파리로 가서 자신의 오랜 친구인 샤리와 함께 지내며 새로운 삶을 시도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이 안주할 곳은 현실의 세계, 부르주아의 삶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자신을 기다리던 전남편 졸탄에게 돌아간다.

미하이는 결국 에버와 만나 그녀로부터 직접 터마시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득게 되고, 자신도 터마시의 길을 따를 것이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우연히 참석하게 된 영세식에서 벌어진 일들로 자살을 실행하지 못한다. 이후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와 함께 부타페스트로 돌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마직막 장면에서 작가는 말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p.382)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해석된다고 역자 김보국은 작품해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그도 그럴 것이 86년 전에 출판된 소설이지만 2022년에도 두 곳의 출판사에서 새로이 출간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세르브 언털은 마리이 샨도르와 함께 최근 몇십 년간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헝가리 작가이며, 그들의 작품이 때늦게 재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후인 1940년대 초에 그가 썼던 문학사(『헝가리 문학사』 및 『세계 문학사』) 도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판금 조치되었고, 사회주의 시절에도 소련 문학을 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이유로 그 책들은 원본대로 출판될 수 없었다. 물론 『여행자와 달빛』이 판금 조치를 당한 것은 아니나, 비평가들이 '정치적인 낙인이 찍힌' 작가의 작품을 '기꺼이 비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그 밖에도 당시 사실주의와 이후 해석학적, 그리고 민족적 관점이 비평의 주된 경향을 이루었던 까닭에 외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내에서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축소되어 있었다. 그나마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분석은 종종 있어왔는데, 이는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세르브 언털의 관심이 잘 알려졌던 바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 달, 성(性), 신화, 종교, 장소 등의 수많은 모티프에서부터 등장인물의 소재가 된 실존 인물, 동성애적 관점(세르브 언털의 일기에서는 동성애를 직간접적으로 연상시키는 몇 차례의 언급이 나온다. 그는 한 여성과 두 번, 그리고 다른 여성과 한 번 결혼했다-역자 주) 이후 발견된 자료(예를 들면 1992년에 사망한 그의 부인 발린트 클라러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던 세르브 언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1995년에 발견되었다. 남편의 사망 이후 재혼하지 않았던 그녀는 1951년 한 아이를 세르브 언털의 영적인 자녀로 여기며 '세르브 야노시'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198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역자 주), 가다머의 놀이로서 미적 경험, 바흐친과 루카치의 서사 형식과 이 소설 속의 영적 모티프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인간은 망상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지옥과 죽음의 경계에 섰을 때는 누군가를 갈망한다. 그 누군가를 찾고 쫓아가지만, 그것은 헛된 것이며, 그의 삶은 향수에 잠긴 채 위축되어간다. 미하이가 로마에 머문 이래 그는 계속해서 이 순간을 기다렸고 준비했으나, 에버와 다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p.330)

에버는 미하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단 몇 마디로 그의 지난 괴로움을 정리한다. “너는 터마시가 아니야. 터마시의 죽음은 오직 터마시에게만 해당되는 거였어. 모든 이가 자신만의 죽음을 찾기를.” 뒤이은 장면에서 미하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앉아 다짐한다. 미하이는 마침내 일상으로 되돌아가지만, 독자는 이후로 펼쳐질 그의 삶이 이전과는 다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님을 이미 독자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근엄하고 엄중한 철학적 사상이나 역사적 사실의 재현을 중심으로 삼지는 않는다. 즉각적인 재미나 즐거움을 주지도 않는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모티프 역시 진부하다 싶을 만큼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헝가리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고, 지금까지 애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21세기의 독자가 20세기 초반에 출판된 작품의 에피스테메를 이해하고, 고전의 반열에서 소설을 읽고 있을까? 역자는 의미 있는 답을 내놓는다. "누구나 뜨겁지만 어쩐지 자주 어두워졌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과거와 현재의 장면들이 교차하고,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사건들로 가득한 이 소설은 언뜻 꿈을 꾸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마침내 언털이 우리 앞에 남겨두는 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다. 환상이 현실을, 우연이 선택을, 죽음이 삶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연한 사고로 페르시아인과 단둘이 남겨진 에르지가 자신의 본능을 깨달아 선택을 내리고, 미하이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 다음에야 비로소 삶에의 의지를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아직 마음은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계속 나아가자. 계속. 사람들이 내린 저 자동차처럼 텅 비어 있으나, 우리는 나아가야 해.(p.269)

 

저자 : 세르브 언털(Szerb Antal)

19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여섯 살에 아버지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 단편소설, 수필을 습작했고, 대학에서는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전공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익혔다.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작가뿐 아니라 번역가,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1933년에는 헝가리 문학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학자로서 집필한 《헝가리 문학사》와 첫 장편소설 《펜드래건의 전설》을 출판하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듬해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바움가르텐상을 수상했다. 《여행자와 달빛》(1937)은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문학 세계의 정점에서 쓰인 작품으로, 신혼여행지인 이탈리아에서 옛 친구를 만나 급격히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 남편의 현재와, 뜨겁지만 암울했던 청춘 시절을 환상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반드시 읽어야 할 헝가리 소설’을 꼽는 설문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이러한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경력과 삶에 제동이 걸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개종 여부와 무관하게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다. 《헝가리 문학사》는 공산주의 통치 기간 동안 판금 조치 되었고, 이는 그의 소설에 대한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44년 헝가리 벌프의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고, 1년 뒤인 1945년 그곳의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역자 : 김보국

한국외국어대학교 헝가리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동유럽어문학과와 헝가리의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헝가리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헝가리 문학과 관련된 다수의 논문 외에 저서로 『헝가리 외교문서로 본 북한의 문예』 『헝가리 외교기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 등이 있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 나더시 피테르의 『세렐렘』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채식주의자』 등을 헝가리어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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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테 다이빙 - 2023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노은지 지음 / 마시멜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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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현조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장소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주제가 되는, 서사적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다. 우리 시대 사랑에 대한 시의적절한 질문과 함께 안정된 문장과 플롯이 일품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기 전 '카리브해에 있는 리조트' 낭만적 장소 배경에 마음이 닿았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을 꿈꾸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곳이다. 꿈결에서나 만날 듯한 그곳을 오가는 크루즈선은 덤이다. 서두의 말은 은희경 소설가와 이기호 광주대 교수의 추천평이다. '우리 시대 사랑법'과 '서사적 완결성'을 추천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실제 배경 묘사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뭔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도입부가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 소설의 도입 부분은 말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한 숨 넘어갈 듯 아름다운 배경을 묘사하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 현조의 움직임은 진한 어둠이 깔려 있다.

"깨끗한 흰 벽과 상아색 대리석 바닥. 에메랄드와 진홍색, 세련된 나뭇잎 패턴의 포인트 벽지. 두 사람의 것이 될 뻔했으나 한 명으로만 채워진 화사하고 화려한 스위트룸. 현조는 방 열쇠와 숄더백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테라스를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친 뒤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방 불을 죄다 꺼버리자 멕시코의 진한 햇살이 비치는 두꺼운 커튼 아랫부분만이 방 안에서 어둠이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 되었다."(p.11)

 


유카탄 반도 카리브해 연안의 한 리조트 <사진출처 : 열정의 대륙 남미 기행>

 

배경 설명으로 묘사되는 서너 개의 단어는 사실 '이국적' 분위기 묘사에 적절한 곳이다. 이 가운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소한 용어 풀이를 미리 해둔다. 세노테(cenote)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발견되는 자연 현상으로, 석회 기반암(基盤岩)이 오랜 세월 빗물에 무너져 내리며 표면을 드러낸 지하수 샘을 말한다. 낮은 저지대, 섬, 해안가 등지의 토양 발달이 견고하지 않은 고생대 지층 석회암 지대에서 발생하는 지질학적 형태이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doline) 또는 싱크홀(sinkhole)과 동일한 개념이다. 석회암이 용해되어 지표 아래에 공간이 생기면서 동굴이 형성되기도 하고, 연속적인 구조적 붕괴로 위가 뚫려 천연 수영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물 아래의 석회암 바위는 용해 작용으로 세월이 흐르며 점차 사라진다.

칸쿤(Cancun)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카리브 해안에 위치한 국제 관광 도시로, 아카풀코와 함께 멕시코 해양 관광의 중심지이다. 치첸이트사(Chichen Itza-책에서는 치첸이사로 표기한다) 도시 유적이란 멕시코 유카탄주(州)에 있는 7~13세기 후반의 대도시 유적을 말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700년경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최성기인 900~1000년경에는 유카탄 지역의 광대한 지대를 통괄하는 국제도시로 번영하였다. 도시 면적은 최소한 30km2 이상이며, 삭베(포장 둑길)만 69개소나 되었다. 이는 메소아메리카에서 최다에 속한다.

맹그로브 숲은 열대에서 아열대 지역의 하구 기수역의 염성 습지에 형성되는 삼림의 일종이다. 세계적으로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호주, 인도 근해,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분포하는데, 일본에도 오키나와현과 가고시마현에 자연 분포하고 혼슈 일부 지역에도 인공적으로 옮겨 심은 맹그로브 숲이 존재한다.

 


 

멕시코 칸쿤으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현조. 그녀는 연인과 가족으로 가득한 리조트에 홀로 들어오자마자 직원에게 남편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현조는 대답한다. 그녀의 연인은 죽었다고. 마야 유적지인 치첸이사 투어에서, 와인을 마시러 간 야외 풀 바에서, 현조는 왜 혼자 신혼여행을 왔는지 묻는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그 리조트로 여행을 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혼자 여행을 온 동양 여자 현조에게 사람들의 관심은 집중된다. 그리고 체크인 할 때 직원에게 그녀의 연인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 어느 샌가 리조트 전체로 퍼져, 진짜 그녀의 연인이 죽어 혼자 온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 궁금증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궁금하다. 작가의 소설 구성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때마다 현조는 굳이 그녀의 연인, 도훈이 죽은 경위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현조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훈은 결혼식 일주일 전에 총각파티를 하다 실랑이가 붙어 맞다가 넘어져 죽고, 도훈의 여동생을 스토킹하던 전 남자친구와의 싸움 도중 칼에 맞아 사고사하기도 하며, 단순한 교통사고로 죽기도 한다. 연인의 죽음을 때에 따라 여러 이유로 말하는 현조에겐 과연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실제 독자들이 느끼기에도 소설 도입부부터 두세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작가가 2018년 신혼여행지에서 처음 구상한 이 책은 카리브해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나온 주인공 ‘현조’의 여정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특히 작가 특유의 자연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이국적인 장소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주체가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현조는 왜 신혼여행을 혼자 온 걸까?

 


 

현조가 지인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된 도훈은 처음엔 그녀의 이상형과는 부합하지 않는 모습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배려와 이해를 접하며, 현조는 굳게 닫힌 마음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후 도훈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가 위험에 처한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본 현조는 그를 자신만의 유일한 보석 같은 존재이자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도훈은 그녀에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고백해온다. 그러나 현조는 그런 그를 놓지 못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선택을 하고 마는데… 이들 사이에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도훈의 죽음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이 소설에서 현조는 신혼여행지로 온 이곳 리조트에서의 궁금증을 계속 쌓아가는 현조는 장(章)을 거듭하면서(이 소설은 모두 12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도훈과의 관계를 풀이해 내고 있지만 독자들이 기대하는 명쾌한 원인과 답은 작가가 직접 내비치지 않는다. 독자들 개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죽은 남자」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저자 노은지는 강렬한 묘사를 쏟아낸다. "눈을 감으면 죽어버린 연인의 눈이 떠올랐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머리가 아플 만큼 칸쿤의 햇빛이 택시 창문을 뚫고 쏟아졌다. 농도 짙은 카나리아 빛깔의 햇살, 새파란 하늘, 가장자리가 은색으로 빛나는 구름 뭉치, 하늘로 손을 쫙 펼친 채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푸르른 야자수들과 키 작은 관목들. 대기에 스며 있는 물기는 세상의 제도를 높여주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현조의 눈은 흐린 회색이었다." 리조트 체크인 하는 데스크에서 여직원 글로리아 후아레즈가 함께 예약한 도훈의 행방을 묻자 현조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He's dead." 현조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리라고 믿었다.

 


 

책 뒷 부분에 부연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의 초고는 단편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원고를 쓰고 지우는 고통스런 시간의 반복 끝에 완성된 작품이 이 책이다. 작가는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길을 바꾼 것들이 많았지만 소설만은 달랐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곡괭이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작가가 제일 공력을 들인 부분은 바로 자연과 와인에 대한 묘사다. 칸쿤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을 문장으로 그려내기 위해 현지에서 들은 세노테에 대한 설명과 관련 사진을 참고했다고 털어놓는다. 와인 공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여러 차례 퇴고를 거쳤다고 한다. 그 노력은 고스란히 전해져 소설 속 와인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읽다 보면 금방이라도 그 맛과 향이 입안에 맴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현조가 세노테를 마주한 부분에서는 마치 고요한 바닷속에 들어간 듯 같이 숨을 죽이게 된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에 빠져들게 되는 또 하나의 묘미가 될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내게 있어 소설은 현실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이제는 내 소설이 누군가에게 도피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현조와 함께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 속 세노테에 같이 빠져 들게 되길 바란다.(p.193)

 


 

순간 현조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미소, 크고 둥근 눈, 햇살에 반짝이는 짙은 눈썹과 촘촘하고 긴 속눈썹, 도톰한 입술. 무엇 하나만 집어낼 수 없었다. 미구엘의 많은 것들이 그녀에게서 불특정한 감정과 감각을 가닥가닥 살려냈다. 조심스러운 태도와 수줍은 미소, 초식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무해한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단단함, 도훈을 이루던 조각들. 현조는 그것을 미구엘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닭살 돋은 팔을 쓸어내리고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p.51) - 「3. 순진한 남자, 해리 포터와 치첸이사의 목」 중에서

 

현조의 입술은 어떤 말들을 흘려보내기 위해 살짝 벌어졌으나, 도훈이 눈치 채기 전에 도로 닫혀버렸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과 비명이 점점 쪼그라드는 그녀의 육신 안으로 다시 자취를 감췄다. 현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도훈이 무언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잠깐,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말들이 있었다. 정적. 숨을 천천히 내쉬자 현조의 어깨가 아래로 떨어졌다.(p.86~87) - 「5. 모르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 모르는 여자」 중에서

 

저자 : 노은지

 

1986년 경기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다. 2023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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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 - 장악하고 주도하는 궁극의 기술
공원국.박찬철 지음 / 시공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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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도 많고 학자들도 많은 시대였다. 수많은 국가의 명멸로 '군웅할거' 시대였다고도 표현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를 비롯, 노자·장자·묵자·순자·손자가 국가 부흥의 토양으로 군주들의 정치를 도왔다. 학문으로서도 거의 모든 토대가 갖춰지고 국가의 틀을 완성시키는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이들 학자들의 학문과 이론은 국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자처했고, 또 성숙해졌다. 이 가운데 이 책 『귀곡자』의 저자 귀곡자는 전국시대로 알려진, 2,500여년 전 중국에서 주로 전쟁에 필요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다만 손자의 『손자병법』과 다른 점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재주는 모두 동원된" 전쟁 이론이라고 치부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학문으로서 전수해야 할 정도의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어쩌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수단까지 모두 동원한다는 점이 학문으로서의 성취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책은 실천서이지 이론서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는 책이지 않았나 싶다. 뒤에 사마천의 『사기』 등에 짧게 언급되는 경우에도 정확한 학문적 확립이 없었던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간단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학문으로서 앞세울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실제로 후학들의 『귀곡자』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명(明)대의 학자 송렴은 "소진, 장의의 말로 어떠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귀곡자』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이는 정통 유학자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곡자』라는 책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번역·주석서인 『귀곡자』의 공동 저자 공원국·박진철은 "자신은 읽되 남은 읽히기 싫은 책"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현재 우리 시대는 당시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해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모두 현실화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변할지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의 시대'이다. 디지털의 시대로 바뀌면서 과학기술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놓으면서 뒤따라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주변인물들로 밀려나는 시기다. 이 시점에서 왜 중국에서 이 책 『귀곡자』의 해석·번역·주석서가 다시 주목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 역시 『귀곡자』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는 게 공동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의 정치인들은 『귀곡자』에 대해 구양수가 밝힌 바와 같이 "시에 따라서 적절하게 변화하고, 일을 가늠해서 적당한 방책을 내는 바는 족히 취할 바가 있다"라고 평가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마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평가와 기시감이 든다. 1513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군주론』 역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의 원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맞지만 그렇다고 『군주론』에 권모술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견지에서 그를 악마의 대변자로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게 그와 저서에 대한 평가이듯이 『귀곡자』 역시 평가가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 책을 악덕의 책으로 비판하면서도 군주로서는 마키아벨리즘적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마키아벨리즘은 그것으로부터 아무리 눈을 돌리고 싶어도 정치의 현실의 일면을 찌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종교나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한 정치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 마키아벨리가 근대정치학의 기초를 정립했다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귀곡자』에 대한 정확한 주석과 시대의 변화를 감안해 재해석되거나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형국이다.

 


 

공동 저자에 따르면 이 책 『귀곡자』의 요결을 ‘반드시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일의 시작을 결정할 때도,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도, 대세를 살펴 방향을 결정할 때도, 일의 마무리를 위해 결단할 때도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주도적인 자세다. 주도적이라는 말은 일에 휘둘리지 않고 일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귀곡자』의 요결은 저자들이 이 책의 재평가를 위해 덧붙인 40여 가지 고사와 조조, 제갈량, 이세민, 오삼계, 서희, 강유, 고선지,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역사상 중요한 전략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당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당 태종 이세민의 고사에서 주도하고 장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산해관의 문을 열어 명나라를 청나라에 받친 오삼계의 고사에서 장악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들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고사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귀곡자』가 제시하는 방법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 된다.

그렇다면 괴이한 이름의 소유자 '귀곡자'는 실재한 인물인가? 공동 저자는 「21세기와 귀곡자」라는 '서문(글을 시작하며)'을 통해 중국 전국시대 활약한 종횡가*의 비조(鼻祖-학문이나 기술을 처음으로 연 사람)로 알려져 있다. 그 문하생이던 소진과 장의는 합종책과 연횡책으로 각국의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손빈병법』으로 유명한 손빈과 전국시대 군사전략가 손빈과 위나라의 명장 방연도 그의 문하생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사기』에 귀곡자는 기원전 5~4세기경에 실재한 인물로 적고 있으며, 귀곡(鬼谷)에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자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귀곡자는 천문과 수학에 정통하고, 선견지명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계략을 결정하는 데 능란했다고 기술돼 있다고 한다. 또한 출사(出仕)를 원하는 제자들을 교육했는데, 학생의 특징에 맞추어 각기 유세, 병법, 음양, 술법 등의 학문을 연수했다. 요즘 말로는 쪽집게 과외선생이라 해야 할까?

 

 

실제로 그가 지었다는 『귀곡자』라는 기이한 책은 춘추전국시대의 다른 제자백가서들과는 달리 출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제적인 원칙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공동 저자들은 말한다. 유명한 합종책과 연횡책은 소진과 장의가 귀곡자에게 배운 바를 그대로 적용해서 얻은 전략이다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종횡가'란 명칭도 그래서 얻은 것이란 독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귀곡자』는 마치 정치적 책략의 교과서로 알려져 왔고, 그동안 명분과 도덕을 중시하는 유가들에 의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책'으로 홀대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 저자에 따르면 책의 내용은 오히려 일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주변의 객관적 상황을 파악하며, 항상 형세글 잘 살피고, 같이 일할 사람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 등 오늘날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분야에서 꼭 필요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귀곡자』는 하나의 큰일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설명한 책이다. 특히 일을 수행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일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하여 마무리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누가 일을 하는가? 물론 내가 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항상 남에게 제어당하지 않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바로 '주도권을 가진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을 어떻게 이루는가?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일을 '일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큰일을 진행하는 것이 바로 귀곡자가 밝히는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란 일을 정의하고, 상황을 분석하여, 전략을 세우고, 의사 결정권자들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는 과정이다. 『귀곡자』는 중국 고전 중에서 이러한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지혜와 방략을 제시하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부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총론〉, 2부 〈준비 단계〉, 3부 〈실행 단계〉, 4부 〈최종 단계〉다. 각 부는 1장 「패합(?闔)」, 2장 「반응(反應)」, 3장 「내건(內?)」, 4장 「저희(抵?)」, 5장 「오합(?)」, 6장 「췌마(?摩)」, 7장 「비겸(飛?)」, 8장 「권(權)」, 9장 「모(謀)」, 10장 「결(結)」 등이다. 제목에 쓰이는 한자는 지금 우리가 상용하는 한자에 포함된 것보다 그 이외의 것이 훨씬 많다. 이 책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 제목부터 해석을 해서 달아 놓았다.

1장 폐합이란 상황을 분석한 뒤 시작을 결정하라는 뜻이고, 2장 반응은 주변의 진심을 파악하라는 의미다. 3장 내견은 마음을 열어 굳게 결속하는 뜻으로 쓰였으며, 4장 저희는 틈이 생길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라는 의미로 쓰인 문자다. 5장에 보이는 오합은 비교적 쉬운 한자이지만 뜻은 대세슬 살피고 방향을 결정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또 6장 췌마는 정보에 우위를 차지할 것을 주문했고, 7장의 비겸은 상대를 높여 장악하라는 의미이다. 8~10장은 각각 한 자씩 돼 있지만 뜻은 명확하다. '권'은 말의 힘으로 상황을 주도하라는 뜻이고, 모는 사람에 따라 쓰는 방법도 다르다. 마지막 결은 결단으로 성과를 얻는다라는 의미다. 이처럼 각 장의 주제를 일렬로 주욱 세워놓고 보면 이 책이 담은 뜻이 점점 명확해진다. 일을 만들어,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꾸준히 성공을 만들어가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일을 성사시켜라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중국 전문가인 공동 저자가 중국의 40여 가지 고사와 조조, 제갈량, 이세민 등 역사상 위대한 전략가들이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을 덧붙여 전국시대 전략서인 『귀곡자』를 풀이하고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는 메시지로 재해석한 이유도 함께 드러난다. 저자들에 따르면 일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주변의 객관적 상황을 파악하며, 형세를 살피고, 같이 일할 사람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일의 시작부터 준비, 진행, 문제 해결, 결단, 일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중견 기업의 임원이나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담당자라면 계획을 세우고 인력과 자원을 배치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작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담당자라면 실행 방법을 수립하고, 주변을 설득해 필요한 자원을 얻고 조직 내에서 성과를 이루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한자가 쓰인 6장 「췌마(?摩)」편을 옮겨본다. 앞선 장에서 큰 추세를 읽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6장은 '적극적으로 능력을 쓸 단계'라고 공동 저자는 말한다. 지금껏 전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내가 공략하려는 상대를 직접 파악해야 할 차례라고 풀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의지를 파악하는 테크닉이 췌(?-재다)와 마(摩-갈다)다. 공동 저자의 주석으로는 췌란 헤아린다, 즉 추측한다는 뜻이다. 물론 추측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마'란 추측을 하기 위한 방법인데, 그 본뜻은 만져본다는 것이다. 이 장은 마치 귀곡자가 옆에서 이야기를 속삭이듯이 생동감이 넘치고, 같은 내용이 정도를 더해가며 반복된다. 상대에게 지혜를 쓰기 전에 상대를 면밀하게 탐색하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들은 정치학, 경제학에서 한때 유행이었던 '게임이론'을 예로 들면서 말한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혹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등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기업 활동이든, 외교 정책이든 협상 전 사전 정보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대방이 나를 예측하지 못하고, 내가 상대방을 예측한 상태라면 게임의 결과는 명백하다는 것이다. 상대가 게임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내가 주도하는 게임이라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현대 게임이론의 핵심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6장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래서 귀곡자는 말한다. 상대의 패를 미리 알고 술책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고전적이지만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귀곡자』 원문에는 '췌'와 '마'가 나뉘어 있으나 두 편을 같이 보는 것이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한데 묶었음도 밝히고 있다.

 


 

저자 : 공원국

 

탐험하는 인류학자이자 작가. 10년간의 대장정 끝에 『춘추전국이야기』 11권을 집필했다. 장대한 역사 이야기를 끝내고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오고가면서 만나고 겪은 사람과 세상, 비현실적인 현실을 견뎌내는 현실의 인간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학자이자 작가에게 진실을 좇는 작업은 소설이어야 했다. 티베트 고원 가상의 시한부 도시를 무대로 무심한 문명의 힘에 짓밟힌 삶과 사랑,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썼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공부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인류학자의 시각으로 대안적 세계사를 제시하기 위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하며 《유목, 세계사의 절반》(가제)을 집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10년간의 대장정 끝에 집필한 《춘추전국이야기》(전 11권),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 기행》,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옛 거울에 나를 비추다》, 《유라시아 신화 기행》, 《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 병법》, 《여행하는 인문학자》, 《인물지》(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하버드 C.H. 베크의 세계사 1350~1750》,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말, 바퀴, 언어》, 《중국의 서진》 등이 있다.

 

저자 : 박찬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출판기획사 Culture Map을 운영하며 중국 관련 콘텐츠를 개발, 번역한다. 동양 고전을 비롯한 역사 인물과 사례 등을 통해, 진지하지만 다른 시각을 담은 담론과 교훈을, 때로는 실재하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굴욕을 대하는 태도》(공저), 《인물지》(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나를 지켜낸다는 것》, 《세계사를 바꾼 15번의 무역전쟁》, 《주역의 정석 1》, 《참모의 진심, 살아남은 자의 비밀》, 《운이 스스로 돕게 하라》,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판세를 읽는 승부사, 조조》,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 《격탕 30년: 현대 중국 탄생의 드라마와 역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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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프 리플렉스
김강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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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장기는 극히 일부만 법 테두리 내에서 실시된다. 가까운 미래 인공 장기가 더 발전되고 법적 규제도 완화된다면 인간의 탐욕이 수명 연장에 과연 초연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근미래의 과학기술 발전과 인간의 탐욕의 실상을 통해 함수관계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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