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텔링 차이나 - 삼황오제 시대에서 한(漢)제국까지
박계호 지음 / 파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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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히스토리텔링 차이나』는 오늘날 중국의 정치·사상·이념의 기초가 된 삼황오제 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역사를 풀어낸 역사서다. 다만 정사를 바탕으로 이야기 중심의 야사를 많이 다룬다는 점은 쉽게 읽고 이해하도록 서술 방식을 바꿨다는 말이다. 표제어 ‘히스토리텔링’은 히스토리(history)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합성한 조어다. 저자 박계호는 '알기 쉽고 재미있으며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한 역사서술법'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밝힌다. 『히스토리텔링 차이나』는 중국통으로 유명한 학자 박계호가 중국 역사의 출발점인 삼황오제 전설부터 시작해 한나라 때까지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이야기 중국 역사책이라는 의미다. 특히 저자는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사람’이라는 인식 아래, 각 시대마다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의 활동을 흥미롭게 설명하는 동시에 역사적 배경을 큰 흐름으로 풀어낸다.

저자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지식, 적자생존의 냉혹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돌파하는 지략,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삶을 완성해가는 지혜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곧 중국 역사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 책은 광대한 중국사의 바다에서 항해를 돕는 친절하고도 충실한 항해지도와 항해일지인 셈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가 과거의 기록을 넘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 지략, 지혜를 가르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훈을 포함하고 있어 우리의 삶에 큰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이 책이 가진 매력이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받는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말이 이 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나라의 군주는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 앞에 아첨하는 자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뒤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있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신하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 항상 있는 일도 선례만을 고집할 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또한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현재를 비춰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라는 저자의 설명이다.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지금도 한중 교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는 유교 중심으로 설명하는 기존 중국사 책들과는 달리 현대 중국의 기저를 이루는 공생공존의 실용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외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개 ‘중국’이라는 답이 나온다. 우리 역사에서 중국을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에 너무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처음 역사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지만 우리가 가장 모르는 나라 역시 중국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중국 대륙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나라들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또한 여러 전쟁과 혁명 등을 통해 현재는 55개 민족들이 모여 만든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 역시, 과거의 유교가 아니라 실용주의 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는 이러한 사상의 흐름이 없었을까? 우리가 중국 역사를 가장 잘 알면서 가장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의 첫 시작이다. 공자보다 170여년 전 인물인 관중이 유교보다 먼저 실용주의 사상을 주창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우리가 역사나 한자를 통해 배우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관중이다. 관중은 여러 제후국들이 수많은 전쟁으로 난립했던 춘추전국시대 인물로, 무엇보다 먹고사는 문제를 중시한 실용주의 사상가였다. 그의 현실적인 실용주의 사상은 현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또한 현대 중국은 마오쩌둥의 혁명 이래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러나 이러한 건국 배경은 현대 중국만이 가진 게 아니다. 진시황의 진나라에 이어 중국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 역시 노동자, 농민, 하급 관리에 의해 세워진 중국 최초의 제국이었다. 저자는 한나라의 건국까지의 시기가 이후 중국의 통치 이념이나 사상의 중심이 노동자, 농민 등 사회 하층 피지배 계급이란 점을 들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중국사와는 달리 현대 중국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고대 중국 역사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히스토리텔링 차이나』는 이러한 중국 고대 역사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중국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가 그동안 일부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을 통해 현대 중국과 이어지는 정확한 중국사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학교에서 중국의 역사를 전공하거나 따로 공부한 적은 없다. 우리 한국사를 공부하다 우리와 밀접한 5,000년의 역사를 함께했다는 점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사상적으로 유교,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을 따랐다는 점에서 중국의 역사를 조각 조각 배웠으며 사회에서는 우리 역사와 함께 해온 사건마다 대부분 중국 역사와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래도 많이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고조선에도, 삼국시대에도,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은 나라의 이름만 바뀐 채 늘 우리와 함께 역사를 써왔다. 저자가 이 책 『히스토리텔링 차이나』를 통해 중국 신화 속 삼황오제부터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통일 제국 진나라와 한나라까지 고대 중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는 이유이다. 특히 기존 중국사 관련 책들이 딱딱한 설명 위주였다면,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쓰는 주지육림, 와신상담, 토사구팽, 분서갱유, 사면초가, 천고마비 등 고사성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과 인물을 중심으로 설명하기에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책처럼 읽을 수 있다.

중국 대륙을 무대로 삼아 숱한 인물들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주인공으로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기존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이 책을 읽는 묘미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어 한나라 때 천재 경제학자로 이름을 떨친 가의를 살펴보자. 독자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인식하게 된 인물이다. 가의는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한나라 때 '전매제'를 처음으로 실시한 인물이다. 일반인들이 화폐를 주조하는 게 가능했던 한나라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가의는 화폐를 만드는 동과 주석, 철의 공급을 국가가 직접 통제해 일반인들이 만드는 화폐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화폐가 단순히 물물교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가치를 저장하는 지급 수단이라는 인식을 통해 저축과 국가 재정 확보의 개념을 정립했다. 화폐의 개념을 이해하고 저축을 주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앞서간 현대적 경제 논리였다.

 


 

『히스토리텔링 차이나』는 고대 중국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바다처럼 가득 담긴 역사책이다. 한편으로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과 현대 중국으로 이어지는 고대 중국의 흐름을 조명하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이제 이 책을 통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저자 못지않은 중국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늘날 중국(China)이라는 영어식 나라 이름과 중화(中華) 사상의 원류가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 공산주의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비슷한 성격의 한나라가 등장하기까지의 중국 역사가 풀이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중국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2장 「중국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요순시대」, 3장 「중국의 정통성을 세운 주나라 무왕」, 4장「숨겨진 실요주의자, 관중」, 5장 「중국의 역사를 바꾼 뽕나무밭 사건」, 6장 「공자의 제자 자공의 외교를 배워라」, 7장 「소진의 합종책과 장의의 연횡책」, 8장 「진시황이 창조한 중국 문명」, 9장 「항우가 맞닥뜨린 운명의 사면초가」, 10장 「중국을 셋으로 쪼개는 것을 거부한 한신」, 11장 「중국 최초로 평민들이 세운 나라, 한 제국」, 12장 「최고의 천재 경제학자 가의의 충고」, 13장 「흉노로부터 배우자」 등이다.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들어가며' 「깃털을 타고 중국 역사로 날자」에서 "환경과 변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라는 틀 속에서 인간의 활동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보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커다란 거울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과 같다. 역사는 비록 과거의 것이지만, 역사적 현상은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의 판단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역설한다. 이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람 중심 사상'이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이미 중국에서 나왔다고 언급한다.

 


 

중국은 55개 민족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진 국가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양문화라는 거대한 줄기를 만들어냈다. 이 광대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의 13가지 '히스토리'를 중심으로 이 책을 펴냈다고 저자는 밝힌다. 13개의 히스토리는 앞서 언급한 각 장에 그대로 표현됐다. 인류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초창기부터 하늘과 태양을 절대신으로 숭배해왔다. 문자를 갖기 이전의 인류는 문화의 요소를 신화에 두었다. 동양의 '천자', 서양의 '하나님' 등에 기초를 두고 신화적 요소를 갖추고 전설로 시작된다. 전설과 신화는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다. 중국 역시 전설로 내려오는 삼황과 오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삼황은 인류의 문명을 만든 세 명의 통치자를 의미하고, 오제란 이들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온 다섯 명의 임금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요, 순 임금도 바로 오제에 속하는 통치자다. 중국 이야기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고사성어다. 우리도 잘 알고 많이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고사성어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고사성어를 알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의식주는 당연히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이를 둘러싼 인간 활동은 때론 협력으로 때론 전쟁으로 치닫는다.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잘 알지만 경쟁을 하다보면 나라와 백성들이 모두 나서서 운명을 걸고 싸운다. 하나의 나라 안에서 또는 여러 개의 나라끼리, 약함을 감추고 강함을 드러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합종 연횡은 결국 실패한다. 우리 현대 정치계에도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어 왔던 합종연횡이 결과적으로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보면서 교훈을 얻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공존하다는 의미다.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흉노'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다. 중국이 천하를 통일하고 번영을 누리다가 쇠망하는 데 평균 300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흉노는 문자도 없고 변변히 남은 유물이나 유적도 없는 흉노는 1,000여년을 지속했다. 이유가 뭘까?

 


 

흉노는 가축에서 나오는 가죽이나 고기, 젖 같은 것으로 자급자족할 뿐이었고, 나머지 생필품들은 이웃 한나라를 침략해서 조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비단옷과 여러 종류의 솜옷, 빗, 허리띠 등을 주고 화친을 맺어 이들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흉노를 설득하기 위해 그들에게 생필품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한나라 문제는 중항열을 사신으로 보내 그들에게 문자도 가르치고, 사신 왕래에 필요한 격식과 예절, 가족의 성(姓)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중항열이 아예 그들과 함께 살 정도였다는 흉노의 관습과 사는 방식에 길들여진 사례도 이 책에 적어 놓는다. 아무리 비문명의 오랑캐족이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역사는 인간의 삶을 적고,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 : 박계호

 

중고등학교 때부터 고대의 중국 사상과 역사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면서 유학과 동양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논어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 대한 의미를 몸소 체득했다. 관심 분야를 넓히고 학문의 현실적 적용을 위해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국제 경영학을 공부해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한중일 세라믹 전문위원, KCB(Korea-China Business) 인터내셔널 대표를 역임했으며, 중국의 강소성 하이안(海安)시 인민정부의 추천을 받아 한국투자유치 대표를 맡으면서 그동안 공부해온 중국 역사와 사상을 비롯한 인문학을 현재진행형의 일반 사회학과 접목하는 것이야말로 역사 공부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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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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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1년이 다 되도록 지속되고 있다.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을 듯한 거리가 있는 곳이라 우리가 걱정하거나 불안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전쟁인데도 전 세계는 장기전을 우려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은 지정학적 위치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강력 비판하고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우크라이나 지지 선언을 하며 무기 지원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방어에 힘을 쏟았다. 이 전쟁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사실 정치적·외교적 문제보다 러시아에서 수입해오는 에너지인 석유와 천연가스 공급을 우려해서이다. 우리 역시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해 사용하는 터라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을 우려해서다.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 지난 70년대의 석유 파동을 겪었기 때문에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은 우리 산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특히 우리는 세계 석유 소비량으로 보면 5위에 올라 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사실 정치·외교적 이유 때문에 발발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책과 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발발했다. 이런 조짐은 푸틴의 러시아가 정식 반대 입장을 표면화하면서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 중 하나인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금지 조치 등으로 인하여 지난 3월 원유 가격은 123달러를 넘어서며 전 세계의 경기 침체를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의 위기가 아니었어도 원유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예견한 전문가가 있다. 그는 바로 30여 년간 에너지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맥널리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에너지 참모로 일했으며 현재 워싱턴DC 에너지 컨설팅 및 시장 자문회사 래피던에너지 그룹의 설립자이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맥널리는 1855년, 예일대학교의 저명한 화학자 벤저민 실리먼 주니어 박사가 ‘오일 크리크(기름 개울)’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석유왕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흥망성쇠, 그리고 텍사스 시대를 이끈 텍사스철도위원회,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탄생, 셰일오일의 발견 등 160년 석유의 역사와 그에 따른 유가의 변동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그가 집필한 이 책 『석유의 종말은 없다(Crude Volatitity)』는 높은 유가의 변동성을 이해하고, 유가의 호황기와 불황기를 예측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도와준다.

ESG, 대체 에너지, 탄소 중립 선언 등으로 인하여 곧 석유 종말의 시대가 올 것만 같다. 독자도 지난 2000년대 초부터 석유 공급의 최정점 시대가 온다는 말을 들었다. 에너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 경제학자나 정부 관료들은 이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오일 피크(이를 정점으로 석유 공급량은 점차 줄어 2050년대에 들어서면 석유 고갈이 오리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특히 세계 최고의 석유 소비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는 하루 280만 배럴(전 세계 수요의 약 3%) 가량의 석유를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거의 모든 석유와 가스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변화는 경제와 정책 특히 무역 수지와 인플레이션 조정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석유나 천연가스를 중동 등 일원화되어 있는 수입 체계를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야 불안한 석유 가격 변동에 대처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해서 정부 고위 관계자를 중심으로 수입선 다변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중동만 아니라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입을 위한 파이프 라인을 북한을 경유해 들여오는 방식의 협력방안도 이때 도출된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실제로 에너지 수입의 상당량은 러시아산을 들여오고 있다고 한다.(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또 한 가지 방법으로는 석유를 다른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전환한다면 유가의 롤러코스터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석 에너지는 현재 전 세계 에너지 사용의 약 83%를 차지하고 있으며, 농업, 산업, 교통수단, 국방 등 석유가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과 대체 에너지, 코로나19 등으로 인하여 석유산업에 투자가 줄어 원유 시추 역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공급량은 줄고 있지만, 그에 따른 사용량을 확 줄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석유는 앞으로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선진국에 문명의 생명선으로 남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주장한다.

특히 우리는 석유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나 유가의 변동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유가의 롤러코스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유가의 변동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요지다. 에너지 시장 변동이나 석유 수급 등에 가장 전문가라 할 저자의 논리가 정확하고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에너지를 대체할 때까지(그 시점이 언제일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에너지 공포나 우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미국에서부터라고 한다. 텍사주의 석유가 발견되고 유정을 개발하고 세계 석유왕으로 등극한 록펠러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다.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 및 산업 발달로 기차와 수송 화물차 등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늘어나면서 석유는 미국 산업의 원동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1891년 원유의 공급량을 규제하기 위해 텍사스철도위원회(TRC)가 설립됐다고 한다. 또 석유가 세계 에너지원의 주역으로 등장한 후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1935년에서 1973년 정도까지를 ‘텍사스 시대’라 불리었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세계 석유 소비의 주축국이자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때 유가의 변동률은 3.6%였다고 한다. TRC가 각 주에 할당량을 부여해 안정적으로 원유를 통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덕분에 대규모로 들어오는 값싼 중동의 원유가 미국의 기존 시장에 혼란을 주거나 대규모 유가 하락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미국은 약 40년간 세계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석유수출국기구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립자였던 베네수엘라의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 박사는 미국의 석유사들이 시행하는 석유 쿼터제 범위와 규정의 엄격함 등을 모방해 만들었다. 1960년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5대 석유 생산수출국 대표가 모여 OPEC을 결성했다. 결성 당시에는 유가의 하락을 막고 산유국 간의 정책협조와 이를 위한 정보 수집 및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가격카르텔 성격의 기구였으나, 1973년 제1차 석유 위기를 주도하며 유가 상승에 성공한 뒤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생산카르텔로 변질되었다.

 


 

특히 텍사스철도위원회는 미국이라는 한 나라만 통제하면 됐지만, OPEC은 여러 국가가 결정하여 만든 기구로 국가마다 이익의 셈법이 달랐기에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하여 유가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때 유가의 변동률은 약 24%였다. 저자는 160년 석유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유가 변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이야기를 책을 통해 풀어놓았다. 부의 중심엔 언제나 석유가 있었고, 대체 에너지의 발전과 산업의 변화에도 그 중심엔 여전히 석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석유의 역사에서 유가의 변동성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은 부의 역사를 이해하는 한 축이 될 것이며, 원유에 투자하고 있는 투자자들에게도 지침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46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책에서 저자는 '프롤로그' 「텍사스 패러독스」를 통해 석유의 역사, 발전, 현재까지 모든 변수와 사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까지 개괄해 쓰고 있다. 워낙 정치적·외교적·국제적인 문제라 변수가 많고,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기술되고 있는 점을 미리 풀어놓는 것이다. 이해를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13페이지에 걸쳐 세세하게 석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2부로 갈라놓고 있다. 160년 석유 역사를 둘로 가르는 분기점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잠깐 언급한 미국이 주도한 석유수출국기구 시대다. 〈혼돈에서 질서를 찾기까지〉라는 제목으로 1859년부터 1972년까지를 이른다. 2부로 갈라지는 지점은 OPEC의 등장이다. 즉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5개국이 모여 결성하고 지금까지 이들이 석유시장이 지배하는 시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지배하는 석유시장〉이 2부에 있다. 1973년부터 2008년 현재를 이른다.

 


 

프롤로그 「텍사스 패러독스」에서 "지난 10년간 폭등한 유가로 인하여 '유가 안정'을 재검토할 필요가 생겼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20년간 대부분 30달러 이하를 호가하던 시기는 지났고 2004년 원유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2007년 말에는 99달러에 도달했다. 2008년 여름이 다가오자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은 유가는 2008년 7월 145.31달러로 정점을 찍었고, 6개월도 안 되어 갑자기 33달러로 떨어졌다. 2011년에는 100달러까지 올랐다가 이후 3년 반 동안 95달러 선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2014년 6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가격은 107달러에서 26달러로 다시 한 번 폭락했다. 수십 년간 상대적으로 안정된 가격을 유지하던 유가가 10년 사이에 두 번의 눈부신 호황과 불황을 겪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그 일에 간심을 가지는 것이 옳을까? 이 책은 유가 안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대 석유시장의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앞에서 말한 질문에 관한 답을 찾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이른바 미국 텍사스 주도의 석유수출국기구 시대(이 책의 1부)의 역사를 통해 유가가 자연적으로 변동성이 있는지, 그리고 왜 그 변동성이 석유산업뿐만 아니라 더 넓은 경제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였고, 석유 노동자들과 관리자들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유가의 평준화를 얼마나 성공시켰는가? 그것이 과연 인간의 탐욕 혹은 고상한 정서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또 지잔 10년간의 가격 변동은 오늘날 유가가 성공적으로 안정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주는가? OPEC은 유가에 대한 통제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한 것일까? 미국의 셰일오일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과연 훨씬 더 광범위한 유가 변동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등 당면하고 산적한 문제를 제기하며 저자는 하나씩 하나씩 답변을 해나간다.

 


 

저자 : 로버트 맥널리(Robert McNally)

 

30여 년간 에너지 전문가로 활동하며 에너지 시장 분석, 전략 및 정책 결정뿐 아니라 경제, 보안 및 환경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 금융가이기도 하다. 또한 정부 관계자로도 일했다. 현재는 워싱턴 DC 에너지 컨설팅 및 시장 자문 회사, 래피던에너지그룹(Rapidan Energy Group)의 설립자이자 대표이다. 또한 미국 국가석유위원회 위원이자, 컬럼비아대학교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의 사외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맥널리는 1991년 에너지 시큐리티 애널리스트(Energy Security Analyst)사의 컨설턴트로 석유시장을 분석하며 이 일에 매료되었다. 1994년 튜더 인베스트 코퍼레이션(Tudor Investment Corporation)에 입사하여 12년간 에너지 시장, 거시 경제 정책 및 지정학을 분석하였고, 부사장 및 전무이사를 맡았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백악관의 국제 및 자국 내 에너지 고문으로 재직하였으며, 국가경제위원회 특별보좌관 및 2003년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제에너지기구 선임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998년부터 1990년, 세네갈 평화봉사단 복무 경험도 있다.

맥널리는 국제관계 및 정치학으로 학사, 이후 존스홉킨스대학교 폴 H. 니츠 고등국제대학에서 국제경제 및 미국외교정책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8년 밋 롬니(Mitt Romney)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 선거 운동에서 에너지 정책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2010년, 마코 루비오(Marco Rubio) 상원 의원 선거 정책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며 계속해서 의회와 행정부에 에너지 정책과 시장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맥널리는 2011년 7월부터 8월까지 마이클 레비(Michael Levi)와의 공저로 에세이 『국제관계(Foreign Affairs)』를 출판하였고, 《CNN》 《이코노미스트》 《폭스 비즈니스》 《파이낸셜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블룸버그 뉴스》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역자 : 김나연

 

영미문화와 영문학을 공부하고 번역에 처음 뜻을 품었다. 서강대학교 영어영문과에서 20세기 현 대미국소설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전문 번역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으며, 현재 출판번역 에이전시 베네트랜스에서 리뷰어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최강의 일머리』, 『부의 해부학』, 『혼자만의 시간을 탐닉하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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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김선현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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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화해 그림, 마음을 만나다』는 그림으로 치유하는, 이른바 '미술치료' 책이다. 저자 김선현은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미술치료를 통해 우리와 사회를 위로하는 작가이자 국내 미술치료계의 최고권위자이다. 개개인과 사회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쓴 자기계발 에세이북으로 분류된다. 이 책은 2016년에 출간 당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책을 새롭게 리뉴얼한 『화해』 개정판이다. 저자가 20여 년간 현장에서 마주한 미술치료 사례와 미술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엮은 ‘1대 1 상담 힐링서’로 거듭난 것이다. 마르크 샤갈, 에드바르 뭉크, 프리다 칼로 등 유명 작가의 작품부터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멋진 그림들까지 모두 42점의 예술 작품을 담은 이 책은 그림을 통해 마음 아픈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면하고 마침내 나와의 화해를 이끌어내길 응원하고 있다. 저자 김선현 연세대학교 교수는 직접 엄선한 미술 작품들을 소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돕는다.

초상화로 유명한 19세기 이탈리아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아름다운 작품 「작별」이 표지화로 쓰였다. 더 산뜻한 디자인으로 바뀐 본문, 그리고 새롭게 다듬은 문장으로 단장한 『화해』 개정판은 기존 김선현 교수의 따뜻한 미술치료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물론, 명화를 보며 힐링의 시간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나이듦, 실연, 육아 스트레스, 외모 콤플렉스, 분노조절장애, 우울증 등 사람들이 삶 속에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 및 심리적 문제 상황에 비슷한 내용을 담은 명화와 그 뒷이야기를 접목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동서양의 미술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트라우마를 살펴보고, 그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와 다른 방식으로 대면하고 치유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이 책은 4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감’을 이야기한다. 상처받은 일들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는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다양한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다룬다. 바쁜 삶에 쫓기기만 한 채 진정한 나의 상처와 대면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도 해결되지 못한 채 상처로 남아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세 번째 파트에서는 상처를 극복한 ‘나’는 전보다 더 행복하고 성숙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파트는 스스로와 화해하는 법과 함께 마음 아픈 과거와 당당하게 작별하고 새로운 출발 앞에 선 이들을 위한 응원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먼저 나의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안아주는 시간, 즉 마음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주변 사람을 돌아볼 여유, 그리고 사회적인 관용의 분위기도 비로소 형성될 수 있음을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표지화는 이탈리아 고전주의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크르코스의 작품이다. 제목인 「작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 속 여인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이별을 맞이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이 떠나기 위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작별은 아프다. 그러나 작별의 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작이 찾아온다. 그 시작 앞에 선 여인의 모습에서 청량하고 설레는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며 자신의 감상을 먼저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걸까요. 아니면 자신이 타고 떠날 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푸른 빛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양산을 쥔 그녀의 회고 고운 손은 검은색 레이스 장갑으로 더욱 돋보이네요. 잔잔한 바다 물결만큼 그녀의 표정도 겉으로는 고요해 보입니다. 이 매혹적인 풍경 속에 가벼운 설렘도 느껴진다면 저 멀리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배 때문일까요?"(p.181)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한 감상 속에서 '설렘'에 주의한다. 독자들에게 작별의 뒤에는 다시 시작하는 설렘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설렘의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되어 있어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설렘을 읽어내며 자신의 치유를 위해 생각을 하게 한다. 책에 따르면 첫 시작에는 항상 설렘이 담겨 있다. 무한한 가능성이 담긴 '처음'이라는 단어가 나의 꿈과 목표와 만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과정의 끝을 서둘러 판단하고걱정만 한다면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원대한 목표나 치열한 성공 뒤에는 항상 처음이 있다. 그 처음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안다면 자신의 행복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한 이유가 독자들에게 올바른 그림 감상과 이를 통한 마음 치유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그림은 모두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작품에서 선정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림 설명이나 감상보다는 치유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는 개인적으로 여기 모든 그림들이 저자의 설명과 감상에 맞춰 읽기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만 보인다. 그렇지만 유독 한 그림은 독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림도 있다. 한스 안데르센 브레덴킬데의 「가을의 숲길」의 그림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숲속 오솔길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벤치에 앉은 여인의 시선이 저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홀로 우두커니 남겨진 모습이 쓸쓸함을 자아내네요. 마음으로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까요?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붉은 단풍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그녀의 모습이 처연해서 더욱 아름다운 풍경입니다.(p.193)

이 그림의 감상을 저자는 풀어놓는다. 저자에 따르면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을 우리 스스로 일부러 만들 필요도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에 놓여졌다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일상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중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경험하는 우울, 외로움, 슬픔, 고립감은 우리가 삶에서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정서가 아니다. 저자는 이 그림을 통해 생각할 것들을 마지막에 슬쩍 덧붙인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세요.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과 떠나보낸 사람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누구나 나이듦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이 나이든 노인이어도 나이듦에 대해 속상해 하거나 심지어는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 그림을 제시하며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며 나이듦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혹시 늙음에 대해 마음 아파하거나 스트레스의 이유가 된다면 이 그림을 치유하기를 권하고 있다. "중년의 여인이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공연을 앞둔 여배우의 모습인데요. 무대를 오르기 전 그녀는 무엇을 마주하고 있을까요? 젊음의 뒤안길로 접어든 자신의 모습 앞에서 수없이 받았을 스포트라이트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까, 어느새 다가온 세월의 무게를 결국 껴안아야 할까. 여러 생각으로 씁쓸한 마음이 느껴지는 표정입니다."(p.135)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누구에게나 세월은 공평하게 다가온다. 그림 속 여배우에게도 시간은 비껴가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결국 맞이해야 하는 것이 '세월의 무게'가 아닐까 싶다. 늙어가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하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초라해지는 게 아니라 성숙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꿈이나 목표를 잃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잖은가. 나이 드는 것을 핑계로 내세우지도 않고 위축되지도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조력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꿈이나 목표를 향해서도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무기력해지는 것은 단지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멋진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리카르도 베르그의 「북유럽의 어느 저녁」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감정만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아니다. 기대 크고, 부푼 설렘도 때로는 우리에게 마음의 짐을 안길 수도 있다. 이 그림 자체에는 독자가 말하는 긍정적인 설렘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부푼 감정 뒤안에 있는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데까지 이를 수도 있다. 이 그림은 여름 저녁, 시원한 호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초록빛이 붉은빛과 어우러져 풋풋하고 싱그럽다. 두 남녀가 있는 공간으로 햇살이 내려와 떨림을 전하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이 시작된 것 같다. 서로의 시선과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의 광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조심스레 피어오르는 사랑을 감추는 듯하다. 그림 속의 여인은 뒷짐을 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감출 수 없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 남자 역시 팔장을 끼고 한쪽 다리에 힘을 주면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은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에 따르면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꼭 만나야 할 사람처럼.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버리게 된다. 사랑의 모든 단계가 떨림의 연속이지만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가장 황홀한 때가 아닐까. 새로운 사랑에 대한 설렘과 누군가와 또 다른 사랑을 한다는 두려움을 감추고,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이 시기가 가장 아름답다. 새로운 시작은 항상 설렘을 주니까.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크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너무 떨릴 때도 있다. 그 사랑이 오래 되어 퇴색되어 버렸을 때 그 기억을 떠올려보라."(p.93~95) 독자는 저자의 귀띔을 듣고서야 "역시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가장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숙인 여인이 상념에 잠겨 있습니다. 깊은 상처가 그녀를 할퀴고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고요히 멈춘 그녀를 위해 바람도 구름도 풀들도 잠시 멈춰 선 듯합니다. 트라우마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깨뜨립니다. 그 결과 이성적 사고가 어렵게 되면서 자신의 순간적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죠. 일상은 차츰 망가지고 결국 상처받은 나 자신에게 매몰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림 속 여인처럼 잠시 멈춰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요한 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우리 역시 잠시 숨을 고르고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p.214~215)

 

저자 : 김선현(金善賢)

 

예술을 사랑해서 미술을 전공했고, 작가로 활동했다. 강의와 실습을 지도하던 중, 눈에 띄게 밝아진 아이들과 스트레스로부터 차츰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고 그림이 갖는 치료적 힘에 눈을 떴다. ‘그림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건 나 혼자만의 만족이지만, 미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가능성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주위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불모지나 다름없던 미술치료 분야에 뛰어들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동양인 최초로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 부속병원에서 예술치료 인턴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에서는 외국인 최초로 임상미술사 자격을 취득했고, 일본 기무라 클리닉 및 미국 MD앤더슨암센터 예술치료 과정을 거쳐 프랑스 미술치료 Professional 과정까지 마쳤다. 미국미술치료학회(AATA) 정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차(CHA)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원장과 차병원 임상미술치료클리닉 교수로 재직했으며, 그간의 활동과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세계미술치료학회(WCAT)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최근 세월호 사고 학생들은 물론, 천안함 사건 유족, 연평도 포격 피해 주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동일본 대지진 피해 일본인까지, ‘국가적 트라우마’ 현장에 곧바로 초빙되어 많은 이들의 아픈 마음을 전문적으로 치유해온 미술치료계의 최고 권위자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디지털치료임상센터장으로 부임해 활동 중이다.

여전히 언론에서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루게 되는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인터뷰한다. 그동안 집필한 책으로는 『그림심리평가』 『그려요 내 마음, 그래요 내 마음』 『그림 속에서 나를 만나다』 『컬러가 내 몸을 바꾼다』 등 다수가 있다. 이번 『그림의 힘』은 지난 20여 년간의 미술치료 현장에서 가장 효과가 있었던 세기의 명화들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집약한 김선현 원장의 대표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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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소외된 노동계급의 목소리에서 정치를 상상하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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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 양극화와 불평등의 시대, 저자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노동계급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낮고 어두운 삶과 영혼에서 피어나는 계급 정치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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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소외된 노동계급의 목소리에서 정치를 상상하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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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은 미국 노동계급이 일상의 투쟁, 승리감, 희망, 공포를 어떻게 정치와 연결하는지를 탐색한다.(p.18) 저자 제니퍼 M. 실바는 책의 서론 「노동계급 정치의 난제」에서 이같이 밝힌다. 이에 따르면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블루칼라 일자리는 지난 수십 년간 자동화되고 사라지고 해외로 이전되었다. 정치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 안전망을 축소하고 단체 협상권을 약화시켰으며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노동계급의 권력을 점점 무력화했다. 아메리칸드림의 핵심 약속인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할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동원으로 가장 많은 득을 볼 집단들은 함께 떨쳐 일어나 정의와 기회의 정당한 몫을 위해 싸울 의지가 없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려는 의욕이 가장 적은 듯하고 말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양극화와 불평등이 가속화되고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보일 정도다. 많은 전문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두고 온갖 제언을 쏟아낸다. 하지만 빠진 게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 즉 가난한 노동계급의 목소리다. 저자 제니퍼 M. 실바는 그동안 노동계급의 삶과 문화, 불평등을 주제로 활발히 저술 활동을 했다. 노동계급의 소외는 가속화되고 미국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로 짚어내고자 했다. 저자가 미국 동부의 탄광촌 콜브룩으로 떠난 건 이 때문이다.

 


 

실바는 마약, 범죄, 가난, 폭력 등의 문제가 가득한 탄광촌 콜브룩에서 가난한 노동계급이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의 힘겨운 일상에서 어떠한 감정의 구조를 구축했는지를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삶과 영혼, 그들의 일상을 잠식한 고통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정치적 가능성을 벼려낸다. 흐릿해지고 있으나 사라질 수 없는 존재들을 위한 정치학 말이다. 저자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삶을 성실하고도 입체적으로 재현하여 지금껏 누구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는 섬세하고 배려 깊은 인터뷰로 노동계급 구성원이 마주한 고난이 무엇인지, 그들은 그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를 조명한다. 이 책이 저자가 콜브룩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직접 듣고 보고 느낀 점을 함께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분석해낸 결과를 이 책에 세세하게 담아 냈다. 저자는 노동계급을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콜브룩의 모든 노동계급이 공통으로 마주한 엄혹한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이들을 백인 남성과 여성, 흑인 및 라틴계 남성과 여성의 네 집단으로 나누어 내부의 차이에도 주목한다. 이로써 저자는 각 인구 집단이 삶, 미래,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가 단순하고 평면적인 차원을 넘어서 복잡하고 정교하게 기획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 백인 남성은 미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이 훼손된 상황에 고립감, 목적 상실,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들은 파편화되고 해체된 남성성의 잔해들 앞에서 길을 잃은 채 서성이는 중이다. 한편 노동계급 백인 여성들은 어떻게든 ‘어머니’, ‘아내’의 역할을 지키려 악전고투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낸다. 콜브룩으로 새로 이주해온 유색 인종은 힘든 상황에서도 미래를 조금 다르게 전망한다. 흑인 및 라틴계 남성은 콜브룩에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걷어내고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가난뿐 아니라 인종에 대한 차별로 어려운 일들을 겪지만 이 모든 고통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과정으로 수용한다. 이는 흑인 및 라틴계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유색 인종 여성들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설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저자는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를 섬세히 검토하는 동시에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적 기획으로 나아간다. 콜브룩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 가난한 노동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연대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파편화되어 개별적으로 생존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노조, 정당, 지역 사회, 공동체, 이웃 등 전통적 준거점을 완전히 휩쓸어 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계발에 탐닉하고 개별적으로 구원을 갈구한다.

 


 

또 그들은 누구도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박탈감에 선거를 포함한 모든 공적 제도를 불신한다. 공적 제도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져 각종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나아가 별다른 노력 없이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으로만 생활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자신을 그런 사람과 구분하고자 한다. 좋은 삶은 자신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가난이 야기한 현실적 어려움과 문화적 수치심을 개인 탓으로 돌리며 자기 자신을 책임의 주체로 내세운다. 요컨대, 콜브룩 노동자들은 정치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태다.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고통이 있다. 저자는 자조, 경멸, 분노, 냉소, 희망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콜브룩에서 ‘고통을 중심으로 구축된 친밀감’을 토대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개인과 공동체가 고통받는 존재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우리’라는 감각을 형성해 다시금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수치스러워하며 숨기는 대신 모두의 경험으로 의미화하면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이 싹틀 수 있다. 저자는 “변화의 가능성은 고통 당사자들이 공동체를 꾸릴 때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의 자원은 가난한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계급적 고통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낡은 희망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스산한 탄광촌 콜브룩.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동맹과 미지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독자는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미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를 공부할 이유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이 전쟁에 이김으로써 우리의 해방을 빠르게 앞당겼으며, 6·25 때 군대를 파견해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는 감사를 느낄 만한 나라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배우고 느낀 바가 없다. 그들의 문화는 경제력에 의해 독자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고, 그들의 민주주의 역시 우리나라의 군부 독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독자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약점인 빈부 격차를 느끼기엔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뉴스나 소식은 자주 들어왔다. 쉽게 말해서 독자는 미국을 부러워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나라였다.

여전히 인종 차별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은 나아지고, 소수자 및 소외 계층에 대해 우리보다는 사회적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마저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의 시민(국민) 보호보다는 부자를 위한 나라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완전 버렸다. 그토록 탄탄하고 우월한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어찌 자국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는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회 하층은 감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의료비가 비싼데도 또 의사나 의료 재단(큰 병원)은 왜 수입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적을까 하는 의심도 덧대어졌다. 이 책은 미국의 하부 구조라고 불리우는 사회 저소득층, 인종, 성별, 학력 등에서 빈자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던져주었고, 그 삶은 우리는 그래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계 최강국이고 최부국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인가? 사라져야 할 사람들인가?

 


 

저자는 이 책의 뒷 부분에 별도로 '결론' 「죽은 공동체에 생명을 불어넣기」라는 장(章)을 마련하고 "펜실베니아의 무연탄 탄광촌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태도와 정책 선호를 탐구하는 데서 출발했다"며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운 대신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한때 사적인 자아를 정치 영역과 연결해주던 각종 제도와 분리되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지금 아주 미미하고 느린 변화는, 이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위협과 이들의 역사에서 패턴화되어 나타나는 적대와 고립에 맞서는 매일의 국지적인 도전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꾸준한 전개 과정과 그 우발성 속에서 희망은 보글보글 피어오른다고 다소 희망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사실 이런 미국의 현실에 대해 독자가 큰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가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이 책을 읽는다. 생각보다 매우 자세하게 탐구했다는 데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외로 쉽지 않은 문장으로 계속돼 다소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문장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독자의 미국에 대한 무지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정수남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의 '해제' 「빗장 걸린 세계의 묵시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독자의 무지와 우려를 훨씬 큰 울림으로 해소해 주었으며 독자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말이 담겨 있어 눈길이 간다. "실바는 콜브룩에 거주하는 노동계급을 인종 그리고 젠더별로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드러내지만 노동계급의 삶 전반을 관통하는 사회구조적 논리를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는 실바가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계급 불평등을 '투견장'과 '빗장 걸기'라는 다소 도발적인 개념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실바의 논의는 우리 사회에도 함의하는 바가 매우 크다."(p.357~360)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계급 인간 군상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외국인 혐오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하루 9달러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데, 극도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는 데, 우리가 타자와 반드시 맺고 살아가야 하는 관계를 유실했다는 데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중략) 이들의 증언으로 판단컨대, 노동계급 가정에 우호적인 경제 정의를 정강의 중심에 놓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성장의 기회를 독려하고, 금융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의 결탁을 서슴지 않고 비판하는 정치인이 이들의 지지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pp.333~335)

 

저자 : 제니퍼 M. 실바(Jennifer M. Silva)

인디애나 대학교의 ‘폴 오닐 공공 및 환경 업무 대학’ 조교수(2019~)로 정치 문화, 사회 계급, 불평등, 성인기로의 이행 등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4년 웰즐리 칼리지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석사 학위를, 2010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크넬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로 있으면서 문화와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 박사 후 과정 중 경제 불안이 사회적 유대감과 시민적 참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2013년에는 첫 저작인 『커밍 업 쇼트』를 출간했으며, 대중적 글쓰기도 활발히 병행해 연구 내용을 『뉴욕 타임스』, 『뉴요커』, 『보스턴 글로브』, 『디 애틀랜틱』, 『보스턴 리뷰』, 『살롱 닷컴』 등에 실었다. 2019년에는 쇠퇴 중인 한 탄광 도시 거주민들을 인터뷰해 이들이 미국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우린 여전히 여기에: 미국 심장에 놓인 고통과 정치』를 출간했다.

 

역자 : 황성원

학부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지리학을 공부했다. 환경, 여성, 노동, 도시 등을 주제로 한 여러 학술서와 대중서를 번역해왔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어느덧 업이 되었다. 책을 통한 사색만큼 물질성이 있는 노동을 사랑한다. 물론 균형 잡기는 항상 어려운 문제다. 옮긴 책으로 『자본의 17가지 모순』, 『백래시』, 『캘리번과 마녀』, 『혼자 살아가기』, 『저항주식회사』, 『쫓겨난 사람들』, 『칼을 든 여자』, 『염소가 된 인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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