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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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는 지금까지 독자가 접했던 나치 독일과는 다른 시각에서 당시 독일군의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막강 군사력으로 로마 제국 같은 제 3제국을 꿈꿨던 독일은 패전을 앞두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 있었다는 폭로성 내용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미군의 참전과 구 소련의 병합에 실패함으로써 사실상 제 3제국 꿈은 사라졌다는 게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사학자들의 견해만 들었다. 유대인 집단 학살로도 표현이 모자라는 인종 학살로 역사상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에 관해서는 낱낱이 해부된 듯 여겨진다. 종전 후 8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이다. 저자 노르만 올러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 나치 독일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더 연구할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헛된 시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다.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저자인 독일 작가는 기자 출신답게 다큐를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나치의 마약 사용 문제를 파헤친다.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허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바탕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소설적으로 풀어썼다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나치의 실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포착한다. '마약' 사용이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돼 약물중독설이 나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선 병사들에게도 마약에 중독될 정도로 수시로 투약했다는 사실은 새삼 전쟁의 참혹한 면과 잔인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해 거북하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은 사이코패스 집단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배워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나치 독일은 마약이 제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 노르만 올러는 직접 자료를 찾고 분석해 나치 독일 시대를 마약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했다. 19세기 모르핀, 코카인 등 마약성 약물의 개발부터 1920년대 독일에 불어닥친 독극물 광풍과 제약 산업의 성장,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마약 배급, 마약에 중독된 히틀러와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의 의존 관계까지, 마약으로 얼룩진 나치 독일의 음습한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독일의 언론인 출신으로 소설가로도 활동해온 저자의 첫 논픽션 작품이다. 저자가 나치의 마약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독일은 물론 미국의 국립기록보관소의 것까지 방대한 자료를 찾아가며 쓴 결과물이다. 실감 나는 묘사와 대범한 비유법 등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료에 근거한 것만 아니라 저자의 추정을 통해 연결되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다.

사실 나치의 악행과 마약을 연결 짓는 과잉 해석은 저자 스스로도 경계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그 시대가 중독성 물질을 너무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탈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며 "마약은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을 강화했을 뿐"이라고 책말미에 적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2015년 처음 출간돼 화제가 된 책으로 원제는 『Der totale Rausch: Drogen im Dritten Reich』, 직역하면 『완전한 도취: 제3제국의 마약』이다.

 


 

저자가 기자 출신의 현직 작가란 점은 책의 서두에 특징을 드러낸다. "다음주도 지난주처럼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페르비틴을 다시 보내주세요. 보초를 설 때 아주 유용해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페르비틴을 보내 주세요."(p.71)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는 하인리히 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서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다. 그가 거듭 요청한 페르비틴의 주성분은 놀랍게도 메스암페타민.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마약류로 규제하는 물질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 메스앞페타민의 '놀라운 효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물질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전쟁의 고단함을 이겨 내고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입에 대기 시작한 군인 시절이었다. 뵐은 페르비틴 복용에 대해 무척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런 태도에 비추어 보건대 이 물질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다만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 아무렇지도 않게 각성제를 언급하는 걸 보면 그의 가족도 하인리히가 약물을 자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이제는 편지를 쓸 시간이 충분합니다. 그럴 만큼 마음이 안정되었고요. 물론 온몸이 축 늘어질 만큼 무거운 건 여전해요. 어젯밤엔 두 시간밖에 못 잤고, 오늘 밤에도 세 시간 이상 못 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곧 생기가 돌 거예요. 페르비틴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러면 고단함도 눈 녹듯 사라져요. 바깥은 보기 드물게 환한 달빛이 흐르고 별이 빛나고, 무척 추워요." 편지 내용으로 저자는 뵐에게 최대의 적은 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후 편지에는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앞으로는 2~4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써도 이해해 주세요. 오늘은 페르비틴 때문에 편지를 썼어요."

 


 

당시 나치 독일은 잠을 제대로 못 잔 병사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위해 각성제를 투여함으로써 전투력을 보충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될 정도로 각성제, 진통제 등에도 각종 마약류가 투여된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저자는 밝힌다. 책에 따르면 19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핵심 성분인 모르핀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 주는 이 '마법의 약물'은 의학적 목적뿐 아니라, 제약 회사의 큰 돈벌이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헤로인, 코카인, 그리고 메스암페타민이 주성분인 〈페르비틴〉이 출시되었고, 독일의 제약 회사들은 크게 성장했다. 강력한 마약인 페르비틴은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해 학생, 간호사, 배우, 작가, 노동자, 소방관, 미용사, 운전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소비되었다. 심지어 메스암페타민이 함유된, 〈프랄린〉이라는 과자가 생산되고 버젓이 광고까지 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군의 광기와 2차 대전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었다.

육군을 비롯해 공군, 해군까지 독일군은 병사들에게 페르비틴을 배급했다. 마약 복용으로 각성된 독일군은 밤낮 없이 진군했고,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돌격했으며, 지나는 곳을 가차 없이 밀어 버렸다. 마약 복용은 수뇌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독일 장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에르빈 로멜과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항공 국장 에른스트 우데트 역시 마약을 즐겼다. 곳곳에서 병사들과 장교들에게서 의존성과, 우울, 불안, 의욕 상실 등의 부작용을 목격됐으나, 국방 생리학연구소 소장인 오토 랑케는 모든 상황에 눈을 감았다.

 


 

독일에서 페르비틴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알약이었고, 그 사용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실은 페르비틴만 그랬던 건 아니다. 각종 화학물질 제조의 강국이었던 독일은 앞서 1920년대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모르핀 생산국, 헤로인 수출국이기도 했다고 한다.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은 겉보기에 엄격한 반(反)마약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 책이 그려내는 실상은 이중적이었다. 페르비틴의 경우 민간에선 1939년부터 처방전을 의무화하고 1941년 마약류 규제에 포함시켰는데, 육군과 공군은 무려 3500만정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책에는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진격을 비롯한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페르비틴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며칠씩 밤잠을 자지 않고 행군하는 병사들만 아니라 야간 공습에 나선 전투기 조종사들도 복용해 '폭격기 알약'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앞서 페르비틴의 각성효과를 주목한 국방 생리연구소 소장 오토 랑케는 임상실험을 통해 그 위험성도 알게 됐지만 이에 대한 경고는 결과적으로 시늉에 그쳤다. 독일군이 활용한 건 메스암페타민만이 아니었다. 1인용 어뢰 공격 등에는 코카인 등도 알약이나 껌으로 동원됐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는 어땠을까.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모렐은 '환자 A' 등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대한 방대한 진료기록을 남겼는데 날짜로 885일 분량에 달한다. 그중 주사약 투여가 약 800회나 된다. 모렐의 주사는 비타민이나 포도당에서 시작해 동물에서 추출한 호르몬 제재와 스테로이드 물질까지, 나중에는 무려 80가지 넘는 약물을 뒤섞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오이코달도 종종 주사했다.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약 두 배에 달한다는 마약성 약물이다.

 


 

저자는 모렐이 진료기록에 손글씨로 '오이코달'이라고 적은 것뿐 아니라 'x'라고 쓴 항목 역시 오이코달로 추정한다. 책에는 히틀러가 주사 전후로 급변하는 모습, 독일에 불리해지는 전쟁의 흐름과 함께 신체적으로도 몰락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모렐은 히틀러의 후광을 통해 사업적 확장도 꾀했지만 결국 미군에 체포됐고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도 손쉽게, 그리고 원하는 때에 마약을 투약받았다. 처음에 그는 만성 소화 불량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 테오도르 모렐을 만났으나, 이후 모렐은 히틀러의 주치의로서 각종 마약을 처방했다. 평소 기력 유지를 위해 비타민, 포도당 주사를 맞았던 히틀러는, 전쟁 초기 동물성 호르몬 제제와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고, 1944년 후반에는 코카인과 오이코달을 맞았다. 오이코달은 합성 마약으로,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두 배에 달했고, 투여 방법에 따라 헤로인보다 강력한 쾌락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약물이다.

전쟁 중 벙커 생활을 하며 마약에 깊숙이 빠져든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욱 의존했다. 마약을 맞지 않고는 작전 회의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모렐은 히틀러를 뒷배경으로 삼아 철저히 개인적인 이득을 취했다. 〈비타물틴〉이라는 복합 제제를 출시해 큰돈을 벌어들였고, 점령지에서 나치군이 몰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각종 약물을 생산했다. 우크라이나의 도축장에서는 고가의 도핑제와 스테로이드 생산의 원료인 동물의 갑상선, 부신, 고환, 전립선, 난소, 쿠퍼 샘, 담낭, 심장, 폐 등을 싹쓸이하는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모렐은 악의 화신 같다. 독일은 한때 순수 아리아인의 피를 강조하며 대외적으로 마약 퇴치 운동을 펼쳤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마약성 물질을 취한 나치 독일의 위선을 보여 준다. 나치 독일군은 마약을 작전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고, 마약은 히틀러와 군 수뇌부의 머릿속에 내재된 잔인함을 강화했다. 수많은 연구에도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히틀러는 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독재자가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자 : 노르만 올러(Norman Ohler)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독일 작가. 1970년 서독 츠바이브뤼켄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슈테른』, 『슈피겔』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1995년 『할당 기계DieQuotenmaschine』로 데뷔했는데, 세계 최초의 인터넷 소설이었다. 이어 2001년 발표한 『중심Mitte』은 『슈피겔』로부터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02년 발표한 『폰테 시티Ponte City』 역시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 뉴욕, 베를린,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하여 〈도시 3부작〉으로 불린다. 2004년 괴테 인스티튜트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면서 현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글을 썼고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도 머물렀다. 2008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팔레르모 슈팅Palermo Shooting」에 각본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DJ로부터 나치들이 약물에 절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조사를 시작했다. 5년 동안 독일과 미국 기록물 보관소를 샅샅이 뒤졌고, 기존 연구에서 빠진 수많은 원본 자료를 찾아내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5년 첫 번째 논픽션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를 썼다. 이 책은 다음 해 영어로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현재까지 30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파라마운트와 영화화 계약도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올러는 우리가 오늘날 마약으로 분류하는 약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석하고 나치 독일의 고위층 특히 아돌프 히틀러 본인도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음을 자세히 다룬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이 책이 역사의 전체 그림을 바꿔 주었다고 찬사를 보냈으며, 히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이언 커쇼와 군사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등도 호평했다. 이후 2017년 역사 범죄 소설 『삶의 방정식Die Gleichung des Lebens』, 2019년 두 번째 논픽션 『하로와 리베르타스Harro und Libertas』를 출간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를 포함하여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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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
김부건 지음 / 밀리언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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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데 선뜻 실행하기 힘들 때, 일상적인 인간관계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는 이 책을 읽어라. 인간 삶의 원칙과 방향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인문고전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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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
김부건 지음 / 밀리언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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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는 "무한한 상상력의 가치를 증명하면서 '작은 성공의 누적(累積)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 감출 수 없는 진실의 무게는 지식과 경험이 균형을 이루고, 이론과 현실이 조화로울 때 그 가치를 알려준다"고 홍석기 글로벌 리더십 연구소 대표는 추천평에서 쓰고 있다. 또 김택환 경기대학교 교수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어떻게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한다. 기본은 바로 생활 지혜의 양식으로,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 맹자, 노자 등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서고금의 지혜를 현대판으로 해석해서 길라잡이를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독자가 읽어보기에 두 분의 추천평이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서평 서두에 제시했다. 처세술의 전문가라 불리는 데일 카네기도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황을 해결하려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자기계발 책으로 출판됐다. 사실 자기계발 책이니 인문학 책이니 하는 분류는 존 듀이의 도서 분류 방법에 따라 도서관에서 책을 보관하고 필요한 사람이 찾아 읽기 쉽게 하기 위해 분류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은 독자가 원하는 책을 찾기 쉽게 하기 위한 분류이다. 자기계발서는 인문학부터 공학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누구라도 쓸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인문학적, 그중에서도 고전에서 찾아낸 자기계발을 위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 김부건은 한국건설교통신기술협회 기술심의위원이자 BJT 부사장이다. 전공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왜 자기계발을 위한 소재를 고전에서 찾았을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논어』가 이유가 될 것으로 독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논어』를 인용해 풀이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계속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왜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 혹은 ‘왜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논어』는 ‘과이불개’라는 한마디로 명쾌한 답을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문고전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도 언어로써 인간의 통찰력을 깨우친다. 이것이 바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고전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저자가 고전을 이용해 자기계발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교수신문〉은 매년 전국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고사성어’를 선정한다. 독자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 기억이 있다. 신문에서 뽑은 2022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교수들이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표현한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p.228)를 꼽았다고 한다. 이 말은 『논어』 「위령공」에 나오는 말로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 하여 “허물을 알고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허물이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자한(子罕)」에서는 과칙물탄개(過則勿憚改), 즉 “잘못하거든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과거와 비슷한 참사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고치지 않고 방치하면 더욱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한 번쯤 읽어보았을 『논어』는 2500년 전에 중국에 살았던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글이 어떻게 2022년의 사회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은 변하지 않기 때문으로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문고전에서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즘 기업의 가장 큰 화두는 다양성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다양성의 가치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만들어진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을 『중용』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라는 말로 강조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인문고전은 현상을 명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답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람을 가까이해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역시 『논어』가 답을 준다.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 즉 “가능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인격이나 지식 면에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유익하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지고 과거의 낡은 지식을 여전히 고수하며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꼰대들에게 공자는 이렇게 한마디 할 것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모르는 걸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독자는 『논어』를 읽긴 했지만(그것도 여러 번) 아직도 내용의 참뜻을 모두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고 책을 통해서 해석하고 무슨 뜻인가를 아는 데 그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독자처럼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도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굉장히 쉽게 풀어썼다.

 


 

“자신의 단점과 일상의 루틴에 갇혀 있다 보면, 삶이 비루해지고 느는 것은 한숨과 두려움뿐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살아가던 저자는 좀 더 의미 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방황하던 끝에 고전에서 길을 찾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세상이 일사천리로 바뀌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정신없이 살아가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럴수록 근본 뿌리가 튼튼해야 시시때때로 덮치는 어려움에도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고 깨달았다. 삶을 통찰하는 지혜, 좋은 인성과 삶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대인관계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 바로 인문고전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옛 선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통찰력을 깨쳐서 남보다 먼저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일상을 한숨과 함께 허투루 흘려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에서는 우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인문고전에서 100개의 문장을 뽑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거리는 성공, 인간관계, 자기관리,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 4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맞닥뜨리기 쉬운 일상의 사례를 들어 고전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풀어냈다. 4개 파트 100개의 장(章)으로 엮었다. 공자의 『논어』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 『주역』, 『중용』, 『장자』, 『회남자』, 『묵자』, 『한비자』 등 장의 주제에 따라 적절히 인용했다. 더불어 데일 카네기를 비롯해 성공한 사람들의 지혜를 인문고전과 연계해서 더욱 확실한 답을 제시한다. 이에 더해 각종 문학에서 필요한 문구를 인용하기도 했고, 격언이나 명언도 덧붙였다. 물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최근 유행한 단어 욜로(Yolo)는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야 한다. 인문고전의 한 문장이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어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독자는 『논어』를 가장 처음 접했을 때 누구나 읽었을 "학이시습지"라는 문구가 기억에 생생하다. '공자 3락'이란 말로 비유하는 그 문장이다. 이를 토대로 이 책의 저자가 밝히는 의미를 섞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문구다. '익히다'를 '외우다'로 임의 번역해 알고 있었다. '자주 읽어 외우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뜻은 외우라가 아니라 실천(습관화)이다는 점이다. 배우고 수시로 실천해 습관이 되면 즐겁다는 말이다. 습관이란 반복 실천을 의미한다는 깨우침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특히 자기계발에서는 '생각-실천-습관-인생'의 선(善) 진행을 금과옥조로 삼는다. 즉 좋은 생가을 하고 숙고를 거쳐 실천을 거듭해 습관이 되면 인생이 변화한다는 선순환을 의미한다.

이 책 52장 「탁월함은 꾸준한 습관에서 나온다」를 읽어보면 독자의 깨우침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논어』 〈자한〉의 문장을 이용한다. "삭이 나도 피지 못하는 꽃이 있고 꽃은 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는 말이다. 저자는 '뭐든지 시작했다면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노력할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비슷한 사자성어로 자강불식(自强不息)이 있다고 한다. '오직 최선을 다하여 힘쓰고 가다듬어 쉬지 아니하며, 수양에 힘을 기울여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풀어썼다. 매우 높은 학식과 덕행을 가졌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군자라도 이를 본받아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품성, 도덕을 닦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으로, 『주역』에서 자강불식은 '스스로 노력하여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해 준다. 이에 덧붙여 아리스토텔리스는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탁월한 사람이라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즉,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마지막 장 「리더의 권한은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하고 되새겨봐야 한다. 특히 한국에는 '정치'는 없고 '정치가'만 있다는 말을 듣는 정계이다. 비판이 아니라 조언을 하는 것이다. "나라의 좋지 못한 일을 도맡아서 책임지는 자가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노자』 〈78장〉에 나온다고 출전을 밝힌 저자는 뜻풀이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나라의 가장 나쁜 점, 가장 더러운 점을 스스로 떠맡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임금 된 자는 모든 백성의 죄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 임금이 나랏일을 책임지는 것은 하늘의 도다." 저자는 특히 공자의 문구 '인무원려 필우근우(人無遠濾 必有近憂)'라 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저자 : 김부건

 

한국건설교통신기술협회 기술심의위원이자 BJT 부사장이며 인문 및 동기부여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 출신 전문 엔지니어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은 유일·유한한 것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일찍이 깨닫고 안정적인 직장이 주는 권태감과 변화가 적은 일상을 박차고 나와 늘 자신이 꿈꾸던 삶과 적성·소질에 맞는 일들을 찾아 동분서주해왔다. 엔지니어 출신 인문학 강연자라는 특이한 이력을 쌓는 과정에서 동양고전과 인문학을 통해 인생의 길을 발견했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문고전의 힘을 알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주고자 집필에 매진해 어려운 인문고전을 실생활에 접목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자기계발서’로 풀어냈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주도적인 삶의 지표를 찾아 더 당당하고 행복한 인생을 잘 조율해나가기를 희망한다. 저서로는 《동양고전의 힘》 《파워링커 혁명》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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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였던 나
유정아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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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은 남녀 구분 없이 우리 모두에게 반동을 넘어 반성을 지나 연대로 가는 길일 뿐이라는 점은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와 함께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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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였던 나
유정아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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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언젠가 너였던 나』는 에세이다. 신변잡기를 적은 에세이가 아니라, 페미니즘과 인간의 삶, 삶의 진리에 대해 썼다. 주제가 무겁다. '언젠가 너였던 나'란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주제다. 저자 유정아는 「프롤로그」를 통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기의 나는 과거의 '나'들의 총합인가?"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 여기의 나까지를 포함한 나일 것인가? 미래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이른 우리가 어떤 태도로 나아갈 때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시작부터 강렬한 느낌의 가설을 내세운다. 어쩌면 우리 사회 문제, 혹은 인류 삶의 문제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 때 필요할 듯한 명제들이다. "작금의 이성주의적 시선들은 역사가 축적해 길어 올린 것이지 뜬금없이 외부로부터 침입한 것이 아니다. 한 평범한 인간의 궤적 안에서도 그 시선들은 자라왔다. 여성인 나만이 아니라 남성이나 그 시각에 반대하는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 안에 상처 받은 약자가, 소수자가 들어 있다." 저자의 전제는 매우 단호하다. 반대할 수 없는 명확한 전제나 명제를 글의 서두에 내놓는 것은 자신의 사유가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할 때 주로 사용한다. 여성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상처 안에 소수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전제 말이다. 저자는 다시 설명을 붙인다. '여성'이 들어가 있을 뿐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다. 강자와 승리자만의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함을 역사는 말해준다는 저자의 주장이 예사롭지 않다.

 


 

저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신(神)이 있다고, 대문자(God)가 아니라 소문자(god)로 자신을 낮추는 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 신은 남과 여를 갈라서 사랑하지 않고 수염이 없는 자와 수염이 있는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인간이라서 지닐 수 있는 마음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 있다. 신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도 신을 본떠 그 다정함을 닮을 수는 있다. 나 아닌 ‘너’에게서 내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그 기억으로 너를 공감하며 너의 옆에 같이 설 수 있다. 저자는 다시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에게는 성령이나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보낼 것 같았거든요.” 사람이 사람의 옆에 서는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이 같은 저자의 인식은 아마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주장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인류학이나 생물학, 문화인류학 등 과학 부문에서는 가능성을 말하더라도.

저자의 남녀 구별이 없는 원시(태초)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1부 1장 「부치지 않은 편지-아욱」에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설 같은 주장도 이어진다. 사실상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 남녀 구별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이 장에서 저자는 독일의 수도원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살았던 12세기 중반. 장소는 아직 칭기즈칸(1162~1227)이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이 지역을 휩쓸기 전의 중앙아시아다. "어느 날 황양의 한쪽 목초지에 차려진 흉노의 천막에서 붉고 찬 기운의 남자아이와 검고 울지 않는 여자아이가 한꺼번에 태어났어요. 물론 세상으로의 완벽한 동시 입장은 아니어서 여자아이가 먼저 엄마 뱃속에서 나왔고 조금 시차를 두고 남자아이가 떨어져 나왔지요."(p.13)

 

 

아이들이 자라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야채죽의 야채 이름이 무엇인지 어미에게 물었다. 검은 고요는 자신의 이름을 못 전하더라도 그 야채의 이름만큼은 아이들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형제와 함께 좋아하던 그 야채. 검은 고요는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려 발음해 보았다. "아-흑-." 애정과 그리움과 사무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만든 말이었다. 아흑. 그렇게 중앙아시아의 동규 혹은 파루초는 이 땅으로 와서 '아흑'이 되고 '아옥'이 되었다가 오늘날 '아욱'이라고 부르는 채소로 남았다는 인류 창조 신화를 이야기한다. 검은 고요는 어떻게 됐을까?

책에 따르면 늘 말 달리던 검은 고요는 말에서 내린 삶을 받아들였다. 한곳에 머무르며 아흑을 기르고 거두고 끓여먹으며 사는 삶. "탈출하는 길을 발견한다면 그 누구도 마다치 않는다"라고 한 이븐 할둔(1332~1406)의 『역사서설』 속의 글처럼, 정주의 삶이 초원의 삶보다 좀 더 편안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용기와 담대함일 수 있다. 하지만 늘 가슴 한편에서는 말 위에서 보던 풍경이 그리웠고, 그 속도를 잊지 못했고, 빨리 살고 빨리 죽는 황야의 삶,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이 익숙하다 여겼다. 검은 고요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깊이 사랑했지만 검은 고요가 더욱 깊이 사랑하는 건 그와 함께 세상에 나온 형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형제이자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소년. 말 못하는 자신의 몫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채 굳게 다문 입술. 자신이 따스하게 잡아주던 붉게 찬 손. 검은 고요가 진정으로 그리워한 건 나였던 너, 남성과 여성을 넘어선 자신, 말하는 자이자 말 안하는 자, 붉고 찬 자이자 검거나 따스한 자, 말과 함께 살아가던 저 너른 들의 존재들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욱은 형제의 굳게 다문 입술 같은 단어이라는 것. 그 입술 너머의 접촉이자 침묵이다.

 


 

독자로서는 난감하다. 저자의 글이 너무 수준이 높은 데다가 인용되는 부분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의 연속이고, 또 내용조차 쉽게 수긍이 안 되어서 더욱 당황스럽긴 하다. 그러나 정준희(언론학자, KBS 열린토론, MBC 100분 토론 진행자)의 추천평을 읽고서 내용의 이해에 좀더 다가갈 수 있다. "유정아라는 인물 안에, 우아함과 소년스러움이라는, 성별과 나이를 가로지르는 복합적 품성이 병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한다. '성(城)안에 살면서 성(性)에 갇혀 있지 않은 만능 마녀'와 그런 '사람(을) 볼 줄 아는 소년'에게 내지른 만세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네 가지 자아상 모두를 향한 환호성이었을 테다. 그/녀의 성(城/性/聲) 안에 가꿔온 도서관과 화실, 정원과 호수를 구경하러 온 여러분 앞에서, 이 소년/마녀는 “손님이 오실 줄 몰라 머리 손질을 못 했다”라며 머쓱하게 그러나 주저 없이 투구를 벗을 참이다."

추천평과 다음 저자의 페미니즘적인 주장을 읽어보니 비로서 말뜻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자는 것이 아니다. 과도기적으로 권력을 가져야만 바꿀 수 있다면 수단으로서는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에는 다 같이 힘을 빼자는 것이다. 힘과 권력의 개념 정의를 다시 하자는 것,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못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 뺌으로써 더할 수 있는 다른 셈법을 가져보자는 것, 돌고 돌아 다시 남성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분 없이 다른 차원의 세상을 향해 가자는 것, 좀 더 공상해 보면 남녀 구분 없이 ‘헤아리는 더듬이’를 가진 새로운 종의 출현을 기다려보자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의 깊이이다."(p.30)

 


 

어떤 작가의 문장은 과거의 문장이 현재에도 시사성을 가진다. 과거에 이미 현재의 지점을 앞서 고민하고 문장으로 적어내는 것, 이를 진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유정아 작가는 과거의 삶에서도 페미니즘으로 사유하고 깊이 있게 현상을 바라봤다. 페미니즘이 가시화되기 이전부터 삶으로써 이를 직감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작가의 문장은 현재에도 그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에 날카롭게 회귀하여 우리의 지금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헤아리는 더듬이”는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며 연대로 나아갈 것이다. 무지개 빛깔로 거리를 채우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공유하기도 할 것이고, 환경을 위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운동을 실천하기도 할 것이고, 바로 옆의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할 것이다. 혼자서 부르짖던 작가는 연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예견이 미래(지금의 현재)에는 당연한 문장이 되길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유정아 작가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삶은 어떨지 저절로 궁금해진다. 과거에 지녔던 가치관이 현재에는 어떻게 변모하고 예리하게 다져졌을지 호기심과 기대가 싹튼다. 궁금증은 과거를 진보적으로 살아왔던 작가이기에 현재를 누구보다도 적확하게 살아가지 않을까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 궁금증은 2000년대 이전의 ‘진정성’으로부터 경험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수염 없는 삶을 택하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 수용할 수 없는 사회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 버림받아 보아야 한다. 세상에서 버려져야 할 것은 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자체이다."(p.181)

위의 문장을 보며 어떤 이는 성별 구분에 맞서는 여러 인물이 떠오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현 사회의 세태를 가늠해 볼 것이다. 세상에 버려져야 할 것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 사회 자체라고 말하는 작가의 문장은 비장함과 의지를 가진 존재에 대한 슬픔이 공존한다. 의지를 가진 존재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조금씩 진보했다. 그 진보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슬픔을 함께 통념해야 한다. 진보는 과거를 올바르게 애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을 잘 애도하고 그 힘으로 다음을 도모하는 것. 거기서 미래라는 창구가 열릴 것이다. 저자의 과거의 문장이 지금의 현재를 예감했듯이 현재의 문장은 미래의 어느 날을 예감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데이터와 현재의 트렌드를 잘 읽어나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목한 미래의 창구는 김초엽 작가에게서 시작된다.

"김초엽의 작품 속 존재들은 성이 지워진 채 유기체로서 삶을 살아간다. 두 가지 성(性과 姓) 모두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약자와 소수자가 존재하고 차별과 배제가 남아있고 약탈과 희생이 따르고 장애와 고통이 선명하지만, 전 우주로 공간이 확장되고 미래로 시간이 확장된 김초엽의 세계에서 두 성이 지워진 존재들은 한결 숭고한 차원의 고민을 한다. 숭고한 고민의 세계로의 초대가 김초엽의 미덕이다. 그 묵직한 초대가 고맙기 그지없다.(p.295-296)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아욱-생활 속의 존재〉, 2부 〈성당-존재 속의 사색〉, 3부 〈사색 속의 진리〉, 4부 〈표절-진리 속의 공감〉이다. 각 부에는 모두 60의 장이 마련돼 독자들을 기다린다. 아직 완전히 저자의 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각 부의 제목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활 속의 존재-존재 속의 사색-사색 속의 진리-진리 속의 공감'은 집중해 살펴볼 작정이다. 책의 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저자의 의도적 제목 배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독자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표현한다면 미래에는 우리들이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아닌 좀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 속 인간의 태초의 모습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내면에는 그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순간들이 보장하고 현재의 문장들이 꿈꾸게 만든다. 미래의 우리가 성별의 구분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인간 옆에 서는 일을, 우리는 상상하고 실현하게 될 것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저자 : 유정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1996년 동안 KBS 아나운서로 일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말하기 강의와 프리랜서로 방송, 음악회 진행 등을 했고 연극 <죽음에 이르는 병>, <그와 그녀의 목요일>과 영화 <재회>에 출연했다. 영화 <재회>는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저서로 《언제나 지금이 아름다운 여자》,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클래식의 사생활》,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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