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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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안개』는 소설을 각색한 시나리오다. 1967년 김수용 감독이 흑백 영화 〈안개〉로 제작,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 독자들이 잘 아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단편소설로서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되면서 대단한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진기행」은 소설가 김승옥을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단숨에 올려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승옥이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의 사회상과 연애관, 결혼관 등이 엿보이며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의 의식과 세태까지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이 소설에 대해 한 문학평론가는 "한 개인이 귀향과 탈향의 과정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자발성, 주체성, 창의성은 버려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또 이 작품은 안개로 상징되는 허무에서 벗어나 일상 공간으로 돌아오는 한 젊은이의 귀향 체험을 통해 개인의 꿈과 낭만은 용인되지 않는 사회조직 속에서 소외당한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문학사적 위치로는 1950년대의 문학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1930년대의 모더니즘을 성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후 교과서에도 수록되고, 최근에는 그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표현력 등을 필사하는 필사책으로도 출간되고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바닷가 조그만 도시다. 저자 김승옥이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이 작품의 무대를 순천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작품 속 내용을 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진기행」을 원작자인 김승옥은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도 맡았다. 소설가가 영화인으로도 데뷔한 셈이다. 이 영화 시나리오 집필을 필두로 작가 김승옥은 1980년대 후반까지 1편의 감독과 15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각색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책 앞 부분에 '작가의 말'을 통해 저자는 두 가지의 의미 있는 고백과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안개〉는 영화작업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소설가로서의 첫 번째 각색 작업이었기에 감독을 비롯한 전문 영화인들이 보기에 시나리오로서는 다소 기대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을 것임에도 김수용 감독을 비롯한 제작자, 조감독 등 스탭 어느 누구도 작품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원작자에 대한 예의랄까 또는 소설로서 원작이 받았던 호평에 버금가는 ‘훌륭한 시나리오’가 나오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지루하고 어수선한 촬영 현장에서의 고된 작업이 끝나고 일차 편집을 거쳐 성우 및 효과음 녹음이 진행될 때까지도 영화의 전체적인 윤곽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원작자나 각색자의 의도가 어떻든 어차피 영화는 필연적으로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에 촬영기간 뿐 아니라 후속작업을 하는 중에도 감독의 의중에 따라 대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원작자는 문학성에 비중을 두지만 감독은 흥행성에 더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영화 주제가 '안개'와 관련 "1967년 어느 날 이봉조 선생이 전화로 들려주는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떠오르는 느낌으로 써 내려간 주제가 〈안개〉의 가사 중 내가 써준 마지막 부분의 가사는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내 여인아 눈물을 감추어라”였는데 완성된 노래를 들어보니 ‘내 여인아’를 빼고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부분은 다 그대로인데 그 부분만 바뀐 것은 아마도 가수가 부르기 편하게 이봉조 선생이 손을 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갔는데 요즘 영화 〈헤어질 결심〉을 계기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노래의 작사자를 우연히 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는 게 아닌가. 수소문해보니 전에 방송사에 계시던 분이라는데 이미 고인이 됐다고 한다. 이봉조 선생도 고인이 된 마당에 어떻게 해서 작사가의 이름이 바뀌었는지 알아 볼 길이 없어진 게 못내 아쉽다."고 밝힌다.

고 이어령 선생은 "「무진기행」은 장소의 문학으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후덥지근한 수면적인 생의 내면적 상태인 '지도의 문학'인 것이다. 시인 이상(李想)은 그것을 '볕이 드는 아내의 방'과 '볕이 안 드는 자기의 방'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방'보다 훨씬 넓고 큰 한 지방의 장소로서 보다 여실히 그려내고 있다... 일상적인 생활이 난파할 때, 때때로 우리는 그 장소로 간다. 즐거운 듯한, 쓸쓸한, 그리고 무의식의 내면속에서 ‘무진’의 안개는 피어오르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원작 소설의 내용은 첫 장면이 주인공 윤희중(영화에서는 윤기준)이 고향 무진으로 내려가면서 시작한다. 무진은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안개가 유명하다. 윤희중의 고향 방문은 아내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으로 그는 장인과 아내의 계획에 따라 처가 소유의 제약회사의 전무로 승진할 예정이다. 윤희중은 무진에서 중학교 동창으로 세무서장으로 근무하는 '조'와, 모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 박선생과 음악을 가르치는 음악 선생인 하인숙과 술자리를 같이 한다. 이 술자리에서 하선생은 세무서장의 요청으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는데, 윤희중은 하선생에게 연민을 느낀다. 술자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윤희중은 후배 박선생이 하선생을 좋아하며 세무서장으로 출세한 '조'가 하선생을 결혼 대상자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선생과 함께 밤길을 걷게 된 윤희중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하선생의 부탁을 받게 되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다.

 

시나리오 #2 터널 속(낮)

윤의 소리(E): 명산물… 무진의 명산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뼁 둘러 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 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다. 안개는 이 세상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 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들을 둘러 싸는 것이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이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p.23)

 

 

다음날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 윤희중은 어머니 묘를 찾는다. 성묘를 마치고 다시 이모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윤희중은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를 보게 된다. 윤희중은 시체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오후가 되자 윤희중은 '조'를 찾아간다. 흰 커버를 씌운 회전의자 위에 자랑스레 앉아 있는 '조'에게 윤희중은 하선생과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이에 조는 하선생은 집안이 허술한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안 된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조는 하선생이 박선생에게 받은 편지를 자신에게 보여준다고도 말한다. 이에 윤희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후배 박선생이 불쌍하기만 하다.

세무서를 나온 윤희중은 하선생과 약속한 바닷가 방죽으로 나간다. 하선생과 방죽을 걷던 윤희중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며 그 집에서 하선생과 머문다. 하선생은 윤희중에게 서울로 데려가 줄 것을 애원한다. 그는 하선생에게 반드시 서울로 데려가 준다고 약속한다. 이튿날 아침, 윤희중은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는다. 윤희중은 하선생에게 전해주고자 한 편지를 찢어버리며 무진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시나리오 #109 찦차 안(이른 아침)

윤, 쓸쓸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본다. 새벽 거리 독특한 반 수면 상태의 거리 풍경이 지나간다. 오른손에 꿍쳐 쥔 편지 종이를 이번에는 두 손으로 꼬깃꼬깃 접고 있는데 무겁고 비통하게 들리는 윤의 소리. 엷은 안개 속의 풍경이 휙 휙 창밖을 지나간다. 넋을 놓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윤의 옆얼굴이 흔들리고 있다.

(N)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떠나는 연유를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말이란 항상 뜻밖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해 저 자신의 노력을 다한 일은 없습니다만, 당신을 햇볕으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는 있는 힘을 다할 작정이었습니다. 저는 방금 오늘의 제가 무척 행복한 곳에서 살고 있는 듯이 썼습니다. 그러나 인숙이, 인숙이···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순간에 생각나는 것은 다만 인숙의 웃는 얼굴과, (중략) 빙 돌아 뒷면에는 〈어서 오십시오, 당신은 무진 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개 속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 이정표에서 조그만 "끝"자 나타나 커진다.

 


 

소설 속 김승옥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짝이는 빛의 내면과 동시에 속된 일상의 외관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상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윤리와 무책임성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1960년대만 유효할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왜곡된 근대화의 모순 그리고 이에 대한 응전 방식으로 발화하는 새로운 엄숙주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좌초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순천문학관에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김승옥관이 마련되기도 했다.

 

 

"4·19, 5·16직후의 한국문단에서 김승옥은 반짝이는 별이었다.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 고 김지하(시인)

 

소설 「무진기행」의 마지막 부분을 여기에 적어본다. 앞 단락의 시나리오 #109의 부분이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해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자 : 김승옥(金承鈺)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승옥은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1962), 「건」(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1963) 등의 단편을 동인지에 발표했다. 이후 「역사(力士)」(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7) 등의 단편을 196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장」(1977),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면서 절필하기 전까지 2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창작 의욕을 상실하고 절필했다.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의 부고를 듣고 뇌졸중으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김승옥의 작품에 대해 “감수성의 혁명이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그는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승옥의 소설은 대체로 개인의 꿈과 낭만을 용인하지 않는 관념체계, 사회조직, 일상성, 질서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이라는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열망, 곧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김승옥 소설의 중심적이고 일관된 내용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소설은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현실을 압도하는바,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환상수첩」,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생명연습」 등의 초기소설은 환각이나 환상을 쫓는 삶 혹은 현실을 초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두드러진다. 「무진기행」 이후 현실의 엄정한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며, 그의 후기소설은 초기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 대신에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지로 가득 찬다. 「서울 1964년 겨울」, 「야행」, 「차나 한잔」, 「염소는 힘이 세다」, 「1960년대식」 「서울 달빛 0장」 등 김승옥의 후기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스적 열정으로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도를 담은 「보통여자」, 「강변부인」 등에서는 김승옥 소설이 지녔던 문제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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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껍질
최석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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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마그리트의 껍질』은 사고로 최근 2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회사원이 기억을 되찾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목 중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화가가 즐겨 그리는 사과를 모티프로 했다. 이 소설은 인간의 폭력성을 통제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자들과 그들을 쫓는 기억 잃은 주인공 간의 쫓고 쫓기는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이 소설은 정신의학, 뇌공학, 심리학, 문학, 미술 분야가 한데 어우러져 저자가 그리려는 세계에 한 발씩 다가서는 구성을 보인다. 주인공 강규호가 어느 날 눈을 뜨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의 하얀 형광등이었다. 사고가 있기 전 기억은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강규호는 사고로 최근 2년간의 기억을 잃었다. 퇴원하며 소개받은 정신과 의사는 '역행성 기억 상실'이라고 하지만 기억을 찾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 11. 21 ~ 1967. 8. 15)는 벨기에의 화가.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했고, 전후의 팝 아트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1927년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했고, 처음에는 키리코풍의 괴상한 물체나 인간끼리의 만남 등과 같은 풍경을 그렸다. 1936년경부터 이미 데페이스망보다도 고립된 물체 자체의 불가사의한 힘을 끄집어 내는 듯한, 독특한 세계를 조밀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또한 말과 이미지를 애매한 관계에 둠으로써 양자의 괴리를 드러내 보이는 방향도 보여주었다. 「이미지의 속임」(1928~1929, 로스 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 「의외의 대답」(1933, 브뤼셀, 왕립미술관), 「복제불가」(1937,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뷰닝겐 미술관), 「사람의 아들」(1964, 개인소장)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복도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한강 하류의 갈대가 무성한 기슭에서 발견돼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땐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왼쪽 무릎 관절과 9번, 10번 갈비뼈 골절, 뒤통수의 깊은 상처, 저체 온에 의한 쇼크, 의식 불명. 최악의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의 하얀 형광등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는 정육점에 전시된 포장육처럼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뼈는 붙었고 근육은 다시 탄탄하게 힘을 얻었다. 뒤통수의 수술 자국도 잘 아물었 다. 오늘은 다리 깁스를 풀었다. 다음 주면 퇴원이다. 모든 것은 산책하는 절름발이 철학자처럼 천천히, 하지만 견고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가지만 빼고는……."

주치의인 박석준 정신과 의사는 일상생활 중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하라고 노트 한 권을 건넨다. 노트의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같은 허공에 뜬 채 껍질이 반쯤 벗겨진 사과가 그려져 있다<사진 참조>. 이 책에 표지에 있는 그림이다. 강규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노트에 일상을 모두 기록한다. 그러던 중 집 화장실에서 비밀 벽을 찾게 되고, 숨겨진 스냅 사진과 소형 금고를 발견한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가 누군지, 금고 비밀번호가 무엇인지,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기억의 조각들을 찾으며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그는 동네 편의점과 책 대여점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은 즉석 도시락을 자주 먹었고 콜라를 지나칠 정도로 마셨으며 엄청난 독서광이었다는 것이다.

 


 

사고가 있기 전 기억은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두개골 속 말랑말랑한 대뇌피질이 마치 해면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서른둘 인생에서 2년이 송두리째 지워져 버렸다. 사라진 기억 속에 소중한 것이 있지는 않았을까. 날 지탱하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햇볕이 따듯하게 데워놓은 병원 벤치에 앉아 온종일 생각했다. 기억이 있었을 자리에 온갖 상상과 추측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상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몇 년째 계속 사는 투룸, 다니던 직장, 하던 업무, 동료들, 늘 들르는 편의점, 주말이면 산책을 하는 공원과 뒷산, 출근 때마다 마주치는 옆집 여자 얼굴, 사고가 나기 전 구매한 노트북의 가격과 판매점 사장의 얼굴까지도 또렷이 생각났다.(p.10) -「1장. 기억의 흔적」 중에서

강규호는 그렇게 기억을 잃은 채 회사로 다시 복귀하여 회사-집-편의점-책 대여점을 오가는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강규호는 누군가로부터 매일 미행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초소형 핀 카메라를 가방에 설치하여 자신을 쫓는 남자를 촬영한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머리를 다쳐 기억을 상실한 환자가 성격이 반사회적 정신장애, 이른바 '소시오패스'와는 다르다는 말을 해준다. 주인공 강규호가 가끔씩 마음속의 공격성에 대해 자신의 성격 변화인지 단순한 기억 상실에 따른 데서 오는 부작용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데서 오는 혼란을 호소하는 부분에서 의사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가끔 반사회적 정신장애가 나타날 순 있긴 한데 그건 성격이라기보다 일종의 마음의 병이니까 다른 경우라고 봐야 하겠지요.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에서 〈DSM〉이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말로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이라는 것이라는 책인데 미국 정신의학회가 합의한 모든 정신장애를 정의하고, 분류해 전문가가 따라야 할 진단 기준을 제공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입니다. 그 책은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15세 이후에 시작되고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침해하는 광범위한 행동 양식이 있고 다음 일곱 개 중 세 개 이상의 항목에 해당한다.(p.51)

 


 

작중 의사의 말에 따르면 소시오패스와 같은 정신장애는 7가지의 행동 양식을 보인다. ① 사회규범을 지키지 못한다. ② 사기성이 있다. ③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④ 쉽게 흥분하며 공격적이다. ⑤ 타인의 안전을 무시한다. ⑥ 무책임하다. ⑦ 자책할 줄 모른다. 소위 정신병이라 불리는 병증은 알아내기가 간단하지 않아요. 뇌에서 작동하는 병리 생물학 기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아직은 너무 적고 동작 원리도 대체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규호는 단편화된 기억의 퍼즐을 조금씩 맞춰 나가고, 더 많은 기억을 찾기 위해 그동안 빌렸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동료의 도움으로 예전 회사에 다시 복직하게 된 강규호는 회장님의 비서 차수림과 가까워진다. 회장과 차수림은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주요 인물들이다. 단조로운 삶을 바꿔 보기 위해 강규호는 차수림을 쫓아 주말마다 봉사 활동을 다닌다. 몇 번의 만남 후 차수림은 강규호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한다. “콜라를 마시지 말 것.” 어떤 상황에서도 화내지 말 것.”. 그렇게 둘은 사내 연애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얼마 후 차수림은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차수림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회식 중 김형석 사장은 술에 취한 채, 강규호를 향해 '마그리트의 껍질'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곯아떨어진다.

 

“자네 같은, 껍질이?”

‘껍질?’ “그거 뭐라 그랬지? 사과 껍질, 그거.”

‘사과 껍질?’ “마그……. 뭐더라. 마가린? 마그릿? 마그리트. 그래, 마그 리트의 껍질.”

‘마그리트의 껍질?’ 3초? 길어야 5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이마 주름, 꽉다문 입술, 일그러진 눈매. 이병우 팀장의 얼굴이 얼음처럼 경직됐다.

찰나였을 뿐이지만, 난 모든 것을 보았고 기억했다. 망막에 맺힌 이미지는 내 시신경에 의해 정보로 바뀌었다.(p.79) - 「1장. 타인과 그의 뱀 그림자」중에서

 

 

미행자가 자신의 방 사진 속 미스터리 여자와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강규호. 사진 속 여자, 비밀 금고, 잃어버린 과거, 주변인들의 수상쩍은 행동,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미스터리한 일들 그리고 노트에 그려진 사과 껍질……. 그리고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억들. 마그리트의 껍질은 강규호의 잃어버린 기억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연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자신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제, 마그리트의 껍질을 벗어나기 위한 강규호의 기록과 진실을 찾는 시간으로 함께 들어가 볼 시간이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건 자기가 사이코패스인 줄 아는 사이코패스래요. MRI로 찍은 자기 뇌 사진을 보고 자신이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뇌 과학자의 말이에요.”

(중략)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자는 애초에 타인의 감정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왜 슬퍼하는지, 왜 기뻐하는지, 왜 아파하는지, 왜 그리워하는지, 그런 것들을요. 대신 내겐 똑똑한 뇌가 있죠. 학창 시절부터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 없고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어요. 난 끊임없이 관찰하고 학습해 왔어요. 타인의 감정을 말이죠. 자원봉사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어요. 어느 때 인간의 감정이 바뀌는지, 어떻게 반응을 보이고 행동해야 하는지, 언제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미술도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요.”(p.253) - 「4장. 마그리트의 껍질」 중에서

 


 

이 소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폭력성을 통제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자들과 그들을 쫓는 기억 잃은 주인공 간의 쫓고 쫓기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소설은 '마그리트의 껍질'이라는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린 그림의 일부를 제목으로 삼고 있고, 기억 잃은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과 인간의 본성에 숨겨져 있는 잔혹성과 폭력성 등을 약물로 제거해 '안전한 사회'로 만드려는 현대 과학의 오만함을 지적하하기도 한다. 자칫 예술 지상(至上)의 노력도 보이지만 결국은 기억이나 환경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추구하는 양심에 의해 제어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는 저자의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위해 껍질이 바닥을 향해 물처럼 흘러내리고 안이 텅 비어 있는 푸른 사과를 통해 무언가 꽉 막힌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묘한 여운을 모티프로 사용함으로써 구성이 복잡해지긴 했다. 주제보다는 소재가 더 두드러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모두 겉을 감싼 껍질을 벗겨내면, 사실 똑같이 생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암호명처럼 사용된 '마그리트의 껍질'(비밀 프로젝트)은 영혼의 껍질을 의미한다. "강규호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완벽한 모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취미는 주기적으로 관찰됐다. 규칙적으로 길고양이나 유기견을 붙잡아 인적 드문 곳에서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p.237) 이 점이 강규호가 실험 대상이 된 것이다. 반전이다. 반전은 다시 반전을 부른다. 결국 약물을 통해 반사회적 인물을 제거하려 한 사람이 반대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직후 이 소설의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 한 말에서 복잡함에서 탈피한다.

 

"그래서 피실험자를 껍질이라고 불렀군요."

회장은 비웃었다.

"아니, 아니지. 정반대야. 사이코패스는 껍집을 벗겨내면 그 안에 영혼이라는 것이 없어. 텅 비어 있을 뿐이지. 그저 껍데기일 뿐이야. 인간의 형상을 닮은 껍데기, 가죽 피부가 덮인 마네킹,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모르는 플라스틱 인형."(p.245)

 

저자 : 최석규

 

LG와 HP를 거쳐 KT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특허 관련 일을 한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오가며 글을 쓴다. 다양한 분야의 경계 허무는 작업을 좋아한다. 선과 악에 관한 연작 중 첫 번째 장편으로 《마그리트의 껍질》을 썼다. 2020년 국가예술지원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소설집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출간했다. 2021, 2019, 2015년 과학 소재 장르문학 공모전에 당선, 2019년 무예소설문학상, 2018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2017년 모래톱문학상, 2014년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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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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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는 지금까지 독자가 접했던 나치 독일과는 다른 시각에서 당시 독일군의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막강 군사력으로 로마 제국 같은 제 3제국을 꿈꿨던 독일은 패전을 앞두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 있었다는 폭로성 내용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미군의 참전과 구 소련의 병합에 실패함으로써 사실상 제 3제국 꿈은 사라졌다는 게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사학자들의 견해만 들었다. 유대인 집단 학살로도 표현이 모자라는 인종 학살로 역사상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에 관해서는 낱낱이 해부된 듯 여겨진다. 종전 후 8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이다. 저자 노르만 올러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 나치 독일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더 연구할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헛된 시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다.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저자인 독일 작가는 기자 출신답게 다큐를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나치의 마약 사용 문제를 파헤친다.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허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바탕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소설적으로 풀어썼다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나치의 실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포착한다. '마약' 사용이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돼 약물중독설이 나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선 병사들에게도 마약에 중독될 정도로 수시로 투약했다는 사실은 새삼 전쟁의 참혹한 면과 잔인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해 거북하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은 사이코패스 집단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배워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나치 독일은 마약이 제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 노르만 올러는 직접 자료를 찾고 분석해 나치 독일 시대를 마약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했다. 19세기 모르핀, 코카인 등 마약성 약물의 개발부터 1920년대 독일에 불어닥친 독극물 광풍과 제약 산업의 성장,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마약 배급, 마약에 중독된 히틀러와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의 의존 관계까지, 마약으로 얼룩진 나치 독일의 음습한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독일의 언론인 출신으로 소설가로도 활동해온 저자의 첫 논픽션 작품이다. 저자가 나치의 마약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독일은 물론 미국의 국립기록보관소의 것까지 방대한 자료를 찾아가며 쓴 결과물이다. 실감 나는 묘사와 대범한 비유법 등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료에 근거한 것만 아니라 저자의 추정을 통해 연결되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다.

사실 나치의 악행과 마약을 연결 짓는 과잉 해석은 저자 스스로도 경계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그 시대가 중독성 물질을 너무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탈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며 "마약은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을 강화했을 뿐"이라고 책말미에 적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2015년 처음 출간돼 화제가 된 책으로 원제는 『Der totale Rausch: Drogen im Dritten Reich』, 직역하면 『완전한 도취: 제3제국의 마약』이다.

 


 

저자가 기자 출신의 현직 작가란 점은 책의 서두에 특징을 드러낸다. "다음주도 지난주처럼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페르비틴을 다시 보내주세요. 보초를 설 때 아주 유용해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페르비틴을 보내 주세요."(p.71)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는 하인리히 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서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다. 그가 거듭 요청한 페르비틴의 주성분은 놀랍게도 메스암페타민.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마약류로 규제하는 물질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 메스앞페타민의 '놀라운 효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물질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전쟁의 고단함을 이겨 내고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입에 대기 시작한 군인 시절이었다. 뵐은 페르비틴 복용에 대해 무척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런 태도에 비추어 보건대 이 물질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다만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 아무렇지도 않게 각성제를 언급하는 걸 보면 그의 가족도 하인리히가 약물을 자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이제는 편지를 쓸 시간이 충분합니다. 그럴 만큼 마음이 안정되었고요. 물론 온몸이 축 늘어질 만큼 무거운 건 여전해요. 어젯밤엔 두 시간밖에 못 잤고, 오늘 밤에도 세 시간 이상 못 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곧 생기가 돌 거예요. 페르비틴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러면 고단함도 눈 녹듯 사라져요. 바깥은 보기 드물게 환한 달빛이 흐르고 별이 빛나고, 무척 추워요." 편지 내용으로 저자는 뵐에게 최대의 적은 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후 편지에는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앞으로는 2~4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써도 이해해 주세요. 오늘은 페르비틴 때문에 편지를 썼어요."

 


 

당시 나치 독일은 잠을 제대로 못 잔 병사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위해 각성제를 투여함으로써 전투력을 보충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될 정도로 각성제, 진통제 등에도 각종 마약류가 투여된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저자는 밝힌다. 책에 따르면 19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핵심 성분인 모르핀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 주는 이 '마법의 약물'은 의학적 목적뿐 아니라, 제약 회사의 큰 돈벌이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헤로인, 코카인, 그리고 메스암페타민이 주성분인 〈페르비틴〉이 출시되었고, 독일의 제약 회사들은 크게 성장했다. 강력한 마약인 페르비틴은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해 학생, 간호사, 배우, 작가, 노동자, 소방관, 미용사, 운전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소비되었다. 심지어 메스암페타민이 함유된, 〈프랄린〉이라는 과자가 생산되고 버젓이 광고까지 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군의 광기와 2차 대전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었다.

육군을 비롯해 공군, 해군까지 독일군은 병사들에게 페르비틴을 배급했다. 마약 복용으로 각성된 독일군은 밤낮 없이 진군했고,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돌격했으며, 지나는 곳을 가차 없이 밀어 버렸다. 마약 복용은 수뇌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독일 장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에르빈 로멜과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항공 국장 에른스트 우데트 역시 마약을 즐겼다. 곳곳에서 병사들과 장교들에게서 의존성과, 우울, 불안, 의욕 상실 등의 부작용을 목격됐으나, 국방 생리학연구소 소장인 오토 랑케는 모든 상황에 눈을 감았다.

 


 

독일에서 페르비틴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알약이었고, 그 사용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실은 페르비틴만 그랬던 건 아니다. 각종 화학물질 제조의 강국이었던 독일은 앞서 1920년대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모르핀 생산국, 헤로인 수출국이기도 했다고 한다.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은 겉보기에 엄격한 반(反)마약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 책이 그려내는 실상은 이중적이었다. 페르비틴의 경우 민간에선 1939년부터 처방전을 의무화하고 1941년 마약류 규제에 포함시켰는데, 육군과 공군은 무려 3500만정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책에는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진격을 비롯한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페르비틴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며칠씩 밤잠을 자지 않고 행군하는 병사들만 아니라 야간 공습에 나선 전투기 조종사들도 복용해 '폭격기 알약'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앞서 페르비틴의 각성효과를 주목한 국방 생리연구소 소장 오토 랑케는 임상실험을 통해 그 위험성도 알게 됐지만 이에 대한 경고는 결과적으로 시늉에 그쳤다. 독일군이 활용한 건 메스암페타민만이 아니었다. 1인용 어뢰 공격 등에는 코카인 등도 알약이나 껌으로 동원됐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는 어땠을까.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모렐은 '환자 A' 등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대한 방대한 진료기록을 남겼는데 날짜로 885일 분량에 달한다. 그중 주사약 투여가 약 800회나 된다. 모렐의 주사는 비타민이나 포도당에서 시작해 동물에서 추출한 호르몬 제재와 스테로이드 물질까지, 나중에는 무려 80가지 넘는 약물을 뒤섞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오이코달도 종종 주사했다.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약 두 배에 달한다는 마약성 약물이다.

 


 

저자는 모렐이 진료기록에 손글씨로 '오이코달'이라고 적은 것뿐 아니라 'x'라고 쓴 항목 역시 오이코달로 추정한다. 책에는 히틀러가 주사 전후로 급변하는 모습, 독일에 불리해지는 전쟁의 흐름과 함께 신체적으로도 몰락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모렐은 히틀러의 후광을 통해 사업적 확장도 꾀했지만 결국 미군에 체포됐고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도 손쉽게, 그리고 원하는 때에 마약을 투약받았다. 처음에 그는 만성 소화 불량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 테오도르 모렐을 만났으나, 이후 모렐은 히틀러의 주치의로서 각종 마약을 처방했다. 평소 기력 유지를 위해 비타민, 포도당 주사를 맞았던 히틀러는, 전쟁 초기 동물성 호르몬 제제와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고, 1944년 후반에는 코카인과 오이코달을 맞았다. 오이코달은 합성 마약으로,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두 배에 달했고, 투여 방법에 따라 헤로인보다 강력한 쾌락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약물이다.

전쟁 중 벙커 생활을 하며 마약에 깊숙이 빠져든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욱 의존했다. 마약을 맞지 않고는 작전 회의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모렐은 히틀러를 뒷배경으로 삼아 철저히 개인적인 이득을 취했다. 〈비타물틴〉이라는 복합 제제를 출시해 큰돈을 벌어들였고, 점령지에서 나치군이 몰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각종 약물을 생산했다. 우크라이나의 도축장에서는 고가의 도핑제와 스테로이드 생산의 원료인 동물의 갑상선, 부신, 고환, 전립선, 난소, 쿠퍼 샘, 담낭, 심장, 폐 등을 싹쓸이하는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모렐은 악의 화신 같다. 독일은 한때 순수 아리아인의 피를 강조하며 대외적으로 마약 퇴치 운동을 펼쳤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마약성 물질을 취한 나치 독일의 위선을 보여 준다. 나치 독일군은 마약을 작전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고, 마약은 히틀러와 군 수뇌부의 머릿속에 내재된 잔인함을 강화했다. 수많은 연구에도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히틀러는 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독재자가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자 : 노르만 올러(Norman Ohler)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독일 작가. 1970년 서독 츠바이브뤼켄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슈테른』, 『슈피겔』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1995년 『할당 기계DieQuotenmaschine』로 데뷔했는데, 세계 최초의 인터넷 소설이었다. 이어 2001년 발표한 『중심Mitte』은 『슈피겔』로부터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02년 발표한 『폰테 시티Ponte City』 역시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 뉴욕, 베를린,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하여 〈도시 3부작〉으로 불린다. 2004년 괴테 인스티튜트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면서 현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글을 썼고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도 머물렀다. 2008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팔레르모 슈팅Palermo Shooting」에 각본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DJ로부터 나치들이 약물에 절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조사를 시작했다. 5년 동안 독일과 미국 기록물 보관소를 샅샅이 뒤졌고, 기존 연구에서 빠진 수많은 원본 자료를 찾아내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5년 첫 번째 논픽션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를 썼다. 이 책은 다음 해 영어로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현재까지 30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파라마운트와 영화화 계약도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올러는 우리가 오늘날 마약으로 분류하는 약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석하고 나치 독일의 고위층 특히 아돌프 히틀러 본인도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음을 자세히 다룬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이 책이 역사의 전체 그림을 바꿔 주었다고 찬사를 보냈으며, 히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이언 커쇼와 군사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등도 호평했다. 이후 2017년 역사 범죄 소설 『삶의 방정식Die Gleichung des Lebens』, 2019년 두 번째 논픽션 『하로와 리베르타스Harro und Libertas』를 출간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를 포함하여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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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
김부건 지음 / 밀리언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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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데 선뜻 실행하기 힘들 때, 일상적인 인간관계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는 이 책을 읽어라. 인간 삶의 원칙과 방향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인문고전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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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
김부건 지음 / 밀리언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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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인문고전을 읽어라』는 "무한한 상상력의 가치를 증명하면서 '작은 성공의 누적(累積)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 감출 수 없는 진실의 무게는 지식과 경험이 균형을 이루고, 이론과 현실이 조화로울 때 그 가치를 알려준다"고 홍석기 글로벌 리더십 연구소 대표는 추천평에서 쓰고 있다. 또 김택환 경기대학교 교수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어떻게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한다. 기본은 바로 생활 지혜의 양식으로,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 맹자, 노자 등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서고금의 지혜를 현대판으로 해석해서 길라잡이를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독자가 읽어보기에 두 분의 추천평이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서평 서두에 제시했다. 처세술의 전문가라 불리는 데일 카네기도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황을 해결하려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자기계발 책으로 출판됐다. 사실 자기계발 책이니 인문학 책이니 하는 분류는 존 듀이의 도서 분류 방법에 따라 도서관에서 책을 보관하고 필요한 사람이 찾아 읽기 쉽게 하기 위해 분류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은 독자가 원하는 책을 찾기 쉽게 하기 위한 분류이다. 자기계발서는 인문학부터 공학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누구라도 쓸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인문학적, 그중에서도 고전에서 찾아낸 자기계발을 위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 김부건은 한국건설교통신기술협회 기술심의위원이자 BJT 부사장이다. 전공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왜 자기계발을 위한 소재를 고전에서 찾았을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논어』가 이유가 될 것으로 독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논어』를 인용해 풀이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계속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왜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 혹은 ‘왜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논어』는 ‘과이불개’라는 한마디로 명쾌한 답을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문고전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도 언어로써 인간의 통찰력을 깨우친다. 이것이 바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고전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저자가 고전을 이용해 자기계발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교수신문〉은 매년 전국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고사성어’를 선정한다. 독자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 기억이 있다. 신문에서 뽑은 2022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교수들이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표현한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p.228)를 꼽았다고 한다. 이 말은 『논어』 「위령공」에 나오는 말로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 하여 “허물을 알고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허물이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자한(子罕)」에서는 과칙물탄개(過則勿憚改), 즉 “잘못하거든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과거와 비슷한 참사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고치지 않고 방치하면 더욱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한 번쯤 읽어보았을 『논어』는 2500년 전에 중국에 살았던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글이 어떻게 2022년의 사회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은 변하지 않기 때문으로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문고전에서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즘 기업의 가장 큰 화두는 다양성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다양성의 가치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만들어진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을 『중용』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라는 말로 강조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인문고전은 현상을 명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답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람을 가까이해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역시 『논어』가 답을 준다.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 즉 “가능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인격이나 지식 면에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유익하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지고 과거의 낡은 지식을 여전히 고수하며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꼰대들에게 공자는 이렇게 한마디 할 것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모르는 걸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독자는 『논어』를 읽긴 했지만(그것도 여러 번) 아직도 내용의 참뜻을 모두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고 책을 통해서 해석하고 무슨 뜻인가를 아는 데 그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독자처럼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도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굉장히 쉽게 풀어썼다.

 


 

“자신의 단점과 일상의 루틴에 갇혀 있다 보면, 삶이 비루해지고 느는 것은 한숨과 두려움뿐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살아가던 저자는 좀 더 의미 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방황하던 끝에 고전에서 길을 찾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세상이 일사천리로 바뀌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정신없이 살아가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럴수록 근본 뿌리가 튼튼해야 시시때때로 덮치는 어려움에도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고 깨달았다. 삶을 통찰하는 지혜, 좋은 인성과 삶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대인관계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 바로 인문고전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옛 선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통찰력을 깨쳐서 남보다 먼저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일상을 한숨과 함께 허투루 흘려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에서는 우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인문고전에서 100개의 문장을 뽑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거리는 성공, 인간관계, 자기관리,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 4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맞닥뜨리기 쉬운 일상의 사례를 들어 고전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풀어냈다. 4개 파트 100개의 장(章)으로 엮었다. 공자의 『논어』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 『주역』, 『중용』, 『장자』, 『회남자』, 『묵자』, 『한비자』 등 장의 주제에 따라 적절히 인용했다. 더불어 데일 카네기를 비롯해 성공한 사람들의 지혜를 인문고전과 연계해서 더욱 확실한 답을 제시한다. 이에 더해 각종 문학에서 필요한 문구를 인용하기도 했고, 격언이나 명언도 덧붙였다. 물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최근 유행한 단어 욜로(Yolo)는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야 한다. 인문고전의 한 문장이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어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독자는 『논어』를 가장 처음 접했을 때 누구나 읽었을 "학이시습지"라는 문구가 기억에 생생하다. '공자 3락'이란 말로 비유하는 그 문장이다. 이를 토대로 이 책의 저자가 밝히는 의미를 섞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문구다. '익히다'를 '외우다'로 임의 번역해 알고 있었다. '자주 읽어 외우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뜻은 외우라가 아니라 실천(습관화)이다는 점이다. 배우고 수시로 실천해 습관이 되면 즐겁다는 말이다. 습관이란 반복 실천을 의미한다는 깨우침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특히 자기계발에서는 '생각-실천-습관-인생'의 선(善) 진행을 금과옥조로 삼는다. 즉 좋은 생가을 하고 숙고를 거쳐 실천을 거듭해 습관이 되면 인생이 변화한다는 선순환을 의미한다.

이 책 52장 「탁월함은 꾸준한 습관에서 나온다」를 읽어보면 독자의 깨우침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논어』 〈자한〉의 문장을 이용한다. "삭이 나도 피지 못하는 꽃이 있고 꽃은 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는 말이다. 저자는 '뭐든지 시작했다면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노력할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비슷한 사자성어로 자강불식(自强不息)이 있다고 한다. '오직 최선을 다하여 힘쓰고 가다듬어 쉬지 아니하며, 수양에 힘을 기울여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풀어썼다. 매우 높은 학식과 덕행을 가졌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군자라도 이를 본받아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품성, 도덕을 닦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으로, 『주역』에서 자강불식은 '스스로 노력하여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해 준다. 이에 덧붙여 아리스토텔리스는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탁월한 사람이라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즉,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마지막 장 「리더의 권한은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하고 되새겨봐야 한다. 특히 한국에는 '정치'는 없고 '정치가'만 있다는 말을 듣는 정계이다. 비판이 아니라 조언을 하는 것이다. "나라의 좋지 못한 일을 도맡아서 책임지는 자가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노자』 〈78장〉에 나온다고 출전을 밝힌 저자는 뜻풀이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나라의 가장 나쁜 점, 가장 더러운 점을 스스로 떠맡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임금 된 자는 모든 백성의 죄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 임금이 나랏일을 책임지는 것은 하늘의 도다." 저자는 특히 공자의 문구 '인무원려 필우근우(人無遠濾 必有近憂)'라 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저자 : 김부건

 

한국건설교통신기술협회 기술심의위원이자 BJT 부사장이며 인문 및 동기부여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 출신 전문 엔지니어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은 유일·유한한 것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일찍이 깨닫고 안정적인 직장이 주는 권태감과 변화가 적은 일상을 박차고 나와 늘 자신이 꿈꾸던 삶과 적성·소질에 맞는 일들을 찾아 동분서주해왔다. 엔지니어 출신 인문학 강연자라는 특이한 이력을 쌓는 과정에서 동양고전과 인문학을 통해 인생의 길을 발견했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문고전의 힘을 알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주고자 집필에 매진해 어려운 인문고전을 실생활에 접목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자기계발서’로 풀어냈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주도적인 삶의 지표를 찾아 더 당당하고 행복한 인생을 잘 조율해나가기를 희망한다. 저서로는 《동양고전의 힘》 《파워링커 혁명》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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