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쉼이 있는 삶을 위하여
이승원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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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인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기 상황의 추이를 볼 때 '절멸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 비상사태, 에너지·식량·경제 위기, 사회경제적 불평등,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후퇴한 민주주의가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거기에 3년 전 시작한 코로나 팬데믹도 끝간 데 모를 정도로 일시 주춤을 거듭하며 더 큰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지구 인류 대부분이 체감을 넘어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 절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 설상가상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더 힘찬 행동은커녕 하루하루 일상에 찌들어버린 우리에게 당장 걸터앉아 쉴 수 있는 곳조차 없는 형국이다. 전 지구가 이들 위기 요인으로부터 어디 하나 안락한 쉼을 제공하도록 안전한 지대도 없는 데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감염병,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위기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반복되는 일상의 탈진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한 곳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없는 형편이다. 이에 이 책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는 무엇이 우리의 쉼을 빼앗고 어떻게 쉼을 되찾을지를 사유하는, 우리 시대의 비판적 인문학이자 성찰적 에세이다. 이 책은 경쟁적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안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잠식하는지,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와 쉼을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소비가 삶의 주요한 리듬인 사회에서 ‘쉼’이 사라지게 되는 근본적 이유를 살피고, 쉼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저자 이승원은 우리의 현실을 먼저 짚어본다. 교육 수준이나 학벌, 재산 규모, 인종, 종교, 성적 정체성, 문화적 취향, 정치적 견해, 하다못해 사는 동네나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연히 마주쳐 함께 앉아 잠시 서먹하다가도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와 힘을 건네며 건네던 시절을 추억한다. 또 덕담을 나누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 있는, 혹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위해 잠시 쉴 수 있는 그런 의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물리적 실체를 갖는 의자가 아니라 쉼과 삶의 의지를 회복의 기폭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에너지 재충전의 의미이다. 다른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대한민국 사회도 쉽지 않은 위치로 흘러온 느낌이 든다.

저자는 단순할지 모를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불안이 희망을 압도하는, 그래서 생명을 돌보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자살'이라는 현상을 통해 먼저 살펴본다. '쉼'과 정반대편에 있는 자살에서 시작해, 자살이 늘어가는 이 사회에 가득 찬 불안의 내부를 들여보겠다는 말이다.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때,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 원인과 마주해도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의자'가 왜 필요한지, 어디에 있는지 답을 구하기 위해 '존엄한 쉼'의 의미를 찾아 나서고자 이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존엄한 쉼이 우리의 존재를 지속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 '레퀴에스코 에르고 숨(Requiesco ergo sum,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을 끌어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차용했음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공공재, 커먼즈, 자기결정권, 자원접근성 등의 개념을 발전시킨다고 밝힌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쉼이란 단지 개인의 행위나 결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의자'를 만들어야 하고, 함께 쉼을 상상해야 한다. 이 의자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거나 힘이 없다고 해서 밀려나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 '정지 운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정지, 즉 멈춘다는 것은 그냥 힘을 빼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멈추기 위해서는 관성에 대한 반작용만큼의 힘, 습관처럼 나아갔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하다. 멈추는 힘은 새로운 방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는 힘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지금 자신을 어디론가 밀고 가는 어떤 힘의 속도와 방향에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자 하는 이들은 함께 길을 걷던 서로에게 기대서야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다. 관성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의, 내가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의자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협력이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처럼 이해된다.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경쟁의식과 의심보다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순간, 정지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정지 운동과 함께, 우리는 그동안 왜 제대로 쉴 수 없었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해진 방향으로 가속화되면서 밀려가기만 했는지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란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는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빈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를 저자와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저자의 집필 취지에 따라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왜 잘살려고 할수록 불안해지는가?」, 2장 「일과 소비에 대하여 착각하는 사람들」, 3장 「우리는 언제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4장 「빼앗긴 쉼을 되찾기 위하여」로 돼 있다. 1장은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더 노력하기 위해 경쟁하고, 자유를 위해 돈을 버는(일하는) 것부터 재점검한다. 이 장에는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변주되는 용어도 등장한다. 또 지금까지 했던 최선이나 경쟁이 시작부터 잘못 꿴 단추 같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저자는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고 누구는 피해를 당하고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인식에서는 어떻게 공존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이다. 즉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협력하고, 위기를 벗어난 후 위기를 맞게 한 용의자 집단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한다면 당초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일이니 만큼 생략할 수는 없을 터, 앞으로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풀어나간다.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비 능력’ 을 갖춰야 하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과로와 일 중독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소비에 열중하는데, 오늘의 소비는 내일의 노동을 담보로 하기에 이 삶의 패턴은 계속 악순환된다. 직장인, 자영업자 등 대부분의 서민들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돌아가는 ‘노동’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일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쳇바퀴를 이탈하게 되면 어김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할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곳에 ‘쉼’은 있을 수 없다."

 


 

2장에서 저자는 다소 생경한 용어들 등장시킨다. '착각 노동'과 '환타지' '소비를 쉼으로 착각하는 현실' 등을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자살뿐만 아니라 혐오를 앞세운 범죄,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구조적 살인과 사회적 재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생존을 위한 가계 대출 규모는 이미 치명적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예감에는 기대감과 비관이 공존하다. 불안에서 벗어난 어떤 평안을 위해, 사람들은 최신 캠핑 도구와 등산 장비를 SUV 차량에 싣고 천연의 삶을 즐기러 산으로 들로, 강과 바다로 떠나곤 한다. 웰빙, 행복, 건강의 뜻을 모두 담은 단어 '웰니스'는 21세기 신종 산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철학이자 생활양식이 되었다. 노후 연금, 양육에서 벗어난 중년의 목가적 삶,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품격 있는 주택, 고가의 빈티지와 최첨단 디지털 제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21세기형 답을 주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일하려 한다.

웰니스 열풍의 반대편,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자살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자살률은 이후 18년 이상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우울한 것일까? 대한민국도 한때(2002년부터) 주5일 근무제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했던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주 40시간 노동이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시해온 서구와는 달리 노동을 멈추고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낄해야 할 이틀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일하는 5일 동안 오히려 초과 근무까지 악착같이 해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일주일 중 이틀 동안 쓴 카드 비용 때문에 나머지 닷새를 점점 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저자는 '저당 잡힌 미래'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피로사회, 성과사회, 일 중독, 자기계발, 취업 걱정 등은 바로 고도로 정교화된 칸트식 노동 예찬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비판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노동 예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을 뒤로한 채 외치는 노동 예찬은 주어진 노동의 욕망를 실현하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라는 '착각 노동'의 판타지를 퍼뜨린다는 주장이다. 일을 자아실현과 동일시하는 사회는 직업 또는 일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방법으로 여기지만, 이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판타지가 진실에 가깝다면, 우리는 일을 많이 할수록 행복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대논리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도 꼬집는다. 이 때문에 저자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믿게 하는 메커니즘을 ‘착각 노동’ 판타지라고 한다. 그리고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 시간마저 장악하여, 신용카드를 긁어야 잘 쉬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실을 포착한다. 물론 이것 역시 착각이라는 것이다.

 

저자 : 이승원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경기도 안양과 영국의 몇몇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시절을 빼고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멋진 사회복지사 아내,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음악을 공부하는 딸, 권투할 때가 가장 맘이 편하다는 아들, 치매 속에서도 늘 웃으시는 어머니, 큰 병을 이겨내고 있는 강한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청소년 시절 육상, 야구, 농구, 중창단, 교회 학생회 활동에 빠져 지냈으며, 이후 대학에서 철학, 종교학, 국제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책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현장 경험을 하며 더 많은 삶의 지혜를 얻었다. 한동안 생업으로 국회, 중간지원조직, 공공연구기관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로 민주주의, 포퓰리즘, 도시 정치, 사회혁신, 세계 시민교육 등을 연구하고 관련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민주주의』(2014), 『커먼즈의 도전』(공저, 2021)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2012),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샹탈 무페, 2019)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커먼즈 네트워크, 시시한 연구소,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등에서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활동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불광천에서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북한산과 봉산 오르기, 드라마 보기, 동네 목욕탕 가기를 즐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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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 - 8인의 시인, 8인의 화가 : 천진하게 들끓는 시절을 추억하며
김연덕 외 지음 / 미술문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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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한때 시와 소설을 TV에서의 광고와 드라마로 비유한 적이 있다. 물론 사석에서 한 말이고, CF의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에서 파생돼 나온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미술 에세이로서 시와 그림은 매우 닮은 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갑자기 TV 광고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시는 간결하고 언어로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로서 어쩌면 가장 오래된 문학인지도 모르겠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은 서사시로서 긴 이야기를 시의 형식으로 썼기 때문이다. 시는 간결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므로 상징과 은유 등 비유도 자주 사용되고, 갖은 문학적 수사 방법이 동원된다. 그래서 간혹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카메라로 풍경을 찍는다면 사진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림의 시초도 사실은 자연이나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림을 자연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예술이라고 한다. 이는 문학에서도 차용되는 논리다. 자연이나 화자의 느낌, 감정, 마음 등을 짧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생긴 장르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었을 때는 구전해야 했기에 간결한 것이 우선이었을 터, 마땅히 짧게 표현하다보니 시가 짧게 의미 전달을 위해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는 문학으로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문학 전공자들은 어떻게 배우는지 독자도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이 책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시와 그림의 조화라고 해도 될 것이고, 한편으론 화가가 표현하는 바를 시인이 글로 반추해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에세이다. 이 책의 8명의 저자들은 모두 시인들이다. 시인 중에서도 그림을 좋아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림을 좋아하고, 어떤 시인은 화가의 작품에 일가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애호가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분도 있다 하니 미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는 시인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예스24 에세이 PD 이나영의 평가도 눈여겨볼 만하다. "8명의 시인들이 각자 친애하는 화가의 그림들을 글로 써낸 책이다. 시와 그림은 말을 줄여 한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의 시절을 관통한 그림들을 시인 각자의 언어로 추억하고, 조우하며 시와 그림이 접촉하는 순간, 엉겨 붙어 내게로 오는 순간을 느낀다."

시와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자.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한쪽은 글로 쓴 예술이고, 한쪽은 선과 색으로 그린 예술이다. 보다 엄밀한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너무도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라 이쯤에서 넘어가 본다. 시와 그림은 자주 한데 엮인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줄임으로써 말해지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대상을 구체적으로도 추상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읽고 감상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시와 그림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부수고 깨뜨리고 치유하고 복원한다는 점에서, 이토록 희미한 세상의 한 구석을 한결같이 예리하게 투사해 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 책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이러한 시와 그림을 적나라하게 사랑하고 싶어서 기획된 책이다. 고유한 세계관과 예리하게 벼린 시어로 이미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단단히 각인된 시인 여덟 명이 한자리에 모여 그림을 논했다. 안희연 시인은 특정한 사조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그림 세계를 구축한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를, 서윤후 시인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성정을 우키요에라는 불멸의 장르로 승화시킨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오은 시인은 강렬한 색채를 자유분방하게 사용해 ‘야수주의’라는 사조의 시초가 된 프랑스의 거장 ‘앙리 마티스’를 좋아한다고 털어놓는다. 또 김연덕 시인은 간결하고 깔끔한 선과 색채로 천진하여 더욱 애달픈 연인 연작을 그려낸 프랑스 화가 ‘헤몽 페네’를 골랐다.

신미나 시인은 반 고흐가 존경한 화가이자 순박하고 꾸밈없는 농촌 생활을 화폭에 담은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이현호 시인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약하며 기인, 미치광이, 주객 등의 별칭으로 전국팔도에 이름을 떨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최북’을, 최재원 시인은 풍성한 색채와 영롱한 빛 표현으로 독보적인 화풍을 개척한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를, 박세미 시인은 오랜 시간 서로의 예술에 크고 작은 영감을 선사하며 우정을 나눈 한국의 동시대 화가 ‘이소화’를 각각 골랐다. 시인들은 저마다 다른 시선과 언어로 그림을 향유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고른 화가와 그 그림이 시인들의 한 시절을 예리하게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희연 시인에게 파울 클레는 최승자와 더불어 그의 이십 대를 정의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는 한때 “클레의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언어화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나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제목과 주석만 초라하게 남은 저 광활한 실패를 보라. 아마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장벽이 아니었을까. 모든 자극이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떤 그림은 그 자체로 크고 넓어 언어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이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클레의 그림에는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는 여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듯 기우뚱한 전나무가, 겁을 집어먹은 듯 처연하게 눈물 한 방울 떨구고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뒤 시인은 고백한다. “지금껏 써온 나의 시들이 상당 부분 클레에게 빚지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파울 클레에게 무한 존경과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안희연은 시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시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청춘을 달려온 시인들에게 그림은 때론 위안을, 때론 공감을, 또 때론 조언을 해주었다고 털어놓는다. 시인이 되고 시집을 펴내며 마주한 고민의 시간과 다양한 인연들 속에서 아파한 이들에게 그림은 때론 사랑을, 때론 상실을, 또 때론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시인들의 한때가 짙게 묻은 그림을 보며 독자들은 시인이 품고 있는 기억의 한 구석을 그들과 공유하며, 그것이 산문으로 발화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게 된다. "클레는 달랐다. 클레의 그림 앞에선 침착하려 해도 휘저어졌다. 단순한데 깊고 골똘했다. 무엇보다 작품 안에서 추상의 역할이 분명하다는 점이 좋았다. 현실을 똑바로 옮겨내는 작업도 소중하지만 내게 보다 위안이 되는 그림은 물컵에 담긴 쇠젓가락처럼 신비로운 굴절이 일어나는 작품들이었다."(p.24)

 


 

또 서윤후 시인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두고 “이십 대의 방황 속에서 우정을 짙게 나눈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언젠가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한 시절의 깊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추억한다. 시인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속 성난 파도를 바라보며, 펄펄 끓어올랐던 호쿠사이의 정열과 갓 시인이 되어 조급하고 서투른 마음으로 안달했던 자신의 이십 대를 병치한다. 김연덕 시인에게 헤몽 페네는 열세 살에 처음 만나 “한낮의 서점에서, 잠깐의 순간에도 그의 연인들에 매혹”되게 만든 화가다. 시인은 “나는 오직 페네를 위해, 책에서 20페이지도 차지하지 않는 그 부분을 읽고 간직하기 위해 그것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의 그림은 거의 내가 들고 다니는 노트에 한 낙서 같았고 그게 낙서라면, 내가 태어나 보았던 낙서들 중 가장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며 유년 시절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페네의 그림을 추억한다. 시인은 열세 살 꼬마에서 스물여덟이 되었고, 그 사이 시인에게 찾아온 사랑들의 “겉과 안은 여전히 아프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때, 페네가 그린 천진한 연인들은 다시 부활하여 시인과 조우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인 시와 그림. 글과 색. 펜과 붓. 문장과 색채. 그리고 시인과 화가. 이 둘을 나란히 놓고 감상함으로써 우리는 두 개의 예술이 서로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합일의 예술을 목격한다. 어쩌면 글로 그림을, 그림으로 글을 100퍼센트 완벽히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결핍이 그들을 계속해서 책상과 이젤 앞에 앉히고, 끊임없이 쓰게 하고 그리게 하는 것 아닐까? 시인과 화가가 접촉한 순간은 한 편의 산문이 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이 글은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생경한 촉감을 남길 테다.

 


 

오은 시인은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티스에 대한 꽤 깊은 조예가 드러난다. 시인은 마티스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춤추는 기분이 든다고 고백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춤추자고 적극적으로 손 내미는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라는 것. 몸을 움직이는 데 '젬병'인 시인조차 신체 곳곳에 분포한 신경이 반응한다. 발을 살짝 떼도 괜찮지 않을까.란 표현으로 몰입하는 그림임을 강조한다. 손을 슬쩍 머리 위로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란다. 시인은 마티스의 회화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 이 느낌이라고 말한다. 직전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아슬아슬함을, 한창때에 번져 나오는 흥분과 희열을 시인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고 느낌을 말한다. 그러나 마티스의 회화는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는 데 와선 흥분을 슬쩍 감추기도 한다. 신체는 캔버스에 스며든 듯 안정적이고 신체가 표현하는 동작은 날렵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시인의 표현으로 독자는 마치 진짜 춤을 추는 사람들 앞에서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은 시인의 마티스에 대한 애정은 그의 작품성을 알아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마티스의 작품에 대해 보고 또 보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한 듯하다. 예술 작품을 오래 보면서 사유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는 글까지 이끌어내는 데서 "역시 시인은 다르다"는 독자의 감탄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마티스는 회화 작업을 할 때 단순화를 중시했다.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일까? 형태를? 색깔을? 입체감을? 사실상 모든 것이었다. 회화 작업을 할 때도 그는 스케치가 지닌 본래의 날렵한 미덕을 지키기 위해 붓을 들었다. 붓을 드는 일은 스케치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덮어버리는 일이다. 연필선이 드러나는 작품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채색 작업은 원래의 구상을 뚜렷하게 하는 작업이기 대문이다. 구상이 뚜렷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처음의 의도는 희미해진다."(p.83)

 


 

시간이 지연될수록 나는 내 공간에 그녀의 그림을 걸게 될 순간을 더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소화의 얼굴을 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이제 훨씬 더 많게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애정이 더 깊어진 것처럼. 그녀의 그림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녀의 그림이 내 공간에 존재하게 될 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웃게 된다. 이것이 작은 꽃의 기쁨.(p.240) - 「박세미 × 이소화」중에서

 

저자 : 김연덕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8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재와 사랑의 미래』가 있으며 곧 다가올 성탄절을 내 생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겨울과 산책과 꽃을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

 

저자 : 박세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저자 : 서윤후

199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과 『휴가 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그리고 여행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만화 시편 『구체적 소년』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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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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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는 예고편이 없다. ‘죽어감’이 길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 서둘러 사라진다. 완화치료 의사 아나 아란치스가 전하는, 후회 없는 오늘을 위해 죽음 앞에서 그들이 하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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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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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죽음이 물었다』는 완화의료 전문의인 저자가 죽음을 곁에 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보호자들을 지켜보며 느낀 성찰을 다뤘다. 독자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완화의료란 삶의 끝자락에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 특히 통증을 완화시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의학이다. 지금까지 독자가 알고 있던 '호스피'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이해된다. 저자는 누군가의 마지막 시간을 돌보는 의사로서 경험한 삶과 죽음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완화의료의 현실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다정한 시선으로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죽음에 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아무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죽음의 순간을 통해, 저자는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을 택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는 상태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 독자들의 공감을 받기에 충분한 사유로 보인다.

저자는 오늘의 삶이 어떻게 죽음의 모습으로 투영되는지 알려주면서,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기회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사실 죽음은 보편적인 단어인 동시에 무척 개인적인 단어이다.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겪지만, 그 체험은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급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나온 삶을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찬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끌어오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지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것과,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겪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특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게 사유하는 일이 거의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개인적 상황의 미래를 예측하는 수준의 일이기에 아무런 사유적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 독자도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서 '죽음이란?'에 답할 정도로 깊은 사색을 해본 적이 없다. 죽기 전에 맞이할 노년에 대해서는 촘촘하고 끈질기게 이기적 결론을 끌어내고 대책을 세우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를 포함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 이후는 인간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종교도 갖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종교가 없다는 이유로 삶과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종교 역시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죽음 이후를 대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인이나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천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믿지 않는데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종교를 갖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즉 죽음은 아직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느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고, 우리는 누구나 가족 구성원이나 친인척의 죽음, 또는 반려동물의 죽음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있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모든 존재적 상실 역시 죽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관계이든, 직업이든, 확신이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날마다 일상의 죽음을 경험하며 크고 작은 상실을 맞닥뜨린다는 저자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죽음이 물었다』의 저자이자 브라질 완화의료 최고 권위자인 아나 아란치스는 이런 상실의 체험을 덜 고통스럽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바로 지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를 권한다. 저자는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죽음을 통해 상실을 끌어안고, 더 나아가 사랑과 지혜로 가득한 삶을 위한 통찰을 전한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현실 세계의 유한성과 연결된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아는 사람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안다.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돌보고 참된 사랑과 배려로 살아가며, 죽음과의 만남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완화의료 전문의로 오랜 시간 일하며 수많은 환자들을 지켜본 저자는 안온한 마지막을 보낸 환자들의 공통점으로 일상에 대한 충실한 태도를 꼽았다.

저자는 다가오는 주말이나 휴가, 혹은 은퇴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자식이나 연인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으로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는 자세만이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아온 환자들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결코 준비할 수 없으며, 삶을 살아가면서 계획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이 책은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돌봐온 의사의 체험기이지만,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대로 오늘 독자의 하루가 어땠는지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겨우 눈을 떠 아침을 맞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루를 보냈다.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몸에 밴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저자는 성찰을 통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그저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몸에 나쁜 음식을 사 먹고, 다닐 시간도 없는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고, 입지도 않을 옷을 사지는 않았는가? 삶에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만 가득한 하루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봤을 때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자는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라고 말하며, 좋은 삶이 있어야 좋은 죽음도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학교에서 지식을 얻고, 사회에 나와 부와 명예를 얻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 애썼지만 무언가를 잃는 법에 대해서는 어떨까. 저자는 삶에서 얻어낸 것들을 온전히 누리며 살기 위해 잃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잃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을지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며, 자기 삶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내 삶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 고통의 체험에서 따라오는 좌절과 우울, 슬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용기 있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해준다. 소중한 것은 지키고, 잃어야 하는 것은 기꺼이 잃는 삶, 고통을 새로운 출발의 도약으로 삼을 수 있는 삶, 스스로 성장하는 가치 있는 삶을 우리는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가치들을 함께 생각해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상실과 고통을 넘어서게 하는 힘은 불멸의 사랑에서 나온다는 저자의 조언과 격려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만의 해답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죽음까지도 인생의 일부임을 잊지 않고 현재를 되돌아보며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값지고 귀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장(章)의 구별 없이 완화의료 의사이자 저자 아나 아란치스의 글이 담겨 있다. 각각의 글에는 저자의 의대 입학 때부터 자퇴, 다시 의학을 시작한 후 현재까지 배운 의학 지식, 치료 경험, 의사의 치료 태도,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태도 등을 종합해 현재의 완화의료 수준이 더 확장되고 깊이 있는 치료로서 발전해가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이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의사로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책임의식과 의료철학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부터 「죽음 이후의 삶」까지 의사로서의 경험과 환자로서의 존엄성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완화의료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다. 독자들은 이 책의 각 글마다 저자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 순간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더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는 예고편이 없다. '죽어감'이 길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 서둘러 사자진다"(p.16)라는 저자의 말은 긴 여운을 남긴다.

 


 

나의 ‘돌봄 은하계’에서는 3퍼센트의 환자들만이 진정제를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죽음을 돕는 이 작은 세계에서는 97퍼센트의 환자들이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아름답고 강렬한 순간에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곳에는 감독도, 배우도, 각본도 없다.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다. 죽음에는 연습이 있을 수 없기에 모두가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과적으로 삶 전체와 일맥상통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p.78)

 

저자 : 아나 아란치스(Ana Claudia Quintana Arantes)

브라질 완화의료 최고 권위자. 상파울루주립대학병원에서 노인의학으로 레지던트 과정을 수련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완화의료를 전공했다. 20여 년째 저작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완화의료가 올바르게 인식되도록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3년에 오래도록 금기시돼왔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TEDx 강연이 큰 호응을 얻으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출간된 《죽음이 물었다》가 브라질에서만 50만 부 이상 판매되고 미국, 스페인, 중국 등 전 세계 10개국에서 출간되며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2020년에 《죽음이 물었다》의 속편인 《아름다운 죽음 이야기》를, 2021년에는 《평생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를 연속 출간하면서 세계적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역자 : 민승남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제15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 『남편의 아름다움』,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 『넛셀』, 메리 올리버의 『천 개의 아침』, 『완벽한 날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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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에마뉘엘 토드 지음, 김종완.김화영 옮김 / 피플사이언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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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장기전으로 끌려갈 예측이 수없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과 서방, 러시아와 친러시아 국가들의 전면전으로 확산될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말 인류는 전쟁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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