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장갑 속 하트뿅 사과밭 문학 톡 10
고정욱 지음, 자몽팍 그림 / 그린애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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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털장갑 속 하트뿅』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어린이용 동화이다. 대략 초등학교 3~4학년용이라고 한다. 초등학생들에게 따뜻한 마음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더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교훈을 주는 동화이다. 원래 동화 자체가 어린이용이고 어린이의 마음에 감동, 훈훈한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쓰여진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에도 옛날부터 동화가 많이 있었다. 대부분의 위인전처럼 교훈을 주는 내용이 많다. 물론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동물을 등장시키고, 쉽게 풀어가기 위해 억지스러운 전개도 있지만 전래동화는 교훈이 목적이기에 구성이나 전개보다는 안에 담긴 메시지가 중요했다. 이런 것은 어린이들 마음에 동물은 친구다라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고, 무섭거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동물의 등장이 잦은 것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동화는 겨울철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뒹굴 읽기가 좋아 어린이들의 감성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되는 문학 장르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신문사들이 일년에 한 번씩 신춘문예를 실시하는데 동화나 동시가 꼭 들어가 있었다.

독자도 어렸을 때 많은 동화를 읽었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나 산수 등을 가르쳐도 동화 읽는 시간을 따로 두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때문에 아버지가 사다주신 동화책이나 세계명작전집에 포함된 동화를 많이 읽었다. 대부분 전래동화보다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들의 동화다. 이솝, 안데르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전래동화보다 좋은 점은 이색적인 풍습이 많이 등장한 데서 더 호기심이 생겼고, 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린이 세계명작전집에는 세계적 대문호들이 쓴 소설이나 극작을 어린이가 읽을 수 있도록 동화 형식으로 번안한 것도 많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 등도 전집의 단골 메뉴였던 것으로 독자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그 내용은 생생하다.

 


 

특히 『로빈슨 크루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가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부모님께 야단 맞은 특별한 기억도 있다. 그때는 주인공이 무인도에 들어간 이유가 타던 배가 암초에 걸려 파손돼 겨우 살아남은 채로 들어간 것으로만 표현됐기 때문에 주인공의 직업이 어떤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노예상이고 노예를 팔기 위해 배를 탔다는 말은 없었다. 나중에 읽은 소설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우연히 노예선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인용돼 있어서 유심히 읽었는데 거기에 노예선의 노예상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알게 됐다.

이 책의 저자 고정욱은 이미 중견 동화 작가인 것 같다. 독자로서는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문단에서는 꽤 알려진 듯하다. 저자의 동화 「가방 들어주는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고, 「안내견 탄실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 등 우리 사회를 더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들을 집필해 왔다고 한다. 이 책 역시 초등 중·고학년을 위한 그린애플의 동화 시리즈 〈사과밭 문학 톡〉 열 번째 책이다. 단편 동화 모음집 『털장갑 속 하트뿅』 역시 훈훈한 감동이 담긴 여섯 편의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손자, 장애가 있는 아들을 위해 학교 청소를 시작한 아빠, 생명의 은인인 포장마차 주인을 위해 용돈을 내놓는 아이, 금은방을 습격한 강도에게 온정을 베푼 주인, 웹툰만 보는 아들을 위해 기발한 조언을 하는 동화 작가 아빠,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 아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엄마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마주할 수 있는 우리 이웃의 삶을 담아낸다. 가족애가 사라져 가고,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그 빛을 잃어 가며, 나 혼자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책은 마음속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 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이 많다. 가족보다는 친구, 직접 대면하는 친구보다는 온라인 게임으로 이어진 친구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이 됐다. 하지만 가족은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이 책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화로 주로 집필됐다고 이해된다. 이 책에서 성운이는 쇠약해진 할머니를 걱정하며 담장 아래 핀 꽃들에게도 할머니를 지켜 달라고 부탁한다. 또 성준이 아빠는 아들이 장애를 딛고 사회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기른다.

화장실만 들어가면 함흥차사인 아들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지만, 결국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넓은 가슴으로 품어 준 엄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가족애를 이야기한다. 가족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는 존재이며, 내가 잘되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려주는 존재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이 책을 읽으며 가슴 따뜻한 가족애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웃 간의 배려와 공감이 사라지고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연말이 되어 구세군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지갑을 열어 나눔을 실천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눈과 귀를 내 관심사에만 고정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책 『털장갑 속 하트뿅』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큰 울림을 주는지도 모른다.

태민이의 아빠는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포장마차 주인에게 고마움을 느껴 사례하려 하지만, 포장마차 주인은 “낡아 빠진 포장마차로 사람 목숨 구했으면 됐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서로를 배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태민이의 마음을 녹였고, 결국에는 통장에 저축해 둔 용돈을 포장마차 주인이 푸드트럭을 구매하는 데 보태게 한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삶을 포기한 민용이를 위로하며 지원하는 금은방 주인도 마찬가지다. 생면부지의 아이지만, 그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민용이가 세상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게 한다.

 


 

「저승 사자를 물리친 자개장」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의 부쩍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성운이는 아픈 할머니를 지켜달라고 해바라기와 예쁜 꽃들, 잡초, 그리고 자개장 속 십장생에게 부탁한다. 그날 밤 저승 사자들이 할머니를 저승으로 모셔 가려고 찾아오고, 십장생들은 기지를 발휘해 저승 사자를 물리친다. 할머니는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고 성운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기 위해 집을 방문한다. 그나저나 성운이는 할머니를 위한 십장생들의 활약을 알게 될까?

「아빠는 슈퍼맨」

성준이 부모가 성준이를 특수 초등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게 한 건, 세상을 살아가려면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성준이가 초등학교 입학한 뒤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 봉사도 한다. 어느 날 평화롭던 학교에 괴한이 침입하는데, 특수 부대 요원 출신인 아빠는 괴한을 온몸으로 진압한다. 학교에서는 고마움의 표시로 학교 성준이 아빠에게 청소 일을 위임하고, 학교는 더욱 반짝반짝 윤이 난다.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

태민이는 집안에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양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이기적인 아이로 자랐다. 그 결과 남과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영화를 보고 나온 태민이와 아빠는 달려오는 트럭에 치일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도 포장마차 주인이 자신의 포장마차로 트럭을 막아주어 태민이와 아빠는 목숨을 구한다. 태민이는 영화 속 주인공과, 포장마차 주인의 살신성인한 행동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포장마차 주인에게 놀라운 선물을 전한다.

 


 

「금은방에서」

화재로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민용은 사회에서 사고뭉치로 낙인찍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결국 민용은 소년원에라도 들어가 보호받기 위해 금은방에 침입한다. 금은방 주인 역시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지만 금은 세공 기술을 배워 금은방을 열었기에 민용이 남 같지 않다. 주인은 민용의 처지에 공감하며 종업원으로 일하게 하고, 금은 세공 기술을 배우게 하는 등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기발한 기부금」

강혁이는 핸드폰으로 웹툰만 보다가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난다. 그런 강혁이에게 아빠는 자신도 어려서 만화만 봤다며, 만화야말로 사물 인식 교육을 하는 데 최고라고 말해 준다. 동화 작가인 아빠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써서 유명해지자 그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한다. 아울러 아빠는 강혁이에게 웹툰을 보면서 포인트로 기부하는 방법을, 엄마에게는 후원 쇼핑을 통해 기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게 가족은 ‘기부’라는 주제로 더욱 가까워진다.

「화장실 도서관」

화장실만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안 하는 민식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민식이는 잘 꾸며진 책상을 두고 늘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다. 집중이 잘된다나 어쨌다나. 그런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학교 강연에 참석한 엄마는 작가의 조언에 깜짝 놀랐다. “엄마 의도와는 달리 민식이에게는 화장실이 자신만의 공간일지도 모른다.”라는 것. 엄마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 자기 생각만 강요했음을 깨닫고, 화장실을 도서관으로 만든다.

 


 

글 : 고정욱

 

어린이 청소년 도서 부문의 최강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문학박사이다. 소아마비로 인해 중증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각종 사회활동으로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고, 장애인을 소재로 한 동화를 많이 발표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전공을 살려 『양반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등의 고전문학 작품을 현대화하기도 해서 총 32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특히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MBC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이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고정욱 삼국지』는 필생의 역작으로, 어린이 청소년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전 작품들을 새롭게 엮고 싶다는 수십 년의 열망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현재 활동하는 작가 중 가장 많은 책을 펴냈고 (약 330권),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으며 (약 450만 부), 가장 많은 강연을 다니고 (연 300회 이상)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기계발과 리더십 향상에도 관심이 많은 작가는 독자들의 메일에도 답장을 꼭 하는 거로 유명하다.

 

그림 : 자몽팍

 

행복한 기억이 오래갈 수 있도록 기억의 조각과 상상력을 더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통해 아날로그 공간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문화재단, 쌍용자동차, 행정안전부, 지학사 《독서평설》 등 다양한 매체에 일러스트를 그렸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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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쉼이 있는 삶을 위하여
이승원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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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잘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불안한가? 일과 소비의 끊임없는 악순환, 대안이 없는 곳에 ‘쉼’은 없다.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고 함께 기뻐하기 위한 인문학자 이승원의 ‘쉼’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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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쉼이 있는 삶을 위하여
이승원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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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인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기 상황의 추이를 볼 때 '절멸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 비상사태, 에너지·식량·경제 위기, 사회경제적 불평등,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후퇴한 민주주의가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거기에 3년 전 시작한 코로나 팬데믹도 끝간 데 모를 정도로 일시 주춤을 거듭하며 더 큰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지구 인류 대부분이 체감을 넘어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 절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 설상가상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더 힘찬 행동은커녕 하루하루 일상에 찌들어버린 우리에게 당장 걸터앉아 쉴 수 있는 곳조차 없는 형국이다. 전 지구가 이들 위기 요인으로부터 어디 하나 안락한 쉼을 제공하도록 안전한 지대도 없는 데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감염병,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위기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반복되는 일상의 탈진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한 곳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없는 형편이다. 이에 이 책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는 무엇이 우리의 쉼을 빼앗고 어떻게 쉼을 되찾을지를 사유하는, 우리 시대의 비판적 인문학이자 성찰적 에세이다. 이 책은 경쟁적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안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잠식하는지,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와 쉼을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소비가 삶의 주요한 리듬인 사회에서 ‘쉼’이 사라지게 되는 근본적 이유를 살피고, 쉼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저자 이승원은 우리의 현실을 먼저 짚어본다. 교육 수준이나 학벌, 재산 규모, 인종, 종교, 성적 정체성, 문화적 취향, 정치적 견해, 하다못해 사는 동네나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연히 마주쳐 함께 앉아 잠시 서먹하다가도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와 힘을 건네며 건네던 시절을 추억한다. 또 덕담을 나누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 있는, 혹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위해 잠시 쉴 수 있는 그런 의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물리적 실체를 갖는 의자가 아니라 쉼과 삶의 의지를 회복의 기폭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에너지 재충전의 의미이다. 다른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대한민국 사회도 쉽지 않은 위치로 흘러온 느낌이 든다.

저자는 단순할지 모를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불안이 희망을 압도하는, 그래서 생명을 돌보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자살'이라는 현상을 통해 먼저 살펴본다. '쉼'과 정반대편에 있는 자살에서 시작해, 자살이 늘어가는 이 사회에 가득 찬 불안의 내부를 들여보겠다는 말이다.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때,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 원인과 마주해도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의자'가 왜 필요한지, 어디에 있는지 답을 구하기 위해 '존엄한 쉼'의 의미를 찾아 나서고자 이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존엄한 쉼이 우리의 존재를 지속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 '레퀴에스코 에르고 숨(Requiesco ergo sum,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을 끌어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차용했음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공공재, 커먼즈, 자기결정권, 자원접근성 등의 개념을 발전시킨다고 밝힌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쉼이란 단지 개인의 행위나 결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의자'를 만들어야 하고, 함께 쉼을 상상해야 한다. 이 의자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거나 힘이 없다고 해서 밀려나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 '정지 운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정지, 즉 멈춘다는 것은 그냥 힘을 빼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멈추기 위해서는 관성에 대한 반작용만큼의 힘, 습관처럼 나아갔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하다. 멈추는 힘은 새로운 방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는 힘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지금 자신을 어디론가 밀고 가는 어떤 힘의 속도와 방향에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자 하는 이들은 함께 길을 걷던 서로에게 기대서야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다. 관성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의, 내가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의자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협력이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처럼 이해된다.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경쟁의식과 의심보다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순간, 정지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정지 운동과 함께, 우리는 그동안 왜 제대로 쉴 수 없었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해진 방향으로 가속화되면서 밀려가기만 했는지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란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는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빈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를 저자와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저자의 집필 취지에 따라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왜 잘살려고 할수록 불안해지는가?」, 2장 「일과 소비에 대하여 착각하는 사람들」, 3장 「우리는 언제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4장 「빼앗긴 쉼을 되찾기 위하여」로 돼 있다. 1장은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더 노력하기 위해 경쟁하고, 자유를 위해 돈을 버는(일하는) 것부터 재점검한다. 이 장에는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변주되는 용어도 등장한다. 또 지금까지 했던 최선이나 경쟁이 시작부터 잘못 꿴 단추 같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저자는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고 누구는 피해를 당하고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인식에서는 어떻게 공존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이다. 즉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협력하고, 위기를 벗어난 후 위기를 맞게 한 용의자 집단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한다면 당초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일이니 만큼 생략할 수는 없을 터, 앞으로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풀어나간다.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비 능력’ 을 갖춰야 하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과로와 일 중독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소비에 열중하는데, 오늘의 소비는 내일의 노동을 담보로 하기에 이 삶의 패턴은 계속 악순환된다. 직장인, 자영업자 등 대부분의 서민들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돌아가는 ‘노동’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일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쳇바퀴를 이탈하게 되면 어김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할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곳에 ‘쉼’은 있을 수 없다."

 


 

2장에서 저자는 다소 생경한 용어들 등장시킨다. '착각 노동'과 '환타지' '소비를 쉼으로 착각하는 현실' 등을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자살뿐만 아니라 혐오를 앞세운 범죄,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구조적 살인과 사회적 재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생존을 위한 가계 대출 규모는 이미 치명적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예감에는 기대감과 비관이 공존하다. 불안에서 벗어난 어떤 평안을 위해, 사람들은 최신 캠핑 도구와 등산 장비를 SUV 차량에 싣고 천연의 삶을 즐기러 산으로 들로, 강과 바다로 떠나곤 한다. 웰빙, 행복, 건강의 뜻을 모두 담은 단어 '웰니스'는 21세기 신종 산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철학이자 생활양식이 되었다. 노후 연금, 양육에서 벗어난 중년의 목가적 삶,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품격 있는 주택, 고가의 빈티지와 최첨단 디지털 제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21세기형 답을 주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일하려 한다.

웰니스 열풍의 반대편,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자살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자살률은 이후 18년 이상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우울한 것일까? 대한민국도 한때(2002년부터) 주5일 근무제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했던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주 40시간 노동이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시해온 서구와는 달리 노동을 멈추고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낄해야 할 이틀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일하는 5일 동안 오히려 초과 근무까지 악착같이 해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일주일 중 이틀 동안 쓴 카드 비용 때문에 나머지 닷새를 점점 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저자는 '저당 잡힌 미래'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피로사회, 성과사회, 일 중독, 자기계발, 취업 걱정 등은 바로 고도로 정교화된 칸트식 노동 예찬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비판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노동 예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을 뒤로한 채 외치는 노동 예찬은 주어진 노동의 욕망를 실현하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라는 '착각 노동'의 판타지를 퍼뜨린다는 주장이다. 일을 자아실현과 동일시하는 사회는 직업 또는 일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방법으로 여기지만, 이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판타지가 진실에 가깝다면, 우리는 일을 많이 할수록 행복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대논리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도 꼬집는다. 이 때문에 저자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믿게 하는 메커니즘을 ‘착각 노동’ 판타지라고 한다. 그리고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 시간마저 장악하여, 신용카드를 긁어야 잘 쉬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실을 포착한다. 물론 이것 역시 착각이라는 것이다.

 

저자 : 이승원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경기도 안양과 영국의 몇몇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시절을 빼고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멋진 사회복지사 아내,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음악을 공부하는 딸, 권투할 때가 가장 맘이 편하다는 아들, 치매 속에서도 늘 웃으시는 어머니, 큰 병을 이겨내고 있는 강한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청소년 시절 육상, 야구, 농구, 중창단, 교회 학생회 활동에 빠져 지냈으며, 이후 대학에서 철학, 종교학, 국제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책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현장 경험을 하며 더 많은 삶의 지혜를 얻었다. 한동안 생업으로 국회, 중간지원조직, 공공연구기관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로 민주주의, 포퓰리즘, 도시 정치, 사회혁신, 세계 시민교육 등을 연구하고 관련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민주주의』(2014), 『커먼즈의 도전』(공저, 2021)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2012),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샹탈 무페, 2019)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커먼즈 네트워크, 시시한 연구소,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등에서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활동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불광천에서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북한산과 봉산 오르기, 드라마 보기, 동네 목욕탕 가기를 즐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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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 - 8인의 시인, 8인의 화가 : 천진하게 들끓는 시절을 추억하며
김연덕 외 지음 / 미술문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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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한때 시와 소설을 TV에서의 광고와 드라마로 비유한 적이 있다. 물론 사석에서 한 말이고, CF의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에서 파생돼 나온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미술 에세이로서 시와 그림은 매우 닮은 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갑자기 TV 광고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시는 간결하고 언어로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로서 어쩌면 가장 오래된 문학인지도 모르겠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은 서사시로서 긴 이야기를 시의 형식으로 썼기 때문이다. 시는 간결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므로 상징과 은유 등 비유도 자주 사용되고, 갖은 문학적 수사 방법이 동원된다. 그래서 간혹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카메라로 풍경을 찍는다면 사진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림의 시초도 사실은 자연이나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림을 자연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예술이라고 한다. 이는 문학에서도 차용되는 논리다. 자연이나 화자의 느낌, 감정, 마음 등을 짧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생긴 장르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었을 때는 구전해야 했기에 간결한 것이 우선이었을 터, 마땅히 짧게 표현하다보니 시가 짧게 의미 전달을 위해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는 문학으로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문학 전공자들은 어떻게 배우는지 독자도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이 책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시와 그림의 조화라고 해도 될 것이고, 한편으론 화가가 표현하는 바를 시인이 글로 반추해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에세이다. 이 책의 8명의 저자들은 모두 시인들이다. 시인 중에서도 그림을 좋아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림을 좋아하고, 어떤 시인은 화가의 작품에 일가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애호가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분도 있다 하니 미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는 시인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예스24 에세이 PD 이나영의 평가도 눈여겨볼 만하다. "8명의 시인들이 각자 친애하는 화가의 그림들을 글로 써낸 책이다. 시와 그림은 말을 줄여 한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의 시절을 관통한 그림들을 시인 각자의 언어로 추억하고, 조우하며 시와 그림이 접촉하는 순간, 엉겨 붙어 내게로 오는 순간을 느낀다."

시와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자.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한쪽은 글로 쓴 예술이고, 한쪽은 선과 색으로 그린 예술이다. 보다 엄밀한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너무도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라 이쯤에서 넘어가 본다. 시와 그림은 자주 한데 엮인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줄임으로써 말해지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대상을 구체적으로도 추상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읽고 감상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다. 시와 그림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부수고 깨뜨리고 치유하고 복원한다는 점에서, 이토록 희미한 세상의 한 구석을 한결같이 예리하게 투사해 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 책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이러한 시와 그림을 적나라하게 사랑하고 싶어서 기획된 책이다. 고유한 세계관과 예리하게 벼린 시어로 이미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단단히 각인된 시인 여덟 명이 한자리에 모여 그림을 논했다. 안희연 시인은 특정한 사조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그림 세계를 구축한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를, 서윤후 시인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성정을 우키요에라는 불멸의 장르로 승화시킨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오은 시인은 강렬한 색채를 자유분방하게 사용해 ‘야수주의’라는 사조의 시초가 된 프랑스의 거장 ‘앙리 마티스’를 좋아한다고 털어놓는다. 또 김연덕 시인은 간결하고 깔끔한 선과 색채로 천진하여 더욱 애달픈 연인 연작을 그려낸 프랑스 화가 ‘헤몽 페네’를 골랐다.

신미나 시인은 반 고흐가 존경한 화가이자 순박하고 꾸밈없는 농촌 생활을 화폭에 담은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이현호 시인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약하며 기인, 미치광이, 주객 등의 별칭으로 전국팔도에 이름을 떨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최북’을, 최재원 시인은 풍성한 색채와 영롱한 빛 표현으로 독보적인 화풍을 개척한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를, 박세미 시인은 오랜 시간 서로의 예술에 크고 작은 영감을 선사하며 우정을 나눈 한국의 동시대 화가 ‘이소화’를 각각 골랐다. 시인들은 저마다 다른 시선과 언어로 그림을 향유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고른 화가와 그 그림이 시인들의 한 시절을 예리하게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희연 시인에게 파울 클레는 최승자와 더불어 그의 이십 대를 정의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는 한때 “클레의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언어화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나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제목과 주석만 초라하게 남은 저 광활한 실패를 보라. 아마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장벽이 아니었을까. 모든 자극이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떤 그림은 그 자체로 크고 넓어 언어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이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클레의 그림에는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 지르는 여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듯 기우뚱한 전나무가, 겁을 집어먹은 듯 처연하게 눈물 한 방울 떨구고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뒤 시인은 고백한다. “지금껏 써온 나의 시들이 상당 부분 클레에게 빚지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파울 클레에게 무한 존경과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안희연은 시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시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청춘을 달려온 시인들에게 그림은 때론 위안을, 때론 공감을, 또 때론 조언을 해주었다고 털어놓는다. 시인이 되고 시집을 펴내며 마주한 고민의 시간과 다양한 인연들 속에서 아파한 이들에게 그림은 때론 사랑을, 때론 상실을, 또 때론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시인들의 한때가 짙게 묻은 그림을 보며 독자들은 시인이 품고 있는 기억의 한 구석을 그들과 공유하며, 그것이 산문으로 발화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게 된다. "클레는 달랐다. 클레의 그림 앞에선 침착하려 해도 휘저어졌다. 단순한데 깊고 골똘했다. 무엇보다 작품 안에서 추상의 역할이 분명하다는 점이 좋았다. 현실을 똑바로 옮겨내는 작업도 소중하지만 내게 보다 위안이 되는 그림은 물컵에 담긴 쇠젓가락처럼 신비로운 굴절이 일어나는 작품들이었다."(p.24)

 


 

또 서윤후 시인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두고 “이십 대의 방황 속에서 우정을 짙게 나눈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언젠가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한 시절의 깊은 우정을 나눴던 친구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추억한다. 시인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속 성난 파도를 바라보며, 펄펄 끓어올랐던 호쿠사이의 정열과 갓 시인이 되어 조급하고 서투른 마음으로 안달했던 자신의 이십 대를 병치한다. 김연덕 시인에게 헤몽 페네는 열세 살에 처음 만나 “한낮의 서점에서, 잠깐의 순간에도 그의 연인들에 매혹”되게 만든 화가다. 시인은 “나는 오직 페네를 위해, 책에서 20페이지도 차지하지 않는 그 부분을 읽고 간직하기 위해 그것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의 그림은 거의 내가 들고 다니는 노트에 한 낙서 같았고 그게 낙서라면, 내가 태어나 보았던 낙서들 중 가장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며 유년 시절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페네의 그림을 추억한다. 시인은 열세 살 꼬마에서 스물여덟이 되었고, 그 사이 시인에게 찾아온 사랑들의 “겉과 안은 여전히 아프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때, 페네가 그린 천진한 연인들은 다시 부활하여 시인과 조우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인 시와 그림. 글과 색. 펜과 붓. 문장과 색채. 그리고 시인과 화가. 이 둘을 나란히 놓고 감상함으로써 우리는 두 개의 예술이 서로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합일의 예술을 목격한다. 어쩌면 글로 그림을, 그림으로 글을 100퍼센트 완벽히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결핍이 그들을 계속해서 책상과 이젤 앞에 앉히고, 끊임없이 쓰게 하고 그리게 하는 것 아닐까? 시인과 화가가 접촉한 순간은 한 편의 산문이 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이 글은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생경한 촉감을 남길 테다.

 


 

오은 시인은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티스에 대한 꽤 깊은 조예가 드러난다. 시인은 마티스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춤추는 기분이 든다고 고백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춤추자고 적극적으로 손 내미는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라는 것. 몸을 움직이는 데 '젬병'인 시인조차 신체 곳곳에 분포한 신경이 반응한다. 발을 살짝 떼도 괜찮지 않을까.란 표현으로 몰입하는 그림임을 강조한다. 손을 슬쩍 머리 위로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란다. 시인은 마티스의 회화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 이 느낌이라고 말한다. 직전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아슬아슬함을, 한창때에 번져 나오는 흥분과 희열을 시인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고 느낌을 말한다. 그러나 마티스의 회화는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는 데 와선 흥분을 슬쩍 감추기도 한다. 신체는 캔버스에 스며든 듯 안정적이고 신체가 표현하는 동작은 날렵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시인의 표현으로 독자는 마치 진짜 춤을 추는 사람들 앞에서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은 시인의 마티스에 대한 애정은 그의 작품성을 알아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마티스의 작품에 대해 보고 또 보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한 듯하다. 예술 작품을 오래 보면서 사유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는 글까지 이끌어내는 데서 "역시 시인은 다르다"는 독자의 감탄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마티스는 회화 작업을 할 때 단순화를 중시했다. 무엇을 단순화한다는 것일까? 형태를? 색깔을? 입체감을? 사실상 모든 것이었다. 회화 작업을 할 때도 그는 스케치가 지닌 본래의 날렵한 미덕을 지키기 위해 붓을 들었다. 붓을 드는 일은 스케치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덮어버리는 일이다. 연필선이 드러나는 작품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채색 작업은 원래의 구상을 뚜렷하게 하는 작업이기 대문이다. 구상이 뚜렷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처음의 의도는 희미해진다."(p.83)

 


 

시간이 지연될수록 나는 내 공간에 그녀의 그림을 걸게 될 순간을 더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소화의 얼굴을 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이제 훨씬 더 많게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애정이 더 깊어진 것처럼. 그녀의 그림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녀의 그림이 내 공간에 존재하게 될 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웃게 된다. 이것이 작은 꽃의 기쁨.(p.240) - 「박세미 × 이소화」중에서

 

저자 : 김연덕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8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재와 사랑의 미래』가 있으며 곧 다가올 성탄절을 내 생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겨울과 산책과 꽃을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

 

저자 : 박세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저자 : 서윤후

199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과 『휴가 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그리고 여행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만화 시편 『구체적 소년』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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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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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는 예고편이 없다. ‘죽어감’이 길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 서둘러 사라진다. 완화치료 의사 아나 아란치스가 전하는, 후회 없는 오늘을 위해 죽음 앞에서 그들이 하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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