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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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렵다"라는 독자의 개인적 생각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시집 『야생 붓꽃』을 읽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시인의 노벨상 수상 이력 때문이다. 어려워서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보다 노벨문학상이란 상의 권위가 주는 매력에 더 끌렸기 때문이라고 독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평소에 시집을 잘 읽지 않는 것을 '시는 어렵다'는 인식에 편승해 변명하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무게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무감을 줄 정도로 압박감이 있다. 책 좋아한다는 사람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시집은 노벨상 수상 작가(2020)이자 여류 시인의 초기 시집(1992)이다. 시인이나 작가에게 '여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여성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독자가 임의로 붙였음을 양해해 주시길 빈다. 이 시집의 루이즈 글린은 1996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시인) 이후 두 번째 여류 시인이자 21세기 첫 여성 시인이다.

1992년 출판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야생 붓꽃』은 시인에게 퓰리처상과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시 협회상을 안겨준 대표작이다. 미국시사에서 식물에게 이렇게나 다양하고 생생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부여한 시인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고 한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86)이 자연에 대한 시, 특히 꽃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를 많이 썼지만, 글릭처럼 이토록 온전히 꽃의 목소리를 직접 구사하지는 않았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동시대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도 자연을 가까이 하며 다른 존재들에 대한 시를 많이 썼지만 인간의 시선으로 대상을 면밀히 보는 시들이 많았다. 글릭에게 이르러 꽃은 비로소 꽃 자체가 된다.

 


 

이 시집은 식물의 목소리를 구사한 글릭의 시적 실험이 돋보인다. 식물을 관찰하다가 자신의 경험으로 넘어가는 화법은 의인화가 가진 울림을 더 크게 보여준다고 예스24 MD 이나영의 평이다. 글릭과 오랫동안 소통한 정은귀 번역가와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이 별도의 책으로 함께 실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는 시를 직접 읽기보다 해설과 번역가의 말을 주의 깊게 살폈다. 시를 읽는 옳은 방법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먼저 읽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작품 해설' 「세 개의 모놀로그 혹은 한 개의 트라이얼로그」에서 "2020년 노벨문학상을 루이즈 글릭에게 수여하면서 한림원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의 열 번째 시집 『아베르노』(2006)였지만, 그것이 『야생 붓꽃』(1992)이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야생 붓꽃』은 『아베르노』와 함께 손꼽히는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글릭만의 '시적 목소리((poetic voice)'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특히 이 시집은 '목소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하나의 답이 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야생 붓꽃』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식물의, 인간의, 그리고 신의 목소리. 대체로 식물은 인간을 향해 말하고, 인간은 신을 향해 말하며, 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이 세 종류의 화자-발화로 쓰인 시가 시집을 삼등분한다. 이 글의 목표는 일차적이고 기초적이다. 세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하고, 각각의 목소리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축어적으로 따라가 보는 일이 그것이다."고 전제한다.

 


 

끔찍해, 어두운 대지에 파묻힌

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러고는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 영혼으로

있으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대지가

살짝 휘어졌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내자 새라고 생각한 것들이 빠르게 날고.

 

다른 세상에서 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너,

네게 말하네, 나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 「야생 붓꽃」 부분

 


 

당신이 나를 그렇게나 끔찍이 싫어한다면

내게 애써 이름 붙여 주시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언어에

비방하는 말이 하나 더

필요한가요.

한 부류에 모든 책임을

들리는 또 다른 방식ㅡ

 

당신이나 나나 알잖아요.

하나의 신을 섬기려면

하나의 적만 있으면

된다는 걸ㅡ

 

내가 그 적은 아닙니다.

이 화단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일 뿐,

- 「개기장풀」 일부

 


 

화자-식물은 정원을 가꾸는 인간에게 힐난한다. 당신은 소중한 꽃들이 죽어 가니 무언가 탓할 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그래서 '잡초'인 '나'를 원인으로 지목해 '마녀의 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왜 인간들은 이런 식이냐고, 왜 슬프다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느냐고("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개기장풀은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것은 당신이 사실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이와 같은 낙인과 혐오는 인간이 자주 범하곤 하는 실패의 '작은 모범 사례'일 뿐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잡초는 말한다.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오기 전부터 우리는 있었고 당신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는 여기 있을 것이다. 당신의 혐오가 철회되거나 그것이 찬사로 바뀌거나 하는 변화에 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곳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줄은 그 당당한 선언이다.

신형철은 또 「꽃양귀비」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시에서 식물과 인간의 차이는 '느낌(feelig)'과 '생각(mind)'의 차이로 설명된다. 꽃양귀비는 느낌의 존재다. 실제 그 꽃의 형상이 그러하듯, 가슴을 활짝 열고 있는 그 강렬한 모습은 이 존재의 핵심에 불이, 내재화되고 일체화된 신성이 품어져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인간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반문이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인간의 삶은 일상적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신성을 더는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의미에서 허무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떠올리게도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꽃양귀비는 인간에게 묻는다. 한 번은 그렇게 자신을 활짝 열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고, 왜 다시는 열지 않으려 했느냐고 말이다.

 


 

역시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잣말 하듯이 쓰인 이 시에서 나(인간), 꽃, 신의 목소리를 내는 화자는 시인 한 사람이다. 세 물체의 소통을 인간이 중간에서 한다. 그가 화자이고 그는 시인이다. 물론 꽃은 꽃으로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신은 신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말하고 항변하고 변명하고 자기의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렇게 알고 시를 읽어나가다가도 일부는 이해가 안 된다. 그것은 이 시의 목소리들이 각 객체이지만 대답하고 질문하고를 반복하는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처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 시가 독자들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라고 시의 번역자 정은귀는 말한다.

그는 '옮긴이의 말' 「꿀벌이 없는 시인의 정원에서」 차근차근 답변해준다. "미국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 특별한 취미가 아니고 일상인 나라다. 미국의 일상에서 이 시집에 등장하는 꽃과 풀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 사회에서 우리 주변에 늘 만나는 사람들이 이 시의 대상이라는 주장처럼 들린다. 정은귀는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집 전체가 54편의 비교적 짧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간명한 단어들이라 굳이 사전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방 뜻이 들어오지 않고 아리송할 때가 많다. "내 말 좀 들어봐" 해 놓고선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겠다는 듯, 시는 여러 겹의 목소리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이 시집을 독자들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꽃을 들여다볼 때처럼 세심하게 보면 그걸로 충분한 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 시집은 사람이건 꽃이건, 풀이건, 저녁나절 햇살이건, 여름 오후 바람이건, 대상을 세심하게 보지 않고 멀리서 예쁘다, 별로다, 심드렁하게 쉽게 결론을 내리는 우리의 습관을 다시 보라고, 단호하게 허리를 곧추세우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저자 : 루이즈 글릭(Louise Gluck)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943년에 태어났다. 1968년 시집 《맏이》로 등단했고, 1993년 시집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2003년부터 다음 해까지 미국 계관 시인이었다. 그동안 시집 열네 권을 발표했고 에세이와 시론을 담은 책 두 권을 지었다. 2020년 노벨문학상, 2015년 국가인문학메달, 1993년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 2014년 《신실하고 고결한 밤》으로 전미도서상, 1985년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전미비평가상 등을 받았다. 2001년 볼링겐상, 2012년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그리고 2008년 미국 시인 아카데미의 월리스 스티븐스상을 받기도 했다. 예일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역자 :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이자, 우리 시를 영어로 알리는 일과 영미 시를 우리말로 옮겨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의 실천을 궁구하는 공부 길을 걷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 《딸기 따러 가자》와 《바람이 부는 시간: 시와 함께》이 있다. 앤 섹스턴의 《밤엔 더 용감하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패터슨》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Ah, Mouthless Things)》, 강은교의 《바리연가집(Bari’s Love Song)》, 한국 현대 시인 44명을 모은 《The Colors of Dawn: Twentieth-Century Korean Poetry》를 영어로 번역했다.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나누기 위해 매일 쓰고 매일 걷고 또 매일 번역한다. 때로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과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으며 공부 길을 걷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대학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주고받는 나눔을 위해 매일 쓰고 매일 걷는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과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믿음의 실천을 궁구하는 공부 길을 걷는 중이다. 번역에도 관심이 많아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영역시집 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2016) 그리고 Ah, Mouthless Things (2017)를 출간하였고 한국 현대시인 44명을 모은 The Colors of Dawn: Twentieth-Century Korean Poetry (2016)를 번역, 편집하였고 영미시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도 기쁘게 하는 중. 시를 통해 우리 삶과 세계를 읽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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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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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나치스는 전제주의 권위의 정권으로 전쟁 준비를 하며 인접국에의 영향력을 최대화했다. 이 소설은 권위주의 시대 교육 체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저자의 자전적 소설로서 어느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형상화해 크게 관심을 모았으나 ‘금서‘로 지정되는 수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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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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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게르버』는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라는 부제와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이라는 데 독자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저자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가 스물한 살 때 쓴 작품인 데다 복잡한 국적과 출신 등이 더 관심이 갔다. 이 소설은 1930년 오스트리아에서 출간되었는데 혹시 독일 히틀러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라 관련이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는 프라하 출신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작가다. 저자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인공이자 고등학생 '쿠르트 게르버'가 겪는 학업의 어려움, 교수와의 갈등, 우정과 사랑의 문제를 다뤘다. 이 소설이 자전소설인 셈이다. 프라하의 권위주의적인 학교에서 겪었던 부정적인 경험을 그렷다.

저자는 1921년 아버지가 프라하로 전근하면서 저자가 다녔던 프라하의 학교는 개혁이 단행된 오스트리아 빈의 학교와 달리 옛 군주제 시기의 낡은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교육의 핵심은 규율과 규범을 내세우며 학생의 자유 의지를 꺾고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졸업 후 좋은 직장과 대학 입학을 위해 졸업시험 합격증이 필요한 학생들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성적 평가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수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소설의 서두에서 전하는 일주일에 열 명의 학생이 자살하는 현실은 그런 학교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권위주의적인 학교를 고발하는 이 소설에는 고등학교 시절 시를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27년 졸업시험에 한 번 낙방한 적이 있는 작가의 경험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소설은 카프카의 유고를 정리·발표한 막스 브로트의 도움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첫 출간 당시 5,000부가 인쇄되고 1년도 안 되어 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소설의 성공으로 토어베르크는 물질적인 안정과 함께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게르버』는 출간 3년째 되는 1933년 나치 정부가 “사제의 문제를 증오심에 가득 찬 왜곡된 형태로 그린” 소설로 판정해 금서가 되었다. 이어 1936년 토어베르크의 모든 글에 금서 판정이 내려졌고, 작가는 1938년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도피했다가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51년에야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쿠퍼 같은 사람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쿠퍼는 소설 속 수학 교수이자 게르버의 담임이다.)

쿠르트 게르버는 고등학교의 마지막 해,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다. 그는 졸업반 담임인 쿠퍼 교수가 가르치는 수학에 약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신’이라 불리는 쿠퍼는 권력 지향적인 사디스트 성향의 교사로, 학생들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강압적으로 행동한다. 쿠퍼에게는 재능 있으나 반항적이며,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고 통솔력이 있는 게르버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다. 게르버가 가장 취약한 과목인 수학을 가르칠 때마다, 쿠퍼는 게르버는 물론이고 많은 학생들에게 모욕감을 주어 게르버는 날마다 괴로워한다.

 

 

게르버의 아버지는 일찍이 쿠퍼의 악의를 눈치채고 전학을 가라고 권하지만 게르버는 “쿠퍼 같은 사람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라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졸업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치욕이다. 심장병이 있어 흥분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아버지로 인해 게르버의 졸업시험에 대한 부담감은 커져만 간다. 게다가 동급생인 리자에 대한 첫사랑은 어쩐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도 게르버는 무자비한 교수 쿠퍼와 불공정한 싸움을 계속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대 사회 속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발을 딛기 전에 오랜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 학교는 우리가 살고 활동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토어베르크의 이 소설 『게르버』는 똑똑하고 성숙하나 반항적인 학생 게르버의 학교생활 마지막 해를 그리며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은 세 가지 것에 근거한다. 바로 진리와 정의, 사랑이 그것이다.” 소설의 서두에 인용된 고대 이스라엘 랍비의 이 격언은 소설의 화두이다. 주인공 게르버는 학교와 실제 인생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한다. 만약 아버지의 말이 옳다면 학교는 세상의 토대인 진리와 정의, 사랑이 있는 곳, 혹은 그것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과연 학교는 그런 곳일까? 저자는 교수의 견해에 좌우되는 학교의 성적 평가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비판은 그런 주관적 판단으로 한 사람의 미래를 판단하는 문제점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라하의 학교에서는 담임의 권위가 막강했던 것 같다. 사회 진출이나 대학입학 등에 관한 절대적 권한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적표에 여러 단계로 나눠 기재토록 돼 있는데 낙제점을 받으면 진급이나 취업은커녕 유급되는 신세가 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만 결국은 잘못된 제도 때문에 한 사람의 능력과 실력은 물론 존재까지도 지워버릴 만큼 절대적 사회의 제도에서는 엉뚱한 피해자가 속출할 뿐이다. 게르버는 주장한다.

"누가 ‘교수진’과 그의 ‘동료들’에게 수십 년 동안 한 사람의 존재를 규정할 권리를 보장했는가? 이 사람은 강한 앞발로 미래를 장악하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하고, 반면 저 사람은 무너져 웅크리고 앉아 배가 난파되어 황량한 섬에 표류한 사람처럼 사방 삭막한 바다에 둘러싸여 냉혹하게 완결된 지평선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며 혹시 자비나 우연, 환영으로 불리는 하얀 점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라고 하는 불가침의 일회적 판결을 내릴 권리를 대체 누가 그들에게 보장했는가?"(p.241)

게르버의 아버지는 학교와 실제 인생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아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만약 그가 옳다면 학교는 세상의 토대인 진리와 정의, 사랑이 있는 곳, 혹은 그것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졸업시험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간주하고, 교수가 절대 권력을 휘둘러 학생을 파멸시키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서로 돕기보다 경쟁하며 강자인 교수의 부당한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학교는 진리, 정의, 사랑과 아무 상관이 없다. 토어베르크의 소설이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정도는 다르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세상 모든 학생이 겪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81년 볼프강 글뤼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가 스물한 살 때 발표한 이 소설이 출간된 지도 어느덧 거의 90년이 넘었다. 장 아메리의 말처럼 “폭탄처럼 떨어진”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 강렬한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어쩌면 권위주의적 잔재가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곳이 많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다. 등장인물 중 주인공은 게르버다. 8학년(*역자 주 실과고등학교 : 수학과 자연과학에 중점을 두는 오스트리아의 8년제 고등학교) 재학 중으로 졸업 시험을 앞두고 있다. 낙제가 될 시에는 졸업 시험을 보지도 못하는데 게르버는 일부 선생님들에게 미움을 받는 학생인 듯하다. 특히, 반의 담임 선생님인 쿠퍼는 게르버의 부모님께 엄포를 놓는 등 게르버를 괴롭힌다. 게르버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가정 학습을 받자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끝까지 학교에 남아 졸업 시험을 보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학교 체제에 불만과 게르버의 이성과의 순수한 사랑, 졸업 시험에 대한 압박감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게르버가 똑똑하지만 엉뚱하고 반항적인 인물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의 영민함에 따른 일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담임인 쿠퍼는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게르버를 괴롭힌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어쩌면 일제강점기 일본인 선생에게 배우는 우리어린이들이 생각난다. 당연히 학교는 다니지만 선생이나 가르치는 것에 대해 반항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눈밖에 났다는 이야기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주장을 하는 학생인 것이다. 특히 청소년기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나서서 주장을 펼치는 요즘 학생 시선으로 보아서는 게르바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낄 것이다. 반항이 아니라 평범이 될 일이다.

 


 

이에 비해 담임인 쿠퍼 선생은 부정적 요소를 다 갖춘 인물이다. 권위주의적인 데다 자신의 권위와 하는 일에 반항하거나 불만을 표시한다면 그 성적표 점수를 무기로 이용해 학생들을 옭아매는 못난 인물이다. 좋게 보면 괴상한 인물쯤으로 보일지 몰라도 독일 나치스 권위주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권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학생의 능력을 키워주고 지식을 전해주는 선생이 아니라 말 잘 듣는 모범학생을 키우는 선생이다. 학생의 인성을 함양한다는 점에서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될 인물이다. 자신은 어쩌면 권력의 지시에 가장 잘 순응하는 선생일 것이다. 학생 위주의 선생이 아니라 이해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의 기준만 보자면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학생을 괴롭히는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밖에 나면 낙제를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길을 들이는 선생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갑자기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을 자신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런 학생에 대해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관련 질문을 하는 등 비인격적 선생의 전형이다. 지금 시대에는 있을 수 없겠지만 나치스 권위를 생각해보면 가능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청소년기인 게르버의 사랑 이야기도 꽤나 인상적이다. 주위 사람들이 성관계 등의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 논할 때 게르버는 성애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리자와 육체적인 사랑에 거리를 두고자 노력한다.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는 리자의 모습을 보고도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인다는 게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본능적 욕구도 참는 순수하면서도 이상적인 젊은이의 표상이다.

 


 

시대가 다르고, 지역도 달라 오스트리아의 교육 체계가 우리와 다르고, 선생이나 학생들의 생각이 달라서 약간씩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노출되지만 적절한 역자 주석을 통해 해소하면 우리의 청소년 소설, 성장소설이나 다름없다. 주인공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심리, 권위주의적 선생의 행위 등을 중심으로 읽으면 큰 물줄기를 잘 따라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의 대학입시는 수학능력시험에 의해 치러지지만 당시 게르버 학교에서는 낙제일 경우 대학에 응시할 기회가 박탈되거나 구술 고사로 이루어지는 일 등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지만 교육제도란 게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가변성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별 문제는 없다. 마지막 내용이 마음 아프게 비극적이어서 씁쓸한 뒷맛에 개운하진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저장하기에는 오히려 더 강렬하다는 느낌도 있다.

 

저자 :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190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라하 출신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21년 아버지가 프라하로 전근하면서 가족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가 1924년 체코 시민권을 획득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시를 발표하고 일간지의 스포츠 리포터와 연극 비평가로 활동했다. 1928년부터 프라하 대학에서 잠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후 프라하와 빈을 오가며 저널리스트, 연극 비평가, 소설가, 서정시인, 패러디 작가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3년 첫 소설 《게르버》가 나치 정부의 금서 판정을 받은 이후 유대인 작가로서 박해를 받다가 1938년 스위스를 경유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1940년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서 생계를 위해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번역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연극 비평가로 일했다. 194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51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저술에 힘을 쏟았다. 편집자, 잡지 발행인, 번역가, 방송 토론자로 활동하는 한편, 재능 있는 젊은 작가의 등단에 힘을 보탰다. 작품으로는 자신의 부정적 학교 체험을 그린 소설 《게르버》를 비롯해 《선수단. 스포츠 인생》 《복수는 나의 것》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 《욜레슈 아주머니 혹은 일화로 보는 서양의 몰락》 《그것 역시 빈이었다》 등이 있다. 《게르버》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 《그것 역시 빈이었다》 등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생전 율리우스 라이히 상, 빈 저널리즘상, 오스트리아 학문·예술·명예 십자훈장, 오스트리아 국가문학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79년 11월 10일 세상을 떠나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자 : 한미희

 

이화여자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독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홍익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하이디』, 『루소』, 『카를 융-생애와 학문』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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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샤의 후예 1 : 피와 뼈의 아이들
토미 아데예미 지음, 박아람 옮김 / 다섯수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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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SF 소설에 대한 독서 부족 탓이겠지만 '블랙걸(흑인 소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이 책 『오리샤의 후예』가 처음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졌지만 1권이 2018년에 출간된 후 4년 만에 2권이 출간됐다. 왜 연속 출간되지 않은지 이유야 어찌됐든 독자로서는 궁금증만 커질 뿐이다. 특히 113주 연속 USA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대단한 소설로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아마존에 1만3,000개 이상의 리뷰가 올라왔을 뿐 아니라 스티븐 킹, 록산 게이 등 걸출한 작가들에게도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인 토미 아데예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블랙걸인 이유가 아프리카 신화를 기반으로 매력적인 마법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여성 히어로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불평등한 현실 세계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목에 등장하는 오리샤는 아프리카의 한 왕국이다. 먼 옛날부터 오리샤 왕국에서는 마법을 가진 '마자이'와 그렇지 못한 '코시단'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마법을 두려워한 왕이 마법을 없애고 대습격을 일으켜 마자이를 몰살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난 마자이의 아이들은 최하층민으로 전락해 온갖 차별과 폭력 속에 살아간다. 11년 후, 제일리는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졌던 성물을 손에 넣는다. 세 개의 성물을 모아 신성한 의식을 치르면 봉인된 마법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한다. 제일리와 아이들은 왕의 추격을 피해 임무를 완수하고 마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여정이 이 소설의 스토리다.

 


 

검은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마자이, 생소한 이름의 신들과 부족들. 이 작품 속 세계는 무척 낯선 풍경으로 가득하다. 표지 그림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저자의 속마음에 딱 맞는 얼굴과 장식 등으로 저자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을 잘 그려주었다고 나중에 저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고 저자가 남긴 「감사의 글」에 남아 있다. 오리샤에서는 제각기 다른 재능을 부여받고 그 힘을 사용하는 열 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희귀하고 신성한 마자이족이 번영을 누렸다. 마자이는 태어날 때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다. 열 세살이 되면 마법을 부릴 수 있었는데 이 마법이 11년 전에 사라졌다.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없다. 사란 왕은 마자이가 약해진 틈을 타 공격을 했고, 마자이었던 제일리의 엄마도 죽었다. 그 이후 사란 왕은 각종 세금을 걷기 시작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면 마자이를 부역장으로 끌고 갔다. 그 곳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성물이 해변에 떠밀려와 신성자들이 성물에 접근하면서 능력이 되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두루마리의 능력을 시험한 사란 왕은 두루마리를 없애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것을 지켜본 아마리 공주는 두루마리를 가지고 왕국을 도망나온다. 시장에서 제일리를 만나게 되고 탈출에 성공한다. 두루마리를 만진 제일리에게 신적인 힘인 아셰가 되살아나는 일이 일어난다.

 


 

마법을 되찾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제일리, 제인 , 아마리는 찬돔블레로 떠난다. 그들을 아마리의 오빠인 이난왕자와 카에아가 그들을 뒤쫓는다. 찬돔블레에서 하늘 어머니의 영혼과 땅에 있는 마자이들을 연결해 주는 영적 수호자의 역할을 하는 센타로를 만나게 되고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백년제 하지에 오리니언해 북쪽 해안에 나타나는 신성한 섬에 3가지의 성물을 가지고 도착해야 하지만 시간은 촉박하고, 뒤쫓는 막강한 적도 있다. 과연 이들은 일장석, 두루마리, 단검을 구해서 그날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제일리와 이난이 꿈에서 연결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마자이를 죽여야 한다고 교육받은 이난은 마자이인 제일리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낀다. 자신이 잘못알고 있었음을 깨닫고 마지이의 적에서 같은 편이 된다. 시간이 촉박한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제인과 아마리가 수상한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고, 이를 구하러 간 제일리와 이난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무사히 탈출해서 제시간에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사란 왕과 마주친 제일리 앞에 사란 왕이 나타나고,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수 없는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란 왕을 지켜보고만 있는 이난. 이난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제일리를 배신한 것일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며 3가지 성물 하나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대로 마법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는 날아가게 되는 걸까?

 


 

1권이 650여 페이지, 2권은 580여 페이지에 이르는 굉장한 분량의 소설이다. 쉼없이 숨가쁘게 읽히지 않는다면 읽어내기 쉽게 생각하는 독자가 드물 터다. 하지만 낯선 풍경과 낯선 용어들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의 세계와 잘 맞아 떨어진다면 분량이 길다고 읽기를 포기할 독자는 없을 터다. 이 소설은 화자가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연결이 매끄럽고 적절한 타이밍에 화자의 입장에서 상황이 전개되어 몰입도가 더 높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로 제작이 확정된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머릿속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경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왕국은 어떻게 나타내면 좋을지, 전쟁의 장면에서 책에서처럼 실감나게 표현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흠뻑 빠져들게 구성되었다. 글을 읽고 있지만 책이 살아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였다. 영화로 어떻게 표현될지도 벌써 궁금해진다.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제일리, 제인, 아마리, 이난이 영화에서 표현된다면 소름 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오랜만에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낯선 이름과 용어답게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우리 세상과는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죽은 자의 영혼을 부리는 사령술사 이쿠족에서부터 상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음술사 에미족, 쇠와 땅을 주무르는 쇠술사와 땅술사 아이에족, 앞날을 예측하는 예언술사 아리란족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서아프리카의 신화와 문화를 토대로 새로운 판타지 세계를 보여준다.

 


 

1권 〈피와 뼈의 아이들〉은 우연히 마자이의 두루마리를 손에 넣은 주인공들이 마법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찬돔블레 사원에서 일장석의 존재를 알게 된 아이들은 백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자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그 가운데 마자이의 탄생 배경과 마법이 사라진 이유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마침내 아이들은 이배지의 경기장에서 목숨 건 피의 경기를 펼친 끝에 일장석을 찾아 의식을 치른다. 과연 수많은 희생을 감수한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까? 참혹한 피 냄새와 강력한 아름다움을 품은 오리샤는 얄궂게도 우리가 사는 세계를 도식화한 레플리카(독자 주 : 미술 그림이나 조각 따위에서, 원작자가 손수 만든 사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세상과 오리샤가 모두 자신과 다른 존재를 철저히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오리샤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갈등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저자는 현대 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는 책의 시작 부분에 앞서 「작가의 말」을 통해 털어놓는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책을 수정하면서도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러분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는 지금도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사자너와 신성한 의식은 환상의 요소이지만 이 책에 묘사된 모든 고통과 두려움, 슬픔, 상실은 현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우연찮게 뉴스를 켤 때마다 무장하지 않은 흑인 어른들과 아이들이 경찰의 총에 맞은 사건을 연일 접하게 되던 시절에 쓰였다. 나는 두렵고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에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작게나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p.6)

 


 

마법으로 번성했던 축복의 땅 오리샤는 물, 불, 빛, 쇠, 바람, 질병, 동물, 시간, 마음, 영혼을 다루어 뭇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강력한 힘은 두려움을 불러왔다. 두려움은 증오가 되고, 증오가 폭력으로 바뀌면서 마자이를 몰살하겠다는 열망이 왕의 마음에 싹튼다. 대학살의 밤, 그 후 십여 년간 오리샤의 최하층민이 되어 고초를 겪는 마자이의 후예들. 오리샤 군대의 사슬과 감옥으로도 묶어둘 수 없는 정의를 향한 갈망, 피를 타고 흐르는 마법의 능력. 이제 그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이 아니라 결단의 함성을 지르려 한다. 때가 왔다. 백 년에 한 번, 마법을 되찾을 수 있는 신성한 날이 다가오고 있다. 마법을 되찾아야만 한다.

왕의 근위대에게 엄마와 동족을 빼앗긴 제일리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살아간다. 적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훈련을 받으며 칼 대신 손에 쥔 것은 격투봉이다. 소녀는 주문을 외듯 읊조린다. “격투봉은 피하되 해하지 않고, 해하되 불구를 만들지 않으며, 불구를 만들되 죽이지 않습니다. 격투봉은 파괴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던 남매, 이난과 아마리는 혹독한 교육과 세뇌 속에서 왕실의 후계자로 길러진 아이들이다. ‘의무를 지켜라, 이난.’ ‘쳐라, 아마리.’ 왕과 왕비의 목소리가 언제나 머릿속을 지배한다. 마침내 궁전에서 도망치는 공주. 그런 여동생을 추격하다가 아름다운 마자이를 만나게 되는 왕자. 각기 다른 고통으로 울부짖던 아이들에게 마법보다 빨리 찾아온 것은 사랑일까, 전쟁일까.

이에 대한 표현은 저자가 염두에 둔 인종차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독자로서는 로마 시대의 검투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흑인 노예로 끌려오던 시절의 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삶이 떠오른다.

 


 

저자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처럼 들리는 「작가의 말」은 이어진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분위기와 저자의 의도를 알면 더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이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디뎌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줄라이커와 살림을 위해 눈물 흘렸다면, 조던 에드워즈와 타미르 라이스, 에이야나 스탠리존스 같은 무고한 아이들을 위해서도 울어주길 바란다. 그들은 각각 열다섯, 열둘, 열일곱 살에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책 속에서)엄마의 죽음에 슬퍼하는 제일리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면 경찰의 만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을 위해 가슴 아파해 주길 바란다. 이를테면 다이아몬드 레이놀즈와 그녀의 네 살배기 딸 같은 사람들. 그들은 사랑하는 필란도 카스티유가 총에 맞아 무참히 살해당하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를 죽인 경관 제로니모 야네즈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런 극소수의 사례 외에도 흑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1권, p.6~7)

서아프리카 신화를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이 소설은 인종 차별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를 담았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독자들은 신화의 스토리를 재미 있게 읽더라도 왜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머나먼 나라에 와서 핍박받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물론 역자 박아람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되새기고 있다.

 


 

"생소한 요소가 가득한 오리샤는 오싹할 만큼 낯익은 모습들을 드러낸다.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운동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토미 아데예미는 1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미국의 뿌리 깊은 흑인 탄압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에서 1권이 출간되고 1년여 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었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종식되지 않았다. 마치 질병술사들이 활약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이 팬데믹은 국내외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종 차별과 정치적 분열을 심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세상의 한쪽에서는 믿을 수 없는 전쟁이 터졌다. 21세기 우리의 세상은 오리샤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아데예미가 창조한 '판타지' 세계는 배경을 덜어내고 보면 우리 세계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마자지와 왕실은 쉽사리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다. 이쿠족은 죽음의 마자이인 동시에 삶의 마자이다. 이몰레족은 어둠의 마자이인 동시에 빛의 마자이고 이오산족은 질병술사뿐 아니라 치료술사도 품고 있다. 그들은 때로 혼돈과 문제를 일으키지만 동시에 그것을 해결할 힘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나 완벽한 세상은 구현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화합할 의지를 다지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의 길일 것이다. 부디 제일리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이 모두 함께 그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지금은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는 제일리 일행이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두 세상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으니까."(2권, p.581~582)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

 


 

2권 〈정의와 복수의 아이들〉은 제일리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참담한 광경으로 시작한다. 마법이 돌아왔지만 주인공들은 더 큰 절망에 빠진다. 왕실은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고 이제는 왕보다 더 인정사정없는 왕비가 전면에 나선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도 막강한 마법의 힘을 갖게 된다. 다행히 우리의 주인공들에게는 든든한 지원군과 새로운 터전이 생긴다.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 신성자들의 정착촌이 아니라 무려 세 개의 산에 자리한 성지를 찾은 것이다. 성지에서의 생활은 마자이들의 아름다운 만남과 감탄스러운 풍광이 어우려져 낙원처럼 묘사된다.

첫 장(章) 「우리의 전투는 이제 시작이다」의 화자는 제일리다.

"되도록 아빠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아빠를 생각할 때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아빠와 함께 처음 파도 소시를 들었으니까. 그 순간 처음으로 파도를 느꼈으니까.

우리는 자장가 같은 파도 소리에 이끌려 숲길을 따라 바다로 향했다. 바다의 산들바람이 고불고불한 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듬성듬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우리 앞에 어떤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했다. 저 자장가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간직하고 있을지. 그저 그리고 가봐야 했다. 그 파도가 내 영혼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쥐고 있는 것 같으니까."(2권, p.12)

 


 

우여곡절 끝에 제일리 일행은 오리샤 왕국에 마법을 다시 가져온다. 그런데 마법을 부릴 수 없었던 사람들도 마자이 조상이 있는 경우 이 힘을 갖게 되어 일명 ‘티탄’이 된다. 왕족들은 마자이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제일리와 아마리는 반란군 ‘이위카’에 들어간다. 제일리는 부족을 지키려는 열망 속에서도 원로라는 막중한 책임감과 소중한 사람을 또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마자이를 혐오하던 사란 왕의 아들, 이난은 아버지의 통치 방식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왕세자로서 주입받은 가치관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렇듯 작중 주인공과 그 건너편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는 선과 악, 그 경계가 모호한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독자는 등장인물의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그들의 심리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난과 연인 관계였던 제일리, 그리고 이난의 동생 아마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각자 지향하는 오리샤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배신과 화해, 대립과 협력, 정의 실현과 복수 등 다양한 형태를 띠며 이어지는 플롯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로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법 판타지 세계관이 등장하는 작품들 사이에서 이 시리즈는 핵심 주역이 흑인 여성이다. 다른 등장인물 또한 모두 흑인 캐릭터라는 점에 차별성이 있다. 저자가 집필하면서 미국의 흑인 탄압 역사를 염두에 두었다고 밝힌 만큼 소설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인종 차별 사건과 흑인 민권 운동을 상기시킨다. 이는 비단 미국의 상황에만 국한된 비유가 아니다. 힘없는 민족, 소수자에 대한 박해와 차별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많은 재력을 가진 자, 권력자가 저지르는 무법적 횡포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데예미는 이 책에서 허구와 현실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한다.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는 물론, 의미를 곱씹으며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해리포터, 신비한 동물사전, 반지의 제왕…… 왜 유명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백인 남성인가?’

저자 토미 아데예미는 이러한 의문 속에서 ‘블랙 걸 판타지’를 탄생시켰다. ‘유럽(배경)-백인(인물)’ 구성의 기존 판타지물들이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치열한 시도인 셈이다. 블랙 걸 판타지는 단순한 역할 전복에 그치지 않는다. 서아프리카 문화권으로 판타지 세계를 확장한다.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펼쳐지는 검은 마법사들의 왕국. 용맹한 사자와 백표범을 타고 어슬렁거리는 아름답고 불온한 전사들. 그들의 대규모 전투와 한층 역동적인 마법. 블랙 걸 판타지의 등장은, 언제나 가능했지만 미처 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준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두려움에 떨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싸우는 것이다. 싸워 이기는 것.

그리고 이기기 위해선 마법이 필요하다.(1권, p.502)

 

“네가 저지른 실수가 너의 전부는 아니란다.” 마마 아그바가 어깨를 잡자 아마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애절해진다. “한순간으로 자신을 단정 지어서는 안 돼. 그로 인해 무너져서도 안 되고. 신들의 방식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단다. 그분들에게는 더 원대한 계획이 있을 거라고 믿어야 해.”(2권, p.545)

 

저자 : 토미 아데예미

미국 타임지에서 ‘2020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했으며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작가 겸 문예창작 교사로 활동 중이다. 하버드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브라질 사우바도르에서 서아프리카의 신화와 종교, 문화를 공부했다. 소설을 쓰거나 BTS 뮤직비디오를 보지 않을 때에는 tomiadeyemi.com에 문예창작에 대한 글을 올린다. @tomi_adeyemi에서도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역자 : 박아람

전문 번역가. 주로 문학을 번역하며 KBS 더빙 번역 작가로도 활동했다. 『마션』, 『이카보그』,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아이 러브 딕』, 『내 아내에 대하여』, 『맨디블 가족』,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12월 10일』 등의 소설 외에도 『슬픔의 해석』, 『작가의 시작』, 『내 옷장 속의 미니멀리즘』을 비롯하여 50권이 넘는 다양한 분야의 영미 도서를 번역했다. 2018 GKL 문학번역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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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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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세 사람이 한날 한시에 엽총으로 자살을 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데다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 충격을 더한다. 다만 세 사람이 모두 여든 살 넘은 노인이고, 세밑의 죽음이라 계획적인 죽음(자살)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있다. 이 소설은 세 노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죽음 이후 벌어지는 일과, 그들의 일상에서 가족이나 친구, 동료, 지인을 중심으로 갑작스런 죽음의 이유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다. 『냉정과 열정 사이』, 『도쿄 타워』 등 수많은 작품으로 국내 480만 독자(번역본 판매부수)들에게 사랑받아온 저자 에쿠니 가오리가 기존 전작들과 사뭇 결이 다른 장편소설을 썼다.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잔잔한 매력을 선사하는 저자는 이 작품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치밀하게 엮어 전개한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담담하고 섬세한 문체는 여전하다. 저자를 통해 세 명의 노인들과 여러 인물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특히 이번 신간은 팬데믹 시대를 반영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생생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죽음의 이유가 고독사인지 아닌지는 이 소설의 논점이 아니다. 다만 여든 살이 넘은 노인 세 사람의 동반 죽음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 사회(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의 문제를 가감없이 따라가는 것뿐이다. 쉽게 표현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저자는 엄격히 객관적 시각으로 일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노인과 죽음의 문제를 사회에 던지는 것이다.

 


 

섣달 그믐날 밤, 호텔에 모인 세 명의 노인. 그들은 함께했던 시간을 더듬으며 회상하고, 엽총으로 함께 목숨을 끊는다. 그들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는 노인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가까운 가족이어도, 친구여도, 지인이어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저자는 이들 가까운 사람과의 만남이나 일상이 이들의 죽음에 직간접 작용을 했는지 여부에 집중돼 있다.

‘나는’ 하고 속으로 말한다. 나는 돈은 있지만, 돈이 있어도 갖고 싶은 게 없어져 버렸어.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더없이 쓸쓸하고 공허한 이 말 속에 묘한 해방감이 엿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이 책의 역자 신유희는 밝히지만 독자로서는 저자 에쿠니 가오리의 심경을 읽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역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저자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읽힌다고 썼다. "현실 속에서 벌어졌다면 그저 세상 떠들썩한 참극으로 치달았을 사건임에도, 함께한 과거를 추억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담담히 맞이하는 세 노인의 모습을 빌려 우리가 겪어 온 혹은 맞이할 수많은 상실과 종언을 이야기하고 있다."((p.274)

 


 

소설의 흐름을 잠시 따라가 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을 계기로 남겨진 자들의 평범했던 일상이 뜻하지 않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혼란이 찾아들고, 살아 있는 자들의 일상이 세 노인의 죽음 위에 켜켜이 쌓인다. 연락이 끊겼던 가족들이 다시 이어지고, 낯선 사람과 메일을 주고받고, 새로운 인연이 생기기도 하는 등 각자의 등장인물들에게 낯섦의 순간들이 파고든다. 이 소설은 이렇게 본인의 죽음 앞에 선 세 노인들과 타인의 죽음 뒤에 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 번째 소개되는 사람의 이름이 치사코는 여자라는 걸 알 수 있다.

"바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있고 촉촉한 곡이 연주되고 있다.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시노다 간지는 여든여섯 살,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시게모리 츠토무가 여든 살이고,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미야시타 치사코는 여든 두 살이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두 달 만으로, 그전에도 그다지 띄엄띄엄 만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p.7)

 

 

세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일까. 책에서는 그 모든 게 모호하고 불명확하게 그려진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명확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 중 가장 큰 특징은 딱 정해진 교훈이 없다는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이 소설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이,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인지 미리 정해 두고 독자들에게 알리는 글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에는 불륜, 나이차가 큰 사랑 등 ‘평범’하지 않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주제가 많이 등장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런 주제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고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명확하지 않은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말로도 들리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사건 전개나 과정이 중요한 것은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저자을 읽기 위해서이니까.

 


 

"마당에 심은 구근 하나가 올해 처음 꽃을 피운 것을 발견했을 때라든지 슈퍼마켓에서 장을 다 보고 바깥에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을 때 혹은 우연히 탄 택시의 운전기사의 느낌이 좋지 않았을 때 갑자기 세상이 아버지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감각에 휩싸인다."

이 소설은 죽은 세 노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아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각 세 노인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쾌했던 고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고인이 살아 있다는 듯이 마음속으로 말을 걸고, 누군가는 집 안에서의 고인과 집 밖에서의 고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또한 고인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족의 이야기도 작품에서 그려진다. 에쿠니 가오리는 남겨진 사람들이 마땅히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우지 않는다. 타인의 죽음 앞에 선 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방식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룬 이번 에쿠니 가오리의 장편 소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는 과연 나의 죽음 앞에서, 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고찰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 : 에쿠니 가오리(Kaori Ekuni,えくに かおり,江國 香織)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난 에쿠니 가오리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1989년 『409 래드클리프』로 페미나상을 수상했고,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무라사키시키부 문학상(1992), 『나의 작은 새』로 로보노이시 문학상(1999),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나오키상(2004), 『잡동사니』로 시마세 연애문학상(2007), 『한낮인데 어두운 방』으로 중앙공론문예상(2010)을 받았다.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서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불리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좌안 1·2』, 『달콤한 작은 거짓말』, 『소란한 보통날』, 『부드러운 양상추』, 『수박 향기』, 『하느님의 보트』,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등 뒤의 기억』,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벌거숭이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개와 하모니카』, 『별사탕 내리는 밤』, 『집 떠난 뒤 맑음』 등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역자 : 신유희

 

동덕여대를 졸업하고 현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에쿠니 가오리의 『호텔 선인장』, 『도쿄타워』, 『마미야 형제』,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벌거숭이들』, 『별사탕 내리는 밤』, 『집 떠난 뒤 맑음』, 츠지 히토나리의 『안녕, 언젠가』, 『태양을 기다리며』, 노자와 히사시의 『연애시대 1, 2』, 가쿠다 미쓰요의 『그녀의 메뉴첩』, 『가족 방랑기』, 오기와라 히로시의 『내일의 기억』, 『벽장 속의 치요』, 가와이 간지의 『단델라이언』 외에 『금단의 팬더』, 『콜드게임』, 『이게 다 베개 때문이다』, 『암 체질을 바꾸는 기적의 식습관』,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112일간의 엄마』, 『밥 빵 면』, 『은하 식당의 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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