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 노래 불러요, 춤출게요
김기우 지음 / 창해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리듬, Rhythm』은 ‘예술가 소설’이다. 저자인 김기우가 「감사의 말」을 통해 "영상 시대에 '소리'에 관한 소설 작업을 하려는 시도가 눈치 없어 보일 수 있겠다"면서도 눈앞의 수많은 이미지로 우리는 피로하다고 말한다. 음악에 대한 소설임을 짐작케하는 말이기도 하다. "눈을 감으면 소리가 들린다. 이 소설은 소리에 관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이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조용한 시공간을 찾듯, 나도 글을 쓰려 할 때 일찍 일어났다. 새벽, 네 시부터 일곱 시까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커서가 깜빡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고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소설은 자기 소리를 밖으로 표현 못하는 사람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밝힌다. 식물인간이 된 작곡가가 자기만 알고 있는 선율을 밖으로 끄집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 데, 그 모습이 지금 우리를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작업의 동기였다고 고백한다. 저자가 그렇든 저자가 그려내는 주인공이 그렇든 작곡가는 식물인간 상태임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소설의 창작 과정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음악이 부추기는 감정은 거의 슬픔에 관련한 것이다. 즐거운 음악도 서럽게 들리는 것은 음악이 언젠가 끝남을 알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알면서부터 슬픔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라며 독백한다.

 


 

저자와 주인공이 같다면, 소설 속 화자가 저자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의 노래와 음악에 관한 성찰을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썼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슬퍼할 준비가 된 우리에게 음악은 슬픔의 즐거움도 준다. 음악을 듣는 시간 밖의 시간만큼은 멈춰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소리와 함께하며 일 년을 보내니 소설이 완성됐다. 소설은 음악처럼 순식간에 슬픔에 젖게 하지 않는다. 이성의 도구로 감성을 전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무리다. 그를 무릅쓴 채 책을 내는 부끄러움을 살펴 주기를 독자들에게 바라고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현재, 과거, 미래의 의식에서 헤매는 세 인물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조망해 독자에게 여러 겹의 독서 체험을 준다. 조실부모하여 힘든 형편 속에서도 가수의 꿈을 이루고자 열망하는 ‘나(윤주)’와, 부단한 노력으로 실력을 키워 한 시대의 국민가수의 위업을 달성한 ‘나(현우)’, 그런 스승을 수십 년 모시며 음악 세계를 키워왔지만,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성재)’가 각기의 사건을 겪어나간다. 그들은 서로 제자와 스승, 그리고 연인의 관계로 묶여 있다. 모두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서로 ‘사랑’의 그물망에 얽혀 서사가 진행된다.

소설의 시작은 슬픈 광경과 함께 비장미까지 보여준다. 첫 장(章) 「나 없는 내 몸」은 작곡가 현우의 시점이다. "쓸모없는 몸이 됐다. 몸은 있는데 나는 없게 돼 버렸다. 주치의는 내 증상을 '감금증후군'이라 불렀다.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중략) 수술 직후 두 달 동안 미라 상태였단다. 그동안 어디 있었나. 몸은 이대로 누워 있었을 텐데, 나는 어디서 무얼 했나. 나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이 내 몸뚱이에 있기나 했나. 지금 떠오르는 풍경 중 가장 선명한 것이 있다. 관광지에서 파는 그림엽서 같은 것이 방 안 여기저기 붙어 있는데, 그중 몇 장이 선연하다. 택배 상자가 열려 있는 채로 엎어져 있는 그림이다. 박스에서 삐어져나온 아기의 손이 유난히 희다. 베란다에 있는 관음죽 화분이 들어앉은 그림도 있다. 관음죽 초록 잎들 사이에 꽃이 붉게 올라왔다. 마치 홍역 앓는 아이의 얼굴처럼 작은 돌기가 붙어 있다."(p.7~8)

 


 

식물인간 상태로 작곡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해답이 장편소설 『리듬, Rhythm』의 주요 메시지다. 육체와 의식의 관계, 바깥세상과 그를 인식하는 의식이 예술창작과 감상의 상황과 다르지 않음을 독자에게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이끈다. 음악가가 최후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은 생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예술에 대한 인식을 넓혀 줄 것이다. 저자가 이 소설을 '예술가 소설'이라 굳이 이름 붙이는 이유이다.

이 소설의 작품 해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에서 주철환(전 MBC PD, 이화여대 교수)은 "김기우의 소설은 흥미로운 고통이 책장마다 휘감기고 문장마다 스며들다, 마침내 심장마저 저며든다. 리듬은 호흡이고 호흡은 생명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게 없으니 이번에 작가는 살면서 가장 소중한 걸 소설에 담고 싶었나 보다. …소설 속에서 윤리, 의리, 도리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하는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애증 관계는 에덴동산의 욕망과 절망마저 환기시킨다. 주인공이 찾으려는 ‘멜로디가 밀려날 정도의 리듬감’이란 결국 인간의 회복이자 자연의 리듬(순리)과 신의 리듬(섭리)을 되살리려는 구도자의 갈망이다"고 말했다. 주철환은 이어 "책을 읽는 내내 들려 오던 선율도 그와 같은 사연이 담긴 노래일까? 작가의 음악적인 영감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리듬, Rhythm』의 다층적인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삶 속에 그 흐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리듬, Rhythm』을 통한 삶의 리듬이 사박자 슬로우로, 삼박자 월츠로, 그리고 우리의 푸념과 넋두리, 후회와 원망을 넘어서는 흥 넘치는 세마치장단으로 제2, 제3의 리듬으로 계속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고 기대감을 덧붙였다.

 


 

두 번째 장 「인형 울음소리」는 가수인 윤주 시점이다. 자신이 하는 일, 만나는 사람, 그리고 다른 두 주인공 '현우'와 '성재'의 관계가 조명된다. "피디는 내가 신인이라고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습니다. 기준도 없어 보였어요. 그는 내게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 아리아〉처럼 부르라고 권했습니다. 대중가요가 왜 그런 창법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녹음은 내 생애 첫 기회였어요. 비록 유행 지난 유명가수들의 대표곡 옴니버스 음반이지만, 내 존재를 드러낼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중략) 임신인 줄도 몰랐습니다. 녹음 계약 뒤 몸이 불었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 산달이 가까웠는데도 나는 임신을 몰랐습니다. (중략) 아기는 인형이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갖고 놀던 베렝구어 인형이었어요.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는 인형. 나는 허겁지겁 아기를 들어 올려 화장지에 쌌어요.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둘러쓴 아이는 누에고치 같았습니다. 휴지통을 비우고 아이 고치를 비닐에 넣으려는데, 끈에 걸려 휴지통이 쓰러졌습니다. 끈이 아니라 탯줄이었어요. 아기와 내가 줄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아이가 갑자기 첫울음을 터뜨렸어요. 갑작스런 울음에 놀라 나는 아기 두루마리를 내팽개쳤습니다. 울음은 더 커졌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천장을 찢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듯싶더니 내 온몸을 쑤셔댔어요(p.20~23)

윤주와 현우는 가수와 작곡가이자 연인 관계였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리고 아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이기도 하다. 다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대한 윤주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고, 현우는 지나치리만큼 아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인다. 세 번째 장 「토막 난 멜로디」에서는 성재의 시점으로 기술된다. 현우와 성재도 사제지간이다. 성재는 윤주와 학교 친구로서, 나중엔 연인으로 발전한 인물로 삼각 관계에 대해 선뜻 나서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나는 서울예고 뒷길을 힘껏 뛰어간다. 빌라 단지 안으로 푹 들어간 쉼터다. 주민을 위한 공원이지만 주민보다 공익근무요원이나 의무경찰이 주로 쉬는 곳이다. 나도 스승 집에서 나오면 여기 벤치에 늘 앉았다 내려간다. 내 상황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그러다가 컴컴해진 내 주변을 털어내고 세검정 불빛 속으로 빠져들기 전의, 그런 자리다.

야경에서 시선을 돌려 뒤를 보니 어느새 어둠이 짙다. 나는 그네에 올라앉아 어둠을 밀어내본다. 발끝에 걸리는 몇 가닥 멜로디, 스승이 티슈에 적은 멜로디가 그네의 흔들림에 맞춰 연주된다. 에릭사티의 〈짐노페디〉를 해금으로 연주하면 이런 소리가 되지 않을까. 혹은 아쟁으로 반주 깔고 비나리를 부르는 민요 가수의 흥얼거림 같기도 하다. 또는 호곡성으로도 들려온다.

나는 발끝에서 밀리고 끌리는 선율을 기록하려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낸다. 아까 받았던 수표 봉투에 스승의 주제를 좀 더 진행해본다.

호곡성이 짓누르는지, 어둠 속을 헤매기만 할 뿐, 나는 이후를 한마디도 적지 못한다. 소리는 온몸에 달라붙는데 기록하지 못하겠다. 선율이 너무 많이 생겨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토막 난 멜로디들은 내게 달라붙었다가 금세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소리는 희미해지고 누에고치처럼 휠체어에 누워 있는 스승의 모습만 아른거린다. 윤주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녀의 코맹맹이 음성이 아련히 들려온다. 호곡성에 뒤섞인 윤주의 목소리가 선명하다."(p.39~40)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세 인물이 일인칭 ‘나’ 시점으로 교차하며 자신의 서사를 끌어간다. ① 윤주 : 고아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류가수가 되고자 안간힘을 쏟는 ‘나’. ② 현우 : 천부의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대중음악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 된 ‘나’. ③ 성재 : 현우를 스승으로 모시고 음악을 배워 실력이 있지만 무명의 세월을 보내는 ‘나’다. 셋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동료, 연인 등으로 얽힌다.

현우는 윤주를 만나면서 자신의 음악생활에서 최고라 여겨지는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곡은 두 마디 선율만 채보된 채였고,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는 ‘감금증후군’ 상태가 됐다. 현우는 의식을 간신히 되찾았지만 눈만 깜박일 수 있다. 현우는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곡을 자신의 수제자인 성재가 완성해 주기를 희망한다. 윤주와 성재가 서로 교류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녀가 자신의 작곡을 그에게 들려주었으리라 추측했다. 성재는 스승으로부터 곡의 완성을 의뢰받고 두 마디 이후의 선율을 완성시키려 노력한다. 그는 오랜 시간 스승의 곁에서 궂은 일을 마다않고 도우며 음악 공부를 해왔다. 스승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아 세상에 나가고 싶었지만 희망일 뿐, 무명으로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윤주는 현우와 성재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다. 현우로부터는 아버지와 같은 정을, 성재에게는 난생처음 이성의 끌림이었다. 그들로부터 음악의 성장과 일류가수의 꿈을 이루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일류가수의 꿈과 노래에의 열정에 비하면 임신거부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방황하는 윤주, 예술을 향해 온 힘을? 다하는 그녀에게 사랑은 종교였다. 현우와 성재도 그런 마음이었다. 최고의 음과 향기를 찾아 창작 혼을 불태우는 그들에게 성(性, sex)은 성(聖, st.)이었다. 현우의 곡은 눈 깜박임만으로 완성되고 윤주와 성재의 꿈은 이뤄질까.

 


 

윤주가 무대에서 뛰어내려 물웅덩이 쪽으로 달려간다. 그녀는 인형을 집어들고 자기 웃옷을 벗어 인형에 들씌운 채 물에 엎어진다. 물이 깊다. 어느새 성재가 달려와 윤주를 쫓아 물웅덩이에 풍덩 빠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우도 벌떡 일어나 차에서 내려 겅중겅중 걸어간다. 현우는 물웅덩이 앞에 서더니 풀쩍, 다이빙한다. 세 사람 모두 윗옷을 벗어 인형에 덮어씌운다. (중략)

우리는 알몸으로 인형 주위를 맴돌며 헤엄친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압만 묵직하게 느껴올 뿐 주위는 고요하다. 우리는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질 듯, 아프다. 멀리서 작은 진동이 시작되면서 하나의 음정으로 피어오르려 한다. 물속의 숨 막힘 안에서 생겨난 하나의 음은 우리의 주위를 감싸고돈다. 어느새 숨 막힘은 한 호흡에 사라지고 조여들던 가슴도 풀어진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하나의 음정을 따라 물속을 흐른다. 여유롭고 평화롭다.(p.241~242)

 

저자 : 김기우

 

서울에서 태어났어도 마음은 본적지 충북 음성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작가는, 한국어로 말하고 글을 쓰고 있어 행복한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누님과 형님들이 보던 소설책을 읽어가면서 한글 감성과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동북고등학교 때 관악부 활동을 하던 경험으로 음악과 노래가 늘 곁에 있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로 등단했다. 서사 이론 공부에도 관심이 깊어 수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에서 석사를, 한림대학교에서 <최인훈 소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을 쓴 지 서른 해가 넘었다. 이번이 소설로는 다섯 번째 작품집이어서 웬만큼 우리 말 좀 안다고 자평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우리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고 여러 나라에서 한글에 사랑을 보내는 이때, 한국의 작가로 우리 문화를 더 깊이 탐구하고 우리 말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지는 요즘이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장편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 중단편 《봄으로 가는 취주》, 《달의 무늬》, 《가족에겐 가족이 없다》 등의 창작소설집이 있다. 창작이론서 《아이덴티티 이론의 구조》, 장편동화집 《봉황에 숨겨진 발해의 비밀》, 글짓기 지도서 《글쓰기 왕》 등도 펴냈다. 현재 한림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제3지구
윤재호 지음 / 페퍼민트오리지널 / 2022년 11월
평점 :
절판


이 SF소설은 지구가 아닌, 또다른 태양계 행성에서 인간이 정착한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간의 욕망마저도 그대로 가져가 보여준다. 또 이곳에서의 최고 권력을 향한 치열한 싸움을 통해 노예제라는 차별적 제도도 그대로 가져가 답습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제3지구
윤재호 지음 / 페퍼민트오리지널 / 2022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지구종말론'의 징후라는 말이 조금씩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물론 호사가들의 말 잔치쯤으로 여겨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과학자들의 지구 온난화에 의한 빙하가 녹아 바닷물 상승으로 계속 이어질 경우 지구 생명체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는 데 중점을 두고 본다면 지구종말론이 말 만드는 사람들의 지나친 예상인 듯 싶다가도 다시 한 번 귀를 쫑긋하게 된다. 특히 지구상에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전쟁도 지구 종말론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다. 인종 차별도 종말론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즉 외계에 의해 지구가 종말을 맞는 게 아니라 지구 내부 요인, 그중에서 이익 앞에 눈먼 인간이 저지른 수많은 행위가 중요 요인일 수 있다는 말은 힘이 좀 실리기도 한다. 세계의 패권국가 미구과 중국의 힘 싸움, 핵무기의 증가 등 지구촌은 단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다. 미국의 우주탐사 계획도 이런 의미에서 재추진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지구 종말에 따른 장기 계획일 수 있다는 말에도 귀가 솔깃해진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하루로 묶인 지구촌이 소통에 어려움이 있어 인간의 마음이 점점 안으로만 움츠려들 때라서인지 상상이나 공상 과학 소설의 장르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SF소설은 지금 문학 출판계의 대세인 듯하다. 발행량을 보아도 셀 필요도 없이 서점 가판대에만 가도 금세 파악이 가능하다. 국내고 외국 번역본이든 가리지 않고 SF소설이 압도적이다. 아날로그 감성에 젖을 수 있는 소설은 이제 도서관 고문서관에서나 찾을 때인 듯하다. 독자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긴 했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1년 처음 소설로 출간한 〈파운데이션 Foudation〉 시리즈는 지난해 미국 애플TV플러스의 미드로 다시 태어났다. 은하제국을 통치하는 인류들의 이야기를 엄청난 세계관으로 구성한 스토리로, 애플이 넷플릭스를 이기기 위해 2,000억원을 베팅했다는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드라마다. 방대한 우주시대의 3만년 인류 역사를 담은 티모시 살라메 주연의 SF 영화 [듄 Dune] 역시 프랭크 허버트 작가가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일생에 거쳐 집필한 총 6부작 소설이 원작이다. 머나먼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 액션 판타지 장르인 스페이스 오페라는 한국의 경우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겨우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의 히트 이후 급작스럽게 SF 소설이 우후죽순처럼 출판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영화로 제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독자가 느닷없이 SF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 『제 3지구』와 연관이 있어서다. 저자 영화감독이고 이 소설은 그의 첫 소설 작품이다. 영화감독 윤재호의 첫 소설 『제3지구』는 앞서 언급한 현실에 도전장을 내민다. 트랜스미디어 콘텐츠 시대를 맞아 글로벌 슈퍼 IP의 비전으로 집필한 한국산 스페이스 오페라 SF소설이 출간된다. 실제로 소설 『제3지구』는 예상치 못한 소재와 배경, 스타일과 전개가 돋보인다. 이 책에 대해 영화배우 장동윤은 "소재 자체가 독특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었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영화화 된다면 꼭 출연하고 싶습니다"라고 추천평을 썼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1%의 엘리트들을 위해 나머지 99%의 노동적 희생이 일어나고 있다”고 경고한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은 제3지구의 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다. 자본의 굴레에 갇혀,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죽을 때까지 반강제적으로 요구되는 서민들의 희생은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바탕으로 ‘제3지구’라는 SF 판타지 시리즈는 기획되었다. 시리즈의 이야기는 좀 더 광대하게 펼쳐지는 판타지 대서사극이다.

『제3지구』는 오염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던 최후의 인류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중심은 새로운 행성에 정착한 인류의 200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엔 1%의 엘리트층의 음모론과 신분제로 인한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빈부격차와 독재 정치를 다루고 있으며, 음모론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인간을 가장한 외계 생명체들이다. 외계생명체는 최후의 인류가 발견한 행성에 인간보다 먼저 정착한 외계 왕국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의 리더는 극비리에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했다. 그후 그가 고안한 독재 정치와 신분 제도와 미래 우주에서의 지구인과 외계인의 공존의 삶이 『제3지구』 세계관의 바탕이다.

 

 

요즘 서점가를 비롯하여 OTT, 극장 할 것 없이 SF가 대세다. 아이작 아시모프부터 김초엽까지 많은 SF 소설들이 앞다투어 영상화되고 있으며, 대중들은 이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독자의 SF에 대한 독서와 경험이 짧기 때문에 SF 소설에 대한 평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았다고 SF의 세계를 모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면 앞으로 읽어도 얼마든지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 어쩌면 세상 문화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SF 비애호가인 독자가 놀랄 만큼 대세로 자리잡았다. 사실 SF는 초기에 일부 독자들에게만 인기 있는 대중문화의 작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상력을 무한대로 넓혀가며 현재를 통찰하게 하는 장르로 성장했다.

높은 오락성으로 마니아층을 모은 SF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왜 쓰고, 왜 읽는가”에 대해서 독자와 작가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며 성장해왔다. 시대에 맞춰 확장하고 변화하는 SF를 보며, 소수를 위한 장르가 어떻게 시대정신이 되었는지까지 알 수 있다. 이는 어떻게 우리가 시대적 요구에 유연하게 답하며 성장할 수 있는지를 배울 실마리를 제공한다. SF적 사고력이 미래사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사회가 현재의 경제·인종·성·이념·환경 등의 문제를 악화시킬 거라는 우려가 현실로 입증되는 지금, 이런 문제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지식체계가 아닌 그 너머의 생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SF는 시대정신이라 할 만하다.

 


 

이동신 서울대 교수(영문과)는 『SF, 시대정신이 되다』란 책에서 "과학이 설명하는 어떤 세계 너머의 과학이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과학 밖 실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칙상으로 이 실험적 과학이 불가능하고 실제로 알려지지도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소설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면서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많은 현상이,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복잡하거나 아니면 너무 거대한 일이라서 과학이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철학이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문학도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하고 그런 면에서는 SF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SF가 대세인 시대 SF문학은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 『제3지구』에서 지구가 더 이상 인간 등 생물이 살기 어려워진 환경이 되자 지구를 버리고 인간이 살 만한 곳을 찾다 두 개의 위성(달)을 가진 화성 크기지만 화성이 아닌 태양계 행성을 발견한다. 이 책은 이들이 정착 후 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발견 당시 정착하기 위해 탐사한 후 결론에 이른다. "사막 아래에는 지하수가 풍부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산소 부족 현상이 나타나는 밤만 잘 버티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으로 충분했다. 이들은 극도로 습한 위험 구역인 우림지대가 아닌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정착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막에서 나오는,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노메탈과 나노크리스탈 자원 덕에 첨단 기계 문명이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미지의 자원 덕분에 인류는 불리한 기후와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곳을 〈제3지구〉라 불렀다."(p.4~5)

 


 

미래 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액션 판타지가 이 책에서 펼쳐지는 장면이다.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적인 요소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표지나 각 장마다 등장하는 괴물(?)의 실체는 외모만 우리 인간과 다른 모습이지만 인간이 가진 각종 감정과 사고 능력 등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괴물에 대한 인식도 앞으로는 바뀌지 않을까 추측도 해본다. 오히려 인간은 내가 잘살기 위해 남을 짓밟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했고, 지구로부터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이 행성으로 옮겨 와서도 본성과 본능의 유전자는 그대로 유지되는 듯하다. 이런 인간의 성질은 양심의 지배를 받을 경우 선한 인간이 되지만 양심이 작동되지 않을 경우 우주 괴물과 다를 바 없다.

이 새로운 행성에서도 권력다툼, 자기이익 추구, 전쟁, 살생 등은 줄줄이 이어지고, 노예와 왕이 있는 지구의 오래 전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 마치 인간은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벌을 받는 행위를 계속하는 유전적 한계가 있는 것처럼... 갑자기 미국의 독립 이후 서부 개척이 백인 우월주의와 맞물리며 원주민,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생명을 경시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우리가 살기 위해 우리는 희생을 치렀다"고 말하는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냉혈한 페르다인도 사랑 앞에서는 괴물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부분도 있어 이 행성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독자가 읽기에는 괴물은 외모가 인간 기준으로 흉칙하게 생겨서 괴물이 아니라 권력자가 오래 권력을 누리기 위해 변화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실 우리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폭군, 독재자가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리가 상상해낸 괴물에 비하면 장난감 인형에 불과할 정도로 악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이 괴물이었다는 점을 이 소설을 읽으며 깨우칠 수 있었다. 권력욕, 탐욕 등은 유토피아도 지옥으로 바꿀 정도로 크고 엄청난 위력으로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히콘은 산성으로 된 침액을 내뱉는 머리가 두 개나 있는 데다 독침을 쏘는 꼬리가 있어 아구라보다 더 위험한 짐승으로 불린다. 항상 여럿이 모여 다니기 때문에 히콘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의 몸통에 독수리의 날개를 붙여 놓은 듯한 히콘은 사람보다 두 배는 컸다. 탕! 탕! 타다다다! 군인들은 날아오는 히콘을 향해 총알을 갈겼다. 렌쳉의 총알은 히콘 한 마리를 땅으로 추락시켰다. 머리 하나가 터졌지만 남은 다른 하나가 강하게 저항했다. “아악!!” 헤나는 히콘의 침액을 맞은 동료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p.303)

 

저자 : 윤재호

 

“소설로 방향을 바꾸면서 나의 상상력은 절대적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부산 출신의 윤재호 감독은 프랑스 낭시 보자르, 파리 아르데꼬, 르 프레느와에서 미술·사진·영화를 공부했다. 2011년 단편 다큐멘터리 <약속>이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장편 극영화를 집필했다. 2013년 단편 <돼지>가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2016년에는 다큐멘터리 <마담B>와 단편 <히치하이커> 두 편의 영화가 칸국제영화제에 선정됐다. 첫 장편영화 <뷰티풀 데이즈>는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두 번째 장편 <파이터>는 202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송해 선생의 유작 다큐멘터리 <송해1927> 또한 그의 연출작이다. 현재 많은 실사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함께 준비 중인 시네아스트 윤재호 감독에게 소설가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또 다른 꿈이었다. 그가 10년 전부터 구상한 첫 장편소설 <제3지구>를 통해 ‘글로벌 크리에이터’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자주 읽는 독자이든 잘 읽지 않는 독자이든 시인이 세상(꿀벌 없는 정원)에서 끌어낸 세 개의 모놀로그, 혹은 한 개의 트라이얼로그에 담겨 있는 삶과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내기에 충분히 잘 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는 어렵다"라는 독자의 개인적 생각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시집 『야생 붓꽃』을 읽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시인의 노벨상 수상 이력 때문이다. 어려워서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보다 노벨문학상이란 상의 권위가 주는 매력에 더 끌렸기 때문이라고 독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평소에 시집을 잘 읽지 않는 것을 '시는 어렵다'는 인식에 편승해 변명하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무게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무감을 줄 정도로 압박감이 있다. 책 좋아한다는 사람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시집은 노벨상 수상 작가(2020)이자 여류 시인의 초기 시집(1992)이다. 시인이나 작가에게 '여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여성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독자가 임의로 붙였음을 양해해 주시길 빈다. 이 시집의 루이즈 글린은 1996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시인) 이후 두 번째 여류 시인이자 21세기 첫 여성 시인이다.

1992년 출판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야생 붓꽃』은 시인에게 퓰리처상과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시 협회상을 안겨준 대표작이다. 미국시사에서 식물에게 이렇게나 다양하고 생생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부여한 시인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고 한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86)이 자연에 대한 시, 특히 꽃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를 많이 썼지만, 글릭처럼 이토록 온전히 꽃의 목소리를 직접 구사하지는 않았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동시대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도 자연을 가까이 하며 다른 존재들에 대한 시를 많이 썼지만 인간의 시선으로 대상을 면밀히 보는 시들이 많았다. 글릭에게 이르러 꽃은 비로소 꽃 자체가 된다.

 


 

이 시집은 식물의 목소리를 구사한 글릭의 시적 실험이 돋보인다. 식물을 관찰하다가 자신의 경험으로 넘어가는 화법은 의인화가 가진 울림을 더 크게 보여준다고 예스24 MD 이나영의 평이다. 글릭과 오랫동안 소통한 정은귀 번역가와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이 별도의 책으로 함께 실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자는 시를 직접 읽기보다 해설과 번역가의 말을 주의 깊게 살폈다. 시를 읽는 옳은 방법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먼저 읽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작품 해설' 「세 개의 모놀로그 혹은 한 개의 트라이얼로그」에서 "2020년 노벨문학상을 루이즈 글릭에게 수여하면서 한림원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의 열 번째 시집 『아베르노』(2006)였지만, 그것이 『야생 붓꽃』(1992)이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야생 붓꽃』은 『아베르노』와 함께 손꼽히는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글릭만의 '시적 목소리((poetic voice)'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특히 이 시집은 '목소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하나의 답이 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야생 붓꽃』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다. 식물의, 인간의, 그리고 신의 목소리. 대체로 식물은 인간을 향해 말하고, 인간은 신을 향해 말하며, 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이 세 종류의 화자-발화로 쓰인 시가 시집을 삼등분한다. 이 글의 목표는 일차적이고 기초적이다. 세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하고, 각각의 목소리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축어적으로 따라가 보는 일이 그것이다."고 전제한다.

 


 

끔찍해, 어두운 대지에 파묻힌

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러고는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 영혼으로

있으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대지가

살짝 휘어졌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내자 새라고 생각한 것들이 빠르게 날고.

 

다른 세상에서 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너,

네게 말하네, 나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 「야생 붓꽃」 부분

 


 

당신이 나를 그렇게나 끔찍이 싫어한다면

내게 애써 이름 붙여 주시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언어에

비방하는 말이 하나 더

필요한가요.

한 부류에 모든 책임을

들리는 또 다른 방식ㅡ

 

당신이나 나나 알잖아요.

하나의 신을 섬기려면

하나의 적만 있으면

된다는 걸ㅡ

 

내가 그 적은 아닙니다.

이 화단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일 뿐,

- 「개기장풀」 일부

 


 

화자-식물은 정원을 가꾸는 인간에게 힐난한다. 당신은 소중한 꽃들이 죽어 가니 무언가 탓할 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그래서 '잡초'인 '나'를 원인으로 지목해 '마녀의 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왜 인간들은 이런 식이냐고, 왜 슬프다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느냐고("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개기장풀은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것은 당신이 사실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이와 같은 낙인과 혐오는 인간이 자주 범하곤 하는 실패의 '작은 모범 사례'일 뿐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잡초는 말한다.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오기 전부터 우리는 있었고 당신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는 여기 있을 것이다. 당신의 혐오가 철회되거나 그것이 찬사로 바뀌거나 하는 변화에 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곳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줄은 그 당당한 선언이다.

신형철은 또 「꽃양귀비」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시에서 식물과 인간의 차이는 '느낌(feelig)'과 '생각(mind)'의 차이로 설명된다. 꽃양귀비는 느낌의 존재다. 실제 그 꽃의 형상이 그러하듯, 가슴을 활짝 열고 있는 그 강렬한 모습은 이 존재의 핵심에 불이, 내재화되고 일체화된 신성이 품어져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인간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반문이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인간의 삶은 일상적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신성을 더는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의미에서 허무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떠올리게도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꽃양귀비는 인간에게 묻는다. 한 번은 그렇게 자신을 활짝 열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고, 왜 다시는 열지 않으려 했느냐고 말이다.

 


 

역시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잣말 하듯이 쓰인 이 시에서 나(인간), 꽃, 신의 목소리를 내는 화자는 시인 한 사람이다. 세 물체의 소통을 인간이 중간에서 한다. 그가 화자이고 그는 시인이다. 물론 꽃은 꽃으로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신은 신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말하고 항변하고 변명하고 자기의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렇게 알고 시를 읽어나가다가도 일부는 이해가 안 된다. 그것은 이 시의 목소리들이 각 객체이지만 대답하고 질문하고를 반복하는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처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 시가 독자들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라고 시의 번역자 정은귀는 말한다.

그는 '옮긴이의 말' 「꿀벌이 없는 시인의 정원에서」 차근차근 답변해준다. "미국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 특별한 취미가 아니고 일상인 나라다. 미국의 일상에서 이 시집에 등장하는 꽃과 풀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 사회에서 우리 주변에 늘 만나는 사람들이 이 시의 대상이라는 주장처럼 들린다. 정은귀는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집 전체가 54편의 비교적 짧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간명한 단어들이라 굳이 사전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방 뜻이 들어오지 않고 아리송할 때가 많다. "내 말 좀 들어봐" 해 놓고선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겠다는 듯, 시는 여러 겹의 목소리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이 시집을 독자들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꽃을 들여다볼 때처럼 세심하게 보면 그걸로 충분한 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 시집은 사람이건 꽃이건, 풀이건, 저녁나절 햇살이건, 여름 오후 바람이건, 대상을 세심하게 보지 않고 멀리서 예쁘다, 별로다, 심드렁하게 쉽게 결론을 내리는 우리의 습관을 다시 보라고, 단호하게 허리를 곧추세우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저자 : 루이즈 글릭(Louise Gluck)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943년에 태어났다. 1968년 시집 《맏이》로 등단했고, 1993년 시집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2003년부터 다음 해까지 미국 계관 시인이었다. 그동안 시집 열네 권을 발표했고 에세이와 시론을 담은 책 두 권을 지었다. 2020년 노벨문학상, 2015년 국가인문학메달, 1993년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 2014년 《신실하고 고결한 밤》으로 전미도서상, 1985년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전미비평가상 등을 받았다. 2001년 볼링겐상, 2012년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그리고 2008년 미국 시인 아카데미의 월리스 스티븐스상을 받기도 했다. 예일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역자 :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이자, 우리 시를 영어로 알리는 일과 영미 시를 우리말로 옮겨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의 실천을 궁구하는 공부 길을 걷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 《딸기 따러 가자》와 《바람이 부는 시간: 시와 함께》이 있다. 앤 섹스턴의 《밤엔 더 용감하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패터슨》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Ah, Mouthless Things)》, 강은교의 《바리연가집(Bari’s Love Song)》, 한국 현대 시인 44명을 모은 《The Colors of Dawn: Twentieth-Century Korean Poetry》를 영어로 번역했다.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나누기 위해 매일 쓰고 매일 걷고 또 매일 번역한다. 때로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과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으며 공부 길을 걷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대학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주고받는 나눔을 위해 매일 쓰고 매일 걷는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과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믿음의 실천을 궁구하는 공부 길을 걷는 중이다. 번역에도 관심이 많아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영역시집 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2016) 그리고 Ah, Mouthless Things (2017)를 출간하였고 한국 현대시인 44명을 모은 The Colors of Dawn: Twentieth-Century Korean Poetry (2016)를 번역, 편집하였고 영미시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도 기쁘게 하는 중. 시를 통해 우리 삶과 세계를 읽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