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게 빛나는 안전가옥 쇼-트 15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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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비현실과 치밀한 현실, 그 낙차만큼의 공포가 닥쳐온다. 우리 시대 청년 세대의 슬픔과 두려움을 예리하게 포착한 신예작가의 첫 호러단편집이 멋진 편집과 함께 독자들의 독서욕을 강하게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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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빛나는 안전가옥 쇼-트 15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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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푸르게 빛나는』은 소설을 담은 책이지만 시집보다 예쁘고 아름답다. 예전 '문고판'처럼 작은 크기다. 손 안에 몇 권이라도 한꺼번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다. 소설을 담는 그릇이 달항아리처럼 아름답다면 '시집은 어떻게 내야 할까'란 숙제를 내줄 정도로 크기나 편집, 표지그림 등이 모두 "예쁘다"는 표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단편소설 3편이 다소곳이 독자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연애 나 로맨스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분류상 '호러' 소설이다. 이 책은 신예작가이지만 호러물에 특화된 작가로 봐도 무방하다. 저자 김혜영은 "괴물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밝힌다. 전작들 역시 호러물이라고 한다. 독자가 독서가 짧아 못 본 새 이미 '호러작가'로 출판계에선 소문이 나 있는 모양이다. 출판사 〈안전가옥〉 스토리 PD 윤성훈은 「프로듀서의 말」에서 기획부터 원고청탁에 관한 이야기 등을 짧게나마 책 뒷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2021년 봄, 안전가옥은 '호러'를 키워드로 스토리 공모전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공모전에 선정된 이야기들을 엮어 『호러』라는 작품집을 선보였지요. 다채로운 공포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집 첫머리에는 김혜영 작가님의 「습습 하」가 실려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때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몰래 엿본 옆집'이라는 소재, 낯익은 낯선 곳으로 만들어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바로 앞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생한 묘사 등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작년 가을, 『호러』가 만들어지는 동안 작가님께 더 으스스하고 더 전율이 흐르는 이야기, 무서움을 넘어 매혹을 선사하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요청했고, 작가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해 주셨습니다."(p.189)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작가님께서 보여 주신 상상력은 단순히 '호러(horror)'라고 분류되기보닩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라고 불릴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코지믹 호러는 흔히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존재로 인한 공포, 인간이 지닌 어떠한 가치도 아무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절망적인 공포 정도로 정리되곤 합니다."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란 용어를 독자는 처음 들었지만 프로듀서는 더 친절한 말을 들려준다. 이에 따르면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란 장르를 본격적으로 분류하고 정의했으며 연구한, 19세기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는 기묘한 미지의 존재들과의 조우, 그로 인한 파멸을 통해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일상적인 세계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위로 가득 찬 세계인지 직접 창작해 보여 주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우주적인 공포’를 이야기한다. 이 장르에 등장하는 공포의 대상은 상식 밖의 무언가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나타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미지의 존재가 너무나 압도적이기에 대항은커녕 사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아득한 장르는 뜻밖에도 평범한 감정을 정확히 파고든다. 삶 전체에 낮은 배경음처럼 깔려 있는,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불안을 짚어 내는 것이다.

기이한 미지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이것에 다가가게 하는 요소는 '매혹'이라는 점도 알려 주었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보고 싶다'란 자신의 단순한 요구를 뛰어넘는 결과물인 『푸르게 빛나는』으로 김혜영 작가의 작품에서 공포와 매혹의 뒤섞임, 두려움과 아름다움의 공존,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무엇과의 만남을 잘 보여주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열린 문」, 「우물」, 「푸르게 빛나는」이란 세 개의 작품과 연결되어 독자들을 더욱 거대한 파경과 붕괴, 더욱 깊은 매혹과 현혹의 세계로 안내할 다음 작품들을 바로 이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작품집 『푸르게 빛나는』은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시작되어 지구 밖의 존재를 암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가족, 친구와 멀어질지 모른다는 평범한 불안은 어느새 무자비한 상대에 의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공포로 바뀐다. 폭이 큰 감정 변화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노라면 우리가 청년 세대의 슬픔과 두려움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또 한 명의 근사한 신예 작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외로운 아이들의 밤에 찾아온 불청객을 그린 「열린 문」, 땀과 체취 때문에 외롭게 살아 온 여성이 정체 모를 이로부터 기묘한 물을 받으면서 겪게 된 인생 역전을 담은 「우물」, 신축 아파트에 생겨난 신종 벌레의 정체를 파헤칠수록 파국에 가까워지는 부부를 다룬 「푸르게 빛나는」 등의 세 작품이 실려 있다. 각 작품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완결성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로서의 연결성을 함께 지닌다. 앞서 언급한 대로 기묘하게 낯설어 매혹적이기까지 한 작품 속 세계는 쇼-트 시리즈의 다음 작품집 『그분이 오신다』에서 더욱 확장된다고 한다.

이 책은 호러물이고 '불안'과 '공포'는 키워드이다. 불안과 공포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감정이다. 다만 똑같은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공포로 느끼지 않는 것은 정상이다는 의학계는 불안과 공포는 고층건물에 설치된 화재경보기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발간한 『정신이 건강해야 삶이 행복합니다』에 따르면 화재경보기는 화재를 감지할 경우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와 불빛으로 건물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협을 알리고 반응하도록 한다.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화재경보기의 센서를 지나치게 예민하게 설정할 경우, 우리는 별일이 아닌데도 매번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 대피해야 하는 등 건물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게 된다.

 


 

불안과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이 감정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너무 과하면 항상 불안에 휩싸이고 공포감에 시달려 행복한 일상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스트레스로 작용되어 자칫 정서적, 육체적인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경우도 있다. 불안과 공포는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센서의 민감도는 적당하게 조절해야 한다. 불안이나 공포가 밀려올 때는 이성적으로 본인을 설득을 시켜보자. 불안은 이성에 영향을 주는 감정이므로 이성적인 상황분석이 도움이 된다. 본인이 어려울 경우 나를 대신해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친구나 동료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불안감이나 공포감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에는 전문 치료 기관을 찾아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의학자들은 불안과 공포를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하는 수많은 약물과 치료방법을 연구해 왔다.

독자가 신경정신학회에서 발간한 책까지 동원한 것은 다음처럼 출판사와 이 책에 대해 불안과 공포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은 '불안의 이유'와 해결책을 책 소개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불안의 이유는 첫째 가까이하고픈 대상과 멀어질 때이다. 우리는 언제 불안을 느낄까? 『푸르게 빛나는』 속 주인공들은 모두 가까이하고픈 대상과 본의 아니게 멀어진다. 「열린 문」의 주인공 남매는 초등학생임에도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아빠는 집을 나가 버렸고 바쁘게 일하는 엄마는 늘 피곤해한다. 심각한 액취증 환자인 「열린 문」의 주영은 만성 축농증 환자인 친구의 코 수술을 말린다. 후각을 되찾은 친구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다. 「푸르게 빛나는」에 등장하는 신혼부부 여진과 규환은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따돌릴까 봐, 경기도에서 서울로 영영 이사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한다. 걱정이 깊어지는 동안 두 사람 간 감정의 골도 점차 깊어진다.

 

 

그렇게 10대, 20대, 30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가 알게 된다. 가족과 친구에게 사랑받는 것이 썩 당연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호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언제나 보답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지금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라 해서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계속 불안에 떨며 발버둥쳐야 한다. 어째서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지 의문을 품어 볼 수는 있다 해도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라는 대전제에 대항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번째 멀리하고픈 대상이 다가올 때이다. 사람들은 멀리하고픈 대상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때도 불안해한다. 『푸르게 빛나는』 수록작 주인공들의 일상은 코즈믹 호러의 장르 특성에 충실한 미지의 존재들을 만나면서부터 무너진다. 지구상의 생명체와는 다른 외양을 지닌 존재는 호기심에 이어 일종의 매혹마저 일으키지만, 인간을 무심하게 해치는 모습이 드러남과 동시에 바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고 일단 마주쳤다면 피할 수 없다.

살아남아도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공유하고 위험을 알리려던 인물들은 난관에 봉착한다.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이야기인 탓에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푸르게 빛나는」의 여진은 자신의 경험담을 듣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고 대꾸하는 남편 규환을 향해 절규한다. “내가 있다는데! 내가 봤다는데! 내가 경험했다는데, 내가 무섭다는데!” 여진은 공포에 이어 고독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작중의 상황이 조금 더 극적일 뿐 비슷한 일은 일상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나를 온전히 수용해 달라는 부탁의 끝에는 절망이 있다. 이 절망은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불안을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코즈믹 호러는 명쾌한 해결을 말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가장 현실에서 먼 장르 중 하나로 보이는 코즈믹 호러는 이러한 접근법으로 현실을 ‘쿨하게’ 반영한다. 이를테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아찔한 번지점프대인 셈이다. 불안을 맛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호러 독자들은 기꺼이 이 번지점프대에 서서 뛰어내릴 준비를 할 터다.

『푸르게 빛나는』이 그저 허황된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정교한 재현이다.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많지 않다. 연령대와 사회적 위치가 각각 다른 인물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어조와 상황을 채택해 몰입도를 높이는 솜씨를 보면 다음번에는 작가가 어떤 세계를 펼칠지 절로 궁금해진다. 뒤이어 출간될 단편집 『그분이 오신다』가 이 작품집과 세계관을 공유하니, 머잖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문」

 

초등학생 세나의 집은 건물 바깥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5층에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심심해하던 세나의 오빠는 도둑 잡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야구방망이를 들고 현관문을 연다. 열린 문 사이로 도둑이 들어오면 때려잡겠다는 것이었다. 두 아이는 잠들기 전 가볍게 시간을 때울 만한 일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의문 중 단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물」

 

주영은 외롭게 살아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체취가 너무 심한 체질을 타고난 탓이다. 친구라고는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하고 수시로 재채기를 하는 만성 축농증 환자 한 명뿐이다. 친구가 수술을 받은 뒤 둘 사이는 멀어지고, 주영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주영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검은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속는 셈 치고 그 물을 마셨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물을 구하는 데 왜 우비와 장화와 삽이 필요한지를.

 

「푸르게 빛나는」

 

여진과 규환은 신혼부부다.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이제 막 이사했다. 임신 중인 여진은 밤중에 깨어났다가 주먹만 한 푸른 구체를 보고 태몽을 꾸었다고 규환에게 알린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여진은 집 안 곳곳에서 새파란 점 같은 벌레들을 발견한다. 반면 규환의 눈에는 여진이 말하는 벌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규환이 보기엔 여진의 불안이 지나치고 여진이 보기엔 규환이 너무나 무심하다. 둘 사이가 조용히 멀어지는 사이 아파트 주민들은 세입자가 배제된 단톡방에서 아파트 내 각종 사건 사고를 비밀스레 공유한다.

 

저자 : 김혜영

 

괴물을 사랑한다.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체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영상과 글을 넘나들며 작업을 하고 있다. 단편영화 〈BJ PINK〉 와 〈소년의 자리〉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단편 수상 작품집 2021》에 수록된 단편 〈토막〉과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단편 〈습습 하〉를 집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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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함께 걸었다 - 나다운 삶을 위한 가장 지적이고 대담한 여정
마사 벡 지음, 박여진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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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걸었다』는 「나다운 삶을 위한 가장 지적이고 대담한 여정」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세계 지성들이 극찬하는 불멸의 고전 단테(1265~1321)가 쓴 장편 서사시 〈신곡〉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나로 온전한 삶을 되찾아가는 방법을 다룬 책이다. 〈신곡〉은 단테가 33살 되던 해(1298)의 성 금요일 전날 밤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번민의 하룻밤을 보낸 뒤,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3마리의 야수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고 길을 인도한다. 〈신곡〉에서 길을 안내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와 단테는 많은 점을 공유한다. 기원전 70년에 태어난 베르길리우스는 극심한 분열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는 전쟁을 경험했고, 이러한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정 시대를 연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기대를 건다.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을 통해 보편적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단테가 평화를 위해서는 신(神)이 세운 신성 로마제국에 모든 나라가 종속되어야 한다고 본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순히 시적 영감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국’을 통한 평화에 대한 전망도 공유한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하고는 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앞길을 맡긴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지고천(至高天)에까지 이르고, 그 곳에서 한순간 신의 모습을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이 전체의 줄거리이다. 먼저 〈신곡〉은 제 1막 「어두운 과거의 숲」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상실감과 고단함, 근심과 불확실성이 자욱한 곳이다. 단테가 말한 어두운 과오의 숲은 대부분 사람이 겪는 삶의 부조화를 상징한다.

 


 

우리는 살면서 삶의 어떤 부분이 혹은 삶 전체가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다. 제1막에서 우리는 잘못 들어선 길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크게 흔들리는 때가 온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어버린 듯 불안해하며 방황한다. 오프라 윈프리의 멘토로 알려진 저자 마사 백(하버드대학 사회학 박사)은 인생 중반 갑자기 찾아온 불안과 혼란을 겪는 이들에게 단테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을 떠나기를 권한다. 인생의 불안과 혼란은 마음이 원하는 것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곡〉 속 단테의 여정을 차용해 진짜 자신의 감정과 열망 그리고 본성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매 순간 나다운 삶, 나를 위한 삶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다.

살다 보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느낌, 인생을 망쳤다는 느낌이 밀려올 때가 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회사 일이 물밀듯이 쏟아질 때, 영원히 사랑할 것 같았던 사람과 죽도록 싸우고 돌아섰을 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텅 빈 집안에 들어섰을 때, 불현듯, 갑자기, 그런 감정들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몇 년 동안 지속해온 직장 생활, 인간관계, 현재 자신의 모습 등 모든 것이 낯설고 부질없고 공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때 우리는 텅 빈 순간을 응시하며 생각한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여긴 어디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원래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잖아!’ 저자 마사 백은 그러한 감정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고 위로한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인간으로서 느끼는 혼란, 불안, 불만 등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전환점이라 조언한다. 이 책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걸었다』는 어느 순간 인생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지도를 건네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독특하게도 이 책은 진정한 자기 감정과 열망, 본성을 되찾고, 나로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불멸의 고전 〈신곡〉 속 단테의 여정을 토대로 보여준다. 왜 하필 〈신곡〉일까? 저자는 이 걸작이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온전한 삶을 회복하며, 더 나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매우 강력한 지침서라고 보았다. 〈신곡〉은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그린 고전, 시대를 초월한 인생 철학과 지혜가 담긴 책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신비로운 여정을 떠나, 지옥부터 천국까지 한 단계 한 단계씩 모든 과정을 거치는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여정을 천천히 여유 있게 따라와도 좋고 올림픽 육상선수처럼 맹렬하게 달려도 좋다. 각자 자신의 호흡과 속도로 가면 된다. 하지만 여정을 결심한 이상 4단계를 모두 거쳐야 한다.

이 책에서 안내할 여정을 소개하면 1막에 이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다음 단계는 제2막 〈지옥편〉이다. 단테가 점점 더 지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듯, 이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직면하고 깊이 이해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찾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본성을 찾아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신념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진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된다. 우리 마음의 소리를 듣고 치유하기 시작하면 제3막 〈연옥편〉에 들어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이제야 깨닫게 된, 진짜 감정과 열망, 본성을 외적 행위와 조화시킨다. 이 과정은 계속해서 할수록 더욱 쉬워진다.

마지막으로 내적·외적으로 일치하는, 온전한 삶에 가까워지면 드디어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없다. 마음과 일과 삶이 무리 없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당신의 주변과 사회 역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함께하게 될 경이로운 여정이다.

 

 

저자는 단테의 상징과 은유뿐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신경학 등 최근 과학에서 얻은 통찰력, 저자 자신과 저자를 찾았던 내담자들의 실제 경험담, 또 평생토록 연구한 사례 및 훈련 방법까지 종합적으로 활용해 온전한 자신으로 회복하는 명료한 과정을 제시한다.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걸었다』는 따뜻하게 감정을 어루만지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때로 마음의 아픈 구석을 건드리고 현재와 과거를 계속 반추하게 하며 떠올리기 싫었던 여러 사건과 생각들을 끄집어내 직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어내려간다면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과도하게 신경 쓰고, 평생 반복되어온 부정적인 사고방식 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단테를 동반자 삼아 내면의 신호에 귀 기울이고 진정한 열망을 따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다.

이 책을 더 자세하고 촘촘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단테가 살았던 피렌체와 중세 기독교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신곡〉을 읽어봤다면 훨씬 도움이 될 듯하다. 성경의 당시 사회는 『시편』 90편 10절을 따라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세 정도로 보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인생 여정의 중간’은 1300년, 바로 그가 피렌체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때를 말한다. 바로 그 해에 단테는 피렌체 공화정을 통치하는 6인의 최고 정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당시 피렌체 정치는 또다시 불거진 파벌싸움으로 혼란스러웠다. 1289년 교황파(Guelfa)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파(Ghibellina)를 누르고 권력을 차지한 후, 교황을 지지하는 흑파(Neri)와 교황을 반대하는 백파(Bianchi)로 다시 분열되어 극심한 긴장을 조성했던 것이다. 급기야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의 요청을 받은 샤를(Charles de Valois)의 군대가 피렌체로 진격하고, 1301년 10월에 단테는 다른 두 명과 함께 피렌체의 특사로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 로마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단테가 로마에 있던 11월 1일에 샤를의 군대는 피렌체로 진격했고, 이것을 기회로 흑파가 모든 최고 정무위원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1302년 1월 27일에 흑파는 백파에 속했던 단테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엄청난 액수의 벌금, 2년 동안의 추방, 그리고 공직 자격을 영구적으로 박탈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이후 3월 10일에 법적 기한 안에 벌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테는 피렌체로 귀국하는 즉시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인다. 인생의 정점에서 그는 조국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가 말한 ‘캄캄한 숲’은 바로 피렌체의 분열과 교황이 초래한 전쟁의 소용돌이였다.

〈신곡〉이 포함하는 영역의 광대함과 거기에 의탁된 메시지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에 사용된 상징의 대요를 설명한 『제정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 책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정했다고 하는 자연계에서의 목적과 초자연계에서의 목적을 향하여 살아간다.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지상낙원을 상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윤리적·지적 미덕이 명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며, 제2의 목적(영원의 행복)을 얻는 길은 신의 은총에 힘입으면서 그리스도교의 믿음·소망·사랑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인류를 현세의 행복으로 안내하는 것은 황제의 의무이고, 천국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은 교황의 의무이다. 이것이 〈신곡〉의 중요한 장면에 나오는 이미지와 일치하는 점이다. 따라서 단테의 상상 속에서 나온 우의적 여행담은 실제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생활체험에서 얻은 진실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조잡한 생활, 이성과 덕이 결핍된 생활을 상징하는 ‘어두운 숲’은 ‘3마리의 야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데, 이들 야수는 원죄에 유래하는 3가지 아집(색욕·교만·탐욕)의 상징이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에 인도된 단테는 이 숲을 벗어나 이성과 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맞는, 현세에 있어서의 지선(지상낙원)에 이른다.

우의적인 면에서 볼 때 〈신곡〉에 명문화된 여러 가지 체험은 파란만장한 인생체험을 통하여 단테 자신의 영혼의 성장과정을 나타낸 것이며, 망명 이후 심각한 정치적·윤리적·종교적 문제로 계속 고민했던 그가 자신의 양심과 영혼 속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아내기까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베르길리우스나 단테가 말하는 ‘제국’이 근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후자에서는 주로 ‘시장의 확보’나 ‘물질적 자원’이 팽창의 주된 동기를 형성한다. 반면 근대 이전 ‘제국’에서는 경제적 동기만큼이나 내부에서 유발된 정치적 동기가 중요하다. 아테네 민주정이 보여주듯 정치 세력들 사이의 긴장이나 개별 정치인의 야망이 팽창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특정 정치 체제와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지만 하나의 단일한 통치체제로 여러 정치 공동체들이 복속되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도시 국가들 사이의 긴장이 조성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 평화를 확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제국’은 종종 도덕적 동기까지 부여받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들은 ‘제국’(imperium)적 팽창에 대한 고전적 동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목가』(Eclogae, BC44-38)에서 지난했던 분쟁과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신의 가호를 받은 한 소년을 통해 ‘황금종족’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고 노래한다.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금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다. 물론 그의 기대는 내란의 종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로마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의 대지가 다시 풍요로워지고, 그 힘을 바탕으로 로마가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을 열망한다.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을 통한 평화’(Pax Romana)를 꿈꾸었던 것이다.

단테도 베르길리우스의 ‘제국’에 대한 기대를 공유한다. 당시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교회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안과 밖에서 두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피렌체도 마찬가지였다.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교황파가 시에나와 결탁한 황제파에게 패배했을 때, 아르비아(Arbia)강 근처의 평원은 전통 귀족에게 대항하던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다. 반대로 1266년 베네벤토 전투, 그리고 1289년 단테가 직접 참전했던 캄팔디노 전투에서는 교황파의 황제파에 대한 살육이 벌어졌다. 그는 이 처참한 상황을 “노예 같은 이탈리아”(serva Italia)라고 한탄한다. 도선사도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제해 줄 새로운 ‘제국’을 열망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면서/사랑의 빛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거란다.” 시인 윌리엄 브레이크는 이렇게 썼다. 그렇다. 사랑의 빛은 햇빛처럼 우리 삶을 환히 비춘다.(p.326)

 

저자 : 마사 벡(Martha Beck)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프 코치.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커리어 경로와 인생 전환에 대해 연구했다. 하버드 대학교와 미국 국제경영대학원(American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Management)에서 사회학, 사회심리학, 조직 행동 및 경영 관리를 가르쳤으며 지금은 개인과 집단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성공을 성취하도록 하는 코칭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아홉 권의 논픽션과 한 권의 소설을 썼다.

그를 찾는 내담자들은 대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 그리고 공허함을 토로하곤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데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삶의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자기 내면의 진짜 감정과 열망, 본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의 자신을 마주할 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생의 한가운데서 마치 길을 잃은 듯한 방황을 멈추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신곡’ 속 단테의 여정을 차용해 사유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일과 지위, 역할, 목표, 심지어 이름까지 다 벗어던져서도 충만한 삶을 살게 하는, 오직 나로 온전한 삶으로 향하는 길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역자 : 박여진

한국에서 독일어를, 호주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기업 경영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다 영미 문학 단편집을 기획하며 번역가가 되었다.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에는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가 작업실 ‘번역인’에서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가 있고, 번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더 터치』, 『의미 수업』,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 산책 2』, 『인생 전환 프로젝트』, 『익스트림 팀』 외 수십 권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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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7일 - 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
신정일 지음 / 창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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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선구자 ‘우리땅걷기’ 이사장 신정일의 41년 간 가슴속에 감춰둔 안기부와의 악연, 고통은? 국가 권력의 오남용은 개인의 삶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시절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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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7일 - 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
신정일 지음 / 창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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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지옥에서 보낸 7일』은 저자 신정일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자전 소설이다. 부제 「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에서 보여주듯 국가안전기획부(구 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에서 간첩 혐의로 끌려가 겪은 고문 등 고초를 당한 경험을 토대로 썼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피해를 당한 분들의 자전 소설을 쓰기에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국가정보원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어나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다.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 시절에는 간첩 혐의나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을 친북 활동 등 간첩 혐의로 무자비하게 끌고 가 고문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까지 연쇄적인 고초를 겪는 일이 다반사였다. 독자는 운동권이 아니어서 직접 끌려가 고초를 당한 경험은 없었지만 친구들 중에는 있었다. 그는 그곳의 경험을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관심을 갖고 알아보려 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또 국가 정보 기관은 으레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수사상' 조사라면 누구도 폭로하기에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지옥'으로 표현한 저자일 것이다. 저자가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이후 시기에도 그런 일은 많았다. 오죽하면 5·18 피해 유가족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수많은 세월 속앓이를 했을까. 지금의 독자들이나 1990년 이후 태어난 세대는 '좀 과장된 것'쯤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 서슬 퍼런 시절 저자는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간첩 혐의로. 사실 저자의 일상 주변을 조금만 안다면(독자도 당연히 이 소설을 통해 알지만) 일부러 간첩 혐의를 씌워 끌고 가진 않았을 것 같다. 다른 혐의를 두고 간첩 혐의를 씌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예를 들면 노동운동이라든지, 아니면 요즘 안 이야기지만 '별건 수사'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건에 끼워맞추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때 안기부의 국가 공권력은 '죄 없는 사람도 그곳에 들어가면 죄 지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이 책 『지옥에서 보낸 7일』은 41년 전인 1981년 8월 어느 날, 지옥 같은 안기부에 인간 이하의 고문을 받은 7일간이 기록이다. 부제에서 암시하듯 최종 학력 국민(초등)학교 졸업인 그가 어떻게 ‘안기부로부터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는가를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이 의해 이유도 모르게 간첩죄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이름도 없이 살았던 많은 이들을 대신해 이 책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삶이 힘들고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자전소설이 작은 위안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지옥에서 보낸 7일’ 이후 41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삶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신정일, 내가 네 놈의 뒤를 8개월 동안을 쫓아다녔다. 너, 간첩이지? 맞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낮게 깔려오는 무거운 목소리.

“너 간첩이 맞잖아.”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놀라서 여기저기를 바라보자 창문이 없는 것이 지하실이 분명했다. 둘러보니 사면이 다 하얗다. 하얀 방에 오래된 낡은 여관과 같이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나무로 만든 가리개 사리로 욕조와 양변기가 보였다. 견고한, 누가 망치로 내려쳐도 흔적도 남을 것 같지 않은 철제 책상과 그 앞에 의자, 그리고 의자가 두 개가 더 있다. 밝은 형광등, 눈이 부시다.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그 사내가 의자에 앉은 채 내게 조용히 말했다.

“신정일, 옷부터 벗어!”(p.37)

 

 

저자는 지금 문화사학자로 역사와 문화 관련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라고 한다. 1980년 10월, 2년 6개월의 제주도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에 자리 잡았다. 그의 '방랑벽'은 타고난 것일까? 저자와 함께 활동했던 김용택 시인은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의 발문에서 신정일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을 찾아 나서서 겪어보고, 배우고 깨달아서 한 가지에 능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한 가지 것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면서 온갖 것들을 겪어내며 산다. 어떤 이는 한 가지 것에 능통함으로써 한 가지 일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만 가지와 통하는 안목을 갖고 살기도 한다. 나는 뒤쪽이다. 인간이 몇 억 년을 산다고 해도 나는 이 작은 마을의 작은 산, 강, 논, 밭, 나무, 하늘, 별, 집,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정일이는 나와는 다른 인간임이 분명하다.

그는 다양한 사람을 찾아 나서서 겪어보고, 배우고 깨달아서 한 가지에 능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벌려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 나는 모른다. 아니 신정일이 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고 꿈꾸는 높고 푸른 산맥들이 김제 만경평야에 들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을 벌이고, 그가 곳곳에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심어준 것이 옳다고 믿으면 그는 주저함이 없이 행함으로써 행복한 것이다. 어느 잘난 사람이 자기가 뿌리고 자기가 당대에 거두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려 하는가. 역사가 어디 그런 것인가.”

 


 

저자는 에필로그 「나는 방외지사의 삶을 살았다」에서 말한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오래도 살았다. 그러다가 보니 내가 사람 들로부터 여러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판 김정호’, ‘현대판 이중환’, ‘현대판 신삿갓’, ‘향토사학자’, ‘걷기 도사’라는 별칭 외에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라고 했고, 도종환 시인은 ‘길의 시인’, 조용헌 선생은 ‘방외지사’라고 했으며, 김지하 시인은 나를 두고 ‘삼남 일대를 걸어 다니는 민족민중사상가’,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걸어 다니는 네이버’라는 별칭을 과하게 붙여주었다. 그중 내가 살아가는 방식만 놓고 보면 거기에 가장 걸맞는 말은 아마도 ‘방외지사’라는 말일 것이다. 강호동양학연구소장인 조용헌 선생이 나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외지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방외지사(方外之士)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자격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방외지사가 될 수 없다. 월급쟁이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면 만 리를 가 보아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되도록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차를 타고 발통 위에 얹혀 다니면 주마간산에 그치고 만다. 산천을 두 발로 딛고 다녀야만 스파크가 튄다. 스파크가 튀어야 깊이가 생기는 것 아닌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인물이 전주에 사는 신정일이다.”(p.348~349)

 


 

말이 좋아서 방외지사지, 달리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들이건 그 누구에게도 조그마한 금전적 혜택을 줄 수 없는 무능력자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모두가 선망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소속이 없으므로 자유롭지만, 글을 쓰지 않거나 일을 안 하면, 통장에는 일 원 한 푼 들어오는 법이 없다. 프리랜서의 삶은, 철저한 자기 관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루의 3분의 2를 남을 위해 쓰는 사람은 노예고, 하루의 3분의 2를 나를 위해 쓰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라고 니체는 말했는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유인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올곧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길 위에 삶이 있다. 그 삶의 길로 머뭇거리지 말고 나서라. 그리고 받아들여라.’ 나의 운명, 나의 지론이다. 그곳이 천국이건, 지옥이건, 그 길을 따라 떠돌다가 어느 날 문득 지상에서의 삶을 ‘객사(客死)’ 로서 마감할 것을 소원한다. 왜 그런가? 길을 좋아하는 사람은 길에서 생(生)을 마감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길을 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좋아하므로 길에서 죽는 객사를 꿈꾸었다. 하지만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옛사람들 의 말을 터득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세상에 살면서 길보다 더 좋아한 것이 어쩌면 책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자를 알고서부터 어느 날 문득 문자중독증에 걸려 문자 조립공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이것은 병인가? 기쁨인가? 이렇게 지금도 헤매고 헤매는 나, 나도 어느 날 용재 성현 선생의 말처럼 최후를 맞고 싶다.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각종 고문이 행해지는 안기부 취조실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벌써 40년 여가 지났는데도 저자의 기억은 생생한 듯하다. 하긴 그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이 국가권력에 의해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잊힐 리 없다.

“악악!”

내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시간, 절망의 늪에서 점차 숨소리가 잦아들어 가는 듯한 그 시간에 뜻하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살살 녹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어, 친구, 잘 쉬었나?”

친구라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보았다. 그 취조관이었다. 재미있다는 듯한 그의 웃음이 더 가증스러웠다. 그렇게 부모 죽인 원수처럼 분노로 나를 개 패듯이 패면서 ‘간첩’이라고 닦달하더니, 지금은 친구라고 나를 놀린다. 웬 친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자, 다시 놀아볼까?”

뭘 논다는 걸까? 그들은 노는데 나는 아프다.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으랴. 잘 노는 것 때문에 사람이 아프고 슬프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으랴. 그렇지 않아도 좁고 연약한 어깨가 으스러진 것 같았고, 갈비뼈가 부러진 듯 아팠다.

 


 

“내가 선생 집에서 가지고 온 책과 소지품들을 보니 문학도였지요? 나 역시 청소년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요. 나는 소설가 김승옥을 좋아했고, 그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이요. 얼마나 좋아했던지 필사도 했었지요. 시는 미당 서정 주 시인의 시와 폴 발레리를 좋아했었소. 〈해변의 묘지〉에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지금도 좋아하는 절창이지요. 당신은 어떻소?”

내가 그에게 지금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가? 지금 내 마음이 그토록 한가하지가 않은데.

“신정일 선생은 어떤 시인들을 좋아하시오?”

 

저자 : 신정일(辛正一)

 

문화사학자로 역사와 문화 관련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다. 1980년 10월, 2년 6개월의 제주도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에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에 참가했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답사를 기획해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관동·삼남대로를 도보로 답사했으며,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걷고 해파랑길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국의 산 500여 곳을 오르기도 했다. 2005년 시작된 우리땅 걷기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포털 다음(Daum)의 카페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 글을 올리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산림청 국가산림문화자산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이 시리즈의 ≪공주·부여≫ 편을 비롯해 ≪신택리지≫ 시리즈(11권)와 ≪왕릉 가는 길≫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시리즈(3권), ≪꿈속에서라도 꼭 살고 싶은 곳≫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천재 허균≫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 ≪신정일의 동학답사기≫ 등 100여 권이 있다. JTV 전주방송 프로그램 ‘신정일의 천년의 길’에 출연했고, 유튜브 ‘길 위의 철학자 우리 땅 걷기’를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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