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 - 무한한 우주 속 인간의 위치
앨런 라이트먼 지음, 송근아 옮김 / 아이콤마(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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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물리'와 '수학'이 싫었다. 대입의 필수과목이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 낙제만 면했을 정도로 했다. 당연히 대학은 인문학 계열로 들어갔다. 그러나 왜 중·고등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쳤는지 지금에서야 깨닫고, 그때 게으름을 피웠던 것이 후회된다.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수학이나 과학이 오히려 더 우리 삶과 가까웠다. 살아오면서 미적분이나 물리의 공식을 이용해 직접 값을 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 원리는 알았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뒤늦게 몰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공자는 약 2500년 전의 사람이다. 동양에서는 그의 학문을 가장 높은 경지의 학문으로 꾸준히 계승 발전시켜 왔다. 그의 학문의 깊이는 그만큼 심오하고 현실 생활에도 잘 맞는 '실학문'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그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받들어져 왔고, 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가 천하를 떠돌며 제자들을 통해 그의 학문을 널리 알리고 고향에 돌아온 것은 74세 때였다. 그가 남긴 말 중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이다. 나이 50이 되어 '하늘의 명'을 알았고, 60이 되어서야 설령 누가 거슬리는 말을 해도 마음에 거스름이 없었다는 뜻으로 술회한 말이다. 지천명과 이순에 대해 다른 뜻으로도 해석하는 분들이 많지만, 독자는 하늘의 명은 우주 섭리로, 이순은 세상의 이치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한다. 과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 말이 아닐까. 과학에 무슨 공자 이야기를 꺼내느냐는 독자들이 계시겠지만 이 책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이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소설) 작가이자 ‘과학 저술계의 계관 시인’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이력도 화려하다. 하버드 천체물리학자, 교수,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경력의 과학자 겸 인문학자이다. 과학과 인문학은 완전 정반대의 학문이라고 얼핏 생각이 들지만 사실 학문은 어떤 분야든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저자는 "작게 쪼개고 쪼개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향하는 무한의 상태와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라는 세계의 어딘가에 인류가 살아가고 있다. 이 인류는 양 심연의 끝 사이에 불안하게 서서 전체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이며, 생명, 마음, 자아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고자 과학을 했나 보다.

그의 책 여기저기에서 그가 과학자가 된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다. 다만 저자는 생각의 끝에서 우주의 미미한 존재로 순간 살다 가는 나란 존재는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에 천착했던 것 같다. 과학자로서 그는 인문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지며 사색하고, 과학적 연구도 꾸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유한함과 무한함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저자의 최신 현대 과학 이론에 바탕한 깊이 있는 생각 여행이다. 에세이의 형태를 띠고 있는 아름다운 문학적인 글이면서 곳곳에 녹아 있는 세계적 과학자들의 깊이 있는 아이디어가 독자의 독서 경험과 생각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주는 놀라운 에세이다.

 


 

소설가로서도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는데 독자는 불행하게도 아직 그의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다. 다만 그를 접한 독자들이 저자의 아름다운 문장을 평가하고 과학적 지식이 뒤를 받쳐 신비로운 세게를 그리는 데 독보적이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인문학적 소양이나 글쓰기 능력도 대단하리란 짐작이다. 실제로 이 책은 독자처럼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과학이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첫째로 저자가 가진 탁월한 문학적 비유 능력 덕분일 것이고, 둘째로 이론적이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딱딱한 물리학 지식을 마치 옆 동네 아저씨에게서 일어났던 일과 같은 일상다반사로 녹여내는 특별한 능력 덕분으로 독자는 믿는다.

또한 리처드 파인만, 스티븐 호킹, 앨런 구스, 숀 캐럴, 안드레이 린데, 잭 쇼스택, 제롬 프리드먼, 알렉산더 빌렌킨, 제임스 하틀, 로버트 데시몬, 프리먼 다이슨을 비롯한 천체물리학자, 양자물리학자, 뇌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과학자들과의 특별한 인터뷰가 이 책에는 녹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뉴턴, 데카르트, 블레즈 파스칼 등 인류사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에서 불교, 힌두교, 고대 철학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특별한 지적 여정에 동참하다 보면 독자들은 수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은 무한대로 광활한 우주에서부터 무한대로 작은 '아원자' 영역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따로따로 떨어져 보이던 연구물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그 맥락(CONTEXT)까지 꿰뚫어보게 하는 놀라운 지적 경험을 선물한다.

 


 

책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현대 과학은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1920년대 시작된 양자물리학의 대두, 외부 은하의 발견과 팽창하는 우주, 작고 작은 미시 세계 속 DNA 구조의 발견과 세포의 발생 원리까지 파헤치는 생명과학, 기계론과 활력론의 대립 그리고 생물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이래로 현대 과학에 일어난 혁명과도 같은 변화는 한꺼번에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고 어려운 주제다. 저자는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하여 이러한 만만치 않은 재료들을 매우 능숙하게 요리한다. 여기서 현대 과학은 더 이상 멀고 낮선 주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간 ‘수식 없는 물리학’, ‘쉬운 말로 풀이한 안내서’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에세이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독자 스스로 과학자의 아이디어와 현대 과학의 눈부신 성과물들을 즐기고 감상하며 사색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쉽게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난해한 현대 과학을 가지고 독자들이 직접 사유하는 철학으로 나아가게끔 돕는 출발점으로 안내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희귀하다고도 할 수 있다. 독자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내 마음을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로’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미소」에서는 기억의 변덕스러움을 노래하고, 무질서의 놀라운 힘에서는 마음의 자유로움을 사유한다. 우주 생명체의 특수성, 빅뱅 이전의 상태에서부터 시간의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과학적 해답을 모색하며, 자연의 신비로움과 그 너머의 진리를 궁구한다.

 


 

독자들은 과학자가 아니어도 과학자의 아이디어를 오롯이 체화하여 스스로 사색하도록 안내한다.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이토록 변덕스러운 내 마음이란 과연 구조로 이루어졌을까?’, ‘엔트로피 법칙과 무질서의 힘은 어떻게 인류의 문화적 진보를 이루어냈을까?’,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란 허상일까 실체일까?’ 이런 질문들과 대답들은 저자의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유, 문학적 비유로 놀랍도록 빛을 내며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그의 글은 비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밝고 경쾌하며 긍정적이다. 자칫 광활한 우주의 규모에 빗대면, 나란 존재란 사막의 모래알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그것이 과학적 지식이 파괴하는 생명의 경외로움이라면, 거꾸로 저자는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라는 존재가 더 신비롭고 경외감이 든다고 말한다. 스스로 어려운 문제 속으로 걸어들어가 멋지게 역전극을 펼치며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멋진 한 인간을 보는 즐거움이란? 한참 읽다 보면 슬며시 미소가 새어 나오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신비롭기도 하고, 어려울 것 같은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저자는 직접 부딫쳐 해결해낸다. 그의 인문학적 기지는 과학과는 또 다른 그의 지식의 한계를 무한대로 끌고 가는 것 같다.

이 책의 원제인 ‘있을 듯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들(PROBABLE IMPOSSIBILITIES, 책 표지에 쓰여 있다)’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24장에도 등장하는 말이다. 이 말은 스토리 창작에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관객이 과거에 빗대어 유추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관객이 개연성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감과 몰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비행기로도 수십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화상 회의를 하고, 손안에 들어온 컴퓨터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얻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과학자들이 일군 성과가 실제 사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삶의 형태와 문화, 철학까지 바꾸어가는 과학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다른 시각으로 표현하자면 과학에 모든 학문이 빨려들어가는 현상, 블랙홀 과학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정작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어디까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천체물리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나와 우주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위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독서는 매우 의미 있고 독자들에게는 귀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독자들은 아마도 각자 의미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의 가이드가 막연히 ‘그건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에 기반하지 않고 과학자들의 아이디어, 최첨단 과학의 전문 지식들을 통해 안내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지적 특권이라는 출판사 측의 뻔한 소개글도 예사롭게만 들리지 않는다. 이 특별한 사고 여행을 떠나는 데 있어 복잡한 현대 물리학에 대한 지식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다만 약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에 대한 열망 하나면 충분하다. 이 책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은 우주, 생명과 마음,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보다 훨씬 크고 작은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명상 모음집이다.

 


 

저자 : 앨런 라이트먼(ALAN LIGHTMAN)

 

어릴 때부터 과학과 문학에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때 이미 독자적으로 과학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시를 썼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MIT의 인문학 교수이며, MIT 최초로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천문학을 연구하였으며, 캄보디아 비영리 조직 하프스웰 재단의 창립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20여 편이 넘는 연극과 음악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아인슈타인의 꿈』과 내셔널 북 어워드 최종 후보작인 『진단』을 포함한 여섯 편의 소설을 비롯해, 2011년 시드니 어워드 ‘베스트 에세이’를 수상한 『엑시덴탈 유니버스』 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 에세이, 시집, 과학 저술 분야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활동을 해온 그는 과학을 문학처럼 읽히게 하는 몇 안 되는 작가다. 그의 이번 최신작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은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의 지적 권위와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표현력이 결합하여, 양자물리학, 우주, 생명과 마음, 의식의 기원, 팽창하는 우주 속 인간의 위치 등 현대 과학의 가장 놀라운 발견에 대한 과학자의 철학적 사색과 명상을 담았다.

 

역자 : 송근아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으며, 우주만큼 매력적인 영어 원서를 소개하고 가르치기 위해 대학원에서 국제영어교육 TESOL을 전공했다.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과정을 수료 후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한 책으로 『더 마블 맨』, 『내 생에 한 번은 상대성이론 이해하기』, 『폭풍의 언덕』, 『우주를 정복하는 딱 10가지 지식』 등이 있으며, 청소년 교양 과학잡지 『OYLA』의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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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마다
리사 스코토라인 지음, 권도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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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추리소설을 즐긴 지 2년쯤 된다. 추리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면 읽지 않는다' 할 정도로 광적인 애독자들을 많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2년 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단했던 독서를 재개한 기분에 닥치는 대로 이것저젓 손을 많이 댔다. 독서를 하지 않는 기간에도 독자들이 어떤 책을 많이 읽는지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책'은 많이 점 찍어 두었었다. 이 덕분에 독자의 눈을 기다리는 책들이 워낙 많아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도 읽고 싶은 책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가시노 게이고를 읽으면서부터 추리소설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겠지만 한국에도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무라카미 하루키 못지않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후 추리소설은 독자의 애독서 목록에 항상 올라갔다.

덕분에 2년 동안 읽은 책이 30권이 넘는 것 같다. 이 정도 추리소설을 읽다보니 재미는 물론 짜릿한 긴장감이 책 읽는 재미를 더욱 키워줬는지 밤새 읽은 적도 있을 정도다. 이젠 추리소설 작가의 이름이나 흐름도 '감'이 좀 잡히는 것 같다. 물론 잘 쓰고 못 쓰고의 판단은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독자가 파악한 추리소설에 대한 흐름은 일본이 강하다는 느낌이 먼저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곳은 영·미 쪽인 것 같다. 일본에서는 추리소설 독자가 엄청나서 추리소설 작가도 많다고 한다. 독자로서는 부럽긴 하지만 번역 출판되지 않은 것을 읽을 정도로 일어 실력도 없고, 아직 그 정도의 광팬은 아니라서 눈을 자연스럽게 영·미 추리소설에도 눈을 자주 돌렸다. 이때 가장 눈에 띄었던 책이 소담출판사가 여성 추리작가 시리즈로 펴낸 첫 번째 책 『블랙 아이드 수잔』이었다. 충격적인 반전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줄리아 히벌린이란 미국 작가의 소설이다.

 


 

그는 독자가 전혀 모르는 작가여서 처음 대하는 작품이고 작가였지만 미국 추리소설의 맛을 잘 보여준 것으로 기억된다. 증거의 과학적 수집 등이 인상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미 추리소설도 여러 권을 읽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대부분 여성 작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은 '소시오패스'라는 점도 특징이다. 일본에선 남성 작가들이 주로 추리소설을 쓴 것 같았는데 영국이나 미국에선 여성 작가들이 대세인 것 같다. 어쩌면 추리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심리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인가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독자가 읽은 추리소설 분량으로 흐름을 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이 소설 『15분마다』 이야기도 돌아온다. 이 소설은 앞서 언급한 소담출판사 기획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텀이 조금 있었지만 첫 번째 소설에 대한 깊은 인상이 남아 있어 기억해내기 쉬웠다. 출판사 측은 이 소설에 대한 소개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악마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테러범이나 살인자, 무자비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악마가 자신들의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기차 옆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체육관의 러닝머신에서 뛰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딸과 결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섬찟한 느낌이다. 그러나 사실일 것이란 게 독자의 느낌이다.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의 범인은 대체로 소시오패스이고 또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 사람이 많았다.

 


 

소설 내용에 대한 소개글은 더욱 구미를 당긴다. "여성 작가의 손에서 탄생하는 첨예한 심리 묘사와 예측 불가한 반전,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 리사 스코토라인의 강렬하고도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오직 가족과 환자밖에 모르는 정신과 의사 에릭의 삶은 소시오패스의 표적이 된 후로 악몽으로 뒤바뀐다. 에릭은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환자를 맡는다. 그 환자는 다른 소녀에게 강박적인 짝사랑을 품고 있는 문제아 십 대 소년으로, 정신과 상담을 하면서 소년이 말한 비밀 때문에 에릭은 그 소녀의 안전이 걱정된다. 그는 의사로서 환자의 비밀을 감춰주고 보호하느냐, 소녀의 안전을 위해 알리느냐 하는 위험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에릭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는 누군지도 모르는 적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연,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범인은 누구일까?"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첫 문장에 주목한다. 대개의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독자가 듣기로는 추리소설 독자들은 책을 읽을지 말지를 소설의 첫 대목을 읽어보고 결정한다. 단편소설은 대체로 그렇지만 추리소설도 그렇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소시오패스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훨씬 영리하고 자유롭다. 규칙이나, 법률, 감정, 상대방에 대한 배려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금세 읽을 수 있고, 연락처를 바로 얻어낼 수 있으며,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조정할 수 있다..." 분명 예사롭지 않다. 화자가 소시오패스이다. 주인공이 소시오패스란 말인가. 독자의 궁금증이 더해가기 시작한다.

 


 

출판사 측의 소개글이 이유가 있음을 느낀다. 이어지는 부분이 책 읽기를 재촉한다. 이 화자의 말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는 소름 끼치게도 우리 24명 중 1명의 확률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인구의 4%가 소시오패스라니 이건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닐까. 그러나 저자는 차근차근 '내가 소시오패스이고, 평범한 이웃이고, 자신들의 딸과 결혼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화자는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소시오패스 검사도 했다고 한다. 해어 테스트(Hare Test)라고 불리는 실제 검사는 오직 숙련된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검사법을 찾아 검사할 때 질문사항을 적어 나간다.

1.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선택하시오 : 현혀 그렇지 않다 / 조금 그렇다 / 그렇다

2. 내가 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아도 미안하지 않다.

선택하시오 : 전혀 그렇지 않다 / 조금 그렇다 / 그렇다.

화자는 20개 문항 40점 만점에 38점을 획득했다고 밝힌다. 소시오패스 전공이라면 우등으로 졸업했을 거라는 여유 있는 말과 함께.

 


 

너무 빠져들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1장의 내용은 저자가 아는 소시오패스의 특징에 대해 화자의 입을 빌려 얘기하고 있다. 소시오패스가 평범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또 그 사람들이 어떤 특징이나 특질적 마음 상태나 태도를 보이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해브메이어 종합병원에서 정신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에릭 패리시 박사다. 이성을 잡아끄는 외모 덕분에 그의 별거 소식은 주변 여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기에 충분했지만 에릭은 하나뿐인 딸 해나와 전처인 케이틀린의 마음을 돌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해나를 위해 아내에게 저렴하게 팔았던 집을 아내가 비싼 값에 판 것과 그림 그리기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해나가 갑자기 소프트볼 연습팀에 참가하게 된 것, 그리고 그 배경에 비워진 자신의 자리를 꿰찬 어느 남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에릭은 배신감에 몸부림치게 된다. 이제까지 해나를 위해 케이틀린이 마음을 돌려주기를 희망했지만 케이틀린의 본심을 알게 된 에릭은 해나를 자신이 양육하기 위해 고민하게 된다.

사실 주인공 에릭은 가족과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캐릭터가 설정된다. 에릭은 어느날 응급실에서 삶이 얼마남지 않은 할머니로부터 혼자 남게 될 손자 맥스를 상담해 줄것을 의뢰받는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부탁에 자신의 진료실에 온 그와 상담을 한다. 우울증과 강박장애를 가진 맥스는 자살충동까지 겪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걱정과 엄마에 대한 분노까지 숨기지 않는다. 한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말하며 다시 상담하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에릭이 맥스의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맥스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상담 때 맥스가 밝혔듯이 에릭은 맥스가 자살 하려는 것이 아닌지 걱정한다. 맥스를 찾기 위해 경찰에게도 부탁하고, 자신의 친구 로리에게도 부탁하지만 찾을 방법은 없다.

 


 

에릭은 맥스가 좋아한다는 르네라는 여자아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경찰로부터 듣는다. 경찰은 에릭을 경찰서로 데려 와 그가 진료한 맥스에 대한 상담기록을 달라고 하지만 에릭은 의사 윤리상 환자의 상담기록을 내어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경찰서로 끌려온 에릭은 로리의 도움으로 그녀의 동생 형사전문변호사 폴을 변호사로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경찰서를 나온다. 에릭은 맥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살해할 아이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맥스를 찾아다니던 중 맥스가 한 쇼핑몰에서 5명의 아이를 인질로 잡고 15분마다 한 명씩 죽이고 나서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위협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게 된다. 에릭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다가가서 자수하도록 권유하는 데 성공한다. 병원에서는 한 의대생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병원도 맥스와 관련, 의사로서 부적절한 행위라고 정직처분을 내린다. 아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여러 곳에서 에릭은 거절당하지만 '맥스는 범인이 아니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여자아이를 죽인 범인을 직접 찾기 시작하는데, 추적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반전이 거듭된다. 이 소설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반전은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에릭은 어떻게 할까. 아마 추리소설 독자라면 이 소설이 꽤 두꺼운(650여 페이지) 책이지만 손에서 놓치 못하고 끝까지 읽어나갈 것이다.

 

“맥스 자보우스키가 르네 베빌라쿠아의 살인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에릭은 망설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맥스와 르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누설하기 싫었다. 맥스의 목숨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만 르네의 살인 사건과 엮이게 될 것이다. 에릭은 마음 한편으로 여전히 맥스를 믿고 있었다. 맥스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으로 유죄를 받게 될 수도 있는 정보를 경찰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에릭이 대답했다. “내가 환자에 대한 기밀 서약의 의무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건, 맥스가 르네 베빌라쿠아의 죽음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p.350)

 


 

에릭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폴은 채널을 돌린 뒤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에서 뉴마이어 경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말해, 패리시 선생의 변호인의 성명서에 대답을 해주고 싶군요. 우리는 패리시 선생이 의사로서 비밀유지 서약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패리시 선생이 어제 아침 래드너에서 교살된 채 발견된 열여섯 살 소녀, 르네 베빌라쿠아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릭은 경감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에릭이 살인자를 비호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극악무도한 범죄의 희생자들과 크나큰 슬픔에 잠긴 가족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르네 베빌라쿠아 살인 사건의 모든 단서들을 쫓아 수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패리시 선생의 변호사가 의사로서의 특권을 주장했을 때 화가 치솟은 건 맞습니다. 우리는 한 어린 소녀의 죽음을 절대 가볍게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p.494~495)

 

저자 : 리사 스코토라인(LISA SCOTTOLINE)

리사 스코토라인은 20여 편 이상의 작품들을 발표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녀의 책은 현재까지 2500만부 넘게 판매되었고, 30개국 이상의 나라에 출간되었다. 그녀는 에드거 상과 《코스모폴리탄》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여성 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현재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매주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딸 프란체스카 세리텔라와 공저로 여러 편의 논픽션을 발표하기도 했다. 리사는 전직 변호사로, 현재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여러 애완동물들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

 

역자 : 권도희

전문 번역가. 옮긴 작품으로 타나 프렌치 『페이스풀 플레이스』, 요한 테오린 『욀란드의 사계』 시리즈, 애거사 크리스티『비뚤어진 집』, 『움직이는 손가락』, 존 하트 『허쉬』, 존 카첸바크 『하트의 전쟁』, 조지핀 테이 『시간의 딸』, 루크 올넛 『우리가 가진 하늘』, 앨리스 피니 『원래 내 것이었던』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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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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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과테말라, 주변 마야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 정복당할 당시 죽음과 고통에 젖은 애절한 사연,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현실, 사실의 기록, 악랄함과 사랑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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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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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란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까딴반도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아즈텍어족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에서 유까딴지방에 이르러 유까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모체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까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이 책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Relacion de las cosas de Yucatan)』은 '마야문명' 하면 항상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사료라고 한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난 직후인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신부인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는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부터 주변의 지리, 마야인들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성과 사랑, 인신공양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았다.

 

마야 치첸이트사의 유적 <출처 : 이미지월드>

 

이 책은 유럽 열강이 초기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대에 남겨진 마야문명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사료이며 마야인들의 삶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서로, 한마디로 말하면 마야문명 종합 백과사전이다. 굳이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 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합쳐 놓은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편역자 송영복은 설명한다. 이미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화로 사라진 고대 마야 원주민들의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찾는 교양의 의미에서, 마야문명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필수적인 사료라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마야인들이 남긴 문자의 발음기호 일부가 수록되었는데, 나머지 마야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p.9)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반면에 마야를 연구하기 위한 식민지 초기의 종합적인 1차 사료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마야의 문자와 그림판 마드리드사본 <출처 : latimericanstudies.org>

 

우리 나라 일반 독자들은 마야문명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다. 사라진 외국문명이기에 굳이 자세하게 배울 필요는 없겠지만 우수한 문명에 대한 대접이 조금은 소홀한 느낌을 독자는 갖는다. 물론 이 얘기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다. 예를 들면 고대 로마제국이나 앞선 그리스문명은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교과서의 분량으로 치자면 마야문명은 단 몇 줄에 그친다. 그것은 아마 지금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이끄는 추세에 따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 고전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 E.톰프슨에 따르면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 한다.

초기 마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극히 드물어 과테말라 태평양연안의 오코스(BC 1500) 및 콰도로스(BC 1000)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BC 5,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후에 형성되는 고전 마야적인 특징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학설이 거의 굳어졌다. 가장 오래 된 마야적 문화는 페텐지방 서부의 시에문화와 북부의 마몬문화인데, 마몬문화의 연대는 BC 5세기로 추정되어 카미날퓨의 라스 차루카스기(期)와 비슷하다. 시에문화는 고전 마야유적인 알탈드 사크리피시오스와 세이발의 하층에서, 또한 마몬문화는 와샤크툰과 티칼의 하층에서 볼 수 있다. 이 문화에 이어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期)와 중부 저지 마야지대의 차카넬문화에 이르러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으며,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문자의 원형이 나타났다.

 

유까딴 반도 <출처 : 세계 문자사전>와 칼라크롤에서 발견된 마야의 도자기(600~800년) <출처 : (CC BY-SA)Sailco>

 

세계의 패권은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콜롬부스는 이탈리아의 탐험가로서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이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다.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의 막을 올리고 식민지 개발에 적극 나선다. 특히 에스파냐는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 남북아메리카 전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각종 자원을 수탈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린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으나 서구 열강들이 너도나도 식민지 개발을 위한 해양 탐험 시대에 뛰어든다. 이때 아메리카 대륙의 두 문명 아즈텍(마야)문명과 잉까문명도 멸망한다. 원주민들의 목숨을 예사로 빼앗는 등 막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저항했으나 부를 향한 서구 열강의 집념은 꺾지 못했다. 이 책도 사실은 그들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미보다는 수탈을 위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지배국 왕에게 보내는 보고서 형식의 글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송영복 편역자는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 앞서 언급한 대로 희소성을 우선 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Mexica, Azteca)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많은 사료와 기록이 남았다는 것. 반면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식민지 초기 종합적인 1차 사료는 여기에 소개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뿐이라는 사실은 앞서 밝힌 대로다. 또 다른 중요한 의의로는 기록의 정확성과 종합성을 들 수 있다. 디에고 데 란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의 정복 전쟁이 끝나고 식민지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에 마야 사람들과 이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자연 등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학술적인 의의는 실로 무한하다. 저자인 란다는 젊은 나이에 유까딴반도로 건너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그들의 생활을 하나하나 세밀하고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물론 기록 내용에 개인적인 감정, 주관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상당 부분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마야 인디오들에 대한 그의 애증으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보고서나 역사적인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문학적인 가치도 더해 준다.

일반 사료의 난해함과 딱딱함에 비해 이 책은 기행문과 감상문의 성격을 두루 가지고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준다. 건조하게 사실을 차분히 서술하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감성의 높낮이가 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감상문과 기행문, 조사보고서의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이 책은 16세기에 쓰인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이에 덧붙여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도 16세기 에스빠냐어와 마야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송영복 편역자는 시간과 달력 부분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오늘날 마야 문자 이해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말한다. 몇 부분에서는 이곳의 동식물을 서술하였고, 마지막에서는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 땅을 정복한 것이 원주민들에게 더없이 좋고 은혜로운 일임을 강조하며 결론짓는다는 점에서 지배자, 정복자의 논리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 란다는 유까딴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원주민 지도자인 나치 꼬꼼이나 가스빠르 안또니오 치 같은 현지인들과 문답을 통해서 자료를 정리하며 집필을 완성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은 그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엇보다도 저자인 란다의 경험과 느낌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이곳에서 오랜 기간 머무는 동안 그가 관찰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동식물과 자연환경에 대한 기록은 그 세밀함이 매우 놀라울 정도다. 란다는 생애 가운데 30년 가까운 시간을 마야 원주민과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마야 유까떼꼬어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인디오들의 언어로 교리를 기록하였다고 스스로 편지에서 밝힌 바 있다는 사실이 있다.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566년부터 수년이 걸린 것으로 보이며,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에스빠냐 정부에 본인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정복 초기 이권에 얽힌 다양한 이해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란다도 분쟁의 한가운데 서게 되며, 원주민들 탄압으로 문제가 제기되자 해명을 위하여 그가 직접 에스빠냐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한다. 책에 원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행실이 좋지 않고 에스빠냐 사람들이 그들을 문명화한 것에 크게 가치를 두지 못하기 때문에 만일 강경하게 조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다시 원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책의 집필 이유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_볼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고, 아랫입술에 내기도 하였으며; 몸 일부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혀의 양옆으로 비스듬하게 구멍을 내서 지푸라기를 통과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또한 부끄러운 부위인 남성 성기의 포피에 상처를 내서 귀에서처럼 증표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할례의식을 한다고 인디아스의 역사가가 착각하였다. 그 밖에도 인디오들은 더럽고도 처참한 공양을 하였다. 피공양을 할 남자들은 신전에 모여 차례대로 서서 각자 성기의 측면으로 비스듬한 구멍을 냈다. 가능한 많은 실을 (구멍으로) 통과시켰고, 그리하여 모든 남자의 성기는 실에 꿰어진 상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성기에서 낸 피로 악마를 문질렀는데, 가장 많이 한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자식들 또한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에 익숙해졌다.(p.217)

 

저자 : 디에고 데 란다

 

16세기 마야 지역에서 활동한 가톨릭 신부이다. 초기 식민지 시대인 1549년 에스빠냐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그곳 원주민 포교와 저술 활동에 힘 쏟았다. 이때 마야 지역은 이미 에스빠냐 몬떼호 장군에게 1520년대 이후 정복되고 있었고, 40년대 이후로는 많은 지역이 에스빠냐의 복속 아래 놓였다. 따라서 저자인 란다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생기고 수도사들의 포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란다 역시 1552년 유까딴 지역의 과르디안(주임신부)으로의 부임을 시작으로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원주민 포교를 위하여 신부들은 그들의 언어와 관습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란다도 그러한 필요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언어를 공부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한 반면,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 풍습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1572년에는 유까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란다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으로 마야문명에 관한 자세하고 광범위한 글을 남겼으나,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화형에 처했으며 마야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모조리 불태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란다는 마야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고발당하고 에스빠냐로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으나 관련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이러한 과정에서 란다의 경험과 호기심, 실제적 필요로 탄생했다. 1573년에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오비스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79년 멕시코의 유까딴 지방 메리다에서 사망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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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탄생 - 내 옆자리의 악인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도키와 에이스케 지음, 일본콘텐츠전문번역팀 옮김 / 드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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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발생하는 원인은 ‘우리’에게도 있다. ‘엘리트’조차 사회구조에 대한 잘못된 선택을 거듭한다. 악인도 행복해지는 사회로 나아가자. 디자인만이 모든 사람이 행복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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