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
오수영 지음 / 고어라운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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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를 낸 전업 작가가 아니라면 직장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분들이 많다. 글만 써서는 '밥 먹기 힘들다'는 현실 때문이다. 한 번 글쓰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글과 작별하기가 쉽지 않다. "평생 직업은 아니지만, 한 번 해볼까?" 해서 글쓰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다른 기회를 갖지 못한 것보다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 많다고 풀이된다. 그들은 대개 평범하고 안전한 미래를 꿈꾸었던 사람들도 아니다. 평범한 삶을 희망한다면 아예 작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에 매달리는 사람은 대개가 '작가를 소원했기 때문"에 글쓰는 직업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를 써서 너도나도 인정할 만한 성과가 없었던 사람은 불러주는 출판사도 없다. 호구지책으로 직장을 택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직장을 따로 갖고 글쓰기도 병행한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터, 호구지책 없이 오랫동안 글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 『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의 저자 오수영은 평범하고 안정된 앞날을 바라보며, 몸에 맞지 않는 유니폼을 입고 생업에 전념했던 분이다. 이 책은 작가라는 꿈도 끈질기게 부여잡은 한 사람의 삶의 분투기이기도 하고,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끝내 탈진한 한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오랜 시간들의 결과는 모순적이게도 행복과 안정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상실의 결과로 이어졌다. "강박적으로 성실하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삶의 정답이라고 믿었던 시절의 결과는 다름 아닌 번아웃과 우울증 진단이었다."(p.7) 이런 증상은 보통 삶의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는 저자는 의사의 진단에 비로소 '오만과 착각'을 깨닫는다. 

저자는 치료에 충실하게 임하면서 혼자서도 불안과 우울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고 〈서문〉을 통해 밝힌다. 필요한 물건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찾아내기 위해 내용물을 전부 바닥에 쏟아보듯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쏟아낸 후 문제의 근원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자는 오랜만에 내면 깊숙이 침잠한 시간을 가졌으며, 이 과정에서 찾아낸 불안과 고민의 단서들을 〈생활일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천천히 실마리를 풀어냈다고 말한다. 덕분에 인생의 중대한 기로 앞에서 미련 없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할 견고하고 따뜻한 용기를 얻었다고 털어놓는다. 이에 따라 이 〈생활일지〉는 직장 생활과 출판 활동을 무리하게 병행하다 탈진한 시기에 적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서른한 통의 편지는 구독 기간 동안 화요일과 토요일 밤마다 정해진 발행 시간, 즉 구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흔쾌히 즐겁게 분투했던 기록인 셈이다.

의사가 진단과 치료 탓인지, 자신이 치료에 성실하게 임했든지 그때는 회복하는 시간이 캄캄한 우물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물보다는 차라리 연둣빛이 생동하는 숲 속의 작은 벤치에 가까웠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너른 품으로 안아주고 미련없이 보내주는 작은 나무 벤치. 그곳에 앉아 온종일 하염없이 나무를 올려다보던 시절을 건너 어느새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역경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자신에게, 그리고 곁에서 늘 응원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구독자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저자는 〈서문〉에서 전한다. "일상의 작은 글쓰기를 통해 무엇이 되거나 혹은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단지 무엇이라도 계속 쓸 수 있게 해준 〈생활일지〉 구독자들께, 그리고 에세이 시리즈의 독자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단순한 흥미나 순전한 응원, 각자의 다양한 이유들로 구독해 주기도 했겠지만, 크고 작은 선택으로 자신의 일년이, 한 사람의 유일한 꿈이,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고 깊은 감사를 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서른한 편의 편지글을 기초로 출판을 위해 고쳐쓴 글들이다.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시점을 독자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거의 시기 순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각 글의 제목을 붙여놓았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몇 편만 제목을 여기에 적어 본다. 「두 번째 편지 : 상담의 시작」, 「네 번째 편지 : 약물 치료의 시작」, 「일곱 번째 편지 : 나를 분석하는 시간」, 「열두 번째 편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 「열세 번째 편지 : 북페어와 사람들」, 「열여덟 번째 편지 : 나태함의 재발견」, 「스물다섯 번째 편지 : 평범한 일인 가구」, 「스물일곱 번째 편지 : 오래된 책을 읽는 밤」 등이다.



먼저 「상담의 시작」에 쓴 글이다. '생업인 승무원과 작가라는 꿈 사이의 균형'이라는 소제목을 달아 승무원 이전의 꿈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승무원과 자신의 이십 대를 살았다는 것. 오직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휴학을 하고 취직과 관련된 모든 것과 거리를 둔 채 혼자만의 방과 상상 속 세상에 스스로 고립된 채 살았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처럼 생각처럼 성과가 나오지 않고, 선배들의 막막한 생활을 목격하고부터는 현실에 목덜미를 부여잡힌 것처럼 겁이 나서 그쪽 세계를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 운 좋게 항공사에 입사해 승무원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때가 딱 서른 살이었다고. 사회 초년생과 애사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집안에서의 눈길도 꽤 부드러워졌을 것이란 짐작도 쉽게 할 수 있다. 글만 쓰던 시절을 삼 년 이상 보냈더니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있다. 짐작컨대 글쓰던 시절에는 누구의 지시 받지 않고 조직 생활에 미숙했을 터, 직장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점이 분명 발견됐을 것이다. 그러나 써놓은 글들이 쌓이고, 쌓인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고, 또 다른 책을 펴내고··· 어쩌면 도피처의 역할을 글쓰기를 통해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것도 '위태로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겉으로는 잘 다려진 근사한 유니폼을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했을지라도 내면은 입사 이후로 단 한 번도 풍랑이 몰아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단 한 순간도 글쓰기를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물론 여유가 있는 삶 속의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건 회사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절했던 꿈이 바로 앞에서 손짓을 하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약물 치료의 시작」의 네 번째 편지글은 저자가 정신의학과 문을 열면서 시작됩니다. 처음 가보았으니 놀랍고 약간은 두려운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더욱이 자신이 오래 다니던 정형외과 위층에 있었다고 하니 정신과 의원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병원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대기실의 가득 메운 환자들의 숫자에 또 놀라게 된다. 분명 진료 예약을 하고 방문한 것인데 이렇게 환자 대기 숫자가 많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 단순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집과 가까운 거리와 의사의 인상을 살펴본 후 선택한 것인데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던 정신의학과 병원에 이렇게 환자가 많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간호사로부터 검사지를 받아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검사지를 작성하다가 대기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독감이 유행처럼 번질 때 가본 내과나 이비인후과도 이렇게 진료 대기 환자가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당연히 "세상에는 각각의 이유로 마음과 정신을 앓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진료실의 분위기는 상담센터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보다 조금 건조하고 사무적인 분위기였다는 것. 병원 분위기는 인테리어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때 저자의 느낌은 인테리어의 영향보다는 심리적인 긴장감과 압박감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의사와의 면담에선 우울을 동반한 공황의 초기 증세라고 진단명을 내렸다고 한다. 저자는 속으로 단순한 스트레스인 것 같으니 병원 치료가 필요 없다고 말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나 번아웃이었구나. 나 우울증에 공황도 앓고 있는 환자였구나. 그것도 모른 채 일상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나를 가차 없이 채찍질을 해댔구나. 네가 지금 그렇게 나태하게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당장 일어나서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누가 봐도 그 숨 막히는 생활의 결과는 탈진이었을 테고 저는 이미 내려진 정답처럼 그 탈진 속에서도 무엇이라도 해내야 한다는 강박적인 허우적거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p.58~59)



스무번 째 편지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는 '실패를 존중하는 일'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KBS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 이야기로 말머리를 잡는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22년까지 15년간 716회분을 방영했다. 지금은 종영됐지만 다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인기를 끌었던 회차가 선택돼 업로드되고 있다. 저자도 모든 회차를 챙겨보진 않았지만 무작정 채널을 돌리다가도 〈다큐 3일〉에서 고정되는 날들이 많았다. 그만큼 꾸밈없이 서민들의 이야기를 전해줘 몰입감이 남달랐다고 술회한다. 그중에서도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회차 중 하나는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노량진 고시촌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방송의 제목처럼 72시간 동안 고시생의 생활과 밀착하여 내레이션과 인터뷰 형식으로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전해주는 방식의 프로그램이다. 

저자는 며칠 전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그 회차를 다시 발견하고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몰입해서 시청했다고 말한다. 노량진은 저자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갓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저자는 얼떨결에 상경해 노량진에서 일 년간 재수 생활을 했고, 특정한 꿈이나 목표도 없이그렇다고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이나 전공도 없이 단지 대전을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과, 당시에 만나던 여자친구가 고려대에 진학하는 걸 보고 비록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더라도 같은 서울에 있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에 이끌렸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큐 3일〉에도 시험에 떨어진 고시생들이 술집에 모여 넋두리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제 더는 안 될 것 같아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며 카페라의 시선을 회피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아마 재수 시절의 저자라면 그를 한심하게 바라봤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저자로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미래만큼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도 없는데 그들은 그 불안을 떠안고서라도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청춘이라는 시간을 온통 들이붓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우리는 용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때로 용기는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미련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용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p.273)



마지막 편지글에서 저자는 「언젠가 우리 다시」-'일종의 고백'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글은 〈에필로그〉 성격이다. 저자 스스로의 삶의 태도와 의지, 그리고 미래 전망 등을 다지고 있다. 어제(이 글을 쓸 당시의 시점에서) 올해 첫 북토크를 끝냈다고 쓰고 있다. 느낌과 소회 등이 담겼지만, 저자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각오라고 이해된다. 책에 따르면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고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지만, 머지않아 종이책이 사라질 수도 있는 시대라지만, 게다가 활자가 담긴 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시대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면서도 저자는 이 세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통째로 던진 셈이니 그 책임과 감당 또한 때마다 잘 받아들이며 살아가려 한다. 행운이 따라준단면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글쓰기 인생에 전환점이 생길 수도 잇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혼자 묵묵하고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란 담담하게 의지를 피력한다. 

책의 가장 뒷 부분에 「생활일지 후일담」을 따로 지면을 할애한다. 산책으로 마을 곳곳을 걷다가 한숨 대신 심호흡에 익숙해지고 있다고도 말한다. 한숨이 불안을 토로하는 방식이라면 심호흡은 내면을 정화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저자는 믿기 때문이다. 맑은 기운이 온몸을 순환하며 불안과 걱정의 잔여물을 세척하면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오래된 실내 공기를 환기시킬 때 청량한 바랑믜 첫 숨을 들이마시는 느낌이라고 비유적 표현을 쓴다. 걷다가 마주한 익숙한 책방에서 잠시 책을 읽기도 하고, 익숙한 카페에 들러 시원한 커피를 마시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내일보다 오늘을 살아갈 다짐이라면, 미래의 아쉬움보다 지금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저자 : 오수영


일상의 작은 이야기를 쓰고 만든다. 한동안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고 그보다 오래 작가를 꿈꾸며 살았다. 저서로는 『조용한 하루』 『사랑의 장면들』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 『깨지기 쉬운 마음을 위해서』 『아무 날의 비행일지』 『긴 작별 인사』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진부한 에세이』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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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 - 나의 갈팡질팡 지망생 시절 이야기
반지수 지음 / 송송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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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그림 그리는 마음이 중도에 꺾이지 않고 오직 예술의 길을 걷겠다는 노력과 열정이 돋보인다. 방황하거나 갈팡질팡해도 결국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포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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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 - 나의 갈팡질팡 지망생 시절 이야기
반지수 지음 / 송송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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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하는 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책을 읽지 않다가, 코로나 펜데믹 발생 후 재택 근무하다 책꽂이에서 읽다 만 책 한 권을 다시 읽은 게 발단이 되어 적지 않은 책을 읽었다. 5년을 꼬박 읽었으니 정확하게 세지는 않았지만 수백 권 이상 될 듯하다. 물론 읽기에 부담이 없는 에세이·소설 등 문학책이 많았다. 또 의외로 많이 접한 책은 음악·미술 관련 감상법이나 해설서가 많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자주 갔던 콘서트나 전시회였지만 대체용으로 적절했다. 그리고 인문학 서적도 많이 출판되었다. 특히 정신의학과 심리학 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많이 판매된다는 자기계발서도 역시 연말 서점 집계에서 최다 판매를 기록한 듯하다. 소설은 SF가 특히 많이 쏟아져 나왔다. '대세는 SF'라고 할 만했다. 일본 책 번역 부분에선 미스터리 소설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덕분에 일본의 유명 미스터리 소설 작가 몇 명의 이름 정도는 알게 됐다. 직장 생활 수십 년 동안 거의 읽지 않은 책이 한 권, 두 권 읽다보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마치 책을 처음 읽는 사람처럼 무리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다. 이젠 1,000권을 거뜬히 넘길 정도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읽은 탓인지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책을 들이밀고 독서 여부를 묻는다면 "읽었다" "안 읽었다"는 대답할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었나?를 질문을 바꾼다면 즉각 응답할 게 별로 없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기억력이 떨어진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기억력은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책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읽는 시간과 내용을 단순화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는 생각을 해냈다. 기억력은 어렸을 때부터 역순으로 무너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선 그림 설명을 해주는 책을 많이 접했다. 그림 미술에 관한 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놀랍게도 어렸을 때 그림 그리다 속으로 마음 먹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게 그림을 설명하는 책과 다시 친해지는 데는 분명 큰 몫을 차지했다.



이 책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도 거침없이 선택했다. “이 책은, 분명 누군가에게 뜨거운 불길이 될 것이다.”란 홍보 문구도 독자의 경우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조용히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놀랍게도 그림을 꿈꾸던 시절부터 그림을 포기하던 때, 그리고 일반 직장에 다니던 때 등 많은 일들이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이 책의 표지화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과외수업을 받을 때 선생님의 공부방과 비슷하다는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 선생님의 이름과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신 분인지도 기억에 살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표지화부터 관심이 생기는 바람에 저자 반지수 소개란에 먼저 눈이 갔다. 책 속의 몇 장의 그림과 한눈에 훑었다. 꽤 낯익은 그림들이다. 소개란에는 『불편한 편의점』, 『위저드 베이커리』,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달팽이 식당』 등의 표지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그림 작가라고 한다. 몇 년 전 에세이 삽화 작가가 펴낸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작가의 책에는 글보다 그림이 훨씬 많았다. 글은 시보다 적었지만 그림이 훌륭해서인지 꽤 인기가 좋은 작가라고 소개돼 있었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났지만, 지금처럼 많은 생각이 되살아 나지는 않았었다. 이 책을 보는 순간 많은 기억이 생각났던 것은 저자의 이력과 또 책 속의 글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로부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 "비전공자인데 그림을 시작해도 될까요?" "나이가 00살인데, 꿈을 좇아도 괜찮을까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말한다.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만화가, 온라인 교육 플랫폼 인기 그림 강좌 운영자···. 요즘 흔한 말로 N잡러인가? 할 정도로 여러 곳에 관계하고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모두 그림과 관련된 일들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저렇게 많은 일을 한다면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할까?란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좋아하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고,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 반지수가 '천부적 재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노력' 없이는 재능도 발휘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림과는 완전 먼 직업군인데. 저자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미술학원이나 예중 예고에 다닌 적도, 입시미술을 배워본 적도 없다. 사회과학도로서 사회운동에 매진하던 23살, 대학 3학년을 마치고 1년간 휴학을 하고 로스쿨에 가야 할까, 본격적인 사회운동가가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던 시기,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휴학을 하고 만났던 많은 이들이 전공을 바꿔 예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23살에 다시 그림 그리기를 결심하고도 알바를 하고, 사회운동을 하고, 복학을 하고, 영화를 할지, 그림을 그릴지, 그림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고민하다가 다시 그림을 그려도 될까? 근본부터 회의하기를 반복하고, 희망과 절망, 노력과 번아웃, 자기 확신과 불신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했다고 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하루하루 성장해 결국은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예전에 책을 펴내고 예스24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선택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이 화가나 만화가였어요.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림그리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배운 적도 없고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어서 계속 미루거나 선택을 못 하다가, 무슨 일을 해도 자꾸 그림 생각이 나고, 어떤 일을 해도 그림이나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일단 시작해봤는데, 너무 몰입이 잘 되어서 ‘이게 내 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해보기로 결정했어요."라고 답했다. 인터뷰라서 그런지 응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소 김이 빠지는 듯하지만 말투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때 낸 책 『보통의 것이 좋아』(에세이)로 인터뷰한 것인데 이런 질문도 있었다. "평상시에 일러스트 작업을 하실 때 어떤 부분에 가장 고민을 하시고, 신경을 쓰시는지요?" 저자의 답변은 일반적이지만 화가로서 가장 적절한 답변으로 생각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이 담겨 있는가에요. 내가 세상을 보면서 좋았다고 캐치한 부분, 내게 소중했던 순간과 그때의 분위기, 공기. 그게 그림의 모습으로 담겨있는가.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사실을 계속 확인하면서 그려요. 누군가 이 그림의 첫인상으로 그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려요."



이 책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는 모두 2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23개의 장이 크게 두 부분으로 갈라져 있다. 저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노력과 방황의 시간과 그림에 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가 큰 줄기라면, 장과 장 사이에 그 시절 기록했던 〈작업일지〉를 배치했다. 그러니까 각 장의 내용에 대한 글들의 증거 기록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림으로 마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화가로서는 이 책에서 글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마치 해설하듯이···.

이에 대해 저자는 "그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쓰는 사람이다"고 답한다. 그는 지망생 시절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고 말한다. 읽은 책, 본 영화, 그렸던 그림, 그날그날의 깨달음, 감상, 다짐 같은 것들. 이걸 저자는 〈작업일지〉라고 부른다.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우선 일지에 쏟아놓고, 반복해 다시 읽으며 자신의 상황과 문제를 파악하고 수정하고 개선해나간다. 보통 사람으로는 쉽사리 하지 못할 일이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의 일들에 대해 기록하고 다시 읽으며 반성하고, 개선점까지 다시 기록하는 일은 하루이틀이 아니고서야 "그런 사람이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저자는 독학자로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불안, 일반적인 인생 경로를 벗어난 데 대한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 하나씩 스스로 깨쳐갈 때의 기쁨 같은 것들이 생생히 기록했다고 고백한다. 뱅뱅 맴도는 것 같은 일상도 매일의 기록을 길게 나열하면 나선처럼 상승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더딘 오늘을 견디는 힘이 된다고 장담하듯 밝힌다. 독자로서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실천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인다. 갈팡질팡하는 지망생이었지만, 하루하루 끈기 있게 고민하고 탐구하고 실행했던 그 기록들이 오늘치의 힘듦을 감당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생생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의 끝없는 ‘갈팡질팡’을 읽다보면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는 저자의 삶의 태도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맞다. 요즘 말로 이른바 '중꺾마'라고 한다던가? "중요한 건 하고 싶다는 마음, 멈추지 않는 시도 아닐까?"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현듯 새로운 각오가 마음속을 소용돌이친다.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며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자퇴 소동'을 빚은 저자는 덕분에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도 겸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갑자기 그만 두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하고 느긋하게 하고 싶었던 경험과 활동, 대화와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장 불태워야 한다고 여긴 것이 공부보다 독서였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이 '생각을 계속 써 두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가치관이 많이 변해가더라는 것. 목적을 두었던 변호사라는 직업부터, 법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고, 내가 가고 싶은 또 다른 곳들을 발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로 인해 더 활동적이고 열악한 곳으로 가고 싶어졌고, 사람이 생에서 단 하나의 직업만 가질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고 책에 적고 있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다채롭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일까? 외도(?)도 어느 정도 했는지, 저자의 발걸음은 다시 학교로 간다.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예술과 병행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계속했다는 점을 매우 잘한 일로 생각하는 모습이다. 세상을 공부하고 매일 생각이 맞는 친구들과 모여 세상, 예술,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것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 어떤 것보다 자신다운 모습이었고 아름다웠다고 저자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1년 더 학교를 다녔는데도 또 졸업을 하지 못했다. 정말 '꾸.역.꾸.역.' 다녔다고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2016년 여름이 되어서야 졸업했다. 처음 자퇴를 하겠다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게 2012년이었으니 4년이나 더 학교에 발이 묶여 있었던 셈이다.

이 책은 저자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한 시점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게 생각하고, 직접 행동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자신이 현재까지 걸어온 길을 기록에 남긴 대로 다시 써 '젊은 날의 방황' '청춘의 고민' '삶의 열정' 그 시기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독자들이 얻어갈 것이 많은 책이다. 


저자 : 반지수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던 스물세 살,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이후 수년간 독학으로 갈팡질팡하며 지망생 시절을 보냈다. 희망과 절망, 노력과 번아웃 사이를 오가는 막막한 날들에도, 하루하루 성장해 결국은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다. 저서로 『보통의 것이 좋아』, 『반지수의 책그림』, 『두 고양이와 산책, 사계절 컬러링북』, 그림작가로 참여한 만화책 『너의 인스타-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볼래?』가 있다. 『불편한 편의점』,『위저드 베이커리』,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달팽이 식당』 등 책표지 그림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림책, 만화, 에세이, 화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만들고 싶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평생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

나, 반지수는 그림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한다.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또 만화를 그리며 글을 쓴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될 줄 알았건만 정신 차리고 보니 책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중 대부분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쓰고, 그리는 셈이다. 먹고살기 위해 표지 일러스트를 그렸고 세 권의 책을 그리고 썼다. 『불편한 편의점』,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위저드 베이커리』, 『달팽이 식당』, 『책들의 부엌』 등 표지를 꾸준히 그려왔는데, 감사하게도 작업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출판계로부터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나의 그림으로 그림책, 만화, 에세이, 화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만들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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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는 군주론 - 新譯 君主論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세키네 미츠히로 엮음, 이지은 옮김 / 힘찬북스(HCbooks)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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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술술 읽히는 군주론』은 표제어에서 느껴지는 대로 '쉽게 풀어쓴 군주론'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일본의 저술가 세키네 미츠히로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편역한 책이다. 이를 우리 번역가 이지은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편역자 세키네 미츠히로는 "『군주론』은 지난 500년 동안 꿋꿋하게 지켜온 명성에도 불구하고, 책을 쓸 당시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본문 속 수많은 각주로 인해 동서양을 떠나 현대 독자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워 '제목은 알지만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제한 뒤 "그 점을 고려해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술술 읽히는 군주론』의 장점이며 지향이자 미덕"이라고 밝혔다.

세키네 미츠히로는 책 앞 부분 「엮은이의 말」을 통해 15세기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문화적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격렬하고 복잡한 권력투쟁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메디치가·베네치아·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제국,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교황청, 프랑스,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 다양한 세력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패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 세력들의 다툼의 장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20대 후반에 피렌체 공화국 정부 관리로 채용돼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요직을 역임했다고 세키네 미츠히로는 설명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외교관으로 다른 나라에 나가 군주들과 직접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 마키아벨리는 정부 수집과 협상을 잘하는 매우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았는데, 정국 변화를 계기로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한 시기 실의에 빠져 피렌체 근교 산장에서 은둔생활 중 재기를 노리며 쓴 것이 바로 『군주론』이라고 집필 배경을 덧붙인다.

『군주론』은 결국 군주의 통치기술을 다룬 것인데, 군주가 국가를 통치·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에 대한 의지·야심·용기가 있어야 하며, 필요하면 불성실·몰인정·잔인해도 무방하고, 종교까지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책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로 인해 후세에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게 된 권모술수주의를 주장하였다 하여 비난의 대상 및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분열과 외국의 간섭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진 이탈리아를 강력한 군주에 의하여 구하고자 한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의 발로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근대 정치학을 개척한 획기적 문헌으로 높이 평가되는 대목도 눈여겨봐야 할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상적인 군주에 관해 논한 『군주론』을 어떻게 21세기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가 세키네 미츠히로의 관심사였다. 즉 현대 사회에 적용해 보면 '리더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주제라고 판단, 『군주론』 속에는 리더에게 필요한 통치술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란 점에 착안해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비결을 중심으로 풀어쓰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주변의 복잡하고 냉혹한 현실을 '나'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제공하겠다는 점이 세키네 미츠히로의 집필 취지이다.

독자도 『군주론』을 이미 읽었지만 발췌 번역본인 데다, 세키네 미츠히로가 언급한 대로 그냥 '교양 필독서'로 별 생각 없이 읽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냉혹한 정치가, 권모술수의 군주의 기억보다는 우리 조선 시대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느낌이었다. 또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쓰인 『손자병법』보다도 덜 감동적이었고, 당시 피렌체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뚫고 나가는 이른바 도시국가의 작은 군주 역할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만 받았던 기억이 난다.

또 권모술수의 외교책을 말할 때 중국의 귀곡자(鬼谷子)도 떠오르는데 『귀곡자』 역시 권모술수를 말하지만, 후대의 구양수가 밝힌 바와 같이 "시에 따라서 적절하게 변화하고, 일을 가늠해서 적당한 방책을 내는 바는 족히 취할 바가 있다"라고 평가한 점을 이해한다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보다 1,700년이나 앞선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도 많고 학자들도 많은 시대였다. 도시국가 피렌체보다 훨씬 복잡한 정치 세력들이 수백 년 간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국가의 명멸로 '군웅할거' 시대였다고도 표현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를 비롯, 노자·장자·묵자·순자·손자가 국가 부흥의 토양으로 군주들의 정치를 도왔다. 학문으로서도 거의 모든 토대가 갖춰지고 국가의 틀을 완성시키는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이들 학자들의 학문과 이론은 국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자처했고, 또 성숙해졌다. 이 가운데 『귀곡자』의 저자 귀곡자는 전국시대로 알려진, 2,300여년 전 중국에서 주로 전쟁에 필요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다만 손자의 『손자병법』과 다른 점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재주는 모두 동원된" 전쟁 이론이라고 치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수단까지 모두 동원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이 책 『술술 읽히는 군주론』은 모두 2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3장 「권력을 타인에게 준 자는 자멸한다」, 7장 「우연히 군림하게 된 자」, 10장 「‘자력 있는 집단’을 만들려면」, 17장 「자비롭기보다 ‘냉혹’하라」, 18장 「‘야수’와 ‘인간’, 두 얼굴을 사용하라」, 24장 「 ‘나라를 빼앗긴 자’의 공통점」, 26장 「어려울 때야말로 ‘전진’할 때」 등 엄혹한 군주를 독려하는 조항이 많다. 뿐만 아니라 14장 「‘노고’에 익숙해져라」, 15장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 아랫사람에게도 자비보다는 엄격한 군주를 강조한다. 

3장의 경우 「권력을 타인에게 준 자는 자멸한다」란 제목의 원제는 '혼성형 군주국'이다. 혼합형 군주국에서는 새로운 군주제의 공통 난제로 정변이 일어난다. 공통 난제란 '지배자를 바꾸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나아진다'라는 민중의 믿음이다.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지금까지의 지배자에게 맞서지만, 그렇게 하면 좋아지리라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백성들은 결국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나빠졌을 뿐이라고 깨닫게 된다. 정변이 일어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새로 군주가 된 자는 군사력을 이용하거나 많은 것을 획득하기 위한 파괴행위로 백성에게 특정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해를 입은 사람들은 군주의 적이 된다. 또 군주의 자리에 올려준 사람들조차 기대에 어긋났다고 실망하여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강경한 조처를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쳐들어간 지역의 주민들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잘 성사되지 않는다고 마키아벨리는 경계하고 있다.

7장 「우연히 군림하게 된 자」의 원제는 '타인의 힘과 운으로 얻은 새로운 군주국'이다. 책에 따르면 단지 운이 좋은 것만으로 군주가 된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한다. 군주의 자리에 직행했기에 도중에 장애물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온갖 어려움에 부딪힌다. 돈이나 남의 후의로 나라를 물려받은 자도 마찬가지다. 다레이오스 왕이 자기 신변의 안전과 영광을 위해 직접 군주로 모신 자들이 그 예다. 즉 그리스의 이오니아나 헬레스폰토스의 도시국가를 닽게 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지배권을 물려준 인물의 의지와 운의 덕을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의지도 운도 매우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다고 마키아벨리는 조언한다. 그들은 애초에 일개 시민에 불과했기 때문에 웬만한 천재이거나 어지간히 수완이 있지 않은 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명령을 내려야 할지 알지 못해 군주의 지위를 어떻게 유지할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편이 되어 충성을 맹세하는 병사들도 없어 지위를 유지할 힘도 없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갑자기 만들어진 나라는 태어나자마자 다 성장해 버리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없으므로 첫 번째로 맞는 악천후를 견딜 수 없다. 갑자기 군주에 오른 사람은, 웬만한 수완이 없는 한, 운으로 자기 품에 굴러들어 온 것을 계속 보유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지금까지 선대가 쌓아 온 토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지점에서 역량에 의해 군주가 되거나 운에 의해 군주가 되는 두 가지 방법에 있어서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예를 소개한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체사레 보르지아다. 프란체스코는 적절한 수단과 훌륭한 수완으로 일개 시민에서 밀라노 공이 됐다. 밀라노를 손에 넣는 데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쉬웠다. 한편 민중으로부터 발렌티노 공으로 불리던 체사레 보르지아는 아버지의 운 덕분에 나라를 손에 넣었지만, 그 운이 떨어져 나가자 날라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무력이나 운에 의해 굴러들어 오게 된 영토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사려 깊고 뛰어난 수완을 가진 인물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이에 마키아벨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리 토대를 마련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큰 수완이 있으면 나중에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만 토대를 마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에는 위험이 따라다닐 것이란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여기서 발렌티노 공이 취해온 행동을 소상히 들여다보면 그가 향후 권력에 대비해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논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새 군주로서 발렌티노만큼 뛰어난 본보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마키아벨리는 역설한다.



이 책에는 뒷 부분에 도쿄대 명예교수의 「로마인과 함께, 로마인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란 제목의 〈해설〉을 싣고있다. 마키아벨레와 『군주론』에 대한 별도의 해설이다. "16세기 초 피렌체 교외의 산장에 은거한 남자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무꾼들의 일을 둘러보고, 점심때가 되면 선술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잡담하고 노름에 빠진다. 하지만, 남자는 밤이 되면 정장을 입고 옛사람의 책을 펴서 읽는다. 이 남자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를 배우 상인 아버지의 장서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서적과 치하게 지냈다. 특히 고대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책에는 마음에 끌리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피렌체는 인문주의 풍조가 만연했고, 대부호 메디치 가문의 저택엣는 인문학자나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고전의 교양을 독학으로 익힌 남자는 그러한 정통파의 모임에서 한데 어울리지는 않았다."(p.217~218)

〈해설〉의 제목, 책과 저자, 시대 배경, 무대 장소 등 모든 것이 '로마 제국'과 관련이 돼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책 『군주론』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당연한 저서가 아닌가 생각된다면 독자만의 고집일까? 조그만 도시 국가 로마는 유럽 대부분뿐 아니라 아프리카 일부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과 앞서간 정치 제도, 시민의 권익 중심의 법 제도 등으로 수백 년, 동로마 제국까지 합친다면 2,000년이 넘는 기간 지속됐고, 특히 유럽의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강국들은 자신의 나라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며 로마 제국을 앞세웠다. 왕정 국가뿐 아니라 민주정이든 독재정치든 가릴 것 없이 로마의 문명을 자신들이 이어받았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심지어 대영 제국의 식민지로 출발했던 식민지 미국, 독립 전쟁 후 정식 독립해 20세기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21세기도 주도한다고 주장하는 미국 역시 로마의 많은 것을 본보기로 삼았다. 우리가 아는 로마는 사실 민주적 정치보다는 군사 강국으로 발전해 이웃 국가를 차례로 복속시킨 군사 강국이 기틀이 되었다. 당연히 많은 장점과 앞서가는 정치 의식을 가진 인물이 많았다는 점도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관용과 포용마저도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한 후 베풀어진 것이란 점에서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공과 사가 있는 제국이다. 이 책 『술술 읽히는 군주론』 및 「로마인과 함께, 로마인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이란 제목의 〈해설〉 역시 로마 제국을 동경하는 시선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한 번쯤 우리 입장에서 되돌아보는 것도 이 책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저자 :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Niccolo di Bernardo dei Machiavelli)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탁월한 정치이론가. 이탈리아(피렌체)의 관료이자 외교관이자 군사 전략가였으나, 말년의 저술로 정치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서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록은 많지 않은데, 변변치 않은 교육 환경에서 홀로 역사와 정치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청년 시절에는 말직으로 근무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80인회의 사무국의 서기에 임명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곧 10인군사위원회의 사무국장과 서기를 맡았다.

1492년 피렌체가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사망으로 통치력 부재 상황을 맞았을 때,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외교관으로서 국운이 풍전등화인 피렌체를 살려내려고 강대국 사이를 필사적으로 오갔고, 국제 정치의 민낯을 낱낱이 목격하며 ‘강한 군대, 강한 군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교황청에 사절로 파견갔다가 만난 발렌티노 공작(체사레 보르자)에게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줄 강력한 신생군주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체사레는 맥없이 병사해버렸다. 마키아벨리는 시민군 양성을 추진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메디치 가문이 군주로 돌아오자 공화국의 일꾼이었던 죄로 감옥에 갇혔다. 이후 특별사면을 받고 나와서 새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필요한 경우에는 비도덕적인 수단도 행사해서 평화를 지키는 강력한 지도자가 되어라’는 조언을 담은 『군주론』을 썼다.

1506년에 피렌체 시민군의 조직을 계획하여 이듬해 9인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어 피렌체의 정복 전쟁에서 군대를 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1512년에 공직을 떠난 그는 산 카스치아노 근처의 저택에서 집필하며 루첼라이 가문의 소유인 오르티 오리첼라리 정원에서 여러 문인을 만났다. 이때 그는 메디치가의 요청을 받아 주로 통치론에 관한 글을 써 권력자들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1527년에 사망했다.

대표 저서로는 『군주론』을 포함하여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결혼한 악마 벨파고르』, 『리비우스 역사 논고』, 『만드라골라』, 『우리나라의 언어에 관한 연구 또는 대화』, 『이탈리아 10년사: 1494~1504』, 『전술론』, 『카피톨리』, 『클리치아』, 『트리시노』, 『프랑스 사정기事情記』, 『피렌체 정부 개혁론』, 『피렌체사』, 『황금 나귀』, 『후회에 대한 권고』 등이 있다.


편자 : 세키네 미츠히로

도쿄도 태생의 번역자.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졸업. 역서로는 《세계 행복 기행》, 《불꽃과 분노―트럼프 정권의 내막》, 《힐빌리·엘레지―미국의 번영으로부터 남겨진 백인들》, 《필수 불교―교리·역사·다양화》 등이 있다.


역자 : 이지은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비즈니스 통·번역가로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2년여 전부터 출판 번역에도 발을 내딛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독자에게 좋은 작품을 전달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번역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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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류학 강의 - 사피엔스의 숲을 거닐다
박한선 지음 / 해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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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anthropology)은 생물로서의 인류와 그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전적 의미로,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의식주를 비롯하여 사회구조·관습·종교·예술·과학 등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을 통틀어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생활방식과 그 소산 일체를 가리킨다. 인류학은 문화를 지니는 동물인 인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이지만, 실제의 연구에서는 생물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각각 별개의 관점과 방법이 원용된다고 한다. 인류학의 싹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진화인류학 강의』에서 저자 박한선도 "인류학은 '인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anthropos)와 '학문'을 뜻하는 라틴어 '로기아(logia)'의 합성어이라고 설명한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인류+학문'이라는 뜻의 '안트로피아(anthropia)'라는 단어를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이 말이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스나 로마 시절에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 중세 시대 이후에 처음 쓰인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 역시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인류에 대한 말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안트로폴로고스(anthropologos)가 가장 유명한 표현이라고 저자는 덧붙이고 있다.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럽인들의 해외진출(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개발 시대)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미개인이나 미개사회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19세기에 진화론이 대두되자 화석인류와 그 문화에 대한 연구가 급속한 진전을 보였다는 게 인류학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즉, 다른 동물과의 비교를 통한 생물로서의 인류라는 인식이라든지, 자신들과는 피부색 ·얼굴 생김새 ·언어 ·풍속 ·습관 등이 다른 이민족에 대한 기록 등에서 인류학의 시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쳐 이 학문이 근대과학으로 발돋움하는 기초는 18세기에 들어와 인류를 동물분류체계에 포함시키고 인종의 분류를 시도한 린네와 인류의 특성이나 인류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노력한 블루멘바흐 등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뷔퐁, E.다윈에 의해 생물진화의 사상이 움트는 한편, 절멸동물의 화석과 함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이것이 홍적세 인류의 존재와 인류진화의 증거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C.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고서부터다.



독자는 짧은 지식이어서 '진화인류학'의 정의나 명확한 발전 과정을 설명할 수 없지만, 오늘날 인류학은 거의 진화인류학과 동의어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존 인류학은 모두 진화인류학의 발전에 흡수돼 설명되는 듯하다. 이 때문에 독자는 인류학의 역사를 C. 다윈의 〈진화론〉 이후와 이전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진화인류학 강의』에서도 대항해 시대 이후 19세기부터는 유럽 학자나 연구자들이 직접 세계 각지로 가서 관찰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C. 다윈 역시 그 중의 한 명으로 저자 박한선은 지적한다. 이때 인류학자나 연구자들은 조사하려는 곳에 가서 현지인과 같이 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고 저자는 귀띔한다.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생태와 문화, 관습, 체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수집한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하는 인류학자를 '안락의자 인류학자'라고 비웃기도 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다윈은 HMS 비글호를 타고 무려 5년 동안 세계를 일주했다.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티에라 델 푸에고의 원주민을 만나 조사했고, 1832년과 1833년 각각 방문해 그들의 생활 방식과 사회구조, 환경 적응 전략 등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다윈은 그곳의 원주민이 지닌 행동 양상과 문화적 관습이 혹독한 기후 조건에 적응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진화인류학자라고 말한다. 18세기 이후 인류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네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뉘어진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적 현상을, 고고인류학은 유물과 민속자료를, 언어인류학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집중한다.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교집합이 존재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뿐만 아니다. 인류학은 이론적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료인류학, 정치인류학, 비즈니스인류학 등으로 응용 분야가 확장되고 있다. 심지어 범죄 수사나 전자제품 개발과 같은 영역에서도 인류학적 지식이 폭넓게 활용된다. 

진화인류학 역시 인류학의 다른 분야와 긴밀하게 연결되며 발전해 왔다.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이들 네 가지 주요 분야와 파생된 응용 분야에 대해 열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진화인류학이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어떤 세게관에 따라 인간을 이해했을까?



'신의 세상'이었던 중세 유럽의 세계관, 《성경》에 등장하는 창조론적 세계관을 저자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자연의 사다리」 세계관에 대해 적지않은 분량의 설명을 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 이전에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겨진 「자연의 사다리」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 대한 연구를집대성했고, 그의 사상은 이후 기독교 교부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나 이시도루스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통합했다는 말이다. 이는 겉보기에는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사회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반영해 왕과 교황이 인간 사회의 최고 지위에 있고, 농민과 노예가 가장 하위에 있는 인간 사회의 거대한 사슬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후 인류학은 기독교 세계관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제시하며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발전은 이른바 '인종'의 구분을 함으로써 비과학적 주장으로 주목했지만 오늘날에도 이 인종 구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을 보면 학계 밑에서 보는 또다른 시각이 존재함을 증거하고 있다. 

앞서 독자는 인류학은 다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생각을 독자가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의 세상에서 본 인간과 인간 중심의 세상에서 본 인간이 같이 보였을 리 없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학자가 저지른 실수는 오늘날 '인종 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인종의 차이를 비과학적 설명이어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황인종은 정직하지 않고, 흑인종은 게으르며, 백인은 문화적이고 문명적이란 주장이다. 칼 폰 린네는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동식물 분류학을 창시한 위대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이지만 인종 구분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이후 러셀 윌리스와 다윈이 등장으로 인류학은 대전환점을 맞는다. 두 사람은 진화론 특히, 종의 변화를 가져오는 주된 기전으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생존하여 번식에 성공하고, 이러한 특성이 세대를 거쳐 대다수의 개체에게 전해지면서 종이 진화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바로 자연선택 이론이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자연선택 이론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다양한 지식과 표본을 체계적으로 정리학 박물학이 아니었다면, 진화이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유럽 곳곳에 건립된 박물관, 동물우너, 식물원은 전 세계에서 모이 다양한 동식물 표본으로 가득 찼다. 단순히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넘어서, 실제 표본을 관찰하고 해부하며 토론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체계적인 과학 활동이 가능해진 환경이 조성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진화인류학이 만사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나온 인류, 인간에 대한 연구 중 가장 과학적이고 설득력이 높다고 인정된 학문이다. 결국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을 연구하다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안 것처럼 하는 오만, 그리고 자신의 분류나 이론을 과신하는 편견이 걸림돌이다. 우생학도 이런 과학적 생물인류학 연구에서 자라난 '악성 종양과 같은 것'이란 저자의 표현도 공감된다. 피부색에 의한 현대 과학은 인종 차별의 근거를 희석시켰지만 이론이 낳은 편견은 아직 인간 특히 백인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탓에 오늘날까지 미해결 문제로 남아 사회문제화 됐다. 피부색에 관한 현대 과학에 따르면 피부색은 주로 지구상 위도에 의해 결정된다. 즉, 햇빛을 쬐면 일어나는 비타민 D를 합성하는 작용과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진화적 변화가 피부색을 다르게 만들 뿐, 피부색과 인종은 별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북유럽인의 피부가 하얀 것은 고위도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인, 로마인, 슬라브족 등의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짙은 것은 적도 근처의 태양빛이 더 강한 곳에 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이 갖는 권위는 때때로 편견, 혐오, 폭력적인 범죄나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경계한다. 이러한 권위는 과학의 성과와 더불어 위험성도 확대시킬 수 있는 이중성을 지닌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오늘날의 진화인류학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그것들의 특성들이 만들어낸 집단의 역사를 과학적 관점으로 객관적으로 연구한다. 진화인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검증과 반성의 과정을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몸에 익힌다는 의미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진화인류학에 관한 대중적 편견은 지난 200년 동안 진화인류학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와 근대를 거쳐 오래도록 지속된 인간적 속성, 즉 여러 지역과 문화의 인구 집단을 제멋대로 분류하고, 우열을 나누고, 위계를 만드는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대학 신입생이 읽기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가 심혈을 쓴 이 책은 단순히 진화인류학을 설명하기보다는 무지-편견-혐오-증오의 연결고리에 의해 나타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 나와 다른 사람을 동떨어진 존재로 폄하하고 사람의 우열을 나누고 싶어하는 본성을 깨뜨리기 위한 가장 확실하 방법인 진화인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존재한 지도 어느덧 수백만 년, 그러나 여전히 인류는 우리에게 연구 대상이다. “아기는 왜 이렇게 연약하게 태어날까?” “사람은 왜 한 연인과 오래도록 사랑할까?” “구름을 보는데 왜 그리운 얼굴이 떠오를까?” “왜 슬플 때 먹어도 케이크는 달콤할까?” “세상엔 왜 늘 일정 비율의 사기꾼이 존재할까?” 질문은 끝이 없고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은 너무 많다. 때로는 자기 마음조차 안갯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진화인류학은 이해되지 않는 인간성도 납득할 만한 현상으로 해석하여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는다. 분노, 죄책감, 사이코패스, 사기꾼의 기만 전략처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감정과 행동도 ‘생존을 위한 진화의 일부’라는 설명은 삶의 모든 것에 ‘이유’를 찾아야 안심하는 인간에겐 유용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진화인류학의 숲에 들어서기 전에〉, 2부 〈사피엔스가 걸어온 수백만 년의 시간〉, 3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 4부 〈믿고 속이고 사랑하는 사회〉 등이다. 1부는 진화인류학의 기본 개념을 다룬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던 당시의 이야기와 급격한 지질 변화, 빙기와 간빙기를 오가는 기후 변화 등에 적응하고 때로는 이동하며 살아남은 인류의 진화 전략, 자연선택과 성선택이라는 진화론의 굵직한 개념까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들을 담았다. 2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까지 이어지는 인류의 진화사를 담고 있다. 다양한 인류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지구 곳곳으로 이동하는 장대한 역사의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거나 더 나은 곳을 향해 이동해 온 인류의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

3부는 진화 과정에서 변화한 인간의 몸을 다룬다. 두 발로 걷게 되면서 손의 자유를 얻고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부터 몸에 비해 큰 뇌를 갖게 되면서 언어 등 복잡한 사고를 하게 된 과정까지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추렸다. 4부는 인간의 마음과 사회, 문화의 발전을 설명한다. 사랑과 애착 등 인간의 마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도덕과 종교를 통해 유지해 나가는 인간 사회까지 다루어 인간성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진화인류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대중서가 없는 상황을 고려해 청소년도 읽을 만한 책으로 풀어쓰는 데 특별히 신경을 썼다. 저자 특유의 이야기하는 듯한 어투 덕에 수백만 년의 인류 진화사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실제 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 내용과 관련된 토론 질문을 뽑았으며, 고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난이도를 조정하는 작업까지 거쳤다. 그 결과 14개의 장 끝에 〈토론해 봅시다〉를 마련했고, 대학 수업에서 실제 활용했던 영상 자료를 QR코드로 수록했으며, 내용 이해를 돕는 다양한 이미지까지 담았다. 부록에서는 〈한국의 고고·자연사 박물관〉을 소개하고 있어 책이 아닌 현장에서 인류의 발자취를 만나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진화인류학이 밝혀낸 인간성에 관한 진실은 셀 수 없이 많다. 앞서 언급한 피부색으로 인종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 외에도, 이기심 대신 이타심이 생존에 유리할 수도 있다는 발견, 대체로 합리적이지만 때로는 말도 안 되게 비합리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모순까지. 이처럼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혐오와 폭력, 비인간화와 젠더 갈등 등 다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사회문제 역시 더 원활하게 풀어갈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진화인류학이라고 독자가 믿는 이유이다. 저자는 “과학적 증거에 기반한 진화인류학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 즉 나와 다른 사람을 동떨어진 존재로 폄하하고 사람의 우열을 나누고 싶어하는 본성을 깨뜨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라고 역설한다.


각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고 주고받은 도움의 상대적 가치를 계산할 수 있다면, 장기적인 협력 관계가 진화할 수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인지적 능력이 있고, 수명도 길며(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어야 하므로), 집단을 이루고 사는 종에서 흔히 이러한 지연 시간 상리공생이 일어납니다. 주고받은 도움의 상대적 가치가 서로에게 큰 차이가 나는 상황이라면 좀더 강력한 협력이 일어날 수 있고요.(p.262)


저자 : 박한선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그리고 호주국립대학교 인문사회대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병원 신경정신과 강사, 서울대학교 의생명연구원 연구원, 성안드레아병원 과장 및 사회정신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발자국』, 『인간의 자리』, 『휴먼 디자인』, 공저 『재난과 정신건강』, 『감염병 인류』, 『단 하나의 이론』, 『통합과 번영의 환상도시 사회학』, 역서 『진화와 인간 행동』, 『여성의 진화』, 『행복의 역습』, 『센티언스』 등이 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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