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씨의 은퇴 이후 인생 리셋 - 인생 1막 2장, 지금부터 준비하고 시작하라
정창호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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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대 트렌드의 하나로 부각된 '꼰대'. 50을 넘긴 중년 중 주로 남성에게 붙여지는 어감 나쁜 별칭이다. '꼰대'는 지금 꼰대가 돼버린 1970년 이전의 출생자를 이르는 말이다. 물론 70년 이후 모든 남성들이 다 꼰대로 불리지는 않는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부터 있었던 단어다. 그때는 주로 선생님의 별칭으로 '융통성 없고 원칙만을 강요하는 선생님'들에게 붙여준 말이다. 독자도 모범생은 아니어서 그런 단어를 가끔 사용한 기억이 있다. 학교 친구들끼리 '꼰대 선생님' 험담을 할 때 '그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험담하면서 깍듯한 호칭을 붙이지 않을 터. 꼰대 선생님들이 지적하는 것은 학교 생활의 기본이다. 점심 도시락을 1, 2교시 끝나고 먹어치우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 수업시간에 바른 자세로 임할 것, 고운 말을 쓸 것 등 학업 외적인 것을 발견하는 즉시 지적하며 혼내는 선생님에게 붙여졌다. 그리고 학창시절 이후 자연스럽게 그 말은 안 쓰게 되고, 사회에서도 여간해선 들어보지 못해 사문화된 단어쯤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꼰대'가 화두다. 어원 모를 그 말이 이제 다시 화두에 오르고 비아냥 섞인 호칭 '꼰대'는 누굴 가리키는가?



남자 나이 50이면 대략 은퇴 이후를 생각해야 하고, 가정의 화목에 충실하고 집중해야 할 나이다. 공자는 '지천명'이라 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선 '꼰대'다. 지금도 정확한 어원을 모르고 어느 계층이나 어떤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말인지 잘 모른다. 그러다 불현듯 이 책을 만났다.

『꼰대 씨의 은퇴 이후 인생 리셋』. 제목부터 눈에 확 들어온 탓이다. 책을 쓴 사람이 50 넘은 중년의 남자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버티어오던 직장 생활이 끝나는 시점을 헤아리기 시작할 때라는 것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백세시대'라는데 이제 막 절반 살고, 후반전 휘슬도 불지 않았는데 비아냥거리는 뉘앙스의 별칭이 붙는다는 건 아무래도 억울할 일이다. 물론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젊은 세대들도 아무에게나 그런 호칭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루 널리 오래 쓰이면 그것은 그들의 대명사가 된다.





50세면 분명 인간 수명이 늘어났다 해도 노화가 늦어진 것은 아닌 만큼 중년으로 분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건강관리를 잘하고, 아직도 20~30년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꼰대'라고 통칭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발음상 매우 듣기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이듦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나이듦을 이르는 말이라고 신경 꺼도 그만이다. 굳이 회피하지도, 나서서 막을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고 당면문제로 인식하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라고 독자는 믿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베이비붐 세대의 퇴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퇴직한 꼰대 씨의 푸념

2. 소중한 것들을 챙기며 살기

3. 슬기로운 인생 후반전 살기

4. 공평한 인생과 소소한 일상





꼰대 씨의 대부분은 노후에 대해 준비할 겨를도 없이 퇴임이라는 절벽에 매달리게 되었다. 가진 것도 없고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끼여서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베이비부머가 누군가? 그들은 절대 주저앉는 법을 모르는 세대 아닌가? 왕년의 그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여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한가운데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퇴직 후의 갑갑한 현실을 숨김없이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세대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나누고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꼰대 씨가 살아온 격동의 세계를 가감 없이 풀어내어 “맞아, 그때는 그랬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비록 한때는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으나 지금은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아내를 눈치를 보고 있는 신세가 된 퇴직자들. 과연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소일하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날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해 함께 고민자고 제안한다.





사실 시간을 열심히 살아온 중년들은 퇴직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어느 정도는 세상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법도 잘 안다. 개인 각자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퇴직금이나 연금, 저축 등을 착실히 관리해온 사람이라면 창업을 준비할 수도 다다. 예전에는 회사를 때려치우는 순간, 화려하게 내 일을 하리라 준비하고 또 준비했겠지만 막상 퇴직하면 행동에 옮기기 어렵다.

또 막상 다른 일을 시작하려니 현실과 생각과의 괴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그래도 설마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계산기를 굴리다가 결국 마음을 접고는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별 볼일 없이 막막하게 보낼 수는 없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꼰대 씨는 오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오라는 데 없어도 집을 나선다. 집 아내나 자식들에게 눈치 보이는 것 같아 나서지만 막상 뽀족하게 갈 데도 없고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일을 생각해봐도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처럼 마땅한 다른 일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마냥 놀다가는 인생이 훅 지나갈 수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인생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저자는 일단 건강부터 챙기려면 돈 들지 않고 가장 효과를 많이 볼 수 있는 걷기부터 시작하자고 권유한다. 다리의 근육이 붙으면 아령이라도 규칙적으로 들어 팔의 힘도 기르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꼰대 계급은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 건강해야 하기 때문에 저자의 권유는 시작부터 좋다.

"이제는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볼 줄도 아는 여유가 생겼다. 인생은 오직 대로만 있는 것이 아닌 작고 예쁜 오솔길도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는 굳건한 의지도 좋다. 그러나 잠시 옆으로 벗어나 보고 내가 좋아하지 않던 취미도 관심을 가져보자. 남들이 좋아하는 것도 기웃거려보자. 지금까지 내가 갇혀 있던 모습에서 이제는 조금씩 벗어나서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 삶을 살아가자.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여유가 있는 윤택한 삶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본문 중에서)





꼰대 씨는 가끔 생각한다. 나도 돈이 많고 배경이 있는 집안에서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평생 고생을 해서 신도시 아파트 하나 겨우 장만한 것이 고작이다. 별다른 인맥도 신통치 않아서 회사에서도 조기에 명퇴당했다. 사업을 하려 해도 크게 동원할 만한 주변이 변변치 않다. 결국은 투자해봐야 손실이 빤한 곳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시합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 하늘만 쳐다보고 한탄을 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세상이 이러하다 해도 이제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다. 남만 부러워하면서 슬픔에 젖어서 그냥 주저앉기에는 너무 슬프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꼰대 씨에게 건강을 특별히 주문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든 현재의 삶을 지속하든 건강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건강해지려면 걷는 것이 만병통치약이니 무조건 걷고 먹는 것을 잘 관리하라고. 아울러 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머리를 많이 쓰고 좋은 취미 생활을 찾아 즐기며 무조건 웃으라고 권한다. 또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한 해 동안 지출의 가장 큰 비중은 ‘나’였다고 답변한댄다. “나를 위해 지출할 때 하나도 아깝지 않다”라는 의견도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젊은이들은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소비를 아끼지 않는 자아만족형 소비 태도를 지니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의 꼰대 씨들은 가족들을 생각해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도 가격표를 보고 슬그머니 내려놓고 살아왔다. 좋은 옷, 좋은 신발을 몰라서 사지 않는 게 아니라 가격이 겁나서 사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녀들을 위해 써야 할 돈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아내의 옷이나 만족을 위한 소모품은 최대한 지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꼰대들은 습관이 돼 으레 그렇게 한다.

저자는 같은 고민을 안고 살고 있는 대부분의 꼰대 씨에게 한평생 경제활동을 하여 가족을 부양했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말자고 당부한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하자. 또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는 것도 권하고 싶다. 아끼는 것도 좋지만 쓸 때 쓰는 것도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라고.


저자 : 정창호


경기도 양주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성균관대학교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했다. 육군중위로 예편후 현대차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20여 년간 중국 광동, 상해, 북경 등에서 현지 근무를 했다. 현대차의 중국 진출 초기에 오토바이를 타고 차를 팔러 다니면서 중국 시장을 개척했다. 30년의 직장생활을 끝으로 퇴직하였고 지금은 모범 백수의 생활을 힘차게 이끌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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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야생에 대하여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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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산다. 자신의 가치관, 인생관, 환경, 위치에서 오로지 삶을 위해 최선을 노력을 기울이며 산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산다'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이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은 죽는다. 삶을 이어가기는커녕 이내 죽는다. 죽으면 번식을 할 수 없고 마침내 멸종된다.

이 같은 생명 유지는 인간의 삶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살아있다' '살아낸다' '살아남는다' '살아간다' 등 수많은 표현이 있다. 인간에만. 인간은 지능과 언어로 삶의 각기 다른 모습을 표현할 때도 다르다. '살아있다'나 '살아간다'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들린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살아낸다' '살아남는다'는 불가능할 것 같은 환경이나 역경을 딛고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읽힌다. '힘든 삶'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삶을 계속할 수 있은 상태임을 말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동물의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에 비해 신체적으로 매우 열악한 조건의 미물마저 삶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내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식물은 삶의 터전을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오롯이 그 자리에서 삶을 위해 인간의 눈에 보이진 않지만 치열한 노력을 한다는 게 식물학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인도네시아 야생 밀림에서 긴팔원숭이를 연구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우리 주변의 작은 존재들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안내한다. 인공물 사이를 비집고 한 줌 흙에서 피어난 풀로, 얼굴이 있는 모든 동물에게로,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생명과 생명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몇 걸음 앞서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씩씩한 자세로 살아가는 존재의 모습과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묻고 답하는 글과 그림이 이 책 『살아있다는 건』에 담겼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식과 자유를 주는 과학에도 아쉬운 것이 있다. 과학은 개체가 갖는 고유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과학은 그래프에 흩뿌려진 여러 개의 점을 모아 거둔 결론에 관심을 둔다. 개별 특징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은 과학이 하는 일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과학은 생물을 관찰하면서도 ‘살아있음’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살아있다는 건 연구 대상의 기본 조건이요, 보고자 하는 건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쯤은 측량 도구를 다 내려놓은 채 생물을 한없이 바라보고만 싶다. 살아있다는 건 무한히 신기하고 재미있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홀연히 떠나서 말이다.(pp. 16~17)





삶은 흘러간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얼마나 살아있을까? 우리는 종종 살아가는 일에 벅차 살아있음을 잊곤 한다. 오늘의 삶은 다음으로 미루고 멀리까지 계획을 세운다.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정신을 비워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삶 속에 완전히 존재하기 어렵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는 어떠한가. 타인을 이해하며, 사랑하며,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혹시 모를 두려움에 나를 아끼느라 삶 또한 아끼고 있는 건 아닌가.

『살아있다는 건』을 읽으면 살아가면서 생기는 오만가지 잡념이나 쓸데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삶을 경계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철학에서나 고민하는 '인간의 삶'을 수많은 작은 생물들의 삶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야생 동식물들은 이처럼 삶을 우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지금이 있을 뿐이다.

늘 현재를 사는 그들은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실패할지라도 발걸음을 내디뎌 사랑을 찾는다. 저자는 빗속에서 잠자리 한 쌍이 기하학적 모양으로 함께 날며 짝짓기를 하는 모습, 여우가 눈이 눈 속에 점프하며 얼굴을 파묻고 놀이하는 모습,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새인 상모솔새가 추운 계절에도 그 작은 입에서 입김을 보이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 등을 묘사하며 살아있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김산하 저자가 다양한 야생 동·식물과 자연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철학을 31묶음의 글과 그림으로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당신이 살아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잊지 않기를'. 숨 쉬듯 당연하여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리의 생명이 언젠가 죽음으로 영원히 끝날 것이며, 그러므로 소중하고 빛나는 시간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이토록 소중한 삶이니 부디 아끼지 말고 살기를. 혼자가 아닌 함께, 제각기 고유한 모습을 존중하며 같이 살아갈 길을 모색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 가장 본성에 가까운 존재로 사는 길을 알게 되기를. 이 책을 쓴 이유다.

이 책의 세 가지 키워드를 꼽으라면 ‘살아있음’, ‘고유함’ 그리고 ‘다양성’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듯이, 고유성과 다양성 또한 그렇다. 다양함이 있어야 고유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너무 당연하여 간과하고 있던 ‘살아있다는 사실’을 독자가 마주하게 하고, 더불어 자연의 다양성과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유성을 이야기하며 획일화된 우리 사회의 생태계의 위험성을 일깨운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를 구성하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아주 익숙한 개념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다종다양한 생물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왜 이토록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5억 4,000년 전, 캄브리아 폭발이 일어났고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다. 자연에서 다양성은 거의 무조건 나타나며, 생태계의 작동 원리, 진화의 전개 방식 모두 다양성을 핵심으로 발휘된다. 그렇다면 다양성은 자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들인 모인 ‘개성의 세계’다. 자연에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며, 그 수만큼이나 개성 강한 생활 방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남극해에 사는 어떤 물고기들은 혈액에 추운 수온을 견딜 수 있는 일종의 ‘부동액’ 성분이 들어있고, 건조한 사막에 사는 도깨비도마뱀은 피부로 물을 빨아들이는 진귀한 능력을 지녔다. 대머리독수리는 시체를 헤집고 썩은 고기를 뜯어 먹어야 하기에 벗어진 머리를 갖고 있다. 자연에서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갖지 못하는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단일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묻는다. 다수가 만들어낸 획일적인 기준을 나의 기준으로 삼고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누군가는 배제하고 있지 않은지. 혹은 모두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도 그 전형성을 따르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같아지는 것은 어색한 일이며, 생명의 본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생태계는 제각기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는 생물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여러 다른 삶과 잘 맞물려 돌아갈 때 건강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생태계는 얼마나 건강한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생태계는 어떠한지 되묻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들이 많다. 더는 미루지 말고, 과제 하듯 해치우던 삶의 속도를 낮추고,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삶을 되살려야 한다. 살아있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존재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 책으로 그 쉼의 시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에겐 '보장된 내일'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 수 있는 것일까? 나가는 순간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일까? 사실이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이고, 모든 길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마찬가지다.

단지 얼마나 삶에 집중하느냐의 차이다. 챙기고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은 우리에겐 좀 버거운 얘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삶은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간다. 그래서 일상적인 만남도 실은 뛸 듯이 반가울 만한 것이다. 그 반가운 마음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다.(p. 226)

「계산 없는 환대 - 일상적인 만남도 뛸 듯이 반갑게」 중에서


나는 인도네시아 밀림의 높은 나무 위에서 긴팔원숭이와 랑구르원숭이가 서로를 쳐다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마치 “네가 여기 웬일이냐”하는 식의 눈빛을 보내는 것같았다. 어쩌면 긴팔원숭이가 있던 나무에 잘 익은 과일이 많아, 랑구르원숭이가 그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무 기둥에서 다람쥐와 딱따구리가 마주치는 사례도 있다. 둘 다 나무를 자유롭게 타는 전문가들이라 서로의 존재를 잠시나마 인지하는 그 순간이 흥미로웠다. 운이 좋으면 사람과 마주하기도 한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밤중에 탐험하다 만난 바위만 한 두꺼비, 덴마크의 눈 내리는 정원에서 마주친 붉은여우. 내가 영원히 기억 속에 간직할 장면들이다.(p. 242)

「우연한 만남 - 별 볼 일 없는 사이라도 마주치며 응시하기」 중에서





그런데 21세기인 현재 동물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축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웃지 못할 이유는 명확하다. 대부분의 동물축제는 동물에게 축제의 시간은커녕 지옥 같은 시간만을선사하기 때문이다. (...) 대표적인 사례가 생태 도시, 고래 특구를 표방한 울산 고래축제다. 살아있는 고래를 구경한 후 고래 고기를 먹는 고래축제는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상업 포경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축제장과 고래연구센터 앞 수십 개 식당은 안정적으로 고래 고기를 공급받고 있다. 혼획으로 매년 정식 유통되는 고래가 80마리인 것으로 보고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는 불법 유통이 아닐 수 없다.(p. 254)


「동물축제 반대축제」 중에서

언제 살았는지 죽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들. 혼자 고독하게 병치레를 하다 죽음이 가까운 걸 직감하고 어두운 굴속에 제 발로 걸어가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맞이한 많은 동물. 평생 한자리에 박혀 모진 계절의 변화와 사람의 손길을 맞다가 조금씩 시들시들해진 많은 식물. 그리고 이들보다도 더 무명으로 살다 간 곰팡이와 조류와 미생물 들. 눈물 흘리는 이 하나 없이 멋지게 살다 돌아간 생명의 장구한 행렬에 귀를 기울여본다. 나의 때는 언제인지. 그때가 오기 전까지 살아있음에 집중하련다. 생명을 살리고, 음미하고, 칭송하고, 보호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너무나 짧으니까.(p. 263)

「나오며 - 언젠가 죽는다는 건」 중에서





저자 : 김산하


1976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출생했다.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스리랑카, 덴마크 등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자연환경을 접했으며 한국 국제협력단의 단원으로 인도네시아, 페루 등지를 돌며 봉사 활동을 했다. 서울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네시아 구눙할라문 국립공원에서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생 영장류학자로, 예술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과학자다. 생태학자로서 자연과 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할 뿐 아니라 생태학과 예술을 융합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가져 영국 크랜필드대학교 디자인센터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연구원이자 생명다양성재단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지역 사회에서 동물과 환경을 위한 보전 운동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제인 구달 연구소의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프로그램 한국 지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동생이자 일러스트레이션 작가인 김한민과 함께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자연 생태계와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는 그림 동화 『STOP!』 시리즈를 출간했으며, 저서로 『습지주의자』, 『김산하의 야생학교』, 『비숲』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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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 : 오래된 신세계 - 상1 - 시간을 넘어온 손님
묘니 지음, 이기용 옮김 / 이연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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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慶余年) : 오래된 신세계』란 제목으로는 어떤 소설인지 알 수 없었다. 한자 몇 자 안다고 뜻하는 바를 해독할 길이 없었다. '오래된 신세계'라는 옆에 붙은 어구로 어렴풋이 판타지 소설의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이유는 사실 중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더 정확할 듯싶다. 제법 두툼한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지도는 가상의 나라이지만 중국 한복판(중원 동남쪽)에 해당하는 나라이며 북쪽에 있는 북제와 힘을 겨루는 상태에 있다고 보여진다. '시간을 넘어온 손님'은 이 책의 제목이자 상1권의 제목이다. 차례를 읽고서야 이 책이 모두 6권(상1, 2/중1,2/하1,2)으로 이루어졌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전쟁소설이며 영웅소설, 무협소설임을 한참 읽고서야 알 수 있다.

사실 이 책이 유명해진 것은 잘 쓴 작품이어서겠지만 중국의 전 국민들이 모두 보고 즐길 정도로 인기 있는 화제의 드라마 원작 소설이다.

출판사 측도 '삼국지'가 '매트릭스', '서유기'가 '반지의 제왕'을 만났다고 평가할 정도로 재밌고 스케일 큰 소설임을 자랑한다. 특히 해리포터 이후 전 세계 독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판타지 소설임을 강조하고 케케묵은 무협소설이 아님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 책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로 방영돼 굉장한 인기 드라마가 됐다고 한다.





무협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자에게도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두툼한 두께의 여섯권의 분량으로 만들어진 책이니만큼 얽히고설키는 극적 관계도 흥미를 유발시킬 것 같다.

이 소설은 소재도 신선하고 현대에 사는 불구의 젊은이가 옛날 무협 시대로 돌아가면서 성장하는 스토리이다. 책의 첫 장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지도가 나와 있다. 또 당시 세계관에 대한 설명과 등장 인물간의 관계도도 덧붙였다. 서서히 대하소설의 면모가 드러난다. 엄청난 무대를 배경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책은 드라마로 제작하는 빈도가 잦다. 우리 조선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사람이 있어 드라마를 끌어가는 극적 요소가 충분하기에 그럴 것이다.




더욱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식물인간인 주인공이 무협세계의 1살 어린 아이로 모든 기억을 가진 채 돌아간다는 설정은 너무 신선하기도 하고, 쉽게 떠올려지지는 않지만 소설의 상상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움이 점점 고조되는 맛에 책을 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문체도 간결해 옛날 무협지와 우리나라의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에 술술 읽힌다. 활자도 넉넉한 것으로 선택해 책장 넘기는 재미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설정도 전생의 기억이 후세로 와서 열등감에서 성장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도 재밌다. 처음 느꼈던 무겁고 두터운 역사소설의 중압감은 쉽게 벗어났다. 두꺼운 책에 대한 부담감 없이 되려 너무 빨리 넘어가는 속도감에 아쉬울 정도였다.





주인공 판시엔은 앞서 언급한 대로 중증근무력증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이다. 그가 자신의 호흡이 끊기는 걸 느끼면서 다른 세계로 간다.

그 세계에서 정신은 온전히 어른이였지만 몸은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시작한다. 현대에서의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살수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도 뛰어나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 주위엔 조연이 있다. 잠시 우쥬라는 남자가 대나무 광주리에 넣은 판시엔을 등에 업은 채로 살수들을 가볍게 물리치면서 휠체어에 탄 남자와 만난다.

휠체어 남자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판시엔의 엄마와 사이가 좋고, 감사원의 원장이다. 그둘은 판시엔을 놓고 누가 키울 것인지 이야기한다. 둘이 의견차로 싸우는 모습도 우리가 보기엔 유치한 수준이어서 실소하게 한다.

“어린이에게 젖을 먹이고, 글자를 가르치는 일을 네가 할 수 있다는 건가? 네가 사람 죽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뭔데?”

청년은 기분이 나쁜 기색도 없이, 메고 있던 대나무 광주리를 새털처럼 가볍게 밀어 올리며 대꾸했다.

“절름발이, 너도 살인만 할 줄 안다.”

“‘나의 주인’이 오면, 곧 그아이를 어찌할 지 결정한다니까! ‘나의 주인’ 외에 누가 이 알 수 없는 온갖 위험에서 그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거야?!”




결국 ‘담주’라는 곳에서 키우기로 결정 났고, 판시엔은 어느덧 4살이 된다. 애어른처름 자신은 사생아이고, 언제 누구에게든 목숨이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기척 없이 판시엔의 방에 몰래 들어오고,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살수인 줄 알고 그를 기절시킨다. 나중에 그가 판시엔의 사부 페이지에이다.

“너 확실히 여섯 살 맞느냐?”

“철이 일찍 드는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다. 그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미 머리는 현대에서 넘어온 능글스런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애답지 않게 진기가 넘쳐 흘렀고, 사납기까지 하다. 더욱이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헤치거나(결국 토하긴했지만) 모든 게 너무 어른스러워보인다. 페이지에는 독에 대해 모든걸 전수 해주고 떠난다.

그후로 7년이 지나고 집사가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대를 하고, 판시엔의 하녀를 건드린다. 그리고 판시엔이 집사를 혼내고 가르친다.




“경전을 읽었다는 것이 사람을 때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내가 비록 하인들을 학대한 적 없다만, 오늘 네게 귀족 자식이 주인행세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려줄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없구나.”

“난 너 같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너는 아마 내가 사생아라는 내 신분을 잊은 거야. 그래. 내가 사생아라 하자.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고, 너를 때릴 수 있지. 그런데 너는 나를 때릴 수 있니? 내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넌 그냥 받아들이고 참아야 하지. 웃을 테면 웃어 봐. 아니면 내 할머니나 징두로 가서 아버지 둘째부인에게 울면서 일러바쳐. 근데 알아둘 게 있어. 이 후원에 다시는 못 들어와. 내가 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첫번째 암살시도가 벌어진다.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을 바로 알아차린 판시엔은 얼른 토해내고, 독의 출처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이미 죽은 주인. 암살하려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판시엔의 손에 죽게 된다. 16살 되던 해에 우쥬에게 어머니에 대한 사실을 듣게 된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막대한 부를 13살 때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난 뒤 국가의 내고에 돈이 환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쥬는 어머니는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오쥬는 상자를 내밀지만 어떠한 무계나, 타격에도 절대로 부숴지지 않는 상자라고 한다. 그의 말처럼 상자는 단단하고 견고했다. 그것을 열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다. ‘징두’에 있다는 말에 판시엔은 징두로 가는 것은 ‘바람’이 아닌 ‘의무’가 되었다.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징두로 가야 한다. 어릴 적 헤어진 판뤄뤄와도 만날 수 있는 징두.




징두에 들어서자마자 철이 덜된 판스져와도 만난다. 매번 울 때마다 가서 엄마를 찾는 판스져. 그리고 뤄뤄와의 만남. 그리고 판시엔은 징두에서 약간의 활약을 남기기도 하면서 점점 황제와도 대면하게 된다. 그는 열쇠를 얻기 위해 장선생을 모신 회장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시선에 등극한다. 장공주는 장선생을 이용해 범한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당하고 나라에서 쫒겨나기까지 한다.

드라마로 방영됐다니 비교하면서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 물론 책으로 읽는 상상력에 흠이 되겠지만. 오히려 책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읽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읽는 내내 긴장감에 숨도 죽여가며 읽을 정도로 몰입도 최고의 소설이다.


저자 : 묘니


1977년생. 중국 1위 장르소설 작가. 중국의 대표 장편소설 작가 김용 이 후 가장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집필한 작품들은 저자만의 독특한 세계관속에 갖가지 사건들을 알차게 구성하였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복잡한 갈등속에서 한줄기 목표로 끊임없이 달려가는 맛이 그의 소설속에 잘 녹아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주작기〉, 〈경여년〉, 〈장야〉, 〈택천기〉, 〈간객〉. 그의 작품 대부분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중국에서 80억뷰가 넘는 조회수를 달성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 최근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대도조천〉을 마감했다.


역자 : 이기용


경복고, 서울법대 졸업. 중국에 관심이 많다. 중국의 부상에 한국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중이다.

'문화'를 화두로 떠돌다 '묘니'와 친구가 되었다. 영화와 출판에 관심 있다. 〈경여년〉 외에 〈장야〉 등 묘니 작품을 우선 번역할 생각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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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란 무엇인가 - 양심 과잉과 양심 부재의 시대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희상 옮김 / 니케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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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많다. 우선 지능에서의 큰 차이, 그리고 직립하면서 크게 쓰이지 않는 손이 가장 대표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 그리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양심도 크게 다르다. 동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장애물은 모두 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아무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남의 이익을 빼앗아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양심부터 상대를 위해 선행을 하는 고급의 양심도 지녔다.

지금까지 인류가 밝혀온 인간과 동물이 가장 다른 점은 앞서 말한 세 가지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 양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학문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동양의 공자, 서양의 소크라테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모두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예수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인간의 삶의 바탕이고 원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비양심적 인간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를 해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극단적인 예다. 우리는 그들을 '양심 없다'고 일축한다. '짐승 같다'로 말하기도 한다. 법(法)도 양심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탈취한 자는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한다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죄를 저질러도 자수하거나 자백하는 등 죄를 인정하는 행위는 양심에 근거했다고 하여 경감 사유로 둔다. 법관도 '법과 양심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한다.





수천 년간 양심의 존재를 믿고 양심을 기준으로 살아온 인간에게 요즘은 많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양심의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의 머리와 사회의 사정들이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선언’을 하고, 누군가는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심지어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깃털만큼의 양심마저 없는 이들이 있고, 어제의 말과 행동이 오늘 다르고 내일 변하는 양심을 소위 ‘소신’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있다. 저마다의 양심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양심 과잉과 양심 부재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로봇산업의 발전으로 '인조 인간'도 머잖아 탄생할 태세다. '양심 없는 인조 인간'의 탄생은 인류 전제의 재앙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양심은 인간 본성일까를 화두로 내세운 저자의 책은 시의적절한 판단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양심은 사회적 발명인가, 종교, 철학, 국가권력, 심리학, 경제와 산업 등 인간 문화의 다른 요소는 양심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스토아철학과 종교개혁, 근대 국가의 성립과 홀로코스트 등 역사적 사건에서 양심은 어떤 기능을 했을까, 오늘날 병역거부와 보건산업, 환경보호운동에서 공통적인 양심의 역할은 무엇일까, 뇌 활동을 규명하는 신경과학과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드는 로봇공학의 발달은 양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등등 이 책은 양심의 다양한 정의와 가치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이끌며 과연 양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이 책 『양심이란 무엇인가』는 한 역사학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개념의 하나인 양심을 탐구 주제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자신의 사유를 펼쳐온 기록이다. 전쟁사가 전공인 유발 하라리의 사상에 영향을 준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국제정치사 분야 석학인 저자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양심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해,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양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서술되어왔는지를 살펴본다.

1장은 통념과 달리 구약성경과 유대교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양심 개념, 그리고 이를 고안해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로마의 스토아 사상을 다룬다. 2장은 사도 바울의 시대부터 기독교와 양심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살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쳐 기묘한 균형을 이루게 된 종교와 세속 권력의 양심에 대해 알아본다.

3장은 르네상스 시기 정치와 종교로부터 떨어져 나온 양심이 ‘국가’와 ‘의무’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루소와 헤겔과 칸트를 비롯해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사상을 살핀다. 4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양심과 신경증의 관련성에 대한 탐구였음을 환기하며 점차 거대한 보건산업과 맞물려 변질된 정신건강 체계를 돌아본다. 또한 서구 사회와 달리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일본과 중국의 윤리사상에서 양심의 대안을 살펴본다.

5장은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제3제국의 유대인 집단학살에서 양심의 역할을 살피며 명령한 자와 실행한 자, 비교적 적은 수의 저항한 자를 구분했다. 6장은 양심을 세 가지 새로운 우상, 즉 인권, 건강, 환경에 묶어두려는 최근의 시도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7장은 인간은 단순히 화학, 전기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보는 첨단과학의 입장을 살피며 양심의 미래를 전망한다.





저자는 전제한다. 양심은 도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도덕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도덕을 바탕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거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깝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유대교는 신의 명령에 집중해 신의 보상을 기대하고 처벌을 두려워하며 율법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양심의 기초는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 문화’에서 찾아진다. 호메로스의 비극은 선과 악 사이의 충돌보다는 명예와 이득 사이의 충돌을, 자기 비난보다는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하는 굴욕을 더 중시했으나,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데모크리토스의 작품에서 양심이라 불러야 마땅할 충돌이 묘사되기 시작한다. 이후 등장한 스토아학파는 ‘자기 자신을 아는’ ‘이성’을 강조하며 자기 통제를 추구하는 형태의 양심과 비슷한 개념을 선보인다.





책에 따르면 곧이어 기독교가 서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이른바 ‘신앙 시대’가 도래한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교회의 타락에 반기를 든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종교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양심의 가책을 강조함으로써 권위에 순종하게 만드는 방식은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방법이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심지어 정치에서 양심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과 과학혁명 속에서 종교와 양심은 힘을 잃는다. 이신론과 무신론은 기독교 세기를 거치는 내내 신의 보상과 처벌이라는 형태로 양심을 매어두었던 닻을 잃게 만들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루소는 교육을, 칸트는 이성을, 헤겔은 ‘세계정신’과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방한다. 한편 서구에 비해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한 동양 사회에서는 양심의 대안으로 ‘부끄러움’이나 ‘존중’ ‘공경’이라는 가치들이 발달해왔다.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히틀러가 행한 연설이나 대화를 통해 그의 내면을 추적하고,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와 게슈타포를 창설한 헤르만 괴링 등 ‘명령한 자’들의 일화에서 이들이 옳고 그름이나 양심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며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는지 살핀다.

이어서 폴란드에서 최종해결을 자행한 101 예비경찰대대 등 직접 ‘살해한 자’들과 한편에서 유대인을 돕거나 정권 전복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저항한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아이러니도 짚어본다. 우연히 사형집행인으로 발탁된 평범한 남자들은 국가가 부여한 명령과 잔혹한 임무에 익숙해졌으며,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의 가스실을 운영한 정신과 전문의들은 당시 수용자 처리에 새롭고도 인간적인 기법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저항한 자들의 행동도 복잡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유대인을 도운 행동에는 이타주의나 공감능력 외에 나치스에 대한 순수한 증오, 자신의 고결함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라든지 후에 얻게 될 보상에 대한 고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이 세 유형에 대한 고찰을 통해 때때로 양심이 우리의 모든 상식을 비틀어버리고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환기한다.





한편에서는 양심의 근거를 국가보다 더 높은 도덕성에서 찾으며 국가에 저항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있었다. 점차 국가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지배하는 절대적 권리를 개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여러 국제법이 인권의 중요성을 점점 강조하면서 양심이 적용될 여지를 좁혀놓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 곧 양심에 자극을 주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 책은 그중에서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건강 관련 양심과 환경 관련 양심에 대해 살핀다. 오늘날 지대한 가치로 여겨지는 건강과 환경은 양심과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에도 다양한 생각거리가 숨어 있다.

게다가 21세기에 양심은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차원의 의문을 야기하고 있다.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 반응을 관찰하게 되었으니 양심의 생물학적 근원을 확인하고, 양심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질까? 인간을 모방한 로봇의 등장은 인공 양심에 대한 논의를 야기하는데, 전통적인 보상과 처벌과는 다른 방법으로 양심을 흉내 내거나 양심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새로운 기술이 군대와 경찰에 제공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만 저자는 수많은 요인과 상호작용해온 수천 년 양심의 역사를 추적하며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한다. “양심은 거듭 처음에는 작고 자발적이며 해방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해 크고 강제적이며 기괴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양심의 최종적인 대안을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양심의 다양한 가치와 무게가 혼재하는 오늘날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양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크다고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그 목적을 훌륭히 수행해낸 결과물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 기대어 기독교 신학자들이 1500년 동안 주장한 대로 불멸의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곧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심리의 자기보존 능력이다.(독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 호혜의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한다. 호혜성은 필요하다면 보상의 약속과 처벌의 위협으로 인간이 되도록 서로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각자 자기보존을 하는 도덕성의 유일한 기초이다. 이런 도덕성으로 비로소 질서 있는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홉스의 양심 이해로 직접 이끈다. 양심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내면의 진실’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름일 뿐이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새로운 의견에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그것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완고하게 옳다고 고집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이 새로운 의견을 부르는 이름이다.

「7장 기술 시대 양심의 자리」 중에서


지금껏 살펴본 양심으로 미루어볼 때 인간, 어쨌거나 서구인은 아주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인생을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를 들어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볼 때, 서구는 항상 사회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리라. 서구 사회는 개인을 그 사회가 정한 적당한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결속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러나 특히 중국에서 선과 악은 사회의 산물이기에 상대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서구는 다르다. 서구인은 항상 죄책감을 걸어둘 아르키메데스 점을 찾는다. 새로운 우상을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우상은 찾아졌다. 가장 중요한 우상 세 가지는 ‘인권’과 ‘건강’과 ‘환경’이다. 갈수록 쇠퇴하는 종교와 견주어 세 가지 우상은 단호할 정도로 세속적이다. 셋 모두 출발은 미미했다. 특정 개인들이 어떤 특별한 악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행동에 나서며 관심을 모으려 시도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 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대중을 발견했고, 이 대중의 규모가 커지면서 운동이 조직되었고, 셋 모두 실로 거대해졌다. 이 조직화 과정에서 운동은 힘을 키웠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대포를 장착하기에 이르렀다.

「맺는말」 중에서


저자 : 마틴 반 크레벨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부터 히브리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국제정치사 및 군사사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노르웨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방 자문을 맡았고, 세계 유수 언론의 칼럼니스트로서 수백 편의 글을 기고해왔다. 저서로 《다시 쓰는 전쟁론MORE ON WAR》, 《전략의 역사A HISTORY OF STRATEGY》, 《보급전의 역사SUPPLYING WAR》, 《평등: 불가능의 탐색EQUALITY: THE IMPOSSIBLE QUEST》, 《국가의 부상과 쇠퇴THE RISE AND DECLINE OF THE STATE》, 《특권을 가진 성THE PRIVILEGED SEX》 외 다수가 있다.


역자 : 김희상


성균관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독일 뮌헨의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와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헤겔 이후의 계몽주의 철학을 연구했다. 《늙어감에 대하여》, 《사랑은 왜 아픈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등 1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8년에는 어린이 철학책 《생각의 힘을 키우는 주니어 철학》을 집필, 출간했다. ‘인문학 올바로 읽기’라는 주제로 강연과 독서 모임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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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시련의 시대를 맞았다. 시리아 등 난민들이 몰려오고, 이들과의 적대적 관계가 된 일부 극우 세력은 코로나 재확산으로 방역을 위해 국경 폐쇄까지 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국가의 음모'라고 반발하고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각국의 정부는 방역 활동과 방역 조치 완화를 주장하는 일부 시민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계속함으로써 이중고를 겪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EU로 통합을 이룬 유럽은 영국의 EU 탈퇴로 자중지란의 상태에 놓였는데도 이렇다 할 뾰족한 수를 못 찾고 눈앞에 닥친 코로나 방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1968년 '68혁명' 이후 사회 변혁 주도세력이 퇴보하는 현상이라는 진단도 나와 전 세계 질서의 변혁을 예측하기도 한다. 68혁명이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일으킨 사회변혁운동을 일컬으며 '5월혁명'이라고도 한다. 1968년 3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발생하였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직장에서의 평등, 미국의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됐다. 시위대는 정부가 대학교육문제와 유럽공동체 체제하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68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 『유럽을 성찰하다』를 펴냈다. 원제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Faut Dire Que Les Temps Ont Change’인 이 책은 68혁명 이후 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 총체적으로 성찰한 진중한 인문에세이다.

특히 오랜 시간 세계 질서를 주도했던 유럽적 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쇠락했는지, 바뀐 세계 속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 찾기 질문을 여러 방면으로 담았다. 유럽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자,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만하다.

“1964년에 밥 딜런은 ‘시대가 변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대는 변했다.’ 하지만 시대는 예상했던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서문에 나오는 코엔의 시대 진단은 좌파와 우파라는 두 이념세력의 공통된 실패를 주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한 세상에서 앞선 시대와도 완전히 낯선 다른 세상으로 건너왔다. 눈부신 미래를 향한 희망이 있던 자리에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자리를 잡았다. 과거의 좌파가 행하던 비판의 메가폰 역할을 포퓰리즘이 이어받았다. 영원한 현재의 공간에 갇혀서 앞날을 생각하기가 너무나 어렵게 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상황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쌓여온 정신적 외상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짧은 기간 민주주의와 산업 발전을 이룬 우리에게도 곧 닥칠 문제여서 주목할 만하다.





코엔이 보기에 50년 전 1968년 5월 혁명은,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당시 대학가인 라탱 구를 행진하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르주아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문제였다. 하지만 68년 5월 혁명에서는 어떤 이도 처형되지 않았으며 마치 즐거운 파티와 같았다.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빵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부를 차별없이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것’이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파리, 베를린의 신세대들은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노동과 물질의 문제에서 벗어나 사랑과 로큰롤로 이뤄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이 중단되고 기나긴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60년대의 열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며 공장에 잠입했던 좌파 청년들에게는 경악스럽게도, 당시 산업은 섬유, 야금, 조선소의 위기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 세대의 열정은 이렇게 무너졌는데,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에 있었던 첫 번째 트라우마로 저자는 진단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 위기는 68혁명의 반대자들에게 역습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일랜드의 토머스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이 ‘무절제와 악덕’의 사슬을 풀어놓아 젊은 세대들이 ‘지혜와 미덕’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보수주의자들도 같은 실수를 범했다.

68혁명 세대들이 ‘금지를 금하기를’ 원했지만,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모든 사회는 규칙과 금지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불가능을 요구하기’를 원했지만, 인간 조건이 비극적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68혁명에 대한 비판은 ‘무력감과 쾌락주의와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을 한시바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쾌락 원칙에대한 현실 원칙의 설욕으로 보였다. 레이건은 경제가 아닌 도덕적 혁명의 기수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68혁명 세대만큼이나 순진한 환상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도덕성 회복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자동 조절되리라는 게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선 이후 실제로 실현된 것은, 아무런 절제도 없는 가운데 터져나온 부의 불평등과 탐욕의 승리였을 뿐이다. 보수주의 혁명의 이 배반은 우리 시대가 겪은 두 번째로 큰 헛된 기대와 착각이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처럼 급격하게 변화한 것은 인간 욕망의 양극단 사이에서 이뤄진 진부한 왕복운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욕망의 양극단은 보들레르가 ‘이 세상 밖 어디든지’라고 불렀던, ‘스스로에게서 해방되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이 역시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어 있다.2 지난 반세기 동안의 변화는 이처럼 깊이 왜곡된 대립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통에 대한 찬사는 타인 기피와 외국인 혐오증으로 변했고, 기존 질서에 대한 즐거운 이의 제기는 경쟁적인 개인주의 속에 쓰러져 있다. 해방과 전통이 대립하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의 커다란 분열을 목격했다. 관습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인 존재가 된 승자와, 전통이 제공해주지 않는 보호책을 전통에서 찾고 있는 패자가 그것이다.

지금의 포퓰리즘은 바로 이런 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산업사회가 제공해주던 지표를 잃어버리고 끝없는 모험을 펼친 끝에 민중은, 지나친 도덕적 관용주의라며 좌파를 비난하는 한편, 부자가 될 생각만 한다고 우파를 비난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좌파는 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서민들을 탐욕의 제단에 갖다 바쳤다.”(104p)

마침내 민중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의 종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동계급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넘어간 것은 68세대의 희망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저자에 분석에 따르면 이탈리아 포퓰리즘 운동에는 엘리트 혐오라는 위를 향한 증오, 즉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키는 급진 좌파 성향은 있었지만, 외국인 혐오라는 두 번째 아이템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선거 결과는 우파에 뒤졌다. 스웨덴의 ‘민주당’, 덴마크의 ‘인민당’, 핀란드의 ‘진짜 핀란드당’, 오스트리아 ‘자유당FPO’, 그리스의 ‘금빛 새벽당’, 이탈리아의 ‘북부 리그당’은 모두 외국인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의 ‘민족전선’도 마찬가지다. 좌파보다 더 급진적인 경제 정책과 우파보다 더 급진적인 도덕 정책으로 세계화에서 낙오되고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지지가 파국 이외에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코엔은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110p)라고 한탄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환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연속으로 나타나는 이런 위기와 단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시대가 소리 없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과연 어떤 병일까? 그 대답은 산업세계라는 문명의 붕괴와 더 이상 후계자를 찾기 힘든 진보 사회의 커다란 어려움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의 시대를 부르는 ‘후기산업사회’라는 명칭이 많은 오해를 낳는 것 같다. 후기산업사회를 두고 좌파는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으로, 우파는 노동 가치라는 기본 가치로 복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두 시각 모두 틀렸다. 후기산업사회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최근 들어 걷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엔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생겨났던 환상,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9년에 발간된 장 푸라스티에의 중요한 저서 『20세기의 큰 희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경제학자에 따르면, 농경사회에서는 땅을, 산업사회에서는 물질을 가공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시간을 물건보다는 건강이나 교육, 여가와 같이 사람에게 쏟는 이 새로운 사회의 희망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었다. 인간화의 길을 걷던 경제학의 이런 염원은 그러나 배반당하고 만다.




푸라스티에는 오늘날 사회의 불굴의 성장 욕구를 과소평가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서비스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 있을 수 없다. 전자의 소득이 후자의 소득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유치원 교사나 간병인 같은 인적 서비스는 새로운 세상의 깃발이라기보다는 아주 낮은 임금의 영역에 맡겨져 있던 것들일 뿐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선동했듯이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1950~1960년대 산업사회에서처럼 더 이상 15년마다 소득이 2배로 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구매력 상승이 가능하려면 연극 무대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감으로써 관객의 숫자를 대폭 증가시키는 연극배우처럼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규모의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탈산업사회는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적절한 명칭인 ‘디지털 사회’라는 제대로 된 길을 이제는 찾은 것 같다. 규모의 효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정보가 취급할 수 있는 정보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이 강제로 거대한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사전에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있으면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은 무한대의 고객을 돌보고 배려하고 충고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미래를 예고하는 영화 「그녀Her」에는 ‘감정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한꺼번에 수백만 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런 것이 바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세상, 즉 호모 디지털리스가 예고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 우리의 의문은 치료약이 병보다 나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냐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면서 근심거리가 늘어나지 않을까?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를 거치면서 새로운 플랫폼 위에서 이뤄지는 컨베이어벨트 식의 연쇄노동이 사람에 대한 테일러주의 시스템 관리로 변하지는 않을까? 산업사회의 해묵은 문제가 이를 대체한 사회 한가운데에서 시간의 엄청난 굴절로 인해 다시 제기되는 중이다. 도덕 붕괴나 금융 위기와 같은 그 모든 단계를 다시 밟아야 할까? 우리는 그때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 의미를 잘못 알지 않았다면 역사는 지금 쓰이는 중이다.

저자 코엔의 진단과 평가, 대안은 마치 대한민국에 곧 닥칠 문제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분석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이 우리가 21세기 들어 겪었거나,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해 부응해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이 책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저자 : 다니엘 코엔(DANIEL COHEN)


오늘날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파리1대학, 파리경제대학, 파리고등사범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양한 저서를 통해 경제 현상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 바람직한 경제 정책에 대한 사회적 발언도 활발히 하고 있다. 경제학자로서 개발도상국 경제에 중심 관심을 두고 특히 개발도상국의 부채 및 성장 문제에 관해 많은 연구를 수행해왔다. 시장방임주의적 담론에 비판적이며 스스로를 실용적 경제학자로 규정하는 코엔은 프랑스 정부와 국제기구의 정책 수립에도 적극 관여해왔다. 『악의 번영』은 2009년 초 출간되어 프랑스 아마존 종합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프랑스 총리 지원 기관인 경제분석위원회 위원과 OECD 개발센터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르몽드』 편집위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화폐, 부, 부채』 『세계화와 그 적들』 『악의 번영』 『호모 이코노미쿠스』 『출구 없는 세계』 등이 있다.


역자 : 김진식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울산대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비판』(2005), 『알베르 카뮈와 통일성의 미학』(2005), 『세계 프랑스어권 지역의 이해』(2009), 『르네 지라르』(2018), 『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2020) 등이 있다. 역서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공역, 1993), 『희생양』(1998),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2004), 『문화의 기원』(2006),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2007), 장-미셸 우구를리앙의 『욕망의 탄생』(2018)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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