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 뇌과학자 -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제임스 팰런 지음, 김미선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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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Psychopath)란 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평소에는 정신병질(精神病質, Psychopathy)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해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범죄 이전까지는 사전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체포돼 당국의 심사를 거쳐 언론에 알려질 경우 이웃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평소에 보여온 행동은 평범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는 1920년대 독일의 쿠르트 슈나이더(Kurt Schneider)가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보통 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의학계에 따르면 이들은 발정·광신·자기현시·의지결여·폭발적 성격·무기력 등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정신병질은 평소에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하여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 브르크하멜국립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밖에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에 무감각하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재범률도 높고 연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일반 범죄자들보다 높다. 또 공격적 성향을 억제하는 분비물인 세로토닌이 부족하여 사소한 일에도 강한 공격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한다. 사이코패스는 이같은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에 사회환경적 요인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전인격적 병리현상으로 본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가 PCL-R(Psychopathy Checklist-Revised)라고 부르는 사이코패스 진단방법을 개발하였는데, 40점을 최고점으로 하여 이에 근접할수록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다고 판단한다. 한국에서도 연쇄살인을 저질러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유영철은 이 진단법에 따라 측정한 결과 34점을 기록하여 전형적 사이코패스로 판정받았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15~16점을 기록한다고 한다.

사이코패스가 반드시 범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직장 같은 일상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게 의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양들의 침묵' 한 장면(사진은 영화 스틸컷으로 독자가 임의로 게재했음.


영국의 과학 전문 주간지 《네이처》는 '살인마의 뇌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과학자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이코패스를 발견하다'를 보도하면서 "제임스 팰런(이 책의 저자)의 놀라운 결론은 ‘정상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사고방식을 전복한다"고 평했다.

저자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연구하던 중 “나는 자리에 앉아 우리 가족의 뇌 스캔 사진을 분석하다가 사진 더미 속 마지막 사진이 두드러지게 이상한 걸 알아차렸다. 그 사진은 사진의 주인이 사이코패스거나 적어도 사이코패스와 불편할 정도로 많은 특성을 공유함을 시사하고 있었다. 나는 사진 주인이 가족 중 하나일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가족의 뇌 스캔 사진 더미에 어쩌다 다른 테이블 위 사진이 섞였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 그 뇌 스캔 사진의 주인공은 나였다.”고 이 책에서 밝혔다.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는 살인마의 뇌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과학자 제임스 팰런이 자신의 뇌 스캔 사진에서 사이코패스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 2008년 TED를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됐으며, 미국 드라마 시리즈 〈크리미널 마인드CRIMINAL MINDS〉의 소재로 쓰이는 것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 대서특필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1991년 사이코패스 영화의 원조로 불리우는 '양들의 침묵'이 상영돼 세계의 의학계와 정신의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세상을 뒤집은 이 과학자의 실제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심오하고 흥미진진한 질문을 던진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나는 어떻게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까?’ ‘왜 자연은 계속해서 사이코패스가 태어나도록 내버려두는가?’ ‘사이코패스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는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지고 있는 과학자의 자기 탐구기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질문과 성찰이 담겨 있다.






성공한 뇌과학자이자 의대 교수인 제임스 팰런은 어느 날 자신의 두뇌 사진에서 사이코패스의 특징을 발견한다. 반신반의하며 자신의 가계도를 살펴보는데, 자신의 조상들 중에 살인마가 즐비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미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 모친 살해 사건의 범인 토머스 코넬, 아내를 쇠로 된 삽자루로 가격한 다음 살해한 앨빈 코넬,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영국 역사상 가장 잔인하기로 유명한 존 래클랜드 왕까지 모두 악명 높고 사이코패스로 의심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유전자 분석 결과, 공격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밝혀져 전사유전자(warrior gene)라고 불리는 MAOA 유전자의 변형이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제임스 팰런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팰런은 온화한 가정에서 자랐고,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많은 친구를 둔 사교적인 사람이다. 2000년에는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해 파킨슨병, 뇌졸중 등 여러 신경퇴행성질환을 치료할 가능성에 관한 최초의 증거를 발견했으며 직접 창업한 회사 뉴로리페어는 전국생명공학협회에서 선정되는 등 학문적으로도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도대체 폭력 전과도 없고 대외적으로도 성공한 이 자상한 가장이 어떻게 사이코패스란 말인가?


사이코패스 한국 영화 포스터.


2020년 초, 대한민국의 언론 뉴스에 매일 오르내렸던 N번방·박사방 사건. 사람들은 이 범죄의 잔혹함에도 놀랐지만 범인들이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평범한 20대 남성들이라는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 길거리에서 지나친다 해도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을 남성들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가장 위험한 사이코패스라도 때로는 명랑하고 근심 걱정 없으며 사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이코패스로 태어나더라도 다음 세 가지 요인을 모두 갖추지 않는다면 사이코패시가 발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첫째, 안와전두피질과 편도체를 포함한 전측두엽의 유별난 저기능. 둘째, 전사유전자로 대표되는 고위험 변이 유전자 여러 개. 셋째, 어린 시절 초기의 감정적·신체적·성적 학대다.(10년에 걸쳐 사이코패스 살인자들의 PET 스캔 사진을 분석한 결과) 살인자들 뇌에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특정 부분, 흔히 자제력이나 공감에 영향을 끼치는 뇌 영역의 기능이 공통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인간적 폭력을 저지른 뇌이니 이해는 갔다. 이들 뇌 영역의 활동이 저조하다는 건 정상적인 도덕적 추론과 충동 억제력이 부족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들어가며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중에서




플로리다주립대학교의 케빈 비버와 동료들은 전사유전자를 가진 남성들이 갱단에 합류할 가능성이 더 높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흉포한 갱단의 동료들과 비교해서 더 폭력적이었고 싸움에서 무기를 사용할 가능성도 두 배나 높았다. (…) 전사유전자는 뇌 구조의 변화와도 연관되어왔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안드레아스 마이어-린덴베르크와 동료들이 시행한 연구에서는 전사유전자가 편도체, 전대상피질, 안와피질, 즉 반사회적 행동과 사이코패시에 연관되는 모든 영역의 부피를 8퍼센트 줄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장 〈나의 조상들은 살인마였다〉 중에서


수감된 사이코패스 중 유아기에 신체적·감정적 학대나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청소년 사이코패스 범죄자 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70퍼센트가 어린 시절 내내 심각한 학대를 받았다고 답했다. (…) 나는 여기에다 가해자를 감싸는 사이코패스들을 더하면, 사이코패스 중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은 비율은 99퍼센트에 육박할 수도 있다고 추론했다.

5장 사이코패스의 조건 중에서




사이코패스로 태어났다고 해도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제임스 팰런은 이 세 요소 중에서 ‘유년 시절의 학대’를 겪지 않았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로 태어났지만 자칭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로 자라날 수 있었다.

제임스 팰런이 주장하는 이 ‘세 다리 의자’ 이론은 고전적인 질문 하나를 이끌어낸다. ‘유전자와 환경 중 무엇이 인간을 결정하는가?’ 본래 제임스 팰런은 유전이 80퍼센트 정도를 결정하고 환경은 20퍼센트밖에 결정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뇌 스캔 사진을 본 이후로는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인간이 훨씬 더 복잡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선하지 않으면 악한, 옳지 않으면 그른, 친절하지 않으면 앙칼진, 무해하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생물학의 산물도 아니며 과학은 우리에게 이야기의 일부만 들려줄 뿐이다”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는 한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스스로 증거가 되어 새로운 사이코패시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더 나아가 유전자 결정론을 고집하던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인간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회고록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한 장면.



제임스 팰런은 이 책을 통해 사이코패스가 반드시 악명 높은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는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사이코패스로 의심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고난도 연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공감 능력이 없어 보이는 빌 클린턴과 폰지 사기꾼의 대명사로 알려진 버니 메이도프를 꼽는다. 특히 금융계와 경제계에 많은 사이코패스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이렇게 사이코패스가 사라지지 않고 일정 비율로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사이코패스가 모든 문화권에 사이코패시가 약 2퍼센트의 비율로 실재한다는 사실은, 사이코패시가 또는 최소한 사이코패스에게서 발견되는 특성과 연관되는 대립유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인류에게 ‘바람직함’을 시사한다. 아니라면 사이코패시는 진화 과정에서 제거되었거나 적어도 오래전에 그 수가 줄었어야 한다. (…) 아마도 그 유전자 자체나 유전자와 연관된 사이코패스적 특성이 생존에 유리한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 틀림없다.

10장 사이코패스는 모든 사회에 존재한다 중에서






제임스 팰런은 진화적으로 거짓말을 잘하고 불안을 느끼지 못하며 이성에게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이코패시가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사이코패스 덕분에 인류가 존속된다고 주장한다.(그의 연구 결과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아 독자에겐 거부감이 든 부분이다) 예를 들어 전사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시급한 상황에서도 결정을 잘 내리는데, 그 유전자를 가진 지도자들의 결정 일부가 문명을 진보시켰을 것이라 본다. 또한 사이코패스들은 감정과 행동을 잘 분리하기 때문에 전투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덜 겪어 대규모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역사의 분기점을 마련했을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사이코패시는 군사, 정치, 경제 등 다방면으로 사회에 이득을 준다.

제임스 팰런의 이야기가 세상에 처음 드러났을 때, 사이코패스 및 범죄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실화라는 점, 사이코패스의 조건 그리고 사이코패시의 긍정적인 영향까지 누구나 흥미를 느낄 만한 요소들의 집합체니까.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이 촉발됐다. 사이코패스에 관한 상식부터 ‘유전자와 환경 중 무엇이 더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인간의 조건은 도대체 무엇인지’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내가 클린턴을 사이코패스로 진단할 수는 없지만, 그는 몇 가지 주요한 특성을 가진 듯 보이고 아마도 PCL-R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소한 15점은 될 것이다. (…) 클린턴은 군대를 향해 무게 잡고 거수경례를 하는 등 흉내 내는 재주가 일품이었고, 갈채를 받을 때는 겸손을 가장했으며, 장례식에서는 적당히 침울해 보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엄청난 슬픔을 연기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사람도 이야기를 꾸며내지만, 진짜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가진 사람만이 그토록 큰 판돈을 걸어놓고 고난도 연기를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

7장 사이코패스도 사랑할 수 있을까 중에서





저자 : 제임스 팰런(JAMES FALLON)


일리노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에서 35년 넘게 의대생, 학부생, 신경정신과 임상의들에게 신경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2000년에는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해 파킨슨병, 뇌졸중 등 여러 신경퇴행성질환을 치료할 가능성에 대한 최초의 증거를 발견하여 미국 국립보건원을 통해 미 의회에서 보고하기도 했다.

또한 팰런의 연구실에서 생명공학회사 세 곳이 출범했으며 그가 직접 창업한 회사 뉴로리페어NEUROREPAIR는 전국 생명공학협회에서 최고의 회사로 선정되었다.

팰런은 스스로를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로 분류한다. 범죄 이력이 없는 친화적인 성격의 성공한 과학자지만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2008년에 TED를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됐으며, 이를 계기로 수많은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소개됐다. 팰런은 자신의 이야기 및 사이코패스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자신의 TED 강의를 모티프로 제작된 드라마시리즈 〈크리미널 마인드CRIMINAL MINDS〉의 한 에피소드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 실린 기사 ‘짐 팰런의 마음에 무슨 일이? 살인자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닥친 일’ 또한 반향을 일으키며 ‘사이코패스, 더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현재 결혼한 지 50년이 지난 제임스 팰런은 슬하에 세 자녀를 비롯해 여러 명의 손자를 두고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역자 : 김미선


연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주로 뇌과학과 진화 분야의 과학책을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 《의식의 탐구》 《기적을 부르는 뇌》 《생각의 한계》 《참 괜찮은 죽음》 《광기와 문명》 《뇌와 마음의 오랜 진화》 《지구 이야기》 《걷는 고래》 《대멸종 연대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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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
조안나 지음 / 지금이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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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는 제목의 뜻도 아리송하고 "행복한 순간에는 글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슬플 때 글쓰기보다 좋은 처방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작가의 말의 깊은 뜻도 동의하지 못한 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아직 글쓰기는 물론 책읽기도 제대로 못하는 독자로서는 "무조건 읽으면서 깨닫게 되면 좋고, 짧은 지식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름의 독서 철학에 따라서였다. 독서에 철학이란 단어까지 붙이는 것이 조금 쑥스럽지만 독자의 책을 대하는 태도일 뿐이니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제목의 아리송한 부분은 책을 들자마자 금세 해소됐지만 공감하지 못한 저자의 말은 한참을 읽고서야 이해했다. 저자가 일상에서 수시로 글쓰기를 하면서 느꼈을 수많은 행복감과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복감'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즉 행복을 찾아 글쓰기를 한 게 아니라, 글쓰기를 해서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독자의 탓이다. 독자 입장은 '글쓰기(창작)는 고통의 내면화'라는 생각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고, 독자로서는 비지니스 글도 쓸 때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자의 말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조안나 저자는 이미 책을 여러 권 출간한 이른바 '인기 작가'인 줄 몰랐다. 출근길 많은 사람들의 강력한 소울메이트가 되어준 『월요일의 문장들』의 작가란 점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독자의 폭 좁은 독서를 반성하는 계기도 됐다. 그동안 수 편의 독서에세이를 통해 한 권의 책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 수 있는지를 꾸준히 전해온 저자가 이번 신작 『슬픔은 쓸수록 작아진다』에서는 독서와는 또 다른, 글 쓰는 삶으로서의 일상을 직조해가는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냈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곁에 있어 주는 건 내가 지켜낸 글들을 위한 시간이었다”라는 저자의 고백도 어렵지 않게 수용된다. 이 책은 아내, 엄마, 주부라는 변화된 삶의 기반 위에 서서 읽고 쓰는 작가로서의 일상을 쟁취하고자 노력한 저자의 내밀한 삶이 담긴 산문이다.

"행복한 순간에는 글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슬플 때 글쓰기보다 좋은 처방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맡겨두고 현재는 우선 써두자.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은 독자들, 나를 낳아준 엄마, 내가 낳은 딸을 위한 글을 더 많이 쓰자. 세상의 모든 여성이 담대하게 일상을 걸어나갈 수 있도록. 이상하게 슬픔은 쓰면 쓸수록 작아졌다고, 슬픔을 쓰는 것은 절대 유치한 일이 아니라고…….(p. 200)



아무리 아기가 봄날의 곰처럼 사랑스럽다고 해도 하루하루 풀리지 않는 육아 스트레스는 세상 모든 엄마를 우울하게 한다. 십수 년을 글을 쓰고 매만지는 작가이자 편집가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다져온 저자에게도 육아는 그렇게 좋아하던 책 읽는 시간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힘들게 아이를 재운 밤이면 밤마다 ‘대체 내 인생은 언제 되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에 갇힌 기분이 든다.”

이처럼 하루아침에 시작된 육아로 인해 혼자만의 시간을 잃어버린 작가의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가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얼마나 열망해왔는지, 끝없는 집안일과 육아로 인해 작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아 노심초사했는지 알 수 있다. 작가의 행복하지만, 지독히 외롭고 쓸쓸한 감정들이 뒤섞인 매일의 기록은 읽는 이의 마음을 시시각각 뒤흔든다. 나의 아름다운 고독을 외치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겨우 손가락으로 그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기고, 기기만 했던 아이가 앉고, 앉아만 있던 아이가 서서 논다. 귀찮고 또 귀찮은 이유식 만들기도 익숙해졌고 내 밥도 함께 챙겨 먹으며 간식도 나눠 먹는 그런 시간도 있다. 이렇게 점점 이 모든 육아의 과정들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반복해서 몸에 달라붙은 습관으로 일상이 지탱되는 나에게 글은 언제나 안식처인 동시에 현실도피처이다.(pp. 162~163)

이 책은 '육아에 지쳐 책을 읽지 못하는 날에는 일기라도 한 줄 쓰기 위해 쉽게 잠들려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한 ‘여성의 투쟁기’이자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에 대한 ‘육아일기’이고 읽지 못해 슬프고 쓰지 못하면 아픈 ‘작가일기’인 셈이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아기가 잠든 유모차를 끄는 동안에도, 아이가 잠든 늦은 밤의 짧은 샤워 시간에도,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면서까지 한 줄이라도 쓰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책 곳곳에서 토로한다.

이런 점에서 책은 글 쓰는 삶을 쟁취해나가는 일상의 단면들을 반복해 나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토록 지독하게 지켜냈던 쓰기를 위한 시간들을 통해 얼마나 작가가 고통에 유연해졌는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지, 무엇보다 삶의 혼돈과 번민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장착하게 되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독자의 편견도 말끔이 씻겨 내려간다.

"내게 글은 곧 삶이었다. 하지만 삶이 곧 글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지만 모두가 글을 쓰며 사는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소울메이트를 만난 후 “슬픔을 자랑스럽게 두르고 다닐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여성”이 되었지만 내 글을 본격적으로 쓰면서 더는 슬픔만을 자양분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밤은 언제나 내 글에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낮이 없다면 밤이 매긴 점수는 무의미했다. 제대로 살았던 낮의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잠들지 않고 글을 썼다. 갑자기 삶이 무가치해지고 숨이 탁 막혀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감정을 글로 써두었더니 그 감정들과 친해졌다. 아이를 낳고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글을 쓰며 사는 삶에 확신이 생겼다.(p. 196)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쓰고 싶다"는 욕구도 생긴다. 나를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책 속의 문장들을, 쓰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지금의 시간들을, 삶의 무질서함과 혼돈들을, 가슴속으로만 담아두기에 벅찬 감정들을 당장이라도 글로 옮기고 싶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일상의 불안과 회의로부터 자신을 치유하는 수단으로서, 삶의 에너지를 채워 넣는 반복적 행위로서의 글쓰기의 매력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도리스 레싱,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니 에르노, 은희경, 박연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 수많은 작가의 작품과 문장, 글쓰기에 대한 그들의 빛나는 통찰도 페이지마다 펼쳐진다. 각 글의 마지막에 오는 '이 책에서 저 글로 가는 법'은 어떻게 독서가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저자 조안나만의 특색 있는 글쓰기 팁이고 독자에게는 글쓰기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독서가 글쓰기로 이어지는지도 자연스럽게 안내로 일깨워준다.

저자에 따르면 새로운 책을 읽고 삶의 재미를 새롭게 발견하면 바로 쓴다. 쓰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내 생각과 시간이 아까워 오늘도 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독자들도 글쓰기를 세안용품처럼 삶의 필수품으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일기와 공적인 글쓰기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읽을 사람을 정해놓고 쓰는 글은 그 어떤 클렌징폼보다 깨끗하게 얼룩진 마음을 정리해준다. 특히 말싸움을 하고 난 뒤 못다 한 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이라면 말 잘하는 법을 다루는 책을 읽고 바로 자신만의 ‘반박리스트’를 써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음 번에 더 잘 싸울 수 있는 내공을 길러줄 것이다. 슬픔과 분노는 글로 쓰면 쓸수록 줄어든다.(p. 192)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부터 책읽기가 술술 풀린다. 글쓰기에 대한 영감을 얻었으니 독자로서는 저자가 어떤 말을 써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나 오랜 시간 습관처럼 몸에 밴 말이라는 것도 '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도 이해된다. 육아를 비롯한 일상이 글쓰기이고, 글쓰기가 일상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의 치열한 노력도 눈앞에 스칠 정도로 수용된다.



또한 책은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할 때,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을 때의 처방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관한 여러 노하우와 팁, 글쓰기가 갖는 치유의 힘, 작가가 생계를 유지하는 법, 글로 자기 브랜드 만드는 법까지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조언들로 가득하다. 선배가 후배에게 조근조근 일러주듯 생생하다. 각각의 글은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그때그때 읽고 싶은 내용을 찾아 읽어도 유용하다. 매일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그것이 일기든, 메모든, 에세이든 자신의 글을 완성할 때까지 하루하루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극제로 독자에게 다가갈 것이다. 자, 오늘은 일단 의자에 앉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박힐 때마다 묘한 용기가 솟는다.

그리고 중요한 문장들을 수집키 위해 앞에 읽었던 내용 중 몇 문장 찾아 노트에 적어본다.

· 아무리 생각해도 쓸거리가 없다고 느껴지면 당신이 있던 “그날 그 도시를, 12월의 거리”를 떠올리고 그대로 묘사해보자.(p. 129)

· 수첩의 반을 채우고도 남을 유별난 ‘나’가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방황하고 있다면 수많은 ‘나’를 기록해보자.(p. 135)

· 그저 매일 세 문장씩 자신의 기분 변화나 일상을 적는다. 손에 항상 들고 있는 핸드폰 노트에 남겨도 되고, 포스트잇에 남겨도 되고, 어떤 일러스트레이터처럼 티슈에 남겨도 된다.(p. 140)

· 오늘 당신이 한 가장 무의미한 일을 적다 보면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한 번쯤 시도해보면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즐거운 놀이가 될 것이다.(p. 147)



순간적으로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은 일단 까먹으면 다시 똑같이 떠올리기 힘들다. 떠올린 생각이 공중으로 날아가기 전에 손을 움직여 꼭 기록해두어야 한다.(p. 121)


때때로 지리멸렬한 권태를 느낀다. 정의할 수 없는 삶에 대한 허무에 허덕인다. 언제 정규직으로 전환될지 몰라서 누구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가장 열심히 일했던 십 년 전엔 알지 못했던 다른 형태의 좌절을 맛본다. 이대로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될 것만 같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악몽도 자주 꾼다.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사는 건 작가로서의 삶에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걸 매순간 깨닫고 있다.(p. 159)


저자 : 조안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출판사에 들어갔고, 잘 팔리는 책이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퇴사한 후 프리랜서가 되었다. 읽기는 쓰기를 낳고, 다시 쓰기는 읽기를 낳아 꾸준히 책을 만들고 써 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힘들 때마다 걷고 무작정 썼던 글들이 죽도록 외로웠던 미국 생활을 견디게 해주었다. 육아에 지쳐 책을 읽지 못하는 날엔 일기라도 한 줄 쓰고 자기 위해 쉽게 잠들려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모여 이 책이 되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 나의 보물 세 가지는 글쓰기, 나의 편인 그대 그리고 너란다, 여름아. 내 딸에게 인생은 쓰지만 글로 써두면 글로 써두면

달콤해진다고 자주 말해주어야겠다. 지은 책으로는 《책장의 위로》,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월요일의 문장들》,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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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 -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
김호기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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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100년사를 독립운동가, 정치지도자, 종교인, 문화예술인, 역사학자 등 60명의 대표 저작을 통해 살핀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이 출간됐다.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힘은 무엇인가? 그것의 하나는 바로 지성과 시대정신이었다. 지성이 개인적·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에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일깨웠다면, 시대정신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가야 할 길을 비췄다. 이 책은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 100년 지성사를 종횡무진 누비며, 더욱 풍요롭고 보다 정의로운 미래를 꿈꾸게 했던 60명의 지식인의 삶과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사회학자로서의 저자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기억과 그 의미를 전승하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독자는 이 점에 공감했다. 다만 아무도 저자에게 60인을 선정할 권리를 준 것이 아닌데 저자의 의지에 따라 쓴 책의 기준이 누구나 설득할 만한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저자도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 부분임을 밝혔다.





저자가 이념적, 학문적, 역사적 균형감각을 가지고 지난 100년 우리 현대사를 대표하는 60명의 지식인과 책을 선정했다면 일단 인정하고 읽은 다음 평가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독자도 일면식도 없는 학자에게 근거 없이 설득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독자의 판단을 도와줄 저자의 이력과 전작(前作) 등을 통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뜻하지 않게 저자가 지금까지 쓴 책 중 몇 권을 알아내 저술 취지나 저술 내용, 출간 이후 평가 등을 중심으로 대략만 파악했다.

『세상을 뒤흔든 사상』, 『예술로 만난 사회』, 『탈냉전사의 인식』,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4권이 그것이다. 대부분 저자의 저작이고 다른 분과 공동저작도 있다. 독자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가 끊임없이 근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배우고 연구해 이번 책을 낸 것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민의 흔적은 이 책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에서 60명의 인물과 대표작을 선정하는 데 그대로 반영된다. 보수와 진보, 인문학과 사회과학, 예술과 자연과학, 국내와 해외에서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과 그들의 대표작을 담아낸 것이다. 여운형의 『조선 독립의 당위성』,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까지 다뤘다.





흥미로운 점은 60명의 인물 중 몇몇은 지식인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승만, 김구, 안창호, 여운형,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게는 독립운동가 또는 정치가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들의 삶과 사상은 민족독립과 해방, 산업화와 민주화, 세계화와 정보사회라는 대한민국 100년의 과거와 미래를 밝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지난 100년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진과 후퇴가 공존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미래에는 불투명성과 불확실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성찰하고 전망하는 지성과 시대정신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다.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먼저 행동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이 남긴 사상을 공부하고 미래를 밝혀가야 할 차례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100년 우리 현대 지성의 고투에 대한 기억을 오롯이 사유한다면 미래 100년을 향한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이 책은 1947년 출간된 김구의 『백범일지』부터 2000년대 이후 출간된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까지 소개하고 있다. 해방공간의 화두였던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서 시작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서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을 탐색하는 데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의 실존적 기억과 집합적 기억을 자세히 살펴본다. 지식인 역시 특정한 시대를 살아갔던 개인이다. 사랑과 미움, 성공과 좌절, 고독과 연대에 대한 개인으로서의 지식인의 실존적 기억을 읽으며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충실한 삶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또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식인의 사상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우리는 지식인들이 기록하고 사유한 집합적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가기 위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60명의 지식인에 대한 동료와 후대 학자들의 기록과 평가다. 역사학자 서중석이 기록한 김구의 삶, 시인 정지용이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서문, 사회학자 김귀옥이 평가한 이은숙의 독립운동은 우리 역사에 헌신했던 이들에 대한 시대의 예의를 기억하게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문제적 인간’ 이광수, 여전히 공과 과가 엇갈리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후대 학자의 평가는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념적, 학문적, 역사적 균형감각을 가지고 지식인 60명과 그들의 책을 선정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립운동가와 정치가였던 김구, 안창호, 이은숙, 여운형의 삶과 시대정신을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기록했다.

최장집과 박세일, 정운찬과 장하준 등 정치학자와 경제학자의 사상을 알면 우리 현대사를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통일, 법과 제도, 사회구조와 문화변동, 페미니즘과 생태학에 관한 지식과 통찰은 우리 사회가 더욱 평화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한편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족주의, 동북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해외에서의 연구는 우리 사회가 더욱 공정하고 풍요로운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지성의 역사를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독점할 순 없다”는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는 예술, 자연과학, 역사학의 지식인과 그들의 사상이 폭넓게 담겨 있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박경리, 최인훈, 조세희, 박완서, 박노해, 한강 등 한국 작가들의 역동적인 삶과 개성 있는 작품 세계는 흔치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예술은 사회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를 선물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지성이 남긴 또 하나의 커다란 성취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미중 신냉전과 팬데믹이 야기한 자국우선주의와 세계 경제위기가 걱정이다. 안으로는 시민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적대하고, 사회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의 불만이 치솟는다.

역설적으로 이런 때야말로 우리는 60명의 지식인과 그들의 사상 그리고 시대정신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잊어서는 안 될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이다”라고 이 책의 집필 의도를 밝혔다. 100년 우리 현대 지성의 고투와 기억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용기를 안겨줄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다. ‘100년의 기억’은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이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우리 공동체를 민주공화국으로 일궈낸 사상의 기억이다. ‘100년의 미래’는 경제·사회적으로 완전한 선진국을 이룩하고 인류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문화국가로 나아갈 시간을 가리킨다. 사회학자인 저자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우리 시대 60명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고 더 풍요로운 내일로 향하는 길을 비춰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여운형이 도달한 결론은 좌우합작이었다. 그의 파트너는 김규식이었다. (…)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신탁통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두 사람은 합의함으로써 우파 민족주의, 좌파 사회주의와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했다. (…) 정치사회에서 중도는 양날의 칼이다. 한편에선 단순한 절충의 위험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념 대립을 완충하고 통합을 모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우리 현대사에서 안겨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4. 여운형: 《조선 독립의 당위성 (외)》과 중도의 미래」 중에서


이광수의 민족주의를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광수의 민족주의에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이 담겨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애증병존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식민적 억압의 주체인 동시에 선진적 문명의 모델이었다. 이런 내면의 애증병존, 달리 말해 정신적 양가감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광수의 경우 그 표출이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났지만, 후기에는 친일에의 길로 드러났다.

「16. 이광수: 《민족개조론》과 근대성의 미래 ①」 중에서



《채식주의자》를 읽을 수 있는 코드들은 에코페미니즘 시각을 포함해 여럿일 수 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사회학적 시각이다. 이 연작은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길 꿈꾸는, 영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의 삶을 다룬다. (…) 위의 글은 영혜의 독백이다. 여기서 육식은 존재의 사회적 조건을 은유한다. 육식의 대척에 놓인 나무는 존재의 실존적 소망을 은유한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육식이 폭력과 규율로 무장된 가부장 사회이자 후기현대사회를 상징한다면, 나무는 그 폭력과 규율에 맞서 존재가 갈구하는 평화와 해방의 세계를 함의한다.

「24. 한강: 《채식주의자》와 예술의 미래」 중에서


《역사 앞에서》는 그 부제인 ‘한 사학자의 6·25일기’가 보여주듯 ‘기록의 역사학’이다.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서 김성칠은 전쟁과 인간, 전쟁과 사회의 모습을 일기로 생생히 남겨뒀다. (…) 지식인이 자기 시대를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은 작지 않은 용기를 요구한다. 《역사 앞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2002년 그 일부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26. 김성칠: 《역사 앞에서》와 기억의 미래 ②」 중에서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를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그동안 학술 토론을 비롯해 개인 회고, 정치 비사, 소설화 또는 영화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조명돼왔다.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풍경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1979년에 사망했으나 ‘역사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32.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와 보수의 미래」 중에서


시대정신이 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집약이라면,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나라가 아닌 ‘함께 사는 사회’와 ‘더불어 사는 국가’를 추구한다. 함께, 그리고 더불어 사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바탕 위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는 점을 노무현은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2009년 5월 그는 돌연 우리 곁을 떠났다.

「35. 노무현: 《진보의 미래》와 진보의 미래」 중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 가운데 이 장의 주인공 안승준은 대중에게 가장 덜 알려진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스물다섯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전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철학을 거쳐 사회생태학과 인류학을 공부했으니 생태학 연구자라 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안승준이 바로 그 청년이다.

안승준을 다루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 현대 지성사에 서 그는 생태학적 계몽의 선구자라 부를 만하다. (…) 둘째, 그의 삶이 안겨주는 감동이다.

「51. 안승준: 《국가에서 공동체로》와 공동체의 미래 ①」 중에서


장하준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제학적 생각들에 의문을 표한다. 예를 들어, 재산권 보호가 경제발전의 전제이고, 적극적 산업정책은 결국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가정들에 대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그 통념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60.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와 세계화의 미래」 중에서



저자 : 김호기


196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UCLA 사회학과 및 Center for Korean Studies 방문학자를 지냈으며,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좋은 정책포럼 운영위원장,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으며,『시민과 세계』등 여러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의 시민사회, 현실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말, 권력, 지식인』,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 엮은 책으로는 『현대 비판사회이론의 흐름』,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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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름다운 옆길 - 천경의 니체 읽기
천경 지음 / 북코리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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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독자 입장에서 이름을 처음 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머릿속에 내재돼 온 철학자다. 아마 철학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철학의 시조'라는 소크라테스 다음으로 이름을 많이 들었고, 아직도 독자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뿌옇게 깔려 있는 인물이다.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도 니체의 이름은 자주 듣고, 인용하는 학자도 많아 머릿속에 깊게 각인돼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음 먹고 책을 읽으려 해도 너무 어려워(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더욱) 중도에 포기한 적도 많다.

사회 생할도 니체나 철학과는 거리가 먼 직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자주 접하기는 어려웠다. 철학이나 니체를 읽기에는 생각 자체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자성하고 있다. 이 책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은 제목부터 니체를 본격 해석한 글이 아니라 옆길(그를 볼 수 있어 본격 해석은 못해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도 삶에 연결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능한 단어가 아닌가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자 천경이 지난 2017년 11월부터 2019년 7월까지 국내 한 신문사에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게재한 내용을 엮어서 출간한 것이라는 소개글을 읽고 독자의 생각은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신문의 칼럼에 연재된 것이면 우리 삶 중에서 시사성 있는 칼럼을 쓴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볍고 재미있으며 깊은 울림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에 독자에게는 읽기로 결심하기에 큰 힘이 됐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은 예상대로 저자가 니체 철학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생활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재미있게 풀어 썼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또 '옆길'이란 표현도 '오류'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면서 니체에 대한 존경심과 우리 일상의 연결 지점에 난 길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가벼운 스케치로 시작되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매 편마다 매우 쉽게 읽히지만, 니체 철학의 깊이를 땀 흘려 담아낸 흔적이 돋보인다. 특히 비유와 상징의 문체로 쓰인 난해한 니체의 저서를, 일상생활에 적용해서 한 편 한 편 담아낸 이야기들이라 설득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저자의 삶의 통찰과 오래 닦아온 문장의 힘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의 문장 중에는 유머 코드가 행간마다 숨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쉽고 평이한 문장들과 일상생활에서 길어올린 에피소드로 구성된 각 장마다 영원회귀 사유, 힘에의 의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위버멘쉬(초인)와 인간 말종, 신의 죽음과 보편진리의 유무, 그리스도교의 폐해와 가치의 전도, 아모르파티(운명애) 등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소상히 소개되고 있어 니체 철학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독자에게도 니체에게 가는 길 옆에 옆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직접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난해하지 않게 니체 철학을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면 재미있게 니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제까지 독자가 읽었던 책 중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쓰인 철학적 해설서이며 에세이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 본격적으로 니체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한 니체에 접근하는 방법을 깨닫거나 최소한 영감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쓰인 '아름답고 멋진 책'이다.

기존의 철학 해설서가 지닌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과 문맥들이 깨끗이 정리되어 산뜻하고 선명하게 니체 철학의 개념을 소개하는 솜씨는 저자가 니체에 대해 웬만한 철학자쯤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가끔 배꼽 잡는 유머까지 행간에 숨어있으니 니체의 철학에 대해 통찰력도 갖춘 건 같다. 니체의 책을 한 번만이라도 눈여겨 읽어본 사람이라면 니체의 독설도 대개 유머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재미와 인식의 ‘벼랑에서 한발을 더 내딛는 자’의 희열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독자도 저자에 대한 신뢰감이 크다. 철학이 어렵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평소 철학에의 입문을 꺼렸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도전해 볼 만하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엄두를 못 낸 사람들에게도 유용하지만, 이미 니체의 저서를 접한 독자들이라면 더 재미있고 깊이 있게 책 속의 메시지들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고 싶지만 어렵다고 포기한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애써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철학을 웃으면서 배우기를 희망하시는 독자들에게도 기꺼이 이 책을 권한다. 독자와 니체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간극이 있지만 저자가 중간에서 모두 연결해주고, 어떤 점에서 우리의 삶과 연계해야 할지 잘 지적해주기 때문에 그냥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독자에게 그랬듯이 현재와는 다른 삶과 사유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니체는 큰 울림과 만만찮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니체를 읽고 나서 큰 충격을 경험했다.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소신들이 해일처럼 부서지는 경험. 그것은 평화로운 일상에 균열을 내고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위험과 놀람의 세계다. 니체는 그만큼 위험하고 충격적인 '망치'와 '도끼'였다.

저자는 “니체는 나의 안일한 내면의 평화를 깨트렸고, 믿었던 가치관과 존경했던 금언들이나 좋아했던 취향마저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 세상에 대한 핑크빛 감흥과 삶에 대한 판타지를 일순간 뒤흔들었다”고 말한다.




또 니체를 만나고부터 세상은 다른 색깔과 다른 질감으로, 다른 관점과 다른 경쾌감과 명랑함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니체를 만나 울고 웃으며 굿판을 벌이듯 글을 썼다고 술회했다.

“니체는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것들에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며 망치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이 현실의 온갖 가치와 덕목과 칭송되던 행위들과 사랑스러운 가족의 얼굴, 평화롭게 지내던 이웃의 친절한 말들, 즉 나의 ‘환영’(幻影)을 되비추어주던 모든 것에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그것들의 민낯을 까발렸다. 그것들은 나의 민낯이기도 했다. 나의 평화와 안전을 지탱해준 얄팍한 지지대, 혹은 의지처 같은 것들, 나와 동류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그 무엇에 대한 안도와 그 안도에 복을 빌며 제사 지내고 경배하는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에 대한 경배, 그것은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종(種)인 내가 이 삶을 버텨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허위의식들, 허구들, 가짜들, 오류들의 집합이며, 이 삶을 참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거짓 덩어리들이었다고 니체는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단호함에 놀라고 예리한 통찰과 용기에 놀라, 살아온 생 전부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니체에 몰입하면서 유머를 배운 것처럼 문체도 다른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삽하기는 하다. 그것도 니체와 닮은 것 같다.





그리고 독자들을 달래는 데 유감없이 글솜씨를 발휘한다. "이처럼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니체의 문장들은 너무나 가볍고 경쾌하고 명랑해서 다시 놀랐다. 특히 니체는 웃음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망치는 망치로되 웃음과 유머가 넘치며 춤추는 망치, 니체. 특히 저자는 자신이 많이 웃지 않은 성격적인 특성을 감안해 니체를 읽고부터는 많이 웃으며 살 것을 자신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이 책을 쓰면서 저자는 많이 웃고 울었다고 말한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은 한마디로 재미있고 웃기기도 한다. 철학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웃어도 될까? 답은 웃어도 된다! 아니, 웃어야 한다. 니체는 ‘웃음은 웃음의 미래’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이 책에 대해 저자는 “진지한 철학을 논하면서 배꼽 빠지게 웃는 역설, 글이 저희끼리 웃고, 글을 쓰는 동안 나도 글과 함께 웃었다”며 책이 재미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행간의 재미를 찾아내고 웃음의 코드를 발견해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약간 당황하지만 '옆길'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즈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웃음은 의미들을 희화하는 힘이 있으며 웃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허무는 힘이기도 하다. 물론 한바탕의 큰 웃음만이 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니체 철학이 그렇게 단일한 맥락으로 쉽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책을 쓰는 동안 “니체의 친구가 되어 웃으며 놀았다”면서도, 또 니체는 재미있다면서도 니체에게로 가면 갈수록 위험하고, 위험한 만큼 후련하고, 더 많이 니체를 알고 싶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고, 차라리 모르고 싶어진다고 술회한다. 니체, 그 숱한 비밀의 문들의 은밀한 내부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니체를 정면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니체를 직면하고 감당할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그것은 지금의 내 삶을 통째로 망치질을 해야 하는 순간과 대면하는 사태로 나를 데려갔다. 이만하면 괜찮아, 하고 자신을 위무하며 조용조용 이 삶의 얼룩진 흔적들과 상처들에 연고를 발라주고 자신을 다독이며, 간신히 웃으며, 용감한 척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나약한 실존에 메스를 가한다. 그 망치와 메스가 실은 명랑한 웃음이며 경쾌한 춤이더라도 웃음과 춤과 명랑함은 무서운 망치이며 칼이며 도끼가 되어 지금 나의 욕망의 화로에 내리꽂힌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끼와 망치는 한바탕의 큰 웃음이었다. 웃음은 가볍되 다른 차원과 다른 평면으로 나를 데려가는 웃음이었다.”





“지금 우울하다면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을 한 가지 해보시기 바란다. 위험한 행동을 단 한 가지라도 해보시기 바란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해보시라. 평소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것을 해보시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빼고 내가 뿌듯함을 느끼는 무엇을. 역설적일지 모르나 이것이 나를 치유해줄 것이다.”

「무기력과 권태 돌파하기」 중에서


“타인과 차이나는 나의 고유성을 발견할 때 기쁨보다는 이거 뭐지? 당황하게 되고 깊이 밀어 넣어버리고 싶다. 좋은 가치로 칭송되는 것이라면 모르되 이곳에서 배척될 만한 어떤 특성이거나 욕망일 때 특히 그렇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딸이 한복모델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당황했다. 공부할 나이에, 이십 대도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 아나운서, 비행기 승무원 등등 기라성 같은 미인들이 나오는 잔치에 중1년생이 망신당하려고 등등. ‘너 자신이 되려는’ 아이를 주저앉히고 너 자신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수없이 나열하며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엄마인 나 자신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 중에서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것이 정말 있긴 한 걸까? 나의 진리와 너의 진리는 동일한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그래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을 따라서 지금 이곳에 도달한,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들 삶 아닌가? 그런데 정말 보편 진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그걸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진리와 바다 건너,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어느 시점의 진리는 동일한가? 미래의 진리는 지금 이곳의 진리와 동일할까? 이 지구별과 저 화성의 진리는 동일할까? 진리는 변하는 것일까? 우리는 불변의 진리를 신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리라는 번개」 중에서


저자 : 천경(천미경)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기자 및 편집장으로 일했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좋아한다. 현재 서울 홍대 인근에 위치한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미셀 푸코, 질 들뢰즈, 프리드리히 니체, 레비스트로스 등의 저서를 읽고 공부하는 〈잡종의 책 읽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 브런치 사이트의 니체 철학 추천작가이기도 하다.저서로 《고독 혹은 빨강색에 대하여》(시집)와 《키스해도 돼요?》(산문집), 《내 안에는 작은 아이가 산다》(산문집), 《주부 재취업 처방전: 내 안의 천재와 접속하기》(산문집)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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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역전 2 - 달라진 세계 힘의 역전 2
문정인 외 지음, 정혜승 기획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올해 초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사태로,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이 그 이전과는 다른,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달라진 세계'에 대한 전망과 담론장이 폭발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도, 이에 대응해 G2로서 미국과 함께 세계 패권의 양대 축으로 올라선 중국도 이 달라진 세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와 당사국들의 정치 사회적 내부 혼란을 겪고 있어 예전의 다른 어떤 문제도 해결하는 국제 사회 한 축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대한민국과 싱가포르, 베트남 등 팬데믹 상황에 적극적이고 선제적 방역으로 팬데믹 대처 모범국의 위치로 올라서는 국가 대부분이 동양 국가여서 세계 질서의 축이 동양으로 흐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이른바 '힘의 역전'이 이루어지고 진단하는 학자들도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담론의 범람 속에서 고민의 ‘방향’을 함께 질문하려는 시도가 드문 것이 사실이다.

메디치미디어는 2020년 6월 제2회 '메디치포럼-힘의 역전2, 달라진 세계'를 개최하여 세상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지에 대한 고민을 뛰어넘어, 팬데믹을 어떤 분기점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를 던진 바 있다. 바야흐로 변화를 향한 의지의 방향을 찾으려는 것이다.

완전히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와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각 분야의 '힘의 역전'을 위해 필요한 태도와 전략을 제안하는 문정인, 다니엘 튜더, 김세연, 유명희, 김동환, 민금채, 이원재의 포럼 발표와 인터뷰를 담은 책이 『힘의 역전2 달라진 세계』가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메디치미디어의 과학 기술의 변화로 생겨난 ‘힘의 역전’을 주제로 했다. 포럼과 그 포럼을 담은 책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모색하는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 첫 번째 포럼 이후 6개월. 예상하지 못했던 대격변이 세계를 휩쓸었고 한국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뒤집혔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생각지 못했던 위치에서 극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메디치미디어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스스로 내일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두 번째 '메디치포럼'을 통해 한층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진 세상만사 속의 변수를 점검하고,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모색하기로 했다.

2020년 6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명례방에서 열린 제2회 ‘메디치포럼’은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방역수칙을 지켜 원래 예정보다 3분의 1로 축소된 규모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발표자들의 문제의식은 심도 깊었고, 참가자들의 반응은 진지했다. 7가지의 주제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물었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패권의 역전 그리고 아시아의 역전은 가능할지, 거대 여당으로 21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 보수의 역전은 일어날 것인지,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인 대한민국이 반세계화의 위기를 어떤 전략으로 돌파할 수 있고 또 이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무너진 생태계와 기후 위기를 겪는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지구의 미래와 공존할 수 있는지, 뉴노멀의 시대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는 어떻게 달라질지를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단 25분이라는 발표에 압축하여,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힘의 역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국제질서의 역전'을 주장한 문정인 대통령 통일안보특보와 최근 WTO 사무총장에 출마해 결선까지 올라 있는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연구 발표를 중심으로 게재한다. 두 분은 최근 국제질서와 미중 무역전쟁 가운데 WTO 사무총장에 출마해 국민들의 관심이 커 선택 게재한다. 모든 분들의 귀중한 주장과 연구결과를 전부 싣지 못함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메디치포럼'의 프로그래머는 1회에 이어 정혜승 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이 맡았으며, 제2회 메디치포럼을 빛내 준 7인의 발표자는 바로 문정인, 다니엘 튜더, 김세연, 유명희, 김동환, 민금채, 이원재이다(포럼 발표 순).

1. 문정인 - 국제질서의 역전, 소프트파워의 부상

2. 다니엘 튜더 - 서양 우월주의, 이번엔 뒤집힐까

3. 김세연 - 보수의 새로운 역전은 가능할까

4. 유명희 - 포스트 코로나, 달라지는 통상질서의 길을 뚫다

5. 김동환 - 자산 인플레이션의 시대, 개인의 역전은 가능한가

6. 민금채 -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밥상의 역전

7. 이원재 - 가장 큰 정부가 가장 자유로운 시민을 만날 때




제2회 메디치포럼에 참가한 7명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코로나 이후의 문제의식. 이들의 공통점은 “힘의 역전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 역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이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역전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 국제질서의 역전, 소프트파워의 부상 - 문정인

변화된 국제 정세에 대한 시나리오가 여럿 등장했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현실성이 있는지, 어떤 것이 대한민국의 상황에 유리한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주어진 상황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당위론’적인 방향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국제질서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옳은지를 제대로 알고, 그 방향으로 세계의 질서가 이동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코로나 19 이후 대한민국의 스마트파워가 급상승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라는 국제적인 위기를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 나아가 한국이 국제질서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서양우월주의, 이번엔 뒤집힐까 - 다니엘 튜더

한국은 이미 좋은 점이 많은 나라이며, 코로나 정국에 잘 대처하고 있는 나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한국의 인지도가 국제적으로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많은 것에서 ‘글로벌 표준’이나 ‘선진국 기준’을 거론한다. 내재되어 있는 서양 우월주의나 사대주의가 더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라는 초유의 국면은 서양이 동양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인데, 한국 또한 이 계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보는 관점을 바꿔 나갈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서양 선진국’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 있게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3. 보수의 새로운 역전은 가능할까 - 김세연

2020년 총선에서 보수 진영이 패배한 것은, 민주당의 선전에서만이 아니라 보수가 잘해내지 못했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미래상에서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그 속도의 변화가 문제일 뿐이다. 보수는 사회의 변화를 점진적으로 담아내는 정치 세력이어야 한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담아내기에는 현재의 보수 정당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제 기본소득은 물론, 주 20시간 근무 시대에 대비해야 하며, 기본자산제나 기계세,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연결 등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그런 현실이 일상화되었을 때를 위한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4. POST코로나 통상정책 방향 - 달라지는 통상질서, 길을 뚫는다 - 유명희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통상 위기는 복합적인 요인, 복합적인 영향을 가진다. 각국의 국경이 닫히면서 세계화 시대는 자연스레 막을 내린 것이 아닌가. 통상을 위해 각국 정부가 나서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보호무역 시대가 본격화될 테지만, 대한민국은 다자무역 질서, 다자 중심주의가 자리 잡도록 중견국가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강대국 중심으로 힘의 경쟁 체제가 자리 잡을 경우, 당연히 그 상황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민이 이런 변화의 방향을 직시하고 장기적인 전략과 단기적인 전략, 대외적인 정책과 대내적인 정책을 함께 실행해 나가야 한다.




5. 자산 인플레이션의 시대, 개인의 역전은 가능한가 - 김동환

코로나로 인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 부동산과 주식 시작은 유례가 없는 유동성의 영향으로 고공 행진을 이어간다. ‘개인은 기관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당연시되었던 주식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2020년. 과연 팬데믹은 부와 가난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정보로 무장한 개인 투자자들의 뒤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한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력이 있다. 주식에 대한 투자가 위험한 투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도 한동안 자산 가격을 끌어올릴 것으로 보이는 유동성의 혼란 속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지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6.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밥상의 역전 - 민금채

코로나 19가 인류에게 대재난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팬데믹은 인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인류는 지구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살아나는 자연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가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대한 재점검에 들어가면서, 식생활에 대한 반성도 당연히 이어졌다. 전세계적으로 지나친 육류 중심의 식단의 문제점이 지적받고 있으며, 채식지향 식이를 선택하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다. 팬데믹으로 육류 공급 망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 역시 이런 추세를 가속화시킨다. 재고 곡물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시작한 대체육 개발로 해외 시장에서 먼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지구인컴퍼니의 민금채 대표가 대체육 시장의 미래를 말한다.






7. 가장 큰 정부가 가장 자유로운 시민을 만났을 때 - 이원재

지금까지 국가가 작아진 것은 없었다. 세계적으로 정부의 크기는 계속 커져왔다. 다만 정부의 역할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정부가 국민들을 얼마나 규제하느냐, 국민 개인을 얼마나 보호하느냐를 기준으로 국가의 역할을 살펴야 한다. 강대국이나 부자 나라에 대한 개념을 다시 규정해야 할 때가 왔다. 나라의 GDP가 큰데 국민 개인에 대한 복지가 부족한 나라라면 이 나라를 부자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기술 발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양극화 추세가 더욱 커질 미래, 국가와 정부의 역할은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 국가에서 개인을 보호하고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으면 개인의 존속은 위험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서 움직이기 위해 다시 모였다. 2회 포럼은 1회에 비해 훨씬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사적 분기점에서 우리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다져 보는 기회가 되었다. 왜 그런지 확인하는 동시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길 바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 내일을 만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을 나누는 만큼 강해지기 때문이다.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 문정인 - 국제질서의 역전, 소프트파워의 부상

뛰어난 통찰력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진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코로나 이후 세계 질서의 5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하며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가치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코로나가 빠른 시일 내에 극복된다면 '기존의 중국과 미국의 전략 경쟁 체제인 국제질서도 많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조지프 나이 교수의 시나리오가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봅니다. 서구와 아시아 국제 정세를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바라보면서 동북아 경제 공동체, 동북아 다자 안보 협력체 등의 아시아 연대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무형의 힘인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코로나19를 계기 삼아 한국형 방역 모델이 국제표준으로 거론될 정도로 소프트파워의 반전을 이뤘다고 합니다. 게다가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존재했고 정부가 효율적으로 정책 조율을 해 나간 점이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잘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더 공헌할 수 있는 국제공헌 국가로 거듭나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인터뷰를 읽는 내내 국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성적이고 전략적이며 상당한 연륜이 느껴졌습니다. 서구 문명이 기준점이라 생각했던 편협한 사고를 가진 제 자신을 반성하게 했습니다. 힘의 역전은 발상의 전환에서 온다는 그의 말처럼 선진국 담론을 벗어나 앞으로 시대를 주축 하는 한 국가로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겠습니다.

결국 소프트파워의 핵심은 스마트 파워이고, 스마트 파워는 정부 혼자만 잘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 시민사회, 미디어를 비롯한모든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단합해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거기에는 대승적 전제가 있죠.

공동체 이익이 우선이라고 하는 우리 국민적 합의 말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유명희 - 포스트 코로나, 달라지는 통상질서의 길을 뚫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무역기구 WTO의 사무총장 후보로 지지하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통상 리더로서 그의 진솔하고 대범한 인터뷰가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자 국제공조를 중견국으로서 주도해야 하며 디지털라이제이션의 공통 규범을 마련하고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성장한 국가이기 때문에 강대국의 각자도생, 보호무역주의가 큰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이미 2016년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 조치로 무역 단절의 손실을 크게 경험했습니다.

중국이나 미국은 내수시장이 커서 반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GDP 대비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은 국가로써 무역의 길이 막히게 되면 엄청난 타격을 입는 상황입니다. 다자간 규범이 최소한의 보루가 되어 회원국이 각자도생 방식으로 가지 못하도록 작동해야 하며 이러한 룰을 만드는데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대응을 통해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중견국의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팬데믹을 극복하는 과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해 통상 관련 국제공조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락다운 조치로 어려움에 처한 민간기업을 대신해 정부가 나서서 정부 대 정부로 국제공조에 힘쓰고 있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국제통상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힘쓰는 정부와 유명희 본부장의 노고에 응원을 보냅니다.

우리에게는 기회인 상황입니다. 한국이 중간자로서, 강대국은 아니지만 '미들 파워'로서 지금과 같은 조건을 잘 활용하면, 다른 나라들도 호의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메디치포럼'의 프로그래머는 1회에 이어 정혜승 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이 맡았다. 이 책의 프롤로그를 썼다.

정혜승 전 센터장은 이날 "세상만사는 한층 더 불안정하고 실행까지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그대로 선택지는 변함이 없다. 흐름을 알고 준비할 것인가, 흐름에 휩쓸려 도태될 것인가.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댈 시간이다"고 역설했다.

정 전 센터장은 LAB2050의 대표이자 경제평론가다. 연구, 칼럼, 방송, 강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설파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이원재의 5분 경영학》, 《MIT MBA 강의노트》, 《소득의 미래》 등이 있다. 〈한겨레〉 경제부 기자로 일하던 중 유학을 떠나 미국 MIT 슬론스쿨 MBA 과정을 이수하고, 한국에 독립적인 싱크탱크를 세우겠다는 꿈을 안고 귀국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했고, 한겨레경제연구소를 설립해 5년 반 동안 소장을 지냈다. 이후 희망제작소 소장, 여시재 기획이사,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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