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것들의 기록
안리나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대 사회의 문신은 일종의 증표로 기능했다. 문신이 증표로 통하게 된 것은 주술적인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원시 문명에선 이 주술적인 의미를 연장시켜 성인식을 통과한 이들에게 문신을 새겨 부족의 구성원이란 의미를 부여했고, 마오리족에서처럼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개성을 표시하기 위한 문신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세계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문신들이 존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교 이후 중국문화권에서 문신은 주로 야만인들의 풍습으로 여겨졌다. 한족의 전통에는 문신이 없었으며, 오월 같은 변방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현대에는 서구권을 중심으로 문화나 예술이라 주장할 정도가 되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전문시술자들도 다수 등장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사(남)가 전신문신(얼굴 포함)을 해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안구를 비롯한 다양한 신체 부위에 문신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 독자도 놀랐다. 특히 여성은 여간해선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문신의 스타일도 다양해졌고, 그만큼 개개인이 문신을 하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단순히 미적 취향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관련된 문신을 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문신(타투)에 대해 오랜 선입견이 강해 부정적인 인식이다. 머리카락도 안 자른 유교문화 영향 때문이다.

독자는 구세대(?)여서인지 문신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은 아니다. 군대 갈 때도 신체검사에서 탈락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수십년 전 일이지만 군 관계자들이 구타와 기합 등 오래 주고, 결국 군의관이 '불합격' 판정이 내린 것을 목격했다. 의아했지만 일관성, 일체적 행동을 강조하는 군에서 사회 부적응자(심신장애자)로 구분해 불합격 처리한다고 했다. 이후 조직폭력배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를 때마다 그들은 대부분 문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강하다. 다만 문신 기술이 발달해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예술적 표현의 한 방법으로 하는 문신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평하거나 비난할 수 없어서다.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한 문신과 예술을 추구하는 문신은 다르다는 입장은 분명하다.



『불완전한 것들의 기록』은 타투이스트 안리나의 이야기와 사진을 담은 첫 번째 포토 에세이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타투이스트로 유명한 저자는 많은 관심과 응원 못지않게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곧 틀린 것이라고 말하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문신이 있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는 저자는 사회적으로 타투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을 바꾸고 증명해 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불완전한 삶 속에서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쓰러져도, 두 팔을 벌리고 자기만의 중심을 잡기 위해 나아가는 저자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타투이스트로서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엄마로서 성장해 가는 과정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슬픔, 우울, 이별의 아픔 등을 통해,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사람을 통해 치유 받게 되는 우리에게 분명 좀 더 괜찮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와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누군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면, ‘저 사람 나빴네’가 되지만, 문신이 있는 사람이 무단 투기하면, ‘역시 그럴 줄 알았어’가 된다. 씁쓸하지만,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싶다. 문신이 있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무수히 많은 후회와 미련을 안고 살아가는 동시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또 정형화된 사회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사랑받기 위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불완전한 삶 속에서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기록이 담겨 있다. 또한 ‘늘 착해야 해.’ ‘늘 잘해야 해.’와 같은 압박감과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지탱하지 못했던 날들에 대한 반성과 함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한 단계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나 역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다. 그보다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예상치 못한 인연과 사건들로 인해 여러 번 길을 헤매기도 하고, 여러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많은 인연과 경험, 좌절 등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때로는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이 후회를 하기도 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아쉬워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끝내 모르는 일이라 더 아쉬울 뿐, 후회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고 답한다.







안리나는 직업이 타투이스트이면서 실제로 전신에 문신을 새겼다. 이때문에 받았을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에 대해서 이 책에서 말한다. 타투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투한 사람에게 마냥 고운 시선을 보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몸에 문신을 새기는 건 개인의 선택이고 취향일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를 저자는 바란다.

저자가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의 육아 내용엔 감동도 느낀다. 문신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육아도 사랑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책임감과 희생, 인내... 지금까지의 삶과는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을 책임감을 갖고 대한다.

그리고 포토에세이라서 감각적인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다. 글과 어울리는 사진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보기에는 좋지만 지나친 노출로 예술적인 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은 자주 접하지 않은 탓인지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자신의 직업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예술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공감이 간다.

"모든 일이 오르막길 내리막길의 반복인 것 같아요'"

이 말도 동의한다. 소신이 있고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뿐이다. 결과는 자신의 노력만큼 얻어질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잠시 주저앉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건물들 틈새로 빛나는 노을이었다. 붉고 노란빛에서 점점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이 마치 내 마음에 또 다른 우주를 담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짙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완전한 밤이 찾아오면 마음에 담긴 우주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틈새」 중에서


나 역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다. 그보다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악플에 모든 감정이 휩쓸려 힘이 들 때도 있지만, 이제는 금세 사라질 불필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의 생명줄을 타인이 쥐고 휘두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버티기 힘들 때는 주변 누군가에게 꼭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악플」 중에서


짙게 밴 향기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넘어져 다친 상처에는 새살이 돋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어둠에도 빛은 내리고, 무섭게 쏟아지던 소나기도 언젠가는 그친다.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확인 사살」 중에서




저자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도 극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이다. 독자도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아성찰을 많이 했다. 본인이나 많은 사람이 타투한 여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데 독자만 선입견을 아직까지 갖고 이 책을 읽기 위해 선택할 때부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삶의 부분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대해 반성도 했다. 여자분들이 문신한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삶은 예상치 못한 인연과 사건들로 인해 여러 번 길을 헤매기도 하고, 여러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많은 인연과 경험, 좌절 등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때로는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이 후회를 하기도 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아쉬워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끝내 모르는 일이라 더 아쉬울 뿐, 후회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에 지치고 관계에 무너지고 흔들리는 일상과 우울감에 힘이 든다면, 이 책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기를. 또 스스로를 믿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시간과 노력은 결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진리의 말을 믿기에 그렇다. 결국 길의 끝에서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기를.



누구나 가까울수록 사소해진다. 우리는 서로 가깝지만 가벼워서는 안 된다. 관계를 저울이라고 가정했을 때, 마음의 무게가 가벼운 한쪽이 존재한다면 반대쪽 저울은 기울어져 치우치고 만다. 수평을 이루는 이상적인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지만, 상대방과 반비례하는 마음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무게」 중에서


저자 : 안리나


타투이스트. 오래된 것을 소중히 여긴다. 빛바랜 사진들, 낡은 물건들에서 오는 수많은 추억과 꾸며내지 않은 날것의 모습이 좋다. 편안하고 꾸준하게, 깊게 마주하는 따뜻함이 좋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플러그드 - 더 이상 하나되지 않는 연인들을 위한 몸과 마음의 대화
치아(治我) 지음 / 책들의정원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각 챕터의 제목만 봐도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 어떤 상담을 원해 심리상담사를 찾았는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람의 심리 상태를 문자 몇 개나 몇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이유로 심리상담을 희망했는지 알기에는 충분하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큰 부분에서 보면 대략 비슷하기 때문이다. 선악을 구별하고,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사랑'이라는 큰 감정 앞에 얼마나 무력하고 쉽게 상처 받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사랑을 하고 있는데, 왜 마음은 더 공허해지는 걸까? 사랑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허탈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순간 등이 그것이다. 『언플러그드』는 함께 있어도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며 해답을 제시해주는 말로 채워져 있다.

사랑이 아니라 동지애만 남았다는 부부, 남자친구가 여사친을 만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여자, 유부남에게 빠져버린 여자 등 사랑하기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너무 닮아있다.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문제점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사랑을 뜨겁게 불태우기 위해서는 나만 이렇게 힘든 문제를 겪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실행한 조사에 따르면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면 이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10명 중 7명이라고 한다. 이는 즉, 내가 모르고 있을 뿐 우리 주변에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이혼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저자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전한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나’이기에 모든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상처 역시 바로 ‘나’만이 치유할 수 있음을, 다양한 상담을 통해 일깨운다. 나 자신을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할 때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또한 자연스레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남편 혹은 아내, 연인, 친구와의 관계가 힘들고 불편했다면, 이 책을 통해 나를 지키는 동시에 관계도 지키는 방법을 배워보자.




1장 너와 내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

- 연인의 이성 친구,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 확신을 주지 못하는 사람, 믿어도 될까?

- 사랑하고 있는데 마음은 더 아픕니다

- 헤어진 사람에게 전화하는 이유

- 나 혼자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 이별 통보를 받아도 보고 싶은 마음


2장 불완전하기에 사람은 사람을 찾는다

- 본능이 우선인 남자와 분위기가 우선인 여자

- 이해보다 의심을 먼저 하는 아내, 바뀔 수 있을까?

- 완벽하지 못하면 사랑도 할 수 없는 걸까?

- 지나간 일이 나의 미래를 가로막을 때

- 일과 사랑, 무엇이 우선인가

- 사랑의 속삭임과 심리적 온도의 상관관계


3장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과 마주보는 순간

- 다른 남자에게서 행복을 찾는 아내

- 사랑이 있으면 가난도 이겨낼 수 있을까?

- 야동을 보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어요

- 남편의 불륜을 목도한 순간

- 몸이 아닌 마음의 문제

- 상습적인 거짓말에 상처받지 않는 방법


4장 행복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

- 연락이 뜸해진 그 사람, 마음이 식은 걸까?

- 반복되는 싸움에 이별을 떠올립니다

- 거절할 수 없는 유혹

- 여자친구가 혼전순결을 원한다면…

- 부부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 여자친구의 과거를 알고 잠을 못 이룹니다



“나 혼자서는 따로 행복해질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달라이 라마)

사랑해서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인이기에, 부부이기에 발생하는 갈등과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마음 아파한다. 갈등은 매우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실수로 카톡을 읽씹했다거나, 나보다 친구 혹은 일을 우선시했다거나, 양말을 빨래통에 넣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아주 작은 노력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서로 간에 생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소통의 부재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과거도, 그 사람의 생각도, 그 사람의 감정도, 그 사람의 생활도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그 사람의 것입니다.

내 과거, 내 생각, 내 감정, 내 생활이 오로지 내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나에게 맞춰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p. 18)








사랑에 대해 ‘맹목적’일 때 사람은 흔히 맹인이 됩니다. 한발만 뒤로 물러서도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는 지금 남자친구가 하는 행동의 진짜 이유는 ‘배려’가 아니라 ‘거리 두기’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맹목적인 사랑이 상대를 지치게 한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하게 이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친구로부터 조금만 관심을 떼어내어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나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기 시작했던 내 생활, 내 꿈, 내 시간 등을 조금씩 나에게 찾아주는 것입니다.(p. 36)



한 부부가 있다. 남편이 집보다는 일을 우선하여 아내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남편이 뒤늦게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해봤지만 아내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 소용이 없었다. “그냥 아이들 엄마 아빠로만 살자” “이혼하자”는 말에 남편도 점점 이 부부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들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담사 치아는 관계의 단절은 대화의 단절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진솔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내가 가진 불만과 상대가 가진 불만을 솔직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더불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사실 그녀의 이런 모든 반응은 ‘나, 이제까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었어.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라는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그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으니까 이혼하자’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당신은 내 말에 흔들리지 말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내가 힘들다는 걸 이해해주고 나를 배려해주면서 흔들리는 나를 이끌어줘’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환경, 다른 삶을 살아오던 사람과 함께 삶을 영위하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힘겨운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를 끌어안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언플러그드』는 이처럼 관계 맺기가 두렵거나 사랑 때문에 힘든 이들이 사람 앞에서, 사랑 앞에서 당당해지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안을 전하고 있다. 상담사 치아가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통해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어쩌면 대화를 자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내가 가진 불만과 상대가 가진 불만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서로 이해하고 둘 다 적극적으로 맞춰주려고 노력하기 위한 대화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진심으로 들어줄 의향도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에만 집중하지 마시고, 남편에 대한 칭찬이나 능력에 대한 인정, 아직도 변치 않는 남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어나가시면 좋습니다.(p. 141)


여성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남성과 다르다는 점, 그리고 서로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누가 ‘맞고 틀리다’를 떠나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내용을 공유하며 감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남자는 ‘맞고 틀리다’가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남자가 어떤 사안을 원인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목적은 하나, 누가 맞고 틀리는지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분명하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과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남자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대화는 남자에게,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시간 낭비일 뿐이죠.(p. 186)



저자 : 치아


‘치아(治我: 나를 다스린다)’라는 필명에서 알 수 있듯, 행복한 삶을 위한 ‘심리 다스리기, 올바른 대인관계’를 오랜 시간 연구해 왔다. 현재는 일 평균 1만 5,000명, 누적 2,000만 명이 방문하는 인기 블로그를 통해 ‘심리 및 성(性) 문제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다. 1996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꾸준히 NLP, 심리치료, 상담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 기관에 소속되어 전문성을 공고히 해왔다.

2016년 출간한 첫 책 《관계 수업》에서는 누구나 궁금해하고 고민하는 남녀의 성 이야기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풀어냈다. 출간 당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등극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소유의 문법
최윤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효석문학상'은 한 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이다. 이효석문학상은 가산 이효석 선생(1907~1942)의 탁월한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평창군 효석문화제'에서 제정했다. 평창군은 이효석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도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해 우리의 풍광과 우리말을 사용해 뛰어난 묘사로 우리 문학과 문단사에 길이 빛나는 작품을 빚어낸 곳이다.

올해로 21번째를 이어온 이효석문학상은 지난해 6월 1일부터 올 5월 31일까지 발표한 중·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심사가 이뤄졌다. 심사에는 오정희·윤대녕·강영숙 소설가와 방민호·정여울 평론가 등 5명이 참여했다.

대상 후보작에는 〈소유의 문법〉과 함께 김금희 〈기괴의 탄생〉, 박민정 〈신세이다이 가옥〉, 박상영 〈동경 너머 하와이〉, 신주희 〈햄의 기원〉, 최진영 〈유진〉이 올랐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은 한국 단편문학의 어제와 오늘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발간한 책이다다.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밀도 높은 이야기를 선보이며, 탁월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 가장 뜨겁게 주목해야 할 작가와 작품의 보고(寶庫)다. 제21회 이효석문학상 대상에는 소설가 최윤의 〈소유의 문법〉이 선정됐다.

〈소유의 문법〉은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인간 속성을 정확히 짚어내는 예리함이 보였으며 이야기가 세련되고 완벽에 가까운 문장의 묘미를 보여 상당히 안정감 있게 전개된 수작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소유의 문법〉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을 묵묵히 응시하는 작품이다. 소유와 탐욕의 시스템에 길들어 ‘이 세상에 올바른 모습으로 거하는 법’을 잊어가는 현대인에게 ‘소유의 문법’을 뛰어넘는 뜨거운 생의 진실을 깨우치는 수작이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에는 대상 수상작 및 우수작품상 외에 대상 수상작가의 자선작 〈손수건〉, 2019년 대상 수상작가 장은진의 자선작 〈가벼운 점심〉이 수록됐다. 오랜만에 장편소설 홍수 속에 만난 이 책에서 아름답고 탁월한 단편소설을 만나 큰 기쁨을 주었다.


대상 수상작 소유의 문법 / 최윤

대상 수상작가 자선작 / 손수건

대상 수상작가 수상 소감

작품론 / 무서운 의식의 드라마가 숨기고 있는 것 / 정홍수

대상 수상작가 인터뷰 / 나의 삶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 / 김유태

우수작품상 수상작

기괴의 탄생 / 김금희

신세이다이 가옥 / 박민정

동경 너머 하와이 / 박상영

햄의 기원 / 신주희

유진 / 최진영

기수상작가 자선작

가벼운 점심 / 장은진






작가 : 최윤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문과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대를 졸업했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 『회색 눈사람』 『속삭임, 속삭임』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첫 만남』, 장편소설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겨울, 아틀란티스』 『마네킹』 『오릭맨스티』, 중편 『파랑대문』, 수필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을 출간했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1976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동굴 속의 두 여자」가, 200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키친 실험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7년 등단한 동생 김희진씨와는 ‘쌍둥이 자매 소설가’이다.

소설집 『키친 실험실』, 『빈집을 두드리다』, 장편소설『앨리스의 생활방식』,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날짜 없음』이 있다. 2009년 문학동네작가상, 2019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첫 소설집 「키친실험실」에서부터 고립과 소통이란 주제에 대해 골몰해 온 그녀는 스스로를 '은둔형 작가'라고 칭한다.

첫 장편소설 『앨리스의 생활방식』에서도 10년간 집안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를 등장시킨 것을 보면 예사로 넘길 말은 아닌 듯하다.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을 묵묵히 응시하는 작품이다. 장애가 있는 딸을 키우며 목수의 꿈을 키워가는 ‘나’는 은사 P의 권유로 시골마을의 저택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외국에 거주하는 P는 시골마을의 저택을 관리해줄 사람을 필요로 했고, 마침 ‘나’는 걸핏하면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는 딸의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요양의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나’는 은사 P의 저택에서 아이와 평화롭게 지내던 중, 마을 주민들이 P의 다른 제자 장에게 집의 소유권을 이전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하라는 황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홀로 우주와 소통하듯 즐겁게 지내는 딸은 가끔 ‘비명’을 통해 이 견딜 수 없는 불합리를 저 먼 곳을 향해 고발하는 듯하다.

‘나’는 딸의 비명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산골마을에서의 조용한 삶이 딸의 아픔을 치유하고 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동아가 숲속이나 산책길에서 그날 주운 물건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나무들을 유심히 살핀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사물들에 조용히 집중하는 딸의 행동이야말로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행복을 느끼는 낙원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집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주인을 몰아내기 위한 기이한 협잡을 벌이는 동네주민들에게 물난리와 산사태가 덮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지만, 그 여름 ‘소유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하며 서로 싸우던 어른들의 떠들썩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예술가로 성장하고, 딸은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모두가 ‘소유권’에 집착하며 집주인을 내쫓는 공작을 벌이는 동안, ‘자연’이라는 그 누구의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조용히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던 ‘나’와 딸은 그 여름 훌쩍 성장하고 치유되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김금희 「기괴의 탄생」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것처럼 보이다가 스승의 불륜과 이혼을 계기로 점점 멀어져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잃고 얻는 것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학생과 불륜을 저지른 스승에 대한 원망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스승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선생님, 걔하고 잤어요?” 돈독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단번에 냉각시킨 이 문장은 스승에 대한 기대와 원망과 미련이 모두 섞인 가슴 시린 문장이기도 하다. 여전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계속되지만 서로를 향한 애틋한 공감의 기운은 사라져버린 그 틈새로 세련되고 지적인 리애라는 존재가 끼어든다.

김금희는 관계의 파국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최첨단 현미경처럼 극대화시켜 ‘나’의 상처가 벌어진 틈새로 ‘기괴한 세상’의 진실이 쏟아져 들어가는 순간의 고통을 명징하게 그려냈다.





박민정 「신세이다이 가옥」은 후암동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불우한 유년의 기억을 복원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오래된 옛집의 쇠그릇에서 나던 비릿한 냄새는 모든 슬픔을 여성들이 도맡아 견뎌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소환한다. 프랑스 입양아 ‘야엘 나임(강장희)’은 ‘나’의 사촌이지만 어린 시절 여동생과 함께 입양되었기에 함께 자랄 수 없었다. 큰아버지의 딸 야엘이 남동생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봉인되었던 트라우마의 자물쇠는 뜻하지 않게 풀려 버린다.

장희, 장선, 장훈 삼남매 중 장희와 장선이 프랑스로 입양된 반면 장훈은 남자라는 이유로 입양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직접 지시하여 손녀들이 해외로 입양된 비극적인 가족사의 중심에는 항상 여성들이 모든 고통을 떠맡아야 하는 불합리한 사회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광복 전에 지어진 일본인 소유의 신세이다이 가옥은 지긋지긋한 가족 내의 학대와 차별의 기억으로 얼룩진 트라우마의 장소다.

남성들이 무능하거나 부재한 상태에서 할머니가 가부장제의 대리 주체가 되어 딸들을 구타하고 멸시한 장소로서 이 부암동의 적산가옥은 트라우마의 ‘흔적’을 품은 장소로서 재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조부모-부모-나에 이르는 3세대의 이야기는 ‘나’와 입양아 장희를 통해 열린 결말로 갈무리됨으로써 윗세대보다는 훨씬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오늘날의 여성들에 향한 연대와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박상영의 「동경 너머 하와이」는 안정된 생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없이 떠돌거나 도망치는 남성들의 이야기다. 엄청난 규모의 탈루와 횡령을 저지르고 빚에 내몰린 처지이면서도 벤츠 S클래스를 당당히 신차로 뽑는 아버지는 ‘나’에게 돈을 구하러 와서도 결코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며 ‘가오’를 중시한다. 약물에 중독된 ‘애인 원모’는 월세 이백짜리 방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으면서도 걸핏하면 종적을 감추어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나’는 간신히 ‘직장’과 ‘글쓰기’라는 생의 소중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뿌리 뽑힌 삶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애인’의 존재가 그에게는 항상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뿌리칠 수 없고, 원모를 여전히 좋아하는 ‘나’는 “결국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수챗구멍”같은 인생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퀴어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오토픽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심사위원들의 지적도 있었다.

박상영 소설에서 나타나는 남성-연인은 겉으로는 관계를 망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나’의 삶을 정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에게 결코 이롭지 않은 존재이지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불가피한 사랑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박상영 소설은 ‘사랑’의 본질을 묻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신주희 「햄의 기원」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마저 스스로 선택하는 예술가들의 고군분투를 형상화한다. ‘햄’은 자신의 죽음마저 예술의 일부이자 작품의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이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나’의 대학 동기 ‘햄’은 자신의 삶마저 가볍게 예술로 승화시켜버렸지만, ‘나’는 불안정한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생활인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선택을 한 ‘나’야말로 햄의 예술가형 삶과 죽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의 반인반수 케이론처럼, 햄은 정말 반은 인간이고 반은 말(馬)인 존재가 되려 했고 그런 그의 목숨을 건 기행(奇行)은 그 자체로 예술로 승화해버린 것이다. ‘나’는 햄의 예술가로서의 열정이 그를 지상의 가치와 공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 자신을 던지도록 했음을 깨닫는다. 예술가로 순교한 ‘햄’과 생활인으로서 정착한 ‘나’ 사이,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화 씨’가 등장하여 질문을 던진다. 피카소의 큐비즘처럼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것이 동시에 보인다고 호소하는 ‘화 씨’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나’는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자신의 삶에서 끝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최진영 「유진」은 생일날 들은 동명 언니의 부음으로 인해 오랫동안 잊어온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유진’의 이야기다. ‘나’와 같은 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언니는 ‘나’의 20대 시절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던 레스토랑의 매니저였다. 유진은 지하방에 살면서도 일요일마다 레스토랑의 아르바이트생들을 집에 초대하여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나’의 가난이 환경 때문이었다면 ‘유진 언니’의 가난은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부잣집을 박차고 나와 홀로 독립하여 가난을 선택한 유진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편안함보다 자유를 택한 언니의 진심을 이해한다.

작가를 꿈꾸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나’를 향해 유진은 따스한 연대감을 표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두 유진의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여기’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은 우울과 젊음과 희망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유진 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살아남은 유진은 죽은 유진의 기억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복원함으로써 더 나은 존재로 변신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락송 2 - 미드나잇, 마가리타
아나이 지음, 허유영 외 옮김 / 팩토리나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의 섹스 앤 더 시티로 유명한 소설 환락송은 대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어 인기를 끌었는데 동명의 드라마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디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들의 철학에 의해 조금씩 그 차이를 보이는데 미국 드라마인 섹스 엔 더 시티에서는 여자들의 성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반면 동양 사상이 깊이 박혀있는 중국에서는 성에 대해 예전보다는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여성들에게 엄격한 잣대가 있을 뿐 아니라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이 남아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판성메이의 고향 집에는 여전히 쉬지 않고 사고가 터지지만 환락송 22층 친구들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고, 다행히 그녀는 연봉을 올려 이직도 하게 된다.

힘들 때마다 왕봐이촨이 판성메이의 곁에서 물심양면 힘이 되어주지만 그와의 미래를 떠올리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남자친구와의 이별의 상처를 털어버리고 새롭게 취직한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추잉잉은 온라인 숍까지 운영하며 돈 버는 재미를 느끼며 적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손님으로 알게 된 동향 친구와 이성적인 호감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이전 연애의 실패로 인해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한다.

취샤오샤오의 사업은 승승장구 하지만 연애만큼은 마음 같지 않다. 자오치핑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 게다가 솔직한 성격 탓에 22층 친구들과도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결혼에 딱히 관심 없던 관쥐얼은 주위 남자 동료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자 결혼에 대한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1년간의 인턴 기간을 마치고 고대하던 정직원이 된다.

한편, 특이점과 결혼까지 약속했던 앤디는 자신의 출생 관련 문제와 트라우마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 그와 이별하기로 결정한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떠난 여행길, 하지만 공항에서 우연히(?) 바오이판과 만나게 되며 예상치 못하게 그와 동행하게 되는데…




판성메이는 퇴근하고 회사를 나설 때 집에서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피해자 측 사람들이 또 병원비 계산서를 가지고 찾아와 1,000위안을 내놓으라고 한다며 울먹였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도 돈 빌려달라고 할까 봐 나를 피해. 엄마는 1,000위안 달라고 쉽게 말하지만 돈 빌리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래도 우리 집에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이번 한 번만이야. 네 오빠도 이번에 나오면 정신을 차릴 거야.”

“잘도 그러겠다. 오빠가 언제 정신을 차리겠어? 다리가 부러져도 정신을 못 차릴걸. 어쨌든 빌려볼게.”

“내일 또 1,000위안을 줘야 돼. 힘들어도 되도록 많이 빌려봐. 어쩌겠니. 오빠가 나오면 다 네 덕분이라고 얘기할게. 다 늙은 우리가 무슨 방법이 있겠니. 너 아니면 누가 네 오빠를 구하겠어.”

“빌려보는 데까지 빌려볼게. 못 빌려도 어쩔 수 없어….”

“꼭 빌려야 돼. 그놈들이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면서 돈 안 주곤 못버티게 한댔어. 네 오빠가 사람을 때렸으니 우리가 어쩌겠니. 너밖에 기댈 사람이 없어. 가족이 안 도우면 누가 돕겠어? 우린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판성메이가 짜증을 냈다.

“그놈들 돌아가라고 하고 내일 은행에 가서 기다려. 얼마든 빌려볼 테니까.”

판성메이가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쉬며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쳐다보았다. 잠시 넋을 잃고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 탔을 때 문득 정신이 들어 버스에 올랐다.

「18장」 중에서



추잉잉이 신용 카드를 받아 물건 값을 계산한 후 커피를 포장해주었다. 그런데 남자가 계산대 주위를 계속 서성이는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라러우 냄새가 나요. 제 고향 냄새에요.”

“하하하! 후각이 정말 예민하시네요. 라러우를 소포로 받았거든요. 고향이 어디세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라서 지명을 써드릴게요.”

진지한 성격의 남자였다. 다만 글씨가 지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비뚤배뚤했다. 추잉잉이 반색을 했다.

“와, 제 고향이 바로 그 옆이에요. 동향 분이시네요. 잠깐만요. 라러우를 조금 나눠드릴게요. 저도 나눠 먹어야 해서 한 줄밖에는 못 드리지만요.”

“설 전에는 계속 회사에서 지내니까 밥을 해 먹을 시간이 없어요. 설에는 고향에 내려가서 먹을 수 있고요.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난감해하는 남자를 보고 추잉잉이 말했다.

“그렇군요. 금연하는 사람 옆에 시가를 두는 셈이겠네요. 명함을 주고 가시겠어요? 타오바오에서 주문하시면 알아볼 수 있게요.”

남자가 카페를 나설 때 마침 들어오던 매니저와 마주쳤다. 매니저가 들어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더니 또 1명 만났네. 방금 나간 남자 모태솔로가 분명해.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씻지도 않나 봐.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더라.”

「23장」 중에서




아무리 친한 사이에도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는 서양에 비해 그런 거리가 다소 모호한 동양에서는 친구의 일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발 벗고 나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친구의 연애마저 간섭을 하고 연애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모습에서 동서 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런 차이도 젊은 층을 대상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그 대척점에 있는 게 아마도 취샤오샤오와 판성메이가 아닐까 싶다.

똑 부러지는 성격임에도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판성메이는 부모의 말씀에 순응하는 예전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이와 반대로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감정에 솔직하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도 거침없는 취샤오샤오는 전형적인 요즘 세대의 모습이다.

그런 그들이지만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고 실연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두 사람을 보는 재미가 환락송의 다른 여자들의 변화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2편이 끝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5권이 완결이란다. 다음 편에서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날지 궁금해진다.


저자 : 아나이(阿耐)


취미로 쓴 소설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하며, 독자들의 수많은 공감과 찬사를 이끌어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현실과 감정을 대변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글재주가 뛰어나고 이야기 구성이 치밀하다. 한 번도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프로필을 자세히 밝힌 적이 없어 신비한 작가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모두 좋아라》, 《동쪽으로 흐르는 큰 강》, 《환락송》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과 함께 떠나는 다크투어
이다빈 지음 / 아트로드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대한민국은 인구 비례 영토가 좁다. 산과 물이 좋아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기후, 대륙과 붙어 있고 섬도 많아 생산물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갯펄도 세계에 드물게 넓게 분포돼 있다. 한 마디로 '살기 좋은 땅'이다. 일찍 농경사회로 접어들어 안정된 삶에 자손도 번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인지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높다. 거기에 원래 같은 나라였다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남북으로 분단돼 인구분포도 남한 쪽이 훨씬 많다. 단위 면적당 인구가 남한이 북한의 두 배가 넘는다. 전쟁 후 복구도 갖은 악조건 하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성은 수그러들지 않아 많은 고급인력 양성으로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다른 나라는 수백 년 걸린 현대화를 불과 몇 십년 만에 이룩했다. 세계가 놀랄 정도로...

2020년 살 만한 나라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수십년 간 우리 민족은 학살, 전쟁 등 어두운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지금도 분단은 이어져 안전과 평화에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산업화, 민주화는 세계 유래 없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해오면서 과거의 악몽을 가슴속에 묻고 지내게 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가 멈춰서버린 도시들은 활기보다는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형국이다. 업무차 여행을 가는 것도 어려운 시점에 관광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 때 찾고 싶은 역사 현장도 가보기 어렵다.



이 책 『소설과 함께 떠나는 다크투어』는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 삶의 의미를 찾아보는 여행이라는 '다크투어'로 붙여졌지만 굉장히 의미 있는 현장 탐구 여행이다. 이 책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비극적인 우리 역사를 그려낸 21편의 소설과 함께 다크투어를 떠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행적을 따라 5개 도시의 뒷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가 민중의 그늘진 삶을 조명해본다. 제주의 현기영, 부산의 김정한 등 도시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소설은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내면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과거의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 여행기를 통해 미래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길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고맙다.

70년 전에는 6.25전쟁이 일어났고, 60년 전에는 4.19혁명이 일어났다. 50년 전에는 노동운동에 획을 그었던 전태일 분신 항거가 일어났고, 40년 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이 10년 주기로 일어났다. 2020년 코로나로 또 한 번 대한민국이 크게 흔들렸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변혁기 모습을 잘 담아낸 소설 21편과 함께 5개 대도시의 어두운 역사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다.



1장 〈개항의 물결 따라 인천〉에서는 개항장 주변의 동구 화평동, 만석동과 중구의 개항누리길을 걷는다.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인천항을 개항했다. 불평등조약으로 치외법권을 누렸던 외국인들과 대조적으로 조선인들은 일제의 수탈과 핍박을 받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나갔다.

새로운 삶을 찾아 인천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화평동과 선상파시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북성포구에서 현덕의 「남생이」를 만나본다.

만석동에서는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지가 어떻게 변모되었고, 아직 쪽방촌에서 살 수밖에 없는 가난의 대물림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또한 강경애의 『인간문제』의 현장인 동일방직에서 인간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오정희의 「중국인거리」 속 풍경이 남아 있는 차이나타운에서는 양공주로 살아야만 했던 여성의 삶을 마주한다.



성냥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보여서 올라가 보았다.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야트막한 산은 소나무가 많아서 송림산 혹은 만수산이라 불렀다. 인천은 우물이 적고 수질이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보가 절실했다. 일제는 수도국을 신설하고 이 산의 꼭대기에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만들었다. ‘수도국산’이라는 이름도 이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이곳까지 찾아들었다.(p. 21)



2장 〈고립된 섬의 운명 제주〉에서는 ‘4.3작가’로 알려진 현기영 작가의 소설 속 현장을 찾아간다. 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 일제는 일본 본토 주변의 섬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했고, 경제 수탈을 본격화했다. 해산물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던 제주 해녀들은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했다.

『바람 타는 섬』에 등장하는 해녀들이 물질했던 곳을 찾아 제주 여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또한 「순이 삼촌」을 비롯한 3편의 소설과 함께 해방 후 미군정기에 일어난 제주4.3사건 유적지를 찾아서 고립된 섬의 운명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3장 〈거친 삶의 파도 부산〉에서는 김정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을 따라간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 많았다. 승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낙동강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김정한 작가는 「사하촌」을 통해 친일 승려들을 고발했다.

「사하촌」의 배경지인 범어사와 부산의 젖줄 낙동강에서 삶의 터전을 이뤘던 사람들의 수난을 담은 「모래톱 이야기」의 배경지인 을숙도를 찾아가 변화된 현재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더불어 「지옥변」에 나오는 1950년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모습과 치열했던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미동을 찾아 부산의 속살을 만나본다.



다랑쉬굴 근처에서 무정세월을 떠도는 혼들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했다. 3월인데도 바람이 이렇게 매서운데 한겨울 동굴에 있던 사람들은 그 추위를 어찌 견뎌냈을지 상상하니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토벌대의 총부리에서는 벗어났겠지만 피란생활은 너무나 처절했을 것이다.

겨울철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만 있을 뿐 먹을 것이 어디 있었으랴. 종달새가 푸른 하늘을 날아올라도 동굴 속 사람들은 한라산 아래 대숲의 울음소리만 들었을 것이다.(p. 100)


산이 많고 평지가 별로 없는 부산은 산비탈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피란민촌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때 불과 28만 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6·25전쟁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피란민들이 넘치자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묘지의 비석을 가져다 주춧돌로 삼고 그 위에 미군들의 보급품 상자를 떼어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p. 144)



4장 〈격변의 도시, 서울〉에서는 시대별 서울의 변화를 보여주며 도심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간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통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를, 『천변풍경』에서는 서울 서민층의 생활상을 그려냈다. 박태원의 작품을 따라 종로와 청계천을 거닐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본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미군정과 군사정권이 뒤를 이어 암울한 시대는 계속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1960년 4.19혁명을 일으켰다.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에서는 4.19 당시 대학생의 고뇌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지인 옛 평화극장과 고대생 피습사건의 현장을 찾아 4.19가 우리 역사에 어떤 교훈을 주었는지 되새겨본다.

한편 이호철의『서울은 만원이다』에서는 1960년대 급성장한 사회의 폐해를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무대인 사창가 ‘종삼’의 흔적이 있는 서울 중심가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화려한 빌딩 뒤에 가려진 그늘을 마주하고, 1970년 분신을 통해 열악한 노동 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한 전태일의 흔적까지 따라가 본다. 『전태일 평전』을 써서 전태일을 세상에 알린 조영래 변호사의 이야기와 전태일이 분신까지 하며 지켜내려고 했던 노동자의 삶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동대문 평화시장 속에서 찾아본다.



시위대에 합류한 소설의 주인공 역시 내재된 인간의 파괴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극장을 부수다가 곧 의식의 혼란을 겪는다. 계엄군이 극장 안으로 들어오자 발각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긴 밤을 극장에서 웅크린 채 지낸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려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혁명은 성공한 것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이다.(p. 184)


동상을 만든 임옥상 화가는 전태일을 시장 사람들 속에 섞이게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태일 동상을 지나간다. 동상 주변 바닥에는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동판 4천여 장이 깔려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글씨를 밟고 지나갔다. 임옥상 화가의 의도는 전태일을 일상에서 만나게 하고, 발길로 갈고 닦아서 빛나게 하는 것이었는데 전태일의 정신은 계승되고 있는 걸까.(p. 194)



5장 〈어둠 속의 빛 광주〉에서는 고려인마을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현장, 5.18광주민주화운동 유적지를 찾아가 민초들의 저항정신을 기려본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자 이에 반발한 의병은 연해주로 넘어가서 항일운동을 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통해 고려인의 삶을 반추해보며 광주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인마을을 찾아간다. 역사문화마을 양림동에서는 문순태의 『낮은 땅의 어머니』 의 주인공 조아라의 삶을 알아보면서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흔적도 함께 찾아본다. 세월을 건너 뛰어 임철우의 『봄날』과 함께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그날의 흔적은 광주 곳곳에 남아 있다. 생생하게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낸 소설을 따라 오월길에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광주의 참상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파도를 쳤는지 되새겨본다.

어둠 속 역사를 담아낸 21편의 소설과 함께 떠나는 이 여행기를 읽는 동안 독자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밀려가고 무너지고 연대해 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5·18 최후의 항쟁지 전남도청으로 올라가보았다. 2층 창가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이곳에서 민주주의 불꽃을 애타게 기다렸을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붉은 오월은 떠나갔고 하늘은 푸르렀다. 벌써 40년이 흘렀다. 5·18 영령들은 광주를 떠나갔을까.(p. 233)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나 화려한 볼거리도 좋지만 역사를 되돌아보고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의 삶에 대해 추억을 가지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또 대한민국 큰 도시들이 어떤 역사와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봐도 좋겠다. 한국의 가장 가까운 역사들을 도시 속에서 문학적으로 접할 수 있는좋은 기회인 만큼 역사에 관심의 유무를 떠나 읽어보며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헤쳐왔는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아는 것도 코로나 극복에 위안과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감사하고, 직접 가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책이다.


저자 : 이다빈


1996년 [현대경영] ‘한국현대시 30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3년 동화집 『모자선생님』으로 문예진흥기금을 받았으며, 시집 『문 하나 열면』(2016)을 출간했다. [한국문예신문] 발행인으로서 전 세계로 문학기행을 다녀와 『작가, 여행』(2018)을 써냈다.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201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도서관 상주작가로 활동하면서 시민들의 글을 책으로 엮어냈고, 『소소여행:성남테마여행기』, 『소소여행:고양테마여행기』(2019) 등 『소소여행』 시리즈를 펴내며 일상 여행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25년간 한국문예교육원장으로서 글쓰기 교육에 힘써 왔으며, 청소년들이 글쓰기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을 쓴 『말하지 않는 아이들의 속마음』(2019)을 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