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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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있는가. 지혜롭고 강한 남성들이라도 여성이 없는 도시는 없다. 남성들이 힘과 지혜에 앞선다고, 전쟁에 이겨 패배한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온다 해도 남성들로만 이뤄진 사회는 없다. 그럼 왜 남성들은 여성들이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한 사회를 만들었는가. 독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성을 소유 개념으로 대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이 소유한(?) 여성들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 인식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강했던 것 같다.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고 인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이 증진되고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접어들었어도 여성에 대한 대우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를 지배하고 이끄는 주체들인 남성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개선돼 왔지만 아직도 사회나 지도층의 뿌리 깊은, 잘못된 인식을 바꾸지 못한 증거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직장에서의 성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지도층으로의 여성 진출은 아직 쉽지 않다. 물론 수백 년에 비해 월등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동등해졌다고 인식되진 않는다. 여성들이 동등하다고 인식할 때까지 미루려는 심산인가라고 추측할 뿐이다. 독자도 남성이다. 그리고 결혼하고 딸도 낳았다. 아직은 배우자와 딸이 남성과 똑같이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왜? 독자도 남성우월주의 인식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을 읽으며 고백한다.



1929년이다.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되었을 때다. 그럼에도 이 사진은 위반의 느낌을 준다. 하루가 끝나고, 여자는 이곳을 뜨고, 사진가도 떠나고, 해가 기울고, 그에 따라 가로등 그림자도 움직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이 장소의 모습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순간이 전부다. 벽을 배경으로 뚜렷한 윤곽을 그리며 금지와 저항의 장소에서 막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 여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자는 불멸하는 독특한 존재로 두드러지게 남았다.(p. 12)

환경 인권운동가 리베카 솔닛이 성폭력이 만연하고, 밤에 도시를 걷는 여성들을 성매매 여자로 보는 폭력적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걷기의 인문학』이란 책을 썼다. 이러한 작업에 발을 딛고서 이 책의 저자 로런 엘킨은 주제를 더 깊고 넓게 파고들어쓴 책이 『도시를 걷는 여자들』이다. 로런 엘킨은 여성이 도시에서 걸을 때 만나는 위험과 매혹을 탐구한다.

이 책의 원제는 ‘플라뇌즈(FLANEUSE)’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근대의 도시 보행자,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관찰하는 산보자를 뜻하는 말인 ‘플라뇌르(FLANEUR)’라는 남성형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꾼 단어다. 단어의 성을 바꿈으로써 로런 엘킨은 이 남성형 명사를 둘러싸고 형성되어온 걷기의 서사를 전복한다. 여성은 어떻게 도시 환경에서 배제되어왔는가, 그럼에도 도시는 여성들에게 어떤 자유와 기쁨을 안겨주는가, 여성이 도시를 걷기 시작할 때 걷기라는 행위의 의미가 어떻게 뒤바뀌는가를 탐색한다.



책에 따르면 걷는 행위는 오랜 세월 예찬되어왔다. 많은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걷기가 지닌 다채로운 의미, 사색과 예술과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이 행위가 인류에게 갖는 의미를 탐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공장소를 걷는 일은 대단히 성별화되어 있는 일이기도 했다.

엘킨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워져온 여성의 지성사와 문화사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의 대도시를 두 발로 걷는다. 그리고 자신보다 앞서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베네치아를 누비며 위반하고 창조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만난다.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걷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라고 정의 내린 ‘플라뇌즈’의 초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진 리스,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등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엘킨은 도시와 여성의 신산한 동시에 짜릿한 관계를 생생하고 다채롭게 보여준다.



로런 엘킨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여성 예술가들을 읽어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19세기 작가 조르주 상드부터 얼마 전 타계한 누벨바그 감독 아녜스 바르다에 이르기까지, 엘킨은 여러 시대를 가로지르며 이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 이들의 또 다른 면모를 조명한다.

이를테면 엘킨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여성이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 플라뇌즈에 관한 탁월한 에세이를 쓴 작가, 도시 공간을 온몸으로 감각하려 했고 여성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한 작가로서 버지니아 울프를 소개한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주요 텍스트로 읽히는 진 리스의 작가로서의 삶과 작품 세계가 파리라는 낯선 곳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지극히 생생하게 펼쳐 보여준다.

"도시에는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도시에 대해 쓰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들고 등등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도시와 어울렸던 여자들이 많았다. [……] 도시를 돌아다니는 기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다를 바 없다. 플라뇌르의 여성 버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여자들이 도시와 상호작용해온 방식을 남성의 방식 안에 가두게 되고 만다. 사회적 관습이나 제약에 대해 말할 수는 있으나 여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워서는 안 된다. 대신 도시를 걷는다는 게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여성을 남성적 개념에 맞추려 하는 대신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아까 했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면, 거리에서 보들레르를 지나쳐간 플라뇌즈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pp. 28~29)



남장을 하고 돌아다니고 수많은 애인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한 조르주 상드는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자신의 작품 안에서 사회와 젠더에 관한 이상을 어떻게 펼쳐냈는지를 파고든다. 종종 헤밍웨이의 전 부인으로만 알려지는 마사 겔혼, 대범하고 용감한 종군기자였던 그녀가 ‘여성 종군기자’로서 맞닥뜨렸던 제약이나 픽션과 사실 사이에서의 고뇌를 소설가로서는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소피 칼에게서는 ‘추적’이라는 남성적 행위가 여성의 것이 되었을 때 어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지를, 아녜스 바르다에게서는 카메라와 영화라는 매체 뒤에 여성이 설 때 시선의 의미가 어떻게 전복되는지를 읽어낸다. 잘 알려져 있는 이 예술가들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는 엘킨의 예리한 시선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녀의 따뜻한 애정이다.

엘킨은 선배이자 동료인 이 여성 예술가들을 가깝게 여기고 유대감을 가지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애정 어리고 공감적인 시선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 더 경유해, 이 예술가들에게서 관계, 고독, 시선, 창조성, 사회적 저항 등의 주제를 길어 올리는 페미니즘 비평을 가능케 한다.



리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관점의 차이”라고 부른 것으로 세상을 봤다. 리스가 만들어낸 여성 인물에게서 이런 면이 드러난다. 이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도 말을 제대로 하지도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한다.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 하거나 잘못된 이야기를 한다.

도시에 오면 우리는 이제야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구나 싶지만, 파리에서조차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리스가 쓴 단편 중에 프랑스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영국 여자가 나오는 단편이 있는데, 거기에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기계 밖에서” 산다는 말이 나온다. 여자는 간호사나 다른 환자들이 “기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힘, 확신”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그런 게 없으며 그들이 자신의 결함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한다.(p. 96)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울프는 머릿속에서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주변에서 보는 삶이 '거대하고 불분명한 재료 덩어리' 같았고 “나에게 전달되어 그것에 상당하는 언어가 되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니 '삶 자체'를 종이 위에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p. 127)


『자기만의 방』에는 조용하고 분리된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나오는 게 아니다. 이 글은 여자가 방 밖으로 나갔다가 부딪히게 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지금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성과 허구, 여성과 역사에 대해 대담한 질문을 던지는 지적 무단침입이기도 하다.(p. 138)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출간 이후 펜 어워드 파이널리스트에 오르고 《가디언》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비평가로서, 에세이스트로서, 작가로서 엘킨이 지닌 탁월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예술 비평과 자전적 산문과 여행기를 수려하게 엮어내는 엘킨의 글쓰기에는 독자를 단숨에 다른 시대,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엘킨은 미국에서 태어나 파리로 이주했고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살아온 경험, 미국의 교외에서 자라나며 가졌던 도시에 대한 두려움과 선망, 이민자의 후손으로 어디에도 좀처럼 완벽하게 속하지 못하고 정착과 방황 사이를 오갔던 경험을 풀어놓는다. 이러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도시 공간을 유연하게 누볐던 여성 예술가들을 읽어내는 예리한 시선을 직조하여 흥미롭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낸다. 여기에 문학과 예술과 도시공간을 충실히 연구해온 학자의 성실함이 탄탄한 배경 지식과 신뢰성을 더한다.

“달콤하게 날카롭고 선동적”(《가디언》)이며 “리베카 솔닛에 기초해 한발 더 나아간”(《파이낸셜타임스》) 작가이자 “그녀 세대의 수전 손택”(데버라 리비)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첫 번째 책은, 그녀의 글쓰기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기대하게 만든다.




저자 : 로런 엘킨(LAUREN ELKIN)


작가이자 비평가. 책, 예술, 문화, 여행에 관해 쓴다. 《뉴욕타임스 북 리뷰》 《가디언》 《하퍼스》 《르몽드》 《런던 리뷰 오브 북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등의 매체에 기고하며 《화이트 리뷰》의 객원 편집자로도 활동한다. 1930년대 영국의 여성 문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리버풀대학교의 명예연구원으로 있다. 뉴욕 태생이고 2004년에 파리로 이주했다. 좌안에 오래 살다가 지금은 우안에 살며 벨빌 근처를 배회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파리와 리버풀을 오가며 살고 있다.


역자 : 홍한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우먼 월드』 『먹보 여왕』 『밀크맨』 『달빛 마신 소녀』『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바다 사이 등대』 『페이퍼 엘레지』 『몬스터 콜스』『가든 파티』 『하틀랜드』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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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클래식 - 음악을 아는 남자, 외롭지 않다
안우성 지음 / 몽스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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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고 투박한 감정 상태가 단단하고 이성적인 거라고, 독자는 얼마간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사회를 이끌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일방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척박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부하고 살아 남기 위해선 감성보다는 이성이 우선시되고 중요하게 생각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거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서도 그런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교육도 그렇게 받았다. 음악이나 미술, 체육 등 예체능 과목은 대학 입시라는 관문 앞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심지어는 대학 입학을 위해 영어 수학 국어 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과목별 배점이 높기 때문) 예체능 과목의 시간은 '국영수'에 내주고 입시 학년에 가면 아예 교과목에서 빠지기도 했다. 16년을 그렇게 교육 받고 그렇게 사회에 나온 사람들은 당연히 음악이나 미술은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시기에 “남자가 뭐 그래”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주로 여성에게서다. 노래도 못 부르고, 그림 솜씨도 형편없을 때 듣는 핀잔이다. 감정을 드러내고 솔직한 남자는 종종 경박하고 가벼운 사람으로 오해 받았다. 평범하고 좋은 사회인이 되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다.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껴도 외롭다는 표정은 피한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감정이 메말랐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삶의 절반을 넘어서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적 위치를 갖게 된 후 알게 된 '예술의 힘'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음악은 우리를 산책으로 이끌고 사색으로 인도하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고 내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도와준다.”

슬프면 슬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내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보호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상처에도 무뎌져 버린,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어둠에서 구원해주는 것도 음악이 하는 일이라고 『남자의 클래식』 저자 안우성은 설명하고 있다.

독자는 적극 공감한다. 이 책을 만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에 꽤 심취했기 때문이다. 지휘자이자 바리톤, 음악 칼럼니스트인 안우성은 메마른 감정으로 마음을 닫은 채 외로워하는 남자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권한다.

음악과 음악가의 삶을 통해 배우고 느끼고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굳어 있는 남자들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도구로 클래식 음악과 음악가들의 삶을 소개한다. 클래식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친해질 수 있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서다.




딱딱하고 ‘평균적인’ 한국 남자였던 저자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여러 음악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사색과 낭만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책에는 저자가 만난 음악가들의 스토리가 등장한다. 낭만의 세계로 타인을 인도하고 순간순간을 작은 감동으로 채울 수 있는 남자가 진정한 젠틀맨이라는 걸 알게 해준 지도 교수, 친절이 최고의 매너라는 걸 깨닫게 해준 플라시도 도밍고, 일상 속 일탈을 통해 스스로 즐길거리를 찾고 여유를 찾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 오페라 코치 마크 로슨, 지휘자의 역할과 카리스마에 대해 생각하게 한 정명훈과 켄트 나가노, 금세기 최고의 오보이스트이자 누구보다 소탈한 소년의 모습으로 저자를 감동시킨 하인츠 홀리거 등. 그가 만난 음악가들의 스토리뿐만 아니라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브람스, 카루소, 카살스 등 클래식 역사에 획을 그은 음악가, 연주가들의 스토리를 통해 그들의 음악적 정서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픈 대가의 태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높은 경지에 오른 음악가들은 엘레강스하다. 무대에 오르는 게 일상인 그들의 태도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면 때문인지 음악계의 대가들 대부분은 고상해 보이는 한편 도도하거나 차가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중략) 이렇게 무대 위에 서면 ‘타인의 시선에 의한 자기 객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쉽게 말하면 남의 눈으로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태도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되고, 궁극적 아름다움은 화려함이나 과장이 아니라 불필요한 행동을 덜어낸 간결함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대가의 우아함 또는 친절함’ 중에서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아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모든 남자의 바람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헛되이 소진하지 않으려면 여유의 시간을 통해 ‘깨어 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생상스를 통해 깨닫게 된다. 비록 허덕이며 쫓기는 삶이라도 ‘못 놀면 죽는다’라는 다짐으로 여유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바쁨 그 자체가 아니라 ‘즐기는 삶’이었음을 상기하며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대한 대작곡가의 소탈한 음악을 더 사랑한다. 아마 이러한 사실을 진작 생상스가 알았더라면 더 많이 놀면서 더 유머러스한 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았을까?

- ‘당신이 바쁘게 사는 이유’ 중에서



저자는 음악가들의 스토리를 통해 ‘내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게 나를 돌보는 가장 중요한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다. 머리는 이성, 가슴은 감정, 몸은 행동력이라고 봤을 때 현대인의 이성과 행동력은 이미 과잉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몸 관리를 위해 PT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노력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 감정에 귀 기울여야 할 때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누가 그리워서 만나고 싶은지, 누구와 산책하며 대화하고 싶은지 내 진짜 욕구에도 귀를 기울이라고 말이다. 감정이 메마른 삶은 불행한 삶이다. 내가 원하는 걸 알고 내가 무엇에 감동받는지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진지한 것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음악을 일상으로 들인다면, 그런 사회라면 감정을 틀어막고 살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감정 단절을 겪고 살아가는 남자들에게, 원활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의 감정에 진지하게 소통할 기회를 갖자고 말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들이 많아지고 격의 없이 솔직한 소통이 가능해지면 각자 지닌 외로움도 덜어낼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감정도 발달한다. 음악이나 미술, 영화 같은 사색거리를 찾아 그것을 향유하고 또 언어를 통해 구체적 감상으로 표현했을 때 검정도 성숙하고 세련되어진다.”




클래식을 좀 안다는 애호가들도 음악을 들을 때면 유독 기술적인 면을 많이 본다고 한다. 누가 얼마나 소리를 길게 내고 특출난 기술을 보여주는지만 본다면 결정적인 하이라이트 순간만 좋은 점수를 준다면 결코 예술을 예술로 즐길 수가 없다.

『남자의 클래식』에서는 음악 안에 감동받을 만한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것들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면 음악 감상의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남자의 클래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나 남자들만을 위한 음악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감정 단절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 ‘신전의 횃불을 지키는 사제’ 처럼 클래식 음악이 고상한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어온 클래식 애호가들, ‘음악의 쓸모’에 대해 알고 싶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글과 음악을 소개한다. 합창단 지휘자로, 클래식 음악 강연자이자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최고의 무대에서 활동한 음악가 특유의 경험을 살려, 보통 사람들과 나누고픈 철학적 사유는 깊고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이 책의 키워드로 사용한 '남자의 태도나 자격'을 진지함, 남자의 고독, 웰에이징, 지성인의 태도, 겸허한 마음, 상처와 치유, 상실과 절망, 시작의 순간, 남자의 진심, 결단의 순간, 남자의 신념, 기교보다 기품, 실력과 파격, 소통, 남자의 매너, 리더의 자격, 절대자의 자리, 남자의 낭만, 리렉스, 소탈함, 남자의 동심, 위엄과 위트 등 수많은 단어들이 멋지게 느껴진다.

음악가로서, 남자로서 저자가 전하는 말들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익숙한 말들인데 잊고 살았음을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이 책이 클래식을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정답게 읽히는 이유이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는 건 감정의 나사 하나가 고장 났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감정 수업이 필요하다. 감정을 배우는 데 있어 음악이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다.”

-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 : 안우성


독일과 영국에서 켄트 나가노 등 세계적 지휘자와 함께 솔리스트로 활동한 바리톤. 독일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대 석사 과정, 최고 연주자 과정을 졸업한 후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오페라 〈마술피리〉, 〈어린이와 마법〉, 〈비밀 결혼〉 등에 주역으로 출연하였고, 독일에서 〈겨울나그네〉 전곡 독창회와 다수의 오라토리오 독창자로 협연하였다.

움베르토 조르다노 국제 콩쿠르, 루체로 레몬카발로 국제 콩쿠르 등 다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 영국 오페라센터에서 주관한 ‘영 아티스트’에 선발되어 유럽연합장학금을 수상하고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독일 국영 TV 방송국 오케스트라와 독창 음반 제작, 독일 뮌헨 국립 오페라단 오펀스튜디오 전속 솔리스트, 독일 프라이부르크 오페라단 객원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클래식 아카데미 ‘클래식 월담’, 사회인 혼성 합창단 ‘오싱어즈’ 음악 감독 등 보통 사람들의 클래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클래식이 개인의 삶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글을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해 왔다. 대한항공, 차움 등의 초청 강연과 MBC ‘사색의 공동체 스미다’ 강연, 문화일보 ‘이 남자의 클래식’ 칼럼 연재 등을 통해 클래식 음악과 인문학의 접점을 모색해 가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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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한 유산 - 8명의 가족이 다 때려치우고 미국 횡단 여행을 떠난 이유
제준.제해득 지음 / 안타레스(책인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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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여행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렌다. 일상적인 단어에 여행이라는 두 글자만 붙이면 특별한 기대감을 준다. 그만큼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하고 미래를 창조적으로 계획하는 데 도움을 준다.

7, 8월은 여름 휴가 시즌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내외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기간이지만 올해는 전래없던 감염병의 확산으로 모두의 발이 묶여버렸다. 해외 여행은 고사하고, 가까운 곳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작은 희망마저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어려워졌다. 일상 생활도 힘들어진 탓에 성인남녀 절반 이상이 '코로나 블루'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깥 활동은 어렵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오히려 가족 거리 좁히기 기간으로 지내는 '위기가 찬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이 시간으로 가족간 거리 좁히기로 가족애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우울감, 무기력증,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의 여행 이야기지만 재미도 있고 끈끈한 가족애를 다지는 모습을 보며 미소도 살짝 짓게 된다. 무엇보다도 가족애를 실현하는 데 많은 영감을 준다.



『위태한 유산』은 할아버지부터 22개월 손녀까지 8명의 가족이 40일간 미국서부, 동부, 캐나다, 하와이를 여행한 기록이다. 이야기의 저자는 아버지와 20살의 막내아들로 둘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해 실었다.

저자는 이 책이 '여행' 이야기이자 '유산'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행이라는 경험 자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 시간과 추억을 강조한 말이다. 비행기 출발부터 순탄하진 않았지만, 함께 협동하며 여행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 있고, 공감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 여행을 기획한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환갑 이후에는 지금과는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고, 익숙한 틀 안에서는 그 답을 찾기가 어려워 가족 여행을 계획했단다.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늘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열심히 자기계발서도 읽어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그런 나의 생각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나에게도 여행이 사고전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캠핑카 타본 적 없는 할아버지, 난생 처음 미국에 가보는 장모님, 해외 여행 자체가 처음인 큰사위,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이모. 5+2+1, 보기 드문 조합의 여덟 가족. 다소 무모하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를 그들은 40일 동안 미국 전역을 횡단했다. 『위태한 유산』이 탄생한 이유다.

서부는 캠핑카를 타고, 동부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 것도 모자라서 캐나다와 하와이까지 다녀왔다. 3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20살의 나이로 2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 제준과 30년 동안 회사를 운영해온 사업가 아버지 제해득.

이 책은 부자(父子)의 여행 인문학으로, 미국 여행에서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와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따뜻한 성찰의 글이 담겨 있다.

불확실한 미래로 방황하는 청춘, 이제 막 아이가 생겨 부모님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경험하기 시작한 청년, 은퇴 후 사랑하는 가족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싶은 우리 부모님에게 이 여행기는 사랑과 행복 그리고 가슴 속 깊이 평생을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행복하게 다녀온 여행은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유산이었다. '위대한 유산'이 아닌 '위태한 유산'이라고 지은 제목에 수긍이 간다. 이 책 또한 보통의 여행기처럼 독자가 실제로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장르는 여행으로, 여행기에 속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여행이 아닌,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놓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이 책을 펼치면 미국 여행 속 심장 뛰는 이야기와 스스로 깊게 성찰할 수 있는 글에 눈은 쉴 틈이 없다. 그 후 이 책을 덮으면 알게 된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변화된 인생의 태도를 만나게 된다.



가족과 다 함께 다녀온 마지막 여행은 언제더라?” 책을 펼치며 시작된 질문이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팍팍하고, 치열한 삶. 얼마 없는 쉬는 날은 소중한 사람을 챙기기보다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우선시하고, 그것은 '가족 탈출'의 빌미가 돼 왔다. 그것을 빌미로 얻은 것은 잠, TV 시청 등이 거의 전부였다. 간혹 등산은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다닐 뿐 가족과 함께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많은 사람이 세월이 지날수록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후회를 한다. 독자처럼. 중요한 것이 우선 순위에서 자꾸 밀리게 되는 이유는 간절하지 못해서라고 성찰한다. 간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머릿속으로는 그 가치를 알지만, 마음으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은 잠시 벗어두고 떠난 여행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느낀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앞으로 가족의 관계 설정에 좀 더 나은 계획을 하게 한다. 소중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많은 생각을 한다.

8명이 40일 동안 한 여행, 개개인의 경험을 다 더하면 약 1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들은 40일을 여행하며 1년이라는 시간의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업가와 박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 아들로부터 큼지막한 여행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아들은 부드러운 묘사로 여행의 순간을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아빠는 과감한 묘사로 여행하며 얻은 교훈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저자 : 제준(아들)


여행가이자 삶을 쓰는 작가다. 열 곳이 넘는 나라, 50개가 넘는 도시를 여행한 아들은 17살 때, 자신의 성장을 정리한 책을 시작으로 습작 2권과 출간작 2권을 썼다. 책에 관하여 삶을 여행하고 노래하며 느낀 것들을 글자에 담아내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아닌 사람 제준으로 온라인에서 소통할 때 쓰는 필명 유월은 준(June)이라는 이름에서 따와 자신에게 선물했다. 모든 이들의 꿈을 응원한다는 필명의 뜻을 바탕으로 예술가로서의 삶과 유니콘 기업의 선장인 사업가로서 삶을 동시에 꿈꾸고 있다. 아들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론이 아닌 실전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이다.


저자 : 제해득(아버지)


중소기업 CEO이자 도시공학박사다. 25년 동안 한 번도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건설회사와 건설자재 회사를 경영하면서 수백억 원의 연 매출을 올렸다. 더불어 R&D 연구개발에 관심을 가지며 발명한 특허는 60건이 넘는다. (주)아이씨오엔, (주)뉴택매써드, (주)콘스타 대표를 역임했고 지금은 경관포장기술연구소와 (주)하이탑의 대표를 맡고 있다. 도시개발정책 전문가이며 모교인 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에서 도시개발 분야의 강의를 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국토교통부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심사를 하며, (사)미래도시 포럼 이사, 한국 중소벤쳐무역협회 부회장, 한국공업화학회 부회장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집에서는 TV 드라마를 보며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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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감별사 - 미스터리 로맨스
마키림 지음 / 바이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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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다'는 이 책의 명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만물이나 인간 존재에도 균형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조정해 맞추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선뜻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다. 더욱이 인위적으로 인간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음양이나 자연의 순리는 자연 스스로에게 맡기고 인간은 오히려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갑자기 이 책에서 처음부터 이 논리를 들이대니 로맨스 추리소설을 기대했던 독자로서는 저으기 당혹스럽다.

“세상 만물에는 균형이 존재하고 있는데 저는 우연히 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많거나 적으면 안 되기에 누군가 조정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만 모두가 사랑만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실시간 음원 차트를 보면 10위 안의 노래가 대부분은 사랑 노래이고 그중 상당수는 이별 노래다. 그만큼 사랑은 동서고금을 떠나 영원한 주제인데 그 까닭은 누구나 사랑, 특히 이별에 관한 안타까운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9년 전 저자 마키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가 있었다고 한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긴 세월 동안 숙성돼 드디어 소설로 세상에 나왔다. 『불륜 감별사』는 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다는 착상에서 출발한 미스터리 로맨스다.

사랑만 있고 이별이 없다면 균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별 조정을 통해 사랑과 이별은 평행하게 유지된다는 이 신비스럽고 조금은 당혹스러운 이야기는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여성이 총을 들고 주차장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야니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는지 눈에 힘을 주었다.

점점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시간은 정지해버렸다. 그는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망치는 여성은 반년 전 헤어진 리헤르였다.”

갑작스럽게 목격한 살인의 현장에서 도망가는 용의자는 그 모습을 절대 잊을 수 없는 헤어진 연인이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동료를 보면서 주인공 야니 존슨은 큰 충격에 빠진다. 서로 엇갈리는 연인들의 운명, 미궁으로 빠져드는 살인 사건, 조금씩 밝혀지는 음모, 충격적인 반전까지를 쉴 새 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미스터리한 상황이지만 그 상황과 대화와 감정이 모두 한때 열렬히 사랑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내용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그렇게 격렬해진 감정의 끝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이 소설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인 ‘과연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를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형사님, 불륜 뜻이 뭔지 아세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것을 뜻해요. 사랑한다 말만 하고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도리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감별해내고 있어요. 세상에 형사님이나 제가 모르는 일은 많고 많아요.”

당사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별을 한 안타까운 커플도 있지만 보통은 사소한 일로 시작한 다툼이 커져 결국 이별에 이르게 된 경우가 많다. 그러면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나 보다’라고 한탄하며 사랑을 접는다.



그런데 왜 그 사소한 일을 넘기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했는지 자책만 할 뿐 사랑을 지키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한 것은 없지 않은가. 이 소설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단순히 한 번 읽고 지나갈 사연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에게 사랑을 지킬 기회를 다시 한 번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이 독자들의 불륜을 감별하고 있다.

“이 세계에 균형은 실제 존재합니다. 여러분 주변 미야쇼 요원이 이제 보이나요? 사랑을 과신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겁니다. 지키는 사랑을 하세요.”

『불륜 감별사』는 ‘사랑을 깨는 미야쇼와 사랑을 지키는 프라젠 사이에서 당신은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마도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흘러간 옛 노래에 불현듯 눈물을 흘리듯이 이 책이 당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영감을 얻어 지키는 사랑을 하기를.



연인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 시험에 빠져 그들이 이별을 하면 성공한 댓가로 돈을 받는다. 연인들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이별을 한다. 주인공 야니는 식품회사에서 일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로 미야쇼 일을 한다.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댓가를 받는 일이 그의 양심과는 맞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임무를 마치고 그만두려고 한다. 야니 자신도 연인 리헤르와의 갑작스러운 결별로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막 그 마지막 임무가 커다란 사건으로 비틀어지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로 빠진다. 야니의 임무에 갑자기 리헤르가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야니는 혼란에 빠진다. 같이 미야쇼 일을 하던 그란시나, 그녀는 야니를 짝사랑한다.

리헤르와 야니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미야쇼 일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가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란시나는 야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려고 한다.



이 책은 독특한 소재로 사랑의 가치를 미스터리 소설로 풀어낸다. 그래서 신선하고 스토리의 전개가 흥미진진하다.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그란시나의 슬픈 사랑이 마음 아프다.

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다. 사랑을 깨는 미야쇼와 사랑을 지키는 프라젠 사이에서 당신은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키는 사랑을 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불륜이란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독특하고 지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제서야 왜 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어야 하는지 겨우 깨닫는다.

제라드 스미스로 변신한 그란시아를 야니가보는 앞에서 리헤르가 총으로 살해한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 리암, 제임스, 지니는 수사를 시작하고, 범인을 좁혀간다. 그 속에서 형사 리암과 에릭의 관계, 그란시아가 밝혀낸 충격적인 진실, 등장인물과의 사랑, 짝사랑 등이 빠르게 전개된다.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스터리 로맨스임이 틀림없다. 저자의 치밀한 작품 구성 능력에 흥미는 고조된다.





선생님, 최근 저에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힘들고 슬프고 행복한 날이 한꺼번에 찾아올 것이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혹시 이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세상 만물에는 균형이 존재하고 있는데 저는 우연히 사랑과 이별에도 균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많거나 적으면 안 되기에 누군가 조정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만 모두가 사랑만 할 수 없습니다.

사랑만 있고 이별이 없다면 균형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해서 이별 조정을 통해 사랑과 이별은 평행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이별을 조정하는 일에 가담 했었습니다. 부여 받은 일은 아주 간단했고 성공하면 돈을 받았습니다.

타인을 이별 속으로 밀어 넣고 받는 돈이라 처음에는 찝찝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니 익숙해지더군요.(pp.4~5)




“사랑,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키지 않는 사랑은 반쪽짜리입니다. 그녀는 형사님과 만들었던 사랑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녀가 안쓰럽죠? 형사님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세요. 저도 제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겁니다.”

야니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사님 심장에 부는 바람을 따라가세요. 주변 눈치만 보다가 진짜 사랑 놓칠 수 있어요.”

조사실 문이 열리고 지미가 커피를 가져 왔다. 촉촉해진 야니 눈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표정은 진지했다.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세상에 널렸습니다. 유혹하는 이성도 많고, 사랑하는 이가 먹지 말라는 술을 먹자고 떼쓰는 친구도 많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상대에게 화내기도 합니다. 그런 사소한 것이 쌓여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이유 때문에 큰 사랑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은 말그대로 바보입니다. 바보.”

지미가 제임스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거울 안쪽 방에 있던 리암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형사님, 지키는 사랑을 하셔야 합니다.”

야니가 결심에 찬 듯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p. 154)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 직업요? 후후. 저는 불륜 감별사입니다.”

“불륜 감별사?”

“네, 불륜 감별사.”

“그런 직업도 있나요?”

“있어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녀요. 그리고 시험에 들게 하죠. 시험에 통과하면 사랑을 지속할 수 있어요.

저는 통과 못 한 사람 덕분에 돈을 벌고 있으니 직업인 셈이죠.”

“이해할 수 없지만 재미있는 직업이네요.”

“형사님, 불륜 뜻이 뭔지 아세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것을 뜻해요. 사랑한다 말만 하고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도리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감별해내고 있어요. 세상에 형사님이나 제가 모르는 일은 많고 많아요.”

“불륜 의미가 확장된 느낌이네요. 하하. 좀더 자세하게 얘기 해주세요.”

“오늘 일이 끝나면 전부 말할게요.”(pp. 238~239)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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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과 편지 - 성폭력 생존자이자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의 마지막 고발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령 옮김 / 심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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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대부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당한다." 최근 한 범죄 수사관이 TV에 직접 나와 한 말이다. 구체적 기록을 얘기했지만 수치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 충격을 받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동료, 동네 지인 등이라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성폭력은 실제 많지 않다는 말에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는 관계'가 가족이나 친족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우리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일탈 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가정이나 친척이라면 이건 문제가 다르지 않은가.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폭력은 외국에 비해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 성폭력 사건은 크게 다뤄진다. 법정 형도 더 무거운 것으로 안다. 얼마 전 이혼한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에게 딸이 '사형'을 시켜달라는 청원서를 내 우리 사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젠 우리 사회도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도 위험 수위에 이르렀구나 하는 심정에 우려와 섬뜩함까지 느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됨으로써 성폭력범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는 추세다. 그리고 성폭력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중심의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수사관이나 법조계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 대법원은 이미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남성들의 성폭력 행위에 단호한 법적 처벌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행해지는 성폭력에 대해 강한 수위의 처벌이 가능해 일시적인 대응 방안으로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대책이나 피해자 중심에서는 아직은 미흡하다는 독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가정 내 그것도 아버지가 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한 점이 더 충격을 준다. 그것도 5세 때부터. 이쯤 되면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다. 인간성이 전혀 없는 '짐승보다 못한 행위'이다.

성폭력 피해자이자 세계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고 10대 이후에는 학대, 폭행, 가스라이팅 등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그가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가해자는 이미 3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브 엔슬러는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을 떠난 가해자, 더 이상 어떤 법적 처벌도 할 수 없고, 사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아버지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피해자인 자신 앞에 세운다. 복수가 아니라 얼마나 엄청나고 잔인한 피해인지를 알리자는 취지다. 다시는 자신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성폭력 문제를 사회문제 최고점으로 끌어올린다. 독자도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범죄에 큰 관심이 간다. 피해자로서의 심리 상태 변화를 좇아감으로써 경각심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저자 엔슬러는 가해자인 아버지가 딸인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상상’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묻어둔 진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진정한 사과를 기다리며 온몸을 다해 세상과 싸워온 엔슬러의 글은 잔혹한 폭력의 실상을 담아낸 고통의 기록이자, 남성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폭력을 고발하는 증언이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하고, 어떻게 사죄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안내하는 지도다.

하지만 세상은 다른 범죄보다 유독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사건을 밝힌 의도’를 의심한다. 이러한 억압은 오랜 시간 여러 사회 문화 조건 속에서 용인되어 왔다. 하지만 2017년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미투 운동 이후 자신이 당한 피해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침묵을 거부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싸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맞선다.




엔슬러는 왜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고, 피해를 겪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현실과는 다른 결과' 즉,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밝히고 인정하며 진심으로 꺼내는 사과를 받는 일은 이브 엔슬러가 선택한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피해자가 가해 사실을 고발하고 고통을 드러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먼저 읽고 해제를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말하곤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커다란 고통일수록 버전을 달리해서 써보라고. 다른 시점, 다른 입장, 다른 시제, 다른 장르로 같은 경험을 다뤄보면 그 사건의 본질은 선명해지고 고통은 옅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의 기록이라서가 아니라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p. 206)

은유 작가의 말처럼 엔슬러는 가감 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사건의 본질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세상에 내놓은 이브 엔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브이V’로 바꾸며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선언했다. 역자 후기에서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버지의 잔혹한 기억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고 원망도 회한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물려준 성과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p. 197)

사과 편지 속 아버지는 딸에게 성적인 학대를 일삼고 심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이유를 자신이 복종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데서 찾는다. 그로 인해 권위와 남자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가족이라는 왕국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엄격하게 다뤄야 할 자신의 소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던 자신에게 커다란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딸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고, 그래서 자기 안에 꽁꽁 숨겨둔 탐욕스러운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다섯 살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했다고 아버지는 말한다.(p. 70)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드러날까 봐 딸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가족 모두가 딸을 가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며, 딸을 끊임없이 궁지로 몰아넣어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도록 조종했다고 이야기한다.(pp. 104~107)



아버지가 꺼내놓은 이 기막힌 이야기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부장제’라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 정신은 온전했어. 나는 특권을 누리는 고압적인 남성이었다. 너는 나의 아이였다. 나의 소유물이었지,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했어. 그러지 않을 때 규율과 처벌을 실행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바로 내가 키워진 방식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겪은 대로 너를 다루고 있었어. 내가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이었지.”(p. 113)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악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사회적?정신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은 그런 상황을 묵인하고 아버지가 저지르는 폭력과 학대에 동조하며 엔슬러를 고립시킨다. 편지는 가감 없이 이브 엔슬러가 겪은 아픔을 묘사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따라서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한다. 그들 모두 존중의 대상이고 공존의 상대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가해자인 아버지의 변명을 읽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상식적이지 않고, 인간적이지 않아서다. 배우자와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소유의 대상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의 대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남녀가 왜 사회의 경쟁 대상이고 지배와 피지배의 대상으로 인식되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변화를 꾀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는지 진정으로 노력한다면 인간은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



난 내 부모와 형으로부터 경험한 폭력과 잔인성을 부정하면서 네게 점점 더 심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거야. 여기에 더해 부가적인 임무도 자리하고 있었지. 너를 더 순종적이고 조용하게 만들어 우리의 비밀을 폭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나는 의로운 고문자가 되었다.(p. 104)

이브, 나는 네가 죽기를 바랐다. 너를 살해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했어. 내가 이미 망가뜨린 것을 죽이려 한 셈이지. 내가 저지른 일의 증거를 지워야 했으니까.(pp. 122~123)

나는 어린 여자아이를, 내 몸집의 반만 한 아이를 때렸다. 손과 주먹을 휘둘렀고, 벨트를 채찍처럼 내려쳤어. 자비 없이 너를 몰아붙이며 온갖 심한 욕을 해댔지. 네 존재와 육체의 모든 것을 모욕했다. 너에게 수치를 주고 너를 소멸시켜 버리고 싶었어. 난 한계를 모르는 듯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네가 감히 고함을 치거나 빌거나 울면, 너를 협박하며 망신을 주고 네 존재를 부정했어.(p. 124)

나는 다섯 살 때 너의 몸을 가졌다. 네가 주지 않았는데도.(p. 179)




저자 : 이브 엔슬러


토니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극작가이자 작가, 사회운동가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여성 200명을 인터뷰해 금기의 대상이었던 여성 성기를 둘러싼 고민과 남성 폭력의 기억을 담아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997년 오비상OBIE AWARD을 받았으며 세계 140개 국가에서 48개 언어로 공연되었다. 그 후 〈레모네이드LEMONADE〉, 〈특별 조치EXTRAORDINARY MEASURES〉, 〈필요한 목표들NECESSARY TARGETS〉, 〈굿바디THE GOODBODY〉, 〈감정적 동물EMOTIONAL CREATURE〉, 〈프룻 트릴로지FRUIT TRILOGY〉 등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버자이너 모놀로그》,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나는 감정이 있는 존재입니다》 등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회운동가로서 ‘브이데이V-DAY’와 ‘원 빌리언 라이징 레볼루션ONE BILLION RISING REVOLUTION’을 조직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을 막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인권운동가 크리스틴 슐러 데쉬베CHRISTINE SCHULER DESCHYRVER, 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드니 무퀘게DENIS MUKWEGE와 함께 콩고민주공화국에 여성 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및 지원 센터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세웠다. 〈뉴스위크〉 선정 ‘세상을 바꾼 150명의 여성’, 〈가디언〉 선정 ‘10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이름을 올렸다.

역자 : 김은령


월간 〈럭셔리〉 편집장. 작가이자 번역가. 《밥보다 책》, 《럭셔리 이즈》, 《바보들은 항상 여자 탓만 한다》, 《비즈니스 라이팅》 등을 썼고 《침묵의 봄》, 《패스트푸드의 제국》,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존 로빈스의 인생 혁명》 등 20여 권을 번역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장을 지냈으며 《설득의 심리학 워크북》(김호 공역)을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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