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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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의 14% 이상은 인터넷을 이용하다 의도치 않게 미성년자의 성적 이미지를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4일 연합뉴스TV 헤드라인 기사의 첫 문장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의 14% 이상은 인터넷을 이용하다 의도치 않게 미성년자의 성적 이미지를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인에게 성적인 이미지를 보내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는 비율도 4%로 나타나 디지털 성범죄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여성가족부는 4일 이런 내용이 담긴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인식 및 피해 경험 조사'를 내놓았다. 지난해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한세대학교,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중·고등학생 4,757명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4.4%는 '인터넷 이용 중에 의도치 않게 미성년자의 성적 이미지에 노출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68.3%가 가장 많이 노출된 경로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꼽았다. 3.9%는 '누군가로부터 본인의 성적 이미지를 보내라거나 공유하자는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아는 사람이 동의 없이 성적 이미지를 촬영한 경우는 1.7%, 낯선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카메라로 몰래 본인의 신체를 촬영한 경우는 1.1%로 집계됐다. '본인의 성적 이미지를 유포하겠다고 협박이나 강요받았다'고 밝힌 청소년은 0.6%였다. 비동의 상태에서 허위 영상물을 포함한 본인의 성적 이미지가 공유·유포된 경우는 1.1%였다.

이처럼 비동의 촬영이나 유포 피해를 본 청소년들은 경찰·피해자 지원기관에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혼자서 끙끙 앓거나, 친구 등에게 알리는 경향이 더 높았다. '지인의 비동의 촬영' 피해를 본 청소년의 46.1%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친구나 선후배에게 알렸다'(22.4%), '피해자 지원기관에 도움을 요구했다'(12.4%), '경찰에 신고했다'(12.1%), '가족에게 알렸다'(10.1%), '학교 선생님에게 알렸다'(7.8%) 등의 순이었다. '공공장소 은닉 촬영' 피해 이후 대응 방식으로는 '친구나 선후배에게 알렸다'는 비율이 37.4%로 가장 많았다. 이어 '가족에게 알렸다'(26.0%),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24.4%) 등의 순이었다. '아동·청소년성착취물 관련 행위'에 대한 처벌 필요성의 인식 척도는 평균 4.7점(5점 만점)으로, 관련 행위를 엄벌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전국 19세 이상 성인 2,033명을 대상으로 한 동일한 조사에서도 4.6점으로, 비슷한 인식을 보였다. 성인의 92.7%는 아동·청소년의 성적 이미지를 보는 것이 이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기사는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인식·피해경험 조사 결과다. 이 가운데 4%는 성적 이미지 공유를 요구받았다고 답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이 같은 범죄나 영상제작·유포 등이 확산돼 골머리를 앓았으나 이를 제작·유포한 사이트가 해외에 있는 데다 삭제 요청도 하지만 글로벌 대기업의 자체 심의해 삭제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실제 처벌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국내에서 터진 'n번방 사건'은 사회적 큰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은 주범에게 40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되고 공범들 역시 장기형이 선고되었으나 아직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수사 당국의 말이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은 2018년 하반기부터 2020년 3월까지 텔레그램, 디스코드, 라인, 위커, 와이어, 카카오톡 등의 메신저 앱을 이용하여 피해자들을 유인한 뒤 협박해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성 착취 사건이다. 피해자는 중학생 등 미성년자를 대거 포함하는데, 수사 종료 시점 실제 피해자는 60~70명이나 피해자들을 특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확한 피해자 수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범죄 가담자 규모는 2020년 3월 경찰 발표 기준, 영상 소지 · 배포자를 포함해 최소 6만명 이상이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잠시 소홀해졌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범죄 규모나 피해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속칭 '박사방'의 주범이 공동 범죄자들을 끌어들여 함께 범행을 저지르면서 8개 방으로 늘어나는 등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데서 큰 우려를 낳기도 했다. ‘박사방’은 ‘박사’라는 닉네임이 운영한 성 착취물을 텔레그램 채팅방인데 주범이 검거되어 4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복역 중에 수사 당국이 밝혀낸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1번방' '2번방' 등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이 때문에 'n번방 사건'으로 불리워졌다. 이들이 범죄 수익 등 금전거래를 암호화폐 결제로만 채팅방에 들어갈 수 있는 전문적인 모델을 만들었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2019년 7월에 등장한 ‘박사’는 갓갓과는 다른 행적을 보였다. 그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등, 일반인 여성들에게 '고액 스폰(성매매) 알바를 하겠느냐'며 접근했고, 이에 응한 여성들에게서 신상정보와 누드 사진 등을 얻어낸 뒤 이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협박하여 가학적인 사진과 영상을 찍고 올리게 했다. 박사는 갓갓과는 다르게 영상의 판매가 목적이었으므로, 암호화폐를 이용하여 영상들을 판매하던 중 체포되었다. n번방과는 달리 주 피해자층은 20~30대 여성이나, 중학생이 포함되어 있는 등 다양한 피해자 연령대를 보유한 사건이다. 보도가 시작되자 ‘박사’는 기자의 신상정보를 파악하고 유포하기도 했다. 또 인천광역시에 있는 고등학생은 아동 음란물과 마약 거래 링크가 공유되는 여러 개의 텔레그램 채팅방을 운영하고, 경찰 수사에 대비하는 요령까지 공유했다.



이 책 『우리가 본 것』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거대 플랫폼 회사의 하청 회사인 〈헥사〉에 소속되어 유해 게시물로 신고된 게시물들을 검토하고 삭제하는 콘텐츠 감수자들의 세계를 속도감 있는 문체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온/오프라인 세계의 모호한 경계를 꼬집고, 우리가 세워놓은 도덕적 기준의 약한 근거를 들추는 이 작품은 오늘날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매혹적이고 불안한 소설이다. 독자는 중년 세대라 인터넷이나 디지털 문화에 익숙지 않아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이란 단어도 n번방 사건 때 처음 들었지만 유해 게시물 삭제 하청업체가 따로 있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자체 기준으로 심의한다는 말도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만 65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중국 등 14개국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현재 텔레비전 드라마를 위한 각색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선정적인 묘사, 혐오 표현, 강간, 자살 시도, 학대, 참수 장면··· 온라인 세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가득하다. 이른바 온라인 청소부인 콘텐츠 감수자들은 이러한 콘텐츠를 평가하여 ‘디지털 쓰레기’에 해당하는 경우 플랫폼에서 삭제하는 일을 한다. 전 세계에는 사람들이 신고한 게시물을 면밀히 검토하는 수천 명의 이들 노동자들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헥사〉처럼 하청업체로 모든 작업을 거대 플랫폼 회사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 케일리도 그중 한 명이다.

주인공 케일리는 옛 연인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퍼주다 빈털터리가 되어 콜센터보다 높은 시급을 주는 〈헥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하루에 500개의 클립을 확인하고 평가해야 하며 화장실에 가려고 책상에서 일어서면 곧장 스톱워치가 작동하는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일하게 된다. 게다가 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회사 때문에 사무실에는 필기도구를 비롯해 그 어떤 물건도 들일 수 없다. 그러나 케일리는 이전 직장에서와 달리 〈헥사〉에서는 아무도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서 편안하다고 말한다.

구인 광고에는 시급 말고는 별 말이 없었어요. 기껏해야 간단한 요건으로, 헥사에서 찾고 있는 인재는 ‘품질 보증 관리자’라고 적혀 있었죠. 이게 무슨 뜻인지 그 자리에서 당장 찾아봤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20퍼센트 높은 시급에 눈이 멀어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아주 달갑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뿐이었어요. 간이 면접에서는 헥사가 하청 업체일 뿐이라는 말을 들었죠. 실제로 하게 될 일은 어느 영향력 있는 미디어 대기업을 위한 ‘콘텐츠 평가’였어요.(p.17)



케일리의 동료들은 매일같이 폭력적인 게시물을 접하면서 심각한 정신적 손상을 입게 되고, 결국 〈헥사〉에게 하청을 준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거대 플랫폼 회사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케일리의 눈을 통해 케일리의 동료들이 서서히 미쳐가는 세계, 취한 상태에서만 일상을 견디며 점차 음모 서사의 세계로 빠져드는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동료들은 우울해하고, 편집증으로 인해 테이저건을 들고 잠자리에 들고, 슈퍼마켓에서 누군가 뒤에 서 있으면 움찔한다.

케일리는 어떨까? 케일리는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헥사’에서 다섯 살 연상의 아름다운 동료 시흐리트와 사귀게 되면서 끔찍한 장면들을 보고도 치워둘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폭한 게시물들은 곧 두 사람의 사생활과 연애에 침입하기 시작한다. 온라인에서 삭제한다고 해서 머릿속에서도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접하는 잔인한 게시물에 심한 충격을 받은 시흐리트는 구기자 열매, 치아씨드, 알코올을 섞어 스스로를 치료하려고 한다. 케일리는 그 행동들을 외면한다.

시흐리트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서사의 전환점이 된다. 이제 케일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아니, 오직 충격적인 상황만이 그녀를 깨우고 그녀가 오랫동안 빠져 있던 심연의 깊이를 깨닫게 할 수 있다. 게시물 속 주인공을 찾아 떠나는 결말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치고 소설은 클라이맥스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속도감 있는 문체는 케일리의 비참함을 칼로 끊어내듯 보여준다.

사실 플랫폼 회사의 하청업체에서 유해 게시물 자체 삭제팀을 운영한다는 말을 독자는 처음 들었다. 이 소설에서도 지적하지만 그들에게는 일반 회사에 비해 약간 높은 보수가 주어진다. 일정한 자격이 요구되지도 않고, 약간의 상담과 면접 만으로 입사할 수도 있다. 연수 기간이 있지만 가장 힘든 일은 업무에서 수많은 영상을 직접 보고 받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이 대기업 플랫폼은 사람들이 '모든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다' 같은 글을 게재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무슬림은 여성이나 동성애자, 심지어 (스티틱 씨,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이성애자 같은 단어처럼 '보호 카테고리'에 속했기 때문이에요. 반면에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다'라는 글은 가능했어요. 테러리스트는 보호 카테고리가 아닐 뿐더러, 무슬림이 유해한 용어도 아니었기 때문이에요."(p.19~20)



독자가 우리나라 'n번방 사건'을 서두에 쓴 이유는 당시 수사 당국이 거대 플랫폼 회사에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삭제 요청'을 해도 결코 쉽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 범죄행위로 제작한 영상 삭제 요구가 묵살되다니, 독자로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의혹이 해소된 느낌이다. 주인공 케일리가 연수 기간에 두 가지 메뉴얼을 배부받았다 말하며 밝힌 약관 설명서와 가이드라인 안내서이다. 당시 케일리는 가이드라인이 수시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더욱이 이 안내서는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게 규정돼 있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컴퓨터 화면에 연달아 뜨는 사진과 영상, 실시간 방송을 검토한다. 이들은 이걸 플랫폼에 올려두는 게 괜찮을까? 만약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왜 안 되는지 말해야 했는데, 이 부분이 가장 까다롭다. 

"창문 밖으로 고양이를 내던지는 사람의 동영상은 학대 행위가 아닌 경우에만 업로드가 가능했고, 창문 밖으로 고양이를 내던지는 사람의 사진은 언제나 가능했죠. 침대에서 키스를 하는 동영상은 성기나 여성의 유도만 보이지 않는다면 가능했는데, 남성의 유두는 보여도 괜찮았어요. 질 안의 음경을 손으로 그린 그림은 가능했지만, 외음부를 디지털로 그린 그림은 금지였죠. 벌거벗은 아이의 이미지인 경우, 뉴스 관련 자료라면 가능했지만 홀로코스트와 연관되어 있다면 불가였어요. 미성년자인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나체 사진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니까요. 총 사진은 게재 기준에 부합했지만 총 판매용 사진이라면 게재 불가였어요. 소아 성도착자에 대한 살인 협박은 게재 가능했지만 정치인에 대한 살인 협박은 게재가 불가능했어요."(p.20)

케일리는 〈헥사〉를 그만두고 난 지금도 콘텐츠 삭제 규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외울 수 있다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회상한다. 동영상은 언제 삭제해야 할까? 피가 보인다면 삭제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이 명백히 웃긴다면 괜찮다. 가학성이 개입되어 있으면 삭제해야 한다. 하지만 게시물의 내용이 교육적 가치가 있는 경우는 또 괜찮다. 이 모든 규정을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케일리가 이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독자들은 그녀의 말 속에서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녀의 냉정한 태도는 보호 기제 또는 억압 메커니즘일 뿐이라는 것을.

남자애는 휴대폰으로 자기 발 쪽을 찍고 있었는데,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칼을 놓고 칼끝을 꾹 눌렀대요. 마치 두 발가락을 분리하는 수술을 막 집도하려는 것처럼요.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칼을 누르는 게 엄청 어설퍼 보였대요. 결국 피를 보게 된 순간, 시흐리트는 영상을 꺼버렸다고 했어요.

“왜?” 내가 물었어요. 동영상은 당연히 끝까지 다 봤어야 하니까요. 시흐리트가 아는 한, 다음에 생식기가 등장하거나 제3자에 의한 학대 행위가 나왔을 거라고 했어요.

“도저히 끝까지 볼 수가 없었어. 그 영상을 보면 자꾸 뭔가가 떠올랐으니까.”(p.95)



저자 하나 베르부츠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이 작품에서 심리적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빠른 서사 속도로 압축해냈고, 이를 통해 디지털 커뮤니티가 품고 있는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측면들을 독자들 앞으로 끌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인터넷에서 ‘정상’은 누가 결정할까? 무엇이 우리의 필터에 걸리는 것일까? 도덕적 개념을 무디게 하고 사용자를 감정적 좀비로 만드는 이미지들은 비단 케일리를 건드리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전체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의 존재감을 높게 사야 한다. 매일같이 ‘유해 콘텐츠’를 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매일이다시피 접하는 유해 콘텐츠 추방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이 소설은 재미와 속도감으로 읽는 즐거움을 끌어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저자는 이 소설이 모두 허구이지만 현실과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현실에서 자료를 찾고 탐색하면서 빚어낸 소설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우리가 본 것』은 우리가 디지털 세계를 매일같이 경험하며 겪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다루어 독자들을 디지털 세계의 심연으로 깊숙이 끌어들일 것이다. 이 소설 마지막 부분에 〈참고 자료〉란 면을 마련, 저자는 "이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그들의 경험은 창작의 산물이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이 현실과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느 전 세계 상업용 콘텐츠 감수자들이의 근무 환경을 조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 연구, 다큐멘터리, 기사 등을 활용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에게 13건의 자료들을 권한다.


저자 : 하나 베르부츠(Hanna Bervoets)


오늘날 네덜란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화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2009년 『또는 어떻게 왜(Of hoe waarom)』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2011년 출간한 『사랑하는 셀린(Lieve Celine)』으로 다음 해에 오프제이 문학상을 수상했고, 2012년 출간한 『모든 것(Alles wat er was)』은 네덜란드 서점가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프란스 켈런동크 상을 수상했고, 2022년에는 첫 단편집 『현대의 희망(Een modern verlangen)』으로 J.M.A 비스회벨 상을 수상했다. 베르부츠가 펴낸 그 밖의 작품으로는 『에프터르(Efter)』 『이바노브(Ivanov)』, 『퓌지(Fuzzie)』, 『아픈 사람들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kom in het Rijk der zieken)』, 『당신이 아는 것을 가르쳐주세요(Leer me alles wat je weet)』 등이 있다.

『우리가 본 것』은 2021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으로 선정된 소설로, 소셜 미디어의 유해 콘텐츠를 검토하고 삭제하는 이들의 세계를 생생하고도 인상적으로 묘사하며 화제를 모았다. 네덜란드에서만 65만 부가 판매된 이 작품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중국 등 14개국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현재 텔레비전 드라마를 위한 각색이 진행 중이다.


역자 : 유수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히스토리카 세계사 9』, 『축복받은 불안』,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 『세계도시파노라마 2권: 베이징』, 『노예12년』, 『히든위치』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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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대지 - 간도, 찾아야 할 우리 땅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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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김정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험난한 여정 끝에 지도를 만들었다는 우리가 위인전에서 읽은 내용에 기초를 두고 제작된 영화다. 김정호(1804~1866 추정)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조정(정부)이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의지로 이뤄낸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19세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대 최고의 '지도쟁이'이자 '지도꾼'이다. 한반도를 지도 위에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도를 통해 대중에게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실용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한국 지도의 발달사라는 관점에서도 그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영화의 내용은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위해 눈비를 맞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어느 선까지는 사실일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할 사업을 국가가 나서서 하지 않은데 개인으로서는 사비를 들여야 지도 제작이 가능했을 터, 김정호에게 그만한 돈이나 지위가 있을 리 없다. 그는 양반 계급이라면 으레 남아 있을 족보나 어느 기록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중인 계급의 이름 없는 사람이 지도 제작을 해낼 만한 재산이 있을 리 없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김정호는 지도 제작이 평생 해온 직업이고, 따라서 지도 제작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지도에 미친 '지도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도 제작은 국가적 사업이다. 국가가 지도 제작에 나서야 제대로 된 지도를 얻을 수 있는 대형 국책 사업이다. 그것은 현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방과 국토 개발 등 큰 국가적 사업 등도 지도가 있어야 제대로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토 전반에 대한 지도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개인이 나서서 다른 지도 제작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일 것이다. 만일 당시 조정에서 지도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관원이나 지리에 밝은 학자들을 충분히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그럴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조선은 국방에 관해서는 '0점'을 줄 수밖에 없는 국가인 이유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는(섬기는) 한 나라가 망할 일은 없다고 믿는 국가가 조선이다. 사대주의가 국시로 돼 있는 조선이기에 지도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500년 넘은 조선이 두 번의 외침에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국가 안보 차원의 지도마저 갖추지 않았던 나라가 조선이다.



김정호가 업적을 이룬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판단은 지금의 지리학자들도 짐작만 할 뿐이다. 그가 영화에서처럼 눈비를 맞고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설정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남긴 곳은 많다. 당시 조선은 국가가 최고의 지도 제작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과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에 개인이 쉽게 나설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김정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 지도 제작을 생업으로 삼은 데다, 지도 제작에는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에 결국에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해 낸 인물만이 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김정호가 생각해낸 방법은 기존 지도를 확인하고, 자료로 활용했을 거란 짐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도의 제작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에 자료 수집도 쉬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호는 국가가 생산한 기존 자료를 십분 활용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기존의 지도를 참조하고 보완 내지는 수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도를 저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지도만 갖고는 조금의 지리적 지식을 더한다고 정확한 지도가 제작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당연히 당시 김정호로서는 구체적인 지리 지식을 담은 지리지의 도움도 빌려야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기존의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의 도움을 더해 〈청구도〉와 〈동여도〉란 지도를 만들고, 나아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현재의 지리학자들의 추정이다. 김정호가 기존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에도 많이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동여도지〉나 〈여비도지〉 같은 지리지를 집필한 데서도 추론 가능하다. 지리지를 많이 읽어보고 참고하다 보니 기존 지리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고, 이에 따라 기존과 다른 새로운 지리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여행에 주로 의존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면, 지리지를 만드는 데 그렇게 공을 쏟지는 않았을 것이란 반대적 가설이 성립되는 이유다.

이 책 『잃어버린 대지』는 김정호가 그리고 쓴 지도와 책을 바탕으로 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자 하는 한 지리학자의 여정을 소설로 담아내고 있다.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가 백두산과 주변 지역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한, 그러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제26권 「변방고(邊防考)」를 추적하며 겪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잃어버린 대지』는 우연히 미국에서 전해진 “리뷰 오브 코리안 보더(Review of Korean Boader)”란 영문 문서에서 그간 전설처럼 전해지던 「변방고」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주인공 윤성욱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연 「변방고」는 어디에 있을까? 또 어떤 내용이 쓰여 있길래, 왜 사라진 것일까.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1861∼1866년께 편찬한 지리책으로 32권 15책이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대동지지』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2첩을 간행할 무렵 32권 15책의 필사본으로 전국 지리지이자 역사지리서이다. 김정호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등 주로 지도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제작한 지리학자이며, 『대동지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편찬한 지리지이다. 현재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김정호의 친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청구도 범례」등 여러 곳에서 피력하였다. 지도는 한눈에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정보를 수록하는 데 한계가 있고, 지리지는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록할 수 있지만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호는 평생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동지지』의 가장 앞쪽에는 김정호가 참고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조선측의 자료가 43종이나 되고 중국측의 자료는 22종이다. 이는 김정호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임과 동시에 조선의 지리지를 집대성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목차 다음 부분에는 대표적인 순우리말의 지명유래에 대한 소개와 한자로의 표기에 대해 기록해 놓았는데, 그가 참고한 상당수의 한자 지명이 원래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임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국 지리지로는 경도(京都) 및 한성부(漢城府)가 1권, 경기도가 2∼4권, 충청도가 5∼6권, 경상도가 7∼10권, 전라도가 11∼14권, 강원도가 15∼16권, 황해도가 17∼18권, 함경도가 19∼20권, 평안도가 21∼24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하천에 관한 내용인 산수고(山水考)는 25권으로, 국경 방어에 관한 내용인 변방고(邊防考)는 26권으로 편제되었지만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수도인 한양에서 전국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정리고(程里考)가 27∼28권에 수록되어 있고, 28권에는 역참(驛站)과 관련된 내용인 발참(撥站)과 연변해로(沿邊海路)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한 방여총지(方輿總志)가 29∼32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대동지지』 제26권이 「변방고」이고 내용은 없이 편제로만 남아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집필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잃어버린 대지』는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역사적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은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워 역사적 장면 사이사이에 개연성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현대판 스토리로 풀어낸 역사 팩션(Fact+Fiction=Faction)이다.



현재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영토였으며, 여전히 북간도 지역에는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다.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란은 조선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소설 『잃어버린 대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간도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역작으로, 독자들에게 잃어버린 땅 간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간도 땅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1712년(숙종 38)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있는 문구를 근거로 삼는다.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 중국(淸)과 조선의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써 분계선을 삼는다"고 새겨져 있다. 간도는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 곧 토문강 동남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 토문강(土門江)은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송화(松花, 쑹화)강의 한 지류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후일 두만강으로 착각했거나 고의로 변경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조선 숙종 때 규정한 이후 '토문'은 우리 민족이 계속 살고 있고(현재까지) 중간중간에 국가간 영토 문제로 부각됐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이 간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배했던 시절,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경선 재협약 등이 어우러지면서 애매해진 상태다. 이 때문에 『대동지지』 제26권이 「변방고」가 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저자 오세영은 책 뒷 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 "간도는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한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두만강 너머의 북간도에는 지금도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곳의 영유권 다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조중변계조약은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기초했고, 간도협약은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정한 감계를 참고했다. 그리고 두 감계는 1712년의 정계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밝힌다.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정했는데 토문강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간도가 조선 땅인가 중국 땅인가가 결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간도협약을 주도했던 시노다 지사쿠는 나중에 줄기차게 '간도는 조선 땅'임을 역설했다고고 한다. 지사쿠는 당시 통감부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이었으며 후일 경성제국대학 학장을 역임하는 저명한 일본의 역사지리학자이다고 덧붙인다.



소설의 주인공 윤성옥은 독일 홈볼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한 지 5년째인 유학생이다. 홈볼트 대학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배출한 학교로서 사상과 철학 분야에서 명망이 높지만, 윤성옥이 전공하고 있는 역사지리학도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하루빨리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가지고 귀국해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를 꿈꾸는 유학 생활이 만만치 않다. 늘어나는 경비도 문제지만 대학 강단의 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이다. 지도교수 깐깐하기로 소문난 베른하르트와의 만남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철저히 준비해도 될까말까한 논문 심사의 날도 하루하루 줄어감에 따라 초조함은 늘어나지만 준비에 매진한다. 논문의 주제를 「리히트호펜이 동양지리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로 정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1860년대 초반에 독일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동북아시아를 방문하고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고, 귀국해서는 여기 홈볼트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소설 속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서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을 연결했던 실크로드는 바닷길이 열리고, 하늘길이 뚫려서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로와 함께 '신실크로드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을 위한 자료집 독파를 하던 윤성옥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리히트호펜보다 먼저 일대를 조사한 사람의 흔적이다. 그 사람이 가진 자료의 방대함과 과학적인 조사에 리히트호펜이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 윤성옥의 눈을 잡아 끈 것이다. 리히트호펜은 동북아시아 조사 때 "동쪽에서 온 지리학자"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었다. 동쪽에서 온 뛰어난 지리학자? 그가 누굴까. 당연히 서양학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문맥으로 봐서 중국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인? 하지만 자료에 적힌 1864년은 일본이 아직 중국에 진출하지 못했을 때다. 그럼 조선인? 윤성옥은 설마 하면서 자료로 눈길을 돌린다. 

동쪽에서 온 지리학자가 동북 3성 중에서 길림성 일대를 집중적으로 탐사하고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세밀한 조사와 과학적인 기법에 경탄했음을 리히트호펜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누구며 무슨 목적으로 길림성 일대를 탐사했을까. 히리트호펜이 감탄을 아끼지 않는 걸로 봐서 예사 인물이 아닐 것이다. 혹시 자세한 내용은 없을까. 강한 호기심을 느낀 윤성옥은?



이 소설의 특성상 윤성옥의 다음 행동은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글로서만으로도 어떤 내용일지 훤히 궤뚫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쓴 역사소설은, 혹은 팩션은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어떻게 꿰맞추느냐만 남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니까. 또 저자 오세영은 팩션을 이번에 처음으로 쓴 것은 아니다. 이미 『베니스의 개성상인』, 『구텐베르크의 조선』, 『소설 자산어보』 등을 집필해 독자들의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작가 아닌가. 

그렇다고 내용에 대해 전혀 기술하지 않을 수 없어 페이지를 건너뛰어 책의 한 부분만 발췌해 여기에 싣는다. 


"도댜체 탐사자는 누구며 1864년에 백두산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그 의문은 다음 장에서 풀렸다. 탐사자는 국경표지석에서 정한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 청나라가 주장하는 강이 아닌 훨씬 북쪽의 강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적고 있었다. 

1864년······ 백두산······ 국경표지석······ 하면 '리뷰 오브 코리안 보더'는 정계비에서 토문강의 위치를 추적하는 탐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라면······ 아무래도 기리고차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기리고차는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가할 때 사용했던 도구로, 후일 실제 거리가 110.95km인 경도 1도의 거리를 108km로 측정했을 정도로 정확한 기구였다. 그리고 1864년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짝을 이루는 대동지지를 저술한 해다. 하면 김정호가 토문강을 답사했단 말인가. 

"······!"

윤성옥은 터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잊고 있었던 리히트호펜의 논문이 떠오른 것이다.(p.81)


저자 : 오세영


195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경희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흩어진 기록을 모으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서의 행간을 채우는 일을 즐겼던 오세영에게 역사를 이야기로 꾸미는 역사 작가는 잘 어울리는 직업인 셈이다. 오세영에게 역사는 내일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소설은 역사를 쉽게 풀어쓰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문단에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러나 시대와 삶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소재를 발굴해서 독자들을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베니스의 개성상인』,『구텐베르크의 조선』, 『원행』, 『만파식적』, 『타임 레이더스』, 『화랑서유기』, 『포세이돈 어드벤처』,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콜럼버스와 신대륙 발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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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사건편 2 - 벗겼다, 세상을 뒤흔든 결정적 순간들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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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꺼내야 하는 독자는 당혹스럽다. 역사는 좋아했지만 물리학은 싫어했기 때문이다. 호불호에 따라 대학 입시도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져 대학 입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리를 싫어한 독자로서는 당연히 인문학 계열로 입학했다. 덕택에 물리학은 적어도 독자의 삶에서 수십 년 동안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어서 적지 않은 기간에 역사는 TV 드라마 사극에 나오는 정도만 이해하면 되었다. 세계사는 대부분 서양의 역사에 맞추어져 있어서 자세하고 깊은 것까지 배울 필요는 없었다. 영화나 혹은 가끔 관련 책을 읽는 정도만 흡수해도 삶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역사와 우리 삶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책 『벌거벗은 세계사: 사건편 2』(이하 『벌거벗은 세계사 2』)는 tvN의 교양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세상을 뒤흔든 중요한 사건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는 모두 10개의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 등장한다. 이 프로그램은 매회 다른 강사와 다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이 책에 있는 모두 강연자가 다르다. 때문에 편의상 저자를 'tvN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팀'으로 통칭한다. 

저자는 이 책을 제작하면서 세상의 모든 사건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즉 어떤 일이든, 크든 작든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 제작팀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제작팀이 10개의 사건을 책으로 만들다보니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저자가 출판사 책 소개글에 낸 첫 문장이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인 것으로 미루어 합리적인 지적일 듯하다. 소개글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일은 저마다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인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역사 속 사건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사를 좀 더 깊숙이 배운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이라도 예상하고 대비할 힘을 기를 수 있다.

이 일련의 소개글은 앞서 언급한 '양자역학'의 이론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에 대답하기 위해 반도체 없는 컴퓨터를 상상해 보자. 반도체가 없다면 노트북, 스마트폰과 같이 작은 컴퓨터의 탄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하는 등 현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많은 기술들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또한 양자역학은 과학기술의 측면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이란 무엇일까? 물리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개념이라도 알기 위해선 백과사전이나 관련 책을 이용해야 할 듯하다. 김재영의 『물리산책』에 따르면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으로, Quantenmechanik(크반텐메하닉)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그대로 영어로 번역된 뒤에, 일본에서 ‘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새로 번역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란 용어로 번역됐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벌거벗은 세계사 2』에 나오는 사건은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순간은 물론, 처음 만나는 의외의 사실들까지 더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프레임 밖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존 역사와는 다른 시각을 보인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양자역학 이론이 적용된다는 점, 일종의 통찰력을 가진 역사 의식에 바탕한 내용으로 풀어헤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신’ 제우스가 시작한 집안싸움이 아테네의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놀라운 과정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비행기 납치와 테러가 벌어지던 공포의 20세기 후반의 상황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사건을 둘러싼 역사 속 결정적 순간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특히 시간 관계상 방송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내용까지 상세하게 정리해 역사 속 흥망성쇠의 진짜 원인부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뒷이야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역사란 스포일러가 넘치고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이야기"라는 말도 꺼낸다. 이는 프로그래밍된 컴퓨터 시연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으나 역사 통찰력으로 갖고 살피면 '그냥'이나 '우연'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독자는 이해한다.



이 때문에 사건은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만큼 다양한 시각으로 해체할 수도 있다. 이는 다시 조합을 이루어 '필연'을 만들어내는 등 독자 입장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 책 『벌거벗은 세계사 2』는 세계를 뒤흔든 결정적 순간들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역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속속들이 파헤친다. 외우지 않아도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를 통해 이제껏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역사의 이면을 탐구하기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독자들은 책장을 펼치는 순간 아는 것을 넘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에는 10개의 사건이 등장한다. 작게는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인류 전체가 휘말려드는 사건으로 확대될 수도 있고, 크게는 국가라는 거대집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사건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뿐만 아니라 구전되어온 '신화'까지도 포함해 인류가 살아온 모습과 과정에 대한 혜안을 제공한다. 

1장 〈벌거벗은 그리스 민주주의-제우스의 집안싸움이 불러온 민주주의의 탄생〉, 2장 〈벌거벗은 인도-힌두교와 카스트의 진실〉, 3장 〈벌거벗은 초한지《삼국지》의 모태가 된 두 영웅〉, 4장 〈벌거벗은 종교개혁-신의 대리인, 교황의 탐욕〉, 5장 〈벌거벗은 스페인 내전-히틀러의 제2차 세계대전 리허설〉, 6장 〈벌거벗은 쑹씨 세 자매-중국 현대사를 뒤흔든 이들의 정체는?〉, 7장 〈벌거벗은 러시아의 흑역사-괴승 라스푸틴과 러시아 제국의 몰락〉, 8장 〈벌거벗은 도쿄재판-일본의 전쟁 학살자들은 왜 풀려났나?〉, 9장 〈벌거벗은 CIA-기밀해제 문서로 본 CIA와 라틴 아메리카〉, 10장 〈벌거벗은 테러의 시대-뮌헨 올림픽 참사와 비행기 납치 사건〉 등 10개의 장(章)이다. 

지금까지 역사는 승자의 입맛에 맞춰 그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기록되어 왔다. 사가(史家)들도 모두 인정하고, 그것을 텍스트로 역사를 해석한다. 물론 명백하게 허위를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팩트)은 접어두고라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사가의 일이다. 이 책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그동안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의 사실과 근거를 살펴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진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도 잘못된 시선으로 한쪽의 역사만을 보면 전체를 놓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고르지 못함을 지적하는 말로 읽힌다. 이 책은 세상과 질서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통찰과 미래를 읽는 전망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다. 언급한 대로 1장에서는 신화의 이야기다. 신화는 문자 기록보다는 문자 이전, 즉 구전으로 내려온 설화나 영웅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우리가 2,500년 동안 사실로 믿어온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다. 구전의 내용을 기초로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배웠고, 믿었다. 물론 문학적 위치나 최초 문명의 발상지라는 영예는 뒤늦게 발굴된 바빌로니아 수메르인들의 『길가메시』에게 내주었지만. 

이 책에는 여전히 그리스 신화를 더 믿을 수 있는 위치에 놓고 있다. 아직 『길가메시』를 새긴 점토판이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데다 이미 발굴된 점토판의 문자 해독이 불가능해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예지력을 가진 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그 결과 ‘신들의 신’이자 자신의 사촌인 제우스로부터 절벽에 매달린 채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수백 년이 넘도록 프로메테우스는 굴하지 않았고, 그의 뚝심에 제우스는 끝내 손을 들고 만다. 시간이 흘러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정신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 평민에게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왕정과 귀족 정치를 거쳐, 참주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층 민중의 불만을 이용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정치를 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p.39) 그에 대한 보답으로 참주는 노예를 해방시키고, 귀족이 독점했던 땅을 빼앗아 평민들에게 나눠줬으며, 농사지을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또 이때 대규모 축제를 열어 평민들의 지친 마음을 풀어주려던 대규모 축제인 '디오니소스 축제'로 성장했다. 이 축제는 참주의 의도와는 다르게 평민들의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디오니소스는 최대 1만8,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공연장이었고, 공연은 프로메테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라는 연극이다. 절벽 위에 매달려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수백 년 감내하면서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에게 굴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때 프로메테우스가 내뱉은 대사가 "그대들 신출내기들은 통치한 지가 얼마 안 되거늘 벌써 고통도 모르고 성채에서 사는 건가?"였다고 저자는 전한다. 축제를 통해 연대의식을 느끼고, 공연을 통해 저항 정신과 민주 의식을 깨친 시민들은 이제 국가 권력의 주체는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한 이유다. 아테네와 민주주의는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인도에서의 카스트 제도에 대한 흐름도 세계 정세를 바꾸어놓은 사건이다. 사실 카스트 제도는 2,000년간 유지되어온 인도 고유의 신분제도다. 인도의 종교 힌두교는 원래 사회적 의무와 물질적 풍요, 쾌락만 가르친 종교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불교와 자이나교 등 여러 종교가 등장하면서 힌두교는 물질만 추구하고 불평등을 강조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불평등한 사회를 떠나 수행자의 가르침을 쫓아 깨달음을 구하려는 사람도 점차 증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최고 신분계급인 브라만이 고심 끝에 내놓은 해답이 힌두교도의 삶의 목표에 '깨달음'을 추가했다. 힌두교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회유하려는 의도였다. 이 결과 힌두교에는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다소 모순적인 가치관이 공존하게 된다. 사실 깨달음을 통해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은 인도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대부분의 인도인은 힌두교라는 거대한 세계관 안에서 각자의 이익과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도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기나긴 중세 시대를 겪으면서 처음에는 4개로 구분되던 카스트가 수천 개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수많은 '자띠'(직업이나 가문이라는 뜻)가 생겨난 것이다. 인도인들은 지금도 카스트보다 자띠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저자는 귀띔한다. 카스트 체계는 18세기에 들어 또다시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영국의 침략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는 세포이 반란(1857)도 영국의 무력에 좌절되었고 멀리 떨어진 영국은 인도 대륙을 다스리기에 벅찼다. 영국 정부가 한 가지 묘안을 짜낸 것이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한 인구 총조사이다. 이때 영국은 조사 항목에서 인도인을 단순한 기준으로 구분했는데 바로 고대 인도 때 만든 힌두 경전의 카스트다. 이미 수천 개의 자띠로 나뉘어진 인도인들은 자신이 수드라인지, 바이샤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욱여넣듯이 대강 분류해 짜맞추었다는 것. 이 인구 총조사가 사그라들었던 카스트 제도에 다시 불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격변기가 비참한 상황의 불가촉천민에겐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도축과 가죽, 육류 가공이 근대 산업으로 떠오르면서 이 업에 종사하던 불가촉천민들이 큰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도나 영국에 꼭 필요한 산업이었기에 이들에게 신분 상승과 함께 수천 년 간 이어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들 신흥 불가촉천민들은 다른 계급처럼 돈을 뿌려서 높은 카스트로 올라가거나 고급 교육을 받고 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하니, 독자로서는 우리 조선시대의 천민 계급이 떠올라 숙연해지기도 한다. 지금의 인도는 알고 있는 바와 다르게 1947년 영국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헌법과 법률로 차별 금지법이 만들어져 차별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고 저자는 전한다. 그러나 아직 일부 지역이나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악습이지만 완전히 사라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20세기 초 청나라, 여성의 인권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던 이곳에서 중국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된 세 자매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아이링, 메이링, 칭링이라 불린 이들은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던 격동의 시대에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행동에 나섰다고 한다. 우리로 보면 '신여성'인 셈이다. 이들의 삶과 결혼은 중국 현대사를 뒤흔들었다고 하는데 커다란 변화의 물결 뒤에 숨어 있는 세 자매의 흥미진진한 인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이 책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분노하고 놀랐던 일본 전범 재판 이야기를 읽을 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전쟁으로 1,000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일본의 전쟁범죄자, 즉 전범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을 열었다. 모두 118명의 A급 전범 용의자 중 28명이 재판정에 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이 전쟁 중에 벌인 끔찍하고 잔혹한 학살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뒤 다수의 전범 용의자가 풀려나거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석방되었다. 제대로 처벌받은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는 것. 도대체 일본의 전쟁 학살자들은 어떻게 법망을 피해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국제군사재판은 왜 제대로 판결을 내리지 않았을까? 

이와 함께 1970년 전후, 세계 곳곳에서는 비행기 납치와 공항 이용객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1969년에만 80여 건의 항공 테러가 이어져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다. 그러던 중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올림픽을 둘러싸고 비행기 납치, 공항 시설 공격, 인질 납치 및 살인 등 최악의 국제 테러가 일어났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국제 테러는 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무고한 희생을 담보로 한 잔인한 비극은 왜 아직도 계속되는 걸까?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시작한 집안싸움이 지금의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놀라운 과정을 밝혀준 이 책은 비행기 납치가 교통사고만큼 자주 벌어지던 20세기 말 '테러의 시대'까지 조명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모르고 있거나, 알았다고 해도 뒤에 숨은 권력의 힘을 알아내지는 못했을 내용이 이 책에는 실려 있다. 이 책 『벌거벗은 세계사 2』는 국가를 뒤흔든 흥망성쇠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왜 과거를 뒤돌아봐야 하는지, 이를 거울삼아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저자 : tvN〈벌거벗은 세계사〉 제작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들이닥친 코로나19. 자유롭게 누군가를 만나고 여행을 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질 무렵 집에서 안전하게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지에 숨겨진 세계사까지 배울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만든 것이 <벌거벗은 세계사>입니다. 그 마음이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이 책이 조금이나마 현시대의 갈증을 해소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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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예찬 - 위대한 사상가들의 실패에 대한 통찰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채효정 옮김 / 시옷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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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오만과 자기기만을 치유함과 동시에 겸손하게 잘사는 법에 영감을 제공하는 우리 삶의 필수적 요소이다. 특히 실패는 필요할 때 ‘극약처방‘으로 사용해 삶의 혁명적 변화를 꾀하는 데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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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예찬 - 위대한 사상가들의 실패에 대한 통찰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채효정 옮김 / 시옷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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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 전집에는 늘 에디슨이 있었다. 미국의 발명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하는 등 수많은 과학기술 발명품을 만들어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해준 인물로 손꼽혔다. 위인전이어서 주로 발명품에만 집중되어 기술되었지만, 외적인 요인 한 가지 빼지 않았던 것은 그의 실패에 대한 말이었다. 그가 남긴 많은 말 중에는 전기 실험을 3,000번이나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고조롱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성공이 아닌 다른 길을 하나 더 알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수많은 발명만큼이나 발명을 위한 에디슨의 열정과 도전, 그리고 인내심을 압축해 놓은 명언 중의 백미로 꼽힌다. 그의 발명 뒤에는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전을 거듭해 결국은 '발명왕'이 되었기에 위인전의 인물로서는 단골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 『실패 예찬』 표제어는 '실패'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강한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 실패를 '예찬'한다는 말은 실패 자체를 찬양한다기보다 실패를 통해 이룬 성공이 더 빛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나 실패보다는 성공을 원한다. 실패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과이다. 실패는 자신의 노력도 송두리째 삼켜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실패를 예찬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궁금하고,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사뭇 기대된다. 

저자 코스티카 브라다탄은 이 책을 통해 4명의 역사적 인물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동안 실패를 추구한 이야기를 통해 실패에 대한 찬양의 주장을 펼친다. 이들 4명의 인물들의 투쟁은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치유뿐만 아니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실패는 피할 수 없으니 오히려 잘 사용한다면 실패의 경험이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 책 『실패 예찬』은 실패를 잘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쓰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들로 시몬 베유, 마하트마 간디, 에밀 시오랑, 미시마 유키오 등 4명이다. 저자는 이들은 실패한 인물들로 다룬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많은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끈질기게 펼쳐 나가며, 실패로써 성공한(?) 4명의 인물을 재조명하기에 갈 길이 멀어서일까?. 깊게 생각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주장이 독선적이고 오류투성이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는 객관적 예로 가득하고, 다양하고 충실한 논증을 제시하며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 

저자 브라다탄은 실패를 부각하기 위해 '성공'의 정의에 접근을 시작한다. "성공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간과하기 어렵다. 어디에서든 우리는 경쟁하고 순위 매기고 가치를 어림한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이런 수그러들 줄 모르는 욕구로 눈이 멀어,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한다"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지적한다. 경쟁이나 순위 등은 실제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적 시스템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어느 덧 깊숙이 경쟁의 늪에 빠져 있음을 뒤늦게 자각한다. 새로운 길을 찾기도 전에 이젠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들인 4명의 인물에 대해 저자는 실패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의미를 발견한 인물들이라고 단언한다. 이들은 실패를 단순한 좌절이 아닌, 깊은 통찰과 성장을 위한 기회로 보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패는 성서에 나오는 원죄와 같아서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전제한다. 우리 모두는 계층, 신분, 종교, 성별과 무관하게 우리 모두는 실패를 타고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실패를 실천하고 타인에게 넘겨준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죄와 마찬가지로 실패도 인정하기가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실패는 또한 추하다-죄처럼 추하다고 이야기들 한다. 실패는 그 삶 자체만큼이나 잔인하고 고약하며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실패는 일반적으로 연구가 부족하거나 도외시되거나 일축되기 마련이다. 아니면 더 나쁘게 자기 계발 전문가, 마케팅 마법사, 은퇴 후 시간이 남아도는 CEO들 손에서 뭔가 '트렌디'한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들은 모두-전혀 모순되지 않는 일처럼-성공으로 가는 발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재포장해 다시 판매하여 실패를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저자는 신랄한 비판의 이면에는 분명 논리가 존재한다. 이를 실패를 통한 지혜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실패는 오만과 자기기만을 치유하고 겸손을 불러일으키는 잘 사는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저자 브라다탄은 이 책에서 성공은 우리를 피상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나, 우리를 겸손하고 더 주의 깊은 사람으로 만들고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성공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실패의 선물이 없다면 우리는 훨씬 더 가난해진다고도 말한다. 저자는 특유의 유려한 스토리텔링과 학문과 영적 탐구 간의 경계를 기분 좋게 넘나드는, 매력적인 작가이다. 저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담고 있는 결론에 이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철학적 사유와 유려하지만 은유적 표현 등으로 독자처럼 지식이 부족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다. 

『실패 예찬』은 실패 자체를 위한 실패가 아니라 실패가 낳은 겸손, 그리고 실패가 촉발하는 치유 과정에 대한 것이다. 오직 겸손, ‘현실에 대한 자아를 버린 존중’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해줄 거라고 아이리스 머독을 인용해 저자는 규정한다. 겸손을 달성했을 때 우리는 질병에서 회복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이를 통해 존재의 얽힘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다는 사실과 합의를 못 하면 사는 의미가 없다"는 저자의 강력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패'의 정의를 규정해야 한다. "실패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패에 관여하는 방식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인 반면에 성공은 부차적이고 일시적인 것일 뿐 그리 많은 걸 밝혀내지 못한다. 성공 없이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고 불완전하며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합의를 못 하면 사는 의미가 없다. "이 전부를 깨닫게 하는 게 바로 실패"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실패가 발생했을 때 우리와 세상 사이, 우리 자신과 타인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우리에게 그 거리는 우리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독특한 느낌, 세상, 그리고 타인들과 우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느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준다. 



이로써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 아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이 존재론적 각성이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자 할 때 정확히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그 각성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치유가 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를 통해 "실패는 무한하고 그 징후도 무수하기 때문에 실패를 세심하게 계획하는 것은 잘 알려진 세인트 오거스틴 일화에 나오는 작은 소년처럼 바닷물 전체를 조개껍데기로 퍼내 해변에 자신이 파 놓은 작은 구멍에 넣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유적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로 보이지만 그건 핵심을 벗어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시도하는 것의 광적인 미학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예로 문학작품 속 가장 비극적인 실패작으로 지적한 『햄릿』에서 폴로니우스는 '광기일지라도 그 안에 나름의 이유'를 관찰해냈다고 말한다. 실패는 우리를 포위하고 둘러싸고 있으므로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다 상상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저자는 이제 이 책의 핵심 내용에 들어선다. 앞서 언급한 4명의 인물들을 이 원(동심원) 안에 배치한다. 이런 실패 추구에서 저자의 방식은 가장 바깥 쪽 원에서 시작해 한 번에 한 원씩 서서히 이동하여 우리와 가장 가깝고 친밀한 형태의 실패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밝힌다. 저자는 가장 바깥에 있는 원, '물리적 실패'에서 시작한다. '거리가 멀다'는 공간적인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물건을 이용하고 물건에 의지할지라도 물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내세운다. 물건의실패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물건의 무결성도 그와 마찬가지이며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원에서 저자는 시몬 베유*를 발견한다. "나는 시몬 베유가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꼈던 본보기라고 단언한다. 

*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 :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레지스탕스(저항) 운동에 참가하려고 귀국을 시도하던 중 영국에서 객사하였다. 억압당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 그녀의 목표였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지방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항상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1934년에는 공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하였고, 후에 스페인 전쟁에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때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레지스탕스(저항) 운동에 참가하려고 귀국을 시도하던 중 런던에서 객사하였다. 만년은 인간의 근원적 불행의 구제를 목표로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그녀의 생애는 억압당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이의 실천으로 일관되었으며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사후에 출판된 여러 논문이나 유고(道稿)는 전후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요저서로 《억압과 자유》 《뿌리를 갖는 일》 등 외에 종교적 명상을 적은 《중력(重力)과 은총》이 있다.(독자 주 : 두산백과)



다음 원은 '정치적 실패'의 원이다. 정치는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관여하기 마련이며 아무리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관여할 수밖에 없는데, '정치를 멀리하며' 살겠다는 결심 자체도 분명 정치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말이다. 이전 원(물리적 실패의 원)보다 정치적 실패의 원은 우리와 더 가까운데 폴리스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심지어 반역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조차 정치적 커뮤니티와 연관된 채로 살면서 자신을 반대자로 규정한다. 이곳에서 저자는 마하트마 간디를 발견한다. 책에 따르면 간디는 순수성의 추구를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정치 속에 심각하게 뒤엉켰다. (간디를 로베스피에르와 여타의 정치적 순수주의자들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지게 만든) 순수성과 완벽함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에서 간디는 가끔 경각심을 일으킬 정도의 불완전한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종국에 그를 구원한 것은 오히려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면이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주목해 보면 "투우사가 나타났을 때 그는 간디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마하트마는 항상 다른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이 책은 진화하는, 그리고 분명 확장하는 실패의 정의를 다룬다. 실패는 근본적으로 불편한 경험, 즉 삶 그 자체만큼 불편한 경험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는 역설적 제안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모든 여정 가운데서도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가장 어렵고 가장 오래 걸린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저자는 주문한다. 실패를 안내자로 두었으니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 결국 이건 최고의 의사들이 항상 가르쳐 왔듯이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당신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식 부족의 독자도 이 말에 저으기 안심하며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저자는 비유적으로 "뱀의 독은 독이자 약이다."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의 말에 새로운 용기를 내 세 번째 인물의 원으로 나아간다. '사회적 실패'의 원이다. 저자는 이 원에서 에밀 시오랑을 소개한다. 우리가 인간적 유대를 벗어나 혼자 살기로 한다고 해도 사회는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물 것이다. 우리는 늘 사회적으로 얽혀 있고, 이 얽힘 속에서 우리는 특히 만연해 있는 실패의 한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회적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실패를 개인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가 에밀 시오랑이다. 저자는 에밀 시오랑에 대해 "부에 집착하고 일 중심인 우리 사회의 창조 신화를 전부 웃음거리로 만들며 능동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데 인생을 바쳤다"고 지목한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타락한 세상에서〉, 2장 〈정치적 실패의 폐허 속에서〉, 3장 〈위너와 루저〉, 4장 〈궁극의 실패〉 등이다. 4장에서는 일본의 군국시대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등장한다. 때는 일본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이후의 일본 사회와 문인 등 몇 명의 삶을 조명한다. 그 중에 당시 일본 최고의 작가로 꼽힌 미시마 유키오는 타고난 재능으로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 대표 작가다. 저자 브라다탄은 미시마를 「긴 실패의 역사를 산 삶」을 통해 집중 조명한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재주 많은 한 천재 작가의 삶을 통해 '실패의 삶'을 찾아낸 것이다. 실제 그는 "스스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특성 중 하나"라고 말한 에밀 시오랑과 비슷한 맥락의 '좌절과 실패'란 단어가 잘 어울릴 정도로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지만, 오히려 인간의 삶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철학자나 위인 못지않은 영감을 주고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판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4장은 미시마의 극단적 선택으로 '생물학적 실패'로 저자는 표현했다. 그러나 미시마의 작품 『가면의 고백』을 읽은 느낌은 달랐다. 미시마는 루저로서가 아니라 실패자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엿보인다. "결국 우리가 엮어내는 자아는 우리가 경험한 것뿐 아니라 갈망했지만 얻지 못한 것, 보답받지 못한 사랑, 지키지 못한 약속, 놓친 기회, 상상이나 환상만 했거나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모든 것 등 긴 부재를 다 합친 총합이다."(p.314)


저자 : 코스티카 브라다탄(Costica Bradatan)


텍사스공과대학교 아너스 칼리지(Honors College)의 인문학 교수이자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철학과 명예연구교수이다. 또한 코넬대학교, 마이애미대학교,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 노트르담대학교, 애리조나주립대학교, 유럽, 라틴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기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뉴욕타임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의 종교/철학 에디터이다. 『신념을 위해 죽다:철학자들의 위험한 삶(Dying for Ideas: The Dangerous Lives of the Philosophers)』을 비롯해 12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고, 『더 갓 비트(The God Beat)』의 공동 편집자이다. 그의 작품은 2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역자 : 채효정


경기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여러 해 동안 직장을 다니며 무역과 해외 영업 업무를 했고, 현재는 도서 번역과 법률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책을 번역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종종 번역하는 책에 반해 버린다. 강아지 세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와 햄스터 한 마리를 키우면서 아들 녀석과 실랑이하는 가운데 정신 바짝 차리고 번역하는 게 매일의 과업이다. 옮긴 책으로 『숙제 파업』, 『수줍어서 더 멋진 너에게』, 『인플루엔자 D와 빅 블랙 큐브』, 『나의 젊은 날』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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