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트니크가 만든 아이 오늘의 청소년 문학 40
장경선 지음 / 다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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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는 동유럽 국가들이 위치한 발칸반도에서의 전쟁을 주무대로 다룬 소설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고, 전쟁보다 큰 가치인 사랑과 협력을 위한 '화해'를 주제로 한다. 이 지역은 구 소련 붕괴 이전에 대부분의 나라가 공산주의 체제로서 소련의 위성국이라고 불리웠던 나라들이 밀집해 있다. 요즘 발칸반도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해외 여행객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곳은 아니다. 독자에게도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이라는 나라가 당연히 낯선 곳이지만 그래도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 곳이기도 하다. 1973년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김순옥, 나인숙 등과 함께 나선 사라예보세계탁구선수권 단체전에서 구기 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는 박정희 정권으로 북한과의 대치 상태였으니 이들의 금메달 획득은 나라의 이름을 떨친 공적으로 평가됐다. 아마 카퍼레이드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공산권 국가들이 많아 여전히 북한과의 수교 상태이고 우리와는 거리를 둔 상태였다.

구 소련이 붕괴된 후 20세기가 다 지나가도록 발칸반도는 우리와 너무 먼 지리적 위치와 당시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이 지역은 카톨릭,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혼재해 있었다. 또 발칸반도를 통일 국가로 묶은 티토 대통령은 국호를 유고슬라비아로 정하고 독재정권을 이어갈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혼란스웠다. 이곳에 치열한 전쟁이 터진 것은 구 소련 해체로 각 나라가 유고슬라비아 이전의 상태를 되찾아가는 과정에서였다.

이른바 '보스니아 분쟁'은 유고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1991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대하여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할 것을 선언하고, 1992년 3월의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보스니아 내에서 당시 35%의 인구비율을 차지하던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참가 자체를 거부하고, 보스니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발칸반도 <자료출처 : 시사상식사전>

 

1992년 4월 6일 EU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됐는데, 신유고연방군(세르비아가 중심이 됨)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내전 초기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점령했었다. 보스니아 사태가 위험 수위를 넘자 유엔은 1992년 5월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 등의 제재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계속해 나가면서 소위 ‘인종청소’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유엔도 1992년 8월 평화유지군 파견을 통하여 내전에 개입하였으나, 세르비아계의 무력도발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종청소'라는 어휘다. 이 소설이 이때 이 분쟁의 중심이었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란 지명은 모두 옛 유고슬라비아의 명칭 그대로다. 유고 이전부터 같은 이름으로 존재했던 지명들이다. 특히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유가 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은 이 책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 〈작가의 말〉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주요 내용은 본문에 수시로 등장한다. 이에 독자 역시 잘 알지 못하는 먼 나라 이야기여서 〈네이버 백과〉를 인용, 배경 설명을 하고 있는 점을 양해 바란다.

언급한 바와 같이 1991년 6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제1차 유고 내전이 시작되었고, 9월에는 마케도니아까지 독립을 선언하여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에 1992년 3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신유고 연방을 창설했으나 이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했으며, 이는 보스니아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을 주도한 것은 이슬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이슬람교도들과 크로아티아인들로, 이들은 세르비아계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을 우려해 독립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세르비아계는 민족별 분리를 이유로 국민투표에 불참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1992년 4월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보스니아의 독립을 반대해왔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1992년 5월 25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에 포격을 감행, 보스니아 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 제2차 유고 내전, 즉 보스니아 내전을 일으켰다. 보스니아 내전은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갈등의 구도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유고 연방군과 함께 보스니아 영토의 70%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낯선 곳의 낯선 전쟁에는 낯선 단어가 하나 더 눈에 띈다. 표제어로 사용되는 '체트니크(cetnik)'다. 체트니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의 전쟁장관이었던 미하일로비치가 세르비아 건설을 위해 조직한 군사조직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영토가 분할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학살되었다. 이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고취된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후 독일에서 저항하던 미하일로비치를 망명정부의 전쟁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미하일로비치는 일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1941년 5월 체트니크를 창설하였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점령국인 독일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공산세력인 파르티잔까지 전투의 목적으로 삼았다. 세르비아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한전만 벌이며 연합군의 지원만 기다리던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독일과 손을 잡고 공산세력에 저항한다.

연합군 측은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크로아티아 출신 티토가 이끄는 공산세력인 파르티잔을 지원했고, 영국정부는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와 티토와의 화해를 중재하였다. 그 조건은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체트니크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연합국 측이 승리함에 따라 유고슬라비아가 공산화되면서 체트니크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전쟁중에 일으키려던 세르비아 건설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미하일로비치는 저항하다가 1945년 티토의 게릴라들에게 잡혀 1946년 반역죄로 처형당했다.(두산백과 참조)

이처럼 낯선 것투성이인 발칸반도에서의 전쟁, 즉 보스니아 분쟁이 낳은 소설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는 체트니크, 모스타르, 스타리 모스트 등 우리에게는 낯선 지명과 낱말,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낯선 역사를 다룬다. 그래서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한 국가 안에서 전쟁을 벌여 서로 죽이고 여성들을 상대로 몹쓸 범죄를 저질러 원치 않은 아이를 낳게 한 사건은 물론 매우 충격적이다. 그러나 세계 지도를 펼쳐도 정확히 어디 있는지 짚어 내기 어려울 만큼 생경한 나라의 이야기를 대한민국의 저자가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런 이야기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음을 울리는 것일까?

 


 

이에 대해 출판사 측이 내놓은 이유는 간단하다. 언뜻 보기에는 멀어 보이는 이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의 어제, 오늘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종교라는 명목하에 내전이 벌어졌던 보스니아처럼 우리나라도 이념이라는 허울 아래 전쟁을 치렀고, 갈라졌다. 이 닮음에 한 가지 차이를 더하면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이미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단이 아픈 것인지, 전쟁이 어떻게 왜 끔찍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반면 소설의 주인공 나타샤와 같은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들은 아직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았다. 곧 나타샤의 주변 어른들은 모두 전쟁의 당사자라는 뜻이다. 책과 뉴스에서 접했던 전쟁과는 다른, 직접 겪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전쟁의 참상, 그 속의 인간들의 추악하고 끔찍한 모습이 주인공 나타샤의 눈과 귀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난다. 또 이런 끔찍한 일을 반복하지 말자는 수많은 합의와 약속이 무색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전쟁의 포화 속에 있다. 소설 속 애나와 나타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여성과 노약자가 반드시 있다.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는 그들에게 바치는 한 송이 꽃이자, 여전히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인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전쟁의 참혹한 면, 인간의 잔인한 면 등을 순화시키기에는 종교의 힘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딪쳤다.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이 지역은 종교와 민족, 종족,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렸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원인이 되는 종교나 민족, 종족이나 이념이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전쟁은 인류가 지양해야 할 가장 큰 범죄요 악행이다. 전쟁의 피해자는 군인보다 훨씬 약자이고 소외자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이 보스니아 내전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여성들은 적의 '씨를 말리기 위해' 여자와 마음대로 강간하게 내버려 둔다. 이 책에서는 '상부의 명령'으로 표현되지만 명백히 전쟁 당사자들의 명령이다. 어는 전쟁에서도 볼 수 없는 전쟁 범죄의 가장 악랄한 부분이 20세기 마지막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점은 21세기 오늘을 사는 인류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자 해답을 내놓아야 할 숙제가 되었다.

 


 

이 소설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는 전쟁을 다루지만 전쟁의 참혹성을 주제로 삼지는 않는다. 피해자이고 약자인 한 여성의 딸(딸도 피해자다)을 중심으로 한 ‘가족 성장 소설’이다. 소설은 전쟁과 범죄라는 무겁고도 큰 소재를 담고 있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은 주인공 '나타샤' 모녀의 갈등과 해소다. 둘 중 누구도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아픈 과거 속에서 공유한 두 사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갈 것을 예고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모든 일은 나타샤가 여행 중에 만난 엄마의 고향 사람들, 끝까지 곁에서 힘이 되어준 친구 사라, 엄마와 같은 입장이었던 사비나 이모 덕분에 이루어졌다. 사실 모녀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는 전쟁이었고 국가였다. 가해자의 위로가 고작 한 달에 밥 한 끼 사 먹을 보상금이 고작이었던 데 비해 나타샤 모녀는 주변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위안을 받고 자기 상처에 당당히 맞설 용기까지 얻는다.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비해 훨씬 작은 약자일 때의 씁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줌과 동시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연대의 모습을 제안한다.

이 소설은 저자 장경선의 시대 의식과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북한과의 휴전중)을 감안해 소재로 삼아 썼다고 이해된다. 저자는 사실 소설보다는 동화를 많이 쓴 작가다. 다만 동화라도 역사에 주목하고 있다. 그가 쓴 동화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암리를 아십니까』, 『검은 태양』, 『언제나 3월 1일』, 『터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이 결말 부분에 이르러 가능성만 열어놓고 끝내는 부분은 현재 이 지역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채 주변국과 UN 차원의 지원을 기반으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뿌리는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의 역사의식과 국제적 감각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UN 기구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내전과 분쟁으로 사실상 유럽의 최빈국으로 꼽히는 보스니아는 2010~12년 동안 국제사회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는데 2010년의 국내총생산(GDP)은 1%가 증가했으며, 2011년의 경제성장률은 2.4%였다. 또한, 2012년 9월 국제통화기금(IMF)은 보스니아에 5억 달러 규모의 대기성(Stand-by) 차관 지원을 최종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2010년 2.1%에서 2011년에 3.7%로 증가했고5) 2011년에 실업률은 27.6%였으며6), 전체 경제에서 음성적인 지하경제가 약 20∼25%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보스니아에서 일어나는 최근 시위의 초점은 높은 실업률과 빈곤률에 대한 항의에 맞춰지고 있는 추세이며, 실례로 2013년 7월 2일에는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1,500여 명의 중산층 시민이 정부 당국에 경제·정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고 외신이 전한 바 있다. 2013년 현재 보스니아 내 380만 명 국민 중 40%가 실업상태이며, 보스니아 내 아동들은 인신매매·가정폭력·방임 등에 노출된 실정이다.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다.

또 2015년은 보스니아에 있어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희망이란, 드디어 EU 가입을 위한 예비협상이 결정되고 EU 안정제휴협정(SAA) 발표로 인해 EU 가입에 탄력이 붙게 된 것이다. 이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보스니아는 EU 기준에 맞는 사회 제도 정비에 나섰고, 이에 대한 혜택으로 무관세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이 남았다는 것과 주변국과의 갈등 상황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20주년은 맞았지만, 여전히 이를 학살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게다가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를 학살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자 했으나 평소 이와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거부로 채택에 실패하게 되었다. 세르비아-보스니아 합동 검찰 수사팀이 과거 스레브레니차 학살 용의자 7명을 검거하기도 했으나, 학살 20주년 추모식에 참석했던 세르비아 총리가 군중이 던진 돌을 맞는 등 스레브레니차 사건은 여전히 아픔을 남기고 있다.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전쟁 포화 속을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이 시점에서 저자의 높은 역사 의식과 국제적 감각으로 '낯선 전쟁'의 비극을 우리에게 전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독자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많은 일들이 있는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저자 : 장경선

 

196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97년 봄 [자유문학]에 청소년소설이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제1회 ‘아이세상 창작동화상’을 받았다. 현재는 아이들에게 독서교육을 하며 동화를 쓰고 있다.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엮은 이야기로는 『제암리를 아십니까』, 『김금이 우리 누나』, 『검은 태양』, 『언제나 3월 1일』, 『안녕, 명자』, 『꼬마』, 『나무새』, 『소년과 늑대』 등 근현대사를 다룬 이야기가 많다. 먼 나라의 아픈 역사에도 귀를 기울여 아르메니아의 아픔을 그린 『두둑의 노래』와 보스니아의 내전을 그린 『터널』과 청소년 소설 『체트니크가 만든 아이』를 썼다. 이밖에도 『쇠똥 굴러가는 날』, 『황금박쥐부대』, 『장난감이 아니야』, 『우리 반 윤동주』, 『우리 반 방정환』도 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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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길 시골하우스
이영희 지음 / 델피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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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감꽃 길 시골하우스』는 '사랑'과 유산을 둘러싼 '돈' 등을 다룬다. 책 속의 분위기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멜로 드라마로 분류될 수 있지만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동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소설이든 동화이든 그 어떤 것으로 분류되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보타니컬 아트와 동화의 만남'으로 저자가 직접 규정해 놓은 것으로 볼 때 아름다운 일을 다루는 것은 분명하다. 내용 역시 꽃과 꽃말이 직접 거론되고 저자 이영희가 '플라워 아트' 전문가라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의 스토리에 대한 관심을 넘어 꽃에 대한 지식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자칫 주제가 약하다는 인식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펼쳐놓은 이야기는 만만치 않다. 저자는 책을 통해 결국 사랑이야말로 어떠한 역경과 시련도 이겨나가게 해주는 힘이란 것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일깨우는 책으로 읽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우리 일상에서 흔히 대하는 분위기가 나타난다. 급작스레 부모를 잃은 주인공 ‘하유’. 추스르기 힘든 슬픔도 잠시, 가족들은 오히려 하유에게 불길한 기운이 있다며 모진 말을 일삼고 유산을 차지하려고만 한다.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하유’는 우연히 들른 감꽃 길 ‘시골하우스’에서 다정한 ‘시곤’을 만나며 소설이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살가운 도베르만*(이름 : 브라프), 넉넉한 시골 인심의 권숙과 종학이 등장하며 하유는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시곤’은 어딘지 모르게 ‘하유’에게 특별함을 느끼며 다가오고 ‘하유’도 ‘시곤’이 운명의 상대임을 강하게 느낀다.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은 꽃말로 상징되며 장(章)의 구분 역할도 한다. 판타지 세상 속의 동화 같은 이야기로 읽는 내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책을 펼치는 순간 온기를 머금은 문장들은 마치 꽃봉오리처럼 피어나서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 도베르만(Dobermann) : 독일에서 유래한 중형견(犬)으로 명칭은 맨 처음 사육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루이 도베르만의 이름에서 온 견종이다. 체구와 달리 우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을 수행하는 능력과 힘든 일도 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한국애견연맹 견종 표준서)

 


 

저자 이영희는 꽃 전문가라고 한다. 꽃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은 이유다. 그는 꽃을 소재로 쓴 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작 『그 모퉁이 집』은 장르 소설로 분류되지만 역사 소설에 가깝다. 표제어로 쓰인 '그 모퉁이 집'은 일제 강점기 불에 타 80년째 버려진 폐가다. 전작은 어느 날 신비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꽃집에 3만 원짜리 꽃다발을 주문하고, 꽃잎 향과 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내는 남자들이 스토리를 풀어간다. 꽃집의 딸이자 아쟁 연주자인 ‘한마디’가 그 모퉁이 집에 꽃 배달을 간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때로 모퉁이 집의 기원을 끌어올린다. 일제 강점기-여성(소녀)-위안부란 상상적 공식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소재의 연결이다. 주인공 한마디는 어릴 적 기억을 잃었지만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 독특한 인물 설정으로 독자들을 신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솜씨는 중견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는 꽃 전문가로서 다양한 꽃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역사적 상상력을 보태어 새로운 장르인 〈플라워 판타지〉를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 바 있다. 독자는 저자의 소설이 전작과 이번 작품으로 두 번째 대하는 셈이다.

이 책 『감꽃 길 시골하우스』는 전작보다 판타지 성은 떨어지지만 꽃에 대한 지식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느껴진다. 전작은 역사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는 집을 두고 시공을 초월해 이야기가 전개돼 꽃은 소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소설 『감꽃 길 시골하우스』는 꽃이 주제가 되었다 해도 무리한 지적은 아닐 듯 싶다. 저자는 특유의 몽환적이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한층 원숙해진 느낌이다. 꽃과 관련 '보타니컬 아트'**도 소개한다.

**보타니컬 아트(Botanical Art) : 식물학을 의미하는 단어 ‘Botanical’과 예술을 뜻하는 ‘Art’의 합성어이다. 모든 종류의 꽃이나 식물, 과일과 채소를 정교하게 표현해 내는 그림 예술. 다양한 기법으로 잎맥 하나하나, 꽃술의 솜털 하나하나, 흙이 달린 잔뿌리 하나하나까도 정확히 그려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저자 주)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10가지의 꽃이 등장해 10장(章)으로 이루어졌다. 각 장과 함께 등장하는 꽃은 각 장에서 소개되며 꽃말을 마지막 문장으로 장이 바뀐다. 이에 등장하는 열 가지 꽃과 제목은 다음과 같다. 「6월에 내린 눈· 감꽃」, 「백자귀의 설야· 백자귀」, 「닿고 나서야 알았다· 작약」, 「당분간만 안녕· 백일홍」, 「재회는 칼날 같고· 오미자」, 「10월이 뜨거워지다· 수국」, 「그대가 있어· 제라늄」, 「그날 밤 그와 그녀· 천년초」, 「악한 자의 구덩이· 포인세티아」, 「뿌린 대로, 지은 대로· 과꽃」 등이다.

저자는 이 책 『감꽃 길 시골하우스』를 통해 우리 인생의 판타지는 결코 SF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유’에게 ‘시곤’이 그랬던 것처럼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일상은 판타지가 되어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유’와 ‘시곤’은 배려가 어떻게 인연이 되고 또다시 나에게 돌아오는지 그래서 사소한 일상이 어떻게 판타지로 변모하는지를 마치 동화처럼 보여준다.

이 소설 작품은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따뜻한 단 한 사람이 되기를 권한다. 지극히 평범한 대화가, 판에 박힌 일상이 사소하게 느껴진다면 주변 누군가에게 따뜻한 단 한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도 누군가의 삶을 판타지로 바뀌게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소한 일상에서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생의 묘미라는 것을 시종일관 지극히 따스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곤’이 ‘하유’에게, 모든 독자들에게 건네는 평범한 듯 심심한 위로로 우리의 오늘은 판타지가 된다. 출판사 측은 이 책의 읽는 독자들에게 "그저 헛헛한 마음에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을 뒤져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책 『감꽃 길 시골하우스』는 그런 독자들에게 선물 같은 소설이 될 것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소설보다는 동화에서 꽃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 작가들이 동심이 꽃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 이영희는 "꽃을 사랑해서 꽃으로 글을 쓰는 꽃 전문가"라고 한다. 저자의 꽃에 대한 표현은 이 책을 통해 수없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인지, 꽃이 주인공인지 모를 정도다. 남녀 주인공이 만나 함께 돌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 책의 첫 장에 나온다.

"주차장 입구까지 다다랐다. 순간 갑자기 하유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부딪칠 뻔했다.

"왜 그래요?"

시곤이 하우가 다가선 만큼 재빨리 옆으로 물러났다.

"들꽃을 밟을 뻔했어요. 발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요."

하유의 신발 옆으로 흰 봉오리를 오므린 제비꽃이 U턴 모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차장의 한쪽 끝에는 평상이 놓였다.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낮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넓었다.

"6월이라도 산 아래 시골의 밤은 싸늘합니다. 비가 온 뒷날은 더욱, 이걸 덮어요."

시곤이 내민 담요를 하유는 선뜻 받아 덮었다.

"이제 제대로 봐요. 눈꽃의 모양이 어때요?"

하유는 천천히 살펴보다 깨닫게 되었다. 갓 타서 뭉쳐 놓은 햇솜 같기도 하고 갓난쟁이 주먹만큼 둥글려 놓은 솜사탕 같기도 한 그것은 처음 보는 꽃이었다. (중략)

이름이 뭐예요? 이 향기도 저 꽃들이 피워내는 것, 맞죠?"

혀끝을 감아드는 다디단 향이 점점 전해지는 중이었다.

"백자귀 꽃입니다."(p.28~29)

 


 

앞서 잠깐 소개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 '아름다운 책'에 한줄 보탠다. 봄날, 밤바람을 타고 벚꽃 눈이 휘날렸다. 시곤이 차창을 내렸다. 브라프가 꽃잎을 받아먹으려고 혀를 날름거렸다. 꽃잎 하나를 낚아 채더니 코까지 벌름거렸다. 또 다른 꽃잎은 브라프의 옆에 놓인 책에 내려 앉았다. 꽃 그림의 책 표지는 이랬다.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보타니컬 아트와 동화의 만남

〈감꽃 길 시골하우스〉- 설시곤과 여하유 부부

 

~ 설시곤의 꽃말은 <여하유> ~

 

저자 : 이영희

 

경남 진주시 하대동 거주

꽃을 사랑해서

꽃으로 글을 쓰는 글쟁이

<영남문학> 중편소설 등단

통일부 통일창작동화 수상

대한민국 e작가상 수상

제 7회 진주시 북 페스티벌 초청 강연

장편소설 『그 모퉁이 집』 출간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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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블러드 -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 2 여고생 핍 시리즈
홀리 잭슨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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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처음 한 문장이 글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결정적 문장이라고 한다. 특히 긴 소설처럼 스토리를 가진 문학 작품은 더욱 첫 문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독자가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포인트라고 한다. 이 때문에 글을 쓰는 작가들은 첫 문장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할 정도다. 문학이론서에도 첫 문장의 중요성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잘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이 말의 중요성은 예전 책을 서점에 가서 구입할 때 확인한 바 있다. 신간 소설이나 베스트셀러라고 진열대에 있는 책을 살지 말지를 첫 문장을 보고 결정했던 것이다. 신춘문예 소설 작품의 심사위원(예심)을 했던 분들도 "첫 문장을 보고 빨리 판단한다"고 말해 왔다. 이 책 『굿 걸, 배드 블러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살인자의 목소리는 분명 뭔가 다를 것이다. 살인자의 거짓말에는 쉽게 감지되지 않는 어떤 미묘한 특성이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톱니바퀴 아래 진실을 감춰둔 채 거짓말을 내뱉을 때,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순간 뾰족하게 변하며 불안정하고 불규칙하게 비어져 나오는 목소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살인자와 마주하면 그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핍은 알아차리지 못했다."(p.7)

 

작가 홀리 잭슨의 장편 소설인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핍의 마음속 생각을 소설의 첫 문장으로 삼았다. '핍'? 그가 누군데?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이 시리즈의 1권을 안 본 탓이다. 이 책은 '핍' 시리즈 1권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의 주인공이다. 그가 이 책 『굿 걸, 배드 블러드』에서도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한다. 1권과 비슷한 역할로, 비슷한 일을 한다면 1권의 인기를,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 잭슨은 주인공 다시 내세울 정도로 1권 발간 때 이미 멀티밀리언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올랐다.

 


 

저자가 2권에서 주인공 핍이 또 다른 치명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 중독성 있는 ‘트루 크라임’ 속편을 통해 더 많은 어두운 비밀을 폭로한다. 사실 1권의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로 이미 대중성을 확보한 핍은 이제 더 이상 탐정이 아니다. 지난해 해결한 살인 사건에 대한 ‘트루 크라임 팟캐스트’를 게시했기 때문이다. 방송에 전념한다는 말이 입소문을 탔다. 핍은 이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터다. 하지만 가까운 누군가가 실종되고 경찰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핍은 그 다짐을 돌이킬 수밖에 없게 된다. 지난 사건의 희생자인 앤디 벨과 샐 싱의 추도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밤 친구의 형인 제이미 레이놀즈가 사라진다. 레이놀즈의 실종은 전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범죄가 분명하지만 경찰이 조사하지 않는다면 핍이 나서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자는 2권의 소설 발단 부분에서 이 사실을 밝힌다.

 

“실종자가 생겼어요.” 핍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리틀 킬턴 마을의 제이미 레이놀즈가 사라졌어요. 사건번호는 900.” (중략) “매일 접수되는 실종사건이 몇 건이나 되는 줄 아니? 어떤 날은 하루에 열두 건이 접수될 때가 있어. 그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다 조사할 만한 인적자원이나 시간이 없단다. 특히나 이렇게 예산도 부족한 판에. 대부분의 실종자들은 48시간 이내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우선순위에 따라야 해.”

“그럼 제이미를 우선순위에 올려주세요.” 핍이 말했다. “제 말 좀 믿어주세요. 이건 단순한 가출이 아니에요.”

“그렇게는 못 해.” 호킨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건 관할 경찰서 수사 경위인 호킨스는 단순 가출 정도로 치부한다. (중략) “제이미는 다 큰 성인이야. 심지어 제이미 어머니조차 제이미가 전에도 가출한 전력이 있어서 집을 나간 게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인정하셨어. 성인에게는 본인이 원하면 사라질 권리가 있어. 제이미 레이놀즈는 실종된 게 아니라, 잠시 집을 나간 거야.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며칠 안에 집으로 돌아올 거다.”(p.68~70)

 


 

독자들은 책을 펼쳐 들자마자 무엇보다 경찰력이 중요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면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경찰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10대 소녀가 대신하고 있는 동안 경찰은 실상 아무런 행동 개시도 하지 않고 핍 혼자서 오롯이 모든 결과를 맞닥뜨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경찰 공권력에 대해 절망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주인공 핍은 이미 한번 리틀 킬턴의 추악한 비밀의 공포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경험하기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저 평범하고 ‘착한’ 여자아이로 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한 터다. 그렇기에 더더욱, 실종된 친구를 찾기 위한 풍파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써보지만 어느샌가 또다시 사건에 발을 들여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가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는 도중 핍은 서서히 통제력을 잃고 결국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옳은 길을 향해 매진하는 핍의 투지와 결단력, 포기를 모르는 직진 스타일이야말로 다시 한번 이 소설의 매력을 떠받치는 원동력인 셈이다.

저자 피터 잭슨은 핍이 행한 엄청난 역할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핍은 놀라운 탐정이지만 실제로 한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핍은 날카로운 칼날 앞에 흔들리며 자신이 그 칼에 베이게 될지 그 칼날을 피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핍 이외에도 소설에는 라비, 카라, 코너, 나오미, 나탈리, 다니엘 다 실바 같은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두 1권에서 등장한 인물들이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경찰보다 먼저 사건의 진실에 집중하는 관심을 갖게 된다. 언제나 핍의 지원군이 되어주는 가족은 물론, 2권 『굿 걸, 배드 블러드』에서는 특히 라비와 코너 그리고 카라가 계속 훌륭한 조연 역할을 하며 무엇보다 라비와 핍이 좋은 관계를 유지한 채 협력해나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저자 잭슨은 꼼꼼하게 짜인 플롯으로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만드는 데 있어 예리한 통찰력과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이미 1권에서 보여줬다. 1권에 이어 이번 출간한 2권 『굿 걸, 배드 블러드』는 '우연보다 필연'의 방법으로 독자들이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시리즈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완벽한 구성력과 반전, 또 반전, 그리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유기적 구성력이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다. 특히 이 소설은 미스터리 페이지터너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은 페이지를 펼치면서부터 이미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예감케 하는 팟캐스트 오프닝이 시작된다. 시리즈의 전작인 1권의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을 능숙하게 요약하면서 새로운 사건에 빠져들게 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리틀 킬턴이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아직 다 파헤치지 못한 치명적인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긴장을 고조시킨다. 군중심리가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또 주변의 평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곳곳에서 약도, 사진, 팟캐스트 화면, 재판 현장 삽화, 사건 기록 문서 파일 등 각종 시각적 자료를 사용해 혹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들 시각 자료들은 구성이 지나치게 치밀해 사전 각본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독자들이 오해할 우려를 사전에 불시시킨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요소를 차단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설 전개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뒤로 갈수록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만 미스터리 소설의 재미는 '반전'에 있다는 주장처럼 반전에 반전이 등장하면서 각 인물들의 역할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기능도 한다. 한 번 손에 잡으면 절대 놓을 수 없도록 유도하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핍이라는 10대 소녀의 인상은 선하고 똑똑하며 결단력이 강하다. 주인공 핍은 자신의 불안한 심리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 군중의 시선 아래 그 압박과 싸워나간다. 사실 실제 10대 소녀가 해결할 정도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일을 해결하는 핍은 사설 탐정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내는 '히로인'에 가깝다. 예상 밖의 이야기 전개와 급변하는 상황이 사건을 더 악화시키고 조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기도 하지만 단순하게 보이는 줄거리가 더욱 스펙터클하게 흘러가는 역할을 한다. 이번 2권 『굿 걸, 배드 블러드』 미스터리와 전작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그사이 죄책감과 복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 홀리 잭슨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통해 10대들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 바라보고 이해하게 하도록 절묘한 구성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 작품은 아직 발간되지 않은 3권을 예고하고 있다. 3권이자 최종편이 될 『에즈 굿 에즈 데드』이다. 물론 국내 번역 출간 기준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핍 시리즈는 스토리 구성이 탄탄하고,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이 촘촘해서 민완 형사가 사건을 풀어가듯이 독자들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10대 소녀를 등장시켜 소설적 재미를 더했으며, 주인공 핍은 히로인으로 등장해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민첩하고 강하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도 저자의 캐릭터 창조에 성공했다고 판단한다. 독자들의 방심 사건의 진행을 무방비로 노출시킨 것은 저자의 구성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사건을 풀어나가는 주인공이 10대이기 때문에 온라인과 디지털 문화을 잘 아는 데 자연스럽다고 소설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건을 풀어가는 데도 우연보다는 필연에 중점을 둘 수 있는 이유라고 출판사 측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온라인 통한 악성 댓글에 노출되거나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더욱 유망한 탐정이 될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10대 소녀이기에 더욱 드러나는 카리스마와 이타심 등도 인물 창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토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혼란이 올 수 있는 부분,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사건과 엮이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독자들의 혼란을 부추길 우려가 있고, 우연에 가까운 사건이니만큼 '옥의 티'로 지적될 수 있지만 충격과 공포를 독자들에게 주는 데는 성공적이라고 출판사 측은 주장한다. 제목까지 정해 놓고 아직 출판 대기중인 '핍' 시리즈 3권 『에즈 굿 에즈 데드As Good As Dead』가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저자 잭슨은 책의 뒷 부분에서 〈감사의 말〉을 통해 10대들의 힘이 이 소설의 구성과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들이 보여준 '우정'에 감사하고 있다. "핍과 카라에게서 볼 수 있듯이, 10대 소녀들의 우정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10대 때부터 함께해온 치눅들, 엘리 베일리, 루시 브라운, 카밀라 버니, 올리비아 크로스맨, 알렉스 데이비스, 엘스펫 프레이저, 엘리스 레벤스, 한나 터너(너의 이름들을 도용하게 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오랜 친구인 에마 트웨이츠(어린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끔찍한 연극과 노래들로 내가 이야기 쓰는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너무 고맙다), 버기타와 도미닉도.(p.475)

 

저자 : 홀리 잭슨(Holly Jackson)

 

1992년생. 열다섯 살에 첫 번째 습작 소설을 썼을 정도로 이른 나이부터 글쓰기에 뜻을 두었다. 노팅엄 대학에서 문학언어학,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영문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는 런던에 거주 중이며, 여가시간에는 게임이나 범죄 실화 관련 다큐멘터리를 즐기는 편. 덕분에 탐정 노릇에 일가견이 있다.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A Good Girl’s Guide to Murder』은 홀리 잭슨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며 그 후속편으로 『굿 걸, 배드 블러드Good Girl, Bad Blood』, 『에즈 굿 에즈 데드As Good As Dead』를 출간했다.

트위터&인스타그램: @HoJay92

 

역자 : 고상숙

 

연세대학교 영문과, 한국외대통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KBS에서 외신 번역과 통역을 담당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레드 세일즈 북』, 『아이를 바꾸는 교육의 절대 원칙 11』,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희망과 함께 가라』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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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이병일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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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일상에서 끌어 올린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예리한 관찰력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모두 보여준다. 특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정(情)과 정감어린 예전의 모습이 더욱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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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이병일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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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은 시인 이병일의 에세이집이다. 등단 이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의 문학은 시와 에세이 희곡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활동으로 숙성돼 왔다. 마치 맛있는 간장이 햇빛과 바람, 그리고 시간에 의해 발효되는 것처럼... 이제 그의 글 한 줄 한 줄은 영혼이 깃들어 있고, 언어는 햇빛이 비치면 '쨍' 소리나며 부설질 것 같은 잘 빚어진 도자기와 다르지 않다. 특히 자연의 생명력과 서정이 깃든 어휘는 순우리말로 표현돼 한층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독창성 있는 어휘 사용은 저자 이병일의 특유의 감성과 함께 녹아 있는 시 〈녹명(鹿鳴)〉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녹명'이란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말로 사전식 풀이로는 '사슴의 울음소리'를 의미한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란 시의 제목으로 완성됐다. 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4장(章) 〈살아 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중 「나는 왜 동물의 언어에 집착하는가?」에서 저자 이병일은 자신의 시 〈녹명〉에 대한 언급을 한다.

 

저 흰빛의 아름다움에 눈멀지 않고 입술이 터지지 않는

나는, 눈밭을 무릎으로 밟고 무릎으로 넘어서는 마랄사슴이야

결코 죽지 않는 나는 발목이 닿지 않는 눈밭을 생각하는 중이야

그러나 벳구레의 갈비뼈들이 봄기운을 못 견디고 화해질 때

추위가 데리고 가지 못한 털가죽과 누런 이빨이 갈리는 중이야(p.223~224) - 〈녹명〉 부분

 

시인 이병일은 이 시에 대해 현대의 우리들이 이로운 정보와 먹을 것을 발견하면 숨기기 급급하고 혼자 먹기 바쁜데, 사슴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서 "이리 와, 우리 같이 먹자"고 정을 나눈다는 점에 착안해 이 시를 완성시켰다고 말한다. 우리의 옛 서정을 사슴의 울음소리를 통해 형상화시킨 것이다.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매혹당하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는 저자의 말로 이 에세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에는 저자가 자연과 일상에서 발견한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억들과 단상들이 펼쳐져 있다.

책의 〈작가의 말〉을 통해 저자는 “작고 눈부신 동식물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아직 말해지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한 엉뚱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신통찮은 문장으로 아름다움이 사는 반대쪽까지 내다볼 심산이었으나 괜히 아는 척하다가 눈꼴사납게 될까 봐 차돌 같고 옹이 같은 눈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목숨 가진 것들의 안위를 살피는 질문이 ‘시’가 된다”(p.284)는 저자의 시론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알 수 있는 글편들을 통해 독자들은 사유와 감성의 진수를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이 에세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에는 저자 자신이 위로를 받은 대상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과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은 “여러 층위를 가진 빛이 있고 색이 있”는 ‘봄산’(p.10)일 수도 있고, “엎드린 자가 벽 너머를 생각하고 누워있는 자가 천장 너머를 보는” ‘시골집 방’(p.26)일 수도 있다. 또 “너무 깊어 아홉 자식의 눈물을 모아 쏟아부어도 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쇄골’(p.98)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칡소와 돼지를 키웠던 일, 사슴벌레와의 만남, 거미줄로 만든 잠자리채에 관한 추억들은 그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도 온기와 위안을 전한다.

꽃가루 날리는 버드나무는 불곰에 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접붙이기에 대한 생각은 존재와 몽상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며,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구를 이루는 어린 아들의 존재는 어른이 되어버린 시인을 자연과 연결해 준다. 자연과 일상에서 끌어낸 아름다움과 사유,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과 가축 또는 곤충, 벌집, 나무 같은 자연물에서 위로받은 소소한 기억들은 극적이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린다.

 


 

1장 〈숨은 위로 찾기〉에서 「팥」을 통해 팥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흰 얼굴과 붉은 얼굴을 가진 돌멩이인데, 그 돌멩이에겐 냄새와 감정이 있고, 목소리도 있다. 항상 주름으로 가득한 세상을 담고 있어 단단한 것인데, 그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순간에 집중하는 힘을 주었다. 팥은 나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한 숟가락 떠서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는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위로였다. 목을 마르지 않게 하는 힘이었다. 어릴 적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팥죽에 대한 그리움과 팥의 의미를 함축해 보여준다.

“가장 은혜롭고 연약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없는 것들의 언어를 읽어내고 싶었다”(p.57~58)는 시인은 그러한 대상들 내부에 숨겨져 있는 저마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에 집중하면 아득한 환상이 보이는데 이런 상상들은 시인을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시인에게 ‘회복의 순간’을 선사한다. 이는 이병일 시인 시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녹명 정신’과도 이어진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혼자만 잘사는 법을 배우는 데 익숙해진 각자도생의 시대에 시인은 굳이 ‘녹명’이란 말을 불러낸다. 은근히 녹명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3장 〈오래 달라붙어 있어도 좋을 감촉〉의 「자두와 마법에 걸린 사과나무를 생각함」이란 글에서 시인은 어릴 적 동네 자두나무에 관한 기억과 동화 〈마법에 걸린 사과나무〉 이야기, 성인이 된 후 지인의 자두나무밭에 들렀던 일을 차례차례 펼쳐놓는다. 자두 서리해 가는 아이들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쥐어뜯어 놓은 동네 아주머니와의 일화에 이어지는 동화 속 마음씨 좋은 사과나무 주인 이야기, 그리고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지인 자두밭에서의 경험은 시인의 녹명 정신이 어떻게 물꼬를 트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시인 특유의 표현과 시적 형상화를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냄으로써 감성과 아릿한 추억의 그리움을 극대화시킨다. 독자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추억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비슷한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앞서 잠깐씩 언급했지만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숨은 위로 찾기〉, 2장 〈내가 사랑하는 것들〉, 3장 〈오래 달라붙어 있어도 좋을 감촉〉, 4장 〈살아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등이다. 1장의 각 제목에 등장하는 어휘들만 봐도 자연 속, 자연과 함께하는 삶,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을 생각나는 단어들로 꽉 차 있다. '봄산' '밤나무와 달항아리' '담장' '방' '수각화' '팥' '나무' '산벚나무' '풀피리' '버들피리' '사슴벌레' 등이 그것이다. 유일한 이색적 동물은 '기린'뿐이다. 그것도 시인 자신의 경험보다는 아이를 보살피던 아이와 자신의 기억에 의해 이 장에 등장한다.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에서 봤던 기린에 대한 관찰에서 깨달음의 일부다. "기린의 힘은 일곱 개의 목뼈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중략) 기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읽으면서 모가지에서 나오는 힘으로 기린이 걷는다는 것을 발견했죠."(p.48)

2장은 시인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물론 시인의 시적 대상이 주가 되겠지만)에 대한 이야기다. 「보리수나무」에서는 평생 산 가까이 붙어사는 부모님 덕에 시인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그리고 후각으로 자연과 동식물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여기서 보리수나무는 일상적인 정경이지만 보리수나무를 관찰하면 다른 것이 보인다는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홀연히 어떤 대상을 응시하고 의미 있는 어떤 순간을 포착할 때, 아름다운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보리수나무는 나무로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잊지 않되 현실에 몸담을 수 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삶의 일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해준다. 끝없는 일상에 대한 기억을 미각으로 말하기. 저 보리수나무는 어디에나 있겠지만 그 어디에도 물돌 같은 파리똥은 없을 것이다."(p.85) 2장에는 또 「나의 시론」이 두 편 나온다. 「나의 시론 1」에서는 ① 투명한 깊이 ② 거머리 시학 ③ 나의 시적 질료는 자연물이라는 번호를 붙인 작은 제목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시론 2」에서도 ① 무턱대고 걷는 산길 ②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③ 핏줄 도드라지는 자리, 시란 소제목도 있으니 역시 일독을 추천한다. 시인이 쓴 시에는 번호를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은 에세이에 자신의 시론임을 확인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해 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을 것이다. 특히 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4장에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는 동식물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지구의 미래를 고민한다.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미래를 관통할 통찰력 있는 시인의 혜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라는 저자는 "목소리를 가진 것, 그리고 사물에게 목소리를 입혀주는 것이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서술과 사유를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찾지 말자」란 글에서 저자는 ① 낮은 목소리 ② 소똥구리 ③ 뱀들 ④ 매 ⑤ 대마와 굼벵이가 사는 집 ⑥ 목청 혹은 석청 ⑦ 고비 ⑧ 산매화를 제시한다. 저자는 지구의 어딘가에서 삶으로부터 어긋난 것들이 진화하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 동식물이 성가시게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저마다 필사적으로 제 목숨을 잘 지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직은 그것들을 되살려낼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더 늦지 말아야 할 것들이기에 굳이 이 책에서 적었으리라. 결국 시인은 죽어 있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 회복은 우리들이 지금 나서야 할 때라고 부르짖는 것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마지막 글 「시, 그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은 저자의 시세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내가 찾는 시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다. 목소리를 가진 것, 아니 사물에게 목소리를 입혀주는 것이다.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버들피리를 종일 불고 잠에 들면 내 몸이 잠시 버드나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꽃가루 휘날리면서 물이며 개구리며 짐승이며 사람까지 다래끼 일으키게 하는, 그런 얄궂은 존재! 그날 논길을 돌아다니다가 밝은 개똥 냄새도 주목받을 때가 있는 것이다."(p.273)

"시 쓰는 운명은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닌 눈동자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눈을 밝게 하는 것은 죄 없는 사물이면서 세상으로부터 몸을 감추지 못한 생명이다. 나는 마냥 걸으면서 일순간, 목숨 가진 것들의 안위를 살피는 질문이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p.284)

 


 

살아있는 것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안부를 묻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첫 산문집인 이 책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 역시 이렇게 안위를 살피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먹을 것을 발견하고 혼자서 먹어 치우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까지 불러들이는 그 울음 자체가 위안을 건네듯,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 모든 존재의 안위를 살피는 잔잔한 질문들은 지금의 각자도생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은근히 강력한 위로와 용기를 준다.

 

달은 진흙머리였다가 온순한 맨발이었다가 물새의 얼굴이었다가 눈먼 고인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달은 변신의 귀재였다. 오래 더럽혀져도 달은 노랗게 맑은 달이다. 달빛은 왜 자질구레한 것들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영혼이라는 말은 저 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달은 물질이 아니므로 삼키지는 말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저 빛이 미늘이다. 한 번 꿰이면 평생 노숙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 물고기 아가미가 꽃잎같이 붉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p.193) - 「달밤에 반응하는 것들」 중에서

 

저자 : 이병일

 

1981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시,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등이 있으며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송수권시문학상 젋은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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