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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에너지 위기, 어디까지 왔나?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7
이완 맥레쉬 지음, 박미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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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7 : 에너지 위기, 어디까지 왔나?>  이완 맥레쉬 / 박미용 / 내인생의책 (2012) [원제 : Energy Crisis (2005)]

[My Review MMCLVIII / 내인생의책 14번째 리뷰]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있다. 산업을 발전시키면 경제가 더 커지고, 더 활발해지기 때문에 더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바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더 효율이 높은 에너지를 속속 찾아냈다. 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핵분열로, 핵분열에서 핵융합으로. 우리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면서 아주 효율이 높은 에너지를 찾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경제규모를 더욱 키우며 더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기존의 에너지원으로 쓰던 '화석연료'를 너무 많이 쓴 탓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기후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석연료를 너무 많이 태워서 대기중에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테인 등)'의 농도가 짙어져서 지구가 점점 뜨거워진 것이다. 그로 인해 '해수면 상승', '이상기온', '허리케인' 등등 단순한 자연재해로만 볼 수 없는 이상한 현상들이 자주 포착되었고, 그로 인한 피해가 심각할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핵발전소'를 가동하면 지구의 기후변화에 영향를 끼치지 않는 청정에너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핵에너지는 절대로 '청정에너지'가 아니었다.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동부해안을 강타한 '동일본 대지진'은 엄청난 강진이었고, 지진으로 인한 피해도 상당했지만, 그보다는 해안가를 휩쓸고 지나간 '쓰나미(지진해일)'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보았다. 그 피해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바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방사능 유출로 인해 후쿠시마 인근 지역의 주민은 전부 소개시키고 피해보상을 하고 있으며,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일본정부가 2025년인 지금까지도 '복구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핵발전소 가동'이 얼마만큼 큰 위험성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긴 1986년에 단순 조작 실수로 인한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비슷한 양상이다. 체르노빌 지역 역시 지금까지 방사능 누출로 인한 '접근금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러-우 전쟁'으로 인해 전장으로 변한 상태지만 말이다. 암튼, 한때 '청정에너지'로 불렸던 핵에너지는 '방사능 유출'이 발생하면 그 즉시 엄청난 피해를 주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청정에너지' 지위를 박탈 당했다. 또한 핵에너지는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으로도 '좋은 에너지'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일단 전세계적으로 '우라늄 매장량'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재처리 과정'을 거치면 '플루토늄' 등으로 재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꽤 효율적인 에너지 자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너지 '생산 단가'는 매우 낮은 편인데 반해서 '핵에너지'를 뽑아 쓰고 남은 쓰레기 처리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이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서 땅속 깊이 200미터 이상으로 파고 들어야 하고, 그리고 5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으로 완벽히 감싸서 '방사능'이 조금이라도 누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고 깔끔하게 폐기해야 하는데 드는 비용이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핵발전소의 '사용기한'이 보통 20년 정도인데, 이 사용기한이 넘은 핵발전소를 정지하고, 폐기하는데 드는 비용 또한 엄청나다는 점에서 '핵에너지'는 절대 효율이 좋은 에너지도 아니며, 전혀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에너지'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위험한 핵에너지를 대신해서 값싸고 깨끗한 '청정에너지'로 '천연가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연가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메테인의 양이 현저히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화석연료'인 까닭에 온실가스 배출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 온실가스 배출을 전혀 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는 무엇일까? 바로 '재생에너지'다. 재생에너지의 장점은 자연에서 얻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지도 않고, 훼손시키지도 않으며, 가장 중요한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서 전세계는 '재생에너지'만을 사용해서 제품을 생산하기도 약속하는 'RE100'을 2040년에는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만약 재생에너지가 아닌 재래식 화석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든 제품에는 엄청난 부가가치세를 매기는 방식으로 '무역상품'에서 저절로 퇴출되게 만들겠다고 한다. 그래서 전세계가 '재생에너지'를 강제로 쓰게 된다면 '기후위기'를 잘 극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중이다. 물론, 그런 실효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 중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쓰고 '화석에너지'는 점차 줄여나가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보이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적극 지지하고 싶긴 하다.

그런데 '재생에너지'는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을까? 실제로 태양광에너지를 모으는 장치에서 '화재 발생' 빈도가 빈번한 것이 사실이고, 바람에너지를 활용하는 '풍력 발전기'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을 뿐더러, 원하는만큼 많은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발전소를 촘촘히 여러 개를 설치해야 하는 문제점도 있을 뿐더러, 자연경관을 해치기도 하고, 엄청 빨리 도는 바람개비(날개) 때문에 애꿎은 새들이 부딪혀서 죽는 일이 굉장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풍력발전소는 고장도 자주 일어난다는 단점이 가장 크다. 또, 수력발전소나 조력발전소, 조석발전소 등은 조그만 규모로 만들었을 때에는 '여러 개'를 만든다는 조건 하에 꽤 효율이 높은 '재생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서 효과만점이란다. 그런데 이런 발전소를 수십 개 만들 수 있도록 허가받는 일이 더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규모가 작으면 정부의 관점에서 별로 실익이 없기 때문에 '댐 건설 규모'를 자꾸 키워서 크게 만들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대규모 공사가 되기 때문에 건설 쪽의 경기부양에도 효과가 크고, 일자리 창출 효과도 키우기 위해서 '건설되는 댐 규모'를 키우는 방향으로 잡기 십상이다. 그런데 큰 댐을 만들게 되면 '환경 파괴'가 그만큼 커지게 된다. 또한 '자연생태'에도 악영향을 끼쳐서 '물길'이 막히거나 달라져서 자연지형이 바뀌는 것으로 시작해서 댐 안쪽에 엄청난 양의 '토사물'이 쌓이게 되면 '고인물'이 썩듯 댐 주변에 악취가 발생하고, 오염도 쉽게 발생하게 되어서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또 '수몰지역'이 넓어지게 되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도 강제로 떠나야 하고, 그 지역의 모든 것이 '물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낳게 되는 단점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재생에너지'가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지구환경도 되살리는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긴 하지만, 완벽하게 장점만 가지고 있는 '청정에너지'는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당장 '기후 위기'와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이점이 있기에 관심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재생에너지'를 적극 사용하게 되면 우리가 그간 걱정하고 우려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에너지 위기'가 사라지게 되는 걸까? 지속 가능하고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기술을 확보하면 일단 큰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만, 재생에너지로 혜택을 보는 나라는 선진국과 강대국 들 뿐이고, 개발도상국으로 불리는 후진국과 약소국 들에게는 오히려 상황이 더욱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생에너지'를 100% 쓸 수 있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과 첨단기술력을 갖춘 강대국 들은 자신들의 부를 아낌없이 투자해서 더욱 효율 높은 '재생에너지'를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빈곤한 후진국과 첨단기술을 갖지 못한 약소국 들은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게 '기술력'도 사오고, '제품'도 사다 쓸 수밖에 없어서 양극화는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후진국과 약소국 들은 '재생에너지 원천기술'을 갖기 위해 R&D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하며 전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허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렇게 세계는 더욱 불공정해지고, 불평등해진 탓에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과 혼란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이 책이 출간된 2005년 쯤에는 당장 코앞에 닥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개발'에 앞장 서는 것만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2025년이 된 지금은 심각한 '경제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전세계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라 '기후 위기' 같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도 싶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할 때인데, '경제위기'에 이어서 난데 없이 '전쟁위기'까지 등장하면서 '기후위기'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듯한 인상마저 주는 요즘이다. 허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여전히 '기후위기'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곧 '에너지위기'이기도 하다. 인류는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서 다시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면, '기후위기'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변하고 만다. 이 위기만큼은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경제위기'도 막고, '전쟁위기'도 막고, '기후위기'도 막기 위해서라도 '에너지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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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1 : 시공간의 비밀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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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1 : 시공간의 비밀>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4)

[My Review MMCLVII / 돌핀북 11번째 리뷰]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양자역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최종 정리한 뒤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해서 뉴턴을 뛰어넘는 '상대성 이론'을 밝혀내면서 '양자역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정작 아인슈타인은 만물이 고정불변이라는 '고전 물리학'에 집착하면서, 모든 것은 예측될 뿐, 고정된 것은 없다는 양자역학(불확정성의 원리)을 끝내 부정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난 이런 아인슈타인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왜 고전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깨버렸으면서도 어째서 '현대 물리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데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 11>을 읽으니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바로 토마스 쿤이 지적했던 '패러다임의 문제'였던 것이다. 과학은 혁명적으로 급변하지,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 혁명은 '정치적인 권력 투쟁의 결과'처럼 일관성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 '수평적 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보를 함에 있어서도 '지체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도 바로 그 '지체현상'을 보인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현대 물리학'의 문을 활짝 열고서 다른 과학자들이 다 건너갈 때, 아인슈타인 혼자만 '고전 물리학'에 남으려 했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역사'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을 비교분석하면서 보여주니 쉽게 이해가 되었던 셈이다. 정말이지 채사장의 인문학적 교양은 정말 범접하기 힘든 경지에 올랐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단하다 정말.

채사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고전 물리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원인과 결과'가 딱 맞아떨어지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자 본격적인 '양자역학의 시대'가 열렸고, 흔히 '코페하겐 학파'로 불리는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막스 보른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소립자의 세계를 연구하며 '현대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양자역학의 결과값이 확률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 확정된 것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리하면, 고전 물리학자들은 '절대주의'에 속하고, 현대 물리학자들은 '상대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이후 '양자역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소립자를 연구하면서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는 '미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자 수많은 과학자들은 설왕설래를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고정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그 법칙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좀처럼 그 법칙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회의감이 들자 과학자들은 점점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없고, 오직 확률로만 예측 가능할 뿐이라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관이 바로 '양자역학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예측이 매우 정확했기에 오늘날의 현대 기술은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없고, 관측자의 관찰만이 유일한 결정 방법이고, 관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확률에 의존해야 하는 것일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달의 존재 유무도 '관측'으로만 결정할 수 있고, 관측하지 않거나 달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달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면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뭔가 '괴리감'이 들지 않는가?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현대 과학은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확률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따위 과학(!)'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고전 과학'에 길들여진 탓이 클 것이다. 갈릴레이나 뉴턴의 시대 때만해도 우리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과학주의'에 절대적 믿음을 부여했다. 그래서 사기꾼들의 뻔한 속임수일지라도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라는 문구만 곁들였을 뿐인데도 '신뢰도'는 향상한다. 이것이 바로 '결정론적 세계관'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이런 맹신이 위험하게 된 것이다. 왜냐면 아직까지도 많은 대중들은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양자역학의 결실'인 스마트폰은 거의 모두가 손에 들고 다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눈으로 보는 세상'은 사실은 전부다 '허상(가상)'에 불과하다. '실제'가 아닌 디지털 세상에 구현된 이미지와 텍스트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허상에는 온갖 '거짓'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기에 스마트폰 속 세상을 절대로 '맹신'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정보를 회의적으로 비판하고, 그 가운데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 유익한 정보,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등을 따로 걸러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쓰여 있는 '이 글'도 어떤 이의 주관적 생각일 뿐, 100%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나처럼 선하고 착한 사...쿨럭쿨럭

우리는 이제 '불확정성의 원리'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싶어도 그럴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이란 과학이 발전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며 살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 책의 다음 편이 바로 '철학'인 이유다. 참 신비롭지 않은가? 과학이 첨단을 걸을 때엔 과학자도 철학을 연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고전 철학'이 아닌 데카르트 이후 '고정불변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결국 세상은 '변화무쌍'한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깨우친 근현대 철학자들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철학의 기초'를 닦은 고전 철학자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이다. 참으로 학문의 길은 멀고도 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할 것이 많아지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은 절로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지는 법이다. 옛 어른들이 "공부해야지"라고 하신 말씀은 알고 보니 "겸손해져야지"라는 말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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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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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 / 김경원 / 다산초당 (2017)

[My Review MMCXLIX / 다산초당 3번째 리뷰]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것은 딱 질색하더니 급기야 복잡한 것조차 생각하기 싫어해서 단순하고 간단한 것만 찾으려 한다. 그런데도 단군 이래 가장 '스펙'이 높은 젊은이들은 대학진학률도 전세계적으로 최상위권인 까닭에 무식한 것은 참지 않는다. 단순하고 간단한데 '유식'하게 보이려면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바로 '요점정리', '핵심정리'를 딱 해서 단박에 알아듣게 만드는, 쉽게 말해 '원포인트 레슨'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어떤 학문이든 '딱 한 마디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 학문에 정통해야 하고, 통달해야 한다. 정말이지 빠삭해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든, '핵심'을 찌르든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므로 아주 쉽게 딱 한 마디로 알아 들을 수 있게...암튼 무지 쉽게 초고수의 능력을 갖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요즘에는 '가능'하다. 어떤 분야든지 그쪽에서 통달한 누군가가 나와서 '초심자'도 단박에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요점'만 딱 짚어서, '핵심'사항만 콕 찔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진정한 능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독서' 분야에서 그런 능력자가 되길 희망하는데 아직은 '도전정신'만 가득할 뿐이다. '실력'도 없이 무턱대고 '다독'만 하고 있는 그런 초심 모드로 말이다. 암튼, 철학 분야에도 그런 유형의 책들이 즐비한 요즘이다. 이 책도 그런 의도로 출간되었고 말이다. 지은이는 '하타케야마 소'라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철학과를 전공한 '철학 강사'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좋아하는 모양으로 주요 저서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철학 입문>이란 책을 펴냈다고 한다.

'생각하는 힘'이란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유명한 말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의 뜻도 알고 있는가? 대부분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실제로 한 말은 "네 무지(無知)를 알라"는 말을 했고, 풀이를 하면, '네가 모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니 '당신도 모르는 것이 있어'라는 말이 뭐가 그리 대단한 '진리'라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뜻풀이를 하자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되 물으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리스 시민들에게 찾아가 '문답법'을 실시했다고 한다. 전쟁영웅인 장군에게 찾아가 '용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최고의 부자에게 찾아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단다. 그리고 장군은 "그거라면 내가 잘 알고 있지. 용기란 적을 앞에 두고서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는 것이오"라고 당당히 말했단다. 한편 부자는 "아, 행복 말인가. 그거야 말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지. 행복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라네"라고 자신있게 말했단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되물었다. "그럼 '작전상 후퇴'를 하고 전쟁에서 승리를 한 장수가 있다면 용기가 없는 거겠군요?", "그럼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은 사람은 얼마를 주고 사면 행복할 수 있소이까?" 이런 대답하기 곤란한 고약한(?) 질문이 몇 번 오가다 보면 용감한 장군이라도, 그리스 최고의 부자라도 '할 말이 없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오"라고 꾸중을 하면서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라고 대답하자, 성이 난 장군과 부자는 "그럼 소크라테스, 당신은 잘 아시오?"라고 성질을 내면서 물으니, 소크라테스는 "나도 모르니 질문을 한 것 아니겠소.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현명함을 깨우쳤다오. 그리고 끝없이 배움의 자세로 공부할 따름이오"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니, 그리스 시민 가운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얄밉고 제거해버리고 싶은 '1순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청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다니니 정치인들이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고, '사형판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죄목은 '신을 믿지 않음(무신론)', '청년들에게 불온한 사상(문답법)을 전파함' 등을 내세워서 말이다. 똑똑한 사람이 잘난 체까지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권력'을 갖지 못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튼, 생각하는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이리 길게 했다. 그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뻔한 답이지만 다름 아닌 '철학'이다. 이 책도 그런 의도에서 출간되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는지는 너무 유명해서 두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다. 대학진학률도 50%를 겨우 넘기고, 만화책이 아니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교과서조차 '만화책'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온통 그림투성이고, 교육용 영상자료도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집중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의 독서인구가 정말 많다고 자랑을 하지만,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고 있는 책도 대부분 '만화책' 아니면 '대중잡지'라고 한다. 나 어릴 적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지 알고 있느냐면서 제발 책 좀 읽으라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는데, 요즘의 일본은 그때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다. 하긴 우리 나라 젊은이들도 책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즐겨 읽어서 그렇지 '독서인구'가 예전에 비해서 정말 많이 늘긴 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철학책'은 과연 얼마나 읽을까? 요즘엔 정말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철학책'을 읽지는 않는다. '너튜브' 같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아주 쉽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을 더 많이 즐겨본다. 요즘 '인문교양'을 다룬 동영상 강좌가 정말 많으니, 굳이 힘들게 책을 읽는 이들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중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은 재밌는 철학책이 나온 것이다. 재밌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책 말이다.

이 책에는 37명의 철학자가 등장해서 '철학 논쟁'을 벌인다. 고대철학에서부터 중세철학(신학)을 거쳐 근대와 현대의 철학까지 '철학사의 흐름'을 유유히 탐색하듯 매끄럽고 맛깔나게 이어지는 철학적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더구나 철학자들의 '일러스트'까지 수록되어 있어서 '초심자의 흥미'를 샘솟게 만들었다. 일러스트가 어째서 '흥미'를 끌 수 있느냐 하면, 정말이지 다들 '미남자'로 미화(美化)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추남'으로 유명한 소크레테스까지 잘 생기게 그려넣었다. 내가 가르치는 한 여고생은 "이렇게 잘 생긴 철학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책이 어렵지 않았어요"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하긴 '아이돌'이 왜 인기가 많겠는가. 힘든 군생활도 '관물대 여신'을 매일 갈아끼우며 버티...쿨럭쿨럭

이렇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정작 '철학'에 관심을 갖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중요한 철학 내용으로 눈길을 돌리면 '철학 논쟁'을 주제로 배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소년범죄'를 다루면서 엄벌을 줘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철학자들을 찬반으로 나누어 그 '철학자들의 대표 사상'을 근거로 삼아 한 편의 '법정드라마'처럼 공방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기초 상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철학자들의 논쟁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법정드라마나 의학드라마를 볼 때 '전문가'라서 즐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있으면 쉽게 '철학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논쟁을 읽어가면서 '철학자들의 대표 사상'에 익숙해지게 된다. '소년범죄' 논쟁에서는 엄벌을 줘야 한다는 쪽에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고, 엄벌에 반대하는 쪽에는 역시나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과 '공자'가 등장했다. 철학에 관심이 있던 분들이라면 '양적 공리주의'와 '질적 공리주의'가 대결을 벌이면서 이상적인 공자철학과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쟁의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책의 내용은 그닥 어렵지 않다. 논쟁을 '대화'를 중심으로 이어나가고, '대화의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면 '논쟁적 대립'속에서 철학자들의 대표적 '철학사상'이 극명하게 대립하며 보다 뚜렷한 철학적 윤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초심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다음 논쟁 주제'로 넘어가면 앞서서 이야기했던 철학사상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질 것이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앞서 등장했던 철학자가 '1회성 등장'이 아니라 '수차례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대표철학사상'의 맥락을 반복해서 엿볼 수 있으니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철학사상가들의 대표철학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철학사상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철학사상을 참고해서 '자기만의 가치관 형성'을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이 철학교육의 핵심포인트도 여기에 있다. 위대한 철학사상을 달달 암기하는 것도 좋은 공부방법이긴 하지만, A라는 철학자가 B라는 사상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외운다한들 뭐에 쓸 것이냔 말이다. 옛날에는 '백과사전식 지식'을 누가 더 많이,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AI검색'을 통해서 아주 쉽게 해결될 사안이다. 그러니 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모르는 것을 애써 '아는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고백하고 '배우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내 삶을 바람직하게 이끌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나는 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라도 더 배움을 늘려나가야겠다. 그렇게 하면 나는 10년 뒤에 많은 것을 깨달은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해 있을 거야. 그때 내 꿈을 실현해 나가야겠다. 공자께서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하셨으니, 늘 겸손한 자세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나도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이런 삶은 멋진 것 같아. 더욱 정진하자!...'가치관 형성'이란 이런 것일 게다. 물론 이것과 정반대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도 마주할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다. 남의 이익에 앞서 내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손해 보는 삶은 '실패한 삶'이다. 무조건 승리하고 쟁취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 당한다. 절대 뒤쳐지지 말자.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이런 삶은 정말 멋지고 신 날 것 같아!...이 둘이 만나면 어떤 논쟁을 벌일까?

사실 철학수업은 늘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아이들은 막상 철학수업을 어렵게만 생각한다. 그 까닭은 '철학사상'이 매우 심오하고 어렵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철학수업을 대신하면 된다. 누구의 철학도 아닌 '자기 철학'이니 크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 철학'을 관철시킬 수 있는 '타당한 근거'만 부지런히 찾아오면 된다. 여기서 '타당한 근거'가 바로 '철학자들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의 대표사상이 '나의 가치관'과 가장 비슷한지 찾아내면 그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철학수업은 준비완료다. 나머지는 치열한 논쟁을 할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자신감 뿜뿜하고 싶다면 '자기 가치관'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반론에도 흔들리지 않을,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 단단히 무장하면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그리고 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 역시 '철학사상'에서 찾으면 된다. 찾기 어렵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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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자본주의, 왜 변할까? - 책가방문고 29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6
데이비드 다우닝 지음, 김영배 옮김, 전국사회교사모임 감수 / 내인생의책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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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6 : 자본주의, 왜 변할까?>  데이비드 다우닝 / 김영배 / 전국사회교사모임 / 내인생의책 (2011) [원제 : Political and Economic Systems: Capitalism (2010년)]

[My Review MMCXLIII / 내인생의책 13번째 리뷰]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아니 애초에 '공산주의'는 실현된 적도 없다. 공산주의 이념은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그 이념으로 실현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는 21세기를 맞이하지 못하고 1990년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를 표방한 나라들은 남아 있다. 중국, 북한, 쿠바 등이 그렇지만, 이들 나라조차 완전한 공산주의 이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일부 이념적인 부분만 남겨 놓은 채 실상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경제체제를 도입해 국제무역의 일원으로 합류하고 말았다.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고립된 채'로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돌아야 하고, 경제는 굴러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고, 한 나라의 경제는 폭망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이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다가 끝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공산주의에 장단점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주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다름 아닌 '대공황'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패전국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 원인이 되어 '패전국들의 경제'가 폭망하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길이 없었고, 그래서 승전국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지 못하고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경제 주도권은 영국(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자본주의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정부(정치인)의 간섭 없이 잘 굴러갈 것이라 굳게 믿었다. 허나 잘 굴러갈 것이라 믿었던 미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하는 듯 싶었지만, 그 성장은 '거품'에 불과 했었고, 마침내 1929년에 주식시장에 엄청난 대폭락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유망한 듯 싶었던 회사와 공장 들이 줄줄이 폐업을 하자, 이들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도 줄줄이 도산을 했고, 투자자는 한 순간에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실업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기만 했다.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자 자본주의의 성장엔진은 멈춰버렸고, 무역도 끝내 붕괴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대실패였던 것이다.

이렇듯 '초기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율적으로 굴러가며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끝은 '경제 대공황'이었고, 전세계는 경제가 멈춰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맞이한 '자본주의의 대실패'를 극복하고자, 전세계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발판 삼아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과 함께 '공산주의'가 시작되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무너진 자본주의를 되살리려는 '수정 자본주의'를 내세웠고, 또 한 편으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독일의 나치즘, 일제의 군국주의)'이 등장했다. 그 덕분에 전세계는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해야만 했다. 경제 문제는 이처럼 큰 파급력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지만 '파시즘'을 내세웠던 이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무너진 경제를 단번에 되살리려는 시도를 했으나,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경제 회복력'에 비해 효과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무너진 경제를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되살리려 하는 '비도덕적인 방법'이 전세계인들에 호감을 얻을 리도 만무했고 말이다. 그 결과 '파시즘'을 해결책으로 내세운 국가들은 차례대로 패배를 했고, 살아남은 경제체제는 두 가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였다. 그리고 이 두 체제는 뜨거운 열전 뒤에 '경제력'으로 우위를 가르는 '냉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 세기의 대결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대결의 초기에는 '공산주의'가 우세를 점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비는 전 세계적으로 격차가 컸고, 후진국에서는 이 격차가 너무 극명했기에 이를 타파할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진 듯한 '공산주의'는 정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방법 또한 '가진 자의 것'을 국유화시켜 '못가진 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니 얼마나 간단한 방법이고, 공평한 방법이냔 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렇게 공평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잘 했지만, 공평한 선에서 출발한 이들의 '공정한 경쟁 욕구'마저 꺾어버렸기 때문에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은 눈에 띄게 더뎠고, 성장발전으로 얻을 이익이 줄어드니 공산국가에서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몫'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은 점점 하락했고, 사람들은 불만이 늘었지만, 공산국가에서는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발전'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불만세력'을 숙청하고 감시해서 '공산주의 이념'만 강요하는 꼴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못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같은 나라는 '자본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등소평(덩샤오핑)의 '흑묘백묘 이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라는 뜻인데, 풀이하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경제를 살릴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사유재산을 활용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국가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 중국의 경제성장은 눈에 띄게 되살아났고,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며 국제무역에도 합류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외국기업들을 자국내에 유치할 수 있었고, Made in China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자유무역을 선도하는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 같은 시기에 WTO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 월가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시위는 곧 확장 되었고 전세계 경제대도시에서 세계무역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분명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그들이 시위를 벌인 까닭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정의와 공정'이었다. 세계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할수록 지구는 병들어 갔고, 숲은 황폐해졌으며,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은 엄청난 동물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들이 만든 체인점에서 내놓은 '정크 푸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부유하고 윤택하게 만든 '자본주의'가 매우 부도덕한 일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선진국의 부는 후진국들을 착취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민낯에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부를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동력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때문에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였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이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살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잘사는 나라 속에서도 몇몇 부자들의 풍요를 위해서 대다수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두가 함께 잘살 수는 없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한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공산주의의 부활'이 필요한 것일까?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본주의 성자의 끝'은 완전한 공산주의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정답이 아니고, 올바른 대안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다시금 '전쟁의 광기'를 되살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유일한 방법은 '기술 혁신'뿐이다. 쉽게 말해, 이익을 창출하는데 이전보다 더 효율적인 기술을 도입해서 '원가 절감'하고, '성능 향상'을 도모해서 다른 상품보다 '경쟁력'을 높여 수익을 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단지 그게 힘들기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전세계는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점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경쟁력을 선점한 '기존의 강대국'들이 최근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기술 혁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펼쳐지고 있어 문제다. 미국의 트럼프는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관세수입'으로 극복(?)하겠다며 연신 똥볼을 차고 있고,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경제위기를 감추고 국뽕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려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중국의 시진핑은 패권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만 부도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지 못해 국제적 밉상으로 낙인이 찍혀 왕따를 당한 화풀이로 만만한 나라를 상대로 힘자랑하기 바쁘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이후로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카이치 총리는 극우보수의 결집을 돌파구로 삼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되돌아가기 위해 일본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더욱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런 어려움 뒤에 '위대한 일본'을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세뇌를 당한 듯,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국가정책을 따를 뿐이다. 과연 깨어 있는 일본국민은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있더라도 그들이 일어나서 국가에 저항하는 일에 앞장을 설까? 일본의 선택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일본은 그런 저항을 해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일본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변신하는데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그건 아니다. 가장 가까운 대한민국이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 일본은 강한 자 앞에서 철저히 복종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절대 안 된다. 일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이게 자본주의의 실체다. 오직 '실력'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게 해주고, '도덕'은 알고도 애써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폐기처분해야 마땅할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 '부를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딴에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비정한 경제체제를 좌시할 수는 없다. 실력을 키워 더 많은 부를 얻게 만들지만, 도덕적으로 해이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만 잘살기를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모두가 잘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뿐인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동식물을 비롯해서 약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 얻는 수익창출 방법은 되도록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피치 못하게 '약자의 희생'이 발생했다면,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당연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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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비만, 왜 사회 문제가 될까? - 책가방문고 25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5
콜린 힌슨 & 김종덕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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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5 : 비만, 왜 사회문제가 될까?>  콜린 힌슨, 김종덕 / 전국사회교사모임 / 내인생의책 (2011) [원제 : What Can We Do About Obesity?]

[My Review MMCXLII / 내인생의책 12번째 리뷰] 옛날에는 뚱뚱한 사람을 부러워했다. 왜냐면 뚱뚱한 만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비만'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상 '먹거리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거의 없었다. 늘 배고팠고 늘 부족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인류는 먹을거리가 지천에 넘쳐나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날씬하다 못해 호리호리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통통하다 못해 뚱뚱했는데, 이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홀쭉하면서도 근육질에 탄탄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뚱뚱해지고 심하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할 정도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그건 먹거리의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먼 옛날에 비해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먹는 양'은 늘어난 것에 비해서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가 된 셈이다. 왜냐면 '좋은 음식'은 값이 비싸졌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음식'은 대부분 가공식품으로 '정크푸드(쓰레기음식)'라고 불릴 정도로 건강에 해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알맞게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반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나쁜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고, 배부른 대신에 건강을 잃어버린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비만'은 부유한 계층보다 가난한 계층에 더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보다 '고열량, 고칼로리 식단'이 현대인을 비만에 이르게 한다고 정의 내렸다. 그래서 '패스트푸드' 대신 '슬로푸드'를 먹고, '글로벌푸드' 대신 '로컬푸드'를 즐겨 먹음으로써 비만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캠페인 홍보(?) 같은 이야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만 문제를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문제'로 격하시킨 듯한 인상이 느껴졌다. 이 책이 출간 된 시점이 2011년이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문제가 비일비재 했다. 그런데도 '비만 문제'를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나쁜 음식을 즐겨 먹는 '식습관의 문제'로만 인식한 것은 아쉬웠다.

요즘 <케데헌>의 인기로 인해 미국의 어린이들은 '입맛'이 바뀌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밥투정을 할 때 부모들이 즐겨 쓰는 해결법으로 '조미김'에 밥을 싸서 '김치 조각'을 곁들여서 먹이곤 했는데, 미국의 어린이들이 '한국 음식'을 즐겨 먹기 시작하자, 빵이나 케익으로 한끼를 해결하기보다는 '김밥'에 '단무지'로 배를 채우려 한다고 한다. 물론 '한국 음식'에 대한 인식이 '고퀄리티'인 까닭에 자녀가 한국 음식을 즐겨 먹고 '정크 푸드' 같은 빵, 과자, 탄산음료 같은 것을 멀리 하는 것에 환영하면서도, 미국의 부모들은 정작 '김밥'을 쌀 줄도 모르고, '조미김'이나 '단무지' 같은 반찬을 구할 곳도 마땅찮은 상황이라서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완제품'으로 나온 한국 음식들은 미국 현지에서는 비싼 값에 팔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재료를 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에 '한국계 이민자'가 있으면 가깝게 지내려 하고 그들을 통해서 '한국 식단의 식재료'를 구하는 방법부터 간단히 만들 수 있는 '한국 음식'까지 배우려는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한인 교포들은 환영하면서도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씁쓸하다고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계 자녀가 '점심 식사'로 싸가는 김밥과 김치, 잡채 같은 음식을 보며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미국에 정착해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한국계 미국인 학부모들'은 과거의 설움과 상처가 떠올라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한국 음식'에 대한 평가가 호평 일색으로 돌변(?)한 요즘과 같은 상황에 감개무량할 지경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음식'으로 마련한 점심 도시락이 얼마나 '건강을 고려한 음식'이었느냔 말이다. 냉동 피자나 냉동 햄버거에 감자튀김과 탄산 음료로 한끼를 떼우는 미국 어린이들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지 않느냔 말이다. 영양학적으로도 더 우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도 낯선 음식, 낯선 냄새 라는 이유만으로 놀림감이 되는 어처구니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돈이 있으면 더 건강한 음식을 찾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은 이런 시대를 맞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대다수 미국의 어린이들이 형편 없는 음식으로 건강을 해치고, '비만'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그건 미국 사회가 점점 가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가가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값이 싼 '나쁜 음식'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학교 급식' 같은 것이라도 개선해서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좋은 음식'을 제공해주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인 탓에 '주'마다 정책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 예산'도 주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도 '부자'와 '빈자' 사이에 엄청난 간극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비만' 같은 문제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곳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가 많아서 '비만' 같은 문제는 뒷전이 되기도 한단다.

이는 비단 미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릴 것 없이 '비만'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부의 불평등' 때문이고 말이다. 단순히 '정크 푸드'와 '글로벌 푸드'를 멀리하고 '유기농' 같은 '좋은 음식'과 '로컬 푸드'로 해결될 시점을 훨씬 지나고 말았다. 현재 '슬로 푸드'와 '로컬 푸드'의 원재료 가격이 엄청 오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처럼 고물가 시대에 비만은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고질병처럼 느껴진다.

한편, 자신이 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꼭 살을 빼는 것이 좋다. 물론 '좋은 음식',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부유한 계층이라도 살이 찐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최근 20Kg 정도 감량에 성공했다. 요즘에는 '살 빼는 약'도 있다고 하는데,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삼시 세끼 챙겨 먹으면서도 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쓴 방법은 '밀가루 음식'과 '설탕'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평소에 면 종류의 음식을 너무 좋아했는데 '라면'을 비롯해서 '빵', '과자' 같은 음식을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메밀 100%'로 만든 면 요리는 가끔 먹었다. 정말 면이 땡길 때 말이다. 그리고 달달한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탄산 음료는 말할 것도 없고 '믹스 커피'도 딱 끊었다. 이렇게 하면 정말 마실 음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신 마셨던 것이 '블랙커피'와 '보이차'였다. 물론 물도 많이 마셔야 한다. 커피나 차 만으로 수분을 보충하면 신진대사에 불균형을 초래하기 때문에 '물 이외의 음료'를 마신 양만큼은 꼭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음식은 배불리 먹었다. 밥은 되도록 '현미밥'으로 절반만 먹는다는 느낌으로 먹었고, 고기와 채소, 그리고 과일(너무 달지 않은)로 배를 채우는 식단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식단을 차리려면 가뜩이나 오른 물가 때문에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구내식당'에서 먹을 때는 배불리 먹고, 집에서 먹을 땐 가볍게 먹는 방식으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녁 6시 이후'로 물만 마셨다. 이런 방법으로 음식 조절을 하면서 적당한 운동(하루 2만 보 이상)을 하며, 매일 체중을 확인해보니 하루에 200g~500g 정도씩 빠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1~2kg씩 체중감량에 성공하니 나름 뿌듯하고 현재는 74~75kg으로 20대 시절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을 하루 아침에 끊는게 어디 쉬운 일일까? 하지만 '고도비만'이 되니 고혈압에, 고지혈증, 그리고 고혈당까지 찾아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이 모든 증세를 단박에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바로 '살을 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기왕 빼는 거 확 빼세요"라고 말하길래, 20kg을 감량하려 목표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요요현상'을 없애려면 '살 빼는 약'이나 '지방흡입' 같은 수술의 도움 없이 '식단조절+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체중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빼는 것도 중요했다. 물론 날마다 빠지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300g을 힘들게 뺐는데, 다음날 의도치 않은 과식으로 1kg이 늘어있는 것을 보면 좌절할 만도 하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약이나 수술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을 빼면 언제든, 원하는 만큼 꼭 살을 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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