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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클리스 - 한국전쟁 감동 실화
로빈 허턴 지음, 황하민 옮김 / 도레미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당면 과제는 제한 구역을 우회하면서 무반동총과 탄약을 옮기는 것이었다. 제한 구역애서는 무기 운반이 금지되었다. 언덕이 많은 지형은 문제르 복잡하게 만들었다. 탄약 보급 지점에서 어금니 언덕까지의 경로는 지프 차량으로 통과할 수 없었기에 결국 무반동총과 탄약을 도보로 옮겨야 했다. 탄약을 보충하기 위해 보급소와 사격 위치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위험천만한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75-)
해병대 제 5연대는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이느 전투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임무를 맡는다는 뜻이었다. 레클리스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무반동총 탄약을 운반할 필요가 없을 때, 레클리스는 수류탄, 소형화기 탄약, 식량, 침낭, 심지어 철조망까지 나르는 짐말이 되었다. 레클리스는 등에 짊어진 짐에서 통신선이 풀려나가도록 걸으며 통신선을 설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19-)
"레클리스가 가파른 경사를 어덯게 올라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사방에서 날아드느 포격이 지상을 온통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상허ㅘㅇ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나아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157-)
병참부대 패터슨 중위가 있었다.한국전쟁 승리의 1등 공신 미국 해병대의 병차 수송을 도맡았던 군마 레클리스 에 대한 영울이야기, 전쟁에 있어서 불리한 점을 극복하고, 제주 말로서 최고의 역할을 해왔던 레클리스가 보여준 영운 이야기는 ,대한민국이 자칫 사라질 뻔 했던 그 순간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고 있다.
미국 본토, 한국 전쟁 기념관에는 레클리스의 실물과 크기가 비슷한 군마 동상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최저방 연천에,레클리스 동상, 레클리스 기념관과 공원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매향리 전투의 치열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으며,한미연합국이 중공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포탄 한 발에 11KG에 달하였고, 그 무거운 포탄을 ,지프차가 지나갈 수 없었던 가파른 산악 지대에 미군의 수송 차량 대싱 제주마 레클리스가 큰 역할을 도맡아 했다. 오직 군마였던 레클리스가 포탄을 수송하였고, 부상병을 이송했다. 때로는 짐말의 역할도 수행했다. 한국군인과 함께 레클리스는 같은 공간에서 숙식하였고, 경주마로 키워졌지만, 미군의 병참 역할을 위해 최공로 쓰여졌다. 한국 군인이 중공군을 상대로 약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역전하였던 건, 병참 수송을 도맡아 했던 군마 레클리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레클리스가 한국전에 투입되고, 해병대 제1사단은 인천상륙적전을 무사히 성공한다. 북한군에 밀리고 있었던 국군의 전세가 역전 되었다. 레클리스의 한국이름 아침해 였고, 군마이면서,키가 140cm에 불과한 제주마 , 노새다. 지프차 대신에 가파른 산으로 포탄을 50여 차례 수송하였고, 한번도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실패하지 않았다. 레클리스에겐, 다리 부상과 눈이 다쳤지만,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였다. 군마로서, 상병계급이었으나,전쟁이 끝나서,특진, 하사로 승진하였다.레클리스의 활약은 일반 병사 못지 않은 위대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레클리스는 1960년 1월 은퇴하였다.미국에는 6개의 레클리스 동상이 세워졌다.
레클리스는 한국전쟁에 투입된 유일한 군마였고,인간도 위험해서, 두려워 가지 못한 길을 레클리스는 두려움 없이 진행했다. 한국 군인 100명 몫을 수행하였으며, 수천 톤의 포탄을 산능선을 따라, 실어나름으로서, 고지전에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였고, 한국전쟁 승리의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경주마로 태어난 레클리스는 페터슨 중위가 훈련하여,. 군마가 되었으며, 한국을 지킨 우일한 말이다.. 무모하였지만, 해병대원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