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생애는 그 자체가 뭐 소설 이상이고 한 편의 막장 드라마입니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위키의 내용과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여러 신문 기사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김동리(1913생~1995몰)
해방후 한국 문단에서 시는 미당, 소설은 동리 아닌가 생각한다. 뭐 정치적 성향은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동리의 혈통은 조선 사림의 거두로 영남학파의 시조로 추앙받는 김종직에 닿아 있다. 점필재의 17대손이라고 한다. 한학자이자 동양철학자 범부 김정설(1897~1966)은 동리의 친형이다. 이분이 또 대단하신 분이다. 김지하는 생명사상과 관련하여 우리 민족 유사이래 3대 천재로 원효, 최제우, 김범부를 호명하고 있다. 동리는 16년 연상인 이 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부가 지은 책 중에 <화랑외사>가 있고 동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화랑의 후예>였다.
동리는 결혼을 세 번 했다. 첫 번째 부인은 김월계이고, 두 번째 부인은 소설가 손소희(1917~1987)이고, 세 번째 부인은 소설가 서영은(1943~)이다. 김월계와는 1940년 결혼해서 1966년 이혼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1937년 동리는 경남 사천의 광명학원 강사로 있었는데 당시 하숙집 딸이 김월계였다. 진주의 한 성당에서 식을 올렸는데 그때 주례가 만해 한용이었다고 한다.
1948년 서울 명동에서 전숙희와 손소희가 마돈나 다방을 차리고 있었다. 당시의 다방은 지금과는 달라서 인텔리 사교 살롱같은 곳이었다. 한무숙이 소설을 쓰려는 손소희에게 김동리를 소개해 주었다. 손소희 역시 유부녀였지만 어쨌든 동리와 눈이 맞고 말았다. 전쟁 중에 동리는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이때 손소희가 위험을 무릎쓰고 헌신적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1953년에 부산에서 동리는 손소희와 살림을 차리고 동거를 시작했다. 이 때 본부인 김월계가 손소희를 찾아와서 머리 끄댕이를 붙잡고 어쩌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바탕 난리를 친 적이 있는데, 이게 또 당시 신문에 특종기사로 보도되어 가판대에서 기록적으로 팔렸다고 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왕지사 이렇게 된거 손소희는 동리의 집안 살림 경제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남의 서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동리가 문학가로, 문화 권력으로 출세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동리는 손소희의 내외조에 힘입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서라벌예술대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1966년 본부인 김월계와 이혼한 후, 손소희와 따로 결혼식을 올렸는지 혼인신고를 했는지는 찾아봐도 기록이 없다. 어쨌든 1966년 이후에 김동리-손소희 커플은 떳떳한 부부가 되었지만 동리는 이때 이미 새로운 여인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68년경에 동리는 서영은을 만난다. 당시 현대문학 실기 강사였던 박경리가 서영은의 습작소설을 보고 김동리를 한번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1943년생인 서영은 그때 이십대 중반이었고 김동리는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문학계에 있어서 동리의 위치로 보나, 둘 사이의 연차로 보나, 더구나 동리는 재혼한 유부남이었고 서영은은 이십 대의 처녀였으니 이 불륜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손소희는 자신 역시 불륜으로 이루어진 관계라서 업보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대범해서 그런지 서영은을 묵인 내지 관용했던 것 같다. 1973년 김동리 손소희 부부가 <한국문학>을 창간했을 때 편집장 이문구가 서영은을 경리 및 편집기자로 채용했고, 서영은이 문단 후배이니 손소희는 서영은을 그런대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영은의 증언에 의하면 손소희는 서영은에게 동리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1987년 손소희가 죽고 그 이듬해에 서영은은 동리와 어느 절간에서 단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20여 년을 음지에서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오다가 이제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남편은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5년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가 죽었다. 서영은이 동리와 법적 부부로 건강하게 같이 지낸 기간은 3년에 불과했고 그후 5년은 똥오줌 받아내는 식물인간 병수발이었고, 동리가 죽은 후에는 전처 소생 자녀들과 재산을 둘러싼 진흙탕 법정 분쟁을 겪었다. 서로의 상처를 물고 뜯고 울고 불고 할퀴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서영은은 이 와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겪고 결국 재판에서도 패소해서 거의 빈털터리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 기구한 사연은 당시 여성잡지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동리 자식들 측의 변호인은 김평우였다. 김동리의 차남으로 박근혜 탄핵심판에 참여한 바로 그 변호사다.
동리는 김월계와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었다.(손소희와 서영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자식들이 모두 재주와 능력이 있어 신문기자, 법관, 외교관, 대기업 임원 등으로 입신 양명했다. 차남 김평우는 1945년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생활 후에 변호사 개업했고 나중에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박근혜측 변호인단에 참여해 진상을 부려 구설에 오르내렸다.
2014년에 서영은은 김동리와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리로 갔나>를 펴냈다. 여러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서영은은 동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이는 인색했고, 폭군이었고, 이기적이었다. 그리하여도 그 남자는 운명이었고 애뜻했다.“ 동리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살의의 가까운 주먹으로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다고 한다. 소설에 묘사된 동리는 ”소유한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 그의 소유란 젖동냥에서 비롯된 생래적 결핍감을 채우고 또 채워서 쌓이게 된 잡동사니들이었다. 그에겐 아내도 소유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토록 혹독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동리의 어떤 부분이 두 사람을 끈끈하게 맺어줬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몸이 잘 맞았어요“
미당은 동리 산소의 비문에 이렇게 적었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