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사교육>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굿바이 사교육 - 내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학부모를 위한 교육 필독서
이범 외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사교육 시장 규모가 얼마얼마로 어마어마 엄마아빠하고, 사교육비 부담에 부모들 등골이 휘고 뼈골이 빠지고, 자식에게 올인하다 늙어 쪽박찬 기막힌 사연도 텔레비전에 나오고 한다. 이래저래 주워듣고 또 보고 하지만 나에게는 딴나라 달나라 이야기였다. 왜냐? 당근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 불혹 넘어 작년에 간신히 후사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 문제는 관심밖이다. 왜냐? 아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슬슬 본인도 교육이란 것에 대해 관심을 좀 가져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아버지 엄마는 7남매 키워 다 대학 보냈는데 사교육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옛날엔 다 그랬다. 나도 그럴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할 작정이다. 애 처음 낳고 마누라하고 둘이서 2인 정상회담을 열어 당내 서열을 정했다. 서열 1위는 자기자신, 2위는 배우자, 자식은 3위, 당내 구성원이 3인이라 금은동메달 하나씩은 차지하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자식에게 올인하지 않고 우리 부부 노후에 올인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썩 잘한 결정인것 같다. 가족내 올바른 서열 책정이 사교육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말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주위에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런다. ‘어디 키워봐라~ 그리 되는가’  

본인이 철들고 어느 한 순간인들 아국 교육이 백척간두 풍전등화의 위기가 아닌 상황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4000년전 애급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정말 큰일이야” 건국 60년 역사의 아국으로서는 교육백년대계란 참으로 아득한 이야기다. 정치인, 학부모, 교수, 무슨무슨 교육단체 등이 한 목소리로 이러다가는 필경 교육이 절딴날 것이라고 가래침을 사방으로 튀기며 핏대를 세운 것도 60년쯤 되지 싶으다. 돌이켜보면 번갯불에 콩을 뽁는지 후라이판에 깨를 뽁는지 조변석개 조령모개의 교육정책으로 지난 세월이 얼마나 분주하고 황망했던가. 이상한 건 그래도 아국은 꾸역꾸역 발전을 하는지 어쨋는지 OECD에도 가입하고 G20이니 어쩌니 나름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혹자는 또 말하길 어쩐다 저쩐다 해도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건 다 교육의 힘이다 라고 한다. (물론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도 수다하시리라 생각한다.)  

본인의 일천한 생각으로는 사교육 문제를 포함하여 교육 전반에 대한 변화와 개혁은 정책 제도적인 측면에서보다는 결국 학부모의 의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학부모의 의식이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을 읽어본다면 말이다. 1교시(이범), 3교시(이수광), 5교시(조기숙), 7교시(송인수) 강의는 현 입시체제와 교육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은 하고 있지만 뭐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고, 반면에 2교시(이남수), 4교시(신을진), 6교시(허아람) 강의는 어떻게 영어공부를 시키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식으로 독서교육을 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녀를 칭찬하고 격려해야 하는지, 자녀를 교육하고 상담하는 보다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 개인적으로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 혜림씨(본인의 어화둥둥 금지옥엽 딸내미 이름이다)를 위해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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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올해의 사자성어
離合集散
전국 120명 교수를 대상으로 인터넷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권력을 쫓아 모이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정치인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2002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다. 12월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총 유효 투표수(2,456만1,916표)의 48.9%인 1,201만4,22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기적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로부터 6년 뒤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예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중국 진나라 말기 한왕 유방과 천하를 두고 한판 벌인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패한 초패왕 항우가 오강 근처까지 도망쳐 왔을 때 주위에서 일단 강동으로 돌아가 뒷일을 도모할 것을 권하자 항우가 말했다. “강동 자제 8천을 데리고 떠나왔는데 이제 다 죽고 나 혼자 무슨 면목으로 그들의 부형을 대한단 말인가” 하고는 스스로 자결했다고 한다. 면목(面目)의 유래다. 역발산기개세로 시작하는 유명한 절명시가 전해지거니와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근 천년 뒤에 오강가를 지나던 당나라 시인 두목이 지난 일을 안타깝게 여겨 시를 지었다. 그 시에서 권토중래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봉하마을에서 서울 검찰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한“국민여러분께 면목없다”는 말과 마지막으로 남긴 짧은 시같은 유서, 권토중래를 도모하는 대신 자결로 마무리한 삶 등을 볼 때 인간 노무현과 인간 항우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얼토당토 않은 비약인가.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고 우리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네델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전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히딩크 감독이 즐겨마셨다고 해서 와인 샤또 딸보도 덩달아 인기였다(요즘 대형할인매장에서도 10만원 가량 한다). 월드컵 패막 하루 전인 6월29일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경비정 1척이 우리 해군 고속정을 기습 공격해 장병 6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했다. 처음에는 서해교전으로 부르다가 후에 제2연평해전이라 명명했다. 북한측은 30여명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6월13일에는 경기 양주군에서 여중생인 신효순. 심미선양이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건이 발발했다.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문제 와 더불어 반미감정에 기름을 퍼붓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차남, 3남이 비리문제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국외적으로는 테러 공포가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 확산된 한해였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테러가 발생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도 체첸반군에 의한 인질극이 있었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이라크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그때는 아직 전운이 감도는 그정도)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정황을 살펴볼 때 철새 정치인들의 가벼운 처신을 질타하는 ‘이합집산’이라는 사자성어로 2002년 한해를 정리하기에는 다소 무리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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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쇠 금/성 김 
전국 23,000명의 응모자들 중 1,366명(5.9%)이 '金'을 올해의 한자로 선정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이유중 하나로 꼽았다. 이와 함께 시드니올림픽에서 일본선수들이 딴 금메달, 금융파탄, 새로운 500엔짜리 동전과 2000엔짜리 지폐의 등장 등을 선정이유로 들었다. 2000년의 500엔 주화 변경은 구 오백엔 주화가 거의 1/10 가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오백원 주화와 모양이 비슷해 자판기에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위에서 5위는 亂(란), 新(신), 噴(분), 災(재)이 뽑혔다.  

 

사실 남북 정상회담은 김영삼 전대통령 재임시절인 1994년에 거의 성사단계 직전까지 갔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연기 되었다. 아무래도 아들보다야 아비가 먼저고 그 무게나 인물로 볼 때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분명 차이가 있는데 그건 YS의 복이고 어쨌든 전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주인공 자리는 DJ가 차지했다. 이면에 어떤 거래가 있었던 간에 어쨌든 두 정상의 만남 자체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뿐만아니라 일본에게도 말이다.   

 

화산 분화로 '분', '재' 등이 수위에 오른 것 같다. 3월 31일 홋카이도의 우수산이 분화했다. 지금도 화구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며 당시의 지각변동으로 융기된 도로와 붕괴된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7월 8일에는 미야케지마(삼택도) 화산이 17년만에 분화하였다. 그 후 분화가 멈추지 않아 9월에는 섬주민 3800명을 섬 밖으로 대피시켰다. 2005년 1월에야 대피령이 공식해제되어 절반 정도가 귀도했다고 한다.  

 

2000년에 일본인으로서는 9번째로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우리도 2000년에 노벨상 하나 건졌다. 평화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화학보다야 세계평화가 훨 중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시라카와 교수는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만든 장본인으로 연구의 획기적 발견은 촉매의 농도를 잘못 맞춘 실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연구자로서는 드물게 매일 6시에 퇴근하고 주말은 거의 가족과 함께 보냈으며 아내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고 한다. 선인장 애호가로 집에 100여그루 이상의 선인장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우리 엄마도 선인장을 무척 좋아 하셨는데 아버지는 볼품없는 선인장을 키운다고 불평하셨다. 가끔 화분을 옮기다가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왠지 선인장을 키우는 사람의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메마를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던 듯하다.) 미국의 앨런 히거, 앨런 맥더미드와 3인 공동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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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끝 말
20,430명의 응모자 중 1,077명(5.3%)이 올해의 한자로 ‘말(末)’을 선택했다. 선정 사유로는 도카이무라(동해촌) 핵사고, 무차별 살인사건, 경찰 오직 사건, 잇따른 신칸센 안전사고 등 세기말 적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이 빈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2위는 亂(란) 3위는 核(핵) 4위는 崩(붕)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시에 나오는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고 앙골무아 대왕이 부활하리니...어쩌고 저쩌고” 하는 구절을 지구와 혜성과의 충돌을 예언한 것으로 여겨 1999년에 이 세상이 절단나고야 말 것이라고 혹세무민하는 참언들이 횡횡하기도 했다. 1999년이 별일 없이 지나자 다시 2012년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 신종 종말론은 마야달력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마야 달력은 기원전 3114년에 시작해 기원후 2012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에 걸쳐 종말론은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법상 9는 꽉 찬 숫자이고 그 다음은 무라고 할 수 있는 0이니 9가 세 개나 겹치는 1999에 종말론 이야기가 안 나오면 섭섭한 것이다. 복날에는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어줘야 섭섭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복날 개나 닭을 먹지 않는 다고 여름 못넘기고 돌연 돌아가시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왠지 먹어줘야 할 것 같다는 말이다.  

 

Y2K 예방을 위해 각국이 수천억을 지출하는 등 세기말에 대한 불안과 공포도 있었지만 밀레니엄 새천년에 거는 기대와 희망도 무슨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유럽연합의 단일통화인 유로가 화려하게 출범했으며 미국의 다우존스지수는 103년만에 처음으로 10000을 돌파했다. 반면 나토의 보스코 공습으로 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터기강진, 중남미 홍수로 수만명이 죽기도 했다. 어쩌면 1999는 숫자적 의미밖에 없었다.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백 수천번의 한해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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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2018-01-2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중 가장 유명한게 1999년 7월 예언인데 다들 당시 지구 멸망이 없으니 틀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7월 당시 인류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은 지구 멸망이 아닌 파룬궁 탄압이었죠. 그의 예언을 분석하면 1억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공포스러운 탄압으로 보는게 가장 정확합니다.

“1999년 7월,
앙골모아(Angolmois) 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
그때를 전후로 해서 마르스(Mars)가 천하를 통치하는데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앙골모아‘는 위대한 왕이라는 뜻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왕은 ‘전륜성왕‘을 의미합니다.(파룬궁의 파룬(法輪)은 ‘법륜‘이며 ‘전륜‘은 ‘법륜을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마르스‘는 중국 공산당이 추종하는 ‘마르크스‘를 의미합니다. ‘공포의 대왕‘은 공산당을 조종하는 세력으로 실제로 100가지 고문, 장기적출, 인체의 신비전 등 공포적인 방법으로 파룬궁 수련자를 탄압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산주의를 만들지만 거기서 탄생된 공산당은 사실 인류의 행복이 아닌 독재와 살인 등 공포의 산물이었죠.

따라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예언은 빗나간 게 아니라 너무 정확히 맞춘 겁니다. 그는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고 했지 전혀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의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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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독 독
1998년 7월 와카야마시의 여름 축제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은 주민 67명이 독성이 강한 비소중독 증상을 보였으며, 이 가운데 어린이를 포함해 4명이 숨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체포된 47살의 주부 하야시 마스미는 살인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는데 11년이 지난 2009년 4월에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에서 최고재판소는 카레라이스에서 검출된 비소와 성분 특성이 같은 비소가 피고인의 자택에서 발견되었고 피고만이 카레를 만드는 냄비에 비소를 투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뚜껑을 열었다 닫는 등의 수상한 움직임이 목격된 점 등을 종합하면 하야시 피고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피해자와 유족이 바라는 동기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야시 피고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하야시 마스마는 변호인을 통해 공개한 메시지에서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범죄학자인 브라이언 마리너가 쓴《독살의 기록》을 보면 비소는 금속계 독극물로 계관석이라는 광석 표면에 자연발생한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되어 8세기에 중동의 연금술사가 이 광석에서 비소산화물 채취방법을 발견했고 이후 비소는 살인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독극물이 되었다. 독극물로 비소가 가장 많이 사용된 이유는 구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하얗고 냄새가 없는데다 맛도 거의 없어(달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밀가루나 설탕 또는 음료에 섞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비소는 유리공예나 염색 벽지용 인쇄잉크 제조에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체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된 것은 그 이전 황제가 유배된 세인트 헬레나 섬의 숙소의 초록벽지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벽지에 포함된 비소는 알신 가스로 서서히 방출되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황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전에 신문을 보니 스위스 어떤 연구팀은 나폴레옹이 사망전까지 20년간 입었던 바지 열두 벌을 비교해 체중 변화를 추정하고 이를 남성 위암 환자 270명의 체중 변화와 비교한 결과 두 수치가 정확히 일치한다며 독살설을 일축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인은 아직까지 논란중이지만 청나라 황제 광서제의 사인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2008년 11월 2일자 홍콩 문회보의 보도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비소에 의한 독살로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광서제는 1875년 4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지만 이모인 서태후가 오랜기간 수렴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1898년 강유위 등의 개혁파와 무술변법을 단행했으나 원세개 등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서태후에 의해 10여년간 유폐되었다가 1908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바로 다음날 서태후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문회보에 따르면 광서제의 사인과 관련하여 ‘서태후가 자신이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 고도 하고 또 어떤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광서제는 신체가 허약하여 병사했다’고 하는 등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도굴된 채 방치된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광서제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고 이후 모발과 유해에 대하여 5년간에 걸친 고도의 과학실험과 과학적 계산의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소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직전 황제 고종의 죽음에도 비소 독살설이 파다하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전의가 홍차에 비소를 넣어 고종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서제와 같이 명쾌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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