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이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인 로저 크롤리는 금시 초문의 인사다. 알라딘 소개는 이렇다. ‘영국의 작가 역사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와 출판인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을 몰타에서 지내고 이스탄불에서 살기도 했으며 아나톨리아 횡단 여행을 하는 등 지중해 지역과 인연이 깊다.’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닌듯하다. 어쨌든 반갑다.

 

 

 

 

 

 

 

 

 

 

 

 

 

 

 

 비슷한 책으로는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있다. 여기에 크롤리의 책이 보태어져 마치 3부작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다. 아시다시피 나나미 할매의 책은 소설 형식이어서 쉽게 읽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런치만경의 책은 이제까지 국내에 번역된 관련 책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일 것이다. 재미도 있다. 재미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계시겠으나 어쨋거나 소생은 재미있게 읽었다. 크롤리의 책은 어떤지 궁금하다. 당연한 이야기로 비잔틴으로서는 최후의 날이겠지만 정복자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날일 것이다. 2012년도 터키영화 《정복자, 1453》도 dvd로 나와있다. 전에는 없었는데 이건 또 언제 나왔나 보니 7월달에 나왔다. 사야할 것들은 자꾸만 무슨 아메바가 세포분열하듯이 증식하는 것 같다. 무섭다. 돈 들어갈 구멍은 여기서 숭!! 저기서 쑹쑹!!! 자꾸 늘어나는데 돈 나올 구멍은 작은 구멍 한 구멍뿐이니....아....나도 이러다가 머지않아 무슨 골다공증 비스무리하게 온몸에 구멍이 숭숭숭!!! 뚫리는 병으로 최후의 날을 맞이할 것만 같다.....<20**년, 붉은 돼지 최후의 날>!!!! ....하기사 그날이 언제와도 오긴 올 것인데...  

 

알라딘에는 크롤리의 최후의 날외에도 부의 도시, 베네치아바다의 제국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도 삼부작인가? 당연히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나미의 저작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말하자면 공화국의 통사(通史). 반면에 크롤리의 부의 도시, 베네치아‘500년 무역대국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배경이 1000년부터 1500년까지이다. 전성기 시절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베네치아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크롤리의 또 다른 책바다의 제국들기독교와 이슬람의 지중해 쟁탈전, 1521~1580’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역시 나나미 할매의 전쟁3부작 중 로도스 섬 공방전레판토 해전과 내용이 겹친다. 크롤리의 책에는 나나미의 책에는 없는 로도스 섬 공방전의 연장전인 1565년의 몰타 섬 공방전’(오스만이 로도스에서 비록 신사적이었지만 결국 냉혹하게 깔끔하니 끝내지 못해서 연장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전쟁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가 있을뿐이다. 씨를 말려야 하는 것인데 그게 또 뭐 말처럼 쉬운게 아니고....)과 일설에는 전쟁의 원인이 포도주 때문이라고도 하는 1569년의 키프로스 공방전이야기도 나온다. 역시 궁금한데 책은 절판이다. 하지만 중고는 있다. 지중해가 로마의 내해 혹은 앞 바다였던 시기 이후의, 그러니까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지중해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는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 세계를 참조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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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5-08-31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 <전쟁 3부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재밌게 읽어서 크롤리의 책들에도 관심이 가네요^^ 어느 곳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느냐만 다를 뿐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었거든요. 저자가 몰타와 이스탄불에서 살았었다니 뭔가 더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같아요^^

붉은돼지 2015-08-31 23:25   좋아요 0 | URL
크롤리 삼부작에 1453 dvd를 한번에 구입하는 거는 조금 무리같아서 일단 최후의 날부터 사서 볼까 생각중입니다^^

마법의활 2015-10-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최악의 졸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보다 해악이 아주 큰 악서라고 생각합니다.

붉은돼지 2015-10-06 13:37   좋아요 0 | URL
마법의 활님~ 어떤 면에서 그리 생각하시는 지 설명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로저 크롤리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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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려했느니 그 낙일이여...

아!!! 내 맘 설레이게 이런게 또 나왔군요^^
그건 그런데, 표지 디자인이 좀 아쉽습니다 ㅜㅜ
뭐, 아직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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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드롬 광장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바라보고 서면 왼쪽은 블루 모스크이고 오른쪽은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1524년에 지어진 건물로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슐레이만 대제 시절의 재상인 이브라힘 파샤의 저택이다. 군대 막사, 대사관,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3년 박물관이 되었다. 아랍어 캘리그라피 작품, 카펫 컬렉션, 도자기와 금속공예품 등 다양한 전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소생 이스탄불 여행 88일 일정의 마지막 코스였는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서 꼼꼼하게 둘러보지 못했다. 대충 설렁설렁 보고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금속 공예품들은 정교하고 아름답고 화려했다. 아마 코란으로 보이는 책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어떤 것들은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길이가 거의 1미터쯤 되는 것들도 있다. 책이 아니라 무슨 거대한 화첩같은 느낌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생각나서 이슬람 세밀화를 찾아봤지만 대부분은 캘리그라피이고 세밀화는 한 두점 정도만 본 듯하다. 이슬람에서는 예언자나 선지자 등의 인물을 회화나 조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모스크에 회화나 조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캘리그라피가 발달한 이유다. 세밀화는 궁정 생활이나 세속적인 부분에서만 일부 이용된 듯 하다. 처음 볼 때는 무슨 빨래줄에 널린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듯한 야릇한 아랍문자들도 자꾸 보고 또 가만히 보니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이슬람 캘리그라피의 아름다움에 눈이 떠지는 모양이다.

 

 

 

 

 

 

 

 

 

 

 

 

 

 

'이슬람 캘리그라피'는 이슬람 캘리그라피에 대한 단행본 도서로서는 아마도 국내에서 출판된 거의 유일한 책인 듯하다. 원서를 번역한 것이 아닌데도 저자가 외국생활을 많이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내용은 무슨 논문을 번역한 듯한 느낌이고, 말이 또 요상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개인적인 소견은 실망스럽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기초한 서양 문명의 지대하고 확고한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하여는 참으로 무지하게 무식할 뿐만아니라 많은 부분 오해가 있기도 하다. 텔레반이나 알카에다, IS 같은 극단적인 사례만 자꾸 접하다보니 무슬림이라고 하면 검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집총한 테러분자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머리에는 뿔이 솟았고 엉덩이엔 꼬리가 달린 악마의 현현을 상상하기 십상이다. 중세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미켈란젤로도 모세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을 달아 놓기도 했다.(히브리어 성경의 라틴어 번역과정에서의 오류라고 한다. 코란은 번역을 허용하지 않아서 코란의 번역본은 없다. 다만 해설서가 있을뿐이다.) 당연하게도 무지는 오해를 부르고 오해는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이슬람을 좀 알아야 하는 이유다.  

      

통상적으로 그리스도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세계 4대 종교라고 한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개인 수양적인 성격이 강하고 힌두교는 잡다한 다신교에 내용이 또 엄청 복잡해서 일단 논외로 하면 역시 문제는 자신외의 어떤 다른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교다. 2010년 통계로 60억 인구 중에 기독교도는 19.9억명(33%), 이슬람교도는 10.7억명(18%) 정도라고 한다.(통계를 조사하는 기관과 그 조사 방법 등에 따라 숫치가 다 다르지만 대충 저 정도인 것 같다.) 기독교 인구 중에는 카톨릭이 10.5억명(18%), 개신교가 3.4억명(6%)이고, 이슬람의 경우는 수니파가 9억명(16%) 시아파는 1.5억명(3%) 정도다. 이슬람 수니파의 경우로 보면 전세계 개신교 인구의 3배 가까이나 된다.

 

한집 건너 커피집이요 두집 건너면 가요방과 술집, 세집 건너면 미장원과 교회다. 사랑과 용서, 봉사와 희생의 교회가 이리도 차고 넘치는 데 나라꼴은 좋게 말해도 한치의 양보도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양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흙 구덩이에서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개꼴로 실로 개판 오분전이니 안타깝다. 그 원인이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 있지 않듯이 중동 문제의 근원도 종교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수일 교수의 주장이다. 2차대전 후의 냉전 기류와 그에 호응하고 상응하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석유자원의 국제화와 민족화의 갈등 등이 분쟁의 주범이라고 한다. 결론인즉슨 원인은 정치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터키는 이른바 세속주의를 지향하니 차치하더라도 이슬람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어쨋든....

 

  

 

 

 

 

 

 

 

 

 

 

 

기독교가 사랑과 용서,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듯이 이슬람도 역시 순종과 평화, 관용과 자선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슬람을 가리켜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 역시 한 손에는 성경, 다른 손에는 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없듯이 코란에도 그러한 기록은 없다. 성경과 코란은 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란에 등장하는 28명의 예언자중 21명은 성서에도 나온다. 코란에는 구약의 모세 5,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다윗과 솔로몬,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온다.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했던 천사 가브리엘은 바로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낭송하라고 말했던 그 천사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예수의 하느님, 무함마드의 하느님은 모두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출신이었는데 어느날 문득 하느님으로부터 고향과 동족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가서 새로운 민족을 세우라는 지령을 받는다. 아브라함이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70대 노인인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여종 하갈, 조카 롯 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다. 본처인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사라의 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다. 이스마엘이다. 후에 본처에게서도 아들을 얻게되는데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적자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이스라엘)은 다시 12 아들을 낳으니 곧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된다. 그 중 유다지파에서 후일 다윗과 솔로몬이 나오고 더 먼 훗날에 드디어 예수가 출현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이 바로 아랍민족의 조상이 된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두 집안이 아니고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집안이다.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브라힘 재상과 술레이만 대제 그리고 황후 록셀란 호상간의 사랑과 야망, 음모와 배신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발자국인데, 토프카프 궁전 성물실에 가면 예언자의 수염과 망토,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참십자가니, 예수의 수의니 하는 것들이 있고 불가에서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등등이 있다. 이러한 종교상의 성스러운 물건들은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든 가까든지간에 이미 오랜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되면

그 믿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그것을 진짜 성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수억명 아니 수십억명을 속인 희대의 사기극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종교란 진실이나 사실보다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블루모스크 인근의 시장을 둘러보다 발견한 램프. 당연하게도 알라딘이 생각나서 한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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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늙은 지니가 사는 요술램프 이야기가 생각나요. 지니가 너무 늙어버려서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해요. 램프 안에 안 들어가고, 고길동 집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려고 하는 재미있는 캐릭터였어요. ^^


붉은돼지 2015-08-31 23:29   좋아요 0 | URL
둘리에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군요
지금 생각하니 기념으로 램프 예쁜거 하나 사올껄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이제와서 뭐 어쩔 수도 없지만 ^^;;;;

후애(厚愛) 2015-08-2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여행가고 싶네요. ㅎㅎㅎ
편안한 주말 되세요.^^

붉은돼지 2015-08-31 23:31   좋아요 0 | URL
후애님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는 괜찮으신거죠?^^
 

히포드롬 경기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경기장의 중앙분리대를 장식하고 있던 세 개의 기둥은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이고, 둘은 콘스탄티누스 기둥이고, 셋은 그리스 델포이에서 가져온 청동 뱀 기둥이다.

  

이집트산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가져왔고 일정기간 방치되었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히포드롬 경기장 중앙분리대에 설치했다. 높이가 25.6미터라고 한다. 원래는 80미터가 넘는 놈인데 잘라서 윗부분만 가져왔다고 한다. 오벨리스크 각 면에는 고대 애급의 아름다운 상형문자가 무슨 부조 작품처럼 새겨져 있다. 거의 3500여년 전의 물건인데도 이렇게 깨끗하게 남아있다니 참 신기하다. 기단부의 대좌에는 사면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부조되어있는데 이게 또 미술사적으로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 외에도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로마의 바티칸 광장,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런던의 템즈 강변, 러시아 이르크추그 등에도 있다. 워싱턴의 오빌리스크는 169미터로 현존하는 오빌리스크 중에 가장 높은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즉슨 이집트 태생의 고대 유물은 아니고 이를 본떠 만든 현대의 건축물이다. 1885년에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기념해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할아버지 바실리우스 황제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 높이가 32미터에 기둥 표면은 원래는 금박 입힌 청동으로 번쩍번쩍 반짝이 옷을 해입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옷이 벗겨져 그냥 벽돌기둥의 모습으로 조금 볼품없는 행색이다. 그 빛나던 금박 청동 옷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 때 약탈자들이 모두 홀랑 벗겨갔다. 아아아!!!!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갔으니 약탈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슨 특별 조치가 없으면 약탈이란 다 똑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1453년 오스만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정복자가 백마를 타고 당당히 입성할 때 술탄은 자신의 친위부대를 미리 보내어 병사들이 아야 소피아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3일간에 걸친 무차별적인 약탈은 술탄이 병사들에게 승인한 권리였지만 아야소피아는 술탄의 몫이엇던 것이다

  

배배꼬이고 끝 부분이 잘린 청동 기둥은 보기에는 볼품이 없다.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게 또 오래고 고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원래 높이는 8미터였으나 손상된 현재 높이는 5.5미터다. 이 뱀기둥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기념물로 델피 아폴론 신전에 세웠던 것인데,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집들이 기념품으로 차출하게 된다. 청동뱀 아래 쪽에는 페르시아 전쟁 때 병력과 예산을 지원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둔한 소생은 몰라서 보지 못햇다. 원래의 모양은 세 마리 뱀이 서로 엉겨서 감겨 올라가는 모습으로, 이 뱀기둥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맨 꼭대기, 그러니까 세 개의 뱀대가리가 삼발이 형태를 이루는 곳에 거대한 황금 솥이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황금 솥은 지금은 어데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솥을 받치던 세 개의 뱀대가리 중 한 대가리의 일부는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역시 아둔한 소생은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은 했지만 너무 피곤한 관계로 세세하게 둘러보지 못해서 그 놈의 뱀대가리 구경을 못했다. 안타깝다. 다른 한 대가리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한 대가리의 행방은 여직 묘연하다.

 

 

 

 

 

 

 

 

 

 

 

 

 

 

캠브리지에서 비잔틴 역사를 공부했다는 제임스 굿윈의 소설 중에 스네이크 스톤이라는 소설이 있다. 배경은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술탄의 늙은(영감은 아니고) 환관인 야심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조금 특이한 소설이다. 굿윈이 전작인 <환관탐정 야심>으로 에드가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기대에 부풀어 읽어봤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그래서 뭐 어쨋다는 말인가?? 비밀리에 전해진 비잔틴의 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소설 속에는 저 뱀 기둥의 사라진 뱀 대가리도 등장하고....제목도 스네이크 스톤인데...그 보물이 뱀 대가리라는 말인지...말대가리란 말인지....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독해력 떨어지는 아둔한 소생의 탓이겠으나 소설은 진정으로 심심하게도 심심했다. 그래도 혹 궁금하신 분은 뭐 함 읽어봐도 무방하겠지만 역시 재미를 보장하지는 못하니 참고하시길.

 

 

  

 

 

 

 

 

 

 

 

 

 

 

황금 솥의 행방은 알 수없지만 히포드롬 경기장을 장식하고 있던 네 마리 청동 말의 행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추적이 가능하다. 연이나 이 청동말의 탄생은 역시 오리무중이다. 아마도 기원전 그리스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과 주석이 조금 섞여있고 거의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몸 전체를 금으로 도금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히포드롬 경기장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1204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시 베네치아 도제 단돌로가 이 네 마리 청동말을 다른 수많은 노획물과 함께 베네치아로 보냈다. 말들은 산마르코 성당 발코니에 세워졌다. 1797년 베니스가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자 나폴레옹은 말들을 파리로 가져가서 1807년 파리에 개선문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말들을 배치했다. 이 개선문은 루브르 앞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으로 지금도 개선문 위에는 복제품 말들이 서있다. 참고로 샹젤리제 거리 끝에 있는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8년 안전 문제 때문에 로마로 옮겨졌다가 1919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2년 산마르코 성당 바로 옆 두칼레궁(도제궁전) 지하로 옮겨졌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말들이 이미 많이 노쇠한데다 편하게 좀 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로 끌려다니며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너무 피폐해져 더 이상 오염된 공기를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전문가의 진단을 받고 1977년 산마르코 성당 2층 성물실로 옮겨졌다. 성당의 발코니에는 복제품이 서있다 2006년도에 베니스에 갔을 때 아둔한 소생은 뭘 잘 몰라서 성당 발코니에 있는 말이 진품인 줄로만 알았다. 성당 안의 성물보관실은 별도 입장료가 있어서 돈 아까워서 안들어갔는데 그 곳에 말 진품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아 뭘 알아야 해먹지......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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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2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저 뱀기둥을 본 것 같아요. 아마도 델포이 신전에서 살았다는 뱀 퓌톤을 형상화했을 겁니다.

붉은돼지 2015-08-26 09:57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보니 퓌톤은 대지의 신 가이아의 자식으로 피토(델포이의 이전 이름)를 지배하던 큰 뱀이라고 하네요...나중에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게 죽임을 당하고 피토는 델포이로 이름이 바뀌어 아폴론이 지배하고 신탁을 내렸다고 하네요....

원래 델포이에 있던 뱀기둥이니 아마도 퓌톤과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호서기 2015-08-2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돼지님의 서재가 참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붉은돼지 2015-08-31 2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호서기님~~
 

현재의 이스탄불 구시가지에는 골든혼 쪽으로 거의 붙어서 토프카프 궁전이 있고 궁전 왼쪽에 귈하내 공원이, 궁전에서 조금 내려오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왼편으로 트램바이 차도를 건너면 바로 예례바탄 사라이가 있다. 박물관 아래로는 분수광장이 놓여있고 그 건너편에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있으며, 모스크 왼편으로는 히포드롬 광장이 길게 펼쳐져 있다. 모두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히포드롬 광장은 예전에 전차 경기장이 있던 자리다. 히포(hippo)는 하마지만 접두어 hipp-은 말을 뜻한다. 1453년 오스만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이전에는 히포드롬 경기장과 붙어서 지금의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와 분수 광장 일대에 비잔틴 제국의 대궁전이 있었다. 황제는 궁전에서 바로 경기장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전용 출입구가 있었고, 또 아야 소피아 성당과 궁전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스탄불의 히포드롬은 아마 현재 그 유적이 남아있는 경기장 중에서 최대 규모다. 가로 120미터, 세로 500미터(또는 130×450미터 라고도 한다)10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엄청나다. 이 경기장은 서기 203년에 세베루스 황제의 지시로 착공되어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완공되었다. 일부 관광안내 책자에는 영화 벤허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잘못된 이야기다. 영화 벤허는 당연히 여기서 찍지도 않았고, 더구나 영화의 원작인 소설 속에서 벤허와 멧살라가 죽기살기로 필사의 전차 경주를 벌이는 장소는 예루살렘의 경기장이라고 한다. 사실 소설 속 벤허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 전후인데, 그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에는 전차 경기장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소설로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품절이다.

 

 

 

 

 

 

 

 

 

 

 

 

 

 

로마시대에 전차 경기는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의 프로축구나 프로야구는 그 근처에도 못 미쳤을 정도였던 것 같다. 비잔틴 시대에는 4개팀으로 나누어 경기가 벌어졌는데 이들은 유니폼을 각각 적, , , 백색으로 입어 서로를 구별했다, 이들을 응원하는 응원단도 적색당, 청색당, 녹색당, 백색당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는 녹색당와 청색당만 남게 되었다. 이 당파들은 단순한 응원단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정당과 같이 거대한 파벌을 이루었고 심지어 사병들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532년에 전차 경기 후에 과열된 응원 분위기에서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니카 반란의 시초다. 황제는 처음에는 각 당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감금하고 처벌하였는데 얼마후 녹색당과 청색당은 서로 힘을 합하여 황제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의 방화로 아야소피아 성당도 불에 타 소실되었다. 폭동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고 했다. 이 때 황후였던 테오도라는 대차게도 황제의 자주색 옷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역사에 남은 유명한 말을 하면서 도망치려는 황제를 훈계했다고 한다. 황후는 곰 조련사의 딸로 극히 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며, 경기장의 쇼걸이자 매춘부였다고 한다. 어쨌든 마음을 고쳐먹은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한다. 이때 히포드롬 경기장에서 학살된 사람이 삼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일렁일렁 노니는 광장이 되었지만 실은 엄청난 유혈의 현장인 것이다.

 

 

 

 

 

 

 

 

 

 

 

 

  

테오도라에 관한 어린이용 책은 나와있는데 성인용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악의적인 역사가들의 진술에 의하면 테오도라에 대한 차마 말로 형용키 어려운 온갖 해괴하고 음탕한 29금도 훨~씬 넘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는데, 당연 이 책에는 안나올 것이다.

  

로마인들과 달리 이슬람교도들은 전차 경기의 묘미를 모른다. 당연하게도 이 경기장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는 없어졌다. 무슬림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 맥주를 일잔 홀짝홀짝하면서 콧구멍 벌렁벌렁하는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내 달리는 전차 경기를 관람하면 정말 재미가 철철 넘쳐흐를 것만 같은데....뭐 취향과 기호가 다 다르니 뭐라 할 수는 없다. 이스탄불 여행 중 현지인이 갈만한 식당에서 두어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니 없다는 것이다. 아아아!! 이 한 여름에 식당에 맥주가 없다니........ 터키가 비록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슬람 국가인 것이다. 아마도 주류는 허가된 곳에서만 판매가 가능한 모양이다. 어쨌든 세계 최대의 전차 경기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기장의 중앙 분리대를 장식하던 세 개의 기둥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이고, 둘은 콘스탄티누스 기둥이고, 셋은 그리스 델포이에서 가져온 청동 뱀 기둥이다. 이 세 기둥 이야기는 다음 편에....계속....

 

 

 

  

 

 

 

 

호텔 방에서 터키 과자를 안주로 에페스 일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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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5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타유 2015-08-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53년 5월 29일.. 그때는 어땠을지..

붉은돼지 2015-08-25 15:53   좋아요 0 | URL
1453년 5월 29일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이스탄불에 있어요^^
1453 파노라마 박물관이라고...이스탄불 여행 마지막날에 갔었는데...나중에 페이퍼에 함 올려볼께요

Mephistopheles 2015-08-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축구장에서 난동 부리는 홀리건...국내 프로야구판에서 난동을 부리는 일부 열성팬들....의 선조들의 이야기군요.

붉은돼지 2015-08-25 15:55   좋아요 0 | URL
훌리건 저리가라 였다나봐요...종종 난동을 부리곤 했다고....ㅎㅎㅎㅎ
로마인들은....비잔틴은 그리스인들이 주겠지만....어쨋든 로마인들은 검투사경기나 전차경기 이런 게임을 엄청 좋아했었나봐요..전차 경기는 말하자면 일종의 카레이스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