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
오늘날 우리 정신세계의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지성적 활동은 책에 기초하고 있으며, 물질의 상부에 있는 문화라고 불리는 그 무엇은 책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서 영혼을 확장하고 세계를 건설하는 이러한 책의 힘에 대해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매우 드문 순간에만 자각할 뿐이다. 새롭고 놀라운 것의 존재에 매번
감사함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책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된 까닭이다. 마치 우리가 호흡할
때마다 산소를 들이마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공급으로 혈액이 비밀스러운 화학작용을 해서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 눈으로 끊임없이 영적 재료를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우리 정신이 새 힘을 얻거나 혹은 지치거나 한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한다. 수백 년에 이르는 문자 역사의 자손인 우리에게 읽는 행위는 이제 거의 신체
기능이나 마찬가지로 자동운동이 되었고,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책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책은 이미 자연스레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되었다.
(25-26)
사람들은 책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기술 중심의 시대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축음기, 영사기, 라디오가
보다 세련되고 편리한 말과 생각의 전달 수단이 되어 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책의 문화사적
임무는 이제 곡 과거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단순하고 편협한 시각인지! 화학도 책만큼 확산성이 있으며 세계를 떨게 만드는 폭발물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인쇄된 작은 종이 묶음의 항구성을 이기는 그 어떤 강철판이나 철시멘트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전기로
켜지는 불빛이 아직 얇은 책 한 권으로부터 퍼져 나와 깨달음을 주는 빛만큼 우리를 비추어 주지는 못했고,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전류가 하는 어떠한 일도 인쇄된 언어가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채우는 것에는 비할 것이 못 된다. 시대를
초월해 불멸하고 불변하는 것인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고 변하기 쉬운 틀에 담긴 고도로 압축된 힘인 책은 기술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기술 또한 책으로부터 배워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3)
학교가 그렇게 망쳐 놓았다. 독서의 동기는 늘 자기
세계의 경계를 넘으려는, 낯선 것 안에서 길을 잃으려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책 속의 비유에서 자신을 되찾으려는 충동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낯설고 멀고 예외적인 동화
속에서 스스로를 꼬드겨 도망쳤으며, 어디에도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았다. 더 이상 동화가 삶을 상기시키지 않고, 오히려 삶이 동화를 우리에게
멀어지게 한다. 동화는 우리 감정을 진지하게 움켜쥐지 않고 그러 쓰다듬는다. 그것도 아주 가벼이. 내면의 시선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부담 지우지 않으면서 매혹하는 동화는 연기를 매지 않는 불꽃이다. 일상적이고
지극히 통상적인 삶의 놀라운 힘이 동화에는 들어 있다. 꽉 짜인 시간의 법칙은 동화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고, 끝없는 우연 속에서 일반적인 규칙은 다 사라진다. 이 의미심장한 속의 무의미함이 바로 동화의 마법이다.
(35-36)
우리가 문학작품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하면 동화는 끝도 없이 쉬워 보이지만 실은 비밀로 가득하고, 무질서한 것 같지만 실은 무의식중에 거대한 법칙을 따른다. 연구자나
학계는 동화의 비밀을 푸는 데, 동화와 민속학과의 관계 혹은 사라진 종교나 신화적이고 에로틱한 상징과의
관련성을 해석하는 데 있어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서 있다.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지만, 동화는 우리의 시간에서 아주 멀리로부터, 모든 것이 은밀하고 신앙적
놀라움 정도가 사람이 느끼는 가장 활기찬 감정이었던 아득한 옛날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같이 보이는 이 소소한 이야기들은 수 세기 전부터 수많은 세대를 거쳐 시간 속을 거닐어 왔고, 그
하나하나가 가장 오래된 숲의 가장 오래된 나무보다도 나이가 많다.
(43)
우리와 옛 동화 사이에 시끄러운 도시가 끼어들고, 오래된
숲을 소란스레 관통하는 철도가 요정과 동물의 목소리를, 그들의 다정한 대화를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와 마찬가지인 동화가 때때로 약간은 꾸며 낸 이야기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대도시 한가운데 문을 굳게 닫아건 방 안에서 읽을 때,
동화는 아주 단순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낯설고 특이하게 느껴진다. 숲속으로, 산 위로 던지는 시선이 먼저 자연을, 그리고 동화를 다시 완전히
순수하고 진실한 것으로 돌려놓는다. 자연이 있는 곳에서는 늘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동화 자체의 신비로움이 무모한 공상도 무용한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 주는 까닭이다.
(69-70)
수천 년 전부터 가능한 한 완전한 세계상을 그리는 것이 모든 지성인의 열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가 외부의 감각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한은 외적인 도움 없이도 가능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곳의 풍경과 기념비가 될 만한 사건, 시인과
예술가를 직관으로 파악했다. 과거는 역사적 의의를 갖지 못하면서 선조들의 시대를 넘어 지금 여기에까기
이르지 못한다. 언어는 제한된 수의 어휘를 품고 있을 뿐이고, 학문은
얼기설기 얽혀 거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법칙만을 포괄한다. 고대 그리스 지식인에게도 절대적으로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평균적인 인간, 예컨대 인쇄소 보조, 초등학교 교사, 자동차 운전자, 판매직
점원의 평균치 지식은 사실에 비교적 적게 근거할수록 더욱 대담하고 탁월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 사유하는 사람에게 보편성의 확보란 당연한 것이었다. 보편성에 의해 정신은 모든 학문을 균질하게 창조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고,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당시 세계의 모든 본질을 시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77-78)
동방의 발견은 유럽 사회의 지평을 급격하게 넓힌 세 가지 사건 중 가장 최근 사건이다. 유럽 정신의 첫 번째 위대한 발견은 스스로 훌륭하게 과거를 발견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졌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두 번째 발견은 미래를 향했다. 그간
끝이 없을 것으로 믿었던 대양 너머로 아메리카 대륙이 돌연 떠올랐다. 아주 멀리 있던 지평선이 가까이
당겨지고, 미지의 나라와 낯선 식생이 새로이 눈뜬 환상에 불을 붙여 유럽 정신을 새로운 전제와 무한한
가능성으로 채웠다. 그다음 세 번째 발견은 왜 그리 늦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동양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 근동 지방부터 페르시아, 일본, 중국까지 동쪽에 위치한 모든 나라는 수백 년간 비밀에 싸인
장소로, 진위가 의심스럽고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해져 올 뿐이었다. 바로
이웃에 위치한 러시아조차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안개로 자욱했다. 오늘날(1917)에도 우리는 폭력적인 전쟁으로 인해 충분히 객관적이지 못한 시각으로 속도만 붙어버린 지적 인식의 시작점
한가운데 서 있을 뿐이다.
(94-95)
동방의 이름 없는 이가 쓴 이 비극 안에 펼쳐지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넓다. <천일야화>에 숨겨진 드라마와 비슷한 수준의 훌륭함은
역시 아돌프 겔버가 대담하게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셰익스피어의 몇몇 작품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거의 음악적으로 가장 깊은 절망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없는 완전함 유쾌함으로 옮겨 간다. <템페스트>에서와 같이 사람 마음속의 모든 요소의 영혼의 파도가 그 안에서 샅샅이 파헤져지고, 헤집어졌던 것은 귀향길의 은빛 수면처럼 다시 잔잔히 잦아든다. 동화의
모든 가벼움과 전설의 다채로움이 그 안에서 반짝이고, 이 요동치는 극 안으로 피의 드라마가 단단히 엮여
든다. 권력을 다투는 성별 간의 극심한 전쟁, 정절을 맹세케하려는
남자의 투쟁과 사랑을 향한 여자의 투쟁.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작가, 우리를 익명의 위대함에 눈뜨게 한 이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작품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빚은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103-104)
장 자크 루소에게 세계의 변혁은 언제나 옳다. 사회질서가
뒤죽박죽이 될 때마다 그 사회와 관련하여 깊이 묻혀 있던 문제들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한 시대가 국가와
인간의 가장 기저에 있는 토대를 건드리고, 전통을 무너뜨리고 규칙을 흔들 때마다 나는 전령이 되고 충고자가
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항상 시간의 흐름이 무관한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영원한 변호인으로, 어떤 사회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고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의 증인으로 그는 서 있다. 루소는 항상 맨 처음부터, 그리고 외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힘은 마치 지렛대처럼 대상에
바깥쪽에서 작용하며, 어느 한 시기에 갇혀 있지 않고 영속하는 인류 안에 있다. 그는 자기 세대와 그 자신이 속한 국가질서에만 다양한 혁명가가 아니며, 그보다는
공동체에 맞서는 개인 인격의 반응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자유를 쟁취하려 투쟁하는 인류를 영원히 수호하는 수호자 같은 인물이었다. 혁명은 그를 인권의 아버지로 내세웠고, 국민의회에서의 연설은 그의
이름을 불멸하는 것으로 새겼다. 그러나 반대 세력은 무정부주의를 탄생시킨 사상가인 그의 시신을 판테온에서
끄집어내 갈기갈기 찢어 남은 것조차 바람에 흩어버렸다. 하지만 세계의 변혁의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말과 정신은 부활한다.
(109-110)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진지하고 폭넓은 작품이 당대에 미쳤던 폭발적인 영향력을 짐작해 보기란
어려운, 아니 차라리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궁정
신하의 집에서 쓰여 비밀리에 인쇄된 이 책이 1762년에 발행되자마자 프랑스 정부는 작가를 잡아들이라
명했고, 이에 따라 스위스의 망명 기회도 사라졌다. 책은
공식적으로 ‘그랑 팔레’의 계단에서 불태워졌고 제네바에서
평의회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제네바가. 하나의 공화국이
그 책으로 인해 붕괴했고, 북미의 다른 한 공화국은 그 책으로 인해 소생했다. 어느 왕은 항변하기 위해서 뒤에 <안티-에미>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고 쾨니히스베르크의 이마누엘 칸트는
이 책을 읽느라 40년 만에 처음으로 매일 하던 산책을 잊었다. 모티에에서는
농부들이 루소의 창에 돌을 던졌으며, 프랑스의 공작부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쏟고 다시 아이들에게 직접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온 문학계가 혼란을 마주하고 삶의 경향이 변하고 여왕들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양치기
소녀들이 트리아농궁전에서 뛰놀고, 그러는 동안 이 책은 미래에 자기를 고발한 사람들과 국민의회가 장광설을
받아쓰게 했다. 그의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에밀>은 그 글로 쓰인 혁명으로, 사유와 도덕과 신앙의 전복을 담고
있었다
(110-111)
그러나 이 책은 사실 교육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은 어린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인간을 다룬다. 인간의 시작 단계만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시작(그러니깐 그 뿌리)을 이야기한다. 이는 곧 각 개인이 세계와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아이가 부모 혹은 교육자와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한 국가에서 성장한 시민이 국가와
관계를 맺는 것, 그 국가의 제정법이나 관습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의 비유다 이 작품의 정수인 <사부아 사제>에서는 그것이 인간과 그가 믿는 신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의 신과의 관계로 말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루소가 최초로 부여한 자유로울 권리를 갖는다. 자신의 신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권리를.
(129-130)
그럼 혹시 선생님은 - 아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 쿠르츠 말러나 헤르더 주더만, 오토 에른스트의 경우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 경우도 어느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그
작가들도 대중을 위해 쓰는 건 마찬가지니까. 단지 대중에게 정신적 차원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고상한
목표에서 쓰기보다, 소통을 목적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대중이 보기 원하는 대로만 표현하는 면이
있지. 이 작가들도 - 물론 그것도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실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지만 - 자신의 낙관주의에 기반해 쓴다기보다는 군중의 것에 기반해
쓰는 것일 거야. 그들은 대중과 함께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그리고
이런 공통점이 그들을 부정해봐야 소용없도록 만들어 있지.
(133)
자네의 이견은 매우 옳다네. 타고르의 저서에서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수월해 보이는 면이거든. 인류가 창조되는 시점부터 씨름해 온 엄청나게 난해한 개념들을
꼭 요술을 부리듯이, 친절하고 발랄하게, 그 어떤 괴로움이나
격정적인 사고 과정 없이 처리해 버리니까. 죽음과 고뇌, 악한
천성까지도 그는 예의 그 부드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어 옆으로 밀어 놓지. 또 하나 자네가 제대로 알고
감지했음을 인정하고 나도 동의하는 건, 이 책에서는 세계가 벌이는 굉장한 연극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세. 늘 혼란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인간이 열에 들뜨고 절망한 가운데서도 어떻게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투쟁하는지
말이네. 타고르에게 이 조화라는 것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일종의 피 속에 흐르는 온화함으로
그가 애초에 한 인도인 특유의 부드러운 방식으로 표현된다네. 조화로운 감정을 학생들과 인류에게 계속해서
전달하지.
(160)
하지만 부를 향한 이런 의지가 과연 발자크의 인생철학이었을까?
발자크는 모든 철학을 자신의 내면에서 소화시켜 소설에 녹여 냈기 때문에 실제 삶에서는 어떤 철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진 재능의 가장 중심 뿌리인 소위 그 어마어마한 투사 능력으로, 그는
자신의 창조물이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순간에도 그들의 생각을 논박할 수 없다고 여겼다.
(173)
여덟 살 아이의 서툰 손으로 조부모의 생일카드에 그리듯 써넣은 글이 괴테 인생의 첫 시였다. 마지막 시는 여든두 살의 노쇠한 손으로 죽기 겨우 몇 백 시간 전쯤에 써 내려간 것이었다. 그렇게 길고 긴 인생 동안 시작의 변치 않은 후광은 이 지칠 줄 모르는 인물을 늘 비추었다. 이 유일무이한 시인이 언어로 기적 같은 자기 재능을 조명하고 뒷받침하지 않은 해가 없었을 것이고 어느 해에는
그러지 않은 날이 어느 달에는 그러지 않은 날이 없었을 때.
(183-184)
괴테는 아직도 고정된 개념으로 볼 수 없으며, 문학사에
박제된 인물도 아니다. 각 세대에게 그는 새로운 의미가 되고, 작품집
또한 새로 가려 뽑을 때마다 새로운 형태로 해야 된다. 시에만 한정해 괴테의 <서동시집>이 어떤 가치 평가를 받아왔는지, 이 오래된 시들이 마술같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 우리의 감정에 다가오는지 살펴보자. 당대와 19세기에는 뭔가 기이하고 시시덕거리는 가면 놀음으로 여겨졌던
바로 그 작품이 지금은 어떠한가! 반면 실러 시대에 쓰인 괴테의 발라드와 민중에게 널리 사랑받았던 몇몇
작품은 그 극도의 단순함 때문에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평가할 때 얼마나 별로인 것이 되었나! 마치 신과
같았던 우리 학창 시절의 괴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썼으며 휠덜린과 니체 이후 독일인이 더
이상 들어서지 못했던 영역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우리를 안내해 준 고전주의 예술가 괴테, 손에
잡힐 듯 가까웠던 이 괴테는 비밀스러운 곳으로 가득한 시를 쓰는 신비한 조각과 같은 이미지와 그의 우주 전체가 지닌 세계관과 충돌하며 점점 더
뒤편으로 물러났다. 20세기에 그의 시를 새로 골라 묶는 작업은 이제까지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야만
하고,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가치 평가나 19세기에 출판된
명작선집의 선택 기준은 논외로 해야 한다.
(190)
괴테의 시는 그런 운명의 형태를 그저 자기 인생 뒤로 흐르는 배경음악 정도로 여긴 것이 아니라
교향곡처럼 웅장하게 그의 온 존재를 감싸 안는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은 이 지상에서 다시는 없을 인간의
가슴속에 인간 음악이 되어 흐르고, 불멸하는 예술이 부리는 마법이 되어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현재적인
것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