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외에 주문을 받곤 했던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은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원 입장에서는 궁에서 멀지 않고, 부수 입을 올릴 수 있는 서화 가계들이 있는 광통교 근처이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지금의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전(典籍),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9)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8호 첫 페이지에 을사늑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기리는 <민중정공혈죽도>를 그려 싣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과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잡지 <청춘(靑春)>,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를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실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88)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초였음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영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치우친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154)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박래현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그림은 어느 시기까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205)

이렇듯 빼어난 감성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던 최재덕이었지만, 북으로 가서는 자신의 화풍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의 감성적이고 예민한 예술적 성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는 북한의 예술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계속 남쪽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면 또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앞서 박고석은 최재덕이 북쪽으로 가고, 이중섭이 남쪽으로 왔으니 비긴 셈이다라고 했지만, “이중섭이 북쪽에 남고, 최재덕이 남쪽에 남았으면 또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쩌면 남북의 미술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역시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235)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건물 건축의 첫째 의문은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크기가 너무 크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 실제 주변 다른 곳의 경우 고도제한을 받는다. 이런 높은 건물이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09-310)

2001년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이 대부분 유화 작품이어서인지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이 미술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문이었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 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대서특필한 기사도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했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판화를 전시하곤 했다.

 

(338)

2009년 일본의 명문 학교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는 개교 80주년을 맞아 학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단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고자 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엄격한 추천과 심사를 거쳐 일본화, 서양화, 조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 한 명을 선발했다. 그 한 명이 바로 1949년에서 1953년까지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인 조각가 권진규(1922~197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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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그런데 말이야, 태곳적부터 사람은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말을 내지르다 보니 문자가 생겨났고 답답증 때문에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음악이 생겨났고 모양을 나타내어 보고 싶은 답답증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게 생겨났을 성싶은데, 그래서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종교니 철학이니 윤리 도덕이니, 그게 다 춥고 배가 고파서 생겨난 게 아니란 말이야. 답답증, 다시 말하면 마음이 춥고 배고파서 생겨난 건데 그래서 인간은 동물보다 복잡해졌단 말이야.

 

(588-589)

여덟이에요. 나인 그렇다 치고, 난 엉큼하질 못해서 탁 털어놓는 거예요. 마음은 간절하면서 안 그런 체하는, 소위 그 숙녀라는 물건들을 보면 메스꺼워서 원, 나같이 솔직만 하다면 세상은 아주 살기 좋고 밝아질 거예요. 한국 사람들의 병이 바로 그거 아니에요? 남이 갖다주어서, 그래야 겨우 먹고 싶지도 않지만 권하니까 먹는다는 식으로 말에요. 배 속은 비어서 꾸럭꾸럭 소리가 나는데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체면치레는 사실 치사한 거예요. , 결혼 문제에도 그래요. 따지고 보면 목적은 간단한 데 공연한 사탕발림을 한단 말예요. 결혼이라는 것도 수지계산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627-628)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혹은 부조리라든가 막연한 말인데 한편 근본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한데 그런 것 밀쳐놓고, 아득바득 애쓰는 그 껍데기만 살짝 벗겨본다면? 역시, 역시 그렇거든. 의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 쌓이고 무너지고 한단 말이야. 마치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떠밀리다가는 큰길로 나와 있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본인의 의사하고는 상관이 없이 천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천치가 되어 있기도 하고, 그게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랄 수 없는 게 오늘이거든. 역학적인 것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운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물러나 버린 빈터에서 인간이 주인만 되었더라면…… 망상이지 망상일세. 어디 본인의 의사만의 부재한가? 그 타의라는 것도 타인의 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자를 빼어버린 타, 다만 타, 그것뿐이지. 홍수를 이루며 떠내려가는 사물의 의사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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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

 

(199-200)

나의 표정에 별항은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입을 헤벌리고 나를 응시했으니까.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리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리석은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의 평행 육면체였다. 나의 구상을 실현하기에 완벽했다. 하지만 비올라의 생일은 11 22일까지는 고작 열흘이 남았다. 나는 제일 좋은 도구를, 치오가 날은 닳고 자루는 갈라져서 손가락에 가시만 남기는 도구들을 쓰게 하고는 만져 보는 것조차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던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야만 할 바로 그 장소를 쪼았다. 별항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258)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조각하는가가 아니야. 왜 그것을 하는가이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니? 그게 뭘까, 조각한다는 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돌을 쫀다>라는 답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고, 나는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조각을 한다는 게 뭔지 깨닫는 날, 넌 단순한 분수대만으로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할 거다. 그동안,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하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강이 화를 낸다는 생각하니?”

 

(357)

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든 피에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려고 옷 주름의 완벽함, 해부학적 정확성, 몸짓의 우아함,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을 강조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전문가들이야 불쾌하든 말든,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얼굴에 있다. 성모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성모를 곱사등이로 만들어도 괜찮았을 거다. 거의 패배한, 피로가 포기의 순간, 영혼을 내맡긴 그 순간에 포착된 여인의 얼굴. <포착된>이라는 말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조각가가 그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미켈란젤로는 스냅 사진을 찍은 거였다. 단순한 끌과 대리석 덩어리만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치러 낸 3.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그 얼굴의 전부는 아니다. 그 얼굴에는 자신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이, 앞으로 곧 일어나려고 하는 모든 일이 담겨 있다. 그 지점으로 데리고 온 시간과 다가옴을 예고하는 시간이, 수백만 초의 죽음과 또 다른 수백만 초의 약속이.

 

(376-377)

비올라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바람이 일면서 마지막이 남아있던 몇 조각의 안개들을 몰고 갔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지? 시로코인가? 포넨테인가, 미스트랄인가, 그레크인가? 혹은 비올라가 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바람일 수도? 나는 비올라를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보다 단수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을 붙이는 세상에 단순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422)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428)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았고 종교에 귀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종교는 피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치는 퇴폐적인 애인이라 그 열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493)

나는 당신들이 일으킨 전쟁 한복판에 우뚝 선 여자다 / 나는 당신들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당신들이 부르는 여자다 / 하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자마자 당신들이 불태울 여자이며 혹시라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내가 보게 될까 봐 / 당신들은 나를 재로 만들어 사방에 뿌려 버리리라, 아니, 당신들의 불은 뜨겁지 않고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니 당신들은 그저 그런다고 생각할 뿐 /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나는 당신들만큼이나 귀하다.”

 

(546-547)

비올라는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비올라가 입원해 있으면서 왜 나를 멀리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이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모든 감옥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수감자들 역시 동일한 죄를 저질렀다. ,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믿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냈다는 죄.

 

(595)

떠나자, 비올라. 난 이런 폭력에 신물이 나.”

떠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최악의 폭력, 그건 관습이지. 나 같은 여자, 똑똑한 여자, 난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습. 그런 말을 하도 듣다 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그 유일한 비밀이라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더라. 내 오빠들, 그리고 감발레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보호하려고 앴는 건 바로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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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알라딘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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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람들은 지금이 역사상 전례가 없을 만큼 사실이 통하지 않는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하다. 비근한 예로, 현재 미국 대통령이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무엇이 사실인지 자기도 모르면서, 알아볼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워싱턴 포스트> 팩트체킹 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기사 작성 시점 기준으로 취임 이래 869일 동안 거짓이거나 오해를 유발하는 주장 10,796건 했다고 한다. 특히 2018년은 유례없는 기만의 해였다고 한다.

 

(26)

진실은 아버지를 하나만 두었으나 거짓말은 수천 명의 사내가 낳는 사생아로서 여기저기 곳곳에서 태어난다라고 1606년 앨리자베스 시대의 작가 토머스 데커는 한탄한 바 있다. 16세기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수필 <거짓말쟁이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의 얼굴이 진실의 얼굴처럼 하나뿐이었다면 상황은 더 나았을 것이다. (…) 하지만 진실의 반대는 그 모습이 수십만 가지이며 펼쳐질 마당이 무한이니 거기엔 끝도 한계도 없다.”

 

(30-31)

그 밖의 종류로는 우선 여론몰이라는 게 있다. 정치인들의 기만술책 중 하나다. 여론몰이의 교묘한 점은 꼭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놓고 거짓말하는 정치인도 많지만, 여론몰이 기술의 정점은 진실만 말하면서도 완전히 거짓된 주장을 펴는 것이다. 정직의 벽돌을 가지고 허튼소리의 집을 짓는다고나 할까. 그 다음으로는 망상이라는 게 있다. 틀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 능력으로, 그 형태는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집단 히스테리에 빠지거나 대세에 굴종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아마도 가장 만연하게 퍼져 있고 피해도 가장 큰 형태가 되겠는데, ‘개소리라는 게 있다.

 

(46)

심지어는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난 후에도 진실이 퍼지는 데는 걸림돌이 있어서, 이미 퍼져나간 거짓을 따라잡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 걸림돌이란 간단하다. 우리는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정말 싫어한다. 우리 뇌가 그걸 질색한다. 그리고 각종 인지 편향 때문에 자기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을 좀처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거짓에 속았음을 용케 깨닫는다 해도 각종 사회적 압력 때문에 자신의 오류를 숨기고 싶어 한다. 구라의 마수에 일단 걸려들고 나면 빠져나오려는 의지를 잃기 쉽다.

 

(66)

당시엔 뉴스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이처럼 어이없게 바라보는 시선이 팽배했을 뿐 아니라, 인쇄물의 폭증이 인간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불안감도 만연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정보 과부하에 대한 우려가 심각했고, 불길한 말들이 나돌았다. 1685년 프랑스 학자 아드리앵 바예는 이렇게 암울하게 예측했다.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기세로 폭증하는 서적으로 인해 앞으로 다가올 수백 년은 로마제국 멸망에 뒤이은 수백 년에 못지않은 야만시대로 퇴보하리라 충분히 우려할 만하다.

 

(68)

사실 악의적인 소책자에 대한 비판은 17세기에 흔했다. 소수의 엘리트 계급을 대상으로 했던 초창기 뉴스레터는 정보의 신뢰성에 근거한 평판으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당시 쏟아져 나오던 인쇄물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최신 뉴스에 중독된 사람도 많았지만, 그에 대한 불신 역시 만연했다. 인쇄물에 적힌 내용이라고 하면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일쑤였고, 여전히 손으로 쓴 편지가 근본적으로 더 믿을 만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77)

첫 사기 시도를 보란 듯이 성공시킨 프랭클린은 기분 좋게 그다음 행각을 이어나갔다. 1730년에는 자신이 필라델피아에서 간행하던 신문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한 마녀재판에 관한 기사를 완전히 지어내서 실었다. 실제로는 당시 미국에서 수십 년간 이렇게 할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 다음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으로 옮겨가서-또다시 가상의 인물이 되어 글을 쓰면서-불쌍한 타이탄 리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97)

보통 날조, 위조, 가장을 뜻하는 ‘faking’이라는 단어는 그 이전까지 주류 담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도둑, 사기꾼, 배우 등 일부 불미스러운 직업군에서 쓰이는 은어였을 뿐이다. 앞서 뱀 기사를 연구했던 언론사학자 터커에 따르면, 그 용어는 1880년대 말 바야흐로 새로운 직업군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언론인 업계에 상륙했다. 그런데 그 말뜻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저지르면 업계에서 매장당하는 죄악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몇몇 연구자들에 따르면 ‘faking’ 꾸며내기는 언론인의 필수능력으로 여겨졌다.

 

(189)

정치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큰 거짓말도 하고, 작은 거짓말도 하고, 온갖 크기의 거짓말을 다 한다. 직업 신뢰도를 조사해보면 정치인이 꼬박꼬박 꼴찌로 나온다. 부동산 중개업자와 심지어 (믿기지 않지만) 언론인보다도 더 낮게 나온다. ‘정치인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대다수의 정치인은 사실 생각만큼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게 대체 뭔 소린가 싶을 것이다. 특히 작금의…… (막연히 세상에 대고 손짓하며) 이런저런 사태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하지만 믿어주기 바란다. 정치인들의 말을 팩트체킹하는 게 내 직업니다. 사실 정치라는 직업 활동에서 거짓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흔히 가진 통념보다 아주, 아주 적다.

 

(191)

정치인은 일어나서 아침밥 먹기 전에 여섯 번은 거짓말할 기회가 있다. 그뿐 아니라 거짓말하기 좋은 무대와 잘 들어주는 청중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항상 듣기 좋거나 무대와 잘 들어주는 청중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항상 듣기 좋거나 화를 돋우는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곧 좋은 시대가 온다거나, 우리가 고생하는 게 누군가의 탓이라거나, 세상은 복잡하거나 애매하지 않고 흑과 백으로 시원하게 가를 수 있다거나 하는 말들 말이다. (방금 얘기가 남의 얘기처럼 들리는 독자가 있다면, 본인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268-269)

그런 노력이 통한다는 믿음을, 그리고 그런 노력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선거에서 졌다고 세상은 진실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며 자포자기하는 태도는 그리 어른스럽다고 하기 어렵다. 인터넷은 개소리 생산 공장이고 아무도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는 생각도 역시 바람직하진 않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살펴봤지만,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하는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루머의 난무, 신생 통신 기술에 대한 집단 공황, 가짜 뉴스에 대한 공포, 정보의 홍수에 대한 두려움, 전부 여러 세기 동안 있었던 현상이다. 과거에도 잘 넘겨냈고, 이번에는 잘 넘겨낼 수 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하고 자포자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가짜 뉴스담론의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믿는다는 점이 아니라, 진짜 뉴스도 믿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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