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번영하고 발전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바로 그러한 계급 사이의 불균형이 날카롭게 의식되었다. 혁명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으키지 않는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이 무시되고 멸시당한다고 느낄 때 모순된 제도를 타도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킨다. 바르나브(Antoine Barnave)가 열렬한 혁명가가 된 동기는,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을 때 클레르몽 통네르라는 귀족에게 자기들의 좌석을 내주어야 했던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부르주아들이 품고 있었던 불평불만과 자존심의 훼손이 그들로 하여금 앙시랭레짐을 미워하게 하고 그것을 없애버리는 혁명으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52-53)

루이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사람이었다. ‘사람 좋은사람이라는 개념에는 유능하다든가 흑백이 분명하다든가 의지가 꿋꿋하다든가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혹은 믿음직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뜻은 들어 있지 않다. 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디로 보나 호인형 남자였다.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고 특히 열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취미를 취미 삼아 즐기는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무에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루이는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 그는 국왕 참의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논의되면 곧 피곤해져서 회의석상에서도 졸곤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무슨 유익한 일을 과단성 있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책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75)

파리의 공기는 날로 험악해졌다. 국민회의 결의해도 불구하고 왕이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빵값은 매일같이 폭등하고 있었다. 파리의 빈민은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빵집을 습격할 기세였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의 파리 시민 65만 중 10만이 갖가지 형태의 빈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거지이거나 거지에 가까운 가난뱅이들이었다. 이 최하층 빈민이 아니라도 파리 시민은 대부분 극소수의 부자 말고는 곡가의 앙등을 견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파리 시민은 곡가 앙등의 원인이 불황이나 흉작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일부 부유층의 사재기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반사회적인 인간들이야말로 왕을 지지하고 국민의회를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108)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지 2 2개월 사이에 프랑스 국민은 새 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새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6월 이후 3개월 사이에 갑자기 분노와 불만이 쌓였다. 지금까지 왕당파를 노려보던 프랑스 민중의 눈은 혁명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신한 푀양파로 돌려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와 불만은 막 제정된 결함투성이의 헌법을 그대로 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 헌법을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새로 만들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앞으로 1년이면 족하였다.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은 계속 민중의 힘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


(128)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파리는 본래 행정구역이 60구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0 5월에 48개의 섹시옹(section)으로 개편되었다. 섹이옹마다 1800명 정도의 능동 시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자들이 시 코뮌을 구성하는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8 10일 사건을 계기로 각 섹시옹이, 특히 노동자들의 섹시옹이 그들의 코뮌 대표자들을 수동 시민으로 교체하여 코뮌의 능동 시민을 압도하게 되었다. 수동 시민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압력에 의하여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차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새 국회인 국민공회 소집을 가결하였으므로 코뮌의 불법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합법성의 기분은 이미 개정하기로 선포한 낡은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새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헌법의 원리에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회의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회의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4)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공회는 연설문을 인쇄하여 전국 코뮌에 배포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그 실수란, 그가 비난한 의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인 만큼 그의 비난에 대하여 뭔가 양심이 찔리는 데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비난에 대하여 뭔가 양심이 찔리는 데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비난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위협을 느꼈다. 만일 로베스피에르가 비난의 대상자들 이름을 밝혔더라면 위협을 느낀 자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반대파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위기의식을 더욱 격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무서웠다. 그가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협을 느낀 자들은 온건한 평원파 의원들을 회유하여 다음 날 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칠 계획을 세웠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회의 과반수 획득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선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실수였다.


(179)

따라서 자코뱅의 세 번째 전통은 참 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평등주의적 민주의의이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자코뱅이 제정한 1793년 헌법의 제5조는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인민 전체에게도, 인민 각자에게도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 수호의 최후 수단으로서의 민중 봉기를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코뱅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29)

나폴레옹이 왕이 아니라 황제간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229-230)

그는 교황 피우스 7세에게 제관의 대관(戴冠)을 교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피우스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교회 앞에 무릎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주재하기 위하여 파리로 향하였다. 1804 12 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대관식은 교황이 제관을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씌어주려는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나폴레옹은 관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일반 관중 쪽으로 돌아서서 제 손으로 관을 제 머리에 위에 얹었다. 그의 제관은 다른 어느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라는 것을 온 세상에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자기 손으로 황비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나폴레옹의 제위는 이중으로 성별되었다. 하나는 국민투표의 인민의 소리에 의하여 또 하나는 종교의식의 신의 소리에 의하여. 피우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하나밖에 실현된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1806 1 1일부터 옛 역서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의 종결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58)

나폴레옹 제국은 족벌 제국이었다. 황제의 형제들과 친척 및 부장들을 위성국가의 통치자로 봉하였다. 그러한 그가 1810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합병하였다. 루이가 네덜란드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의 성패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모든 정책은 대륙봉쇄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안 지역들을 프랑스에 합병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고, 심지어 교황령이나 일리리아 지방까지도 무리하게 합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영국해에 접해 있는 가장 중요한 네덜란드에서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봉쇄의 운명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305)

샤를도 형 루이처럼 67세의 홀아비였으나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활동적이고 정렬적이고 명쾌한 성격만이 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사상도 매우 달랐다. 샤를은 왕당파의 두목으로서 헌장을 우습게 여기고,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장난으로 믿고,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이제 왕권신수설을 부정한 헌장을 준수해야 하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헌장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정치의 군주로서의 임무에 성실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329-330)

그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선진 산업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을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나타난 빈부의 격차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줄이긴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는데, 이를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운동을 사회주의운동이라 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은 갖가지 이론과 형태로 19세기 선진 산업국가들의 역사를 색칠한다. 특히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그렇다.


(341)

이제 국민은 공화정을 확정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431-432)

파리 코뮌 기간 중 벌어진 공전의 참변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 문화와 현대 문명의 중심지 파리에서 어떻게 하여 그런 끔찍하고 야만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코뮌 직후부터 거기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학의 생명은 해석에 있다고 하지만 파리 코뮌에 대한 해석만큼 오늘날까지 극심한 대립을 보이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파리 코뮌의 해석이 처음부터 유달리 현저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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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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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근에 미국에 사는 교포 작가들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일이 자주 있단다. 얼마 전에 새로 알게 된 미국 작가 이창래 님의 책들도 우리나라에 꾸준히 번역 출간되었더구나. 아빠는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많은 작품들을 쓰셨고,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었대. 이창래 님은 서울에 태어나신 이후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구나. 그래서 이창래 님의 소설들은 우리나라와 관련된 소설들을 주로 쓰셨고,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작품은 많은 상들을 수상했다고 하는구나. 나중에 이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아빠가 너희들에게 이야기 해줄 책은 가장 최근작인 <타국에서의 일 년>이라는 작품이란다. 이번 작품은 우리나라 색깔을 거의 뺀 작품으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지은이 이창래 님의 <타국에서의 일 년>뿐만 아니라 이전 작품들에 대한 호평이 이어져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책을 펼쳐서 그런지, 아빠는 썩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단다. 누군가에게 추천까지는 못하겠더구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책은 취향이 읽는 이마다 다르니까

 

1.

책이 7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이긴 한데, 스토리 라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어. 그럼 최대한 요점만 뽑아서 이야기를 해볼게.

틸러라는 20대 초반의 남자가 있었어.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2.5%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어. 하지만 겉모습은 완전 백인이었단다. 그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떠나고 줄곧 아버지와 둘이 지냈어.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단다. 아버지와 아들의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엄마의 부재가 늘 틸러를 그늘지게 만들었단다.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틸러와 사이 좋게 지냈기 때문에 틸러는 엄마와 추억을 가끔씩 꺼내곤 했단다.

틸러는 현재 30대 밸이라는 여자와 밸의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지내고 있단다. 그렇다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어. 틸러와 밸이 나이차가 많이 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연인 사이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았단다. 그들은 거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했단다. 그 이유는 밸의 고발로 남편이 도망 중이었고 그로 인해 증인 보호를 받고 있었거든. 생필품을 살 때만 잠깐 나갔다가 오곤 했어. 빅터 주니어도 학교에 가지 않고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했는데, 틸러도 빅터 주니어를 가르치곤 했단다.

틸러가 밸이 함께 지내기 약 일 년 전에 틸러는 퐁이라는 중국계 사업가를 만나게 된단다. 틸러가 골프 캐디 아르바이트를 할 때 퐁을 만났는데, 퐁은 틸러를 좋게 봐서 자신이 하는 사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어. 이제 막 청년에 들어선, 거칠 것이 없는 틸러는 퐁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그 이후 틸러는 퐁을 따라 하와이, 중국 등 외국 경험을 하게 된단다. 이 소설은 틸러와 밸의 현재 지내는 내용과 틸러와 퐁이 과거에 지냈던 일들을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해준단다. 읽다 보니 틸러가 나이 많은 밸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밸로부터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단다. 그리고 살갑지 않은 아버지와 관계를 퐁으로부터 보완을 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어. 만난 지 얼마 안되었지만 퐁에게 많이 의지하고 신뢰를 했거든.

퐁도 아픈 과거가 있었단다. 1966년 중국문화대혁명 당시 예술가였던 퐁의 부모님들은 박해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어. 고아가 된 퐁은 어떤 시골 마을에 배정을 받아 자라게 되었는데 그리 행복한 어린 시절은 아니었어.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사업가가 된 것이라고 했어. 퐁도 부모님에 대한 애정 결핍, 가족에 대한 애정 결핍을 틸러에게 찾으려고 했으려나. 주요 등장인물인 틸러, , 퐁 모두 외로움을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 같았단다.

 

2.

밸의 아들 빅터 주니어가 고작 여덟 살뿐인데 요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빅터 주니어는 요리 동영상을 한번 보고 나면 곧바로 그 요리를 바로 만들었단다. 맛도 엄청 좋았어. 집에서 갇혀 지내던 빅터 주니어는 새로운 재미를 알고 이것저것 요리를 했고, 틸러와 밸은 빅터 주니어를 위해 요리 준비를 해주었어. 빅터 주니어의 요리 솜씨가 우연히 마을에 소문이 나면서, 위험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를 넓혀가게 되었어. 밸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틸러는 자신들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했단다.

손님들도 초대하여 저녁도 함께 먹었는데, 틸러는 무척 민감해 있었고 그로 인해 다른 손님들과 트러블도 있었어. 밸과도 마찰이 빚어져서 밸은 혼자 집을 나가기도 했어. 틸러는 밸을 걱정하다가도 어린 빅터 주니어를 보살펴야 하는 책임감이 있었어. 그리고 빅터 주니어도 자신처럼 엄아 없이 자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빅터 주니어에게 더욱 잘해주고 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단다. 다행히 얼마 안가 밸이 다시 집에 돌아왔어.

….

, 이번에 틸러의 지난 일년 동안 퐁과 있었던 이야기를 해줄게. 틸러는 퐁이 함께 해외 출장을 가자고 해서, 호놀룰루와 중국 선전에 함께 와서 퐁의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동업자들과 만나게 되었단다. 줄곧 외롭게 지내던 틸러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을 거야. 퐁은 그곳에서 자무로 만든 건강음료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단다. 자무라는 것을 처음 들어봐서 찾아봤더니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생산되는 전통 의학 및 허브 음료라고 하는구나. 퐁의 친척들과 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자꾸 어머니와 추억이 떠오르고 부재에 대한 아픔이 느껴졌단다. 아무리 즐거워도 다른 이들로부터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이란다.

퐁이 잠시 미국에 다녀온다고 했고 틸러는 퐁 없이 선전에서 지내게 되는데 약속했던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 중요한 건 퐁이 거금의 사업자금을 가지고 갔다는 거지.. 퐁이 계속 오지 않게 되자, 퐁에게 투자금을 댔던 이들이 틸러를 감금하고 구타당하기도 했단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그 길에서 밸과 빅터주니어를 만나게 된단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이 틸러를 성장시켰을까? 소설의 흐름은 성장소설처럼 보이지만, 아빠 생각에 틸러는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여전히 엄마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이 많은 밸을 만난 것으로 보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한 편으로 밸과 빅터 주니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보면, 그 전과 달리 책임감도 생기고, 빅터 주니어를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않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어. 하기야 청춘의 성장이 눈에 확 뜨이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설이 무적 길긴 하지만 아빠는 큰 감흥은 받지 못했단다. 지은이 이창래 님의 이전 소설들은 어떤지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내가 이 위대하다는 나라 어디에 사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책의 끝 문장: 눈을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준비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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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정말로 저는 떠나야 돼요. 제가 여기 남아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자동인형인 줄 아세요? 감정 없는 기계처럼 보이나요? 내 입에 문 빵 조각을 빼앗기고 내 컵에 담긴 생명수가 엎질러지는 걸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기고 작다고 해서, 영혼도 마음도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잘못 생각하셨어요! 나도 당신처럼 영혼을 갖고 있어요. 당신과 똑같이 마음이란 걸 갖고 있어요! 하느님이 나에게 미모를 선물하시고 부유함을 허락하셨다면, 내가 지금 당신을 떠나는 게 힘든 것처럼, 당신도 나를 떠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나는 관습이나 전통이나 죽어 없어질 육신을 매개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하는 거예요. 우리 둘 다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치에 동등하게 서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동등하니까요!”

 

(37-38)

한동안은 아마 지금과 같으시겠죠. 아주 잠깐 동안요. 그 후에는 냉정해지실 거예요. 그러다 변덕스러워지시겠죠. 그러다 엄해지실 테고, 저는 나리의 마음에 들려고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 많이 익숙해지시면 어쩌면 다시 저를 좋아하게 되시겠지요. 절 사랑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실 거라는 말이에요. 나리의 사랑은 6개월이나 그 이전에 거품이 되어 사라질 거예요. 남들이 쓴 책을 보니, 남편의 열정은 아무리 오래 지속돼 봐야 그 정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친구와 동료로서는 저의 친애하는 주인께서도 저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121)

이제 어떤 상황인지 알겠지. 그렇지? 청춘과 한창 시절의 반을 말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보내고, 반을 쓸쓸한 고독 속에서 보내고 난 뒤에 처음으로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을 찾아낸 거요. 당신을 찾은 거요. 당신은 나와 꼭 맞는, 보다 나은 나의 인격이자 나의 선한 천사요. 나는 당신에게 강한 애정으로 묶여 있소. 당신은 선량하고 재능 있고 사랑스러워. 내 가슴엔 뜨겁고 엄숙한 정열이 있소. 그게 당신에게로 기울어져, 나의 중심과 생명의 샘으로 당신을 끌어들이고, 나의 존재로 당신을 감싸지. 순순하고 강한 불길로 타오르며, 당신과 나를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소 이것을 느끼고 알았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거요. 나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고 말하는 건 공허한 조롱이오. 그녀가 끔찍한 악마일 뿐이라는 것은 당신도 확인했잖소. 내가 당신을 속이려 한 것은 잘못이었소. 하지만 당신의 성격에 존재하는 완고함이 두려웠소. 편견이 미리 뿌리를 내릴까 봐 두려웠소. 위험한 고백을 하기 전에 당신을 안전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소. 겁쟁이 같은 짓이었어. 지금처럼 당신의 고결한 마름과 아량에 먼저 호소했어야 했는데, 고통스런 내 삶을 솔직하게 열어 보였어야 했소. 내가 얼마나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삶에 굶주리고 목말로 했는지를 당신에게 설명했어야 했소. 나의 결의가 아니라(이 단어로는 약해) 내가 성실하게 지극히 사랑하고 그 보답으로 성실하게 지극히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 저항할 수 없는 나의 천성을 먼저 보여 주었어야 했소. 그 후에 내 정절의 서약을 받아 달라고 청하고, 당신의 서약을 나에게 달라고 청했어야 했소. 제인…… 이제 나에게 서약해 주시오.”

 

(191)

외롭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 눈에 보이는 골짜기 굽이에, 나무에 반쯤 가려진 교회와 사제관을 제외하고는 건물을 하나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저 멀리 끝에 부유한 올리버 씨와 그의 딸이 살고 있는 베일 저택의 지붕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가리고, 돌로 된 문설주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곧 나의 작은 마당과 그 너머 풀밭을 가르는 쪽문을 밀어 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리버스 씨의 포인터인 늙은 개 카를로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세인트 존은 팔짱을 끼고 거기에 기대 서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언짢아 보이는 얼굴로 근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들어오겠느냐고 물었다.

 

(207)

그가 새 책 한 권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시집이었다. 현대 문학의 황금기였던 그 시절의 운 좋은 독자들이 자주 볼 수 있었던 진정한 작품 중의 하나였다. 슬픈 일이다! 이 시대의 독자들은 그때만큼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운 내시길! 여기서 비난이나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시는 죽지 않았고 천재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물욕의 신이 아무리 힘을 뻗친다 해도 이런 것들을 속박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시와 천재는 언젠가 그 생명과 존재와 자유와 힘을 다시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하늘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강력한 천사들이요! 더러운 영혼이 승리하고 약한 영혼이 파멸에 눈물 흐릴 때, 그들은 미소 짓는다. 시가 파괴되었다고? 천재가 추방되었다고? 아니다! 범부들이여, 그렇지 않다. 질투심으로 그런 생각에 이끌리지 마라. 아니다, 시와 천재는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권력을 쥐고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어디에나 퍼지는 그들의 신성한 힘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비천한 지옥에 남겨질 것이다.

 

(334)

나는 이제 결혼한 지 10년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대단히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내 생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만큼 남편에게 가까웠던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만큼 절대적으로 그의 뼈 중의 벼요, 살 중의 살이었던 여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에드워드와 아무리 오래도록 같이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각자 가슴에서 뛰는 심장 박동에 싫증 내지 않듯이, 그도 나와 함께 있을 때 싫증이라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다.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혼자 있을 때처럼 자유로운 동시에 같이할 때처럼 즐겁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오래도록 이야기한다. 우리의 얘기는 서로의 생각을 좀 더 생생하게 귀로 전해 준다. 나는 온전히 그에게 신뢰를 보내고, 그는 온전히 나에게 신뢰를 바친다. 우리는 성격적으로 매우 잘 맞고 그래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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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 시대를 앞서간 민족혁명의 선각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23
강영심 지음 / 역사공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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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독립운동가에 관한 책 한 권을 소개할게. 신규식이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도 잘 모르고 있던 분인데, 몇 년 전 김종훈, 김혜주, 정교진, 최한솔 님의 <임정로그 4000Km>라는 책에서 알게 분이란다. 짧게 소개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분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인터넷서점에게 신규식 님에 관한 책이 있나 검색했었단다.

많지 않은 책 중에 아빠가 고른 책이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줄 강영심 님의 <신규식, 시대를 앞서간 민족혁명의 선각자>라는 책이란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읽는 것이 아빠 나름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그런 활동이라고 생각한단다. 더 많은 분들에 관해 공부하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 자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책을 읽지는 못하는구나. , 그럼 신규식 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

 

1.

신규식 님은 1880 2 22일 충청북도 문의군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그곳은 산동 신씨 문중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어. 아빠가 존경하는 신채호 님도 이곳 출신이라고 하는구나. 신규식 님의 선조들도 이야기하면서, 신숙주의 후손이라고 소개를 해주었어. 신숙주가 집현전의 유능한 학자로만 소개를 했는데, 나중에 변절한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지은이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단다. 변절자의 대명사 신숙주의 후손이긴 하지만 신규식은 그의 길을 따르지 않은 위인이라고 소개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신규식 님의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와 중추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는구나. 신규식 님은 학생 때 벌써 을미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대. 1896년에는 조정완이라는 분과 결혼을 하였고, 개화 공부를 하기 위해 상경을 하였다고 하는구나. 한어학교라는 외국어 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했어. 먼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고, 만민공동회도 주도했단다.

이 일로 한어학교에서 퇴학당한 것 같다는구나. 이후 대한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서 보병참위에 입관하게 되었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신규식 님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단다. 다행히 가족들이 발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오른쪽 시신경이 마비되어 한쪽으로 눈동자가 치우치게 되었대. 신규식 님의 호가 예관(睨觀)인데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흘겨본다라는 뜻의 예관(睨觀)으로 지은 거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점점 쓰러져가는 모래성 같은 상황이었단다. 일본의 무력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어 신규식 님도 보직을 내려놓아야 했단다. 나라가 힘을 가지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계몽운동을 시작했단다. 산업발달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업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공부하기도 하고, 산동 신씨 문중에서 만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혼>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었어. 그 책은 그의 사후 정식 출간되었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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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46)

신규식이 순국한 지 1년 후에 그의 역사관이 담긴 한국통사 <한국혼>이 출간되었다. 중국학자 후린이 다음과 같은 글을 서문에 적어 신규식의 독립투쟁의 산증인이 되었다. “한국 문제는 일본 군벌이 일본 국민에게 남긴 하나의 큰 빚이다. 이 빚은 언젠가 청산되어야 한다. 폴란드가 독립하고 체코가 새롭게 부흥하였으며 인도의 이집트 역시 기필코 독립할 것이다. 한국 문제 또한 오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신규식 선생 그는 비록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혁명가도 그를 기려 계속해 영웅들 일어나 마음모아 배를 저어가니 나라의 혼은 살아날 것이고 선생 또한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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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은 나철을 만나 대종교 활동을 시작했단다. 당시 나철의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바탕 역할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신규식은 또다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나철이 발견하여 구해주었단다. 경술국치 이후 나철의 대종교는 계속 탄압을 받게 되어,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을 이어나갔어. 신규식은 이때 상하이행을 선택했단다.

신규식은 재산을 처분한 후 상하이로 향했단다. 그가 상하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한 곳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것을 생각하면 신규식의 판단력은 뛰어났다고 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일찍 상하이에 정착하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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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규식은 1911년경 한국인은 거의 없고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주목하지 않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그곳에 한국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민족혁명의 앞길을 연 선각자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가를 불러모으고 조국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중국이나 미국의 학교에 보내고 혹은 직접 세운 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가면서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구축하여 마침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았던 독립운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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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하이에 아직 우리 동포들이 많지 않다 보니 신규식은 중국혁명지사들과 교류하였고 중국 신해혁명에도 참여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중국의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중국으로 혼란에 빠지게 돼. 신규식도 위안스카이가 감시하는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행동 범위가 조심스러웠대. 하지만 여전히 중국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계속 중국 혁명 활동을 이어나갔어. 신규식은 동재사라는 조직을 결성했어. 본부는 상하이에 두고, 베이징과 만주에 지사도 둔 비교적 큰 조직이었단다. 이 조직은 300여 명까지 커졌어. 1913년 독립운동을 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을 만들었단다. 박은식, 신채호도 이 일에 동참을 했어. 그렇게 모인 청년들은 중국과 미국, 프랑스 등에 유학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중국의 군사학교에 학생들을 보내 군사교육도 받을 수 있게 했어. 이 활동으로 통해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그들은 향후 항일운동을 주도하게 된단다.

….

1914년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신규식을 비롯한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단다. 세계1차대전에 일본도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독일의 적군이 되었어.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생각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는 독일과 중국을 지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단다. 하지만 세계1차대전은 독일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입지가 더 강화되었지.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들의 잔치였고, 그 잔치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만들어진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은 법무청장을 맡게 되었어. 좋은 뜻에서 시작한 임시정부는 얼마 못 가 내부 갈등이 벌어졌고, 어떻게든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규식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도 했단다. 이승만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지지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신규식은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에 이어 외교부총장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어. 광둥특사로 중국의 쑨웜과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해 지지를 받아내고 원조 약속도 받아냈단다. 태평양 회의에 파견 나가서는 영국, 프랑스 영사들과 만나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어.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던 신규식에게 심장병과 신경쇠약이라는 병마가 찾아왔어. 두 번의 자살 시도와 오랜 타지에서의 생활이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병이 걸린 후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하다가 1922 9 25정부! 정부!”라는 말을 남기고 삶을 마감했단다.

40년 남짓한 짧은 그의 삶이었지만, 무엇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사신 분인 것 같구나. 그가 살았던 40여 년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 중에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불운이었지만, 그의 조선 독립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밑거름이 되어 해방도 되고 이후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단다.

요즘 친일파들이 다시 극성인데, 그럴수록 진행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셨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찾아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책을 통해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신규식 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독립기념관 제6전시관 내 임시정부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20여 명의 밀랍상이 전시되어 있다.

책의 끝 문장: 신규식의 선구적인 삶의 자취에는 우리는 정의와 인류애를 추구하며 사람답게 사는 스승의 모습을,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지도자상을 만날 수 있다.



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중국 지역 독립운동 조직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감행하려한 점에서 분산된 독립운동역량을 단일화한 선구적 무장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견인차가 되었던 것과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 P100

"우리나라를 욕심낸 나라를 귀국이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화에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출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귀국의 자구책 가운데 상책이다. 발칸문제 때문에 유럽전쟁이 일어났듯이 지금 귀국의 지위가 바로 서방의 발칸사정과 똑같다. 때문에 동아전쟁이 일단 발동되면 귀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참여할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는다. 본국 문제가 토의될 것을 핵망하며 귀 정부를 재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귀국을 위한 자구책이며 양국을 위한 일이다." - P129

1922년 8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날, 신규식은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섰다. 살이 홀쭉히 빠진 그의 양볼에는 깊게 주름이 잡혔다. 그는 백지장처럼 하얗고 움푹 팬 눈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요.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 없소"라는 자책하는 듯한 독백을 남기곤 입을 다물었다. - P141

황커치앙에게 보낸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선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고,
이어 약속을 어긴 이웃 일본을 죽이고,
남은 힘으로 뭇 요물들을 물리쳐.
태평양으로 내던진 뒤 피먼지를 씻노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진보적인 태도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살해된 중국의 근대 민주 혁명가를 애도하기 위해 쓴 수많은 시속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 P157

신규식의 삶은 인간사랑, 민족사랑으로 가득찬 가장 인간적인 민족지도자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의 시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바람을 담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풍류를 알고 인생을 노래하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소유한 인사였다. 하지만 민족적 국가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한말, 식민지시대를 살아야 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민족문제 해결이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시대 인식을 실제 삶으로 구현해 냈던 믿음직한 선현 중 하나가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했던 민족역사 속의 선현들처럼 닮아 민족자결, 민족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우리의 구명부는 오직 ‘민족자결’이라는 한가지 소망을 가슴에 새기며 결코 앞에 나서지 않고 통합의 울타리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해 낸 그럼 민족운동가였다. 그의 뒤를 이은 우리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반드시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일제시대 민족운동가 중 한사람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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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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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박완서 님의 책을 읽었단다. 박완서 님이 주로 활동하던 시절과 아빠가 책을 즐겨 읽기 시작한 시점과 시간 차이가 있어서 박완서 님의 책은 많이 읽지 않았어. 아빠 독서 기록을 찾아 보니 3권을 읽었더구나. 박완서 님은 1931년에 태어나셔서 비교적 늦은 1970, 불혹의 나이에 등단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 2011년 돌아가시기 전에 많은 작품들을 남기신 지난 세기 우리 나라 대표 여성 작가 중에 한 분이란다.

이번에 읽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부제로 박완서 짧은 소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단편 소설이면 단편 소설이지, 짧은 소설이라고 했을까? 책을 읽어보니 왜 그랬는지 알겠더구나. 정말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있단다. 400페이지 남짓에 48편이 실려 있으니 한 편 평균이 10페이지 남짓이구나. 1970년대에 주간지 등에 기고했던 소설들을 모은 책이라고 했어. 1970년대면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의 이야기들이구나. 그래서 약간은 생소함이 느껴지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시절이나 오늘날이나 사람 사는 것은 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앞표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아빠가 어렸을 때 안방 화장대에서 볼 수 있는 그 장면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란다. 큰 거울이 있는 앉은뱅이 화장대에 유선 전화기가 올려져 있고, 빗통이 있고, 거울 앞에는 결혼 사진이 세워져 있고 말이야. 그 당시 대부분의 집에 가면서 이런 스타일로 안방이 꾸며져 있었지. 옛 생각 물씬 나게 하는 그런 책표지구나. 책표지 뿐만 아니라 책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들도 옛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추억 힐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단다.

 

1.

48편의 이야기는 1970년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단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어. 그 당시에는 20대 후반만 되어도 노총각 노처녀 소리를 듣던 이야기도 있었고, 남녀 간의 결혼에 대한 갈등, 결혼의 조건을 두고 재는 주인공의 심리 등을 실제처럼 잘 지어냈더구나. 1970년대 집에 유선 전화를 하나씩 놓기 시작해서, 전화기에 대한 에피소드들도 실려 있었어. 그리고 1970년대부터 서울에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들어서서 그런지 아파트로 이사 가서 겪는 이야기들도 여럿 실려 있단다. 요즘도 교육비 때문에 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데 1970년대에도 교육비로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나 보구나. 그런 이야기들도 실려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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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여보, 당신 이까짓 아파트 하나 샀다고 우리가 무슨 갑부라도 된 줄 알아요. 내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게. 아직 멀었어요. 철이 사립 국민학교 치다꺼리도 치다꺼리지만, 철이라고 만날 국민학교만 다니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유 말도 말아요. 그뿐이면 또 좋게요. 과외 공부 안 시키우? 아이를 낳아놓기만 하면 뭘 해요. 사람 노릇을 시켜야지. 사람 노릇 시키려면 돈이 무진장 드는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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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경제가 계속 발전하던 시기이다 보니 사회도 빠르게 변했단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고유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간의 의견 차이를 다룬 이야기들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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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82)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도 해야지 입 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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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짧게 끝맺음을 하니 콩트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몇몇 이야기들은 유머가 담긴 이야기들도 많아서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단다. 그 중에 결혼을 앞둔 어떤 예비신랑이 예비신부로부터 궁합이 안 좋다면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듣고, 본인도 궁합을 보러 가서 무당한테 들은 이야기를 읽고는 쿡,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단다. 궁합의 유래가 이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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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286)

실례가 안 된다면 궁합을 보아드리기 전에 궁합의 유래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예로부터 궁합이란 원치 않는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다고 전해지죠. 그건 다 아는 얘기고 오늘날까지 궁합이란 게 소멸하지 않고 날로 발전해온 과정 역시 남녀 간에 있어선 거의 영혼의 문제인 일방적인 사랑의 소멸과, 거기 따른 편리한 거절의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게 나의 현장 체험인데요. 선생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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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단다. 아무래도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다 보니 체온 그대로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어. 책을 가만히 만져보면 36.5℃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단다. 너희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생소하고 낮 선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서 읽어야겠구나. 불과 50년 전 이야기인데, 우리나라가 너무 빨리 변한 것 같구나.

오늘은 이렇게 짧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상철은 자기가 일등 신랑감이라는 걸 너무 믿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 여자의 건강을 빌면서 손자가 결혼하는 걸 볼 때까지 살고 싶은 내 과욕을 줄여서라도 그 여자의 목숨에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문규는 그제서야 친구의 지난날의 그림의 미완성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 참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난날의 친구와, 지난날의 친구의 그림이 가슴에 저리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미완성을 완성시킬 수는 있어도 완성을 미완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명 있는 걸 생명 없이 할 순 있어도 이미 생명이 없어진 것에 생명을 줄 순 없는 것처럼. 문규는 친구의 완성된 그림을 갖고 싶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써 그와 친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귀부인의 장막을 뚫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쓸쓸하게 친구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을 나왔다. - P138

젊은이나 어린이들과의 이런 언어의 불통에는 편리하게도 세대차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어 열등감까지는 안 느껴도 된다. 그러나 우리 나이나 우리보다 얼마 젊지 않은 사람들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까지 해야 되지 이 아니 서글픈 노릇인가. 그런 못 알아들을 말 중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친구들이 흔히 쓰는, 그쪽의 관용어에다 토씨나 접속사만 우리말로 하는 경우는 대강 넘겨짚어 알아듣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물 건너온 티 좀 작작 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상당한 지식인이어서 유창하게 논리적인 우리말 중 못 알아들을 말이 섞이면 적어도그게 사람 이름인자, 사람이라면 음악간가 문학간가 과학잔가? 또는 실재하는 사람인가 작중 인물인가, 아니면 새로운 주의나 경향, 사조(思潮)의 이름인가쯤은 짐작할 수 있어야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못 읽었다는 식의 실수를 안 할 수가 있다. 또 상대방을 함부로 높이 평가해 그런 학구적 상상력만 동원할 것도 아니다. - P264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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