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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해줄 책은 이미리내
님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우연히 알라딘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책이고 귀가 얇은 아빠는 출판사의
광고성 책소개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단다. 미국의 대형 출판사와 선인세 계약을 맺는 등 여러 나라에서
출간이 확정되었다는 내용이 아빠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단다. 지은이 이미리내 님은 스스로 자신을 미국
교포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고 했는데, 아빠도 작가의 약력을 자세히 읽기 전까지는 미국 교포인 줄
알았어. 왜냐하면 이 책은 영어 원서가 있고, 번역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야. 최근에 외국에 있는 우리나라 교포들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일이 많아져서 이 책도
그런 책들 중에 하나인 줄 알았어. 그런데 책 앞에 한국어판 서문을 읽고 나서야 지은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렇다면 왜 한글이 아닌 영어로 소설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이유도 한국어판 서문에 나와 있었단다. 지은이 이미리내 님은 20살까지는 우리나라 일반 학교에 다녔고 20살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대.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남편이 홍콩으로 발령을 받아서 홍콩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하고 위해 대학원을 들어갔어. 홍콩이다 보니 영어로 가르치는 대학원을 들어간 것이고, 영어도 문예 창작을 공부하게 되어 소설도 영어로 쓰게 되었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는구나. 그렇게 영어로 쓰다 보니 우리나라보다 영미권에 먼저 소설이 소개가 되었고, 단편 소설로 상도 받았다는구나. 그리고 이번에 첫 장편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도 영어로 써서 영미권에 먼저 출간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제를 모으게 되자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하게 된 것이란다.
출판사의 광고성 책소개가 거창할수록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는데, 기대 이상이었단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꿰뚫은 삶을 산 한 여인의 이야기인데 무척 재미있었어. 일제
시대 우리의 아픈 역사도 담겨 있고, 이후 분단 국가의 아픈 역사도 담겨 있었단다. 이 소설을 영어로 쓰셔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외국에 소개했다는 점에도 지은이를 칭찬하고 싶구나. 한글이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쓰신 것도 잘 하셨네.
1.
그럼 지금부터 책 이야기를 해줄게. 황홀요양원에서 부고 담당으로 일하는 이새리는 흙을 먹는 괴짜 할머니, 묵미란
할머니를 알게 되었어. 묵미란 할머니는 새리에게 부고를 써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여덟 개의
단어로 이야기해 주었단다. 그런데 그 단어들이 예사로운 단어들이 아니었어.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한 할머니의 인생을 대표할 만한 단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 어떤 삶이길래 저런 단어들을 나열했을까? 궁금증이 확 늘어나더구나. 그런데 위 단어들은 여덟 개가 아니고 일곱 개였단다. 나머지 하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할 모양이구나. 어떤 사연인지 묵미란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하게 된단다. 책의 순서는 시간 순서가 약간 섞여 있는데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어.
나중에 시간 순서대로 짜맞추면서 이전에 읽은 부분의 궁금했던 떡밥들이 하나씩 수거되는 기분이었단다.
…
시작은 다섯 번째 인생, 1961년의 이야기란다. 참고로 다섯 번째 인생은 단편으로 먼저
출간되어 미국에서 무슨 상도 받았다고 했어. 다섯 번째 인생 1961년의
이야기는 처음 읽을 때는 어찌된 사연인지 궁금한 부분들이 많은데 다른 인생들을 읽다 보면 어떤 일이 있는지 이해가 간단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다섯 번째 이야기를 쭉 해볼게. 1961년 ‘나’는 임진강변 금파리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 여기서 ‘나’는 묵미란
할머니는 아니고 또 다른 화자란다. 그 동네에는 임진강변에 돌아다니는 미친 여자가 있었단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마을마다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하나둘 있는 것은 예사이던 시절이었어.
사람들은 그 여자를 처녀귀신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여자가 돌아다니면서 소리내는 것을 흉내내어 “야다다”라고
불렀단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를 ‘얄루’라고 불렀어. ‘얄루’도 그 여자가 흥얼거리는 말 중에 하나였거든. 주석으로 ‘얄루’는 압록강의
영어 발음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그 여자에게 동정심 또는
연민 또는 어쩌면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어. 어느 비 오는 날 ‘나’는 메기를 잡으러 갔다가 그만 지뢰를 밟고 정신을 잃었단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전쟁 때 뿌린 지뢰가 터지지 않고 있다가 비 오는 날이면 떠 내려와 사고가 나기도
했는데 ‘나’가 그만 그 지뢰를 밟은 거야. 정신을 잃었다가 깼다 잃었다가 했는데, 얄루가 자신을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미친 여자로 알려진 있던 얄루가 말이야.
병원에 한참 있다가 퇴원을 했는데
친구 ‘용’이 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어. 용의 형 ‘완’이 얄루를
찾아가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둘이 몸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얄루의 몸 속에서 권총이 나와서 완이 빼앗았고 도망가는 얄루를 향해 권총을 쐈는데
맞추지는 못하고 얄루는 그 길로 도망을 갔다고 했어. 그후 얄루의 행적은 모른다고 했어.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얄루가 가지고 있던 권총이 북한 권총이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미친 여자가 아니고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이었다는 거지. 미친 척 하면서 남한과 미군부대의 정보를 빼간
걸로 의심되는 상황. 서울에서 조사하러 내려왔지만 끝내 얄루는 찾지 못했단다. 이렇게 다섯 번째 인생 이야기가 끝이 났단다. 그 얄루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바로 다음 장을 넘길 수밖에 없구나.
…
첫 번째 인생. 1938년. 묵미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단다. 어린 시절이니 그냥 편이상 미란이라고 할게. 미란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평양 인근에서 살고 있었어. 미란의 아버지는 고래잡이를 하셔서 집에 없는 날이 많았는데
집에 있는 날이면 어머니를 패는 가정폭력범이었단다. 사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단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어. 딸도
감옥에 가게 될까 봐 빨리 결혼시킨다는 것이 지금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것이란다. 나중에 어머니의
어머니도 감옥에 가게 되고 두 분은 모두 감옥에서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아이들이 있으니 가정폭력범
남편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었어. 미란은 흙 먹는 버릇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좋아서 그런 거라고 했어. 아버지는 툭하면
어머니를 죽도록 팼는데 어느날은 너무 맞아서 어머니의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단다. 미란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독초를 캐와서 몰래 아버지의 음식에 넣고 외출을 했단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죽어 있었어. 어머니는 미란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 어머니는
땅을 깊이 타서 그곳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었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미란은 더 이상 흙을 먹지 않았단다.
2.
세 번째 인생 1950년. 미란은 전쟁 중에 엄마와 동생이랑 헤어졌단다. 엄마를 찾겠다고 남으로 피난을 왔어. 여자의 몸으로 혼자 다니면
안될 것 같아서 남장을 해서 돌아다녔는데, 체구가 작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라고 생각했어. 미란은 부산까지 내려왔단다. 미란은 어렸을 때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워서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미군부대에서 가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지. 통역 일을 하게 되었는데 미군부대 하우스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곳은
미군상대로 성접대를 하는 여자들이 있는 곳인데 그 여자들 대부분은 강제로 동원된 여자들이었어. 일제
시대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야. 미란은 화가 났어. 사실 미란도 일제 시대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했었거든. 누구보다
하우스에 있는 여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어. 미란은 하우스에서 알게 된 제니의 탈출을 돕기로 했어. 어느 날 미란은 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갔단다.
…
두 번째 인생은 1942년. 년도만 봐도 암울하고 아픈 시대로구나.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미란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단다. 많은 위안부들의 현재의 삶에 좌절하여 목숨을 끊기도 했지만 미란은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단다. 그리고 공격해온 미군들에 항복하여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할 수 있었어.
…
네 번째 인생은 1955년.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 미란은 평양으로 돌아왔단다. 위안부 시절 엄청 친한 친구 용말이라는
이가 있었어. 친한 것뿐만 아니라 미란과 용말은 서로 닮아서 자매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어떤 일본군은 둘을 헛갈리기도 했었어. 용말은 말하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 해서 다른 위안부들에게 인기도 좋았어.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서 미란도 용말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었단다. 용말은 위안부에 끌려오지 않으려고 빨리 결혼하려도 보니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남편은 마음씨 착한 남자였다고 했어. 하지만 세 달 밖에
못 살고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강제로 붙들려 위안부로 오게 되었다고 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용말은
병이 걸려 전장에서 죽고 말았단다.
전쟁이 끝난 미란은 갈 곳이
없어서 용말의 집으로 갔어. 용말의 남편 영민은 미란을 보고 당연히 용말이라고 생각했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여자인데 용말과 비슷한 용모에 세 달을 살다가 10년만에
봤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미란은 그렇게 영민과 함께 지내게 된단다. 영민은 지난 10년 간에 일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단다. 영민은 10년 만에 만났지만 아내의 미세한 차이를 눈치챘어. 눈에 확 뛰었던
점이 사라져 있었고, 더욱이 발 사이즈가 작아졌던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정체를 물어볼 수는 없었어. 지금 이 여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민은 아내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했단다.
3.
여섯 번째 인생 2005년. 갑자기 시간은 훌쩍 뛰어 세기가 바뀌어 2005년이 되었단다. 다섯 번째 인생이 1961년이었으니까 40년이 훌쩍 넘어섰네. 최선생이라는 사람과 박수사관의 신문.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최선생은
대남 경찰이었어. 최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란이었단다.
…
용말의 남편과 살고 있던 미란이
실수를 한 것이 있었어. 돈벌이를 위해 영어를 쓰게 되었는데, 영어를
너무 잘 하는 것을 의심 받아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어. 당국에서는 미란이 미군 부대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는 이력을 확인하고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하고 미란에게 제안을 했어. 스파이 일을 해달라고.. 미란이 거절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란은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스파이 일을 시작했단다. 그렇게 스파이, 그러니까
간첩 일을 하게 된 거야.
그러면 이제 처음에 이야기해
준 다섯 번째 인생에서 미친 여자인 척 하면서 미군 부대의 정보를 빼간 간첩이 누구인지 알겠지? 남편
영민의 누나가 기차사고로 죽고 나서 누나가 입양하여 키우던 아이 미희를 영민과 미란이 입양하여 키우기로 했단다.
그리고 압록강 근처 혜산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지냈어. 미란은 미희를 친딸처럼
잘 보살피며 잘 키웠어. 사실 미란은 위안부 시절 몸이 망가져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거든. 미희는 커가면서 미란의 영향으로 외국어를 잘 하게 되었고 외국어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미희도 스파이 일을 하게 되었어. 미희가 어쩌다가 엄마가
하는 일을 할게 되었는데 자신도 엄마처럼 스파이가 되고 싶다고 한 거야.
이런 과거가 있었던 것이란다. 미란은 이념과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어쩌다 보니 스파이가
되어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수사기관에서 신문을 받고 있었어. 미란을 신문하는 박수사관은 다른 간첩 명단을 달라고 했어. 미란은
그 명단을 다 줄 수 있으나 실명은 모른다고 했어. 한 명만 실명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도 전향하는데 도와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단다. 그 한 명
누군지 알겠지? 딸 최미희였어.
….
일곱 번째 인생 2006년. 에이드리언 루소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어. 루소는 프랑스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지내다가 중국의 새생명교회에 선교사 자격으로 가서
탈북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단다. 그곳에서 배성미라는 탈북자를 만났어. 배성미는 그 교회에 머물면서 루소 목사를 도와주며 생활하다가 둘은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아람이라는 아기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배성미는 쪽지 한 장만 남겨두고 사라졌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배성미라는 여자가 최미희일 거는
것은 짐작이 가지? 맞아, 배성미는 최미희였단다. 최미희는 공작원 교육을 받고 스파이가 되었단다. 배성미라는 가명으로
탈북자로 위장하고 루소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빼오는 임무를 맡게 된 거야. 그런데 루소가 미희에게 빠져서
사랑하게 되었고, 루소는 브로커에게 거금을 주고 남한에 데리고 와서 결혼까지 하고 딸 아람을 낳은 거야. 미희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와 접선을 했단다. 그런데 어느날 엄마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게 않을 때가 되었다면서 미희를 설득하기 시작했어. 자신이 먼저 자수를 하고 미희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겠다고 했단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어. 어느
날 갑자기 성미, 아니 미희는 루소에게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 동안 숨겼던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했단다.
….
이제 다시 첫 장면의 황홀요양원. 부고 작가 이새리와 묵미란 할머니. 미란은 자신의 딸과 사위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어. 새리는 속으로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어. 요양원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자신의 자식들이 외국에 살고 있어 바빠서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말이야. 요양원 사람들은 묵미란 할머니는 지금 뇌종양을 앓고 있어서 머리도 이상해져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흙도 먹는다고
했어. 그래도 새리는 묵미란 할머니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었어. 묵미란
할머니는 자신이 한 이야기들을 적은 일곱 권의 노트도 건네주었단다. 그런데 얼마 후 묵미란 할머니는
요양원을 탈출해서 근처 빈터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말았단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더욱이 그날은 딸 최미희와 사위가
찾아와서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 그 전에 모시러 올 수도 있었는데, 2006년 전향한 미희는 한 동안 숨어 지내야 했고 미국으로 건너 간 다음에도 합법적인 미국 시민이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이제서야 합법적인 미국 시민이 되어 엄마 미란을 데리러 온 것이었단다. 그러나 묵미란 할머니는 떠나기 싫었던 거야. 딸에게 부담되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자기답게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다. 뇌종양으로
남아 있는 삶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소설의 이야기상 그런 마무리가 나을 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래도 딸과 만났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이야기해줄
때면 편지가 길어지곤 하는데 오늘 편지가 참 많이 길어진 것 같구나.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이미리내 작가님의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지는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 생각이 처음 떠오른 건 내가 이혼을 겪고 있는
동안이었다.
책의 끝 문장: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혀는 마치 사탕에 입힌 새콤달콤한
가루처럼 굵은 흙에 한 겹 덮여 있었다.
"말이란 건 그냥 말이 아니란다, 아가. 말은 우리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 이상이야.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절대 일방통행이 아니야." 나는 엄마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보다다 더 똑똑한 엄마를 기대할 수 없었다. "말을 부드러운 무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아가. 네가 아버지가 모르는 말을 썼을 때 아버지가 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알겠니?" - P65
어느 날 너는 우리에게 자기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냐고 물었다. "금주는 할아버지가 둘인데, 어째서 난 영이야?" 네가 투덜댔다. 나는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우리를 새로운 질문의 무한루프로 빨아들였다. "돌아가신 게 뭐야?" 그건 죽은 걸 뜻한단다.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더 이상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란다. 하늘나라로 가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야. "하늘나라에서는 뭘 해?" 누구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단다, 미희야. "왜?" - P182
나는 우리 결혼의 첫 번째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기 위해 내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언제부터 우리 자신을 우리가 딱하게 여겼던 다른 평범한 부부들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을까. 예를 들어 식당에서 서로의 얼굴이 아닌 서로의 어깨 너머 빈 공간을 쳐다보는 부부. 이제 싸우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관심이 고갈된 부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부. 오로지 자식 때문에 함께 사는 부부처럼 말이다. - P232
미희는 마치 납치범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이 아이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살아서 성장하게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좋고 내게 당신이 원하는 다른 어떤 비극을 줘도 좋아요. 내 다리를 앗아 가도 좋고, 내 눈을 앗아 가도 좋고, 심지어 내가 간 뒤에 이 아이가 정상적으로 살 거라고 보장만 해준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요. 깨어 있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작은 핏덩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아느니 차라리 영원히 잠들겠어요. - P317
갓 태어난 아람이는 하나의 블랙홀이었고 우리는 그 블랙홀에 기꺼이 빨려 들어갔다. 울음과 단속적인 짧은 잠과 수시로 폭발하는 식욕으로 우리의 잠을 앗아 가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완벽한 폭풍이었다. 동시에 아람이는 우리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경이로움으로 채웠다. 그 아이는 우리가 지금은 잊은 어린 시절의 놀라운 경험들-우리가 이 세상의 신참자로서 주변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어떻게 모든 평범한 물건이나 사람이 우리의 무한한 호기심에 불을 붙였는지-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은 그토록 정신이 고양되는 경험이다. - P333
"내가 전에 갈망한 적 없던 흙을 갈망하게 되면 그냥 먹는 거지. 내 몸을 새것처럼 보존해서 110세까지 살려고 애쓸 생각은 없어." 묵 할머니가 킬킬거렸다. 그녀는 카르페디엠은 안 그래도 충분히 무모한 10대들에게 설파할 것이 아니라고, 그녀처럼 쪼그라든 늙은 몸들을 위한 경구라고 말했다. "오늘을 즐겨라. 그야말로 내일이 없을지도 모르잖나." 그녀가 속삭이고는 또 다시 킬킬거렸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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