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2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한강> 다시 읽기 2권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가 또 독서편지가 밀리기 시작해서, 바로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1권은 1950년대 후반에 이야기가 시작되어 4.19 혁명까지의 이야기를 했잖니.

이승만 독재가 끝난 대한민국이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가 이루어지고 살만한 국가가 될 거라고 기대를 하던 시기에서 2권의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고등학생인 유일표는 친구 이상재와 함께 또 다들 친구 허진의 집을 찾아갔단다. 허진이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허진의 집을 찾아가보니 허진은 판자집에서 할머니와 동생들과 힘들게 살고 있었어. 암에 걸린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집안살림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얼마 전에 그만 자살하셨단다. 그래서 허진이 가장으로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어. 더욱 안타까운 것은 허진의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6.25 전쟁 중에 돌아가시고 말았어. 일제 시대 때 투철한 독립운동을 하셨어도 그 때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6.25 전쟁 때 돌아가셔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보상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대. ,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냐. 친일파들은 다시 요직을 잡고 떵떵거리는데, 독립 운동한 후손들은 하루 먹기 힘들어 학교까지 그만두어야 하다니

유일표와 친구들은 허진의 사연을 듣고 조금이라도 허진을 돕기 위해 학교의 교실들을 돌아다니면서 허진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부의금을 모았단다. 적지만 그렇게 모인 돈을 허진에게 전달했어. 그리고 유일표는 강숙자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허진의 일자리까지 소개를 받아 허진은 취직을 하게 되었단다. 허진은 유일표의 도움으로 취직하여 일을 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의는 줄어들지 않았어. 낮에 힘들게 일하고 밤에는 혼자 독학을 했단다. 허진의 동생 허미경도 유일민이 강숙자에게 부탁을 해서 강숙자의 친구 박영자의 아버지 박부길의 회사에 경리로 일하게 되었단다.

....

 

1.

4.19 혁명 이후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어. 이승만의 추종자였던 자유당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무소속으로 출마를 했단다. 남천장학사의 강기수도 그렇게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남천장학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선거 유세에 이용하였고, 온갖 불법으로 선거 운동을 했단다. 선거 유세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해야 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자금줄이 걸려 있는 것이라 참가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갈등을 하기도 했단다. 강기수는 무소속이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단다. 1권에서 억울하게 예편하고 민주당에 들어가 정치를 시작했던 한인권도 간발의 차이긴 하지만 당선이 되었단다.

유일민은 어느날 경찰에 연행되어 며칠 동안 조사를 받고 나왔단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단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유일민은 경찰에 잡혀가 며칠씩 조사를 받곤 했단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고, 남한에 내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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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제발 내려오지 마세요. 만나서 당하는 비극보다 만나지 않고 그냥 그리워하며 사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북에서는 왜 자꾸 사람들을 내려보내는지 모르겠어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선가요? 그건 남쪽을 너무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6.25를 겪고 난 남쪽 사람들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를 너무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나라에서 감시하고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6.25를 통해 북쪽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며 공산당을 싫어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들을 내려보내 무슨 효과를 보지는 겁니까. 여기 있는 가족들만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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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유일민은 과외 자리도 잘렸어. 고향 선배인 김선오와 이규백에게 도움을 청해 보려고 했지만, 그들도 유일민을 외면하였어. 과외 학생인 임호태의 누나 임채옥만 유일민을 찾아와서 옷도 사주고 챙겨주었어. 유일민의 임채옥의 이런 대시를 불편해하여 몇 번이고 떨쳐내려고 했지만, 임채옥은 유일민 바라기였단다.

4.19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권민심을 잘 헤아려서 국가 재건에 힘을 쓰면 좋았겠지만, 권력을 처음 잡아봐서 그런지 무척 서툴렀단다. 당내 신파와 구파 사이의 갈등도 컸어. 국민들은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는데 민주당 내에서는 싸움만 하고 있으니 민주당은 빠르게 민심을 잃어갔단다. 4.19 이후 여러 가지 법 개정도 이루어졌는데, 사법 시험을 대학교 졸업해야만 볼 수 있고, 30세 이하만 볼 수 있게 바뀌었어. 남천장학사 학생들에게는 치명적인 법이었단다. 대학교 다니면서 시험을 못보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만 30세 이전에 합격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

영악한 강기수는 남천장학사의 지원을 축소했단다. 그래서 김선오는 부족해진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를 해야 했어. 강숙자를 통해서 안면이 있던 안경자의 소개로 안경자의 동생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야기를 하자면 안경자의 아버지는 광주에서 병원을 크게 하는 지역 유지였어. 이규백도 남천장학사의 줄어든 지원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했어. 이규백은 형이 죽었기 때문에 형수와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돈이 더 필요했거든. 어쩔 수 없이 논을 팔기도 했단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논을 강기수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샀던 것이란다. 강기수는 그렇게 땅을 계속 늘리고 있었던 거야. 그런 강기수의 모습에 이규백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돈 때문에 남천장학사를 떠날 수는 없었단다. 자신의 이런 신세를 탓할 수밖에..

1권에서도 나온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 천두만과 나삼득에 관한 이야기도 해줄게. 그들은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지만,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했어. 누군가의 제안으로 석탄을 몰래 홈쳐서 파는 일을 하기로 했단다. 위험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밥벌이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석탄 더미가 무너지는 사고가 났어. 천두만은 간신히 빠져 나왔지만, 나삼득은 그만 석탄 더미에 묻혀서 죽고 말았단다. 다른 이들은 도망갔지만 천두만은 나삼득을 살려보겠다고 그 자리에 있다가 경찰에 잡혀서 감옥살이도 하게 되었어. 천두만은 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출소했단다. 그 사이에 있던 일자리도 잃어버렸지만 그보다도 나삼득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무척 컸어. 그는 움막집을 팔아서 나삼득의 장남을 공장에 취직시키는 뒷돈을 쓰면서 마음의 짐을 좀 덜었단다. 그리고 자신은 서울을 떠나 인천 부두에서 일하기 위해 인천으로 떠났단다.

유일민이 대학생이 된 다음 선배들을 통해서 통일 운동에 참여하라는 반강제 반설득이 이어졌단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유일민은 참여할 수 없었어. 자신의 아버지 이력을 이야기할 수는 없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단다.

 

2.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워서 알겠지만, 1960 4.19 혁명 이후 혼란이 계속 되어가다가 1961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잖니. <한강> 2권에서도 그 사건이 일어났단다. 어느날 갑자기 장도영과 박정희가 이끈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단다. 하룻밤 사이에 군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발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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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정권 인수와 국회 해산을 선언함과 아울러 장면 내각 장차관 전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주한미국 대리대사와 미8군 사령관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부인하고 장면 정권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지지를 표명하고, 쌀값은 당일로 치솟아 혁명위에서는 매점매석하는 미곡상들을 극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동하고, 장면 총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 행방이 묘연하고, 혁명위에서는 서울시내 각 경찰서장들을 중위 대위로 임명하고, 검열을 당한 신문들은 부분부분 먹통이 된 채 찍혀 나오고, 혁명 수행상 필요 시에는 체포, 구금, 수색을 영장 없이 집행한다는 포고령이 잇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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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이 일어나면서 군인들은 사회를 정화를 한다면서 용공분자들을 조사한다고 했는데, 이것 때문에 유일민은 다시 잡혀 들어갔단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북에 계시다는 이유 때문이야.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형이 사라져서 유일표는 형을 찾으려고 했지만 허탕이었고 며칠 째 형은 돌아오지 않았어. 유일민은 무려 두 달 만에 풀려났단다. 한 학기가 그냥 다 날라갔어. 학교에서도 유일민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유일표는 형이 그렇게 잡혀갔다가 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대학생이 되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어. 유일표는 정치학과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이력으로 정치 일을 못할 것이 뻔했어. 무슨 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졌단다.

이번에는 유일민의 친구 서동철도 잡혀 들어갔는데, 군인들은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깡패들도 모두 감옥에 넣는다고 해서 서동철도 잡혀 들어간 거야. 서동철은 자신을 봐주던 사장님의 도움으로 비교적 편한 탄광지대 국토건설 사업근로대라는 곳에서 1년간 복무하게 되었단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들어졌는데,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게 했고 중고생들의 삭발령이 내려져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단다.

….

이규백의 형이 사라 태풍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잖아. 이규백의 형수 해남댁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어머니와 힘들게 살아가 있었어. 그런데 황춘길이라는 자가 해남댁을 짝사랑하고 있었어. 황춘길은 홀로 있던 해남댁을 겁탈했어. 그리고는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도망가자고 했단다. 처음에는 황춘길을 괘씸하다고 생각했는데, 황춘길이 자신을 무척 위해주고 아이들도 당연히 함께 가서 산다고 이야기해서 황춘길의 뜻에 점점 동의하게 되었단다.

….

5.16 쿠데타와 비상계엄으로 국회는 해산되었단다. 국회의원이었던 한인곤도 피해를 보았단다. 한인곤의 매제 양봉석은 대위로 군대에 있었는데, 5.16 쿠데타 이후 예편하고, 중앙정보부에 일하게 되었다고 하자 한인곤은 반대를 했단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는 막강한 권력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양심의 소유자라면 일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지.. 한인곤이 반대하자 동생 한정임은 그런 오빠를 반대했단다. 돈도 많이 벌고 권력의 중심인 중앙정보부 자리를 왜 반대하냐고 말이야. 5.16 쿠데타 이후 군정부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면서 부정한 일들을 바로 고치는데 앞장섰어. 그렇다 보니 군정부에 대한 여론이 좋아졌단다. 하지만 그 쿠데타는 불법적으로 정권을 차지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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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15)

그건 당연히 박수를 받을 만큼 잘한 일이오. 조직폭력을 일삼아 시민생활을 불안하게 한 깡패들을 소탕애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국민의 기본의무를 기피해 개인의 이득만 추구한 파렴치한 자들을 색출해내 국가의 기강을 바로세우는 건 백 번 잘한 일이오. 그런데 그런 겉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 국민들이, 아니 이성적인 대학생들이 쿠데타정권의 부당성까지 망각하게 된다면 그건 큰 문제요, 무슨 말인고 하면, 지금 군인들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 그 저변에는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부당함을 하루빨리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네 능력을 과시하고 민심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그거요. 그들이 참으로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그런 중요한 일들을 빨리 끝내고 군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하고, 그땐 온 국민이 박수를 치고, 박정희에게는 중장 진급이 아니라 국민의 이름으로 별 다섯, 원수를 달아줘도 아까울 것 없소. 허나, 지금은 감시의 시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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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시간 내에 다시 정권을 이양해야 했단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어. 5.16 군사쿠데타로 잡은 불법 정권이 20년 가까이 이어질 거라고는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구나. 오늘날 비상계엄과 내란이 대통령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야….

….

여기까지가 <한강> 2권의 이야기란다. 글이긴 하지만 지은이 조정래 님께서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셔서 그 당시의 우리나라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어.

오늘은 그럼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공덕동의 언덕바지 비탈동네는 성북동 골짜기의 판자촌들보다 한결 더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웠다.

책의 끝 문장: 그러나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정동진은 그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란 마술 같은 면이 있고, 특히 기회 포착이 중대합니다. 국민이나 대중들은 순진한 관객이구요. 마술사가 연달아 실수하면 관객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특별법을 지연시킨 건 분명 잘못이고, 그걸 당장 만들 수는 없고, 국민들 마음은 급하고, 그렇게라도 임시방편을 하지 않으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큰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한 의원님이나 저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서 따낸 당선인데, 일도 못 해보고 밀려날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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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인의 집이라 긴장하며 잘하지도 못하는 서투른 일본말로 첫인사를 했다. 나의 인사가 끝나자, 하타케야마 부부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사죄한다라고 인사를 했다. 처음 받는 인사 치고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의 가족 중에는 강제 연행을 당한 사람도 일본군 위안부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젊은 부부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이미지로 생생히 남아 있다.

 

(13-14)

2011년 발생한 3.11대지진도 아베 수상과 극우 보수세력의 등장을 초래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준비되지 못한 제1차 아베 내각의 실패로 자민당이 장기집권의 바닥을 드러냈고, 2009년 결국 야당 민주당에 정권교체를 허용해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취임했다. 민주당은 도로 및 댐 건설을 중심으로 한 자민당의 국책사업을 비판하면서 콘크리트에서 인간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또한 관료만능주의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의미 없는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시민 및 관료가 함께 토론해서 예산을 결정하는 참여형 정책결정 과정을 시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의 주재와 재정 확보 실패로 비현실적인 정책에 머무르며 언론의 비판이 계속되었다. 결국 준비되지 못했던 민주당 집권세력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여 일본 국민들의 머릿속에 낙인이 찍혔다. 일본사회에서는 3.11 대지진과 민주당의 무능이 동시에 떠오를 정도다.

 

(17)

일본 극우보수세력의 실체는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가 청산되지 못한 한국사회에도 그 잔영이 남아 있다. 이른바 친일 부일세력으로 불렸던 이들은 한국사회의 엘리트로 변모해 해방 후 우리 사회의 기본 골격을 만들고 유지시켜왔다. 한국사회는 한국전쟁 후 반공 및 한미일 안전보장의 틀 속에서 이른바 안보경제의 의존관계를 맺으며 일본사회와 공존해왔기 때문에 친일 부일세력들의 실체를 해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장기간에 걸쳐 군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꾸고 과거사 청산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국가폭력의 실체를 파악해가는 과정 속에서 청산되지 않은 일본 식민지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48)

2012년부터 등장한 일본회의를 중심으로 극우보수세력이 부상한 상황은 동아시아가 지금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냉전이 붕괴된 이후 약 30년간 중국이 강자로 대두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이 약화되었지요. 그러나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약화되었지만 군사적 역할은 훨씬 커졌고, 각국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실패하고 극우보수세력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등 아시아는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북한의 화해 움직임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본이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보수세력이 그간 북한 위협론과 한반도 위기론을 주장하면서 일본 내에 자신들의 정치 기반을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80-81)

우리가 일제 청산을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결국 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권세를 누리던 자들이 그대로 살아남았지요. 그리고 그들이 대한민국 군대를 운영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국이 군을 해체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육성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조선인 장교들을 그대로 쓴 겁니다. 그들이 위안대를 만들었고, 그 규모와 위치를 <6.25사변 후방전사>에 자랑스럽게 실적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 아니 박정희식 군국주의에 빠진 그 식구들을 반대하는 겁니다.

 

(100)

이토 히로부미는 쇼카손주쿠에서 공부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습니다. 한미한 가문의 하급 사무라이로, 처음에는 존왕양이적 입장에서 각종 테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죠. 그러다가 1863년 조슈번에서 선발한 영국 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외국 생활을 하며 영국의 선진문물에 압도되어 존왕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근본적인 사상 전환을 하게 됩니다. 존왕양이파는 원래 한국의 위정척사파와 크게 바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위정척사파들이 내 목은 잘라도 상투는 못 자른다고 버틸 때 이토 등 존왕양이파들은 서구 문물을 접하고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112)

박정희가 1945년 이전에 물리적으로 한 친일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박정희는 친일파가 되기 위해 긴 기간 준비운동만 한 셈입니다. 대구사범학교부터 일본 육사까지 문무를 겸비해 제국에서 출세하기 위한 발을 내디디마자 일본제국에 패망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박정희를 원조 친일파라고 하는 이유는 집권한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일본 극우파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일본이 만주국을 경영했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의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세지마 류조고, 그 배경에 황도파의 사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23-124)

갑신정변(1884)의 주역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입니다. 이 사람들 친일파일까요? , 친일파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친일은 지금 이야기하는 친일과 아주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봐야 합니다. 그때는 아직 일본의 침략적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전이었습니다. 구한말 우리가 보는 일본에는 분명 두 가지 성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모델로서의 일본입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를 침략해오는 일본이지요. 적어도 1894년 갑오농민전쟁 이후에는 침략성이 아주 확고하게 드러났지만, 그 전에는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많이 배우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박영효나 김옥균이 취한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을 이완용, 송병준과 같이 취급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199)

그런데 일본에서 외국인 학교를 각종학교로 취급하는 것은 조선학교 때문입니다. 외국인 학교를 정규학교로 규정하는 순간 조선학교에도 보조금을 지급하고 각종 제도로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조선학교만 각종학교로 취급하면 너무나 노골적인 차별 정책이 되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아예 모든 외국인 학교를 정규학교로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입니다.

 

(265)

물론 다른 길도 있습니다. 한일 시민사회가 진정한 교류를 해낸다면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을 뛰어넘어 진정한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일관계에서 시민사회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고 시간도 걸리겠지만 한국사회에는 충분한 저력이 있습니다. 지난 촛불혁명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272)

한국의 입장에서는 한일관계를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협력하지 못하면 동아시아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역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지요. 물론 한국에는 북한이라는 동족이 있지만 이미 70년이나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장래 북한과 공존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당장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지요. 또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는 큰 나라일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일본을 포기하면,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대립 사이에 끼어서 한반도는 영원히 분단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싫든 좋든 실리적으로 이웃인 일본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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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49)

곽은 학생이 박정희 정권 때 무엇을 해보았냐고 묻는 건 아니며, 늦춰 잡아 전두환, 그러니까 1980년대쯤을 상상했다고 가정했다. 그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이 있다면 하나, ‘태어나는 일이었다. 곽은 자기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지, 학생이 근현대사 연표 학습을 게을리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지루한 수업 분위기가 전환되길 기대하며 분유나 기저귀 같은 단어가 포함된 유머로 대답했다. 주름 개선 화장품 2종을 추가해 피부관리 루틴을 체계화했다. 가끔 혼자 재치 있는 대답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냐고 묻지 그래요?’ 미시사를 포함한 세 권의 역사서를 읽고 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 저서는 고등학교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 조로(早老)가 나았다.

 

(204)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296)

공항이란 무섭다. 들어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면 안 되는 곳과 들어가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들고 가도 되는 것과 들고 가면 안 되는 것과 들고 가야 하는 것도 정해져 있다. 그렇게나 엄격하면서 정작 중대한 사정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 작은 딱지를 붙인 내 가방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내가 세상 저편이 갈 때까지 가방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내 손에 다시 쥐어질 수 있을까. 내 운명도 가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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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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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앞뒤 가리지 않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가끔은 쌍욕까지 거침없이 내뿜는 도올 김용옥 님이라 더욱 좋다. 도울 김용옥 님의 근간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을 읽었단다. 김용옥 님은 거침없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고, 해박한 지식을 강연이라는 형식으로 전파해주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단다. 아빠도 그런 이유로 김용옥 님을 좋아하고, 그의 책들을 즐겨 읽고 한단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책도 자신의 지식 수준으로 거침없이 쓰다 보니, 지식 수준이 낮은 아빠 같은 사람들은 읽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김용옥 님의 책을 읽기 전에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작해야 한단다.

김용옥 님의 책들은 주로 고전이나 사상서에 대한 책들을 많이 쓰셨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일제시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에 관한 책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유명한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는 오래 전에 김삼웅 님이 쓰신 <만해 한용운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한용운의 삶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면서도 일제 탄압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은 또렷이 기억나는구나.

이 책은 도올 김용옥 스타일의 한용운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단다. 거침없이 자유롭게 쓰셨는데, 읽고 나니 그렇게 쓰신 것이 다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 그리고 왜 하필 이 시점에 만해 한용운일까? 싶었는데 서문 대신 쓰신 서시(序詩)를 읽어보니 알겠더구나.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작년 10월이니 윤석열의 내란 시도가 있기 두 달 전이란다. 이미 남아 있는 3년은 너무 길다고 큰소리가 나오던 시절이고, 정부가 왜 이렇게 친일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던 시절이란다. 김용옥 님도 친일파 정부가 답답했는지 작심하고 비판했어. 그리고 일제 시대 일제와 친일파에게 항거했던 한용운 님을 다시 공부하면서 오늘날의 친일파를 몰아내자는 의도도 있었던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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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찌하여 이 땅의 권력을 쥔 자들이

또 다시 일본에게

이 땅을 팔아먹고

일본의 이익에

우리 삶을 예속시키며

일본의 군대가

이 땅에 상륙하는 것을

도우려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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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러분! 친일파들을 물리칩시다.

현해탄 건너 그들의

고향으로 보냅시다.

밀정들을 동해 건너

그들의 조국으로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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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해 한용운은 안타깝게도 해방을 얼마 앞 둔 1944년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김용옥 님이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하면서, 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가 학예회 때 춘 승무부터 이야기했는지 좀 의아했단다. 자신의 친구가 춘 승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지훈 시인이 쓴 시 <승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어. 승무라는 것이 스님이 추는 춤이다 보니, <승무>가 시())라서 스님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님과 연결이 되나 싶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의 삶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청록파 시인으로 알고 있던 조지훈 시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좋긴 했지만, 한용운에 관한 책에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가 길어지네 하면서도 김용옥 님의 글쓰기는 역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서 마음에 드네, 이러면서 계속 읽어나갔단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서 조지훈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비교 설명도 해주었어. 어느 책에서 볼 수 없는 두 시인의 비교…. 예전에 김수영 시인에 대한 책을 읽어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김용옥 님이 설명해주니 더욱 명확해졌고, 조지훈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지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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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인간됨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후학이지만, 김수영이 조지훈보다 더 진보적이라든가, 조지훈이 김수영보다 더 보수적인 삶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도무지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수영과 지운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지훈이 한 살 먼저 태어났고,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점에 비명에 갔다) 지훈이야말로 역사의 굽이마다 정확한 행적을 남겼다. 지훈은 지조를 목숨보다 아끼는 선비였고 수영은 자유롭기에 좀 퇴폐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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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님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을 했다는데 그때 조지훈 시인은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교수를 하고 계셨대. 하지만 과도 다르고 위치도 달라서 조지훈 시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는구나. 김용옥 님은 나중에 다시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입학했는데, 그때는 조지훈 시인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라고 했어. 그런 조지훈 시인이 죽기 전에 하시던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용운 작품들을 모아서 출간하려던 작업이었단다. 드디어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가 밝혀졌구나.

1958년 조지훈은 남정 박광 선생과 함께 고려대 애제자들과 함께 한용운 전집 출간 작업을 시작했단다. 그 작업은 10년 넘게 이어지고 1973년 전집 6권으로 출간하게 되었대. 그 사이에 조지훈 시인과 박광 님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한용운 전집 출간할 때 그들의 이름을 빠져 있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과 박광의 공이 가장 크다면서, 그들의 이름을 뺀 행위에 대해 김용옥 님은 크게 비판을 하였단다. 한용옥 시인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지훈 시인에 의해 한용운 전집이 출간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다른 변절자들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말이야. 그리고 불교계의 자존심도 지켜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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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우리는 만해를 통해서 비로소, <독립 선언서>를 짓고도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달라고 비굴하게 요청한 육당이나, 창씨개명에 앞장서서 본인의 이름을 카야마 미쯔로오로 바꾸고, 황민화 운동,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며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독려한 춘원이아, 타쯔시로 시즈오로 이름을 바꾸고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미당 서정주(1915~2000) 등등의 민족지도자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만해의 시가 오늘까지 살아있지 아니하면, 일본 식민지강점시대의 암울한 저류를 흐르던 우리민족의 정의감이 그 좌표를 잃고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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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전투력에 트라우마가 있던 일본은 다시 쳐들어와 왔을 때는 그들부터 포섭하려고 했다는구나. 그래서 일제 시대 때 불교에 관대했고 불교계에서도 그런 정책들을 좋게 봤었나 봐. 예를 들어 스님들은 한양 도성 내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풀어주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끝까지 호국불교의 자존심을 지키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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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

20세기 일제강점이라는 사건은 메이지시대의 권력다툼의 분규 속에서 태동한 사쯔마 계열의 정한론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결국 알고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재현일 수도 있다. 그 망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남김없이 섬멸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 땅에서 최후 일 척까지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임란의 의병의 활약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승병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들은 철학이 있었고 호국불교의 사명이 있었고, 무술에 능한 자가 많았고, 조직적 전투력이 있었다. 명령계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기네 불교와는 달리 대처가 아닌 비구의 순결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역()이 말하는 바, 이간(易簡)스러웠다는 것이다. 일본침략자들에게 승병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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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해 한용운 님의 아홉 살 때 신동들이 뗀다고 하는 사서삼경을 읽은 것이 아니고 <서상기>라고 하는 찐하면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애정소설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것들이 그의 감성 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만해 한용운은 두 번의 출가 끝에 1905 1 26일 백담사에서 정식 스님이 되었다고 했어. 그 당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라는 사회진화학으로 분류되는 책을 읽었는데, 그것이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백담사에서 스님 생활을 시작한 한용운은 이후 금강산과 거봉산에서 수련을 하였고, 일본 유학도 갔으나 중도 하차하고 돌아오셔서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조선불교유신론> 1910년에 쓰셨단다. 이 책에서 대처승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어 논란도 있었으나 불교를 널리 퍼지게 하는 방안으로 제시했던 것이고 그 책의 핵심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 1914년에는 <불교대전>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해 팔만대장경을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하는구나. 1915년에는 다시 백담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2년 전 화재로 올 수 없어서 오세암으로 가셨대.

….

1918 1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중국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 소식을 알고 여운형은 중국에 가서 크레인을 만났단다.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승전국이 지배한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논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대. 그래도 크레인은 어떤 형식으로 도움은 주겠다고 했어.

이 말에 여운형은 신한청년단 멤버들을 소집하여 탄원서를 작성했다는구나. 그 탄원서를 크레인에게 전달하였고, 윌슨 대통령에까지 전달되었대. 하지만 승전국들도 결국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소국의 독립 보장은 패전국에 지배당한 국가들에 제한되어 있었어. 그런 사실을 모른 우리나라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던 거야. 한용운도 불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일로 약 3년간 투옥되었어. (1919.3.1~1921.12.22)

감옥에서 <조선도립의 서>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은 독립신문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서 서울 선학원에 잠시 있다가 다시 오세암으로 가셨대. 1925 6 7 <십현담 주해>라는 책을 쓰고, 1925 8 29일 드디어 그 유명한 <님의 침묵> 시집을 출간하셨어. <님의 침묵>에는 모두 88편의 시가 실려 있단다. 88편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가 시집의 제목으로 뽑은 <님의 침묵>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많은 시에서 당신등의 말이 나오는데 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했어. 이 시를 쓴 시기하며 한용운이 그 전까지 걸었던 삶의 행적을 보았을 때 은 우리나라라는 것을 누구나 알 텐데, 고의로 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국소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구나. 친일파를 뉴라이트라고 포장해서 부르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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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님은 갔습니다. ~~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첫 구절을 읽고 더욱이 1925년 만해가 이 시를 쓰던 시점에서 읽고, 3.1만세혁명을 떠올리지 아니하는 자는 천치바보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만을 여기다 덧붙이면서 순수문학을 운운하는 자도 무뎌빠진 감상론자, 아니면 뉴라이트의 근대화론의 정당화를 위해 애쓰는 자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물론 만해의 시가 위대하고 옹혼한 까닭은 개인의 사랑의 테마와 조국의 운명 혹은 코스믹한 해탈의 테마가 항상 병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님은 갔습니다의 최초의 인상이나 최종적 의미는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환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리라 믿고 목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민중적 좌절감의 절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 ~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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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 속의 첫 키스라는 말은 3.1만세혁명이라고 이해하면 되고, ‘새로운 슬픔은 역사의 단절과 민족혼의 좌절로 해석하면 된다고 했어.

지은이 김용옥 님은 한용운 님의 시를 극찬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시들도 평가를 했었어. 최초의 신체시하고 하여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는 형편 없는 시라고 하면서 그런 형편 없는 시에 최초의 신체시라고 타이틀을 붙여주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강하게 비판했어.,

그리고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 역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써서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타고르 시인김용옥 님은 그런 타고르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단다. 인도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유학을 했고, 영어도 유창하여 자신의 시를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대. 그렇게 영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시인이라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 같아. 당시 인도는 영구의 지배를 받는 어려운 시절이었고, 간디는 타고르에게 인도 독립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거절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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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그러나 타고르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다. 간디의 아이디어를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했고, 영국으로부터의 인도의 독립만이 장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립보다 인도인의 정신적 개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간디를 독립이 곧 인도인의 정신적 해방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의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근대적 가치를 배우고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타고르는 인도인의 기질에 배어있는 선민주의나 비합리성,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아직도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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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타고르가 우리나라에 대한 시를 어떻게 쓰게 된 것인가. 타고르가 일본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에 맞춰 우리나라 동아일보 기자가 일본에 찾아가 우리나라에도 방문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대. 하지만 거절 당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짧게 시 한 편을 적어서 준 것이 바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 상태에서 안전빵으로 쓴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이 타고르 시인을 이렇게 평가하니 정이 뚝 떨어지면서 타고르의 시를 읽고 싶은 생각도 뚝 떨어지는구나. 집에 언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사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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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타고르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벵골의 구석에서 자라난 그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정감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한 타고르에게 민족의 구원을 기대는 예언자적 시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타고르는 근원적으로 픽션이다. 그가 쓴 등불시는 타고르와 간디의 사상적 대결을 연상시킨다. 타고르는 모르는 상대로부터 시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최대한 부딪힘 없이, 최대한 안전빵의 시를 쓴 것이다. 그러한 허구가 조선역사 정취의 1세기를 장악하였다면 우리의 한 세기 그 자체가 허구가 아니겠는가? 내 말이 너무도 혹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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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시가 타고르의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었나 봐. 지은이 김용옥 님은 그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주시면서 만해 한용운의 시가 더 탁월하다면서 대학원과 초딩 만큼 차이가 난다고 했어.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집의 71번째 시의 제목은 <타골의 시를 읽고>라고 있다는 하는구나. 그 시를 통해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는 현실 떠나 이상을 노래한다고 평가를 했다는구나. 그 시를 읽어 보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를 좋게 평가한 것 같지는 않구나. 아래는 오타처럼 보이는 것이 몇 개 있는데, 오타가 아니라 초판본에 실려 있는 시 그대로 발췌해서 그런 것이란다. 옛날에는 저렇게 쓰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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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374)

<타골의 시 <GARDENISTO>를 읽고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최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모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랴고 떨어진 꼿을 줏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줏은 꼿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꼿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읍니다.

눈물을 떨어진 꼿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서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모리 좋다 하야도 백골의 입설에 입맞출 수는 없읍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서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서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겄읍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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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의 이야기란다. 이번 책은 제법 어렵지 않고 잘 읽히는 것 같아 더 좋았단다.^^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 시대가 만해를 부릅니다.

책의 끝 문장: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논의를 리얼하고 신실하게 만드는 것은 만해의 삶의 지조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혁명에 투신하였고, 지고의 선의 경지를 증득하였고, 시인으로서 고매한 언어를 구사하였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변절, 배신의 족적만 남겨도 위에 그린 삼각형들은 다 부서져 버린다. 멀리 산속으로 도망가 숨어 살면서 절개를 지키는 것은 혹 가할지 모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살면서 호통을 치면서 당당한 지조와 타협 없는 절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그 경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훈은 만해의 절개가 그의 삶의 업적을 빛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진주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서상기>에서는 최초의 무산지몽(巫山之夢)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남자중심의 기술이 아니라 여자의 주체적인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에게 "따멕히는" 존재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보다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다. 앵앵은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 장생을 시험한다. 그의 상사병이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위태로운 증세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이불과 베개를 먼저 보내고 장생이 누워있는 서상(西廂, 큰 건물의 서쪽 회랑)으로 나아간다. 앵앵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모든 것을 비우는 듯한 극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 자태는 곡패 "원화령(元和令)"의 운을 밟는 시로써 표현되고 있다. - P176

조선불교유신의 개혁을 꿈꾸고, 또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8만대장경을 재편집하는 웅장한 작업을 하였어도 그것은 문자의 장난이었지, 자기가 추구하던 진정한 존재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했다. 존재의 자유는 생활의 자유로 표현되지만, 생활의 자유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가 달성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 자유는 스스로를 속박한 자박(自縛)의 상태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해방의 소리를 해풍 속에 쓸려가 떨어지는 잡물의 추락성 속에서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객수(客愁)의 어설픈 고뇌가 사라지고 나 만해는 삼천계를 향하여 할파하노라! 백설(白雪)과 도화(桃花)의 편편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주의 실상일 때는 시공의 분별심을 초월하는 것이다. 복사꽃의 붉음이 흩날리는 백설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야말로 객수(客愁)가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리라. 그것은 존재의 자유인 동시에 기나긴 방황을 거친 자기 삶의 족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 P236

조선왕조 전체를 개관할 때, 한글이 언문이라 하여 비하된 듯하나 그 실용적 가치는 꾸준히 증가되었으며, 세종의 창제동기를 충분히 실현되어 갔다고 볼 수가 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글에 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방대한 한글자료들이 방치된 채 연구되고 있지 아니한 것이 현금의 정황이다. 백성이 권력기관에 항의하는 괘서들이 한글로 쓰인 예가 많았다 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한글의 사용은 급증하였다고 한다. 왜놈들이 읽지 못하는 암호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광해군 이후로 왕후들이 청정(聽政)이 많았던 까닭에, 한글정치라고 말할 정도로 국정문서에 한글이 많이 등장하였다. (김일근 <언간(諺簡)의 연구(硏究)>, 건국대학교출판부, p.330)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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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게 바로 독재자들이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팔십 넘은 나이에 이승만도 나 아니면 이 나라는 안 된다는 했거든.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게 바로 경제문제야. 박 통이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그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다. 앞으로 계속 더 잘살게 되려면 박 통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 아주 그럴듯한 감언이설이고, 판단력이 약하거나 가난한 일부 국민들은 속아넘어 가기 딱 좋은 괴변이야. 그러나,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박 통이 아니라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 그러면서도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형편없는 작업환경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 피땀을 흘리며 일해 온 국민들의 노력과 힘이라는 것을 이번 데모에서 동시에 일깨워야 해. 국민 여러분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진실을 밝혀 박 정권이 유포해 온 최면에서 국민들을 깨어나게 하는 게 우리들의 또다른 임무야. 국민들이 그 최면에서 깨어나는 건 바로 박 정권이 안주하고 있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거니까.”

 

(73)

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 1 8 17부터 시행한다.

 

(75)

맞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오. 그러나 그런 인식을 하는 건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한 문제요. 참 불행하게도, 박 정권은 그동안 경제발전을 자기네 업적으로 선전하는 데 크게 성공했고, 현명하지 못한 대중들은 정치선전에 최면되면서 대중들의 약점인 영웅주의에 빠져들어 박정희를 경제를 일으킨 영웅으로 믿고 받들게 되었소. 대중들이 그렇게 된 데는 그동안 그 영웅주의를 깨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야당, 언론, 지식인들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소. 다시 말하면 정치, 사회적 투쟁이란 폭넓은 대중들이 호응과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데, 오늘의 현실에서 그게 과연 얼마나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오.”

 

(134)

이상재는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허미경의 모습을 지우려고 애썼다. 허미경은 그렇게 짓밟히고 얼마나 받았을까. 양품점 차린 돈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결혼을 단념한 눈치였는데,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 놓은 보상이 그 양품점이라면 말이 되는가. 그 두 배를 받았다 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강제로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놓은 것은 범죄다. 분명 사회적 범죄다. 그런데 그게 다 돈으로 해결이 된다. 도대체 그자가 지금까지 망쳐온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망쳐놓을까. 그런데도 그자는 돈의 힘으로 죽는 날까지 건재할 것이다. , 돈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에 진실이란 있는 것인가…… 내일 아침 신문들을 본 민다리의 오빠들은 어찌 될까. 자기네 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끝내 체념하고 그자가 조금 낮게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재벌은 거대한 산이다. 아니, 산맥이다. 돈으로 덮이지 않을 사회악은 없고, 그들은 그 무기로 완전무장되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잉태해 낸 공룡이고 악마들이다. 노동 착취를 일삼으면서 그 따위 짓들을 하는 한 그들은 분명 사회의 악마들이다.

 

(221-222)

물론 싫어하지요.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착취만 당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GNP 80불에서 시작한 경제개발이 15년이 된 지금 600불이 넘었어요. 이렇게 경제가 발전한 건 누구 때문인가요? 박 통 때문인가요? 기업주들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지요. 그건 그동안 모든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과 형편없이 적은 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뼛골 빠지게 일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기업주들은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정당한 보수를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들 배만 더 불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정부는 또 아직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자본을 더 키워야 한다면서 기업들 편만 들고 있어요.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돼요.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공장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싸워야 해요.

 

(287-288)

유일민은 곰탕집으로 걸어가며, 술이나마 없었다면 이 세상을 어찌 살았으랴, 하고 생각했다. 술은 세상사의 괴로움이나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망각제나 도피처 역할은 해주었다. 특히 악몽을 피할 수 있는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감정을 토해내는 것도 괴로움과 고통이 덜어지는 것 같은 착각의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묘해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끼리 술잔을 나무며 속 깊은 하소연을 하고 나면,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은 다소 편해지고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위인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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