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작가 헤벨이 주는 정답은 이렇다. 천사가 당신에게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줄 경우 답해야 할 첫째 소원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 둘째 소원은 무얼 빌어야 할지 물어서 알게 된 그 소원을 비는 것. 마지막으로 빌어야 할 세 번째 소원이 중요한데, 바로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35)

세상의 일은 다 어렵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면서, 이를테면 내가 죽지 못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 일인걸요하면서 성실히 임하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일의 성과도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다를 겁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지금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40-41)

아이들은 아이들일 때 놀아야 한다. 놀아야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고 주위를 살피며 세상 이치도 깨닫고, 무엇보다 심심해서 이것저것 해보는 가운데 진정한 창의력이, 생각이 자란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이 때 아이노릇 잘 해야 학생 때 학생노릇 잘 하고 어른 때 어른 노릇 잘 하는 건 자명한 이치이다. 아이 때는 공부하고, 어른 되어서는 남의 눈치나 보며 그저 놀고 싶어 하고,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되겠는가.

 

(57-58)

공부하느라 고생이 막심한 어미를 일찍부터 보아온 탓에 어려서부터 공부는 절대로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좌우명 삼고 산 것 같다. 그러나 자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도 끝도 없이 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점에서는 어미로부터 그리 멀리 가지도 않은 것 같다. 온 식구가 그렇다. 다들 가끔씩 만나면 매우 반가워하는 그런 사이가 일찍부터 되어버렸다.

 

(103)

어두운 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불 켜진 딸의 방을 쳐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안에 정말로 따뜻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구나, 작은 한 송이 지혜의 꽃이. 세상의 비바람 속에서도 견뎌야 할 텐데. (어미가 일하며 힘든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인 탓인지 딸은 용돈을 달라고 떼를 써야 할 나이에도 용돈은커녕 학교에 내는 돈조차 안 받으려 들었다. 훗날 장학금 주며 데려가 공부 잘 시켜준 좋은 학교를 잘 마쳤다.)

만년필을 잡으면 글을 쓰지 않아도 손이 따듯하다. 만년필을 놓고 스탠드 불빛 앞에서 손을 펴본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펴면, 내 손안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듯하다.

 

(139)

남의 살을 세세히 알 수야 없다. 그러므로 남들은 대체로 편안하거나 그저 그만한 것 같고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 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171)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미미한 것이라면, 우리의 사랑이 그것을 살리고 키울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미한 나도, 무엇인가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무언가 큰 것을, 거리를 두거나 실없이 미워하는 대신 사랑한다면, 어쩌면 나도 그만큼 따라서 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무얼 얻어내겠다는 생각과 계산이 끼어들면, 그때는 사랑이 부서지고 만다. 세상 허섭스레기에 가 있는 눈길은 단호히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사랑아닌 사랑을 하는 동안 우리는 귀한 것, 가엾은 것, 우리 모두 나서서 바꾸어야 할 것, 자라나는 것, 푸르른 것은 확실하게 외면하고 있다.

 

(227)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고, 어딘가에서는 무얼 읽었고, 또 어딘가에서는 뭔가 간절한 생각을 했고, 그런 이유로 소중해진 곳들이 어느새 다 내 자리가 되어 있다. 푸코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서 자리 하나 만드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개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는데 나는 참 부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235)

아이를 나 혼자 기른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어차피 세상에서 살 것이기도 하지만 당장 있으나마나한 어미 대신, 주변 사람들이 내 아이를 한번이라도 아끼는 눈길로 보아주길 바랐다. 나도 이웃아이들에게 그렇게 했다. 늘 문이 열려 있다 보니 가끔씩은, 냉장고 안에는 이웃이 넣어두고 간 김치나 다른 반찬이 들어 있기도 했다. 헌 신발이나 옷가지가 현관문 안에 놓여 있기도 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내 아이들이 어디선가, 아프거나 슬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그 분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주셨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절절 매며 시간을 쪼개 쓴 어미가 아니라, 그 분들이 키워주신 것 같다.

 

(249-252)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현실에서는 일일이 다 만나낼 수 없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만나보는 일은 세상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의 갈피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은 아마도 함께 살아가면서 가능 필요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배우고 읽는 궁극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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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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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은 시를 읽곤 한단다. 즐겨 읽는 편은 아니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유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류시화 시인이라고 말할 것 같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류시화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참 좋단다. 시라는 것이 한 번 읽고 바로 와 닿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경우도 많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은 한번에 가슴에 딱 달라붙어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고 기쁘게 해주기도 한단다.

나이를 먹게 되면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단다.

아빠의 예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 말이 틀린 것 같단다. 시라는 것이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말들이 많은데, 류시화 시인이 어떤 사물을 두고 비유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단다. 평상시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였는데, 류시화 시인이 이야기하니까 둘 사이가 그런가 보네

삶을 노래하고, 죽음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노래하는 류시화 시인의 이번 시집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도 좋았단다.

 

1.

아빠가 책을 읽고 나면 좋은 구절들을 발췌하곤 하는데, 시집은 아빠가 마음에 들었던 시 전체를 발췌한단다. 시라는 것은 전체를 다 읽어야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시집에서 발췌한 몇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대신할게. 책의 첫 번째 실려 있는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시는 연탄 시로도 잘 알려진 안도현 님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오르는 듯 했어. 물고기와 새를 통해 온 생애를 걸어봤냐고 묻고 있단다.

==================

(13)

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이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은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

류시화 시인의 책에 사랑이 빠질 수 없지. 이 책의 제목을 뽑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는 사랑에 관한 시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단다.

==================

(16)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시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아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감수성과 창의성이 부럽구나.

==================

(92)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당신을 발견한 내 눈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내 귀를 사랑한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다가간 내 목숨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 곁에서 웃는 나의 아픔까지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를 숨 쉬는

나의 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지대가 꽃나무가 사랑하듯이

슬픔의 무게로 기쁨의 가벼움을 사랑하듯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

….

<물음표>라는 시는 계속 질문을 하는 하는 시란다. 시를 쓰려고 이것저것 스스로 물어본 글들을 쭉 놓아놓은 듯 한데, 그것으로 좋은 시 한 편이 된 것 같구나. AI 시대에서는 누가 얼마나 더 좋은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단다. 그런 시대에 발맞춰 쓰신 시는 아니겠지? 이 시에 나온 질문들은 ChatGPT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하네…^^

==================

(130-131)

물음표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명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내 눈썹을 그릴 때 신은 어디서 검은 색을 얻었을까?

바다의 결정체인 소금은 왜 파란색이 아닐까?

숯은 불을 어디에 감추고 있을까?

바람은 자신을 손짓하는 나뭇잎을 어떻게 찾아갈까?

돌이 흘리는 눈물은 왜 냉정하지 않고 고단해 보일까?

무는 세상의 무엇이 보고 싶어서 흰 목을 빼고 있을까?

지빠귀처럼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정하고 태어날까? 그 얼굴은 어디서 고를까?

아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동안 빗방울의 심장은 두려울까? 두근거릴까?

거리에서 혼잣말하는 여인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걸까?

속으로 우는 울음만큼 절창이 없다는 걸 갈대 피리는 언제 알았을까?

모든 전등은 왜 약간은 떨면서 켜져 있을까? 자신이 돌아갈 어둠에 맞서기 때문일까?

내가 그리워한 첫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금 간 사랑을 꿰매려면 얼마나 긴 인동초 꽃실 빌려야 할까?

왜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자신과 행복하지 않을까? 더 큰 형벌이 있을까?

억새는 왜 지나가는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까?

내일을 알려면 얼마나 많은 어제를 불러 모아야 할까?

수십 억 인구 중에 왜 둘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당신의 나이고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당신이기로 결정했을까?

누가 인간의 몸을 본떠 물음표를 만들었을까?

==================

아빠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시는 곧 공부라고 생각했단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늘 아빠를 괴롭혔으니 말이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책 읽을 시간도 적은데, 거기에 시집까지 읽어보라고 할 수는 없겠구나. 시집은 나중에 감수성 충분해지는 이십 대에 읽는 것으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물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책의 끝 문장: 아무리 연습해도 나는 작별의 말이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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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수년 전, 아이가 마음껏 놀게 하려고 일부러 맨 아래층에 얻은 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발을 구르거나 뛰어다니려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줄넘기 연습을 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지렁이랑 달팽이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

 

(42-43)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 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 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49)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할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여름밤 내 책상 옆의 작은 거울 속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설픈 수화를 연습하는 내 상반신이 비쳐 있었지만, 거기 어른을 나는 매 순간 알아보았습니다.

 

(62)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05)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138)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 끼칠 만큼 명확하게 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176)

그 순간, 불쑥 오래된 한 단어의 기억이 절반쯤 잘린 채 떠올라 그녀는 그것을 붙들려 한다.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로 시작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307)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뜻함과 차가움, 노동과 휴식, 병과 치유, 꿈과 현실, 애정과 오해, 기대와 실망, 잠깐 마주잡는 손길, 잠깐 마주치는 눈빛들…… 속에서 우리는 나아간다. 사실 식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 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08)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316)

지금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자신이 뚫다 만 종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옆얼굴이다. 그들이 내쉬는 더운 숨이 구멍들을 통과해 가장 단순한 언어가 된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간결한 부호 같은 언어들이 그 구멍들에서 새어나온다(들립니까, 나는 지금 온 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같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장 연한 부분, 또는 어떤 목소리의 이미지.

 

(331)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355)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이 되기 이전에 노트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나요?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데…… 항공기 조종사가 우울증을 앓다가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추락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살아 있던 사람들을 아주 많이 살해하며 죽었어요. 그런데 절반 죽은 또다른 사람이, 그 항공기 사건과는 정반대로, 삶으로 건너오면서 죽어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방향이죠. 하지만 어떤 한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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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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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지은이 매들린 밀러의 책을 이야기할게.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 모두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란다. <아킬레우스의 노래> <일리아드>, <키르케> <오디세이아>를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소설 속 조연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그런 소설이었어.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이었단다.오늘 이야기할 책도 위 소설들과 비슷한 성격이 책이란다.

<갈라테이아> 아빡가 갈라테이아가 누군인지 몰라서 검색을 해 보았단다. 피그말리온이 사랑한 조각상, 그래서 사람으로 변해 피그말리온의 아내가 된 그 조각상의 이름이 바로 갈라테이아라고 하는구나.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데도 그가 만든 조각상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구나. 피그말리온이 그렇게 사랑했던 갈라테이아….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렇게 끝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처 갈라테이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만약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조각상이었던 갈라테이아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더니, 어떤 남자가 눈 앞에서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안 입고 있었다갈라테이아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 주는가.. 지은이의 이런 발상은 아빠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

 

1.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사람으로 변한 지 11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을 해. 남편 피그말리온과 결혼을 하여 딸 파포스나 낳았어. 파포스는 이제 열 살이 되었어. 남편은 시간은 갈수록 갈라테이아에 집착을 하고 질투를 하고.. 결국 갈라테이아를 때리기도 했단다그런 갈라테이아는 남편을 안고 바다에 빠져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삶을 마감하였단다.

….

무슨 소설이 이러냐고? 이 소설은 엄청 짧은 단편 소설이란다. 그런데 출판사는 책 한 권으로 출간하는 모험을 했구나. 양장본으로 만들고, 책의 뒤편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옮긴이의 말> 까지 실었지만 다 합해서 72페이지구나. 짧지만 강렬하다는 등의 호평이 있었지만, 갈라테이아가 하고 싶었던 말은 더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이 소설은 갈라테이아가 태어난 지 11년 뒤에 시작하여 아주 짧은 시간을 이야기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그 동안의 심경 변화 등을 쭉 이야기해주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 쉽게 읽은 책 한 권을 늘려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마저…^^ 매들린 밀러의 다음 책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거기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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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41)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의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 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한 중 거름이 거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57)

, 나도 이번 사건으로 모든 걸 알게 된 건데, 우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로조건이라는 게 있어. 하루에 일은 여덟 시간만 한다. 야근을 시키면 야근 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야 한다. 공장 안의 작업환경은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거야. 그밖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 많은데, 그 법들을 다 합해놓은 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그런데 사장들은 그 법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걸 법이 정한 대로 하게 하려고 우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게 하는 일을 시작했어. 그걸 노동운동이라고 해.”

 

(60)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 배운 것이 많은가…… 아니지, 스물두 살에 벌써 재단사 노릇을 했다면 아무리 짧아도 5년은 봉제공장밥을 먹었을 것 아닌가. 그럼 아무리 많이 배웠어야 중학교밖에 더 나왔겠는가. 그렇다면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스텐공장은 일하는 모든 조건이 봉제공장에 비해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막소주나 마시며 불평을 했을 뿐이지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공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사람이 남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다니…… 그게 똑똑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야박하고 약아빠진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니……

 

(95)

월출산은 바위산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빼어난 산이었다. 월출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은 두 가지 사실이 합해져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방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줄기라고는 없이 질펀한 들녘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거대한 바위산이 솟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바위산이 되 무작정 커서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산들은 겹겹이 큰 산을 이루어내며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솟아 더욱 우람해 보이고, 그러면서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월출산은 바위산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겹겹의 봉우리에 안개가 감겨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렵게 신령스럽기 그지없었고, 눈이 하얗게 내려 있으면 신선의 세상이 저기가 아닌가 싶게 신비스러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155-156)

바로 그거요. 모든 신문들도 은근히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고, 세상 인심도 그리 돌아가고 있듯이 이번 선거는 분명 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유권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해요.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하는 얘긴데, 유권자 설득작전에서 그냥 막연하게 우리가 같은 경상도니까 경상도를 찍자 해서는 효과가 좋지 않아요. 특히 지식수준이 낮고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건 된장이고 간장이고 고추장이다 하는 식으로 꼭꼭 찍어서 쉽게 말해야 효과가 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270)

으응, 그거야 뭐……” 김명숙은 그까짓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끝을 흐리고는, “이런 말 들으면 우리 원장님 또 싫은 기색할지 모르지만 말야, 디자이너로 말하자면 노력으로나 능력으로나 앙드레 김을 당할 사람이 없어. 네가 말을 꺼냈으니까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우리한테는 신동파나 박신자보다는 앙드레 김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받아야 될 인물이야. 너도 소문 들어서 좀 알고 있겠지만 앙드레 김은 벌써 15년 전에 순전히 독학으로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기본 스케치를 1천 번, 1만 번, 수백만 번을 해서 2년이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디자인 스케치를 해낼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실력이 얼마나 짱짱하면 벌써 6~7년 전에 프랑스 정부에서 초청해 세계 디자인의 최고 도시인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게 했겠니. 너 국민학교 때 명필 한석봉 얘기 들었지? 등잔불 없는 밤중에 천자문을 획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썼다는 거. 난 그게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앙드레 김이 살아 있는 한석봉이야. ……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꿈이야.”

 

(302-303)

그 길을 따라 사나이의 젊은 꿈도 접고, 야속한 운명에 절망하며 절룩절룩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의 외롭고 슬픈 모습이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영상이 아니라 그 시를 외웠던 중학생 때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변함이 없는데 왜 시는 떠오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간간하게 말하면 세월 따라 잊혀진 것이었다. 그런데 최주한은 야릇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마치 누구한테 빼앗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배면에는, 그럼 나는 서울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빼앗아간 것은 서울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비해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중학생인 어린 시절 한때 외웠던 시를 잊혀지게 할만도 했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상실감이 드는 것은 자신이 처한 궁색한 처지 때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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