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종이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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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조정래 작가님의 신간을 읽었단다. 자필 싸인으로 된 책을 선물 받았단다. 나이는 숫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조정래 작가님.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가는 시대의 산소라는 것을 증명하듯 이번 작품에서도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소설에 담아주셨단다. <정글만리>, <풀꽃도 꽃이다>, <천년의 질문>에 이어 <황금종이>도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어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갖게 하셨어.

제목 황금종이에서 연상되듯이 이번 소설은 에 관한 이야기란다.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 사고 중에 많은 이야기들이 과 관련된 이야기란다. 돈 때문에 가족 간에도 살인이 벌어지는 세상,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세상, 돈이 권력이 되고, 돈이 계급이 되는 세상.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 세상에서 살고 있단다. 돈이 줄어들면 두려움이 생기고,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심적으로 안심이 되는 건 아빠도 마찬가지란다. 많은 욕심은 부리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빠도 돈에서 자유롭지는 않구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신 것 같은데, 이 책을 통해서 돈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단다.

 

1.

이태하. 인권 변호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야. 운동권 출신으로 졸업 전에 사법고시를 합격한 수재 중에 수재였지. 검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재벌 회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재벌 회사의 비리 의혹을 재기했다가 검찰 내에서 왕따를 당하고, 지방 발령을 받게 되었어. 그 이후 검사옷을 벗고 인권변호사로 일하게 되었단다. 비록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변호사로서 보람된 일을 하는 것에 만족했단다. 그는 인권변호사이긴 하지만, 친구들의 사건 의뢰를 하면 공정한 입장에서 사건을 맡아주기도 했어.

어느날 대기업 다니는 친구 박현규가 찾아와서 법률 상담을 받았어. 박현규의 이종사촌 여동생이 자신의 엄마, 그러니까 박현규의 이모를 상대로 상속관련 민사 소송을 걸었다는 거야. 이모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태하에게 사건 의뢰를 하려고 했던 거야. 박현규는 이태하의 조언을 받아서, 사촌 동생들을 협박 반, 설득 반 이야기를 했고, 사촌 동생들은 다행히 소송취하하기로 했단다. 또 한 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상속 관련해서 물어보려고 오기도 했단다. 이렇듯 친구들이 그에게 법률 상담을 하려고 오는 경우는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것들이었어.

단골집 행복 식당 사장님의 안타까운 사건도 돈과 관련된 것이었단다. 고깃집을 운영하는 강남길이라는 사람은 건물주인이 바뀌고 월세를 4배 인상 소식을 들었어.. 2배도 엄청나게 많은 것인데, 4배는 강남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 건물 주인을 찾아가 몇 번을 읍소하고 부탁했지만, 건물주인은 요지부동이었고, 월세를 내지 못하면 가게를 빼달라고 했어. 이제서야 자리를 잡고 장사도 잘 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강남길은 건물 주인과 이야기하다가 우발적으로 화를 내자, 건물 주인은 도망을 갔고, 강남길은 쫓아가 어깨를 쇠망치로 때렸단다. 이 사건으로 강남길은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고, 강남길의 아내 오수자가 이태하를 찾아왔단다. 이태하는 강남길이 술을 먹고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벌은 면했지만 여전히 경찰서에 구금을 당했어. 이태하는 강남길의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재판을 준비하기로 했단다. 일반 국민들이 아무래도 을의 입장이었던 강남길을 더 이해해 줄 것이니 말이야.

김민제는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이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40년만에 사생아가 나타나서 자신도 아버지의 친자로 상속권을 주장했어. 김민제는 황당했지. 그 사람의 말이 맞다면 상속법 상 절반을 그에게 주어야 했어. 사실 김민제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아버지가 오래 전 바람을 핀 여자 사이의 각서를 발견했거든. 아버지는 오래 전에 그 여자와 사생아에게 일부 재산을 주었고, 그 이후 어떤 재산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각서였어. 김민제는 그 각서가 유효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생아가 이야기하기를 그 각서는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의 사이의 각서이지, 자신과는 관련 없는 것이라며 상속에 관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단다. 난감해진 김민제는 동창 박현규를 통해 이태하 변호사에게 자문을 부탁했단다. 이태하는 현재 상속법으로 5050이 맞기 때문에 쉽지 않은 소송이라고 하고, 억울하겠지만 어느 정도 돈을 주고 화해하는 방안을 가이드 해주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식당 주인의 아내 오수자, 이 분은 마음이 여리고 착하신 분 같구나. 식당 일 때문에 자신도 어려운 처지인데, 집안 친척의 일들도 살펴야 했어. 큰 고모가 계신데, 큰 고모가 젊은 시절, 남편의 폭력을 참다 못해 도망쳐 나와 지금까지 혼자 지내셨어. 안 해본 일 없이 온갖 일을 다 하셨는데, 얼마 전에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셨어. 오수자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큰 고모 병원에 가서 좀 보살펴주라고 해서, 오수자는 큰 고모 병문안을 갔단다.

그런데, 그곳에 낯선 이가 있었어. 아들 김승기가 어떻게 알고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거야. 큰 고모가 많지는 않지만 평생 모은 돈과 아파트를 노리고 접근한 거지. 김승기는 엄마에게 계좌번호 비밀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큰 고모는 아들을 믿지 못하고 알려주지 않았어. 하지만 큰 고모는 며칠 못 가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장례식상에는 김승기 말고, 큰 고모의 딸도 몇 십 년 만에 나타나서, 남동생과 말다툼을 했단다. 이유는 상속 때문이었지. 큰 고모는 죽을 때까지 돈을 쥐고 있었고, 자식들은 많지 않은 돈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장례식장에서 싸우고돈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 같구나. 아들 김승기는 누나와 엄마의 아파트를 팔아서 반씩 나눠가졌어. 그런데 누나가 모르고 있던 엄마의 통장에 있던 돈은 혼자 몰래 꿀꺽했지. 그 돈이 14천만으로 적지 않은 돈이었어. 공돈이 생긴 김승기는 계속 로또만 샀단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말이야. 계속 사다 보면 1등이 될 것만 같았고, 1등만 되면 더 큰돈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 아내와 딸이 말려도 김승기는 멈추지 않았단다.

 

2.

소설의 첫 부분에 이태하 변호사의 친구로 나온 박현규. 그에게는 딸 서린이 있었어.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친구의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나서 헤어졌어. 그리고 얼마 후 수천 억 프랜차이즈 가게를 가지고 있는 사업가의 아들과 사귀게 되었어. 서린의 엄마 신혜주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했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서린의 전 남자친구는 서린이 자신을 멀리한 이유를 모르고, 서린을 계속 쫓아다녔어. 서린의 입장에서는 스토킹이었지. 서린의 엄마 신혜주는 남편 박현규에게 서린의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을 해결해 보라고 했어. 박현규는 딸의 전 남자친구를 만나 따끔하게 충고를 했고, 전 남자친구는 알겠다면서 박현규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듯 했어. 하지만 서린을 잊지 못하는 전 남자친구는 서린을 계속 쫓아다녔고, 서린이 새로운 남자친구, 그것도 갑부집 아들인 것을 알고는 술 먹고 서린을 찾아와 단판을 지으려고 했어. 술 기운에 서린과 말다툼을 하던 전 남자친구는 서린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은 자살을 했단다. 이 사건으로 박현규는 충격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대.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이태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돈이 또 사고를 쳤구나.

편의점 주인을 하는 송동식. 큰 돈은 벌지 못하지만 착실하게 살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아주 작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단다. 어떤 학생들이 몇 푼 더 얹어서 돈을 줄 테니 담배를 팔아달라는 것이었단다. 그 학생들은 CCTV가 없는 곳에서 거래를 하자는 제안도 했어.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송동식은 몇 번 거래를 하다 보니 수입이 괜찮았어. 하지만 얼마 못 가 경찰에 걸려서 경찰서 신세를 졌단다. 송동식의 아내는 행복식당 오수자에게 부탁해서 이태하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어. 하지만 이태하 변호사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단다. 미성년자에 담배를 파는 것은 국가에서 제정한 국가법이기 때문에 구제가 쉽지 않다고 했단다.

….

이상 1권의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았단다. 소설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모두 뉴스 상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소식이라서 더 무서웠던 것 같구나. 소설을 읽으면서 돈에 대한 경각심을 생겼고, 사람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그럼 조만간 2권도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딸이 어머니에게 소송을 걸었다?”

책의 끝 문장: 김수희가 몸을 일으켰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백만장자, 억만장자를 모두 부러워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의식중에 지배당하고 있다.’
언젠가 읽은 어느 심리학자의 글이었다.
- P81

그런데 교단 끝에서 휙 돌아선 교수가 칠판 빈 데다 쓰기 시작했어. ‘돈은 인간에게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 이렇게 쓴 교수가 돌아서더니 ‘오늘 강의는 끝!’ 하고는 강의실을 나갔어. 다른 것들 것 달리 아무 부연 설명도 없이. 그때 모든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칠판의 그 짧은 문장에 박혀 있었어. 그 한 줄의 문장은 학생의 질문만큼 도발적이고 신선했거든. 그 처음 듣는 말에 학생들은 묶인 채 침묵은 꽤 오래 계속되었어. 학생들은 돈과 실존과 부조리와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파악해 보려고 헤매고 더듬거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다가 누군가가 침묵을 깼어. ‘그거 그럴듯하네." 또 누군가가 ‘어렵다, 어려워"하며 일어섰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고, 골치 아프다. 실존이든 부조리든’하며 자리를 떴어.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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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짚은 단순한 볏대만이 아니었다. 그건 농경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다양한 쓰임새를 갖는 소중한 재료라는 것을 넘어서서 그 어떤 것보다 청결하고 신성한 뜻을 지닌 대상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짚은 멍석 망태기 삼태기 새끼맷방석 섬 등속의 농사기구며 생활용품을 만들고, 지붕에 이엉으로 얹고, 신을 엮어 신으며, 땔감으로 썼다. 그런 생활의 긴요한 쓰임새 외에도 짚은 길운을 지키고 액을 물리치며, 저승길의 혼백을 받드는 제구(祭具)이면서, 하늘에 이승의 염원을 실어 비는 매개물로 쓰였다. 보름날을 비롯하여 온갖 액땜을 하는 허수아비가 짚으로 엮어졌고, 3년상이 끝날 때까지 사립 밖에 걸리는 사잣밥 망태기가 짚으로 짜여졌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사립 밖에 붓는 물밥의 깔개가 짚이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모아 만든 달집의 짚단에는 또 한해 농사가 가뭄도 홍수도 없이 풍년 들게 해달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지푸라기 하나하나에 서려 있었다.


(51)

토지조사사업은 크게 네 가지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고 있었다. 첫째, 조선의 전국토를 대상으로 총독부 소유의 땅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모든 종류의 토지 소유자들을 명백히 하여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조선땅 전체를 샅샅이 측량하여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넷째, 양반계층의 재산을 보호해 줌으로써 식민성 지주로 예속시키는 동시에 친일세력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자는 것이었다.


(94-95)

그게 그럴 만한 까닭이 있소. 산이 너무 많은 함경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농토를 찾아 청나라의 봉금령을 어기면서 두만강을 건너다닌 것이 벌써 수십년 전부터였소. 밤에 두만강을 건너가 만주땅에 농사를 짓고 새벽이면 돌아오고는 하는 것이오. 그러다가 잡히면 월강죄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소. 허나 배곯는 사람들은 그 죄를 무서워하지 않았소. 사람들은 자꾸 강을 건너갔고, 청나라도 힘이 쇠해지면서 봉금령도 흐지부지되기 시작했소. 그러자 조선사람들은 만주땅으로 파고들어 들이 넓고 물길이 좋은 용정에다 붙박이로 터를 닦게 된 것이오. 실은 이 만주땅이 예전에는 다 우리 땅이었소. 백두산이 가운데 솟아 북쪽으로 산줄기들이 뻗어내린 땅이 만주고, 우리 선조들이 고구려라는 나라로 또 발해라는 나라로 이 만주땅을 다스렸던 것이오.”


(116)

그러나 도를 통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수하게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다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별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 느껴지면서 무상감에 빠진 마음은 다시 세속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상감은 순간이었고 세속으로 열린 마음은 무상의 진리를 잡아먹었다. 피눈물나고 쓰라리고 아픈 나날의 세상살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인생은 무상한 것이라고 가르치며 고개를 돌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생은 외적의 온갖 횡포 아래 죽어가고 피흘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중들이 목탁 치며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고 목청 높여 염불을 왼다고 하여 외적이 물러가고 중생들이 평안해질 리가 없었다. 그건 억지고 눈가림이었다. 태평세월 속에서 편안하게 한평생을 보낸 인생살이는 우주의 수억겁 세월에 견주어 무상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흉악한 총칼 앞에 목숨을 내놓은 채 날이면 날마다 짓밞히는 지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어찌 무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나날은 너무 긴 고통의 유상이요 괴로움의 유상이요 절망의 유상인 것이었다.


(211)

총독부에서는 <역둔토 특별처분령>이라는 것을 공포했던 것이다.

그것은 총독부가 무력을 앞세워 빼앗아 국유지로 편입시켜 버린 조선 사람들의 역토나 둔토를 일본이주민들에게 대여의 우선권을 부여해 주는 특혜법령이었다. 그건 이민정책을 활성화시켜 이민을 많이 오게 하는 조건 마련인 동시에 조선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작이나마 얻으려고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지배술책이었다.


(262)

그러나 공허는 잠시 망설였다. 마음 한구석에 앞을 가로막는 손이 불쑥 나왔던 것이다. 그 손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손이었다. 그는 그 손을 바로 내칠 수가 없어서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둠 속 저 멀리서 겨울별들이 유난히 또렷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삼천대천 세계로 보자면 사람의 한평생은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하나의 물방울이요 한 덩이 뜬구름이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인연을 맺지 마라, 인연은 괴로운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롭고, 원수는 만나서 괴로우니라. 그저 지당할 뿐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대로 하자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불심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있다. 그 마음에 따라 금덩이도 돌로 보이고 아무리 미색인 여자도 목석으로만 보이게 된다.


(313)

술이 취하면 누구나 아리랑을 불렀다. 불러도 목놓아 불렀다. 목놓아 부르다보니 가락은 제멋에 겨워 더 늘어지며 슬퍼지고 넌출져 휘감기며 처연해지고, 술에 젖은 가슴은 그 가락을 못 이겨 허물어지며 더 서러워지고 녹아내리며 한스러워져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가락에는 끝내 물기가 묻어나고는 했다. 그들은 통곡을 대신해 그 가락을 목놓아 부르고, 분을 삭이려고 목놓아 부르고, 외로움을 달래려고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334-335)

국민군단의 창설은 국민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박용만이 주도한 것이었다.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박용만은 2년 전에 하와이로 옮겨와 국민회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으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해 왔다. 국민군단의 창설은 바로 그 무장투쟁론의 첫 단계 실현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물두 살까지로 제한된 국민군단의 신병들은 130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와 자라난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군단이 갖춘 장비는 사관용 45구경 단총 39, 장도 10, 목제총 350, 나팔 12, 드럼 7, 미합중국 보병학교 교재 28종 등속이었다.

원래 미국통치령 내부에서는 외국인들의 군사훈련이라 군사활동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 군사령부에서는 국민군단의 창설을 묵인했다. 그건 국민회의 교섭능력만이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이 각 농장에서 발휘하고 있는 노동능력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에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이 발표한 이례적인 성명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어느 점에서도 일본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따라서 언제나 조선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조선인 교포단체와 교섭하여 결과를 해결지을 것이며 일본인의 간여를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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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왕자 - 갱상도 (Gyeongsang-do Dialect) 이팝 어린 왕자 시리즈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자, 최현애 역자 / 이팝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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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년 전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블로그인 알라딘서재에서 알게 된 책을 읽었단다.

애린 왕자.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분명 겉표지는 어린 왕자이고, 지은이도 생텍쥐페리라고 써 있는데, 번역본의 제목은 어린 왕자가 아니고 애린 왕자였어. 왜 그런가 궁금해서 책 소개를 봤더니, 이 책은 어린 왕자의 경상도 사투리 버전이라고 써 있다고 하더구나.

미리 보기를 통해 어떻게 번역되어 있나 봤더니, 억세고 사나이 냄새 잔뜩 나는 경상도 사투리로 적혀 있더구나. 눈으로 읽어도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는 듯 했어. 재미있겠다 싶어 주문했단다. 그런데 좀 알아 보니, 전라도 사투리 버전인 에린 왕자도 있다는 구나. ㅎㅎ 그리고 충청도 사투리 버전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고

<애린 왕자> <에린 왕자>를 같이 주문했어. 집에 왔을 때 앞에 몇 페이지만 보고, 큭큭거렸던 기억이 있구나. 얼마 전에 독서 앱 밀리의 서재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애린 왕자가 오디오 북으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책장 속에 잠자고 있는 <애린 왕자>를 꺼내 들고, ‘밀리의 서재의 오디오북과 함께 읽어보았단다. ‘밀리의 서재 <애린 왕자> 오디오북을 녹음하신 분이 경상도 네이티브인지 아빠는 잘 모르겠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듣기에 나쁘지 않았단다. 1배속보다는 1.5배속 정도로 해서 들어야 경상도 사투리의 제맛을 느낄 수 있었단다.

경상도 사투리로 읽고 들어도 어린 왕자의 순수함은 변하지 않는 것 같구나. 좀더 정감 어린 것 같더구나. 어린 왕자의 내용은 아빠가 재작년에 표준어 번역본 <어린 왕자>를 읽고 이야기해준 내용이 있으니 따로 하지는 않을게. 이 책을 기획하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밀리의 서재를 검색해 보니 <에린 왕자>의 오디오북도 있더구나. 그것도 기회가 될 때 들어봐야겠구나. 충청도 버전의 <어린 왕자>도 출간되었는지, 검색해 보니 충청도 버전은 소문만 있었고, 출간은 안 된 모양이더구나. <어린 왕자>뿐만 아니라 유명한 고전들을 사투리 버전으로 번역 출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잘 찾아보면 어울릴 만한 고전이 있지 않을까 싶구나.

오늘은 아주 간단히 소감만 이야기하고 마치련다.

이상.


PS,

책의 첫 문장: 나는 보아뱀이라 카능 기 정글에서 젤로 무서븐 기라꼬 생각했데이.

책의 끝 문장: 구란데 어느 으른도 이게 이마이 중요하다는 걸 이해하지는 몬 할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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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13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투리 버전, 괜찮은 아이디어같네요.ㅎㅎ

bookholic 2024-02-15 09:43   좋아요 0 | URL
네.. 사투리로 번역하면 어울리는 책 선정해서 시리즈로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4-02-14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오디오북 들어보고 싶어요!! 재밌겠어요^^

끝문장 웃깁니다. 구란데... 구라래... ㅋㅋㅋㅋㅋㅋㅋ

bookholic 2024-02-15 09:45   좋아요 1 | URL
직접 낭독하면서 녹음해 보셔도좋을 것 같아요~~~^^ 지인들한테 선물~~
 
















(43)

당시 피렌체를 지배했던 가문이자 역사상 가장 힘센 시민 가문 가운데 하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빛을 못 보던 작가들을 적극 후원해 르네상스 예술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이기도 합니다.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쏟은 거액의 출처가 바로 환어음을 활용한 은행업에서 나온 이윤이었어요. 메디치 가문이 유럽 경제의 큰손으로 성장하도록 기초를 놓은 인물은 조반니 데 메디치입니다. 국제무역을 하며 결제의 어려움을 절감한 조반니는 가장 먼저 유럽 전역에 지점망을 구축해 일종의 환전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상인들은 메디치 가문의 환어음만 가지고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됐죠. 덕분에 귀금속 화폐를 운반하는 비용과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201)

플랜테이션이란 서구 유럽인이 돈과 기술을, 노동자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규모 농장을 말합니다. 사탕수수와 면화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재배되는 대표 품목이죠.

거대한 규모보다 더 중요한 건 플랜테이션의 운영 방식이에요. 서구 유럽인이 돈과 기술을 제공했다고 했죠? 이들은 토지와 생산시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해줄 노예를 잔뜩 사들여 대규모로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설탕을 내다 팔아 처음 투자한 돈의 몇 배를 벌어들였죠. 이때 처음 토지와 생산시설을 사들이는 데 들어간 투자금이 바로 자본입니다.


(245-246)

당시 미국이 사회주의 진영을 이기기 위해 택한 전략 중 하나가 자본주의 진영에 속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일이었거든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성장을 경험한 국가라면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을 테고, 다른 국가들에도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과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죠.

해방 이후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된 우리나라에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원조도 받고, 미국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보호무역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일본과 유럽 등 다른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도 미국의 외교 전략에 발맞추어 한국의 보호무역을 용인해주었습니다.


(301)

유독 이해관계가 잘 맞는 국가들이 있다면 WTO가 일률적으로 정한 조건보다 더 장벽을 낮추는 게 좋겠죠. 예컨대 WT) 8% 관세를 적용하라고 할 때, 두 국가끼리 자체적으로 관세를 완전 철폐하는 등 특혜에 가까운 조건으로 시장을 열어둘 수 있어요. 이렇게 이해가 맞는 국가끼리만 특별한 조건으로 협력하는 경우를 지역주의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지역주의 협력체가 바로 유럽연합, 다시 말해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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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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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한국 근대사 산책 8권의 이야기를 할게. 8권의 부제는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란다. 만주사변은 1931년이고, 신사참배는 1930년대 중반부터 많이 강요했으므로, 8권의 다룬 시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까지라고 보면 돼.

그럼 바로 시작해 볼게. 일제의 강압과 폭력을 피해 많은 우리나라 동포들이 만주 지역에 가서 터를 잡았단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만주 지역의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간의 다툼이 있곤 했어.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지. 그런데, 일본이 이것을 사악하게 이용하려고 했어. 일본은 일상적이 이 사소한 마찰을 허구로 왜곡하여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어. 국내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고,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호외까지 내면서 대서특필했단다. 이 소식에 대해 신중하게 대응했던 동아일보와 다른 행보였어.

조선일보를 통해 전해진 이 소식은 국내에 있는 백성들을 열 받게 했어. 분풀이 하겠다면서 국내에 살고 있는 화교들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화교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어.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니, 혼란의 틈을 타서 일본인들이 죽인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이 소식은 다시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에서는 중국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단다. 완전히 일본의 음모에 말려든 거지. 일본은 중국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중국인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을 대거 투입하였고, 이 군대를 이용하여 그대로 만주를 점령하였단다. 이것이 바로 만주 사변이란다. 때는 1931 9 18일이었어.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조선일보의 이 소식을 접하는 자세였단다. 일본의 앞잡이 신문이 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문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했을 때, 좀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후 기사를 썼어야 했어.

근현대에 와서 신문은 이렇게 많은 영향력을 넘어 권력까지 갖게 된단다. 1930년대에도 그런 신문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한 이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당시 신문을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면 오늘날 신문에도 딱 맞는 글 같더구나. 많은 매체들이 생겨나서 옛날보다 신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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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17)

당시 신문이 누린 권력과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월간 <동광> 1931 12월호에 실린 <신문 비판 특집>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기사는 대화형식으로 신문에 대한 세평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의 신문계에 사장이면 판서 격은 되고 중역이면 참판 격은 된다는 말을 못 들었나? 그 밑에 국장도 있고 부장도 있으니까 벼슬 못한 조선 민간 유지에게는 이것이나마 훌륭한 벼슬자리인 줄을 모르는가? …… 연전에 모 신문에서 수재금을 모집하니까 푼푼이 들어온 것이 5만여 원이요, 또 요새 이충무공 성금모집도 2만 원을 돌파했으니, 이 돈 없는 조선에서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신문의 위력이 아니고는 못할 일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시골 가서 보면 석유 등잔 희미한 불빛 밑에서 동리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지가 해지도록 돌려가며 읽고, 신문에 난 말이면 만고의 진리로 듣는 형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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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대 들어서면서 독립운동은 한풀 꺾이게 되었단다. 일본 침략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많은 이들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그 열정을 이어가기 힘들었나 봐. 이때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김구 선생이 만든 임시정부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이란다. 1932 1, 이봉창 의사가 일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도쿄에서 일왕 암살 시도를 했단다. 폭탄이 안타깝게도 불발이라서 실패를 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어. 그리고 1932 4월에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전승기념 및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요인들을 죽인 사건이었단다.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1932 12 19일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하셨단다. 아직 100년도 채 안된 시절이었구나.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사회주의 노선의 국내 활동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의 탄압에 의해 더욱 힘들어졌단다. 국내 공산당을 이끌던 이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있었어. 이들은 경성 트로이카로도 불렀는데, 국내에서 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단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빠도 오래 전에 안재성 님의 <경성 트로이카>라는 책들 통해서 읽어본 적이 있구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재유는 여섯 번 체포 당하고 여섯 번을 탈출했대. 대단하시구나.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 감옥에 수감 중인 여운형은 가출옥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대. 당시 신문 시장은 동아일보가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금광으로 떼돈을 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동아일보의 인력을 빼오면서 조선일보가 성장하게 되었대. 그때 빼온 인력들 중에 밉상 이광수도 있었단다. 이광수는 조선일보 부사장을 비롯하여 다섯 가지 직책을 맡으면서 조선일보를 동아일보와 함께 양강체제를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는구나. 당시 신문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연재 소설을 싣는 것이었어. 그래서 1930년대는 신문 연재 소설의 전성기였다고 하는구나. 많은 작품들이 신문에 연재되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홍명희의 <임꺽정>이라고 하는구나. 이 책은 그 이후에 오랫동안 인기를 끈 역사소설이 되었지.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예술문학운동단체로 번성했던 카프도 일제의 탄압으로 몰락했다는구나. 카프 멤버 중 안막이라는 작가가 있어. 물론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야. 그런데 왜 이 사람을 이야기하냐면, 안막의 아내가 엄청 유명한 무용가인 최승희라는 사람이란다. 최승희라는 사람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일제 시대 유명한 무용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거든. 이 책에서 잠깐 최승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분이 전세계로 활동하는 무용가였더구나.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네.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무용이라는 재능을 펼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변론하는 이들도 있었어. 해방 후에는 남편 따라 북한으로 갔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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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39)

167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졌던 최승희는 1937년부터 5년간 세계 공연을 나섰으며, 이때에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성기 당시 최승희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 예술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 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소설가 존 스타인벡, 루이스 레에나, 존 그로프,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 소설가 로맹 롤랑, 미셀 지몽, 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녀와 친교를 맺었다. 파리 공연 때 파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았는데,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나중에 안씨 집안(시댁)과 최씨 집안(친정) 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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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학 단체로 구인회가 있었는데 이효석, 이무영,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도 이 단체의 멤버였대. 이상과 김유정이 비슷한 시기에 폐결핵을 사망했다고 하네. 창단 멤버는 아니지만 나중에 박태원이라는 분도 구인회 멤버가 되는데, 박태원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이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읽어봤으면 하네. 몇 년 전에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상을 수상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로 박태원 작가가 소개된 적도 있어.


2.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엄청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시작인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도 교육열이 엄청 높았대. 보통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나서 1 1교제라 하여 한 개 면에 한 개 보통학교를 세웠대. 보통학교를 6년제로 바꾼 것도 이 시기였다고 하고과학이나 우생계몽운동도 일었는데, 지금은 우생학이 잘못된 학문이라서 폐기처분 당했지만, 당시에는 많이 유행했나 보구나. 우리나라에도 1933년 조선우생협회가 생겼대. 우생학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빠가 작년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세계대공황과 히틀러가 우생학을 악용하면서 우생학은 쇠퇴했다고 하는구나.

1930년대에 조선을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조선학이 등장했다는구나.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책들을 쓰셨어. 신채호도 합류하여 <조선상고사> 등 많은 역사책을 쓰셨단다. <조선상고사>는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쓰셨다고 하는구나.

당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이 유행했단다. 브나로드 운동은 아빠가 학창 시절에도 시험문제에 자주 출제되었던 기억이 있구나. 브나로드라는 말은 러시아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래. 이 운동의 취지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문자보급운동을 하였고, 이광수의 <>, 이기영의 <고향>, 심훈의 <상록수> 등이 출간되었어. 사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책은 브나로드가 끝난 1935년에 출간하긴 했지만, 농촌 계몽 소설로 브나로드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어. 이런 좋은 운동을 변절자 이광수가 주도한 것을 보면,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어떤 평론가는 이광수의 <>은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이 담겨 있다고 평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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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브나로드운동을 주도한 것은 편집국장 이광수였으며, 그 운동의 시범작으로 쓴 것이 <>이다. 지수걸은 <>에 대해 이광수가 <>에서 표방한 하면 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아는 것이 힘’ ‘티끌 모아 태산등의 헛구호는 제국주의 지배모순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제가 선전한 자력갱생운동 구호와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이러한 구호는 안 해도 이미 되어 있는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될 사람들에게 안주 삼아 내뱉는 비아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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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이 발표한 <상록수>는 동아일보 공모전에 당선되었는데, 상금으로 야학당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야학당은 해방 후에 이름을 상록초등학교(충남 당진에 있는 학교)로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우리나라 선수로써 올림픽에서 가장 먼저 금메달을 딴 사람은 손기정이라는 분이란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참가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1등은 손기정, 3등은 남승룡이 차지하면서 시상대에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두 명이나 있었어. 심훈은 당시의 감격을 글로 쓰셨는데, 지금 읽어봐도 감격이 전해지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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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시인 심훈은 8 10일 새벽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신문 호외를 받아들고 그 뒷장에 그대들(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심장 속에 솟음치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는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갈겨썼다. 감격에 몸을 떤 심훈은 그 즉흥시를 들고 <조선중앙일보>의 편집실을 찾아가 한바탕 읽어 들려주고는 사라졌는데, 그 이튿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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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동아일보 등 일부 신문에서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단다. 일본은 크게 격분했지. 이후 동아일보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되는데, 탄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 어용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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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조선일보>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일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1937 1 1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 같은 지면에 총독의 새해 기념사와 휘호를 실었다. 이후 해마다 1 1일자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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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37 7월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켰어. 승리한 일본은 중국 난징을 공격하여 민간인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난징대학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단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독립운동의 침체기는 이어졌단다. 독립투쟁에 있어서 분열과 연합이 이어졌는데, 우파는 김구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단다. 김원봉은 김구의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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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김원봉은 1937 12월 초에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하지 않은 중간파, 좌파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한상도는 이로써 1930년대 후반기, 중국 관내 지역 한인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구의 우파그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던 김원봉 중심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되어갔다.”고 했다. 1938년엔 장제스가 직접 나서 한인세력의 단결과 재편성을 촉구하게 된다. 끝없는 분열! 당시 독립군세력이 처해 있던 최악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긴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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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이끌면서, 반대로 김구의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조선의용대 합류를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김구가 거절을 했다고 하는구나.

1937년 연해주에서도 아픈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단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고려인들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어. 그 먼 길을 좁은 기차 칸에서 빽빽이 이동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은 반역죄의 명목으로 2000여 명의 고려인이 총살 당했다고 하는구나. 나라 잃음 설움은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우리 백성들의 희생으로 돌아왔단다. 왜 소련은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지,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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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1934년 사할인에서 출생해 <고려일보>의 사장을 지낸 조영환은 러시아는 한인 이주민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해주 일대의 미개간지를 개척한 후에는 이 개간지에 러시아인을 이주시킨 다음 한인들을 다시 오지인 미개간지대로 추방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5년 이후 연해주에 상주하는 한민족 수가 근 30만 명이었는데 그 후에도 인구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조국이 인접한 이 지대가 장래에는 한민족의 자치지역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 체제는 1932년부터 한민족 중 인텔리, 기술자, 농업전문가, 당 관리요원, 군무자 등 민족의 두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일제 스파이라는 것이다. 한평생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반일투쟁에 몸바쳐온 연해주 한민족들에게 역사의 철천지원수인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는 만인의 단죄를 받는 야수적인 행위였다. 그 때문에 1932~1937년까지만해도 한민족의 핵심 지식인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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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도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로 이민 가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1930년대도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만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한편 1930년대 국내에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갑부가 되려는 이들이 많았어. 그로 인해  금광과 부동산 열풍이 일었고, 주식 투기꾼들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여러 큰 기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경성방직이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하는구나. 경성방직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졌는데,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이 기업을 이끌었는데, 이들 또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단다. 친일이 아니고 자본주의 흐름을 탔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신 해하는 이도 있다는구나.


4.

일본은 193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황국식민화 운동을 하였고, 그 일환으로 한글 교육을 중단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단다. 1938 6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만들어서 언론사가 주도하는 국민총동원도 했어. 이것의 목적은 내선일체를 강화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일본군에 지원하도록 언론사들이 앞장서 독려했단다. 지원병에 대한 대우로 좋게 해주다보니 지원병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먹기 살기 위한 생계형 지원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일제는 역사에 있어도 식민사관을 주입하려고 했어. 단군조선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태워버렸단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적게 되었나 보구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단다. 이 조직에 최남선도 참여하여 일선동조를 주장하는 만행을 저질렀어.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서술한 <조선사> 35권을 펴내기도 했어. <조선사>는 박은식이 1915년에 쓴 <한국통사>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자 식민사관으로 기획하여 만든 책이라고 하는구나. 이젠 완전히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이려고 한 거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조선사> 제작에 참여한 대표적인 식민사관 사학자 이병도라는 사람이 있단다. 이 사람은 아빠도 알만큼 유명한 식민사관 역사가란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후에도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 한국사를 주도했다는 거야. 그래서 오랫동안 한국사는 식민사관 역사를 배워 온 것이라고 예전에도 들었어. 이런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되니, 오늘날 정치판에도 아직도 친일파들이 많은 것 같구나. 된장.

1937 6월 수양동우회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란다. 무려 181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는데, 4 5개월 재판 끝에 다행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대. 그런데 그동안 감옥에 있으면 대부분 전향을 했고, 모진 고문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어. 그 중에 도산 안창도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감옥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투옥 중에 병을 얻어 병 보석이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1938 3)

의아한 것은 안창호의 제자였던 이광수는 안창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일본에 자신이 전향할 테니 동우회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무죄를 받게 해달라고 했다는구나. 이것은 이광수가 자신이 친일 하게 된 변명으로 많이 이야기를 한대. 자신의 말대로 친일이 동우회 사건의 무죄를 받기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면, 그 이후 그런 행동을 하면 안되지. 그는 이 사건 이후 주요한 등과 함께 철저하고 악랄한 친일파가 되었단다.

신사 참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지었다고 하는구나. 1943년에는 무려 854개를 지었대. 신사 참배를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이나,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신사참배를 허용했다고 하는구나. 종교도 결국 강자의 편이구나. 개신교도들 중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2000여 명이 투옥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되고, 50여 명이 순교했다는 아픈 역사가 있구나.

….

여기까지 8권의 이야기란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구나. 글이 엄청 길어졌네. 그 만큼 아픈 역사가 많던 시절이라서 그랬나 보구나. 이제 두 권 남았구나. 아빠가 부지런을 좀 떨어서 얼른 이야기해줄게. 말뿐일 수도 있지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미국에서 1920년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도 할 만큼 번영과 즐거움이 솟구친 시대였다.

책의 끝 문장: 1940년대 들어 그 전쟁기계 국가의 광란은 극을 치닫게 되며, 그 와중에서 조선인의 신음 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간다.


1929년의 대공황은 인류 문명사에도 한 가지 큰 변화를 몰고왔으니, 그건 바로 소비(consumption)라는 개념의 재탄생이었다. "소비"는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단어로 ‘consume’이라는 동사의 본래 뜻은 파괴하고, 약탈하고, 정복하고, 소진시킨다는 의미였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consumption)’라는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대중광고와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비’라는 단어는 ‘선택’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 P11

"반민생단투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광으로 전개되어 심지어 4살짜리 어린애까지도 죽였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 적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문, 타살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 자기보호 혹은 지나친 불안감이나 과시욕에서 나온 적극성의 과잉표현으로 중국인들 앞에서 조선인을 믿을 수 없음을 고백하며 조직에 자신의 청백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심리가 민생단 적발과 비판투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혁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조그만 일도 큰 문제로 고발하고 또 거짓진술을 해댄 것이 반민생단투쟁을 확대, 지속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인정된다." - P74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는 우생학의 기본 사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유태계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금융 엘리트들의 실직사태가 벌어지고, 중산계층 전문가와 학자들도 이들과 나란히 실업자 대열에 들어서게 되자,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대공황은 수백만 미국인들을 평등하게 하여, 북유럽계 인종이든 남유럽계 인종이든,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들이건 유태인이건 모두 똑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 P161

"첫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사회진화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이념으로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와 독립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저항적 민족주의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목표를 심화하는 발전적 계기로서 수용되었다. 둘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그의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채호에게 있어서 무정부주의가 민족주의의 방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의 발전된(혹은 민족주의가 지양되는( 단계로서 간주함이 타당하다. 셋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좌우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종합하여 지양하는 제3의 가능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P181

김원봉은 1937년 12월 초에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하지 않은 중간파, 좌파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한상도는 "이로써 1930년대 후반기, 중국 관내 지역 한인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구의 우파그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던 김원봉 중심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되어갔다."고 했다. 1938년엔 장제스가 직접 나서 한인세력의 단결과 재편성을 촉구하게 된다. 끝없는 분열! 당시 독립군세력이 처해 있던 최악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긴 어렵겠다.
- P249

<한국통사>는 대원군시대부터 한일합방까지 50여년의 뼈아픈 망국사로, 국가는 비록 망하였지만 국혼(국가의 정신적인 힘)인 국교, 국가 등을 보존하고 교육과 독립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국백인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어 박은식은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쓴 독립운동사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고무되어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선 민중의 힘과 민의의 결집이 독립실현의 중요수단임을 강조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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